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038. 아르키스 대미궁(6)
쿵!
미궁을 뒤흔드는 소리에 은현과 엘레노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 소리는….”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아의 말을 들으며 은현은 진동과 소음의 진원지를 찾았다.
‘감지’를 통해 미궁의 내부를 탐색하고 있었기에 원인이 어느 곳에서 발생했는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은현은 바닥을보며 말했다.
“아래군요.”
“서, 서둘러야하지 않나요? 지금 오라버니의 파티가 전투중이라면….”
“이건 전투소리가 아닙니다.”
“전투소리가 아니면요?”
“소리와 진동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마수하나가 길길이 날뛰며 미궁 안을 뛰어다니고 있다는 뜻이죠.”
엘레노아는 은현의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어지는 소음과 진동으로 추측해보면 적어도 마수가 인간들을 쫓고 있는 건아닌 것 같습니다. 미궁 안을 들썩거리게 만들 정도로 여기저기 벽에 들이박으면서 생기는 소음 같으니까요. 왜인지는 몰라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뭔가에 잔뜩 화라도 난 것처럼.”
“전투가 벌어진 게 아니라는 건가요?”
“전투 도중이었을 수도 있죠.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생각은 파티원 중 하나가 도주용으로 구비해둔 최루병 같은 걸터뜨린 뒤에 마수에게서 도망쳤을 가능성이 가장 높네요.”
은현은 저렇게 미궁 안에서 마수 하나가 길길이 날뛰었을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최루병?”
“포션병 안에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약재와 촉매를 넣어 제조한 비치사성의 도구입니다. 주로 연금술사들의 공방에서 만들어지죠. 연기를 들이마시게 되면 그대로 피부에 따가움이나 구토, 재채기 등의 상태이상을 유발시킵니다. 이길 수 없는 마수와 조우했을 때 이 병을 터뜨리면, 마수들이 그 최루병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급하게 퇴각하는 거죠.”
“그렇군요. 즉, 만약에 오라버니 일행이 전투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했고저 마수가 오라버니 일행을 놓친 것에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고 있다는 건가요?”
“그런 거겠죠.”
은현은 이제는 완전히 멈춘 진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는 엘레노아에게 말했다.
“속도를 높여야 겠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업혀야겠군요.”
“또요…?”
엘레노아는 아무래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씩이나 외간남자의 등에 업히는 것에 약간의주저함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동과 소음이 멎었습니다. 최루로 인해 발생한 상태이상 효과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뜻이죠. 아마 고통에 잃었던 이성을 되찾게 된다면 마수는 자신에게 큰 엿을 먹이고 도망친 인간을 죽이기 위해 찾아다니겠죠.”
“아.”
알렉스의 일행일 가능성이 있는 파티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지금, 이 소음의 원인인 마수가 다시 조우하기 전에, 은현과 엘레노아 쪽에서 파티와 접선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다시 마수와 조우를 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아는 망설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밤중에 숲을 달렸던 것처럼 은현이 엘레노아를 업고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마차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미궁의 내부를 빠르게 활보하면서도, 이리저리 발동되는 함정들을 모두 피하고 전진하고 있었다.
엘레노아는 조우하는 마수들의 공격도 맞기는커녕, 뿌리치며 대담하게 전진하는 은현의 능력이 이제는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사고 가속]
은현은 ‘시간 가속’을 통해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으로 미궁 안을 뛰어다니면서도, ‘감지’를 가능한 최대의 범위까지 펼친 뒤,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들을 ‘사고 가속’으로 정리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은현의 머릿속에는 미궁 내부의 구조, 위치한 마수들의 종류와 숫자, 휴식처로 알려진 세이브 포인트,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알렉스와 유리아 왕녀 일행의 파티의 위치를 찾기 위함이었다.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맵핑(Mapping)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현은 감속 한 번을 하지 않고 복잡하고 어려운 미궁의 내부를 제집처럼 망설임 없이 뛰어다녔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미궁의 내부를 활보하던 중에, 두 사람은 문이 있는 곳 앞에 다다랐다.
감지를 통해서 ‘문’너머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은현은 문을 향해 돌진하더니 다리를 들어 올려 철제문을 뻥차버리고는 그대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꺄악!”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뛰어내린 것에 가까웠다.
