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1)

#11. 그날 이후

1954년 1월 초.

전쟁이 끝났지만 피난민은 남은 도시, 부산에 종일 눈이 내렸다.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지역이라 반가워할 만도 하건만 작년 11월 말 도심을 휩쓴 대화재로 그나마 비바람을 가리던 천막마저 타버린 피난민들에겐 가벼운 눈조차 결코 가볍지 않은 재해였다.

하지만 어른들이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비탈에서 썰매를 타며 신나게 눈을 즐겼다.

고관 마을, 별채가 딸린 큰 기와집 마당에서 노는 정호와 선희처럼.

“오빠야!”

네 살 선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부엌까지 울리자 마른 멸치를 다듬던 경자가 선의 눈치를 보았다.

실상 선이 아니라 건넌방의 눈치를 살핀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쟈가 도련님한테 와 저래 앙살이고?”

“애들끼리 놀면 그렇지. 그리고 도련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래도 우째 그랍니꺼. 개성 마님도 계신데.”

선이 할 말이 없는데 결국 사달이 났는지 선희가 높은 울음을 터뜨렸다.

경자가 나가니 넘어져 있던 선희가 더 크게 운다. 그 곁엔 올해 국민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정호가 당황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희야, 와 그라노?”

아이를 일으킨 경자가 엉덩이를 털며 묻자 선희가 당돌하게 정호를 가리켰다.

“오빠야가 밀었다.”

“그게 아니라 희야가 내가 만든 눈사람을 자꾸 건드려서.”

장독대 아래 깨진 눈덩이를 가리키는 정호의 표정도 꽤나 억울했다.

“희야, 오빠야가 맨든 거를 와 뿌샀노.”

제 편을 들어야 할 엄마가 혼을 내자 선희가 지붕이 떠나가라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 바람에 밖으로 나간 선이 두 아이의 꼴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눈투성이 된 채 빨갛게 언 볼이 참으로 귀여웠다.

막 아홉 살이 되어 슬슬 소년 티가 나는 정호에 비해 누런 코를 흘리며 우는 선희는 아직 세 돌도 안 된 아기인지라 더욱 사랑스럽다.

“눈사람은 또 만들지 되지. 그렇다고 동생을 밀며 어떡해. 다치면 어쩌려고.”

선이 부드럽게 타일렀음에도 윤조를 닮아 광채가 유별난 정호의 눈이 울먹울먹해졌다.

그때 정호의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했다.

“누가 우리 도련님을 혼내는!”

건넌방에서 의령댁과 함께 나온 근엄한 여인은 경자가 개성 마님이라 칭한 윤조의 어머니였다.

“할머니!”

개성 마님이 달려온 손자를 치마폭에 폭 감싸 안았다.

“오냐, 내 새끼! 열심히 맨든 게 망가져서 얼마나 속상했는. 아이고! 손이 얼음장 아니네. 할미랑 따뜻한 방에 가서 귤이나 먹자우.”

정호를 데리고 가던 개성 마님이 의령댁을 슬쩍 보았다.

“계집애가 누굴 닮아 저리 기가 세네?”

기어코 한 소리 하시는 시어머니 덕에 의령댁 보기가 민망해지는데 어느새 눈물이 싹 마른 선희가 말했다.

“할무니, 나도 규울.”

“가스나야! 그리 비싼기 우데 있노.”

“아니요, 있어요. 안 그래도 가져가시라고 좀 챙겨 뒀어요. 희야, 이리 와.”

“아입니더! 괜찮십…….”

체면 차리느라 비싼 귤을 마다하는 손주며느리 경자를 툭 친 의령댁이 선을 따라가며 투덜댔다.

“느그 시어마시는 성질이 와 저 모양이고? 적적하다고 불러들일 때는 은제고 저래 사람 쪽을 준다.”

“죄송해요.”

“그게 우예 사모님 때문입니꺼.”

“오야! 느그 사모님 탓이 아니라 다 내 탓이다, 됐제.”

