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023. 여신과의 재회(1)
“여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와 있는 새하얀 공간.
먼 옛날 이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오래된 기시감을 느끼며 은현은 긴장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딱 하나의 가능성.
“설마….”
은현은 설마 싶은 생각과 함께 주위를 돌아보았다.
뒤돌아서자 눈에 보이는 세 개의 옥좌와 중앙의 옥좌에 앉아있는 한 여성들을 보고서야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
그리움과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던 은현은 그녀를 부르려 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을 또 다시 부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부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큰 성과를 거둔 부하 직원을 칭찬할 때, 두 번째는 부하 직원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길 때, 마지막 세 번째는 큰 실수를 저지른 부하 직원을 혼낼 때.
‘설마 세 번째는 아니겠지…? 아니 첫 번째나 두 번째였으면 내가 죽고 되살아났을 때 부르지 않았을까? 헤르샤 준남작 사건이 끝난 이 타이밍에 나를 불렀다는 건…혹시 나 뭔가 잘 못했나, 정말로?’
[후후,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단다.]
“예?”
은현은 머릿속을 울리는 여신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은현을 화사한 금발을 가진 여신이 자애로운 미소로 맞이해주고 있었다.
“여, 여신님….”
근 400년 만의 재회였기에 은현은 이 재회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때는 괴로워서 울부짖으며 여신을 찾기도 했고,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갈 때마다 혼자가 되어 여신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리워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여신들은 그때마다 은현에게 답을 해주지는 않았던 것에 서운함을 느꼈을지언정 은현은 한 번도 그녀들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막상 그녀들의 앞에 서게 되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입에 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가까이 오너라.]
은현은베르단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긴 계단을 올라 베르단디의 옥좌 앞에 서자 베르단디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양팔로 은현을 껴안았다.
“어…엇….”
베르단디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몸을 잔뜩 경직시켰다.
여신의 포옹이라니, 도저히 진정시킬 수 있을 만한 그런 게 아니다.
[고생했구나.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아….”
은현은 학교에서 상을 타온 아들을 칭찬해주는 듯 등을 토닥여주는 베르단디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 속 깊이 충족되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은현의 400년간의 고행을 모두 알고 있는 베르단디의 말이었기에 더욱 기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씀 하나면 충분합니다.”
은현은 쓰게 웃으며 여신에게 답했다.
“헌데 여신님, 이번엔 혼자 오신 것입니까? 처음 뵈었을 때의 다른 두 여신님이 보이지 않으신데요.”
[아이는…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예?”
[내가 아이를 이렇게 맞이하러 왔는데 어째서 다른 자매들을 찾는 것이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 묘하게 서운해 하는 말투와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단디.
그녀의 표정을 본 은현은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게 아니라요…. 저는 다른 두 분께도 권능을 부여받았으니까요. 다시 뵙게 된다면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인 것이냐?]
“그럼요.”
은현은 아직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는 베르단디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그 얼굴을 봐서 지금은 믿어주도록 하겠다.]
베르단디는 한심한 아들을 바라보듯이 은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현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만나 뵙게 된다면 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은현은 이내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렇겠지.]
베르단디도 진지해진 은현의 표정을 보고는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덤 속에서 되살아났던 건 역시 여신님의 은혜였나요?”
[그렇다.]
“어째서죠?”
[어째서라니?]
“어째서 저를 되살리신 거죠?”
[…그게 꼭 이유가 필요한 것이냐?]
“그런 건 아니지만….”
베르단디는 은현이 아직도 자신이 되살아난 것에 기뻐하기보다, 어째서 자신이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그렇게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예? 그게 무슨….”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너를 멋대로 이곳에 데려오고, 억지로 사명을 부여하여 우리의 숙원을 위해서만 움직였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
은현은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면목이 없다는 듯 설명하는 베르단디를 보고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크게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신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이미 다 보셨다면 알고계시잖습니까. 저는 죽으면서 여신님과 다른 여신님들을 원망하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족하는 최후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만족하였다하더라도, 내가 싫다.]
“막무가내시네요.”
