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1)

#9. 녹엽(綠葉)

“나리! 아씨! 화연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소리 높여 고하는 식모에게 화연이 던지듯 가방을 맡기는데 올케 숙경이 우다다 달려 나왔다.

“아이고, 밤새 어디 계셨수!”

“오라버니, 집에 계시다고 하던데…….”

화연이 멈칫했다.

숙경의 눈두덩을 물들인 보랏빛 멍을 본 것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아가씨한테 도 지점장 얘길 했다고…….”

민망해하는 올케를 보자 화연은 갑자기 부산역에서 선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선이 퉁퉁 붓고 멍든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리 마음 놓고 있진 않았을 텐데.

“화연아!”

서재에서 나오는 민병기의 뒤로 콧수염이 난 낯선 사내가 따라 나왔다.

“어딜 갔었니?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아가씨 찾느라 재판소에 출근도 안 하셨다우.”

“입 안 닥쳐! 내 눈에 띄지 말랬지.”

한마디 거들었다고 민병기가 손까지 치켜들며 화를 내자 콧수염 보기 창피했던지 숙경이 총총히 물러났다.

한심해서 올케를 보다 콧수염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가 모자를 벗고 화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화연이가 돌아왔으니 기무라, 자넨 그만 가보게.”

“예. 그럼.”

기무라가 나가자 화연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냐, 들어가서 하자.”

서재에 마주 앉자마자 민병기가 화연의 손을 잡았다.

“얼굴이 초췌하구나. 지난밤엔 어디 있었던 거니?”

화연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생각할 게 좀 있었어요.”

집을 나갈 때만 해도 당장 윤조와 선을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긴 시간 동래로 가며 차차 머리가 식어 갔다.

감정만으로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전과 같은 굴욕과 실수만 반복되리라.

“이해한다. 소식 듣고 심란했겠지. 그래도 걱정하는 사람 생각해서 전화라도 한 통 했어야지.”

“그럴 틈이 없었어요. 계획을 세우느라.”

온천장을 뒤져 윤조가 묵은 여관을 찾았을 땐 화연의 마음은 식다 못해 차가워진 후였다.

“계획이라니?”

이혼 후 화연에겐 꿈이 생겼었다.

보란 듯이 성악가로 성공해 전(前)남편이 후회로 땅을 치게 만들고 싶었다.

야심차게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재능이 변변찮았고, 꿈꿨던 자유연애는 시시하기만 했다.

외롭고 우울해서 조선으로 돌아가고만 싶을 때 윤조를 만났고 화연에겐 다시 희망이 생겼다.

모든 것이 전남편보다 빼어난 윤조를 통해 첫 결혼의 상처를 보상받겠다는 희망.

그런데 그게 다 윤조의 속임수였다.

꿈은 깨졌고, 희망은 조각났으며, 평판은 돌이킬 수 없게 망가졌다.

할 수 있는 건 복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화연은 웃돈을 주고 일부러 윤조의 옆방에 들었다.

그리고 태어나 가장 끔찍한 밤을 보냈다.

물론 복수의 불을 태우기 위한 불쏘시개로는 적당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께서 하실 일이 있어요.”

부탁이 아니었다.

마치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듯 화연은 사무적이었다.

“응? 무슨?”

“윤조 씨, 잡아들일 수 있죠? 경찰과 상관없이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화연의 말에 민병기가 당황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만. 진심이냐?”

“진심이에요.”

윤조가 그랬다.

일본은 곧 패망한다고.

그가 그랬으니 아마도 그리될 것이다.

윤조는 자신을 속였을지언정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얘긴 더 이상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윤조와 선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아귀에 힘이 있을 때, 그들이 여길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망쳐 놓아야 했다.

“그리고 아까 그 기무라라는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그자를 네가 왜?”

몸살과 두드러기로 앓아누운 화연에게 민병기가 자책하듯 말했었다.

윤조가 기무라의 행적을 알고 식겁해 더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시킬 일이 있어요. 되도록 빨리 자릴 마련해 주세요.”

화연에게선 감히 거역할 수가 없는 위엄마저 흘러 민병기는 무기력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서재를 나온 화연이 방으로 가려는데 마당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숙경이 보였다.

연기가 시린지 눈가를 훔치다 상처를 건드려 아파하는 숙경이 딱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아랫것을 시키지, 저 꼴로 염천 더위에 뭐하는 짓이람.

