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031. 구조요청(2)
“상태는 어떻죠?”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 여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지 않습니다. 다리가 아예아작이 났어요. 신성 마법으로 치료는 가능하겠지만 당장 전투를 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크윽…….”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빛 하나 없는 미궁 속에서 유일하게 주위를 밝게 비추어주는 횃불에 의지해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직접 보게 되자, 더욱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꺾여버린 종아리와 짓이겨진 발은 더 이상 남자가 걸을 수 없는 상태라는것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상태를 보며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상을 입은 남자에게 연신 사과하는 것 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메르딘, 정말 무모하게 이곳에 비밀리에 오는 게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저하. 제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남자의 위로를 받으면서도 그 위로를 받는 여자, 유리아 페르니아스 왕녀는 자신의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미궁 속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마수의 습격으로 유리아를 지키기 위해 그를 호위하고 있었던 근위기사가 몸을 던져 왕녀를 구해냈지만, 마수의 공격을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그의 다리가 마수의 공격에 직격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네 명이라는 소수전력으로 구성해온 파티에서 중요 전력 하나가 전투불능에 빠진 것은 파티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한 메르딘의상태를 살피는 궁사와 유리아 페르니아스, 이렇게 셋이 전투에서 빠져있다는 뜻은 파티을 습격한 위험천만한 마수를 딱 한명의 파티원이 붙들고 대처하고 있다는 뜻이다.
쿠우웅!
거대한 몸집을 가진 마수가 난동을 부리며 동굴의 벽에 부딪칠 때마다 미궁의 벽 전체가 흔들리고 굉음을 만들어냈다.
그 혼란 속에서 단 한사람만이 자신의 검을 쥐며 마수의 위협에 대항하고 있었다.
크오오오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마수의 위협적인 포효가 미궁의 안을 꽉 채웠다.
그런마수의 포효를 듣자 유리아도 움찔 몸을 떨고는 잔뜩 경직된 채로 마수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알렉스의 등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렉스가 대치하고 있는 마수는 입의 양 옆으로 커다란 엄니가 돌출되어 돌진할 때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뾰족한 엄니로 사람을 꿰뚫어버리거나, 압도적인 덩치로 부딪친 상대들을 분쇄시켜버린다는 살벌한 마수, 불보어(BullBoar)였다.
“선배! 큰일이에요! 저는 지금 당장 선배 쪽으로 가세해야할 것 같아요.”
던전 안에 들어온 왕녀 일행은 그녀를 포함한 총 네 명, 왕녀인 마법사와 궁사 하나, 검사 둘로 이루어진 파티으로 사제가 없다는 점만 뺀다면 어느 정도 밸런스가 잡힌 파티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소수 규모의 파티원 중 전위 한 사람이 빠진다는 것은 큰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마수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알렉스 혼자만이 저 강력한 마수와 맞서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아는 궁사가 부상당한 메르딘과 혼자서 불보어의 돌진을 피하며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알렉스 중, 누구를 우선순위에 둬야하는 가에 대한 계산을 마친 뒤에 한 행동이었다.
“미안해요…. 정말로…. 나 때문에….”
유리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자, 왕국 안에서도 실력이 좋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데려왔기 때문에 던전의 공략에서 차질을 빚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준비도 완벽했고 대비도 확실하게 해두었기에 그만큼 자신감이 넘쳤었다.
이 던전을 공략하고 유물을 손에 넣어 자신의 힘을 키우는 나중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자신의 파티을 덮친 저 정체불명의 마수의 등장은 유리아의 예상과 기대를 깨끗이 배신했다.
이런 위기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째서…이곳에 저런 게 있는 거야?’
자신이 알고 있던 이 미궁에서는 저런 마수는 등장하지 않았었다.
어째서 지금, 저런 마수가 이 미궁 안에 등장을 한 것일까.
안일했던 것일까.
물어봤자 누구도 답해줄리 없는 의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었고 마수의 위협을 맞서는 두 기사들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그래서? 유리아 왕녀님이 가출을 했다는 건가요?”
“부끄럽지만 그래요.”
3일 전, 갑작스럽게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녀, 유리아 페르니아스가 호위하는 기사 둘과 마법사를 데리고 왕궁을 나갔다.
누구에게도 행선지와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고 멋대로 벌인 일이기에 왕궁 내에서 그녀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인 헬레나 후비에게조차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는 건 은현으로서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지만.
“그래서 어째서 따님 분의 가출에 대한 문제 해결을 저에게 굳이 부탁하시는 이유가 뭐죠?”
“그 아이의 호위로 동행한 근위기사인 알렉스 경의전언도 이유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이 나라의 귀족들보다 그대를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왕국의 파벌 싸움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현재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져 나라 내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헬레나 후비와 아르미타스 공작을 중심으로 한 ‘귀족파’와 디아네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정파’의 귀족들.
사실상 디아네 왕비와 헬레나 후비의 두 아들 중, ‘누구를 왕세자로 옹립하느냐’에 대한 권력다툼으로 파벌이 점점 더 양극화되고 싸움의 규모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헬레나 후비의 딸인 유리아가 가출을 한 상황.
상대 쪽 왕정파의 귀족들이 이 정보를 알게 된다면 유리아에게 무슨 수작질을 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헬레나는 이렇게 은현을 찾아온 것이리라.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존재했지만.