아니꼬워하는 의령댁과 입을 비쭉거리는 경자의 모습이 선은 아직도 놀라웠다.

살림 솜씨가 악하다며 서슴없이 망할 여편네라 부르던 윤조의 어머니가 의령댁과 아웅다웅하면서도 죽이 맞는 사이가 된 것도, 경자가 순용의 아내가 된 것도 전부 다.

“맛있어?”

조그만 손으로 귤을 야무지게 까먹는 선희에게 선이 물었다.

“응! 억수로 맛있다.”

“희야, 맛있다가 뭐꼬? ‘맛있어요’ 그래야지.”

언제쯤이나 경자의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려나?

선을 은인으로 여기는 마음에 선과 윤조의 사랑에 대한 환상이 합해져 경자는 선을 거의 위인 수준으로 따랐다.

첫딸의 이름을 선희라고 지었을 정도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러지 마. 아직 아기인데. 많이 먹어, 희야.”

“어!”

“아유, 우리 희야 너무 예뻐.”

“얼라를 저래 좋아하믄서 와 정호 하나만 봤을꼬?”

의령댁의 말에 선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데 순용이 퇴근을 했다.

해방 이듬해 따로 살림을 나갔던 순용의 가족이 다시 윤조의 별채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은 52년 1.4 후퇴 이후였다.

엄청난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든 부산은 집, 물, 전기, 식량과 기본 생필품 등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뭐든지 아껴야 했고, 하루하루 전장에 나간 아들과 남편의 무사 귀환을 걱정하던 그 시절엔 모여 사는 것만이 답이었다.

“아빠아!”

선희를 안아 든 순용이 한참 입덧 중인 경자에게 눈짓을 했다.

“오늘은 좀 괜찮나?”

“예.”

4년 차에 접어든 부부답지 않게 경자와 순용이 서로를 보는 눈빛엔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직후 터진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2년 넘게 떨어져 지냈던 것이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갚음이라도 하듯 돌아온 순용과 경자는 곧바로 둘째를 가졌다.

“사장님은 권 상무님하고 공장 부지 보러 가시가 좀 늦으신다고 하셨습니더.”

순용의 말에 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선희 엄마도 이제 건너가.”

“아닙니더. 하던 거마저 하고…….”

그대로 두면 저녁 설거지까지 하겠다고 할 것이 뻔했기에 선이 경자를 밀어냈다.

“됐어. 내가 하면 되니까 빨리 가. 얼른.”

순용 가족을 별채로 보낸 선이 마당가에 서서 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언제까지 오시려나? 추위에 눈으로 인한 습기까지 더해져 많이 힘들 텐데.

선은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선이 수술 흉터가 선명한 윤조의 무릎에 김이 펄펄 오르는 젖은 수건을 얹혔다.

“으!”

“많이 뜨거워요?”

놀란 선이 수건을 걷으려는 걸 윤조가 말렸다.

“아냐, 괜찮아. 좋아.”

온찜질에 굳었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지 윤조가 이맛살을 찡긋거렸다.

“날도 추운데 대충 보고 들어오지.”

“새 공장이 들어설 장소인데 어찌 대충 봐.”

해방 후 윤조는 목재 사업을 시작했다.

염려대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며 나라가 쪼개지고, 일본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목재 공급이 어려워진 것에 착안한 사업이었다.

사업이 안정기에 오를 때쯤 전쟁이 일어났고, 휴전 후 목재의 수요가 급증하자 윤조는 공장 확장을 위한 부지 물색에 나선 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날이 춥거나 비가 오면 더 아파하는 것을 속상해하자 윤조가 선의 손을 잡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윤조는 늘 그렇게 말했지만 선은 가끔 궁금했다.

이 사람, 정말 괜찮은 걸까?

윤조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부산에 남은 진짜 이유는 선이었다.

