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044. 마녀의 스승
“으아아아! 끝났다아!”
에린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10분 뒤, 마력 운용 훈련 시작할 거야.”
“마, 마녀님.”
“일리아나.”
“일리아나님. 제발 조금만 더 휴식시간을…1시간, 아니 30분만 자게 해주세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안 돼.”
“네에….”
체력훈련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에 후련함을 담은 외침을 내뱉었지만,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는 일리아나의 말에 에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작스레 훈련을 봐주는 상대가 은현에서 일리아나로 바뀌었기에 처음에는 크게 긴장하며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륙을 구한 영웅 중 하나인 고위 자릿수 마법사가 자신의 훈련을 봐준다는 것이 마법의 ‘마’자도 모르던 에린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아닌 부담으로 짓눌리고 있었다.
또한 에린에게 자신의 훈련을 감독하는 일리아나는 어느 의미로 은현보다 더욱 깐깐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훈련의 양을 소화시키면 그 이상의 간섭은 절대로 하지 않지만,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훈련을 하면서 말을 걸어주는 등 살갑게 대해주지 않는다.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의자에 앉아 마법서적을 읽고 있는 모습은 에린이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것이 마치 ‘방해하지 마라.’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삐빅! 삐빅! 삐빅!
규칙적으로 울리는 알람소리에 일리아나가 자신의 품안에 가지고 있던 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었네.”
“아!”
그 말에 에린의 안색이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라는 말은 10분 휴식이 아니라 점심을 먹은 뒤 최소한 2시간의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은현이 짜주었던 훈련 매뉴얼대로 시간을 칼같이 엄수하는 일리아나였기에, 에린은 기대에 찬 얼굴로 마녀의 선언을 기다렸다.
“밥 먹고 하자.”
“네!”
싱글 벙글 웃음을 보이던 에린은 이내 일리아나가 던져주는 두 개의 덩어리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것들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에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딱딱하게 굳힌 비스킷 같은 과자 두 덩어리, 일명 에너지바라는 식사대용 식품이었다.
“저, 일리아나님? 아침에도 이거 먹었는데 점심도 이걸 먹나요…?”
“문제 있어?”
“아뇨, 그게….”
에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밀가루를 단단히 압착시켜놓은 것 같은 외관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못할 정도인 에너지바의 포장을뜯으며 입 안에 넣었다.
특유의 뻑뻑함 때문인지 담아둔 생수를 들이키며 물렁해진 쿠키 같은 식감을 느끼며 입안에 약간의 단맛과 고소함이 퍼져나갔다.
‘현이가 만들어준 스프 먹고 싶다….’
새삼 훈련 첫날에 은현이 만들어준 점심식사가 얼마나 신경써주었던 것인지를 깨달은 에린은 뻑뻑한 에너지바를 억지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에린은 흘끗 자신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에너지바를 먹으며 마법서적을 읽고 있는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그녀를 대면했을 때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도 아름다울 정도의 미모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 뒤로, 지금은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저 분이 정말로 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마법사? 그냥 움직이기 귀찮아서 방구석에 있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워낙에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어딘가에 이동을 해야 할 때면, 텔레포트라는 고위마법을 사용하는 마력낭비를 보여주는 가하면, 요리하는 것도 귀찮아 집 안에 이렇게 에너지바를 쌓아두고 하루 세 끼를 이것으로 생활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 에린의 입장에서는 신기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
에린은 은현이 있을 때는 이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에린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일리아나에게 물었다.
“혹시 일리아나님…요리 할 줄 모르세요?”
“응. 못해.”
생각해보니 항상 식사를 할 때는 은현이 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청소는요…?”
“그걸 왜 해.”
“빨래도?”
“안하는 데 뭐 문제 있니?”
“헐….”
그녀가 안한다면 이 집안의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뭐가 당당한지 일리아나는 마법서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담담히 에린의 질문에 긍정한다.
이 마녀는 수치심이라는 것도 없는 걸까.
생각해보니 일리아나는 집안일에 전혀 손대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연인이자 자신을 훈련시켜주고 있는 은현이 아닌가.
에린은 은현이 엘레노아와 원정을 나간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에 우울한 기분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훈련을 꾹 참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옥 같았던 훈련 뒤에 만들어주는 맛있는 요리가 하나의 낙이었는데, 퍽퍽하다 못해 목이 잠기게 만드는에너지바라는 비스킷 두 조각으로 훈련의 보상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이가 올 때까지 나도 삼시세끼를 이 에너지바만 먹고 훈련해야 한다는 거야?!’
끔찍한 상상에 안색을 새하얗게 질리는 순간이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수업 시작할게.”
“네?!”
에린은 화들짝 놀라며 새된 소리를 냈다.
세상이라도 멸망했는지 절망어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일리아나는 뭐 문제 있냐는 시선으로 에린을 바라보았다.
“저…점심 먹고 나면 쉬는 거 아니었나요…?”
“체력훈련은 안 할 거야. 이제부터 해줄 건 마력 운용에 대한훈련 방법이지. 방법은 설명해주겠지만 이론이나 원리에 대한 질문은 안 받을 거야. 궁금하면 나중에 현이한테 물어봐.”
“네? 그게 무슨….”
“나는 이런 개념이나 이론 같은 거 잘 몰라. 애초에 나한테 마법을 가르친 것도 현이였고.”