혀를 차던 화연이 눈썹을 찡긋 올리더니 마당으로 내려갔다.

“무슨 약이에요?”

숙경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오빠 것이에요. 요즘 기력이 허해진 것 같아서.”

“훗. 걸핏하면 언닐 때리는 남자한테 약까지 달여 바치고 싶어요?”

“그럼 어쩌우. 미우나 고우나 내 서방인데.”

화덕에 활활 부채질을 하는 올케의 뒤통수를 보던 화연이 그 말을 듣고 곁에 앉았다.

“혹시 오라버니가 언니 웃기게도 해줘요?”

“웃겨 주긴! 울리지나 않음 다행이우.”

그렇지.

화연이 아는 부부란 대개 그러했는데 도대체 윤조는 무슨 웃긴 것을 보여주겠다고 천한 아랫것 앞에서 채신머리없이 우당탕거렸던 것일까?

선의 깔깔대던 소리가 궁금해하는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화연은 새삼 분했다.

“오라버니가 언니 거기도 만져 줘요?”

“거기, 라니……?”

화연이 약탕기 앞에 쭈그려 앉느라 벌어진 숙경의 다리 사이에 턱짓을 했다.

“거기. 잠자리할 때.”

숙경이 경기라도 일으킬 듯 부채를 휘두르며 사방을 살폈다.

“망측하게! 누가 들을까 무섭수. 무슨 그런 흉한 소릴…….”

“역시 안 해주는구나. 난 또 부부는 좀 다를까 했네.”

엉뚱한 소릴 해대는 화연을 숙경이 의심스럽게 보았다.

“아가씨도 시집가 보셨으면서 뭘.”

“그러게요. 참 대단해. 그 더러운 델 입으로…….”

전남편과의 잠자리는 따분하고 괴로웠다.

길어야 10분 남짓인데도 견뎌낸다고 여겼을 만큼 모욕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윤조가 자신의 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여겼는데.

“바, 방금 뭐라고 했수?”

정신을 차려 보니 숙경의 눈이 달덩이처럼 커져 있었다.

“거기에 이, 입을 댄다고?”

잉어처럼 뻐끔거리는 숙경의 꼴이 우스워 화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대다 뿐인가? 물고, 빨고, 넣어 달라고 앙앙거리고.”

“……세상에! 어떤 여우 같은 년이 그런 음탕한 짓을 했단 말이우?”

말만 그럴 뿐 숙경은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초롱초롱 빛이 날 지경이었다.

“있더라고요. 순진한 얼굴로 홀리는 구미호 같은 년이.”

아니, 인정하자. 둘 다 똑같았다.

분방하고 솔직한 밀어와 정염이 넘치는 정사를 귀로 생생히 들으며 화연은 놀랍다 못해 괴롭고 나중엔 멍하기까지 했다.

윤조가 저렇게 뜨거운 남자였어?

남녀 사이에 저런 세계가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걸 나한테는 안 주고 저런 천한 하녀에게 줘?

억울했다.

돌이켜 보면 화연은 늘 애매하게 낀 희생자였다.

개화된 세상이 아니었다면 첫 남편이 자유연애를 빌미로 자신을 그리 쉽게 버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유연애의 희생양으로 살기 싫어 자신도 자유연애를 했더니 조선 시대였다면 상상도 못 할 비천한 노비에게 밀린 꼴이 아닌가!

용서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그러고요?”

숙경이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던 화연을 깨웠다.

“뭐가요?”

주변을 두리번거린 숙경이 화연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그 여우 같은 년이 사내놈이랑 또 뭔 짓을 했냐고요?”

여직 그 얘기야?

화연이 숙경을 경멸 어린 눈길로 쏘아보았다.

“구미호가 남자를 어찌하는지 몰라요? 밤새 괴롭히다 종내는 간을 홀랑 빼먹는 거.”

킬킬대며 화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는 동안 화연은 굴욕적인 흥분으로 속옷을 적시며 비참함을 삼켜야 했다.

세상에 사랑이 어딨어?

더구나 영원한 사랑 같은 게.

있어도 내가 부숴 버릴 거야.

내가 못 가진 건 아무도 못 가져.

“저년이 돌았나?”

