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화 〉022. 깨어난 소녀 (22/730)



〈 22화 〉022. 깨어난 소녀

 분 동안 은현의 품안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에린은 가슴 속에 있는 서러운 감정을  쏟아내자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왜 그래?”

에린은 얼굴을 붉히며 은현과 시선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자신의 행동이 매우 어이없고 창피한 일이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다른 남자 품에 안겨서 그렇게 서럽게 울다니…으으!’

은현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에린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너한테 전해 줄 게 있어.”

“전해 줄 거?”

에린은 은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품안에서 편지  장을 꺼냈고 그 편지에 적힌 글씨체와 내용을 보고 누가 이 편지를 작성한 건지 알아보았다.

“이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거는 네가 무사히 깨어났다는 뜻이겠지.
나는 너를 생각하며 이 편지를 쓰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됐어.
너는 이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힘들 때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하고 가족으로서
너를 지키지 못해준 것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저지른 모든 행동들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행동해 왔어.
어쩌면 그건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의 압박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 자신의 합리화와 욕심을 보기 좋게 포장한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 동안 내 마법에 잠식당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는 하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내가 했던 짓의 결과를 마주했을 때 가슴속에 가득 차올랐던 후회 속에서도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다음 아닌 너의 미래였어.
앞으로는 어머니도, 나도 없는  세상 속에서 네가 홀로 서야하는 앞날에 내가 저지른 죄들로 네가 더욱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과연 네가  길을 버티며 걸어갈  있을까.
하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나는 조금은 걱정을 덜  있었어.
혹시라도 정말 힘들고 앞길이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포기하고 싶을 때,
 편지를 너에게 전해 준 남자에게 의지하렴.
그 남자는 나에게는 너를 찾기 위한 단 하나의 실낱같은 희망이나 다름없었어.
적어도 험난하고 외로운 너의 싸움의 시작점에서 네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자야.
네가 의지할 수 있는 남자는 내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너에게 폐만 끼치고
이렇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한심한 녀석 밖에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같아.
하지만 너는 다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부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비록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없지만, 너의 삶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을게. 너의오빠, 엘빈이.」

편지를 쥐고 있던 에린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고손에 쥐어진 편지가 구겨지며 떨렸다.
편지지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스며들어 편지지가 번지고 있었다.
터질  같은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구겨진 편지를 꽉 쥐며 질끈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는…. 정말 죽은 거야?”

“죽었어. 내가 죽였지.”

“…….”

담담하게 사실을 고백하는 은현을 에린이 노려보았다.

“잔인한 사실이지만 너는 알아야할 사실이니까.”

“약속, 지켜준다고 했잖아….”

은현이 유령이었을 때의 에린과 신목의 아래에서 맺었던 약속은 엘빈을 무사히 찾아내고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알아. 약속도 지킬 거야.”

“그게 무슨…말이야? 오빠는 죽었다며.”

“그 상태의 엘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도 못한 괴물 밖에 안됐어. 이미 손  수 없는 지경이었지. 그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에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에게 엘빈이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그림자를 조종하는 꺼림직한 마법을 사용하는  같다고 알려준 장본인이 에린이었다.

“그대로 뒀으면 정말로 이성을 잃고 그림자에 잠식당해서 마수보다  끔찍한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죽였어. 엘빈도 그걸 바랬고.”

“그러니까 죽이는 게 오히려 오빠를 구해주는 거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설마. 인간의 몸으로는 그 흑마법의 후유증인 그림자의 제어가 불가능하니까  제약을 없애버린 거야. 죽었지만 아직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제대로 남아있어.”

“그게 무슨…아!”

에린은 은현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한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에린 자신이 한동안 육체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영혼만 존재하는 상태로 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다시 만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그렇구나. 고마워…. 정말…정말로 고마워….”

에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몇이고 은현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일단은 이제부턴 내가 네 보호자가 될 거야. 일단은 내일부터는 학교도 다시 가야겠지. 아마 널 둘러싼 많은 환경이 너한테 불리하게 작용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네가 성인이 때까지는 널 혼자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 동안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해봐.”

“해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에린은 은현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더니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 은현에게 물어보았다.
이 남자는 어째서 자신과 오빠를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려는 것일까.

“저기, 넌 왜 나랑 오빠한테 이렇게까지….”

똑똑

에린이 은현에게 질문을 하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고 약간의 텀을 둔 뒤 한 소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은현님! 큰일 났어요!”

“나가봐야할 것 같네.”

은현은 소란스럽게 들어오는 에이라의 말을 들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에린을 보며 물었다.

“몸은 괜찮지?”

“어? 아, 응.”

“그럼 나가자.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생긴  같으니까. 밥 먹고 싶다.”

“아,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은현의 말에 에린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시작해서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할 겸,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현과 에이라의 뒤를 따랐다.
방문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도 저택의 내부를 보며 에린은 속으로 감탄과 긴장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는 설마….’

고급스러운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에린은 자신의 앞을 걷고 있는 에이라를 몰래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이테르 왕립 학교 안에서 유명한 자신의 선배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 내에서는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가진 올리비온 후작가의 장녀인 에이라 올리비온은 이미 학교의 전교생이 다 아는 유명 인사다.
졸업 이후 바로 아버지를 따라 기사단에 입단할예정이라는 소문은 귀족가의 소문에 대해 어두운 편인 에린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그러면 여기는 올리비온 후작 저택이란 말이야?!’

