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043. 사도 후보(2)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
한국에서 연재된 유명한 웹소설.
방대한 설정과 스토리와 많은 등장인물들이 묘사되는 이야기로 한국을 시작으로 해외에서도 인기가 식을 줄을 몰랐던 유명한 이야기다.
자신이 광신하는 악마종들을 소환하여 아르케나 대륙에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였던 ‘미르바빌라 제국’과 아르케나 대륙의 ‘인류연합군’은 전쟁을 벌였다.
많은 인간들의 사상자를 ‘아르케나 대전쟁’이 종전 된 이후, 20년이 지난 세계를 배경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즉, 이 세계는 그 소설 속의 세계관과 똑같은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죠.”
설정된 배경의 지명도,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들도 똑같다.
아르케나 대전쟁을 종전으로 이끌었던 여섯 명의 대영웅들의 영웅담에 대한 것도, ‘리오드 올리비온’과 ‘일리아나 케니퍼’에 대한 자세한 인물 설정도 들어있었던 것도 놀라웠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남자의 존재였다.
“‘알렉스 아르미타스’가 주인공 파티의 일원…?”
“이 사람 정말로 소설 안 읽었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잠깐 정리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설 속에서는 알렉스가 주인공의 동료가 되고, 왕녀님께서는 주인공과 알렉스 일행이 만들어가는 소설 속 이야기의 등장인물에 빙의됐다는 건가요?”
“그렇죠.”
유리아는 은현이 등장한 순간부터 ‘도대체 은현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한참 했다고 한다.
그리고 떠올렸던 하나의 가능성이 바로 자신과 같은 ‘이세계 전생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직 모험가길드나 왕국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키스의 대미궁’의 위치와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 점이나, 소설 속의 핵심 인물 중인 하나인 알렉스와 친해 보인다는 점.
게다가 ‘운명의 메르헨(약칭으로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을 줄여 부른다고 한다.)’ 웹소설 속에 등장하기는커녕, 전혀 연관도 없었던 인물이 소설 속 원작의 흐름을 파괴하는 행보를 보이니, 자신처럼 ‘운명의 메르헨’을 읽었던 애독자일 것이라는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운명의 메르헨’은커녕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 은현을 보고 도리어 유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원작을 읽어보신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아르키스의 대미궁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리고 알렉스는 어떻게 만난 거죠? 저는 그쪽이 틀림없이 알렉스가 주인공의 동료인 핵심인물이기 때문에 접근해서 친해진 줄 알았는데.”
‘게다가 아까 보여줬던 엄청난 힘은 도대체 어떻게 익힌 거지? 난 이 세계에 와서 간단한 마법이라도 하나 익히는데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지구에서 죽은 이후, 이 세계에서 전생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유리아에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왕족으로서 뛰어난 마나 보유량과 감각을 가졌지만, ‘마법’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적응을 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한 끝에 겨우 적응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전생 이후, 유리아 왕녀의 기억과 지식이 없었다면, 그녀는 전생하자마자 홀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도 통하지 않았을 테고, 글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현생의 기억도없는 채로 전생의 기억만이 되살아났다면 언어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은현은 이것이 신의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
은현은 400년이 넘는 긴 영생의 시간동안 가장 황당한 사실을 들었던 것에 어이가 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 세계가 소설 속의 세계라고? 아니, 아니야. 적어도 나는 확신할 수 있지.’
지구의 종말을 두 눈으로 경험했고 일곱 신들이 복구시킨 이 세계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은현이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반대구나.’
지구에서 창조된 소설 속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단지 전생의 기억을 일깨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읽었다는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설을 창작하여 그녀에게 이 세계의 이야기를 전달한 것은 유리아를 이 세계로 불러온 신의 짓일 것이다.
‘심지어 웹소설 같은 걸로 이 세계의 사전 지식을 전달한 건…. 여신님, 가능한 부분인가요?’
[불가능하진 않단다. 그 웹소설이라는 건 자세히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미래의 일부의 흐름까지 이야기를 만들어서 전달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이 세상에서 깨어난 저 아이를 배려하기위했던 거겠지.]
은현은 베르단디의 추측에 고개를 주억였다.
많은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전혀 예측도 하지 못했던 사실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정보였다고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봐요. 제 말 듣고 있어요? 어떻게 된 거냐고요.”
은현은 유리아에게 어디까지 사실을 전달해야할지 정리를 마친 뒤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제가 알렉스님을 알게 된 경위는 딱히 별 게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몇 번 얼굴을 마주친 게 다에요.”
“그런 것 치곤, 알렉스가 묘하게 그쪽을 신뢰하는 눈치던데….”
유리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쳐다보았지만,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르키스 대미궁에 관해 알고 있던 건 이 미궁에 한번 와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이 미궁이 만들어진 목적과 미궁의 주인이 3계층에 남겨둔 유언을 들었기 때문이죠.”
“그 말은…당신은 3계층의 마지막 시련까지 통과했다는 얘기인가요?”
“아니요. 하지만 미궁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죠. 그래서 일부러 시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요? 미궁 안에 있는 보상들은 하나같이 진귀한 재료들과 많은 가치가 담긴 마도구들이 가득했을 텐데.”
“그건 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3계층에 남겨둔 아르키스의 유산들은 모두 인형사 후계에게 계승되어야하는 물품이니까요. 인형사를 목표로 하지 않는 왕녀님이 저의 도움을 받아서 보상만 챙기고 나오시려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윽.”
유리아는 아픈 곳을 찔렸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실제로 자신의 심보가 그렇게 좋지 못했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타국에서 들어온 혼담이 가출의 계기가 되었다죠.”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팔려가는 게 싫었어요.”
“하지만 왕족으로서 다해야할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있을 텐데요.”
