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021. 아르미타스 공작가문(3)
“읏…!”
애슈턴은 자신을 향해 터뜨리는 아버지의 노성에 몸을 떨었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잔뜩 붉힌 얼굴과 정말로 한심하다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브로스가 정말로 애슈턴에게 이번 일로 실망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좋다. 이번 사건에서 그 아이의 처벌은 묻지 않도록 하지. 그 자리에 버나드 또한 있었다고 하던데 보나마나 그 자에게도 손을 써둔 거겠지?”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흥. 됐다. 이제 용건은 끝난 거겠지? 그렇다면 어서 사라져라. 네놈과 대화를 섞는 것만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군.”
“여전히 저에 대해서 평가가 가차가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은현은 쓰게 웃고는 들어왔던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자리를 떠났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있는 아브로스의 침실을 두리번거리며 엘레노아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알렉스가 은현에 대해서 궁금해져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절대로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는 녀석.”
아브로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은현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아버지는 그 남자를 알고 있습니까? 아까 전 그 남자의 마력은 절대로 평범한 남자가 내뿜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그가 말한 대로 일개 평민이 아니에요. 어째서 그 같은 인물이 왕국에 있는데 지금껏 아무도 몰랐던 거죠?”
알렉스는 처음 엘테르의 정원 소망의 나무 앞에서 자신을 일리아나의 조수라고 소개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를 데리고 있는 검은 마녀가 그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가요?”
아르케나 대륙의 전체를 뒤져봐도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들 중 하나.
페르니아스 왕국의 기사 리오드 올리비온과 함께 대전쟁의 막에 종지부를 찍은 대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로 대륙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
“하, 그거야 말로 연막이지.”
“네?”
“그 검은 마녀를 앞에 내세워두고 뒤에 숨어 있는 녀석이다. 뱀 같은 자식이야.”
“아버지도 그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뭐?”
애슈턴은 아직도 불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브로스의 반문에 다시 이야기했다.
“그가 이렇게 우리 집안을 조롱하고 농락한 것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좋지않으신 거지 않습니까! 어서 그자의 약점을 찾아내서 반격을….”
“…….”
아브로스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첫째인 애슈턴을 노려보았고 더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못난 놈, 어째서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냐.”
정말로 지금껏 자신의 교육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자신이 받았던 모욕과 수치스러운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분풀이를 하고 있는 한심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아.”
“네.”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엘레노아는 한참을 고민하고는 아브로스의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서 그대로이야기 했다.
“…이런 방식을 취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니가 뭘 안다고…!”
“흐음. 계속해라.”
애슈턴이 분개하며 엘레노아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아브로스는턱을 쓰다듬으며 엘레노아의 발언을 생각하고는 엘레노아의 발언을 허가했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애슈턴의 노성에 인상을 찡그렸던 엘레노아는 아브로스의 발언 허가가 떨어지자 재차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무력도 왕국 기사단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고 머리 또한 좋아요.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 자신을 앞으로 내세워 행동하지 않죠. 항상 뒤에서 상황을 만들고 함정을 파 상대를 농락하고는 상대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만을 제시하죠.”
엘레노아는 은현이 학교장과 마법학 교수들의 무능함과 페르니아스의 신목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엘빈의 신병의 인도를 자신이 인도 받을 수 있도록 협박했던 것을 떠올렸다.
“원인과 과정이 어찌됐든 헤르샤 남매나 그 남자의 입장에서 저희 가문은 저지른 비리를 덮으려는 부패한 귀족입니다. 사실상 이 사실을 모두 왕가에 고발해서 우리 가문 전체가 처벌 받도록 만드는 방법이 더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어요. 그런데 그 남자는 그러지 않았죠.”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왜 우리 가문을 살려준 것일까.
오히려 거래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양의 금화를 쥐어주기까지 했다.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성검’에 대한 비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것일까?
왕가를 제외하곤 극히 일부 밖에 몰랐던 페르니아스의 신목이라는 나무와 아이테르라는 학교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일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인지.
엘레노아는 아무런 가능성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두렵다.
“상대의 의도와 역량이 보이는 적은 대비라도 할 수 있지만 의도도 보이지 않고, 역량도 가늠이 되지 않는사람을 상대로는…어떻게 싸워야할지 모르겠어요.”
“맞다. 너무나 기분 나쁜 놈이지. 모두가 그 놈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보잘 것 없는 평민이라고, 그저 마녀의 옆에 붙어서 떨어지는 꿀이나 받아먹는 무능이라고 평가하지.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그건 바로 그놈이 일부러 자신을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했을 뿐이야. 애슈턴, 너처럼.”
“크으….”