속으로 경악한 에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은현과 에이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와아….”

호화로운 대저택의 내부에 처음 들어와 본 에린은 감탄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말이라고 하는 거지 도대체 뭐로 들리는 거지?”

‘응…?’

에린은 은현과 에이라가 멈춰선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벌써 내용을 짐작한 은현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고안으로 들어갔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니가 결혼하고 저런 예쁜 부인과 아이 둘을 끼고 살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나보다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야. 고지식한데다가 곰과 사자를 섞어놓은  같은  면상을 좋아해주고 성심성의껏 내조해준  여자가 대단한 거라고. 어디서 자기가 잘난  마냥 유세를 떨고 나한테 조언을 해?”

“어이가 없군.  나이가 넘도록 아직도 결혼을 못한 여자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같은데. 훌륭한 배우자를 맞이하는 것 또한 자신의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너는 한참 글렀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뭐? 이 머릿속도 쇠로 되어 있는 무식한 자식이!”

“어이가 없군. 귀찮아서 코앞의 거리도 마차를 불러서 이동하는 귀차니즘 노처녀가.”

“너 진짜 해보자는거야?”

“못할 것도 없지.”

서로의 눈싸움이 이내 서로의 몸에서 발산되는 마력의 충돌로 테이블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식사들이 드르르 떨리고 있었다.
은현은 입을 열어 두 사람의 다툼을 말렸다.

“뭐 하는 거야.  다…. 밥 먹는 자리에서  싸워?”

“이 자식이 나보고 노처녀라잖아!”

“이 녀석이 나보고 쇳덩어리 뇌라고 했다.”

은현이 한심하다는  둘에게 핀잔을 주자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은현에게 따졌다.
은현은 이미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흥분한 상태인 일리아나를 보며 그녀가 이미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간 상태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도 뭐라 말했는데 얘가 이렇게 잔뜩 흥분을 했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리오드를 살짝 째려보자 리오드는 은근 슬쩍 은현의 시선을 회피했다.

“현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

“내가 아직도 어디에 하자가 있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어서 생각하는 거야? 미리 말하지만  결혼을 못하는  아니라 안하고 있는 거야! 어떤 개자식이 날 두고 멋대로 죽어버려 가지고!”

“아니, 그게 무슨…?”

뜬금없이 일리아나의 화살이 자신으로 날아온 것에 은현은 당황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할지 몰라 말을 어눌하게 흐리며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잔뜩 분개한 그녀의 반응을 보고, 은현은 리오드가 일리아나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건지 깨달았다.

“야, 리오드 너 설마….”

“흥.  녀석이 나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

“이 개자식이, 진짜!”

“자자, 즐겁게 밥을 먹으려고 모인 자리잖아. 우리 밥이나 먹자.”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리오드는 코웃음을 치며 뒤로 빠졌고 이내 아내인 테레지아의 옆에 서서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

“아뇨. 그렇지는……. 단지 검은 마녀라는 대마법사의 인상은 너무 예상외라 당혹스럽네요.”

테레지아는 정말로 예상외의 상황을 본 것에 대해서 뭐라 설명할  없는 이상한 감상을 품었다.
대륙에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 자신의 남편의 친구이며, 남편인 리오드와 함께 대전쟁을 종식시킨 대영웅 중 한명인 그녀의 무용담은 많은 음유시인과 역사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테레지아는 일리아나가 매우 지적이고 위대한 마법사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리 리오드에게 질문을 해봤지만전혀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인상을 찌푸리며대답을 했지만.
실물로 직접 보고 나니 테레지아는 역시 역사서에 기록된 이야기나 사람들의 입담에 오르내리며 구전되는 이야기는 믿을게 못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저에게 고민의 상담을 하셨던 것도,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지요.”

“…일리아나가 너에게 고민의 상담을?”

“후후, 여자들만의 비밀이야기랍니다. 그것보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네요?”

테레지아는 미소지으며 리오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보이나?”

“평소보다 좀 들떠 보이시니까요. 그만큼  은현이라는 분이 당신을 찾아온 것이 기뻐보이세요.”

오랜 시간을 리오드와 함께 해온 테레지아이기에 무뚝뚝하면서도 그의 표정의 변화를 알아챌  있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나 일리아나나, 다른 녀석들도 모두, 저 녀석에게 빚을 지우고 그렇게 떠나버린 녀석이었다.”

그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 표정을 바라본 테레지아는 다시 시선을 옮겨 일리아나를 필사적으로 달래고 있는 은백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전쟁이 끝나고, 언제나 남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을 이끌었던 영웅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한심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이 지금의 평화 속에서 만들어진 일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군.”

20년 전의 은현은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리오드를 비롯한 팀원들을 이끌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었다.
마치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경주마처럼, 은현은 어떤 목표에 대해서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되살아나면서 그 집착이 사라짐과 동시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방황하는 듯하면서, 지금의 생활을 명백히 즐기고 있다.
리오드는 은현의 그런 변화가 나쁘지 않은 징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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