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화 〉030. 구조요청(1) (30/730)



〈 30화 〉030. 구조요청(1)

“아~어깨랑 허리가 너무 편하다.”

일리아나는 기지개를 활짝 펴면서, 지금까지 결려있던 어깨와 허리의 쑤시는 감각이 아예 사라진 것에 상쾌함을 느꼈다.

“이거 매일 해주면  돼?”

“매일 해준다고 오늘 같은 기분을 느낄 리가 없잖아. 한 일주일에  번은 해줄게.”

“흐음.”

은현이 어젯밤에 몸을 만져주었던 마사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애초에 뭉치거나 결리지 않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앞으로는 자세의 교정도  신경 써.”

“하지만 이미 습관이 들어버렸는데?”

“그러니까 그 습관을 고쳐야지.”

이제는 서류 업무를 보면서, 몸을 의자 한쪽에 기울이거나, 다리를 꼬는 등의 자세는 지금부터라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잔소리만 늘어가지곤.”

은현의 말을 들은 일리아나는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리면서 도서관의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똑똑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일리아나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흐음, 들여보내.”

이제 곧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던 일리아나와 은현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온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이건 또 무슨 조합일까.”

“엘레노아 공녀? 그리고….”

이전 레니온 헤르샤 배임횡령 사건에서 크게 얽혀있던 공작가문의 여식이 사건이 마무리 되고 얼마 안 있어, 이렇게 메르비스 도서관을 찾아왔다는사실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은현은 또 한 사람을 응시했다.
엘레노아의 동행인은 고급스러운 원단의 재질이 돋보이는 로브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내 동행인에게로 시선이 몰리자, 동행인은 얼굴을 감추고 있던 후드를 젖혀 내리고, 자신의 모습을드러내었다.

“…좋은 용무로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이 여자가 여기에 왔다는  자체부터가 절대로 좋은 용건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공녀님. 약속을 어겼군요.”

“으….”

실망했다는  내뱉은 은현의 말에 엘레노아가 몸을 움찔떨었다.

“엘레노아를 탓하지 마세요. 제가 억지로 강행해서  거니까요.”

은현의 말에 몸을 움츠린 엘레노아를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선 또 다른 여성이 은현과 마주섰다.

“이렇게 실례하게 되서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마녀의 조수분…이라고 했나요?”

“그건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부르는 제 직업명 같은 겁니다. ‘은현’ 또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 후비 전하.”

“날 알고 있군요. 하지만 나는 그대를 모르니까 재차 소개하도록 하지요. 페르니아스 왕국 후비, 헬레나 페르니아스라고 해요.”

 왕국의 머리, 주인인 국왕의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페르니아스는 은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부디 그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공녀에게 부탁을 하여 찾아왔어요.”

은현은 헬레나 후비의 손을 바로 맞잡지 않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희 마녀님이 아니라, 저에게 부탁을 말인가요?”

이윽고미간을 좁히며 엘레노아 공녀에게 시선을 던지자, 엘레노아는 고개를 돌려 은현의 시선을 피하고는 변명을 입에 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없었다?”

“오라버니께서 남기신 전언이에요.”

엘레노아가 오라버니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애슈턴 또는 알렉스  인데.
 자존심만 강한 열등감 덩어리 소공작이 엘레노아에게 직접 전언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엘레노아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 은현에게 품속에서 알렉스의 말이 담긴 종이를 꺼내 은현에게 전했다.

- 3일 뒤,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장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이 종이에 적힌 ‘그 사람’이라는 게 어떻게 저라고 확신하나요?”

“사안이 사안이었어요. 문제가 생겼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당신이었어요. 오라버니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확신했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엘레노아를 보며 은현은 피식 웃었다.

“뭐가 웃기죠?”

“공녀께서도 어이가 없지 않나요? 이 나라에서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공작 가문이 도움을 요청받는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에 있다는 게,그것도 다른 귀족도 아니고 왕국 백성도 아닌 저한테 말이죠.”

‘나 같은 사람에게 사정을 밝히고 도움을 구하고 싶다고?’

은현은 굉장히 불합리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신분도 불명확하고 정체도, 목적도 잘 모른다.
왕국을 위협할 의도는 없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으로 간주하고 위협하기에는 도리어 자신들이 당할 수 있는 위험한 남자.
그것이엘레노아가본 은현에 대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엘레노아는 은현의 웃음이 섞인 조롱에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로…어쩔 수 없었어요…. 떠오르는 게 당신 밖에 없었다고요.”

“제가 직접 설명하도록 하죠.”

“안 합니다.”

“…….”

헬레나 후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덩달아 엘레노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그 어떤 누구도 이 땅의 주인인 왕국의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었다.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거절의 의사부터 내보이는 은현의 무례한 행동은 상대가 왕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즉결 처형에 가까운 죄목이었다.
하지만 현재 은현과 헬레나 후비가 있는 이 장소가 왕궁이 아니라는 점과 이 주택의 주인인 일리아나 마저도 은현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을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은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고 해서 헬레나 후비가 어찌할 수 있는 입장도 상황도 아니었다.

“이봐요! 아무리 저희가 무작정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의 후비님께 너무 무례한…!”

