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010. 신목(神木)의 유령(3)
하늘을 부유하고 있는 반투명한 형체와 갸름하고 아직 앳돼 보이는 얼굴.
그리고 왕립 학교 아이테르의 교복,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소녀의 긍정을 통해서 은현은 눈앞의 하늘위에 떠있는 유령이 에린 헤르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기하군. 이론상만 존재했던 이야기인데. 미치지 않고 본래의 정신과 기억을유지한 영체라니. 이건 잘만하면 학계에 보고할 수 있을만한 사례야.”
은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진지하게 일리아나와 함께 연구해보고 싶은 현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그는 계속해서 에린의 영체를 바라보며 관찰한다.
너무 노골적인 탐구심 가득한 시선에 에린은 거북했는지 시선을 피하며 은현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이….]
“왜?”
[아니, 예상했던 반응과는 너무 틀려서….]
“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린은 말했다.
[아니, 뭐 무서워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마치 실험용 생쥐를 보는 것같은 시선을 받으니까 그게 기분이 좀…. 복잡하달까?]
무엇 때문인지 눈치를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에린은 쭈뼛쭈뼛 은현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하는 이상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은현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납득했다.
“하긴 사람을 앞에 두고 할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미안해. 나도 모르게 호기심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있었다.
은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에린의 현 상태를 보며 관찰하고 분석하고 있던 것에 대해 반성하고 그녀에게 사과했다.
[아니, 지금 내 상태를 사람이라고 부르기 뭐하지만….]
“비록 육체는잃고 영체만 남았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기억과 존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인간이야. 스스로를 너무 깎아내리는 듯 한 말은 하지 마.”
그것은 이미 인간의 카테고리를 벗어난 은현,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긴 시간을 불로장수의 삶으로 살아오면서 은현 자신도 이미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몸이기도 했다.
[어? 으, 응….]
생각지도 못한 격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에린은 고개를 살짝 돌렸고.
은현의 시선을 피하며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투명한 유령의 피부의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에린은 조금 부끄러운 듯 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희망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지.”
[어…. 엥?]
무심코 긍정하려다가 에린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은현의 말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천천히 곱씹었고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자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아직 안 죽었다는 거?”
[응.]
뭐가 급한 건지 고개를 세차게 여러 번 끄덕이며 긍정했다.
저런다고 대답이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며 은현은 피식 웃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가능성을 잡은 것이기 때문일까.
기대감이 서린 눈빛이 어서 대답하라는 귀여운 강요처럼 보였다.
“그 전에.”
[응?]
“내 이름은 은현, 심부름꾼이야.”
‘네 이름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은현은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의 속마음을 읽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 속마음이 다 보이는 애네.’
“레니온 헤르샤 준남작의 공금 횡령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너를 찾아왔어. 그리고 어떻게 지금의 네가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까지도.”
에린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에린이 가장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주제로 입에 담았다.
아마 처음 그녀의 회생 가능성에 대해서 운을 띄웠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살아나고 싶다면 내 질문에 답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에린은 아마 이것이 그의 의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일리아나가 은현에게 맡긴 의뢰는 에린 헤르샤라는 소녀의 실종에 관해서 조사하고 그 소녀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겉보기의 의뢰일 뿐이었다.
간단한 실종자의 의뢰를 왕국 쪽에서 일리아나에게 의뢰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일리아나에게 이 일의 의뢰를 맡긴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에린 헤르샤의 집안인 ‘레니온 헤르샤 준남작의 배임 횡령 사건’의 전말을 찾고,
그가 빼돌린 금화의 행방을 찾아 왕국의 국고로 환수하는 것.
그것이 왕국이 일리아나에게 이 일을 의뢰한 진짜 목적이었다.
실종된 에린 헤르샤의 수색은 그 일의 과정에 불과했다.
[…….]
에린은 은현의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어째서 이 밤중에 학교에 몰래 왔던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은현은 자신이 실종 자신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학교에 잠입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싫다….’
이 모양 이 꼴이 돼서도, 아직까지 아버지인 레니온 헤르샤의 범죄 사실이 에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육체가 있을 때의 기억은 또렷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범죄자의 아이라는 낙인과 미천한 평민의 피를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와 모멸의 시선을 받아왔다.
평민의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같잖은 이유로 마법으로 만들어낸 물세례를 맞았던 굴욕도 있었다.
