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032. 구조요청(3)
이야기를 마치고, 곧장 도서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복도를 걷고 있던 도중, 도서관을 찾아온 한 소녀가 은현과 엘레노아, 헬레나 후비를 보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에린? 도서관에는 무슨 일이야?”
“그, 그냥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을 뿐인데….”
에린에게 있어서 아이테르라는 학교의 장소는 매우 불편한 장소였다.
틈만 나면 귀족자제들의 도를 넘는 괴롭힘을 동반한 비난과 조롱은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깎아내리고 있었고, 지금의 에린에게 의존 할 수 있는 상대는 은현 밖에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은현을 찾아온 것이었다.
“저 아이가….”
아직 학생인 듯 교복을 입고, 어린티를 못 벗어낸 남청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고는 엘레노아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단 번에 알아맞힐 수 있었다.
헬레나를 포함해, 두 여성의 주목을 받고 있던 소녀, 에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째서자신을 보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멀뚱멀뚱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엘레노아가 헬레나에게 고개를 조금 숙이며 실례한다고 의사를 표현한 뒤, 에린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가까워지는 엘레노아를 보며 영문을 모르던 에린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나를 보는 건 처음이겠네.”
“어…. 저를 아세요?”
“네가 나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겠지만, 난는 너를 한 번 본적이 있으니까.”
소망의 나무에서 잠들어 있었던 소녀의 모습을 한번 본적이 있었던 엘레노아는 약간 긴장했는지 작은 심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에린의 눈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연다다.
“나는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공녀, 엘레노아 아르미타스야.”
“아….”
‘아르미타스 공작’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에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고 말없이 엘레노아를 쳐다만 보고 있을 때, 엘레노아는 에린에게 다시 말했다.
“에린, 나는 너와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
복도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을 소개하고 대화를 요청한 여성을 보며 에린은 멍하니 있기만 하고 있었다.
아르미타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으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던 것도 잠시, 에린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고민에 빠졌다.
‘뭐라 대답해야할까? 대화를 하고 싶다고? 무슨 대화를? 이제 와서? 지금? 왜? 어째서? 뒤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계시는 분은 누구지?’
머릿속으로 갖은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에린의 표정을 본 엘레노아는 에린이 자신의 소개에 놀라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다시 한 번 에린에게 말을 걸려 했던 순간.
“잠시만요. 공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은현이 중간에 개입했다.
“이 아이도 지금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이고, 공녀께서도 지금 그 건의 준비로 바쁘시겠죠. 나중에 제대로 된 자리를 한 번 마련해보심이 어떨까요.”
“그건…. 후우, 그렇군요. 제가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모르게 이 아이를 발견하게 되어, 급하게 말부터 걸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아…. 네….”
에린은 아직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공녀는 에린이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정중했고 기품이 있었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었던 에린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행동이 공작가의 인물이 공작가의 후계자인 소공작 애슈턴의 독단에서 시행된 것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여성은 관계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막상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막상 공작가의 인물을 만나게 되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에린에게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현의 중재가 에린에게는 구원과도 같았다.
“단, 이 자리에서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공작가의 여식으로써 우리 집안의 문제로 큰 해를 당하게 된 점. 정말로 미안해.”
“아, 저기, 그게….”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고는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은 에린은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나는 용서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어째서? 잘못한 건 공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야. 어째서 이분이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이건…. 아니야.’
에린은 지금의 엘레노아의 사과가 굉장히 불합리하다고 느꼈고 왠지 모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째서…어째서 당신이, 공녀님이 사과를 하시는 거죠…?”
엘레노아는 숙인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에린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못한 사람이 아닌, 연관이 없는 엘레노아가 사과를 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잘못은 공작가문의 사람이 한 게 맞지만…. 공녀님이 하신 게 아니잖아요! 어째서 공녀님이…! 읏!”
꾹꾹 참았던 감정과 눈물로 눈가가 글썽거리려고 할 때, 에린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을 느꼈고 놀라 뒤로 바라본 순간, 은현이 고개를 흔드는것을 보고는 작게 신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은현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에린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엘레노아가 사과를 하고 자신에게 사죄를 하는 이유는 그녀 개인으로써, 공작가에서 태어난 여식으로써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작가의 이름을 짊어지고 대표하는 사과를 해야 하는 남자는 따로 있었다.
에린은 아마 그는 평생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서 사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공녀님에게 화를 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소매로 눈물을 닦는 에린을 보며 엘레노아는 쓰게 웃었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고마워.”
오히려 에린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당신의 배다른 오빠가 저지른 짓을 어째서 당신이 사과하는 것이냐고 말해주는 것에 엘레노아는 적잖게 위로를 받았다.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었던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
에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엘레노아의 언제 올지 모르는 권유를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엘레노아는 에린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헬레나 후비 곁으로 돌아왔다.
“저 아이군요.”
“네.”
“불쌍하기도 하지.”
엘레노아와 공작가에서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전말을 들었을 때는 유일하게 생존자가 된 에린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품었다.
은현의 뒷공작으로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에 의외라는 인상을 받았고, 기특하거나 강인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에린을 뒤에서 돌봐주고 있는 은현의의향이 궁금하기도 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지금 에린 헤르샤는헬레나의 머릿속에서 주의 깊은 관찰이 필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 ◆ ◆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어.”
