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027. ‘엑스트라’는 ‘주인공’에게 ‘희망’을 제시한다(3)
“이게 다 뭐야…?”
에린은 은현을 따라 들어온 일반 주택의 지하의 내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햇빛이 한줌 들어오지 않는 내부를 천장에 설치된 마법등이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밀폐된 지하는 탁한 공기와 갑갑하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오히려 바깥보다 상쾌한 공기와 쾌적한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공간의 규모는 가히 아이테르의 훈련장과 맞먹을 정도.
수 백 명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시설을 개인이 사용할 목적으로 이렇게 깔끔하고 훌륭하게 정비해둔 것을 생각하면 도대체 돈이 얼마가 들어갔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널 훈련시킬 훈련장이야.”
“훈련장?”
“응. 앞으로 넌 이 주택에서 지내면서 삼시세끼를 먹고 모두 훈련에 시간을 쏟아 부을 거야.”
“…….”
에린은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길을 제시해주겠다면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엄청 힘들 거야. 배는 고프고, 춥고, 피곤하고, 몸이 엄청 아플 수도 있지.
즉 자신의 길 앞에 험난한 고생길이 열렸다는 소리.
하지만 밥도 주고 재워도 준다는데 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에린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는 ‘죽을 만큼 힘든 훈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첫날은 간단한 설명부터 해줄게. 앉아봐.”
“응.”
일단 에린은 은현이 자리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이야기를 하자 그를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너에게 가르칠 건 최종적으로 검술과 마법이야.”
“검술과 마법…? 보통은 하나만 가르치지 않아?”
“처음에는 검만 가르칠 생각이었어. 근데 마법도 그럭저럭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난 오빠가 마법에 재능이 없다고 그랬는데?”
메이거스에 입단한 평민 천재 마법사, 엘빈은 여동생인 에린이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아보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엘빈은 아이테르에 입학하면서 검이나 마법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민인 자신이 다른 귀족들보다 뛰어난 마법적 능력을 선보이게 되면서 궁정마법사단인 메이거스에 입단했지만 그가 받아온 것은 시기와 질투 뿐 이었다.
엘빈은 에린이 자신처럼 귀족들의 사회에 뛰어들면 분명 힘든 일을 겪을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랬겠지. 지금은 아니야.”
“으음…?”
에린은 은현의 애매모호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은현은 그런 에린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마법사들 사이에 ‘자릿수’라는 개념이 있는 건 알지?”
“자릿수?”
“아이테르에서 안 배웠어?”
“어, 그게…. 난 그냥 기초교양하고 예법하고 간단한 교육만 받은 거라….”
“아, 맞다. 너 성적 바닥이었지.”
“저, 정말로 학교에서 그런 거 안 가르쳐줬다고!”
가슴에 화살이라도 박혔는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고는 창피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알아. 알아.”
이미 마법사나 기사를 목표로 하는 귀족가의 자제들은 입학 전부터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나이가 되면 학교에 입학한다.
즉 정말로 에린과 다른 귀족 자제들 사이에는 스타트 지점부터가 큰 차이가 발생을 하는 것이다.
아예 쌩으로 몸만 입학한 에린에게는 마법에 대한 정말 기초적인 교육은커녕 제대로 된 수업의 진도도 따라가지 못했으리라.
은현은 이미 학교에서 그녀의 성적표를 확인해본 바가 있기 때문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다 이해한다는 표정…. 진짜 재수 없어.”
“‘자릿수’라는 건 ‘한 자릿수’부터 ‘열 자릿수’까지 10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이 등급은 페르니아스 왕국 뿐 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공통의 개념으로 자리가 잡혀 있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고 있네!”
에린은 은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였지만, 은현은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한 자릿수부터 네 자릿수까지를 ‘일반 자릿수 마법사’, 다섯 자릿수부터 여섯 자릿수를 ‘상위 자릿수 마법사’, 일곱 자릿수부터 열 자릿수까지를 ‘고위 자릿수 마법사’라고 해. 자릿수의 범위가 4, 2, 4의 범위로 구간이 나뉘어 있는 이유는 한 자릿수부터 네 자릿수의 범위에 속하는 마법사의 숫자가 가장 많기 때문이야. 상위 자릿수 마법사의 범위가 두 구간 밖에 안 되는 이유는 네 자릿수부터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마법사가 극히 적기 때문이지.”
