〈 52화 〉052. 세대의 차이(1)
“이걸로 세 건째입니다.”
“크흠.”
“도대체 아르티아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정체불명의 괴한의 습격을 받는 귀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단서조차 잡지 못했나요?”
“그렇습니다.”
“더 이상 피해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이건 우리 왕국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귀족의 말에 회의장에 출석한 모든 귀족들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침음을 흘렸다.
수도 페르닌의 중심에 있는 왕성의 안, 회의장에 이렇게 다수의 귀족들이 출석하게 된 계기에는 최근 귀족들만을 노리는 습격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아르티아와 병사들은 뭘 하고 있길래, 범인의 윤곽조차 잡아내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습격사건의 수사를 맡고 있던 아르티아의 기사단장, 리오드 올리비온은 침묵한 채, 귀족의 질책을 달게 받고 있었다.
귀족의 위계는 한 단계 낮은 귀족의 입장에서는 현재 수사에 진척이 없는 상황을 구실로 삼아 리오드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헐뜯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르티아의 위용을 등에 없고 왕국내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청렴결백과도 같은 이미지를 가진 리오드가 아니꼬웠던 귀족들은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리오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만.”
리오드를 질책하며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린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르티아 단장. 현재 조사 결과로 나온 정보들을 말씀하세요.”
회의실의 중앙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의 끝에 놓여진 옥좌에앉아 있는 여성, 디아네 페르니아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리오드를 응시하며 명령했다.
디아네가 리오드에게 발언을 허락하자, 리오드가 싸늘한 눈빛에 담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아르티아 기사단장, 리오드 올리비온이 현재까지의 수사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2주 간 습격을 당한 피해자들을 진찰했던 의사들의 소견으로는 마치 생기(生氣)라도 빨렸는지 홀쭉해진 몸 상태로 앙상한 뼈만 남을 정도로 수척해진 상태라고 하나 같이 증상들이 일치했던 것으로 보아, 동일범, 또는 같은 방식을 취하는 다수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의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범인에 대한 단서는 나왔나요?”
“노려진 귀족들은 모두 셋으로 나이, 파벌, 작위, 직업 등 ‘남자’라는 성별의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피해자들 사이의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 피해자 모두 호위도 없이 혼자서 한밤중에 가도를 걷고 있었으며, 동행인의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고, 목격자에 대한 이야기 또한 전무한 상황이죠. 계속해서 탐문을 실시하고 있지만, 유용한 정보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고 설마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죠?”
“피해자들의 몸을 조사해본 결과, 그 어떠한 외상도 발견할 수 없었고 금품도 갈취당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말했던 소견되어 수척해진 몸만이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죠.”
“그래서요?”
“현재 피해자들의 주변 인물 관계와 더불어 원한 관계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며, 다양한 가능성을 세워두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인가요?”
“‘범인이 인간이 아닐 가능성’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범인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저처럼 20년 전, 아르케나 대전쟁에 참전하셨던 분들이시라면, 피해자들의 증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 존재들이 있을 겁니다.”
“설마….”
떠올리기도 싫었던 끔찍한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하나의 가능성.
대전쟁 당시, 메이거스 소속의 마법사였던 현 아이테르 학교장, 올리버 바오트만은 인상을 찡그리며 리오드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리오드가 제시한 그 가능성을 입에 담은 것은 굳은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현 왕국의 군무장관인 아브로스 아르미타스 공작이었다.
“악마족, 서큐버스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리오드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큐버스 또는 몽마(夢魔)라고 불리 우는 악마는 남자를 유혹하여 몸속의 정기를 갈취하고자신의 생명력과 힘으로 만들어 스스로의 능력을 강화하는 종족이다.
정기를 갈취하는 수단으로써, 주로 인간에게 환각을 보여주고 꿈을 꾸게 만드는 ‘최면술’에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는 악마이기도 하며, 서큐버스에게 정기를 빨린 남자는 신체가 급격하게 쇠약해지고, 체내의 남아있는 모든 마나를 빨리기 때문에, 몸이 회복되기 전까지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르케나 대전쟁 당시, 악마족을 신봉하고 그들을 아르케나 대륙에 소환하려 했던 것은 미르바빌라 제국과 제국의 황제였다.
하지만 황제를 부추기고, 악마 소환 의식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으며, 뒤에서 제국을 주무르며 조종했던 것은 당시 대륙에 숨어 지내며 존재했던 ‘하급 악마’들이었다.
“서큐버스라…. 정말로 이 사건의 범인이 서큐버스라면, 상당히 귀찮아지겠군.”
전쟁 당시에 몽마 하나가 아군 진영의 막사에 잠입하여 병사들의 꿈을 조작해 많은 정기를 빨아감과 동시에, 전투불능상태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지 아브로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리오드가 은현을 비롯해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팀으로 이곳저곳에 신출귀몰하게 등장하여 적군에게 혼란을 주는 특수부대 형식의 팀을 구성하여 전장에서 활약하는 ‘영웅’이었다면.
아브로스는 왕국의 깃발을 앞세워 수만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군과 정면에서 맞서 싸웠던 ‘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아군을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서큐버스의 능력은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능력이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악마족들은 모두 그때의 대전쟁에서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시 태어날 뿐이지. 아니면 대전쟁에서 살아남았다거나.”
악마들은 죽일 수 있어도, ‘멸(滅)’할 수는 없다.
- 악마들은 말이지. 모조리 죽인다고 해서 멸종되는 존재들이 아니야. 걔네들을 죽여도 새로운 악마들이 다시 태어나거든.
리오드는 과거 은현이 이야기해줬던 악마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며 20년 전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귀족에게 이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 그럴 수가….”