“뭐, 그렇겠지.”
“저녁은 대강 만들어 뒀어. 에린한테 꼭 먹이고.”
“알았어.”
“훈련은 웬만하면 네가 봐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라고 지시할 필요는 없고, 그냥 정해진 훈련량을 다 끝내는지 안 끝내는지 감시만 해줘.”
“알았다고.”
“훈련 전이랑 끝난 뒤에 꼭 스트레칭으로 몸도 풀라고…….”
“아! 알았다고!”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리아나가 빽 소리 질렀다.
“딸 맡기고 출장이라도 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 좀!”
‘갈 때까지 잔소리네. 진짜.’라며 혀를 차는 일리아나를 보며 쓴웃음을 짓던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갔다 와. 다치지 말고.”
“넌 출장 가는 아들 배웅하는 엄마 같은데.”
“장난하니? 애엄마는 무슨, 적어도 애는…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 지르는 일리아나의 배웅을 받으며 은현은 집을 나왔다.
이후 공작가의 저택 근처에서 조용히 기다리자 엘레노아가 저택에서 나왔고, 은현은 장비를 착용하고 준비를 마친 상태로 나온 엘레노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흐음….”
“뭐, 뭔가요?”
“생각보다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고 생각해서요.”
실제로 엘레노아의 장비는 은색 빛으로 빛나는 경갑의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양손에 들려있는 고목으로 만들어진 스태프는 범상치 않은 양의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은현은 마냥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엘레노아의 자신감의 근거가 어느정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기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아무런 말없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은현의 시선에 엘레노아가 당황하며 물었지만 이어진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무시하지 말아요. 이래 뵈도 사제로서 원정도 다녀왔던 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모험가들 사이에서 ‘페르닌의 꽃’이라는 사제는 꽤나 유명하죠.”
“그,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말아요!”
엘레노아는 모험가 길드 안에서 불리는 자신의 별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파티의 회복과 유지력을 담당하는 후위직인 사제라는 직업은 수가 굉장히 귀한 직업이다.
보통은 사제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호국인 베스티아 신성국에 위치한 ‘베스타 신전’에 협조요청을 통한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사제 개인이 스스로 모험가 길드에 말을 들이미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제인 당사자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에 공작가문의 여식이라는 것은 모험가 길드 사이에서는 꽤나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있었다.
“공작께서도 딸을 참 강하게 키우신단 말이지. 아들 둘이라면 모를까 딸에게도 원정을 보내어 바깥세상을 경험하게 하시다니.”
과연 나라의 군사부문의 총책임자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무(武)’를 중시하는 공작가문 다운 교육방침이었다.
“아버지를 잘 아시나요?”
“아뇨. 모르는데요. 뵌 적도 어제가 세 번째였네요.”
“어떻게 알게 되신 건데요?”
“질문하는 분위기가 좀 꺼림직합니다만.”
“저희 가문의 비원인 ‘성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죠?”
“취조합니까?”
은현은 성문을 향해 함께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이것저것 캐묻는 엘레노아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둘 만이 있게 되자, 엘레노아는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해뒀던 은현에게 물어볼 질문들을 모두 물어볼 기세였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알려줄 수 있잖아요.아니요. 들어야겠어요. 그건 절대로 새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어떻게 당신이 우리 집안의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던 건지, 말해주세요.”
“그냥 추측이었습니다.”
“추측?”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 내에서 귀족들 사이의 뜨거운 관심사는 왕정파와 귀족파 사이에서 한창 1왕자와 2왕자 중, 누구를 왕세자로 옹립하느냐에 대한 경합이죠. 아르미타스 공작님이 지지하는 2왕자가 1왕자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요소가 뭐가 있을까 추측해본 겁니다.”
“…….”
“2왕자가 성검을 쥐게 된다면 적어도 명성과 명예는 물론이고 무력까지 얻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건, 2왕자가 쥐어야할 성검이 20년 전 아르케나 대전쟁에서 부러진 상태라는 것 아닌가요. 그 성검을 복원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헤르샤 준남작을 이용해 금화를 빼돌릴 계획을하고 있던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은현은 정곡을 찔렸다는 듯 잔뜩 굳은 표정을 지으며 걷고 있는 엘레노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 상상이 너무 지나쳤습니까?”
“애슈턴 오라버니가…사리사욕을 목적으로 금화를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공작가도 돈 많잖아요. 게다가 애슈턴, 그자도 자기 배를 불리려고 그런 짓을 벌였던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그자는 재물욕보다는 명예욕과 자존심,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완전 귀족중의 귀족 같은 이미지니까. 소공작으로서 현 공작가의 당주인 자기 아버지에게 칭찬 한 번 받겠다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어이없기도 하지만요.”
흔히 말하는 애정결핍 같은 사소한 문제였다.
그의 독단행동 하나로 일이 그 지경까지 꼬이고 많은 이들을 피해보게 만들었던 것이 매우 한심하기까지 했다.
엘레노아는 자신의 가문인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집안의 사정은 물론, 집안 구성원의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는 은현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정보들은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건가요?”
“으음, 그건 말이죠.”
은현은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엘레노아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몰라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영업 비밀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