“사람 수 차이가 그렇게 많이나?”
“대체로 상위 자릿수마법사의 숫자가 대륙 전체의 마법사의 숫자의 10% 밖에 안 되지. 고위 자릿수 마법사는 전 대륙에서 10명밖에 없고.”
“…이 집이 그럼 세상에 10명밖에 안 계시는 고위마법사 님의 집이라는 거야?”
“많은 마법사들이 일반 자릿수에서 상위 자릿수로올라가는 것은 ‘재능의 영역’이 필요하다고 하고 상위 자릿수에서 고위 자릿수로 올라가는 것은 ‘깨달음의 영역’이라고 칭하지.”
“또 말 돌리고 있네!”
“이 왕국, 페르니아스에는 그 고위 자릿수 마법사가 두 명 있어. 한 명은 이 집주인이고, 다른 한 명은 네 오빠가몸을 담았던 ‘메이거스’의 마법사단장, 사이먼 마기우스지.”
“우리 오빠, 엄청 대단한 곳에 있었구나….”
에린은 새삼 엘빈이 얼마나 대단한 오빠였는지를 재인식하고 있었다.
“그 사이먼 마기우스, 그 양반하고 우리 마녀님하고싸우면 우리 마녀님이 무조건 이겨.”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
에린은 어이없다는 듯 일리아나의 자랑을 늘어놓는 은현에게 소리쳤다.
일곱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이며, 60이라는 나이 대에 접어든 노년의 관록으로 모든 궁정마법사들을 통솔하는 사이먼조차도, 일리아나와의 마법전에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한수 접고 가르침을 청했다는 일화는 왕국 내에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은현은 일리아나의 자랑을 늘어놓으며 즐거운 듯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누가 키웠는데.’
내심 뿌듯한 감정을 지울 수 없던 은현은 자기 자식의 자랑을 늘어놓는 엄마마냥 에린에게 많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에린은 중간부터 뭔가 내용이 산으로 간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걸 계속 듣고 있어야하나 심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높은 자릿수를 목표로 마법을 배우라는 얘기가 아니야. 그냥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을 만한 마법들만 익혀도 충분해. 어디까지나 검술이 메인이고 마법은 그걸 보조한다는 마인드로. 알았지.”
“응.”
에린은 재능이 없는 자신이 마법을 어디까지 배울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일단은 은현을 믿고 따라가기로 한 이상 불만이나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럼 앞으로 검술을 가르쳐주는 거야?”
“검술보다는 일단 몸을 만들어야지.”
“몸?”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린의 행동에 은현은 허공에 손을 뻗더니 갑작스레 검 하나를 만들어냈다.
에린은 그 광경이자못 신기했으나, 구태여 은현에게 그 비밀을 묻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이상한 비밀이 많은 남자였다.
이제는 의심하는 것도 지쳐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은현은 권능으로 소환한 검의 손잡이를 에린에게 내밀었다.
“쥐어봐.”
“응. 어엇!”
손잡이에서 은현이 손을 떼자마자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일단은 그걸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근력을 키우고, 체력도 키워야겠지?”
설마.
“일단 간단하게 운동부터 시작하자.”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은현의 말에 에린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린은 일리아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저녁이 돼서는 은현의 중재를 통해서 집주인인 일리아나와 인사를 나눴다.
연인의 집에 눌러 앉아 살고 있는 주제에 뜬금없이 어린애 하나를 데려와서는 멋대로 밥을 먹이고 재워주겠다고 집주인에게 통보하는 꼴이 매우 우스웠지만, 일리아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던 일리아나는 ‘흐응.’하는 비음을 내며 에린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내일부터 은현에게 훈련을 받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얘한테훈련을…. 열심히 해봐.”
뭔가 동정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아나의 눈치를 본 에린은 어째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더더욱 불안해졌다.
다음 날.
길이 120m, 폭 90m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훈련장을 빙빙 돌며, 에린은 뛰고 있었다.
은현이 제시해준 과제는 1km라는 거리를 쉬지 않고 뛰는 것, 횟수는 5번이며 1회당 8분이라는 시간제한을 걸었다.
