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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036. 아르키스 대미궁(4) (36/730)



〈 36화 〉036. 아르키스 대미궁(4)

‘삼매붕권(三昧崩拳)’
그것은 고대 시대, 마족에 대항했던 영웅들  하나인 주현성이라는 남자의 기술 중 하나였다.
지구인의 몸으로 마력을 깨우치고 극원류(極源流)라는 무술에 접목시킨 남자.
맨몸으로 마족들의 공세를 버티고 혈혈단신으로 마수와 악마들의 몸을 찢어버렸던 인물이자, 은현에게 싸움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  하나였다.
무술에 아무런 재능도 없었고, 가르쳤음에도 성취가 없었던 은현은 긴 시간 동안 오직 기본기만을 닦는데 매진했고 그 과정에서 매일 밤마다 정권지르기만을 연습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속에 품으며, 은현은 한 가지 동작만을 반복했고 반복할 때마다 느껴지는 미세한 차이를 수정하며 잘못된 점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다시 반복하면 할수록 동작의 완성도는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그렇게 극의에 다다를  깨우친 기술이 바로 ‘삼매붕권’이었다.
잡념을 버리고  가지에만 집중시켜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은현의 기술.
재능이 없었던 은현과 무술의 극에 달했던 주현성이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이었다.
몇 년에 걸쳐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한 끝에 탄생한 기술에는 은현의 피나는 노력과 광기어린 집착 속에서 태어난 기술이었지만, 그 기술을 만들기 까지 소모된 노력과 시간까지 알아보기에 무술에 대해 전혀 모르던 엘레노아에게는 무리가 있었다.
그저 맨주먹으로 미노타우로스의 복부를 터뜨러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는 못한 실정이었지만.

‘대체…정체가 뭐야?’

지금껏 보아온 모습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은현의 모습이었다.
흑마법사의 ‘그림자’에 대항했을 때도.
말로 사람들을 농락하고 간악한 협박에 가까운 협상을 제시했을 때도.
코볼트의 무리들을 간단하게 제압했을 때도.
엘레노아는 경악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진 남자는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은 무엇인가?
미노타우로스는 하급마수인 코볼트 무리들과는 질적으로도 틀린 중급마수이다.
능력과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코볼트들과 한 개체 단신으로 활보하는 미노타우로스  어느 쪽의 위험도가  높은지를 따져본다면, 많은 모험가들은 당연 후자를 선택하리라.
숙련된 모험가들의 입장에서는 숫자가 많아도 전투력이 낮은 코볼트 무리들은 어느 정도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큰 소모 없이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의 경우는 다르다.
숙련된 모험가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단단한 육체, 어마어마한 크기의 무기를 휘두르며 주위의 적들을 처참하게 찢어발기는 압도적인 근력은 많은 모험가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들이었다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팔근육으로 휘둘러지는 무기를 한 번 맞게 된다면 그대로 몸통이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미노타우로스를 맨손으로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이가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지금껏 살면서 저렇게 무식한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왕국 최강의 기사인 리오드나 수많은 공적을 쌓고 무력으로 군무장관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의 아버지, 아브로스마저도 저 미친 행위를 따라할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버지는  남자의 행동 방식과 뱀 같은 혀가 가장 두렵다고 하셨지. 하지만 아니야.’

은현에 대해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은현의 저 끝을  수 없는 무력이다.

‘뭐 하는 거지?’

그런 놀라운 광경을 보여준 은현은 갑작스레 무릎을 꿇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탄식하고 있었다.

“고기…내 소고기가….”

뭐라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엘레노아는 조심스레 주저앉았던 바닥에서 일어났고 은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이야! 정신을 차리거라!]

‘여, 여신님?’

베르단디의 목소리를 들은 은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깜짝 놀라며 허공에 떠있는 베르단디를 불렀다.

[지금은 그것보다 해결해야할 일이 있지 않느냐. 아이가 매우 아쉬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만, 어서 정신 차려야지.]