“그 놈은 그렇게 상대가 자신을 깔보고, 비하하고, 업신여길수록 더욱 좋아한다. 그건 자신이 심어준 인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뜻이며, 자신의 생각이 상대에게 읽히고 있지 않다는 증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그 놈이 만든 판에서 놀아나다가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맞게 되는 거다.”
은현의 이 사고방식은 여신들에게서 사도로 임명을 받았을 때 받았던 역할이 ‘엑스트라’라는 것이 그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연’에 불과한 자신은 항상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니며 ‘주인공’들을 돋보이도록 만드는 역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에게 진짜 리더라고 인정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은현은 항상 타인의 앞에 나서서 모두를 이끄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은현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아브로스는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릴 뿐이었다.
“업신여겨질수록 좋아한다니…그건 좀 변태 같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엘레노아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방식을 좋아해서 하고 있던 것도 아닌 은현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가능하면 그 남자와는 엮이지 말도록 해라. 우리를 적대하는 거는 아니지만 대립관계로 놓였을 때 상대하기 골치 아파지는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지만.
거래를 하는데 있어서 조건을 달거나 부탁을 받는 것 보다, 대가를 받아들이는 쪽이 더 꺼림직 하게 만드는 인간은 은현이 유일했다.
아브로스에게는 시커먼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는 적보다, 적인지 아군인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은현처럼 자신이 파악할 수 없는 상대를 대하는 것이 더 꺼림직 했다.
애슈턴은 아직도 은현에게 받았던 모욕에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동감한다는 듯 아브로스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으으음….”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으며 몽롱한 정신 속에서, 에린은 점차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촉감과편안함을 가져다주는 베개와 이불의 감촉은 낯선 감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줬고, 에린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 벌떡 일어났다.
“여긴…어디…?”
딱 봐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침대와 벽지, 가구들을 보고 자신의 방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고 에린의 머릿속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에린은 마지막 기억을되새겼다.
“아….”
아버지의 잦은 구타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술을 먹고 들어오면 항상 자신을 때리곤 섬뜩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던 아버지.
무서운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켜주며 대신 아버지의 폭력을맞아주던 오빠.
“아아….”
하나씩하나씩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신음소리가 점차 잦아졌다.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은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으, 으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오빠가 아닌 다른 누군가,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와 함께 허겁지겁 도망치려던 자신이 발을 헛디뎠고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도.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조금씩 고통을 호소하던 에린은 모든 것을 기억해냈을 때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으으으….”
‘언제나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단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방안에 혼자 있기에 들릴 리 없는 오빠의 목소리를 들은 에린은 이제는 더 이상 오빠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자신이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끝까지 참고 참으며 오빠를 본 순간 기쁨의 눈물을 흘리려 했던 다짐이 깨져버렸다.
밀려오는 설움과 열심히 참고 또 참은 것에 대해 자신의 고생을 위로해주고, 그동안 잘 참았다고 칭찬해줄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이 에린의 감정을 더 고조시켰다.
“흐, 흐윽, 어째서…어째서 나한테만!”
설움은 원망으로 바뀌어간다.
자신에게만 이런 힘든 시련을 겪게 만드는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감정으로.
가득 채워진 소녀의 마음속에는 점차 증오심이 끓어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끼이익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고 인사도 없이 한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서 설움에 잠긴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에린을남자는 흘끗 바라보았다.
천천히 침대로 걸어와 걸터앉은 뒤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전혀 생각지 못한 행동에 소녀가 울음을 멈추고 붉어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침의 햇살을 받아 밝은 색이 돋보이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선명한 붉은색을 띄는 눈동자.
소녀는 이 남자가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꿈같은 경험이었던 영혼상태였을 때,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이상한 수를 쓰며 자신을 찾아낸 신기한 남자,
그 신기한 술수만큼이나 인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한 기억은 소녀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 남자가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쓰다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황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 참았네.”
“응…?”
“그동안 정말 잘 참았어.”
에린은 이상했다.
가슴속의 무언가가 울렁거리며 잠시나마 신비로운 남자의 등장에 진정되었던 감정이 다시 세차게 요동쳤다.
지금까지 꿋꿋이 버티며 생활해왔던 에린에게 가뭄의 단비라도 내리듯이 해주는 칭찬의 한마디가 에린의 마음을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남자가 에린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며 그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에린은 남자의 품안에서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쌓인 울분의 감정을 모두 토해냈다.
“흐…흐윽! 흐으아아아아앙!”
남자는 자신의 품안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에린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슬며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의 구체로 이루어져 천장에 떠있는 불길한 마나의 집합체,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그 검은 구체는 천장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검은 구체도 남자의 시선에 반응하는 듯 보였다.
“잘 가라.”
서럽게 울고 있는 에린에게도 들리지 않을 법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검은 구체는 남자의 그 말을 듣기라도 한것 같았다.
검은 구체 조금씩 작아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