1km를 완주할 때마다 10분씩 휴식시간을 주었고, 쉴 때마다 지속적으로 물을 마시며 수분을 보급했다.
운동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던 에린에게는 첫 바퀴부터가 난관이었으나 어찌어찌 힘겹게 완주를 하며 첫 바퀴를 끝내자마자 바닥에 풀썩 드러누웠다.
“자, 물.”
목의 갈증이 너무 심했던 에린은 은현이 건 낸 물병을 벌컥벌컥 마시며 수분을 보충했고 그제 서야 숨을 크게 내쉬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10분 뒤, 두 번째 바퀴 간다.”
“…….”
에린은 어쩔 수 없이 은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은현이 8분 안에 1km를 완주하지 못했을 경우, 한 바퀴를 더 돌아야한다는 악질적인 조건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이 지옥 같은 달리기를 더 하기 싫었던 에린은 죽기 살기로 남은 네 바퀴를 모두 뛰었다.
도대체 이렇게 죽기 살기로 달리기만 시키고 도대체 너는 뭐하냐고 은현에게 따지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헥헥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자시는 과는 달리 담담한 표정으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을 쫓아오는 은현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불평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져 버렸다.
죽을 것 만 같았던 달리기가 끝나자, 에린의 뱃속에서 거창한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움직일 기력도 없어….”
바닥과 일체화가 된 에린은 공복의 신호를 울리는 복부의 호소에도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은현은 그렇게 흐물흐물 늘어진 에린을 안아 들고는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부엌에 도착하자마자 향긋한 냄새가 에린의 코를 간질거리고 있었다.
“이건….”
은현에게 안긴 채로 정신까지 놓으며 멍하니 있던 에린은 자신의 코를 타고 넘어오는 음식의 냄새에 조금씩 에린의 식욕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은현이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혀주자 에린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는 못 참겠다는 듯 포크를 집어 들었다.
“먹어도 돼?”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 아까 전까지 다 죽어가는 슬라임 같은 면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한 차이에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신난다는 듯 에린은 은현이 차려준 식탁의 음식들을 먹었다.
“천천히 먹어. 그렇게 먹고 다시 운동하면 체해.”
에린은 한 창 음식을 먹다가 그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설마, 또 뛰어…?”
“아니, 안 뛰어.”
“그…럼?”
드디어 쉬는 건가?!
“다른 거 할 거거든.”
활짝 미소 짓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 에린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운동 가셔야합니다. 회원님.”
에린은 인상을 찡그리며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은현을 째려보았다.
[아이야.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보는 내가 다 안쓰러워지는 구나….]
‘절대 안 됩니다.’
은현은 여신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걱정 마요. 안 죽으니까.’
[후우….]
베르단디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미죽은 눈으로 빵과 스프를 입에 넣고 있는 에린을 보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현의 주도로 다듬어진 앞길의 첫 시작은 지옥의 PT훈련이었다.
점심을 먹고 약 1시간 정도 소화의 시간을 가진 뒤, 은현은 축 늘어진 에린의 몸을 어깨에 들쳐 업고는 다시 지하 훈련장으로 왔다.
“이건 뭐야?”
“덤벨이란 거야.”
쇠막대의 양쪽 끝에 쇳덩이가 붙어있는 기이한 형태의 물건을 보며 에린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양손에 하나씩 들어.”
“으….”
처음 은현이 줬던 검보다는 가벼웠지만 이것도 근육이 아예 없다시피 한 연약한 소녀였던 에린에게는 조금 버거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은현이 에린의 양손을 붙잡자 에린이 놀라 몸을 떨었다.
“도와줄게. 내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힘주고 천천히 들어올려.”
“끄으으으으응!”
이를 악물고 에린은 은현의 도움을 받아 덤벨을 쥔 양팔을 옆으로 들어올렸다.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리는 게 차라리 낫지, 천천히 힘을 유지하며 덤벨을 들어올리는 게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니었다.
“이렇게 열 번.”
“열 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총 3세트.”
“…….”
에린은 확신했다.
“넌 진짜로 악마야!”
“이 분야 한정으로 그 말은 칭찬이나 다름이 없는데.”
평소 같았으면 굉장히 모욕스러운 말이었지만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는 에린을 보고 있자니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