‘그, 그렇죠….’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꿇었던 무릎을 다시 일으키며 몸을 추슬렀다.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고요.”

흘끗 미노타우로스의 시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미궁에 저 마수가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분명 다른 개체도 있을 게다. 낙심하지 말거라.]

“그렇…겠죠.”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아쉬웠던 마음이 강했던 것일까, 은현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으로 대꾸한다는 것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엘레노아의 반문에 적당히 대답한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노타우로스의 시체에서 미련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이 커다란 미궁에 저거 하나만 있을 리도 없지. 분명 다른 개체가 있을 거야. 그때는 실수하지 말자.’

“다시 탐색을 재개하죠. 지금부터는 아마 전투도 빈번하게 이루어질 것 같으니 단단히 주의해주세요.”

엘레노아는 은현의 당부를 들으며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크으윽!”

알렉스는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비명을 다시 집어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벽에 부딪치는 충격으로 인해 기절할 뻔 했지만, 더욱 끔찍한 통증이 알렉스의 몸을 헤집으며 괴롭히고 있었다.
송곳처럼 돌출되어 있는 불보어(BullBoar)의 엄니가 알렉스의 왼쪽 복부를 관통한 채로 알렉스의 몸을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밀어붙여 미궁의 벽과 충돌시킨 것이었다.

쿠르릉

거칠게 콧김을 내뿜던 불보어가 알렉스의 복부를 관통시킨 자신의 엄니를 빼내며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불보어가 멀리 떨어지자 알렉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구멍이 뚫린 자신의 왼쪽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손으로 거칠게 틀어막고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쿠르릉!

일어설 힘도 없었던 알렉스가 벽에 기댄 채로 다시  번 포효하는 불보어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듯 사나운 눈과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바닥을 거칠게 쓸고 있는 모양새가 충분한 도약거리를 확보한 뒤 또다시 자신을 향해 돌진해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알렉스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최후였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어떻게 불보어에게 타격을 주고 왕녀 저하와 일행에게서 저 놈을 떼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순간.

치이익!

 포션병이 바닥을 굴러가더니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알렉스와 불보어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연금술사제의 최루병이었다.
병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는 호흡기관을 가진 생명체의 기관에 침투하여 구토, 재채기 등의 상태이상을 유발시키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호흡기관을 가진 생명체라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통하는 무기였지만, 알렉스는 재빨리 오른팔로 팔과 코를 막아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최소화했다.
반면 불보어의 경우에는 반대였다.
거칠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크게 내쉬는 호흡습관을 가진 불보어는 새하얀 연기들을 대량으로 들이 마셨고, 그 효과는 강력했다.

쿠으으으!

연기를 들이마신 불보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미궁의 벽들에 부딪치면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는 불보어의 행동은 미궁이 진동할 정도로 강력 여파를 남기고 있었다.
얼마나 거세게 날뛰던지, 알렉스가 부딪치면서도 부서지지 않았던 미궁의 벽에 금이가더니 이윽고 미궁의 벽들을 부숴버리고 다닐 정도였다.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움직여요!”

활을 어깨에  채로 하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여자가 다급하게 알렉스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이 틈에 자리를 피해야 해요! 어서요!”

여자 궁사, 아이샤 벤델가르드의 재촉을 들은 알렉스는 자신에게 소리치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으윽!”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하자, 관통당한 복부의 상처가 이루 말할  없는 통증이 덮쳐왔기 때문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관통당한 상처를 왼손으로 억지로 틀어막은 알렉스는 기대고 있던 미궁의 벽에 기대며 힘겹게 일어섰다.

“부축해드릴게요. 어서 가요.”

