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042. 사도 후보(1) (42/730)



〈 42화 〉042. 사도 후보(1)

“당신, 혹시 ‘지구인’인가요?”

은현은 유리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르케나 대륙의 입에서 ‘지구’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유리아는 어째서 ‘지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가운데, 일단은 은현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맞습니다.”

“역시….”

“왕녀님은 지구인이 아니시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지금 이 순간에 자연스레 지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는 뜻은….”

은현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저처럼 왕국 안에서 지구출신의 고대인이라고 소개한 사람을 만났거나, 아니면 왕녀님 본인의 내면이 지구인이거나.”

정곡을 찔린 것처럼 유리아의 어깨가 한 번 들썩이더니 그대로 경직됐다.
일국의 왕녀의 신분을 가졌으면서, 말도 안 되는 독단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던 유리아를 보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략혼을 싫어하고 아직 철이 없다는  행동한다는 헬레나 후비의 말이 떠올랐다.
신분의 제약에 얽히기 싫어하고 자유로운 삶은 추구하는 듯 홀연히 가출한 여성.
납득할 수 없는 이질적인 독단 행동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두 가지를 입에 담았다.
사실 첫 번째가 거의 확실하다 생각했고, 두 번째는 말도 안 됐지만, 여러가능성 중에서 첫 번째 다음으로 제일 가능성이 높았기에담았던 생각이었다.
의외였던 것은 유리아가  번째가 아닌 두 번째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 깜짝 놀라 반응을 했다는 것이다.

‘설마? 진짜로?’

그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 했던 은현은심각하게 동요하는 유리아의 얼굴을 보고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다.

“왕녀님. ‘지구’에서 전생해서 이쪽으로 넘어온 거군요?”

“읏…!”

작게 신음하는 유리아의 반응이 정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그걸 어떻게….”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비밀을 은현이 너무나도 간단히 밝혀낸 것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은현이 곧장 이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신의 옥좌’에서 미리 설명을 해주었던 베르단디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신들도 너의 경우를 본받아 가능성이 보이는 인간들을 사도로 맞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권능을 부여하고, 인간을 사도로맞이하는 것.
가장 처음 그것을 시도했던 운명의 세 여신들이 ‘은현’이라는 성공적인 케이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신들의 새로운 계획.
때문에 은현은 언젠간 자신과 같은 신의 사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여신님.’

은현은 조용히 자신의 여신을 불렀다.

[으음, 모르겠구나.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확실한 건 저 아이는 사도가 아니다.]

혹시나 해서 여신에게 확인을 부탁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들려온 것에 은현은 고민했다.
지금  시기에 자신의 부활과 맞물려서 저 여자가 등장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유리아의 몸속에는 지구인의 기억과 영혼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은현은 인간의 영혼은 죽게 된다면 명계로 가서 생전에 쌓았던 업보에 대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베르단디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윤회, 또는 환생을 통해 다시 태어난 인간은 전생의 자신의 기억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유리아 왕녀는 어떠한가, 멀쩡히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한 것이다.

‘환생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저 여자의 영혼을 신들이 왕녀의 몸에 강제적으로 정착시킨 걸까?’

[아니, 살아있는 인간의 몸에 영혼을 정착시킨 것이 아니다. 환생도 성공적이었고 명실상부 아이 본인의 영혼이 맞구나. 그렇다면…갑작스레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보는 게 맞겠지. 아무래도 신 하나가 저 아이의 영혼에 새겨져있던 전생의 기억을 강제적으로 다시 일깨운 모양이야.]

‘어째서 그런 짓을 했던 걸까요?’

[그건….]

은현의 왼쪽 어깨 위에 떠 있던 베르단디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는 은현의 얼굴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좀 복잡한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설명할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권능을 사용했다.

[은현고유능력]
[사고 가속]

은현을 둘러싼 세계가 모두 정지한 것처럼 활동을 멈추었다.
자신의 육체에 한해서 시간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작할 있는 지금, 현실의 시간은 1초도되지 않았지만, 사고의 흐름을 극한까지 가속시킨 은현의 체감 시간은 몇 분이나 되는 시간으로 늘어났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인간과 여신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베르단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를 되살리기 전에, 신들은 모여서 여러 번의 회의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아이의 노력으로 ‘하계의 멸망’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막아낼 순 있었으나, 멸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가 멸망하지 않은 미래로 뒤바뀌면서 모든 운명들이 뒤틀리고 변화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또 새로운 ‘하계의 멸망’이라는 미래가 태어났단다.]

은현은 이미 한 번 들어보았던 이야기였지만 조용히 베르단디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하계의 멸망’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에 대해서 여러 번 토의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운명을 크게 비틀어 하계를 구한 존재로 한 신이 아이의 이름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  

[이미 성공 했던 전적이 있잖아. 인간을 사도로 받아들여서 성장시키고 하계의 멸망을 막도록 사명을부여하는 게 어때?]

[하지만 시도했던 것도, 성공했던 것도 딱 한 번뿐이다. 이번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게다가 사도로 삼을 수 있을만한 재목도 지금 하계에는 없어. 그리고 이제 하계에는 세계의 복원에 힘쓴 베스타를 비롯한 일곱 여신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인지도도 없어서 간섭하는 것도 못해.]