그 무렵 정호를 임신했던 선을 인정받지도 못한 본가로 데려가 마음고생 시킬 수 없다며 부산에 살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개성을 점령한 북한군의 총에 윤조의 부친과 영조가 죽고, 큰형님마저 크게 다쳐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난 와 함께 살지 않았다면 아직도 선은 윤조의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리라.

처절한 비극이었던 동족상잔엔 이렇듯 불화했던 한 가족을 화해시킨 이면도 존재했다.

“봄 되면 우리도 이사 갈까요?”

“어디로?”

“그냥 새로 지을 공장 근처도 괜찮고.”

“갑자기 왜?”

“다들 곧 떠나잖아요. 이리 큰 집은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개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윤조의 형님은 인삼 농사에 적당한 땅을 물색한 끝에 강화도에 터를 잡았고, 봄에 어머니를 모셔가기로 한 상태였다.

음력설을 쇠면 순용 가족도 근처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 전쟁 때 열 명이 훌쩍 넘었던 식구는 달랑 셋만 남을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머니 가시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는 거 어때?”

“결혼식이요?”

“올해부터 많이 바빠질 거야. 나도 따로 시간 내기 힘들고, 어머니도 먼 길 오기 쉽지 않으실 테니까 지금이 딱 좋을 것 같아서.”

이해는 됐으나 선은 썩 내키질 않았다.

“이제 와서 남부끄럽게 무슨 결혼식이에요.”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게 뭐가 부끄러워?”

“정호가 아홉 살이에요. 그보다 난 더 늦기 전에 정호 동생을 보고 싶은데…….”

선이 용기를 내어 한 말에 윤조가 미간을 세웠다.

“어머니가 또 뭐라고 하셔?”

“아뇨. 내가 갖고 싶어서.”

“난 정호면 됐어. 다시는 너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그깟 갓난쟁이 하나 더 는다고 무슨 고생?”

“정호 낳을 때 생각 안 나? 당신 꼬박 이틀을……. 난 싫어.”

윤조가 고개를 저었다.

선마저 잊어버린 난산의 고통이 윤조에겐 아직 생생한 기억이었으니 팔뚝만 한 아이 때문에 아내를 잃어버릴 뻔했던 그 순간의 무력감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재작년에 호주 선교사가 연 부인 병원이 있대요. 거기 다니면서 조심할게요. 당신도 선희 예뻐하잖아. 내가 딸 낳을게, 응?”

여느 때와 달리 선이 적극적으로 졸라대자 윤조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나로는 부족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결혼식은 싫다. 식구는 늘리고 싶다. 다 허전해서 그런 거잖아. 친정 없이 결혼식 올리는 건 싫고, 집이 비어 가는 건 쓸쓸하고 그래서.”

허를 찔린 선이 식은 수건을 갈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이제 우리 엄마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 안 해요?”

해방이 되고 윤조는 힘과 기회가 닿는 대로 선의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 어머니를 그리게 된 선에게 꼭 찾겠노라 호언장담했지만 중국에서 끊긴 행적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며 윤조는 더 이상 선에게 어머니에 관한 희망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무거워서. 넌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으니까.”

선의 가슴에 조용한 눈물이 차올랐다.

윤조는 선이 얼마나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시어머니도 의령댁도, 때론 경자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곤 했다.

험한 세월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일곱 살 때 헤어진 어머니가 여태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고.

이젠 제사나 정성껏 모시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식 노릇이라고.

정말 자신의 소망은 부질없는가.

그러니 다른 사람 부담스럽지 않게 사모의 정마저 숨겨야 하나 혼란스러울 때마다 선의 서러움은 당연한 것이라고, 마음껏 보고 싶어 해도 된다고 이해해 준 윤조가 아니던가.

그리 너그러웠기에 더 마음 놓고 불안해했었나 보다.

“아니다. 내가 억지소릴 했어. 남편이 어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다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미안해하는 윤조를 보니 선은 콧등이 시큰해졌다.