“제 질문에 대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같은 파벌의 귀족이 아닌 저에게 이 부탁을 하신 거죠?”
“왕가의 신분은 높은 자리이기 때문에 많은 의무와 책임이 존재하죠. 단지 그 아이는 왕족으로서 그 의무와 책임을 수행할 생각이 아직 없는 철이 없는 아이라……”
“다른 나라나 왕국의 고위귀족과의 정략결혼 같은 걸로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딸을 이용하려 했던 건가요?”
은현은 흔한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갈등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귀족파벌의 귀족들은 이미 유리아에게 그럴 목적으로 접근하고 있었죠. 그 아이는 그것에 압박을 받고 있어서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가출로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군요.”
‘어떻게 되먹은 개연성이냐. 이게.’
은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어지는 헬레나의 말을 다시 경청했다.
“만약 이번 가출 사건이 알려지고 아무리 같은 파벌이라도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움을 주었던 걸 구실로 대가를 요구할 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뻔해요. 그래서 그대를 찾아온 거예요.”
자국의 가신들을 믿을 수가 없기에 전혀 연관이 없는 평민을 의지한다.
그 평민인 은현은 이미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전말을 해결한 수완, 엘레노아와 알렉스의 추천으로 어느정도 그의 실력과 가치를 인정한 상태였다.
“왕국의 중대사에 대한 일을 부탁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를 다시 궁으로 되돌려 보내주시면 그걸로 족해요. 그대의 목적과도 맞지 않나요?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헬레나의 지적은 올발랐다.
남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은현의 입장에서는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성격이 맞는 의뢰였으니까.
그 부탁의 난이도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서라도.
“귀찮네요.”
은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간을 좁혔다.
“공녀님, 알렉스님에게서 장소에 대한 단서나 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단서는 제 쪽에서 제공할 수 있습니다.”
엘레노아가 은현에게 이야기하고는 품에서 작은 도구 하나를 얇은 손으로 쥐고는 꺼내어 은현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추적용 아티팩트에요. 오라버니가 떠나기 전에 저에게 이걸 주고 가셨어요.”
“이미 어느 정도 준비는 해두고 있었군요.”
“네. 이 아티팩트는 사용자가 마력을 불어넣으면 그 사용자의 마력을 기억하고 멀리 떨어져있어도 기억된 마력의 주인이 있는 장소를 바늘이 가리켜요. 오라버니는 이 아티팩트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어 기억시키고 저에게 건 내면서 이 전언이 담긴 종이를 함께 건 내셨어요.아마….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도록…, 음?”
은현이 엘레노아의 손에 있던 추적용 아티팩트를 받으려고 한 순간, 엘레노아가 아티팩트를 쥔 손을 뒤로 빼고는 은현에게 아티팩트를 건 내는 것을 거부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은현이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안 되는데요.”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대답에 엘레노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단호한 은현의 대답을 들었지만 그녀 또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째서죠? 방해되지 않을게요.”
“방해되는데요.”
“읏…!”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표정을 보이며 얘기하자 엘레노아는 신음했다.
“지금 향하는 곳이 어디의 어느 곳인지어떤 위협이 있는지 공녀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그런 곳에 스스로 발을 들이미시겠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네요.”
“저도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은현과 엘레노아 사이의 언쟁에 헬레나가 끼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공작가의 영애가 위험을 자초하는 행동은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공녀는 특별해요.”
“특별하다고요?”
“공녀는 베스티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성 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사제입니다. 당신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공녀를 데려가신다면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라고 하더라도 혼자보다는 두 명이 낫지 않나요?”
은현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았으나 헬레나의 지원사격과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엘레노아의 고집을 꺾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면 마음이 편한데. 공녀님이 동행한다면 공녀님을 지키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하지 않습니까. 두 명이 되면 두 배로 귀찮아요.”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어요.”
“저는 걸리적거린다고 판단되면 버릴 것이고, 필요하다면 당신을 희생도 시킬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엘레노아는 즉답했다.
은현이 정의를 추구하거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선인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왕국의 귀족들보다 말과 술수로 암약하는 것에 더욱 뛰어난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정말로 필요하다면 매정하게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레노아는 막연히 은현이 자신을 버리거나 없앨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의 기지로 자신을 포함해 공작가의 모두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었고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다지만 흑마법사로부터 필사적으로자신을 지켜냈던 남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남자.
엘레노아는 이 순간부터 ‘은현’이라는 남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후우….”
굳은 그녀의 결심을 꺾지 못한 은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요청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알겠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은현의 승낙을 확인한 헬레나는 그제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보상 문제로 넘어가볼까요?”
“금전적인 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죠. 무엇을 원하나요?”
“딱히 지금 바로 생각나는것은 없네요.”
씨익 웃어 보이는 은현의 표정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레노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런 표정을 짓는 은현은 뒤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아이테르 학교에서, 공작가문 저택에서의 두 사건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빚으로 하나 달아두도록 하죠.”
“…….”
헬레나가 은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의 속내를 들춰보려했지만 은현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후비님이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을 할 생각이니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아요.”
“후우…. 좋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급한 건 제 쪽이니 어쩔 수 없군요.”
헬레나의 승낙이 떨어지자 은현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