[다른 시간대에서 인간을 불러오는  어떤가요?]

[다른 시간대?]

[노른의 세 자매가 사도로 삼은 은현이라는 인간도 하계가 ‘지구’라는 문명이 존재했을 때 데려왔던 인간이라면서요? 차라리 우리도  문명이 존재했던 과거의 인간을 데려오는  어떤가요?]

[시간선에 간섭하는 건 금기다.]

[방법은 직접 데려오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 이미 죽어서 환생한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지구’ 문명에서 살았었던 전생의 기억을 억지로 깨운다던지.]

[흐음….]

한 여신의 제안에 다른 신들도 처음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점차 여신의 제안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전생의 기억을 일깨운 인간을 사도로 삼는 건가?]

[설마요. 그것도 일단은 지켜봐야죠. 어디까지나 그 ‘은현’이라는 인간과 비슷한 출신의 인간으로 시험을 해보는 거예요. 무턱대고 사도로 삼아서 신력을 깎아먹는  우행이 아닌가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

‘…즉 과거, 현재 아르케나 대륙의 인간 중에는 사도로 삼을 수 있을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지구에서 살았던 인간의 기억을 일깨운 환생자를 만들어서 과연 신의 사도로삼기에 적합한 인간이 나타날지 말지를 시험해보고 있다는 상황이라는 건가요?’

[그렇단다.]

‘지구의 기억을 가진 환생자를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하게 된 건 ‘성공사례’인 제가 지구인의 기억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고요.‘

[그렇지.]

‘…민폐가 따로 없군요.’

이 사태의 원인에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이 기여했다는 것에 은현은 복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면목이 없구나…. 우리의 일을 인간들에게 떠맡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려서….]

‘아니요. 여신님을 탓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이상 인간들에게도 무관계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적어도 저는 이렇게 저에게 힘을 내려주신 여신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이 세상에서 갑작스럽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한 인간들에게는 약간의 동정심이 들기도했다.
말 그대로 신들의 사정에 의해서 멋대로 ‘신의 실험’에 쓰여 지는 실험쥐 같은 신세가 아닌가.
여기서 만약 사도의 재목으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신들의 사정에 의해 만들어진 ‘환생자’들은 다시 걸레짝처럼 버려질 지도 모른다.
실험에 실패하면 실험체들을 폐기처분하는 것처럼.

‘즉, 유리아 왕녀, 저 여자도 신들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신들의 실험에 쓰여 지고 있는 피해자 신세라는 건데….’

은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일단은 신들의 사정은 이해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신님.’

은현은 새삼 저런 실험쥐 취급을 하는 신들이 아니라 베르단디를 포함한 운명의 세 여신들의 사도가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 만남 당시, 몇 번이고 정말로 괜찮겠냐고 자신에게 다시 선택해보라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베르단디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떠오른다.

[그, 그때의 기억은 잊어버려라.]

은현의 사념을 읽은 베르단디가 부끄러운 듯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했다.
은현은 그런 자신의 여신을 보고 미소 지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뒤, 은현은 ‘사고 가속’을 풀었다.

“다, 당신도 지구에서 죽고 이 세계로 전생된 건가요?”

“응…?”

은현은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내 유리아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그 착각을 고쳐줄 생각이 없던 은현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네. 아무래도 왕녀님과 같은 경우인 것 같네요.”

“하아아…. 다행이다. 그래도 나 혼자만 이 세계에 떨어진 게 아니었구나….”

그동안 자신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꽤나 강했던 모양인지 유리아가 안심하는 모습을 보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유리아는 이곳이 과거 ‘지구’였던 곳이  차례 멸망하고, 그 이후에 형성된 세계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느끼고,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유리아는 정말로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은현은 충분히 착각할 만도 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이냐?]

‘여기에 신들의 이야기나 계획의 전모를 말해줬다간 도리어 반감을  수도 있어요. 애초에 이야기를 믿어줄 지도 의문이고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람은 자신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는 제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노력과시간을 필요로 한다.
신들의 존재와 이미 정해져 있는 ‘세상의 멸망’, 그리고 정해진 미래를 바꿔야하는 배역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선택된 ‘잠정적 사도 후보들’.
이런 대규모 스케일의 이야기를 설명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유리아가 ‘아, 그렇군요.’하고 납득할 수가 있을까.
‘100% 현실을 부정하고 은현을 비웃는다.’라는 예상에 이번에 손에 넣은 불보어의 고기를 걸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줘도 안 가질 것 같다만….]

‘아무튼 여신님의 이야기를 지금 상황에서 전달하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같아요.’

은현은 이제는 그에 대해 아예 경계를 풀어버린 유리아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키스 대미궁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응? 당신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 안 읽었어요?”

“뭔 메르헨?”

“아니, 당신 한국인이잖아요? 한국에서 꽤 유명했던 소설인데요?”

“모릅니다.”

“어어? 그럼대체 그쪽은 아르키스 대미궁에 대해서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아르키스 대미궁하고 그 소설이 연관이 있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전혀 모르겠다는 은현의 반응을 본 유리아가 더욱 당황하며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 세계. 소설 속의 세계잖아요.”

“예?”

“아니, 그러니까! 이 세계,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 소설 속의 세계잖아요!”

“뭐…요?”

은현은 정말로 드물게 살면서 제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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