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9화 〉039. 아르키스 대미궁(7) (39/730)



〈 39화 〉039. 아르키스 대미궁(7)

그의 소개를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셋 중에서 왕족으로 가장 신분이 높았던 유리아였다.

“당신은…어떻게 이 미궁을 알고 들어온 거죠?”

“흐음?  질문이 그거군요.”

“대답하세요! 대체 어떻게 이곳을 알고.”

“그 질문, 정말 대답해도 괜찮겠습니까?”

“뭐라고요?”

“제가 어떻게  장소를 알고 여러분들을 찾아왔는지를 말해드린다면, 왕녀님께서도 어떻게 이 장소를 알고 계신지 말씀을 해주셔야  것 같은데요?”

“그, 그건….”

“이 미궁은 모험가 길드를 비롯해 페르니아스 왕국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인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얻고 무엇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 저도 의문이 드네요.”

“머, 먼저 질문한 건  쪽이에요!”

유리아는 은현의 지적을 듣고는 몸을 떨었다.
은현의 말을 듣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정말로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묻잖아.”

은현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차가워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온도의 변화에 엘레노아도 깜짝 놀라 은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얼굴에는 상대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배려와존중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무언가에 대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언짢아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그쪽의 질문에 대답해주면, 그쪽도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냐고.”

“…….”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유리아를 보며 은현은 다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간단합니다. 왕녀님께서도 밝히고 싶지 않는 부분이 있듯이 저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평소대로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은현의 행동을 보며, 엘레노아는 심각한 이질감을 느끼고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우리 서로 불편한 부분은 묻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죠?”

“으….”

“제가 이곳에  경위는 간단합니다. 알렉스 공자님의 여동생이신 엘레노아 공녀님과 헬레나 후비님의 요청을 받고 가출하신 왕녀님을 다시 데려가기 위함이죠.”

“어마마마가…보내셨다고요?”

유리아는 헬레나 후비의 이름이 나오자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구조를 위해 발걸음을 옮겨준 건 고맙다. 평생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군. 하지만… 어째서 굳이 엘레노아를 데려왔지?”

자신의 동생을  위험한 던전 안으로 끌고 온 것이 은현인 것처럼 말하는 알렉스의 말에 은현은 인상을 찡그리며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요? 내가 데려와? 공녀님, 빨리 해명하시죠.”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곧장 자신을 쳐다보는 은현의 시선을 느끼며 엘레노아는 몸을 살짝 떨더니 알렉스를 직접 설득시켰다.

“오라버니, 제가 따라가겠다고했어요. 오라버니의 상태가 걱정이 돼서….”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저 자가 아니었으면 너도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렇더라도 따라왔어야만 했어요. 만약 오라버니가 죽으면 집안에서 애슈턴 오라버니가 저를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시잖아요. 오라버니가 죽으면 저도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

아르미타스 공작가문 안에서 애슈턴과 알렉스, 엘레노아의 관계는  복잡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애슈턴의 어머니는 맏이라는 이유와 자신의 외가의 힘, 입지를 이용해서 아들인 애슈턴을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소공작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애슈턴의 입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가문 내에서 알렉스와 엘레노아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만약 알렉스가 왕녀 호위 임무 중에 사망을 하게 된다면, 엘레노아의 편은 아버지인 아브로스와 힘이 없는 첩의 자리에 위치해 있는 그녀의 어머니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애슈턴이 엘레노아를 같은 파벌의 귀족 자제에게 정략혼을 시켜서, 자신이 공작가문의 가주가 되었을 때의 입지를 단단하게 굳혀놓으려는 치졸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상황.
알렉스가 죽어버린다면 엘레노아를 정치적인정략혼을 반대해주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도 소중하지만, 오라버니만큼이나 제 인생도 소중해요. 그러니까 제발 무리하시면 안돼요.”

“그래…….”

알렉스는 엘레노아의설득을 들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입지는 더욱 곤란해진다.
아버지인 아브로스의 보호만으로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일 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동생과 어머니를 애슈턴과 그의 어머니로부터 지키기 위해 검을 잡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온 것이 아닌가.

“자, 이야기도 얼추 정리된 것 같군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할까요?”