“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를 가르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에린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현이도 혹시 고위 자릿수 마법사인건가요? 그것도 일리아나님 보다 높은 자릿수의…?”
생각해보면 은현도 이상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법지식을 보유하지 않았던가.
소망의 나무에 의해서 시간의 결계 속에 갇혀있던 육체와 유체이탈로 인해 영혼이 분리되었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맞혔고 해결책 또한 제시해주며 사건을 해결했다.
궁정마법사단인 메이거스 소속의 마법사들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인 아이테르 학교의 마법교수진들도 파악하지 못했던 마법적 현상을 은현은 단번에 알아맞히는 모습까지 보여준 것이다.
마법사로서 결코 평범하지 않는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을 뜻하는 바이기도했다.
“아니, 걘 마법은 쓸 줄 알지만, 마법사는 아니야.”
“그게 무슨…?”
에린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일리아나를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로 성장시킨 것은 은현이지만, 정작 은현은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아, 몰라. 일단 나는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일단 알려줄 생각이야. 배워볼래, 말래?”
“해, 해볼게요.”
혼란스러운 기분을정리하지 못하면서도 에린은 일단 마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그녀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받아들여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에린의 얼굴을 보며, 일리아나는 그리운 추억을 떠올렸다.
살아남기 위해서 성장해야만 했던 시절, 기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전장에 나온 풋내기 마법사가 마법사도 아닌 남자에게 가르침을 청해야 했을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의 나도 이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진 눈빛.
자신감은 조금 부족한 소녀였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는 에린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현이를 이런 눈빛으로 보았던 걸까.’
대단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을 성장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담고 있는 눈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일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귀찮지만, 그렇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
대면한 이후로 처음 보는 검은 마녀의 웃음을 본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예쁘다.’라는 감상을 품으며 넋을 놓고 보았다.
“마력이란 건 몸속에잠재되어 있는 마나, 또는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야. 사람의 몸속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마력은 네 몸 안을 타고 흐르며 순환하지.”
설명을 하면서 일리아나의 손바닥에 푸른색의 기운이 일렁이기시작한다.
“마력을 다룬다는 건 몸 속에 흐르는 이 에너지를 조작해서 어떠한 형태로 활용하는 걸 뜻해. 마법사들은 만들어낸 자신이 만들어낸 술식과 법칙에 마력을 불어넣어 ‘마법’이란 형태로 발현을 시키고 전사들은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여 신체능력을 향상시키거나, 무기에 마력을 담아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등 직업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마력을 사용하지. 활용 방법에서는 직업마다 다르고 무궁무진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마력을 스스로 조작할 줄 알아야한다는 거야.”
손바닥 위를 둥둥 떠다니는 푸른색의 마나는 때로는 숫자의 모양을 형성하고, 어떤 때는글자의 모양을 취하는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변화했다.
그만큼 일리아나가 자신의 마력을 조작하는 감각이 탁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였다.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마력 훈련은 간단해. 스스로 마력을 느껴보고, 방출시켜보고, 나처럼 형태가 있는 모양을 취하도록 만들어보는 것.”
에린은 일리아나의 설명을 들으며 몸속에 마나라는 기운을 느껴보려고 했지만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잘 모르겠어요. 뭔가 요령 같은 건 없나요?”
“몰라.”
“네?”
“모른다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마나를 느낄 수 있었고, 조작도 할 수 있었어. 내가 마법사로서의 시작점이 여기였으니까 너한테 이걸 알려준거야.”
“…….”
에린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세간에서는 일리아나 같은 사람을 두고 부르는 말이 있다.
그녀는 세상에 흔히 있지 않는 ‘재능충’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 ◆ ◆
다음 날 저녁.
수도 페르닌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리아 왕녀는 은현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근위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성으로 복귀하겠다고 했다.
알렉스는 피곤해 보이는엘레노아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유리아 왕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따로 헤어졌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은현을 미궁 안으로 데려오고, 파티의 보조와 회복 담당이었던 엘레노아였기에 유리아 또한 알렉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유리아 왕녀의 파티는 그렇게 각자의 갈 길을 가는 것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지하 훈련장으로 간 은현은 의자에 앉아 나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일리아나와 죽을상을 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에린을 보고, 훈련을 설렁설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에린은 지하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훈련장으로 들어온 인물이 은백색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라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얼마나 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는지, 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져 있던 에린이 벌떡 일어나더니 은현에게 달려갔다.
“왔어?”
에린의 반응을 본 일리아나도 입구 쪽을 바라보며 은현을 보고 그의 복귀를 웃으며 맞이해주고 있었다.
“응. 훈련은 잘 시키고 있었나보네?”
“뭐, 그럭저럭.”
“저, 저기!”
“응?”
에린이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는 것에 은현은 꽤나 그녀의 태도가 처음과 달리 꽤나,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는 익숙하지 않은 남자라는 점 때문에 낯을 가리며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마치 주인을만난 강아지마냥 꼬리라도 있다면 세차게 흔들기라도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 저녁밥 좀 해줘!”
“…….”
잠깐 침묵하며 에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던 은현은 흘끗 일리아나 쪽을 바라본다.
청소도하지 않고 바닥에 버려둔 수많은 양의 에너지바 포장용지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일리아나, 너 설마 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또 귀차니즘이 도진 일리아나가 하루 세 끼를 저것으로 때웠다는 것을 눈치 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일리아나는 자연스레 은현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