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015. 신목(神木)의 유령(8)
“일리아나!”
집으로 돌아자마자 은현은 일리아나를 찾았다.
“응?”
안경을 쓰고 마법서적을 탐독하고 있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리아나는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마법서적에서 시선을 뗐고 방금 막 들어와 현관 앞에 서 있는 은현을 보았다.
“준비하자.”
그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일리아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 나서야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한 명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데.”
“누구?”
은현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의 그림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위로 떠올라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일리아나가 눈빛을 찡그렸다.
“흑마법사?”
“응.”
“흐응……. 그래. 어떻게 된 건지 대강 알겠네.”
이미 은현에게서 에린의 과거에 대해 들었던 일리아나는 흑마법사인 엘빈을 데려온 것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엘빈은 그것이 뜻밖이었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니?”
“전……. 흑마법사인데, 집안에 들여놓으셔도 되는 겁니까?”
엘빈은 처음 은현을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미 명성이 대륙 전체에 알려져 있는 일리아나에게는 초면부터 깍듯이 존대를 했다.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10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여덟 자릿수라는 등급을 가진, 고위 자릿수 마법사인 ‘검은 마녀’ 일리아나는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흑마법’이라는 외도의 길로 들어선 엘빈에게도 통하는 진리였다.
“왜? 내 집에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그것도 네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일리아나의 표정에는 그 어떤 마법사도 자신에게 대적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엘빈은 그 자신감과 당당함이 대단하다는생각이 들었다.
“세간에서는 저 같은 흑마법사를 경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마녀님에게 살해당할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다는, 너무나도 담담히 얘기하는 엘빈의 얼굴에는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흑마법사들 중에 쓰레기, 등신, 내로남불의 인간 말종이 많아서 세상에서 배척받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흑마법사들이 그런 것도 아니야.”
“…….”
그것은 흑마법사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기에 엘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구성 비율의 차이려나? 검사들이 검을 들고 선량한 사람들을 구하고 다니는 영웅으로 칭송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검을들고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면서 미친 살인마 새끼라고 비난 받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 흑마법사들도 그들 중에 ‘악인’이라고 불릴만한 인간들이 더 많았을 뿐이지. 순수하게 인간을 돕는 선량한 흑마법사들도 있었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요컨대 ‘흑마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흑마법을 사용하는 인간들의 대부분이 이미 어딘가가 뒤틀려서 미쳐버린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 원인이라는 말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엘빈은 이미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에 이성을 잡아먹히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흉포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네 사정은 현이한테 이미 들었어.”
사정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마녀는 은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한 짓을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일리아나가 엘빈을 보는 시선은 어딘가 안타까움이나 동정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이성을 잠식당하는 상태에서도 목적 이외의 상관없는 사람들은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도 했던 것 같고. 고생 많이 했네.”
엘빈은 그녀의 칭찬 비슷한 위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일이 커지기 전에 쟤가 데려왔으니까 다행이지. 너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으면 네 동생도 이 나라에서 지워졌을지도 몰라. 알고 있니?”
“…반성하고 있습니다.”
엘빈은 그림자에 이성이 잠식되어 이성의 회복을 위해 몇 일간 잠에 빠져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여동생인 에린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대로 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날뛴 것이었다.
“좋아. 이제 배우들도 다 모였고? 연출 준비도 얼추 된 것 같고. 이제 가자.”
“아이테르로?”
“응. 모두 거기로 모이도록 너랑 리오드의 이름이 들어간 초대장을 뿌려뒀거든.”
“이제는 자연스럽게 우리 이름을 파네.”
“나한테 강제로 일을 시켰으면서 이 정도 편의도 안 봐주게?”
“흥.”
일리아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항상 상황을주도하고 나서서 해결을 하면서도, 그 공적에 자신을 포함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년 전부터 한결같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받고 칭송받아야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은현인데.
일리아나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현은 그저 웃으며 발걸음을 걷고 있었다.
“…….”
엘빈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은현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누구지? 이 녀석은…….’
엘빈이 존경해 마지않던 대영웅의 고위 마법사와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은현을 새삼 다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두 사람이 아이테르에 도착하자, 은현은 학교의 대문이 아예 개방이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당당하게 대문을 지나 지난 번 에린을 만났었던 ‘페르니아스의 신목’이 있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목은 지난번처럼 밝은 녹색 빛을 띄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평범한 나무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평소 페르니아스 왕국사람들이 보는 ‘소망의 나무’의 모습일 것이다.
정원에 있는 ‘소망의 나무’의 근처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었다.
젊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중년남자 셋.
다섯 명의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높은 신분을 가진 고위 귀족 집안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정원에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새로 등장한 은현과 일리아나를 알아보았다.
“검은 마녀? 어째서 저 여자가 여기에?”
밝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귀족 남성이 미간을 좁히며 예상치 못했던 일리아나의 등장의 이유를 모르겠다며 중얼거렸다.
은현은 그 말을 들었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일리아나보다 살짝 앞으로 서며 큰 소리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메르비스 마법도서관 관장, 일리아나 케니퍼의 수행을 맡고 있는 조수. ‘은현’이라고 합니다.”