숙경이 멀어지는 화연을 향해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 * *

떠날 날을 앞둔 하늘은 불길한 정도로 고요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메아리치던 공습경보가 오전 일곱 시 즈음 한번 울린 것을 제외하곤 내내 잠잠했고, 하늘을 찢을 듯 요란스럽던 비행기도 그날만은 조용했다.

매미라도 쩌렁쩌렁 울어 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없는 도시 같았으리라.

하지만 선의 마음은 하늘과 달리 들끓고 있었다.

윤조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부산에서의 마지막 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지글지글 타는 듯했다.

그래서 종일 짐을 쌌다 풀었다, 이젠 쓸 일 없는 살림살이들을 쓸고 닦기를 반복했지만 근심은 한자리만 맴맴 돌뿐.

윤조가 시간에 맞춰 조선소를 빠져나올 수 있을까?

혹시 그 전에 폭탄이 터지면 어쩌지?

잡히지 않고 무사히 기차를 탈 수 있을까?

자신이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통에 방해가 된 건 아닐까?

아, 차라리 폭탄이 불발되어 버렸으면.

“오늘은 동네가 유달시리 조용하네.”

마실을 다녀온 의령댁이 방을 들여다보았다가 걸레를 든 선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즉도 그라고 있나? 잠깐 갔다 올 사람이 뭐 그래 극성으로 닦아샀노. 혹시 내가 못 믿더버서 그라나?”

“아뇨,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어른들 뵐 생각하니까네 걱정돼서? 전보 보냈다매?”

의령댁은 선이 윤조와 함께 개성에 다녀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여태 소식이 없으세요.”

“부리던 종년인데 그라믄 뭐 어화둥둥 내 메누리, 이랄 줄 알았드나.”

내키는 대로 지껄인 의령댁이 뒤늦게 시무룩해진 선에게 말했다.

“시간이 걸릴 거란 말이다, 내 말은.”

“알아요.”

“마, 민적에 이름도 올맀겠다 이제사 뭐 우짜겠노. 기죽지 마라. 나리가 니 든든한 방패가 돼 줄 끼다.”

선이 의령댁에게 샛눈을 떴다.

“사내는 무정하고, 상전은 잔인하니 헌신짝 신세 안 되게 조심하랄 땐 언제고?”

“내가 은제?”

의령댁이 먼 산을 보며 시침을 뚝 뗐다.

“어머.”

선이 어이없어하자 의령댁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인자는 죽을 때가 다 됐는갑다.”

“갑자기 왜 또 그런 말씀은.”

“상전이 하녀하고 정식으루다가 혼인하는 것도 다 보고. 니를 보니까네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구마. 니, 꼭 나리하고 끝까지 잘 살으래이.”

눈까지 부라린 의령댁의 협박성 덕담에 선은 뜻밖에 목이 메었다.

“네. 아주머니도 건강하세요.”

내일 윤조와 선이 기차를 타면 미리 귀띔한 대로 순용도 의령댁과 집을 떠날 것이었다.

제발 그들도 끝까지 무사하기를.

“야가! 영영 헤어지나? 뭘 울기까지 하노?”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 주던 의령댁이 갑자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니 혹시 얼라 들어선 거 아이가?”

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니에요.”

“잘 생각해 바라. 원래 여자가 얼라를 가지면 맴이 하루에도 열두 번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라.”

“아니라니까요. 얼마나 됐다고 벌써.”

“와? 들어설 때도 됐지. 잠자리한 지 한 달 넘었다이가.”

선이 황급히 의령댁의 입을 막았다.

“순용이 들어요. 그리고 배불뚝이 되면 그날로 끝이라고 조심하래 놓고선?”

“어쩐지. 어디서 듣고 저러나 했더니 아주머니 때문이었군요.”

기척도 없이 윤조가 들어오자 의령댁이 혼비백산했다.

“아고! 들어오싯, 내는 고마 저녁을, 아이고마…….”

의령댁이 엎어질 듯 도망을 가자 선도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저도 같이…….”

“어딜!”

윤조가 냉큼 선을 안아 제 무릎 위에 결박하듯 앉혔다.

“둘이 짜고 날 애태웠겠다.”

“아니, 그게…….”

“권 주임한테 출장 잘 다녀왔냐고 물었던 것도 나 보라고 그런 거였어?”

윤조가 우물쭈물하는 선의 허리를 재촉하듯 꽉 죄었다.

“빨리 대답해.”

“……시켜서.”

“와, 나 완전 속았네.”