“그렇더라도….”
유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한참을 고민했고, 은현은 가만히 모닥불을 쬐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내가 팔려갈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내 남편이 될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아예 몰랐다면, 적어도 이런 무모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겠죠. ‘운명의 메르헨’속의 유리아는 말이죠. 렌디르 왕국의 사비로스 공작가의 자제에게 시집을 가요.”
“그렇게 좋은 정략혼은 아니네요.”
“사비로스 공작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어느 정도는요. 게다가 같은 왕족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공작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은 모양새도 그닥 좋지 못하기도 하지요. 사비로스 공작가는 독자 집안인데, 약혼자도 이미 한 명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일국의 왕녀를 정실도 아닌 첩으로 시집을 보낸 다는 건…이건 후비님의 판단이십니까?”
“어마마마는 사비로스 공작의 진짜 모습을 모르세요. 겉보기에는 청렴하고 자신의 영지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라 떠받치는 공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있으니까요. 그의 진짜 모습은 젊은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에 돈과 지위로 여자를 사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어마마마께서는 몰라요.”
“설득해보신 적은 없나요?”
“어떻게요? 사비로스 공작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저뿐이에요. 이 사실을 전달한다고 해서 어마마마가 믿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나요? 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멀쩡한 사람을 깎아내리는 짓이라며 저를 훈계하실 지도 모르죠. 그리고…이 정략혼은 많은 게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이유는 대강 알 것 같군요. 입지를 다지는 것과 동시에 왕녀님을 보호하려는 건가요.”
이 세계에서 귀족들 간의 정략혼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위세를 올리고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아니면 보호의 명목, 정말로 서로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는 귀족들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리오드와 테레지아가 정말 드문 케이스지.’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존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남편은 자신의 능력을 실력을 갈고닦고, 귀족으로서의 위세와 입지를 점점 키워나가기 위해 아내는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한다.
“후비님께서는 왕녀님을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왕국 내에서 자신의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는 타국의 세력을 끌어들이시려는 거군요.”
“그렇죠….”
유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나쁘게 말하면 딸아이를 팔아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헬레나는 사비로스 공작의 진짜 모습을 모른다.
대외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소문이 파다한 사비로스 공작이라면, 자신의 아들을 왕태자로 만드는 것을 도와줌과 동시에, 첩으로 시집을 간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딸인 유리아를 홀대하지 않고 아껴주며 보살펴 주리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헬레나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왕국 안에서 아들의 입지를 단단히 굳혀주는 것과 동시에, 딸이 행복하게 시집살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었지만.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기 위해 급한 마음이 앞서서, 의심스러운 부분이나, 눈에 가려진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가출을 결심하신 거군요. 타국과의 정략혼을 통해서 보호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인형사 아르키스의 심장을 찾기 위해 미궁에 들어갈 결심을 하신 겁니까?”
“네….”
유리아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은현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보호를 받기 위해서 타국에 팔려갈 정도로 연약한 자신이 싫어서, 적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을 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한 첫걸음으로 ‘운명의 메르헨’속의 던전들의 위치를 떠올리며 ‘유물’을 찾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고 급한 마음에 알렉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여 이런 허술한 원정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후비님도 그렇지만 왕녀님도 잘못됐습니다.”
“네?”
“무조건 안 될 거라고생각을 하고 설득 자체도 시도해보지 않으셨잖습니까.”
“하지만….”
“압니다. 왕녀님의 그 생각의 근거가 그 ‘운명의 메르헨’이라는 소설 속의 자신의 미래를 기반으로 알고 있던 사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 소설 속의 이야기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미 실제로 은현이라는 존재의 등장이 그러했고, 이 시기에 자신이 가출을 하여 아르키스 대미궁을 찾아온 것 또한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근위기사 분들에게도 상담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미궁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대로 전달했다면 근위기사 분들 또한 그에 맞는 대응을 했을지도 모르죠.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전 정보의 유무니까요.”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들은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수상쩍은 정보들인데, 그걸 누가 믿어준다고….”
“사람을 믿는 데는 말이죠. 출처 같은 건 가끔 중요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원정을 이끌면서 파티원 분들이 제가 제공하는 정보를 의심하거나 출처를 묻는 등의 행동을 보여줬던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출처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정체가 불분명한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믿는 데에는 이성적으로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합니다.”
알렉스와 엘레노아 남매가 정체를 알 수 없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현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처럼.
아르키스 미궁 원정에서 많은 정보와 기술들을 제공하며 파티를 이끄는 모습에 근위기사들이 은현에게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신뢰를 보인 것과 마찬가지다.
메르딘과 아이샤는 어째서 갑작스레 난입하여 파티에 합류하기 전까지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의 오더를따르면서도 불만을 하나 가지지 않았을까.
그것은 은현이 등장부터 엄청난 무력을 선보였고, 원정이라는 분야에서 굉장히 많은 경험을 했던 베테랑과도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도, 으스대지 않고,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무시하기는커녕 경험을 쌓게 만들어 성장을 시키려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신뢰란 굉장히 중요하죠. 당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와 이야기가 신빙성이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출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수상하기 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왕녀님을 신뢰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라면 왕녀님의 말을 믿어줄 겁니다. 한 번 부딪쳐 보세요.”
“아….”
유리아는 멍하니 은현의 말을 들으며 작게 탄식했다.
“만약 스스로에게 그럴 자신감이 없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세요.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도 않고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신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겁니다.”
은현은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자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유리아에게 말을 이었다.
“믿음과 기대를 받으며 사람들을 이끌고, 받았던 믿음과 기대에 희망으로 보답하고 그 희망은 또 다시 맹목적인 새로운 믿음과 기대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가능성을 지닌 유리아에게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만들어주는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