“자, 잠깐만요!”

유리아가 은현을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뭐죠?”

“당신의 힘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이 미궁의 시련을 통과하는 걸 도와주실 수 있나요?”

“…….”

은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움의 요청을 받은 은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미궁 안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이 이어졌다.
단지 그렇게 좋지 못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게 진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아이샤는 그렇게 위험한 꼴을 겪고도 아직도 이 미궁에 남아있다는 선택을 고집하는 유리아의 태도에 화가 났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 미궁의 위험천만한 마수들을 대적할  없었다.
대적하기는커녕 하마터면 파티 전원이 전멸하여 마수들의 먹이로 전락했을 수도 있던, 그런 위험이었다.
이 위험한 던전에 근위기사들을 끌어들인 것이 왕녀, 자신이라는 것에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죄책감을 품고 연신 사과하며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마수를 압살하는 모습을 보여준 남자 하나가 등장하여 다시  미궁을 탐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자  다시 저렇게 욕심을 보이고 있다.
제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다.
더는 참지 못한 아이샤가 유리아에게 다가가 한마디를 하려 했지만 상처를 치료받고 멀쩡해진 메르딘이 아이샤의팔을 붙잡아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지 말라는 알렉스의 눈짓을 보고서야 아이샤는 이를 갈며 발걸음을 멈췄다.
더는 이 위험천만한 곳에 있고 싶지 않은데.
은색머리카락을 가진 은현이라는 저 남자가 왕녀의 요청을 거부할리도 없었다.
그녀는 왕족이었으니까.
결국 이 지긋지긋한 미궁 안에서  일을 더 있어야할지도 모르는다는 절망감이 아이샤의 몸에서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싫은데요.”

“예?”

“엉?”

“뭐라고?”

아르미타스 남매를 제외한 사람이 모두 은현의 거절을 생각도 못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은현의 성격을 알고 있는 남매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제가 해야  일은 왕녀님과 기사님들을 모두 왕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이 미궁의 시련을 답파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강하잖아요. 당신의 힘만 있다면 이 미궁을 답파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부탁드려요. 왕녀의 이름을 걸고 당신에게 보상을 약속할 테니….”

“‘아르키스의 심장’을 노리는 거라면 포기하세요. 그건 왕녀님이 손댈  있는 종류의 유물이 아닙니다.”

“…….”

구체적인 유물의 이름을 언급하자 유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봐. 그러지 말고 도와주면 안 되겠나? 우리는 왕녀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저 마수를 간단히 제압한 실력이라면 분명 왕녀님의 목적도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돕냐, 안 돕냐의 차이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왕녀님은 이 미궁의 존재를 알고 찾아오셨으면서, 이 미궁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겁니까?”

“아르키스….공허의 시대에 마족들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 중 한 명, 던전을 탈취해 던전 안을 미궁으로 개조하고 찾아오는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목적은…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후계를 기다리기 위해.”

“잘 알고 계시네요. 인형사도 아닌 왕녀님께서 인형사 아르키스의 후계를 이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이 미궁의 핵심 동력원인 아르키스의 심장만을 가지고 이 미궁을 나오겠다니, 말도 안 되죠.”

“으….”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왕녀님을 도와서  미궁의 시련을 모두 클리어 한다고 해서 왕녀님에게 심장이 위치한 최심부의 시련은 받을 수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왕녀님 스스로의 능력으로 시련을 통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거의 대놓고 날먹을 하겠다는 심보나 다름이 없다.
은현의 말을 들으며 유리아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멍하니 은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미궁에 대해 막연한 지식 밖에 없던 유리아는 자신보다 더욱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며 설득하는 은현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인가?

“이해되셨으면 서둘러 이 미궁을 나가도록 하죠. 부상은 치료했다지만 아직 체력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닐 겁니다. 시간도시간이고 서둘러 미궁을 나간 다음 야영의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은현은 유리아의 대답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고는 파티의 지휘를 맡고 있던 알렉스에게 간단한 계획을 전달했다.

[아이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구나.]

‘그냥, 저 왕녀가 하는 행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요.’

유리아가 왕족이라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막론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은현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니까 버스를 태워달라는 도둑놈 심보가 괘씸했기 때문이다.