젊은 귀족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악마’라는 미지의 종족에 대해 알 수 없는두려움을 느낀 듯 했다.
“정말 서큐버스의 짓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본다면, 증상이나 정황이 들어맞는 것도 있군.”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것, 수척해진 몸과 거동을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
“범인이 악마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알고서 하는 발언이겠지?”
“물론입니다.”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묻는 아브로스의 질문에 리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왕국의 중심인 수도에 악마족이 잠입해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가능성만으로도 수도에 정착한 백성들은 불안함에 떨게 되고, 타국들이 악마족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이것을 빌미로 간섭을 해올 가능성도 있다.
“단지 가능성일 뿐입니다. 정황만으로 보면 들어맞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아마 저 말고도 떠올리신 분들이계실 테니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정말일 경우에 미리 대비해두는 것이 옳은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어째서 올리비온 후작이 판단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재 대리청정을 맡고 계신 왕비마마의 몫입니다!”
리오드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젊은 귀족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만약 악마의 악이라는 단어라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소문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수도 안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어요.”
처음 반박한 젊은 귀족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동조하는 상황까지.
“하….”
아브로스는 그 광경을 보더니 아무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지금 발생할 수도 있는 혼란을 막자고 더 큰 위험을 방치하자고 하는 것과도 같았다.
악마가 잠입했을 지도 모른다는 정보가나도는 것으로 백성들이 불안감에 빠지는 것은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단지 그것으로 인해혼란이 발생한다면 자신들에게 어떤 피해가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의 귀족들은 악마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고 있고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나라의 미래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던 아브로스와 리오드처럼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의 귀족들은 뭐라 의견을 내지 못하고 침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대비는 해야 하지만, 이 정보를 어떻게 다뤄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브로스는 흘끔 고개를 돌려 중앙의 옥좌에 위치한 디아네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디아네 여왕은 현재 쇠약해져 통치를 할 수 없는 국왕에게서 대리청정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라도 한다면, 그녀와 반대파벌에 속해있는 아브로스는 강력하게 그녀의 선택을 철회시키기 위해 간언을 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악마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다면.
“지금 나온 정보만으로는 아직 확신이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가능성만으로 악마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좀 더 확실한 단서를 찾도록 하세요.”
돌려 말하면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전면적으로 숨기려 하는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사흘 후에 다시 회의를 열도록 하죠. 그 이전에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더 좋겠네요. 혼자서 안 된다면 그 잘난 후작의친구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해보시는 게 어떤가요? 이건 백성에 대한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공적인 문제이니까. 도도한 그 마녀도 친구인 후작의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까요?”
무능력하니 친구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의 처리를 확실히 하라는 비아냥.
자신의 존엄을 무시함과 동시에 그의 동료를 모욕하는 여왕의 발언을 들었음에도 리오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여왕의 물음에 대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궁정회의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디아네 여왕의 선언을 끝으로 길었던 회의를 끝마쳤다.
“으아아…숨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
회의가 끝나고, 궁정을 나온 리오드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아르티아의 부단장, 카인 세자르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왕님이 단장님 노려보는 표정, 진짜 장난 아니시던데요?”
아직도 디아네 여왕의 표정을 떠올리면 몸이 떨리는 듯 양팔로 자신의 팔을 문지르며 카인이 리오드의 뒤를 따랐다.
그에게 말을 거는 태도는 도저히 한 기사단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책임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벼운 태도다.
하지만 단지 그런 태도 때문에 카인을 자신의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니었기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실제로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먼저 시비를 털 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친우분이신 마녀님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는 솜씨가 아주 장난 아니던데요?”
“…….”
“아니, 단장님 뭔가 여왕님한테 죄지은 거라도 있으세요? 다른 귀족님들한테는 안 그러시는데 단장님한테만 저러시는 이유가 대체 뭐에요?”
“죄는 무슨. 적반하장이지.”
“엥? 허억!”
리오드가 아닌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린 카인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고, 공작각하.”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아브로스에게 인사를 하자, 그 인사를 받고 고개를 끄덕인 아브로스는 곧장 리오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따님이신 엘레노아 공녀의 성인식 이후로 뵌 적이 없었으니 2년 만에 뵙습니다. 각하.”
“벌써 그리 되었나.”
작게 중얼거린 아브로스는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궁정회의인데. 술 한 잔하겠나?”
아브로스의 권유를 들은 리오드가 흘끔 카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그의 시선의 의미를 눈치 챈 카인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남아있는 정무는 없으십니다. 내일 아침에 기사들의 탐문 수사가 끝나는 대로 단장님께 보고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예. 그럼.”
기사로의 경례를 마치고 아브로스에게도 인사를 한 카인은 곧장 자리를 떴다.
“세자르 자작의 장남인가. 다른 귀족들의 반발도 있었을 텐데, 잘도 부단장의 자리에 앉혔군.”
아직27살로 나이도 젊다.
리오드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바로 혼인을 통해서 아이를 가졌다면 저만한 아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리오드와 아르티아의 명성을 아는 다른 귀족들이 발이라도 한 번 걸치게 하려고 갖은 수를 썼던 것을 감안한다면, 젊은 기사를 부단장이라는 중책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제가 뽑았고 제가 교육시킨 녀석입니다. 실력이나 인성은 확실하다고 자부하죠. 조금 가벼운 태도가 흠이긴 하지만 기사단 내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녀석입니다.”
실제로 저 가벼운 태도는 귀족으로서는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기사단 안에서 분위기메이커와도 같은 카인은 단원들의 인정을 받는 인기인이기도 했다.
“그보다 용건은, 역시 저보다는 저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같군요.”
“맞네.”
아브로스는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리오드의 질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