“저도 불안하고 헷갈렸단 말이에요.”

선이 뚱해서 말이 없는 윤조의 눈치를 살폈다.

“후회되세요?”

“응. 후회돼.”

놀란 선이 윤조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한테 입 맞췄을 때 요 앙큼한 속셈을 알아채고 확 진도를 뺐어야 했는데.”

비로소 안심한 선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치, 그날 밤에 바로 방으로 왔으면서.”

“맞다! 순용이 방에 숨어서 나 기겁시킨 거, 그것도 일부러 그런 거야?”

그건 진짜 궁금했던 모양인지 자못 심각해진 윤조에게 선이 고개를 저었다.

“숨은 거 아닙니다. 진짜로 냄새가 독해서…….”

윤조가 웃으며 입술을 내렸다.

하루 종일 선의 곁을 떠나지 않던 불안이 촛농처럼 녹아 사라지고 방 안엔 입술이 만났다 떨어지고 다시 섞이는 소리만이 낮게 울려 퍼졌다.

선이 어깨를 틀어 윤조를 안았다.

어깨와 팔을 거친 선의 손이 윤조의 가슴을 더듬어 가는데 뭔가 빳빳한 모서리가 손가락 끝에 걸린다.

“참, 사진 나왔어.”

윤조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둘의 결혼사진이 든 봉투를 꺼냈다.

하얀 원피스에 사진관에서 빌린 면사포를 쓰고 꽃다발을 든 신부는 처음 찍어 본 사진에 경직되어 눈만 동그랗다.

“마음에 들어?”

“표정이 좀. 긴장해서 굳었나 봐요.”

“내가 더 이상한데.”

“아니에요. 지점장님은 멋져요.”

“아냐, 네가 더 예뻐.”

서로 상대가 더 잘 나왔다고 우긴 끝에 윤조가 결론을 냈다.

“그럼 둘 다 굳은 걸로. 다음에 정식으로 결혼식 올리면서 예쁘게 다시 찍자.”

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사진을 보았다.

선 혼자 서 있는 사진이었는데 수줍은 미소가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생각해 보니 이때 윤조가 사진사 옆에서 선을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자신이 윤조 앞에선 이리 고와지는구나 생각하는데 사진 하단에 날짜 말고 따로 적힌 한자가 보였다.

“무슨 뜻이에요?”

선이 글자를 짚자 윤조가 읽어 주었다.

“녹엽(綠葉). 푸른 잎사귀란 의미야.”

“푸른 잎사귀요? 그걸 왜 여기?”

윤조가 웃었다.

“비밀.”

“뭐예요. 말해 줘요.”

“내일 기차에서 말해 줄게.”

윤조의 대답이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약속임을 깨달은 선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꼭이요.”

“응.”

윤조가 선의 눈물을 닦아 주며 길고 긴 입맞춤을 했다.

* * *

두 시간 넘게 한자리를 지켰지만 아무도, 심지어 순사조차 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정숙한 옷차림과 우아한 모자가 범접하기 힘든 고고함을 풍기는 데다 눈에 보이는 가방, 반지 따위는 최고급품이라 으레 상류층 부인이려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모자 아래 선의 심정은 시시각각 찢겨 나가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은 지났고, 기차 시간은 임박했다.

계획대로라면 윤조는 이미 조선소 사장에게 폭탄이 든 차를 선물로 바치고 부산역에 도착해 선을 만났어야 했다.

그리고 기차가 부산을 떠난 한 시간 후 권 주임이 고안한 장치에 맞춰 폭탄이 터지면 작전은 완벽히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선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윤조는 혹시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혼자라도 떠나라 당부했지만 선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5분.

제발. 제발.

레이스 장갑이 흥건해지도록 땀이 흐른 손을 틀어쥐는데 입구에 익숙한 그림자가 들어섰다.

반가움에 일어섰던 선이 이내 뻣뻣해졌다.

‘순용이가 왜?’

지금쯤 의령댁과 떠났어야 할 순용이 왜 여기 나타났단 말인가?

선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순용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윤조는? 왜 윤조는 안 보이는 거지?

“왜……?”

“마님! 죄송합니더. 오래 기다리셨습니꺼?”

굽실거리며 여행 가방을 든 순용이 재빨리 속삭였다.

“티 내지 말고 따라온나.”