엘레노아가 공중에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비명을 질렀고 자신을 업고 있던 은현의 목을 더 강하게 조였다.
“숨 막혀요.”
“그, 그럼 이런 짓 좀 갑자기 하지 마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으니까!”
“빠르게 가려면 참아야죠. 오라비의 목숨이 걸린 문제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뭐라 반문을 못하던 엘레노아는 이럴 때만 알렉스의 일을 핑계로 들먹이는 은현이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단을 빠져나와 새로운 층으로 진입한 은현은 다시 새로운 지하의 내부를 빠르게 활보하고 다녔다.
자신의 ‘감지’끄트머리에 걸리는 네 명의 사람을 발견한 은현은 그 순간 뛰어다니던 발걸음을 멈췄다.
“찾았다.”
“네?”
뜬금없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멈춘 은현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엘레노아는 은현이 자신을 내려주고 앞에 매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그런 은현의 행동을 ‘이 인간이 또 뭔가를 하려는 구나.’라는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뭘 하려는 건지 물어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여행용 백팩을 내려놓은 은현은 손에 장창을 하나 소환하더니 곧장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구부려 몸을 숙이고, 장창을 뒨 오른팔이 뒤로 곧게 뻗으며 허리가 비틀린다.
‘투창? 여기서? 벽을 향해?’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은현을 지켜보고 있을 때, 엘레노아는 은현의 오른손에서 장전을 마친 석궁처럼 언제라도 날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창을 보았다.
“아….”
창을 중심으로 응집되는 마력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은 양질과 많은 양의 마나가 푸른색의 색깔을 띄우며 손과 창을 감싸고 있을 정도.
은현은 마나를 담고 또 담으며, 손에 쥔 창을 한계까지 강화하고 또 강화한다.
한계까지 강화하며 만들어내는 것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관통력.
한계까지 담긴 마나로 손에 쥐어진 창이 부르르 떨며 울부짖는다.
이것이 한계라는 듯, 어서 자신을 해방시켜달라는 듯이 무기의 비명이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강화가 끝난 은현은 언제라도 창을 던질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차분히 기다렸다.
‘감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대상, ‘커다란 엄니를 가진 맷돼지’가 자신 조준한 목표지점에 들어오기를.
그리고 미친 듯이 돌진하는 맷돼지가 정확히 자신의 사선에 들어온 순간, 은현은 창 안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마력을 해방시켰다.
“읏!”
갑작스레 은현이 쥔 창을 중심으로 거센 마력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기에 엘레노아는 작게 신음하며 바람에서 얼굴을 보호하며 막았다.
[브류나크(Brionac) 창술]
[껍질 꿰뚫기]
완벽한 투창의 자세에서 발사된 창이 벽을 부수고 2km 너머의 마수를 향해 날아가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몇 겹이나 되었던 미궁의 벽을 허물고 목표물을 정확히 꿰뚫었다는 것을 확인한 은현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번엔 많이 먹을 수 있겠구나.’
[아이야…. 집중하거라.]
그 광경을 본 엘레노아는 허물어진 벽들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쳤어….”
작게 중얼거리는 엘레노아의 말을 무시하고 은현은 창에 꽂혀 공중에서 박제된 것이나 다름 없는 맷돼지 형 마수, 불보어가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땅에 닿지 않는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시 장창 한 자루를 소환하여 이번엔 불보어의 머리를 조준하여 투창을 던졌고, 명중한 불보어의 머리가 터지는 것을 확인하고 즉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닥에 두었던 여행용 백팩을 다시 매었다.
“가시죠.”
은현은 엘레노아의 허리와 다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짓….”
“공녀님의 오라버니가 계신데 까지 1km거리입니다. 공녀님의 걸음걸이에 맞춰 가면 한세월이에요. 오라버니께서 좀 심각한 부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서두르죠. 중간에 내려 드릴 테니 체면걱정은 하지마세요.”
“…….”
엘레노아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은현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위중한 상태라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신성마법으로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이렇게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고 엘레노아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순식간에 이동을 끝낸 은현은바로 앞에서 엘레노아를 내려주었고, 그녀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며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두 남녀와 마주했다.
“엘레노아? 네가 여기엔 어떻게….”
갑작스러운 엘레노아의 등장에 당황한 듯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를 제치고 은현은 곧장 자신을 이 사건에 엮이게 만든 장본인을 향해 걸어갔다.