“맞아요. 곁에 없는 엄마가 항상 날 지켜 주는 남편을 어떻게 대신하겠어요.”

“……선아.”

“고마워요. 진심으로.”

윤조의 팔이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눈은 그쳤지만 윤조와 선의 사랑은 밤새 그치지 않은 밤이었다.

* * *

1월 말.

음력설을 앞두고 제수용 생선을 장만한 선이 붐비는 자갈치 시장을 빠져나온 건 마침 하루 두 번 있는 영도다리 도개가 얼추 다 된 시간이었다.

정호의 손을 잡은 선이 영도다리 옆 점바치(점쟁이) 골목을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도개 구경에 나온 인파 속에 혹시나 아는 얼굴을 발견할까 하는 선의 오랜 습관이었다.

“도련님, 기억납니꺼?”

선희를 업은 경자가 정호에게 물었다.

“뭐가요?”

“도련님 일곱 살 적에 친엄마 찾아갈기라고 울고불고했던 거 말입니더. 호호호!”

“아이참!”

정호가 곤란해하며 코밑을 훔쳤다.

의령댁이 장난 삼아 한, 영도다리 아래서 주워 왔다는 말을 곧이들은 정호는 친엄마를 찾겠다며 집을 나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근데 그거 진짜라예.”

“예?”

“저기 다리 밑에 사탕 파는 아지매 보이지예? 저 아지매가 도련님 진짜 엄맙니더.”

불안하게 흔들리는 정호의 동공을 보니 선은 웃음이 났다.

겉모습은 윤조와 찍은 듯 닮아 시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호지만 순진한 심성은 영락없이 자기다 싶으니 마음이 애틋했다.

“엄마 아니죠? 나 엄마가 낳은 거 맞죠?”

“그럼. 우리 정호는 내가 배 아파 낳았지.”

“거봐요. 아니에요.”

“그라믄 가서 물어보십시데이. 누가 도련님 친엄만가.”

경자의 계속되는 도발에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야겠다 싶은지 정호가 비장하게 사탕 좌판으로 걸어갔다.

“그만 놀려.”

“재밌잖아예. 이라믄서 사탕도 하나씩 멕이고.”

“나두 사탕.”

사탕이라는 말에 등에 매달려 졸던 선희가 정신을 차렸다.

“가스나, 묵는 데만 귀가 밝아 갔고. 희야, 니도 여기서 느그 친엄마나 찾아라.”

그러나 선희는 어려서 그저 사탕을 외치며 칭얼거릴 뿐이었다.

그사이 용기를 내어 노전에 다가갔던 정호가 후다닥 돌아왔다.

“엄마, 아줌마가 아니고 할머니야.”

“아이고마, 아홉 살이나 되어 갖고 아직도 속습니꺼? 우리 도련님 순진해서 큰일 났다.”

장난이 길어지자 정호가 뾰로통해졌다.

저건 진짜 화가 났다는 뜻인지라 선이 나섰다.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자.”

“사타앙!”

선이 돌아서려 하자 선희는 짧은 다리를 버둥대며 숫제 울 기세였고 정호도 가만 보니 사탕은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가 살게예.”

짓궂게 굴었던 것이 미안했던지 경자가 나서자 선이 막아서며 노전에 다가갔다.

“사탕 좀 주세요.”

“예! 얼마나 드릴까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으려 머릿수건을 둘러쓰고 목도리를 입까지 칭칭 감싼 여인이 활기차게 물었다.

“이것저것 섞어서 넉넉히 주세요.”

값을 치르려 손가방을 열던 선이 불현듯 이상한 느낌에 눈을 들었다.

그런데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여인의 짙은 눈시울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벼락을 맞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 두 여인을 경자가 이상한 눈으로 살폈다.

“아지매? 사탕 안 담고, 아이고! 와 그랍니꺼, 사모님?”

선이 손을 뻗어 여인의 목도리를 확 끌어 내리자 경자가 놀라서 말했다.