“은현?”
“역시…….”
모두가 들어본 적이 없는 은현의 이름을 곱씹으며 누구인지 기억해내려고 했을 때.
유일하게 다섯 명의 사람 중 홍일점인 여성, 엘레노아 아르미타스 공녀가 은현을 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마녀님의 이름이 적힌 초대장이 왔을 때, 당신의 수작질일거라 생각했어요.”
엘레노아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은현을 노려보며 이야기했다.
“응? 무언가 마음이 들지 않으셨나요? 저는 공녀님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요?”
“어느 입으로 그런 양심이 없는 말을! 당신 그때 제 엉…읏!”
화가 난 얼굴로 은현을 비난하려던 순간 엘레노아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그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남들 앞에서 입에 담을 뻔했다는 사실에 식은 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는지 은현은 의아해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상하게 냉정을 잃은 엘레노아를 본 그녀의 오빠, 알렉스 아르미타스가 은현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 아무 짓 도 안했습니다만…. 오히려 제가 목숨을 구해드렸다구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저 태도가 너무나도 능글맞고 얄미워서 엘레노아의 속이 더 화가 났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 귀족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오, 오해라구요. 일리아나 님! 전 맹세코 일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공녀님을 지킨 것 밖에 없었는데!”
보는 사람이 많아 대외적으로 ‘일리아나의 조수’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은현은 정말로 억울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표정을 지었다.
400살이 넘은 내공이 담긴 ‘한심해 보이는’ 혼신의 연기에 일리아나와 리오드를 제외한모두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 가식적인 면상을 보고 있자니. 짜증나네.’
일리아나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됐고. 본론으로 넘어가.”
“넵.”
은현은 짧게 대답한 뒤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 서로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자기소개 시간은 따로 가질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이 자리에서 저희가 초대한 또 한분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짝짝!
경쾌한 박수소리가 두 번 울리자, 은현의 그림자 속에서 엘빈이 튀어나왔다.
“읏…!”
“뭣?!”
이미그 광경을 한번 본적이 있는 엘레노아와 마법에 정통한 중년남자가 그 마법의 정체를 알아보고 경악하며 엘빈을 바라보았다.
리오드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흑마법이군.”
“네. 정답입니다. 이분의 정체는 엘빈 헤르샤. 이번에 배임횡령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헤르샤 준남작의 아들이죠. 그리고…실종된 에린 헤르샤의 오빠이기도 합니다.”
“헤르샤….”
또 다른 중년 남성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엘빈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서로를 잘 아시겠지만 이번에 초대되신 흑마법사님께서는 이분들을 모르실테니 제가 대신 소개를….”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다 아니까.”
엘빈은 가장 왼쪽에 있었던 리오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추적하던 왕국 기사단, 아르티아의 단장, 리오드 올리비온 후작.”
리오드와 엘빈은 말없이 서로의 시선을 응시했다.
이후 엘빈이 옆으로 시선을 옮겨 계속해서 말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나를 찾아와 금화의 행방을 물었던, 왕국재무장관, 버나드 보리스 후작.”
“…….”
“나와 거래를 했지만, 배신을 한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남매들.”
“뭐…라고요?”
“배신이라고…? 그게 무슨….”
엘빈은 놀라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남매를 내버려두고 마지막 가장 오른쪽에 있는 중년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내 동생, 에린이 실종된 장소인 아이테르의 책임자, 학교장 올리버 바오트만.”
“크윽….”
다섯 명의 이름을 모두 말하고 자신과 연관성을 설명한 엘빈은 은현을 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알만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 그렇군요.”
은현은 웃으며 엘빈의 말을 긍정했다.
‘유도한 건가? 저들이 나랑 에린과 엮인 연관성을 일부러 설명하도록?’
자신이 이곳에 모인 저들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
눈웃음을 짓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엘빈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을 존대하는 은현의 태도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에 굳이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말이냐.”
알렉스가 앞으로 나와 엘빈에게 물었다.
“공작가가 거래를 했고 배신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물었다.”
엘빈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무슨….”
“자자, 그 이야기는 차차 제가 설명해드리도록 하죠.”
알렉스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이려 했던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잔뜩 경계심이 짙은 얼굴로 엘빈에게 따져 물으며 다툼이격화되려 하자, 은현이 중간에 나서서 둘의 다툼을 제지했다.
“저희 마녀님과 아르티아 단장님이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초대한 이유는 말이죠. 여러분이 흑마법사님의 말씀대로‘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관계자이거나 관계자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알렉스가 은현의 말에 의문을 품으며 반문했다.
“그러니까 말이죠. 제가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은현의 말에 리오드를 제외한 네 사람은 모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현이 했던 설명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부분이 너무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왠 사기꾼을 보는듯한 의심 섞인 시선으로 은현을 보고 있을 때.
은현은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있었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주위의 환경이 물속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 마냥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
엘레노아는 이 기묘한 환경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자신의 오빠인 알렉스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은현이 손가락을 튕긴 것을 기점으로, 세계가 일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