‘이건 아르키스의 염원을 방해하는 행위에요.’

 미궁이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은현은 유리아의 행동과 말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후후, 친구의 무덤에서 부장품을 도굴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 화가  것이구나.]

베르단디는 기특하다는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여신의 손길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일까, 작게 숨을 내쉰 은현은유리아 때문에 생긴 불쾌해진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알았다.”

알렉스는 억지에 가까웠던 유리아 왕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준 것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의 결정에 동의했다.
개인적으로 왕족의 요청을거절한 것은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지만, 이 이상 미궁을 계속 탐색하는 것 또한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했기 때문이다.

“전위, 맡을 수 있겠어요?”

“엘레노아 덕분에 상처도 나았어. 조금 피곤하긴 해도 짐이 될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야.”

“좋네요.”

은현은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알렉스와 메르딘을 보고 피식 웃으며 걸었다.
은현과 엘레노아가 합류한 것으로 유리아 왕녀의 원정팀은 꽤나 안정적인 밸런스를 갖추게 되었다.
은현을 포함해 전위가 셋, 넓은 시야로 탐색과 경계를 비롯해 전위를 엄호하는 궁사 하나, 높은 화력을 자랑하는 마법사 하나에 회복과 보조를 담당 하는 사제 하나.
소규모인 점은 변함없었지만, 실력 좋은 사제와 근접 전사 하나가 추가됨으로서 더욱 안정적인 탐색이 진행될  있었다.

“꽤나 미궁 깊숙이도 들어오셨네요.”

“함정에 당했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은현에게 자신들의 파티가 미궁 지하로 떨어지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함정?”

“갑자기 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래층으로 떨어졌었지. 만나게 되는 마수들도 모두 차원이 다른 수준이더군.”

“아아, 위에 층은 마수들보다 함정이 더 짜증났었지. 아이샤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함정을 탐색하고 해체하는데도 신경을 너무 써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아이샤도 인상을 쓰는 메르딘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듯 한마디 거들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직업보다 시야 넓은 궁사는 원정에서마수와 함정의 탐색으로 파티에게 닥쳐올 위험을 미리 파악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궁사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던 아이샤라는 근위기사는 미궁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수의 경계와 함께 함정의 탐색에 많은 신경을 쏟고 있었던  같았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보아하니 꽤나 많이 시달렸던 모양이다.

“파티의 오더를 은현, 너에게 맡기고 싶다.가능한가?”

“네에?! 서, 선배!”

갑작스러운 알렉스의 부탁에 아이샤가 펄쩍 뛰면서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난 지 1시간도 되지 않은 남자에게 파티의 지휘권한을 맡기다니 도저히 이해할  없는 선택이었다.

“이 파티를 이끌고 있던 건 알렉스님이었지 않습니까. 뭘 믿고 저에게 맡기겠다는 건가요?”

“적어도 합리적인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다. 너는 우리를 위협했던 불보어를 말도 안 되는 거리에서 투창으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줬지. 심지어  겹으로 가로막혀서 벽을 뚫고서까지 정확히 명중시킨 공격이었어. 위력도 위력이지만 가장 뛰어난 건 너의 그 탐색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서, 선배애….”

“흐음.”

은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알렉스의 의도를 깨달은 은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레 이 파티의 오더를 맡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아이샤에게 시선이 갔다.
은현의 시선을 받은 아이샤는 몸을 굳히며 은현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 의도에 넘어가드리죠.”

은현의 생각을 자연스레 읽은 베르단디도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도 귀찮은 걸 싫어하면서 이런 부탁은 다 들어주는 구나.]

‘귀찮아요. 이것도 저것도 전부다. 하지만…가끔가다 꽤 보람 있을 때가 있긴 하죠.’

은현은 주인공들의 성장을 돕는 엑스트라라는 역할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아이샤가 주인공이 될지 그저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주인공으로서의 배역을 쟁취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가능성이 보일 때 그녀를 돕는 것도, 그녀 스스로가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은현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과연 그녀는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보고 배울 수 있을까.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알렉스가 아끼는 것으로 생각되는 저 아이샤라는 궁사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은현은 파티의 오더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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