선은 침착하게 고개를 쳐든 채 순용을 따라 역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선의 눈앞에 조선소에 들어갔어야 할 윤조의 세단이 서 있었다.

더구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작전 후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던 권 주임.

“이게…….”

순용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

“타이소. 자세한 거는 가믄서 말씀드리겠습니더.”

자동차를 개인용으로 굴릴 수 있는 민간인이 거의 없던 때라 사람들은 선을 존귀한 신분이라도 되는 양 흘깃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머리까지 숙였다.

선이 차에 오르자 문을 닫아 준 순용이 조수석에 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지점장님은요?”

시동을 건 권 주임이 차를 출발시켰다.

“권 주임님! 윤조 씬…….”

“체포되셨습니다.”

덜컹.

돌부리에 걸린 차가 울렁대자 선의 고개가 부러진 인형처럼 힘없이 꺾였다.

* * *

지난밤 옆 동네에 미국 비행기가 떨어뜨리고 간 폭탄이 터져 사람이 열 명도 넘게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고개 넘어 들린 날, 선은 윤조의 행방을 수소문하러 간 권 주임을 기다리느라 대문간을 서성대고 있었다.

“와서 이거 좀 묵으라.”

의령댁이 부엌에서 죽을 쑤어 나오며 말했다.

“나중에요.”

“아까도 나중이라 안 캤나. 퍼뜩 온나! 언제까지 생으로 굶을 끼고.”

의령댁이 며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 핼쑥해진 선의 팔을 끌어 죽 그릇 앞에 앉혔다.

멀건 죽을 보며 선이 중얼거렸다.

“안 넘어가는데.”

“안 넘어가도 묵으라. 억지로라도 묵어야 나리 오실 때까지 버틸 거 아이가.”

치미는 눈물을 참으며 수저를 드는데 권 주임이 순용과 함께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찾았어요?”

권 주임이 고개를 젓자 선이 실망하여 도로 주저앉았다.

부산과 경남 일대 경찰서와 헌병대, 교도소와 군부대까지 인맥을 동원하고 뇌물까지 뿌리며 뒤졌지만 윤조의 종적은 묘연했다.

“좀 씻고 오겠습니다.”

권 주임이 사라지자 의령댁이 순용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데를 갔드노?”

“마산.”

“아이고마! 이러다가 조선 팔도를 다 뒤지겠고마. 아니, 권 주임은 뭐하는 사람이고? 잡히간 거는 그렇다 치고 오데 있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게 주임님 탓입니꺼.”

“이상하다 아이가. 순사가 잡아갔으믄 경찰서에는 있어야지. 이건 뭐 귀신도 아니고.”

의령댁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렸다.

“혹시 그새 죽이가꼬 어데 파묻은…….”

“할매! 그런 소릴 와 하노!”

순용이 고함을 치자 놀라 귀를 막았던 의령댁이 뒤늦게 선의 눈치를 보았다.

“답답해서 안 그카나. 답답해서.”

“아주머니.”

선의 부름에 의령댁이 제풀에 놀라 더듬댔다.

“어, 어? 와?”

“지금이라도 순용이하고 여길 떠나세요.”

선의 권유에 순용이 펄쩍 뛰었다.

“무신 소리고! 누부 혼자 우째 지낼라꼬?”

“내가 한 소리 했다고 삐짔나?”

“그게 아니라 위험해질까 봐 그래요. 순용이 너도 주임님 따라다니는 거 이제 하지 마. 알았어?”

윤조가 사라진 마당에 다른 식구들마저 다칠까 선은 무서웠다.

“괜찮을 겁니다.”

그때 권 주임이 수건으로 얼굴을 꾹꾹 눌러 닦으며 나왔다.

“괜찮다이, 무신 소린교?”

“제가 지금까지 무사한 걸로 봐선 순용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란 말입니다.”

“그라니까네 그기 무신 소리고 말이다!”

의령댁이 소리를 높이자 권 주임이 차분히 설명했다.

“출발도 못 했어요. 사무실 덮쳐서 지점장님만 잡아갔다고요. 같이 있던 저도, 차도, 폭탄도 다 두고 딱 지점장님만.”

순용이 의미심장하게 권 주임을 바라보았다.

“하기는. 작전이 샜으믄 주임님도 잡아가고, 차도 진작 징발해 갔을 낀데.”

“이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에요.”