은현은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을 부정당하는 심경이 복잡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베르단디가 그만큼 자신의 사도인 은현을 아끼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아이의 사명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이전보다는 조금 저 제약이 풀릴 것이다.]
“제약이요?”
[그렇다. 이전에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고 ‘엑스트라’로서 ‘영웅’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명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말씀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크게 상관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완전히 제약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이의 고행을 지켜봤던 신들은 아이에게 협조적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이의 개인행동 정도는 봐주기로 했단다.]
“그…렇군요.”
꽤나 파격적인 조건이다.
마치 이번 건수로 큰 실적을 올려 사내에서 인정받은 사원이 된 기분이다.
은현 덕에, 베르단디도 다른 여신들에게 어깨를 피고 다니기라도 하는 것일까.
설명을 해주는 베르단디의 표정도 의기양양했기 때문에 은현은 웃음이 나왔다.
[뭐가 웃긴 것이냐?]
“웃고 계신 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뭣…! 크흠! 여신을 놀리면 못쓴다.]
당황하던 베르단디는 가볍게 은현을 나무라고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아이와 영웅들이 악마소환을 막아준 덕분에 확정되었던 ‘하계의 멸망’이라는 운명은 개척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지.]
“다른미래가 생겨버린 거군요.”
간단히 예상한 은현의 추측에 베르단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아이가 개척된 운명에서는 또 다시 새로운 운명들이 생겨났고 거기에는 이번 위협과 같은 위험한 운명들도 포함이 되어있다. 사실 아이를 되살리자고 했던 것은 나의 욕심이기도 했지만, 다른 신들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한 번 성공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아무런 연고도, 재능도 없던 인간이 단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다는 이유로 사도로 선택되었고, ‘인류의 멸망’이라는확정된 운명을 비틀었다.
한 번도 없었던 노른의 세 여신의 시도에 많은 신들이 불가능하다며 비웃었지만.
세 여신들의 선택을 받은 은현은 다른 신들의 예상을 벗어나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
그들에게도 ‘은현’이라는 존재는 ‘하계의 멸망’이라는 난제에 대처하기 위한 조커카드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마치 실험쥐 같은 취급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되살리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은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새로운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면 어째서 자신을 되살렸는지,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 은현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신들도 아이의 경우를 본받아 가능성이 보이는 인간들을 사도로 맞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건….”
은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인간들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보다 압도적인 힘, 능력을 부여받아 부족하지 않은 생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은현에게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명을 다해 하늘로 올라가는 동료들을 맞이하는 순간 찾아오는 외로움과 씁쓸함이었다.
[아이야. 내가 아이에게 내려준 권능은 나만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이란다. 다른 신들이 자신의사도에게 내릴 수 있는 권능은 각 신들의 능력에 제한된다. 모든 신들이 나처럼 사도들을 ‘불멸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모든 사도들의 권능이 다 똑같지 않다는 뜻.
“그렇군요. 헌데 그 말씀은….”
[그렇지. 만약 만나게 된다면, 가능하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다른 신들이 말하더구나.]
“그렇군요….”
학부모들의 ‘우리 애 좀 잘 부탁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은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한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여신님의 인도였나요?”
은현은 이번에 자신이 구한 에린의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있었구나. 너무도 가여운 아이였지. 운명도 가혹하지. 어찌 어린 아이에게….]
베르단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운명의 세 여신들은 생명이 태어나면서 그 생명의 운명을 점지하지만 그 운명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신들은 스스로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은현을 사도로 선택했고.
자질을 가졌으나 좋지 못한 운명을 타고난 생명들을 은현에게로 이끌어 구원하도록 유도했다.
리오드와 일리아나를 비롯한 은현의 많은 동료들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이번에 은현의 도움을 받은 에린 또한 마찬가지.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현은 고개를 숙이고 베르단디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이번에는 제 쪽에서 보고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마녀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냐?]
“알고 계셨나요?”
[말했지 않느냐. 간섭할 수는 없었어도, 아이의 모든 행동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이내 잠시 말하기를 망설이더니, 얼굴을 붉히는 베르단디의 표정을 보고, 은현이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전부 다 보고 계셨나요?”
[…….]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며 은현에게서 시선을 피한 베르단디는 은현의 추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