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019. 아르미타스 공작가문(1)
“꼭 혼자 가야해?”
“응? 그래야지.”
“…….”
일리아나는 은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마녀를 보며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잖아. 너는 대외적으로 왕국의 일에 과도한 간섭을 하면 안 되는 거. 그건 너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거야. 개인적으론 나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너를 거기에 혼자 보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야.”
“내가 죽으러가? 대화를 하러 가는 거야. 대화.”
“……빨리 돌아와.”
엄마냐?
순간 이 얘기를 할 뻔 했지만 이것까지 입에 담았다간 등짝을 맞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테르의 정원, ‘페르니아스의 신목’앞에서 펼쳐진 은현의 연극은 에린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폐막을 맞이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곤히 누워있던 에린은 리오드가 데려갔으며 그의 저택에서 깨어날 때까지 요양을 하기로 했고, 엘빈은 은현이 직접 맡기로 이야기가 해결됐다.
“정말로 이걸로 된 건가?”
길을 걸으면서 엘빈이 은현에게 물었다.
“뭐가?”
“나는 그렇다 쳐도 내 동생은…정말로 약속을 지켜줄 수 있는 건가?”
결국 올리버는 즉시 흑마법사 엘빈을 처형하자는 주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린을 찾아내지못한 학교장과 학교의 마법 교수들의 무능함과 왕가와 학교장에게만 전승되는 ‘페르니아스 신목’의 비밀을 터뜨리겠다고 은현이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리오드와 일리아나는 애초에 은현 쪽의 사람이었으며 제일 중요했던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남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부정을 덮기 위해서라도이 일이 밝혀지지 않기를 원했다.
결국 은현에 의해 밝혀진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진실은 은현에 의해서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해결되었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지켜줄 생각이었어.”
“어째서지?”
“응?”
“어째서 우리 남매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냐. 너라면 그때 폐창고에서 날 제압하고 바로 왕국에 넘기는 방법도 있었어. 오히려 이런 번거로운 방식보다 그게 네 입장에서는 간편했던 게 아니었나?”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왕국 사람이 아니야. 너를 왕국에 넘겨봤자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없어. 해봤자 포상금 정도인데 돈 같은 건 딱히 필요도 없고. 내가 너희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는…. 음, 그래 운명 때문이려나.”
“운명이라고?”
엘빈은 은현이어울리지도 않는 굉장히 생소한 단어를 꺼냈음에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나한테 큰 은혜를 주신 분이 말씀하신 게 있어. 세상은 말이지. 뭐든지 정해져있는 법이라고.”
“뭐든지 정해져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네가 태어난 순간부터 네가 밟아야할 과정,경험하게 될 모든 사건들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그건 굉장히 기분이 더러운 말이군.”
엘빈은 인상을찌푸려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빈과 에린은 태어난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받는 인생과 불합리한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를 잃고, 흑마법사가 되어 자기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가족 전원이 자신을 떠났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는 것도.
모든 것이 정해져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불합리하다.
어째서 우리 남매에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만약 내가 너희를 만나지 않았고, 에린의 실종을 조사하는 일을 맡지 않게되었다면.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너는 이성이 너의 그림자에 완전히 먹혀서, 마수들보다 더한 괴물이 되었을 테고, 에린은 신목이 만든 시간의 결계 속에 갇혀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네가 운명을비틀어 우리 남매를 구원했다고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거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내가 한 게 뭐있다고. 단지 너희들의 운명이 그저 그렇게 끝난다면…너무 슬프잖아. 난 말이지. 너희처럼 질 나쁜 운명에서 놀아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언젠가 이 아픔을 딛고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그것은 20년 전, 리오드와 일리아나를 비롯한 동료들을 만났을 때부터 달라지지 않은 은현의 소망과도 같았다.
스스로가 대단한 재능과 혈통을 가졌다는 귀족 검사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더욱 위를 보고 정진할 수 있도록 현실을 가르쳐 왕국 최강의 기사를 만들어 냈고.
재능이 없었던 마법사에게 마법의 기초와 다양한 마법 지식들을 가르쳐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키워냈다.
은현은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구해왔고 그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멋진 모습을 보아왔다.
“너희를 만난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부여된 어떤 운명과 역할을 깨달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이야.”
“부여된 운명과 역할….”
그것이 스스로가 ‘엑스트라’임을 자각한 은현이 엘빈과 에린을 돕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엘빈은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은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걸어갈 길은 만들어주겠다.
그러니 절대로 굴복하지 마라.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상냥한 미소를 보며 엘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자신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흑마법사이자, 언젠가는 괴물이 될 사람이었다.
또한 공작가의 여식을 살해하려 했던 남자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의 목을 베어버린 패륜적인 일을 저지른 남자다.
이미 스스로도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런데….’
은현은 아직도 자신이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이 남자는 이토록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나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물론이지.”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은현의 말에서 엘빈은 점점 흉포해지는 감정 속에서 왠지 모를 그리움과 따스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하….”
아버지인 레니온을 죽이고 처음 지어보는 미소였다.
은현의 그 말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 엘빈은 구원받았다.
“난 뭘 하면 되지?”
“형, 믿지?”
“왜 형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말이라면 믿도록 하지.”
“그럼 일단 죽자.”
엘빈은 은현의 말에 피식 미소 지었다.
갑작스러운 은현의 말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미이성을 잃어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에게 경멸했던 엘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도 가지고있었다.