권 주임의 말에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만 있던 의혹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 말씀은 화연 아가씨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깨에 수건을 걸며 권 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고선 이렇게 아무 흔적이 없을 수가 없어요. 제가 내일 민병기 판사를…….”

“아뇨.”

선이 말했다.

“제가 만날게요. 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화연 아가씨라면.”

굳어진 얼굴로 수긍하는 권 주임에게 선이 부탁했다.

“저 대신 약속을 잡아 주세요.”

권 주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부인.”

* * *

바보 같은 년.

이제야 날 찾아?

윤조를 가둔 폐쇄된 옛 지서의 지하실로 내려가며 화연이 조소를 머금었다.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며 오라버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못 참고 먼저 연락을 할 뻔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차질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화연이 쇠문 앞에 섰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랜만이야, 차돌 아범,”

지금은 경성에서 아버지의 경호를 맡고 있는 차돌 아범은 가노(家奴) 출신으로 부친의 지원을 받아 고등계 형사까지 한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보기 험하실 텐데.”

차돌 아범의 경고에 화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선의 처분을 결정하기 전 윤조의 의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은 있지?”

“예. 들어가십시오.”

육중한 쇠문이 열리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들어가니 화연이 오기 전 치웠는지 별다른 도구는 보이지 않았지만 물이 흥건한 바닥과 비명이 인 박인 듯 음습한 공간에 손이 묶인 윤조가 처참한 몰골로 구겨져 있었다.

“어…….”

잠시 말문이 막혔던 화연이 입술을 축이며 손짓을 했다.

“일단 앉혀 봐.”

차돌 아범이 윤조를 의자에 앉히는 사이 화연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얼굴은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충성스럽게 지킨 차돌 아범 덕분에 피투성이가 된 몸과 달리 윤조의 얼굴은 말짱하다 못해 처연하고 퇴폐적인 느낌까지 흘렀던 것이다.

찢어진 헝겊처럼 너덜거리는 몸에 아름다운 얼굴이라.

그 부조화에 픽 웃어 버린 화연을 차돌 아범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손 풀어 주고 잠깐 나가 있어.”

차돌 아범이 밧줄을 풀자 윤조가 미간을 찡그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화연은 내심 스스로에게 놀랐다.

사실 겁이 좀 났었다.

망가진 윤조를 대면하면 마음이 약해져 복수심이 사그라지거나 죄책감이 생길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보니 아무렇지도 않다.

어쩌면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라 의사, 그것도 피를 보는 외과 의사가 체질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화연이 입을 열었다.

“상당히 힘들어 보이네요.”

“……보다…… 시피.”

가까스로 나온 대답이었건만 화연은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의 말을 조롱이라도 하듯 고문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잘난 척이라니.

그건 기분과 별개로 안 좋은 징조이기도 했다.

“더 힘들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윤조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화연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기다렸다는 듯 나온 말에 화연이 얼떨떨해졌다.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요. 이유가 뭐였건 당신의 상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용서하시오.”

화연은 더 기분이 나빠졌다.

차라리 매국노라 비난받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그럼 나한테 돌아오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왜요? 미안하다면서?”

윤조의 고개가 작게 흔들거렸다.

왜 저러나 했더니 힘이 없어 소리를 못 내는 것일 뿐 웃는 거였다.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아. 자신을 증명받기 위해 그럴듯한 트로피가 필요했을 뿐이지. 친구이자 이길 수 없었던 라이벌의 연인을 빼앗아 결혼했던 것처럼 말이요.”

화연은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게 뭐 어때서요? 덕분에 윤조 씨도 필요한 것을 얻었잖아요.”

“벌레로 취급당했어도 벌레로 산 것은 내 잘못이오. 그걸 깨닫고도 다시 벌레로 돌아갈 순 없지.”

“내 곁에 있으면 벌레로 사는 거다? 하!”

코웃음을 치며 윤조를 보는 화연의 눈매가 칼날처럼 예리했다.

“그래요. 벌레로 사느니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죠. 차돌 아범!”

“예, 아가씨.”

“이제 얼굴도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예.”

“아, 그리고 꼭 해줄 말이 남았으니 혹시 죽을 것 같으면 연락하고.”

선을 어떻게 처분했는지는 돌이킬 수 없게 된 그 순간에 말하는 것이 제일 적당하리라.

“해줄 말이라니?”

