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011. 신목(神木)의 유령(4)
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며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은현은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세수와 양치를 마친 다음,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아침을 준비한다.
마도구로 철판을 달구고, 버터 한 조각을 녹인 다음 식빵들을 올려주고 그 위에 계란을 하나씩 올려준다.
약간의 소금과 후추로 간단히 간을 해주고 식빵의 아랫면이 노릇노릇 구워졌을 때.
뒤집어주고 구운 햄과 치즈를 얹어주고 한자리수의 불 마법으로 간단히 익혀 치즈를 녹인다.
이후 그릇에 옮긴 뒤 칼로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놓고 샐러드를 담은 다음, 옆에 적당한 온도로 데운 우유 한 컵을 준비하여 식탁위에 세팅을 해두었다.
이윽고 하품을 하며 아직 잠옷차림인 일리아나가 방에서 나왔다.
“잘 잤어?”
“아니.”
잠이 덜 깬 듯 풀린 눈으로 하품을 하다가도 자신의 아침인사에 일리아나는 뭔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단박에 거절했다.
아직 어제의 자신이 조금 놀린 것에 대해 모를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태도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은현은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식탁에 세팅되어있는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과 향기가 그녀의 얼굴까지 다가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리아나의 식욕을 자극시켰다.
“이런다고 내가 화가 풀릴 줄 알아?”
평소보다 유독 오늘 아침이 공들인 모양새가 나는 것 때문인지.
어젯밤에 자신을 화나게 했던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라고 생각한 일리아나가 은현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정작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화를 풀어주려는 심보가 오히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였다.
일리아나는 아직 화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양 포크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설마. 내가 너를 아는데.”
“흥.”
일리아나는 또 한 번 코웃음치고는 결국 포크에 집어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내일 해결을 볼 거야. 너도 좀 도와줘.”
일리아나는 아직도 삐쳐있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하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은 덤이었다.
“오늘은 리오드한테 갔다 올게.”
“어제, 안 갔다 왔어?”
“시간이 시간이었잖아.”
사실 가려고 하면 갈 수는 있었지만 에린과의 대화로 몇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미 새벽이 되어버린 시간대라서 리오드의 저택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쪽에도 도움을 좀 요청해야지. 적어도 매정하게 거절하진 않겠지?”
“흥, 그 자식이 네 말을 거절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니가 부탁한다면 이 나라 국왕 목이라도 따다 줄 텐데.”
“야, 밖에서는 그렇게 얘기 하지 마. 왕실 모독죄로 내 목이 따인다고.”
그렇게 일리아나와 아침식사를 마친 은현은 정리를 마치고 곧장 집을 나와 리오드의 저택을 향하려 했다.
“안녕하세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발머리카락의 소녀의 인사를 받게 되었다.
“에이라? 이 아침부터 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어제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주셨는데 오시질 않으셔서, 아버지가 직접 저를 보내셨어요.”
은현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은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은현이 도서관을 나오자면서 일리아나가 은현이 그쪽으로 갈 것이라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는데 자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자기 딸을 시켜 이렇게 자신을 수행하도록 하다니.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직접 와줄 줄은 몰랐네. 대강 일리아나가 소식을 전달해뒀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왕국 내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기사단인 아르티아의 단장인 ‘리오드 올리비온’이 맡게 되었다.
아르티아는 궁정귀족의 회의 결과로 사건의 경위를 빠짐없이 파악하고 횡령된 예산을 되찾아올 것을 명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횡령 사건의 중심인 레니온 헤르샤 준남작 일가의 가족들은 모두 처형, 도주, 실종이라는 형태로 용의자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그 리오드조차도 지금으로썬 꽤나 답답한 상황이 아닐까하고 은현은 생각했다.
“혹시……. 은현님이 이렇게 나서주시는 건 아버지의 부탁 때문인가요?”
“이건 일리아나의 요청이었어. 그래서 누구의 의뢰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네. 어차피 왕가 쪽의 관계자이겠지.”
“아! 검은 마녀님의…….”
에이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고지식한 사자가 아무리 이런 큰 사건이라도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건 상상이 잘 안가네.”
은현은 실제로 머릿속으로 한 번 상상을 해보고는 자존심 상한 듯 인상을 잔뜩 구긴 표정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에이라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흘리는 가벼운 험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작은 도움 정도는 주려고.”
은현은 살며시 웃었고 에이라도 기쁜 듯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고 후작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앞장서는 에이라가 시종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가자 은현 또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이미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후작 부인.
테레지아 올리비온이 은현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은현은 그녀의 인사를 받고 자신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꽤나 바쁜 와중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고생은 남편이 하고 있으니까요. 그이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없어 안타까움에 그저 기다릴 뿐이었답니다.”
테레지아는 웃음을 지으며 은현의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레지아는 살짝 은현의 눈치를 보며 건 내야할 말을 신중히 고르고 있었다.
남편의 친우라기엔 너무 젊은 외모와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은현이라는 남자는 남편에게 도움을 줬고 앞으로도 남편에게 도움을 줄 인물이다.
결코 수준 낮은 대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테레지아는 청년에 대한 대우를 어떠한 선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역시 쉽지 않는 모양이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색의 머리카락에 일부만 중앙으로 땋아서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장신구나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 무뚝뚝한 사자 녀석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잡았을까.’
리오드와 테레지아는 서로가 서로에게 살갑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부부는 아니었지만.