오로지 은현의 말을 믿기만 할 뿐, 이후는 은현이 모두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엘빈은 후련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라면 이유가 있겠지. 죽기 전에 동생에게 남길 편지 하나를 쓰고 싶은데.”
단지 여동생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가지 못한다는 것이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었다.
은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언젠가 깨어날 자신의 여동생을 생각했다.
‘언제나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단다.’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은 엘빈은 그렇게 은현의 검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했다.
◆ ◆ ◆
“그렇군…. 콜록!”
“아버지?!”
“아니, 괜찮다. 조금 잔기침을 했을 뿐이야.”
공작가의 침실에서 잠옷차림으로 두 자식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아브로스 아르미타스 공작은 잔기침을 내뱉었다.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던 첫째,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후계자, 애슈턴이 손을 들어 제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놈이그렇게 움직였다면 슬슬 눈앞에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자를 아시나요?”
“알지.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껄끄러운 뱀 같은 자식이다. 절대로 녀석과 얽혀선 안 된다. 알겠느냐?”
“도대체 어떤 남자이기에…?”
아브로스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단히 경고하자 엘레노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재차 도대체 어떻게 그 남자를 알게 되었는지 경위를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실례합니다.”
“읏?!”
“뭣!”
“누구냐!”
“젠장.”
아브로스는 창가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현을 보며 이를 갈았다.
결국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이야~오랜만에 뵙네요. 공작 각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여긴 4층인데. 여전히 상식 밖의 짓거리들을 저지르고 다니는군? 네놈 눈에는 지금 내 몸 상태가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이느냐?”
“흐음, 보아하니 큰 병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다음에 한 번 뵙게 된다면 몸에 좋은 약초를 하나 드려야겠네요.”
“주지 않아도 되니 내 눈에 띄지 마라. 네놈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싫으니까.”
“여전히 너무하시네요. 하지만 지금 시기에 공작님이 돌아가시는 것도 곤란하다고요. 당신이 죽으면 도대체 왕국의 군대는 누가 이끌어 간답니까?”
“쓸데없는 잡설은 집어치워라. 본론을 말해.”
엘레노아는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 아브로스와 은현을 번갈아 보았다.
국왕을 제외한다면 재무장관과 마찬가지로 왕국안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군무장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가 아르미타스 공작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상대로 저런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더욱 이상한 것은 아브로스의 반응이다.
은현은 공작가의 저택에 혼자 침입하여 무단으로 공작가의 침실에 와 놓고선, 마치 동네의 아저씨를 대하는 것 마냥, 한 없이 무례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를 지적하기는커녕 상대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은 철이 들 때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떤 남자이기에…?’
평소 무표정으로 포커페이스를 관철하는 아브로스의 얼굴을 간단하게 깨부수는 은현을 보며 엘레노아는 잔뜩 긴장했다.
“네놈…! 잘도 아버지를 상대로 그런 망발을…! 지금 공작가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냐!”
“그래요. 용건은 저거입니다. 저거.”
은현은 웃으며 애슈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브로스에게 말했다.
그 행동을 기점으로 아브로스와 은현 사이의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크윽!”
“꺄악!”
애슈턴이 은현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아브로스와 은현의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돌풍에 튕겨져 나갔다.
알렉스는 갑작스러운 바람에 놀라 비명을 지르던 엘레노아를 붙잡아 감싸 돌풍 속에서 그녀를 보호했다.
몇 초간은현과 아브로스의 마력이 맞부딪치며 두 사람 사이에는 살벌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
‘아버지와 마력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고?!’
나이를 먹고 노쇠한 몸이라곤 하지만 아르미타스 공작은 5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군무장관이라는 역할을 제외하고서라도 개인의 무력으로 왕국 최강의 기사인 리오드 올리비온과 견줄 정도의 남자였다.
은현은 그런 아르미타스 공작을 상대로 밀리기는커녕 웃음을 짓고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똑바로 설명해라.”
“아직 건재하시네요. 실은 말이죠. 이번에 그쪽 아드님이 멋대로 일으킨 일 때문에 수습이 너무 힘들어졌거든요? 그래서 좀 도움을 받으려고 왔는데 말이죠.”
“뭐?”
“그게 무슨…?”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은현의 말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화가 난 표정으로 이를 갈고는애슈턴을 노려보는 아브로스의 시선을 따라 두 사람도 애슈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애슈턴은 신음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라? 반응을 보아하니 공작님은아직 얘기하지 않으셨던 것 같네요? 아니면 평생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셨나?”
“개 같은 놈이….”
피식 웃어 보이며 폭탄을 던지고는 실실 웃고 있는 표정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아브로스는 은현이 일부러 자신과 애슈턴의 신경을 긁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저 얄미운 면상이 더욱 꼴보기가 싫었다.
“그게…무슨 말인가요?”
영문을 모르고 있었던 엘레노아가 은현에게 물었다.
“사실은 말이죠. 레니온 헤르샤가 배임 횡령으로 금화를 빼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던 건 공작 쪽이 아니라 저 녀석이거든요.”
“아….”
“엘빈은 공작님과 독대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알렸고 레니온이 빼돌린 금화를 모두 넘겨주는 것을 조건으로 레니온을 죽일 수 있는 기회와 상황을 만들어주고, 자신과 여동생의 안전을 약속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설마….”
그 다음부터는 엘레노아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엘빈이 약속을 어기고 공작가를 배신했던 이유.
엘레노아는 그가 했던 말을다시 떠올렸다.
- 처음에는 나도 약속을 지키려고 했지.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