불안 가득한 물음에 화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난 윤조 씨가 아니니 벌레처럼 살아도 상관없잖아요.”

“나 하나면 되잖소. 선이는 안 돼.”

“너무 걱정 마요. 선택권은 줄 생각이니까. 그럼.”

“화연이. 민화연!”

윤조의 부르짖음을 뒤로하고 지하실을 나오며 화연은 깨달았다.

이젠 피 냄새가 고역스럽지 않다는 것을.

* * *

우연일 거야, 우연.

열흘 전과 같은 여관, 같은 복도를 걸으며 선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연으로 돌리려 해도 너무나 똑같다.

화창한 날씨, 뭉게구름을 스치는 더운 바람.

그때와 같은 여종업원의 하얀 타비(たび, 일본식 버선)가 길이 잘 든 마루 결을 삭삭 스치는 소리까지.

긴 골마루를 걸어 윤조와 묵었던 방 앞에 이르렀을 땐 머리 위로 피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종업원이 그 방을 지나 옆방에서 걸음을 멈추자 비로소 긴장감이 한풀 내려앉았다.

그래, 우연일 거야. 우연.

무릎을 꿇은 여종업원이 문을 열어 주자 유카타 차림의 화연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탁자에 팔을 기댄 채 밖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엔 꼬부라진 이국의 문자가 쓰인 포도주병과 술이 담긴 잔도 보였다.

선은 자꾸만 오그라드는 어깨를 펴고 화연 앞에 앉았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안 나서 그저 화연의 옆모습만 응시했다.

화연이 유리잔의 가는 기둥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인사도 안 하니?”

당황한 선이 그때서야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아가씨.”

“멍청한 종년.”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았기에 선은 입술을 꾹 물었다.

“열흘만인가? 여기 다시 온 거 말이야.”

선이 놀라자 화연이 혀를 찼다.

“내가 널 여기로 부른 게 우연인 줄 알았니? 저런 한심한 년이 뭐 좋다고.”

윤조를 연상시키는 말에 선이 정신을 차렸다.

“오늘 뵙자고 청한 것은 윤조 씨가 실종…….”

“윤조 씨라? 맞다. 그때 이름을 부르면 넣어 주겠다고 윤조 씨가 널 애태웠었지?”

“……예?”

“너야 원래 천한 것이라 치고 도윤조의 취향이 그리 저급할 줄이야. 하긴 뭐, 널 택한 것만 봐도.”

어깨를 으쓱하며 포도주를 홀짝거리는 화연을 보며 선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날……?”

“그래, 이 방에 있었어. 밤새도록.”

명치를 차인 듯 선이 하얗게 질렸다.

“미쳤군요.”

화연이 느릿하게 턱을 치키며 웃었다.

오싹할 만큼 도취적이고 나른한 미소였다.

“이런. 넌 내가 안 미쳤길 바라야 할 텐데.”

뭔가 이상했다.

혹시 술에 취한 건가?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는데.

“지점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으음, 넌 닥치고 듣기만 해. 어디 종년이 묻지도 않은 일에 입을 나불댄담.”

말끝마다 종년, 멍청한 년 하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일부러 찍어 누르려는 심산인가 싶어 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는 선에게 화연이 비소를 날렸다.

“사상범으로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화연이 술병을 기울이자 핏빛 포도주가 주둥이를 자른 항아리 모양의 잔에 쪼르륵 고여 들었다.

“고문당해 자백하고, 그 거짓 자백으로 날치기 재판을 받아 몇 년을 감옥에서 썩는 거야. 전쟁터로 보낼 수도 있고. 다른 조선 청년들처럼 총알받이가 되는 거지.”

“지점장님을 잡아간 건 경찰이 아닙니다.”

“그렇지. 경찰이 훨씬 나은데. 적어도 시체는 내줄 테니 말이야.”

“아가씨……!”

화연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넌 네게 해야 할 말이 있어. 그걸 하려고 날 찾아왔잖아.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빨리 말해. 그래야 나도 다음 일을 하지. 네가 미적대면 윤조 씨가 고통받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야.”

악문 턱이, 꽉 쥔 주먹이 와들와들 떨렸다.

하지만 윤조의 안전이 화연에게 달렸다는 것을 안 이상 다른 수가 없었다.

“살려 주십시오.”

“누굴?”

선이 화연을 보았다.

“말해. 누굴?”