그런 대우를 받았음에도 에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범죄를 저질렀고, 자신이 평민이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도 그 모진 굴욕을 모두 견뎌내야만 했다.
아무도 자신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상태가 되어서 좋았던 점은 딱 하나였다.
그 고통의 시간에서 해방됐다는 점뿐이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도 그 사건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말인가.
에린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현에게 물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야하는데?]
“그러면 너는 뭘 원하는데?”
[나, 정말…. 살아날 수 있어?]
“그럼.”
은현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모습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그 고통의 시간을 다시 겪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에린은 몹시 외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한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살아서 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에린은 속으로 그런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아버지의 횡령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좋아. 그럼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응?]
“내가 듣고 싶은 건, 너의 이야기야.”
[내 이야기?]
“그래. 너의 모든 것. 네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듣고 싶어.”
[…….]
에린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은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심히 오해스러운 발언이었지만 은현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쁜 의도도 없어보였기 때문에,에린은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현과 에린은 옥상 바닥에 앉았고 에린의 과거를 포함해서 서로 몇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해보고바뀐 은현의 인상은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만물박사 같은 남자였다.
은현은 자신의 상태를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 단번에 알아보기 까지 했고 해결책까지 제시해주었다.
대화중에 한 가지, 에린이 어이가 없었던 점이 하나 있었다.
에린이 옥상에서 추락했을 당시에, 학교 건물 내부에 있던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에린과 눈이 마주쳤던 여학생은 당시의 에린의 추락에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추락하면서 에린이 여학생을 쳐다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린은 경악스러운 얼굴을 보이며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전~혀 그런 적 없어! 뭐야 그게? 난 웃은 적 없어!]
에린은 한 여학생과눈이 마주쳤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했다.
오죽했으면 그 오해에 화가 난다는 듯이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행동을 보며 은현이 재미있다고 웃었다.
은현은 에린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점은 사실이었지만,
여학생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은 부정하는 것을 보고 어쩌면,
에린의 웃음을 보았던 것은 극도로 공포가 조성된 공간에서 무서운 것을 보았다고 착각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대화를 할 수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 때문이기도 한지, 에린이 처음 은현을 보며 품었던두려웠던 인상은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에린은 이대로 가다가는 이상한 괴담을 만들어내어 자신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나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장 그 여학생을 데려와 달라는 말도 했지만 은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에린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히잉….]
시무룩해하는 에린을 보며은현은 고개를 저었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야할 정보도 다 수집했고 슬슬 사건 해결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했다.
[가게?]
“가야지. 들어야할 것도 다 들었고. 해야 할 것들도 많고.”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히려 현재로써 자신을 인식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은현이 가버린다면 다시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에 매우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응….]
“이틀이면 모든 일이 끝나. 그때 널 되살려줄게.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어?”
에린은 설사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이 나라 안에서 계속 생활을 하는 한, 범죄자의 딸이라는 인식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그녀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이후에린이 걸어야하는 길은 평온한 길이 아닌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은현은 이러한 점을 그녀에게 설명했고 지금의 ‘영체로서의 생활’과 되살아나서 다시 시작하는 ‘인간의 생활’, 어느 쪽도 선택을 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먼 미래의 앞날보다는 지금을 걱정할래. 일단 지금은 엘빈 오빠가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고 싶어.]
“그렇구나.”
은현은 에린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꼭 지켜야해.]
“알았어.”
은현은 그렇게 유령 소녀, 에린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밝은 달빛 아래, 새벽길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모아온 정보들을 정리하고 종합했다.
사건에 대한 모든 해답은 나왔다.
원인도, 배경도, 과정도 어째서 그런 결과로 다다랐는지 알았다.
문제는 이젠 이걸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은현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자 어느새 집에 도착했고 문을 열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어.”
“꽤 늦었네?”
은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을 자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던 일리아나를 보았다.
흘끗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3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은현은 아직까지 일리아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잤어?”
“너 기다렸지. 일만 맡기고 먼저 아무 것도 좀 그랬고. 또…. 아니야, 그냥 그래서.”
“흠?”
은현은 일리아나가 뭔가 또 말하려 했지만 다시 얼버무리는 것을 보며 물음표를 띄웠다.
“그래서? 어땠어?”