척 보기에도 위중한 상태인 것을 알려주는 알렉스는 정말로 마음을 놓은 듯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바라보았다.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은현이 와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은현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는 알렉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배달 왔어요. 고객님. 부탁하신 ‘도움’ 제때 맞춰 도착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평생을 감사해야할 지도 모르겠군.”
“그럼 다음부턴 이렇게 ‘배달의 부족’을 부려먹는 것 마냥 쓰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아무리 협력관계라고 해도 또 이러면 다음부터는 화낼 겁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너희들의 일에 나를 엮이게 하지 마라.’라는 경고를 담은 말이었지만, 알렉스는 그런 은현의 말을 듣고는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없군. 네 도움이 절실한 일은 끊이지 않을 것 같아서.”
“뭐, 그건 그때 가서 또 상담해보고. 일단은 그 다 죽어가는 몸부터 어떻게 해보도록 하죠.”
은현은 알렉스의 사정은 대강이나마 눈치 챌 수 있었기에 너무 뭐라 타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또한 유리아 왕녀의 독단 행동에 휘말린 입장이었기에, 자신의 능력부족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했고, 혹시 모를 사태에 ‘은현’이라는 보험을 걸어둔 것이었으니까.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완수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이 은현에게는 그렇게 싫은 인상은 아니었다.
‘뭐, 이런 놈이니까 굳이 구하러 온거지만.’
[다른 자였다면 구하러 오지 않았을 거란 말처럼 들리는 구나.]
‘적어도 이 자식의형인애슈턴이라는 쓰레기였으면 절대로 안 왔어요.그냥 죽게 내버려뒀을 겁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헬레나와 엘레노아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은현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곤경에 처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모든 이들을 구하는 ‘성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성자가 위기에 빠지고, 불행한 운명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굳이 구하지 않는다.
‘성인’은 아니지만 ‘악인’도 아닌, 철저한 계산적인 인간이 은현이었다.
은현은 가만히 알렉스를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같은 인간인 자신이 인간의 목숨의 가치를 판단하고 구할 목숨과 버려야할 목숨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처음 사도로 임명되면서, 신들이 강제한 이 사고방식에는 수많은 회의감과 고뇌가 들었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히 고착화된 자신의 사고방식은 평범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이제는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을 채용할 필요가 없다고 여신인 베르단디가 제약을 풀어주었다고 하더라도 400년 동안 유지되어온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도 없었다.
‘예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힘들겠지.’
과연 지금의 자신을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을까, 은현은 회의감이들었다.
육체는 이미 인간의 수명을 벗어났으며, 머릿속에 주입된 사고방식과 생각은 인간을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효율적인 면을 추구하는 합리적이라는 표현을 포장한 매정하기 짝이 없는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아이야…그런 슬픈 생각은 더는 하지 말거라. 아이의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 내가 아이의 곁에 온 것이다.]
‘…여신님.’
[아이를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만든 게 다름 아닌 나와 나의 자매들이니까 말이다.]
‘여신님. 괜찮다니까요.’
은현은 또 한 번 스스로를 자책하는 베르단디를 위로하고는 알렉스의 상태를 살폈다.
“이건…좀 심각하군.”
“오, 오라버니!”
은현을 뒤따라온 엘레노아가 복부의 커다란 관통상을 보고 안색을 새파래지며, 비명을 질렀다.
“당장 치료를.”
“네.”
[베스티아 신성 마법]
[하이네스 힐]
손상된 장기와 살점들, 피부조직이 복구되는 것을 보고 신성력이 가득 담긴 상위의 힐이라는 것을 알아본 은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네요. 고위의 회복 주문을 쓸 수 있었군요.”
“뭐가 의외라는 거죠? 말했잖아요. 도움이 될 자신이 있…으.”
자신감 있게 말을 하다가, 엘레노아는 은현과 함께 행동하면서 한 번도 자신이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매우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급하게 은현의 시선을 피한 엘레노아를 보고 은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자기 소개를 해야겠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근위기사님들과 유리아 왕녀님. 알렉스 님과 엘레노아 님의 부탁을 받아 여러분들의 구조 임무를 맡게 된 은현이라고 합니다.”
은현은 격식 있는 자세를 취하며 상황이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세 사람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