은현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서로를 위하고, 잘 어울리고, 사랑하는 잉꼬부부가 따로 없었다.
참 여러 방면으로 서로를 위하는 사이좋은 부부가 아닌가.
친구가 여자 하나는 잘 잡았다고 피식 미소를 짓고 만다.
“혹시 오늘 저택을 방문해주신 이유는, 지금 남편이 수사하고 있는 일과 관계된 일이신가요?”
테레지아의 질문에 은현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에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미 기다리고 계셔요.”
“감사합니다.”
은현은 테레지아의 호의에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 도착한 은현은 노크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왔군.”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갈색머리카락의 남자는 그의 방문을 환영했다.
20년 전, 미르바빌라 제국과의 대륙 연합군의 대전쟁을 종식시킨 대영웅 중 한명.
또한 은현의 동료였던 리오드 올리비온이었다.
“정말 너한텐 아까운 분이시네.”
“맞는 말이다.”
인사 대신 살짝 장난을 담은 은현이 자신을 이곳까지 깍듯하게 대해주며 안내해준 테레지아를 칭찬했다.
리오드는 쓴웃음을 담아 긍정했다.
미르바빌라 제국과의 아르케나 대전쟁을 끝내고, 믿고 의지했던 은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던 시절.
무기력감과 허탈감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도록 밀어준 여성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페르니아스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고 아이를 가지며 살 수 있었을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러지.”
리오드는 현재 자신의 기사단이 레니온이 빼돌린 금화를 아들인 엘빈이 가로챘고 현재 도주중인 아들을 추적중인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가장 뜻밖의 사실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레니온이 투옥된 감옥 안에서 암살당한채로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순찰을 돌았던 간수에게 발견되었으며 투옥당하고 3시간 뒤도 안되서 벌어진 일에 수사를 맡았던 리오드와 아르티아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후 금화의 행방을 찾던 도중 엘빈이 북쪽으로 도주한 정보를 포착하고 그의 추적을 실시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수사진행 상태였다.
“그 엘빈이라는 남자는 마법사라고 했지?”
“궁정마법사단 메이거스에 입단한지 2년차 되는 마법사라고 하더군.”
“흐음, 평민이 그 엘리트 모임에 입단을 말이지. 꽤나 실력 있는 마법사였어?”
“그럭저럭. 곧 상위 자릿수를 넘보는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군.”
“헐, 그 나이에?”
‘자릿수’란 마법사들의 등급을 의미했다.
대체로 한 자릿수부터 열 자릿수까지 10가지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이으며,
다섯 자릿수의 경지로 진입하는 마법사는 대륙 전체의 마법사 인구를 통틀어 따져봐도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엘빈은 젊은 나이에 그 경지를 넘보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얘기는 다 들었고. 좋은 정보였어. 이제 내 쪽에서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뭐지?”
“월척을 하나 낚아야 하는데. 미끼가 필요하거든.”
“흐음?”
“네 딸. 좀 빌려가도 될까?”
“음?”
리오드는 은현의 부탁을 들으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훗,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생각보다 너무 흔쾌히 수락하는 리오드의 반응에 도리어 은현이 놀랐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위험 속에 밀어 넣는다는 말일까.
하지만 리오드의 생각은 달랐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딸이 기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너와 일을 겪으면서 간접적으로 기사라는 일의 위험성을 재차 인식하고 그만둬줬으면 하는 바램이야.”
“…….”
“게다가 이 네가 정말로 그 아이를 상처 입히도록 그대로 둘리도 없겠지. 아마 현실을 알게 해줄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현실을 가르쳐 주고 와라.”
“부탁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뭐하지만, 너는 네 딸을 너무 사내자식처럼 키운단 말이야. 누가 봐도 청초한 아가씨인데. 너처럼 근육덩어리로 성장할까봐 무섭다.”
“난 에이라가 기사가 되는 걸 반대했어. 그런데도 내 기사단에 입단하겠다면 조금 현실을 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네가 만반의 준비를 해둘 테니, 위험해질 걱정도 없겠지?”
“뭐, 그건 그런데…….”
은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친구의 딸인데. 생채기하나 남기지 않고 보내줄게. 명색이 친구의 딸인데 삼촌으로써 용돈도 좀 쥐어줄까?”
“하.”
별로 나이차이도 나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친구나 남매사이이라면 모를까, 도대체 누가 그런 식으로 볼 수 있을까.
리오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 ◆ ◆
“그래서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흔쾌히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에 에이라는 리오드의 명을 받아 은현을 따라 후작가의 저택을 나왔다.
계획을 들은 에이라의 어머니인 테레지아는 끝까지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남편인 리오드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자식을 밀어 넣어 그 상황을 헤쳐 나가고 성장시키는 방식에 걱정이 앞선 것이다.
“모험가 길드.”
“모험가 길드요? 거기는 왜죠?”
“에이라, 낚시 해본 적 있어?”
“아니요?”
“옛말에는 이런 말이 있어. 물고기가 낚이는 것은, 낚시꾼이나 낚시대 때문이 아니다. 낚시 바늘에 붙은 미끼 때문이다.”
“낚시꾼의 실력이나 장비가 아니라 미끼가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우리는 지금 미끼를 뿌리러 가는 거야.”
“은현님께선 아까 아버지한테 저를 ‘미끼’라고…….”
“응. 그러니까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