알렉스의 오른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른 아이샤는 그의 몸을 부축하며 유리아 왕녀와 메르딘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면서도 현 상황에 대한 정리를 하며 머릿속을 굴리고 있었다.
현재 상황은 심각했다.
 명의 팀원 중 전위 두 명이 부상으로 전투 불능, 남아 있는 것은 마법사 하나와 궁사 하나.
부상자를 데리고 전투에 임하는 것도 불가능.
현재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특정도 불가능.
그렇다고 아무런 마수와도 조우하지 않고 이 미궁을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
어떻게 해결책을 내놓아야할지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 알렉스는 답답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의 표정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도 암울한 분위기가 전염된다.

“내가 당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왔군요.”

알렉스의 굳은 표정을 본 유리아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저하! 모든 건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알렉스는 상황이 이렇게 안 좋게 흘러간 것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파티 안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리더는 왕족인 유리아 왕녀가 맞았으나, 나이가 가장 많으며, 던전 탐색과 원정에 경험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알렉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파티의 지휘는 알렉스가 맡게 되었다.
상황이 이처럼 안 좋게 흘러간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알렉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요. 나의 잘못이에요.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저런 마수가 미궁 안에 있다는 얘기는 듣지도 못했고, 그저 시련만 간단히 클리어하면 모든 게 해결   알았는데….”

“저하, 절대로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메르딘도 굳은 표정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유리아를 위로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단은 이동하죠.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서 선배님들 상처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가 자기 탓이라며 자책하고 위로하고 있기만 하고 구체적인 행동 방침이 결정되지 않자, 아이샤가 입을 열어 행동 방침을 제시했다.
원래는 알렉스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죄책감에 사로잡힌 유리아 왕녀를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음.”

“일단은 그래야겠군.”

왕족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창단된 그라시아 기사단에서, 아이샤는 단원인  사람 중에서 가장 막내에 해당했지만, 알렉스와 메르딘은 그녀의 제안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유리아는 메르딘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우자 메르딘은 송구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는 근위기사인 자신이 왕녀인 유리아를 지켜야하지만, 입장이 전혀 반대가 되었다는 것에 매우 복잡한 심경이었다.

“선배, 진짜 우리 어떻게 해요?”

알렉스를 부축한 아이샤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흘끔 유리아를 보더니 다시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저 대가리 꽃밭 왕녀 하나 때문에 우리 다 죽게 생겼잖아요!”

“말조심해라. 네가 아무리 저분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저 분은  나라의 왕녀님이야.”

“그게 중요해요?! 지금 우리 다 아까 그 맷돼지한테 뱃가죽 찢기게 생겼는데!”

알렉스는 잔뜩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유리아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애쓰며 말하는 아이샤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었다.
멋대로 왕녀의 파티에 아이샤를 데려온 것도 그녀의 실력을 알고 있는 알렉스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샤는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왕족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그녀는 안일한 생각과 판단으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것이 설령 왕족일지라도, 책임과 의무에 의해 유리아를 호위하고는 있지만, 그녀를 싫어하는 감정은 엄연히 존재했다.
 장소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소규모의 인원으로 파티를 구성해 던전에 들어온 유리아 왕녀 본인은 자신의 판단이 매우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악질적이기까지 했던 함정에 대한 존재나, 전혀 예상못했던 마수인 불보어를 만났던 것을 보면 입장한 던전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몰랐던 모양이다.
심지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도 밝히려 들지 않았다.
이 던전에 어떤 목적이 있어서 들어왔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목적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그녀의 호위를 위해 따라왔던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근위기사 두 명이 전투를 속행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상태.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고 아이샤는 혀를 찼다.
존경하는 선배인 알렉스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유리아 왕녀의 호위 따위는 금화를 10닢을 준다고 해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늦지 않게 왔으면 좋겠는데….”

“와요? 누가? 이 미친 던전 안에요?”

작게 중얼거리는 알렉스의 말을 들은 엘레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있어. 정말 혹시나 해서 만들어둔 보험이. 그런데 와 줄지는 모르겠네.”

“뭐에요. 그게.”

어이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어설픈 쓴웃음을 짓는 알렉스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나갈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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