“무례한?”

일리아나가 엘레노아의 말을 끊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으.”

은현의 무례한 언사에엘레노아가 대경실색을 하며 그에게 소리쳤지만 은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왕비님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드릴까요?”

“…들어보죠.”

헬레나 후비의 얼굴은 분노한 기색이나 굴욕을 참는 얼굴이 아니었다.

“첫째, 저에게 주어지는 메리트가 없습니다. 제가 왕비님의 부탁을 해결해드렸다고 한들, 저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습니다.”

“뭘 원하죠? 재물이나 권력, 아니면 명예를 원한다면 제가 이뤄드릴 수 있어요.”

“저를 소개했고 이 자리에 동행한 공녀가 제가 아르미타스 공작가와 어떤거래를 했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헬레나는 은현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은현은 백금화 600닢이라는 거금을 공작가에 전달했다는 것은 이미 엘레노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헬레나는 이번에 은현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큰 지출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을 협상카드로 제시하려 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은현은 공작가에 백금화 600닢을 제시하면서도 요구한 부탁은 ‘에린에 대한 보호’ 뿐이었다.
대가에 비해 요구하는 것이 너무 초라했다.
오히려 은현이 공작가에 백금화 600닢을 주고 싶어서 굳이 구실을 만들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 말의 뜻은 ‘나한테 백금화 600닢 따위는 부담이 되는 금액도 아니다.’라는 의사표시였다.

‘이 남자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단순히 도움을 받으려는 대상, 능력있는 청년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대화를 해보면 해볼수록 의구심과 신비로움만이 쌓여만 갔다.

“둘째, 저는 왕국의 일에 제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전 헤르샤 준남작 사건도 버나드 후작님의 간곡한 부탁을 전달받아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지만, 제 이름이 거론되지 않도록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 시나리오까지 준비해가며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왕가에서 직접 도움을 요청하실 정도의 사안이라…. 좀 귀찮네요.”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협조하겠어요. 절대로 당신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도록…….”

“그 약속은 믿을 수가 없군요. 이미 왕비님이 저를 찾아오셨다는 것 자체가 제가 왕비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는이유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은현은 엘레노아를 바라보았고 엘레노아는 몸을 떨었다.
헬레나가 은현의 존재를 알고 그를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옆에 있는 엘레노아가 지난 번 있었던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전말을 모두 이야기했다는 뜻이 된다.
이미 한 번 깨져버린 신뢰와 약속의 위에 똑같은 약속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현에게 믿음을 줄  있을 거라고는 엘레노아도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다급한 나머지 곧장 은현을 떠올리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오느라, 이점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으….”

은현은 아브로스가 말한 대로 명예, 재물, 권력 등의 욕구와 거리가  남자였다.
그렇다고 생명을 중시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정의롭거나 선한 인물과도 거리가 멀었다.
은현이라는 남자가 도대체 무엇에 가치를 두고 행동을 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아브로스가 이전에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녀석.’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고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두뇌, 무력 등 귀족으로서의 권력을 제외하고는, 은현이라는 남자는 모든 부분이 완벽 했고 항상 자신들의 예상을 넘어오는 행보를 보였다.
만약 은현이 적으로 돌아서고 그의 적의가 공작가를 향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런 인물이 굳이 왕국에 속박되어 왕국에서 가장높은 인물  한 사람의 부탁이라고 해서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른 인물이었다면 출세와 보상에 눈이 멀거나 정의감에 취해 부탁을 받아들였을 텐데, 눈앞의 남자는 다르다.

‘이제는 정말로…오라버니…. 저는 어떻게 해야….’

“그렇기 때문에 저는이 시점에서 한 가지 조건을 걸고 싶습니다.”

“……?”

느닷없이 태세전환을 하는 은현의 행동에 헬레나 후비와 엘레노아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일리아나. 해도 되지?”

“마음대로 해.”

자신의 상사인 마녀에게 묻는 은현의 태도나, 은현의 행동에 전혀 간섭할 의사를 보이지 않으며 손을 내젓고 있는 일리아나의 모습은 명백히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영웅의 이름을 너무나도 친숙하게 부르는 그의 태도에서 헬레나와 엘레노아가  다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정신이쏠려있었기에 두 여자는  점에 대해서 자세한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

“후비 전하의 요청 들어드리죠. 단, 제가 왕가와 공녀님에게 원하는 보상은 좀 색다를 겁니다.”

[아이야. 어차피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었다면 처음엔 어째서 거절한 것이냐?]

‘원래 협상의 기본은 튕기면서 자기 몸값을 올리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하아,  들었던 생각이지만, 나는 아이가 어째서 이렇게 배배꼬인 귀찮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은현은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는 베르단디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왕가’의 사람이라는 헬레나의 신분으로 인해 이야기의 시작은 당연히 헬레나 쪽이 우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부러 무례한 행동과 언사를 통해 자신에게는 왕족으로서의 권위와 압력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엘레노아가 약속을 어김으로써 더 귀찮은 사건을 가지고 자신을찾아왔다는 것에 대한 화풀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 그럼 알렉스님이  짓을 하고 다니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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