하지만 온전히 드러난 사탕 장사의 얼굴을 보곤 더 놀랐으니 여인은 마치 선의 30년 후 모습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모님하고 이 아지매하고 우째 이래 닮았십니꺼? 엄마라캐도 믿게…….”

경자가 제 입을 막았다.

“세상에……!”

주춤 일어서는 여인, 고실댁의 눈엔 이미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너 선이냐?”

“……엄마?”

“진짜 내 딸 선이냐?”

“엄마!”

22년 만이었다.

이리 어머니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눕기는.

저녁 내내 같이 지내고도 도무지 믿기질 않아 선은 옆에 누운 어머니의 얼굴을 이리 쓰다듬고 저리 쓰다듬었다.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너무 늙어 버린 얼굴이 속상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일 마음이 아팠던 건 어머니의 고달픈 인생길.

군산에서 시작해 중국과 만주, 북을 거쳐 부산까지 오며 세 딸과 남편을 차례로 잃어버리고 혈혈단신이 된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질 듯 아팠다.

하지만 고실댁은 힘들었지만 살만했다고, 같은 처지의 동포들과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다고.

그래서 이리 좋은 날을 만났다고 웃으며 말해 선을 더욱 눈물짓게 했다.

“엄마, 이제 우리 같이 살아요.”

“시어른 모시고 사는 애가 무슨 말이야. 너 잘 사니 그걸로 됐다. 이제 서로 어디 사는지도 아니까 걱정 마라.”

“봄 되면 어머님 강화도 올라가시고 별채도 비어요. 아까 정호 애비도 엄마 모시자고 했잖아요. 그 사람 빈말 안 해요. 그리고…… 나 엄마한테 해산구완 받고 싶어.”

고실댁이 베개에서 머리를 뗐다.

“너 애 가졌어?”

선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치 않아 윤조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벌써 시작했어야 할 달거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눈 오던 그 밤에 찾아온 아이임이 틀림없었다.

“나 정호 낳을 때 얼마나 서러웠다고. 그러니까 이번엔 어머니가 미역국도 끓여 주고, 아기 기저귀도 갈아 주면서 내 옆에 있어요, 응?”

고실댁이 응석을 부리는 선에게 나직이 말했다.

“신기하기도 하지. 관옥(冠玉) 같이 훤하던 도령이 내 사위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개성에서 윤조 씰 본 적이 있어요?”

“본 정도가 아니라 그 도령 덕에 네가 그 집에 들어간걸.”

어둠 속에서 선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정호 애비가 말 안 해?”

선이 고개를 젓자 고실댁이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제발 받아 달라고 사정을 하는데도 마님이 안 된다는 걸 정호 애비가 나서서 어린아이가 가련하지도 않냐고, 얼마 전 죽은 여동생 얘기까지 하며 편을 들어줬단다. 덕분에 마님이 마음이 약해져서 널 맡길 수 있었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마음이 설레 선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선은 어머니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한 후 살그머니 일어나 문간방으로 갔다.

처음 만난 장모에게 아내와 안방을 양보한 윤조는 선이 곁에 누워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나?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 잘 안 마시던 술도 제법 마셨지.

어머니 만난 것을 자신보다 더 기뻐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선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윤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 뭐야? 왜 왔어?”

윤조가 채 눈도 못 뜨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뭐? 22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두고 내가 보고 싶었다고?”

어이없어하는 윤조의 가슴에 뺨을 대며 선은 생각했다.

나의 태양.

난 그 붉은 햇살 아래 푸르게 피어난 잎사귀.

잎사귀가 태양을 향해 힘껏 팔을 뻗듯 선이 윤조를 꼭 껴안았다.

“다시 자요. 난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안 가고 계속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잠에 취해 웅얼거리면서도 선을 당겨 안는 윤조의 손길에 행복의 눈물이 스르륵 고였다.

고마워요. 

내 영혼을 다해 사랑해요.

나의 빛.

나의 윤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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