일리아나는 운 좋게도 에린 헤르샤의 영혼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이후 처음 은현이 에린을 봤을 때처럼,
망령이 스펙터라는 스피릿형 마수가 되지 않고 인간의 의식과 기억을 유지한 채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흥미를 품고 있었다.
“마법사의 관점으로써, 네 생각은 어때?”
“으음.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이긴한데. 증명하는게 쉽지는 않겠네. 사례가 그 아이 하나뿐이기도 하고. 애초에 그 현상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현상도 아니잖아? 음······. 방법은강구하면 나올 것 같긴 한데 당장 떠오르는 건 없어.”
“그런가.”
“애초에 이런 쪽의 지식은 나보다 너가 더 해박하잖아.”
“그래도 명색이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인데. 조언 정도는 구할 수 있잖아.”
“흥. 듣기 좋네. 근데 그게 가능하구나. 그런 게….”
설명을 들은 일리아나는 감탄한 듯 숨을 내뱉었고, 새로운 것을 찾았다는 듯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일리아나를 은현은 아무런 말없이 빤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빤한 시선을 느낀 일리아나가 생각을 멈추고 은현을 보며 물었다.
“아니, 이렇게 보고 있자니 새로운 장난감을 본 어린애 같아서. 대체 누가 너를마흔이 넘은 아줌···흡!”
“그 입 안 닥쳐?”
위이이잉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은현의 목 주위를 이상한 기류를 형성한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네 자릿수 마법]
[윈드커터(Wind Cutter)]
하급 마법이라고는 하지만 하급 중에서 제일 상위 주문에 해당하는 마법인데.
무영창으로 시전하여 자신의 목을 노려왔다.
살짝 놀려줄 생각으로 그녀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는데.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다.
“흥.”
화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일리아나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옆으로 획 돌렸다.
자연스레 마법이 풀리며 살벌한 바람소리가 점차 멎어졌다.
“미안, 미안.”
〈 11화 〉011. 신목(神木)의 유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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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며 지금이 아침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은현은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세수와 양치를 마친 다음,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아침을 준비한다.
마도구로 철판을 달구고, 버터 한 조각을 녹인 다음 식빵들을 올려주고 그 위에 계란을 하나씩 올려준다.
약간의 소금과 후추로 간단히 간을 해주고 식빵의 아랫면이 노릇노릇 구워졌을 때.
뒤집어주고 구운 햄과 치즈를 얹어주고 한자리수의 불 마법으로 간단히 익혀 치즈를 녹인다.
이후 그릇에 옮긴 뒤 칼로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놓고 샐러드를 담은 다음, 옆에 적당한 온도로 데운 우유 한 컵을 준비하여 식탁위에 세팅을 해두었다.
이윽고 하품을 하며 아직 잠옷차림인 일리아나가 방에서 나왔다.
“잘 잤어?”
“아니.”
잠이 덜 깬 듯 풀린 눈으로 하품을 하다가도 자신의 아침인사에 일리아나는 뭔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단박에 거절했다.
아직 어제의 자신이 조금 놀린 것에 대해 모를 화가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태도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은현은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식탁에 세팅되어있는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과 향기가 그녀의 얼굴까지 다가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리아나의 식욕을 자극시켰다.
“이런다고 내가 화가 풀릴 줄 알아?”
평소보다 유독 오늘 아침이 공들인 모양새가 나는 것 때문인지.
어젯밤에 자신을 화나게 했던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라고 생각한 일리아나가 은현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정작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가져다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화를 풀어주려는 심보가 오히려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였다.
일리아나는 아직 화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양 포크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설마. 내가 너를 아는데.”
“흥.”
일리아나는 또 한 번 코웃음치고는 결국 포크에 집어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내일 해결을 볼 거야. 너도 좀 도와줘.”
일리아나는 아직도 삐쳐있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하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은 덤이었다.
“오늘은 리오드한테 갔다 올게.”
“어제, 안 갔다 왔어?”
“시간이 시간이었잖아.”
사실 가려고 하면 갈 수는 있었지만 에린과의 대화로 몇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미 새벽이 되어버린 시간대라서 리오드의 저택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쪽에도 도움을 좀 요청해야지. 적어도 매정하게 거절하진 않겠지?”
“흥, 그 자식이 네 말을 거절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 니가 부탁한다면 이 나라 국왕 목이라도 따다 줄 텐데.”
“야, 밖에서는 그렇게 얘기 하지 마. 왕실 모독죄로 내 목이 따인다고.”
그렇게 일리아나와 아침식사를 마친 은현은 정리를 마치고 곧장 집을 나와 리오드의 저택을 향하려 했다.
“안녕하세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발머리카락의 소녀의 인사를 받게 되었다.
“에이라? 이 아침부터 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어제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주셨는데 오시질 않으셔서, 아버지가 직접 저를 보내셨어요.”
은현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은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은현이 도서관을 나오자면서 일리아나가 은현이 그쪽으로 갈 것이라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는데 자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자기 딸을 시켜 이렇게 자신을 수행하도록 하다니.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직접 와줄 줄은 몰랐네. 대강 일리아나가 소식을 전달해뒀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왕국 내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기사단인 아르티아의 단장인 ‘리오드 올리비온’이 맡게 되었다.
아르티아는 궁정귀족의 회의 결과로 사건의 경위를 빠짐없이 파악하고 횡령된 예산을 되찾아올 것을 명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횡령 사건의 중심인 레니온 헤르샤 준남작 일가의 가족들은 모두 처형, 도주, 실종이라는 형태로 용의자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그 리오드조차도 지금으로썬 꽤나 답답한 상황이 아닐까하고 은현은 생각했다.
“혹시……. 은현님이 이렇게 나서주시는 건 아버지의 부탁 때문인가요?”
“이건 일리아나의 요청이었어. 그래서 누구의 의뢰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네. 어차피 왕가 쪽의 관계자이겠지.”
“아! 검은 마녀님의…….”
에이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 고지식한 사자가 아무리 이런 큰 사건이라도 나한테 부탁을 하는 건 상상이 잘 안가네.”
은현은 실제로 머릿속으로 한 번 상상을 해보고는 자존심 상한 듯 인상을 잔뜩 구긴 표정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에이라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흘리는 가벼운 험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작은 도움 정도는 주려고.”
은현은 살며시 웃었고 에이라도 기쁜 듯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고 후작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앞장서는 에이라가 시종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으로 들어가자 은현 또한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이미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후작 부인.
테레지아 올리비온이 은현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은현은 그녀의 인사를 받고 자신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꽤나 바쁜 와중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고생은 남편이 하고 있으니까요. 그이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없어 안타까움에 그저 기다릴 뿐이었답니다.”
테레지아는 웃음을 지으며 은현의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레지아는 살짝 은현의 눈치를 보며 건 내야할 말을 신중히 고르고 있었다.
남편의 친우라기엔 너무 젊은 외모와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은현이라는 남자는 남편에게 도움을 줬고 앞으로도 남편에게 도움을 줄 인물이다.
결코 수준 낮은 대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테레지아는 청년에 대한 대우를 어떠한 선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역시 쉽지 않는 모양이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색의 머리카락에 일부만 중앙으로 땋아서 길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다.
특별한 장신구나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 무뚝뚝한 사자 녀석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잡았을까.’
리오드와 테레지아는 서로가 서로에게 살갑게 직접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부부는 아니었지만.
은현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서로를 위하고, 잘 어울리고, 사랑하는 잉꼬부부가 따로 없었다.
참 여러 방면으로 서로를 위하는 사이좋은 부부가 아닌가.
친구가 여자 하나는 잘 잡았다고 피식 미소를 짓고 만다.
“혹시 오늘 저택을 방문해주신 이유는, 지금 남편이 수사하고 있는 일과 관계된 일이신가요?”
테레지아의 질문에 은현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에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미 기다리고 계셔요.”
“감사합니다.”
은현은 테레지아의 호의에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 도착한 은현은 노크를 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왔군.”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갈색머리카락의 남자는 그의 방문을 환영했다.
20년 전, 미르바빌라 제국과의 대륙 연합군의 대전쟁을 종식시킨 대영웅 중 한명.
또한 은현의 동료였던 리오드 올리비온이었다.
“정말 너한텐 아까운 분이시네.”
“맞는 말이다.”
인사 대신 살짝 장난을 담은 은현이 자신을 이곳까지 깍듯하게 대해주며 안내해준 테레지아를 칭찬했다.
리오드는 쓴웃음을 담아 긍정했다.
미르바빌라 제국과의 아르케나 대전쟁을 끝내고, 믿고 의지했던 은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했던 시절.
무기력감과 허탈감에 빠진 자신을 구원하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오도록 밀어준 여성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페르니아스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얻고 아이를 가지며 살 수 있었을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그러지.”
리오드는 현재 자신의 기사단이 레니온이 빼돌린 금화를 아들인 엘빈이 가로챘고 현재 도주중인 아들을 추적중인 상황이라고 이야기했다.
가장 뜻밖의 사실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레니온이 투옥된 감옥 안에서 암살당한채로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순찰을 돌았던 간수에게 발견되었으며 투옥당하고 3시간 뒤도 안되서 벌어진 일에 수사를 맡았던 리오드와 아르티아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후 금화의 행방을 찾던 도중 엘빈이 북쪽으로 도주한 정보를 포착하고 그의 추적을 실시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수사진행 상태였다.
“그 엘빈이라는 남자는 마법사라고 했지?”
“궁정마법사단 메이거스에 입단한지 2년차 되는 마법사라고 하더군.”
“흐음, 평민이 그 엘리트 모임에 입단을 말이지. 꽤나 실력 있는 마법사였어?”
“그럭저럭. 곧 상위 자릿수를 넘보는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군.”
“헐, 그 나이에?”
‘자릿수’란 마법사들의 등급을 의미했다.
대체로 한 자릿수부터 열 자릿수까지 10가지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이으며,
다섯 자릿수의 경지로 진입하는 마법사는 대륙 전체의 마법사 인구를 통틀어 따져봐도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엘빈은 젊은 나이에 그 경지를 넘보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얘기는 다 들었고. 좋은 정보였어. 이제 내 쪽에서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뭐지?”
“월척을 하나 낚아야 하는데. 미끼가 필요하거든.”
“흐음?”
“네 딸. 좀 빌려가도 될까?”
“음?”
리오드는 은현의 부탁을 들으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훗,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생각보다 너무 흔쾌히 수락하는 리오드의 반응에 도리어 은현이 놀랐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위험 속에 밀어 넣는다는 말일까.
하지만 리오드의 생각은 달랐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 딸이 기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너와 일을 겪으면서 간접적으로 기사라는 일의 위험성을 재차 인식하고 그만둬줬으면 하는 바램이야.”
“…….”
“게다가 이 네가 정말로 그 아이를 상처 입히도록 그대로 둘리도 없겠지. 아마 현실을 알게 해줄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현실을 가르쳐 주고 와라.”
“부탁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뭐하지만, 너는 네 딸을 너무 사내자식처럼 키운단 말이야. 누가 봐도 청초한 아가씨인데. 너처럼 근육덩어리로 성장할까봐 무섭다.”
“난 에이라가 기사가 되는 걸 반대했어. 그런데도 내 기사단에 입단하겠다면 조금 현실을 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네가 만반의 준비를 해둘 테니, 위험해질 걱정도 없겠지?”
“뭐, 그건 그런데…….”
은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친구의 딸인데. 생채기하나 남기지 않고 보내줄게. 명색이 친구의 딸인데 삼촌으로써 용돈도 좀 쥐어줄까?”
“하.”
별로 나이차이도 나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친구나 남매사이이라면 모를까, 도대체 누가 그런 식으로 볼 수 있을까.
리오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 ◆ ◆
“그래서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흔쾌히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에 에이라는 리오드의 명을 받아 은현을 따라 후작가의 저택을 나왔다.
계획을 들은 에이라의 어머니인 테레지아는 끝까지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남편인 리오드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자식을 밀어 넣어 그 상황을 헤쳐 나가고 성장시키는 방식에 걱정이 앞선 것이다.
“모험가 길드.”
“모험가 길드요? 거기는 왜죠?”
“에이라, 낚시 해본 적 있어?”
“아니요?”
“옛말에는 이런 말이 있어. 물고기가 낚이는 것은, 낚시꾼이나 낚시대 때문이 아니다. 낚시 바늘에 붙은 미끼 때문이다.”
“낚시꾼의 실력이나 장비가 아니라 미끼가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 우리는 지금 미끼를 뿌리러 가는 거야.”
“은현님께선 아까 아버지한테 저를 ‘미끼’라고…….”
“응. 그러니까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줄게.”
은현은 조용히 일리아나를 끌어안아주면서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달래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