“……지점장님을 살려 주십시오.”

선을 굴복시킨 화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진작 그리 나왔어야지. 벌써 며칠째니? 불쌍한 도윤조. 멍청한 니년 때문에 6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맞고, 매달리고, 물에 처박히고…….”

선이 귀를 막고 몸을 수그렸다.

“그만, 그만! 살려 주세요. 제발 도련님을 살려 주세요.”

엎드려 비는 선을 도도하게 내려다보던 화연이 쪽지를 던졌다.

“내일 일찍 그리로 가.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자를 따라가.”

선이 코앞에 떨어진 쪽지 속 글자를 눈으로 읽었다.

내용은 짧았다.

지정(池町, 중앙동), 동백 여관.

여관?

“여기서 뭘 하는…….”

“말했지. 물어보지 말라고.”

“어찌 믿고요? 제가 가면 도련님을 살려 주신다는 걸 어찌 믿고…….”

“집에 돌아가면 윤조 씨 소식이 와 있을 거야.”

다가온 화연이 푸르도록 창백해진 선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휘감아 당긴 후 귓가에 속삭였다.

“명심해. 네가 거절해도 죽고, 안 가도 도윤조는 죽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도, 네가 중간에 도망가도 죽어.”

잔인할 정도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화연에게 선이 물었다.

“제가 떠나면 바로 풀어 주시는 겁니까?”

“조선을 뜬 게 확인되면.”

조선을 떠?

아예 다른 나라로 보낼 작정임을 알고 선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요시코, 넌 착한 아이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리라 믿어.”

화연은 그렇게 선택지 없는 선택을 강요한 후 돌아서 손을 내저었다.

“이제 나가.”

대문을 넘어서자 의령댁과 순용, 권 주임까지 일어나 선을 쳐다보았다.

화연의 말이 진짜였구나.

초량으로 오며 집에 돌아가도 윤조의 소식이 없었으면, 오늘만은 제발 없었으면 바랐건만.

자신을 향한 침통한 시선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부인…….”

“지점장님 소식인가요?”

의령댁이 놀라며 말했다.

“우예 알았노? 권 주임이 방금 만나고 왔단다.”

“……마, 만났다고요?”

살아 있다는 기별 정도를 예상했던 선이 뜻밖의 말에 걸음을 내딛다 휘청댔다.

“야야, 진정하그라.”

선이 의령댁의 부축을 뿌리치고 권 주임에게 달려갔다.

“어디 계신 거예요? 어떻던가요? 몸은 괜찮아요?”

“일단 들어가시죠.”

안방에 들어가니 챙기다 만 듯 짐 가방에 선의 옷가지가 두서없이 포개진 것이 보였다.

“이게 뭐예요? 내 옷을 왜?”

“지점장님께서 하루빨리 부인을 피신시키라고 하셨습니다.”

“피신이라니 그게 무슨……?”

심상치 않은 낌새에 선은 피가 마르는 듯했다.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그 사람, 무사한 거 맞아요?”

권 주임이 곤란한 듯 턱밑을 훑었다.

“그게…… 괜찮다고 전하라고…….”

“하아…….”

심장이 뜯겨 나갈 듯 아팠다.

“어딘가요? 가볼래요. 밖에서라도 봐야겠어요.”

“저도 눈을 가리고 가서 어딘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생각보다 더 완벽하고 철저한 덫에 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어떡해요. 이제 어떡해…….”

“살아 계신 건 확인했으니 기운 차리십시오. 지점장님도 꿋꿋이 버티고 계셨습니다. 예상되는 장소 몇 군데를 뒤지고 있으니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조만간이 언제인 걸까?

선에겐 오늘 밤까지밖에 시간이 없었다.

“개성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순용이와 의령댁을 데리고 내일 새벽 첫 기차를 타세요.”

“개성이요?”

“혹시 변고가 생기면 본가 가까운 곳이 나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신신당부를 하셨으니 꼭 따라 주십시오.”

선은 입술이 말라 왔다.

윤조는 개성으로 떠나라 하고, 화연은 시키는 대로 해야 윤조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민화연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권 주임이 말을 꺼낸 순간 화연에게 잡혔던 선의 뒷덜미가 화인처럼 후끈거렸다.

‘명심해. 네가 거절해도 죽고, 안 가도 도윤조는 죽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도, 네가 중간에 도망가도 죽어.’

선은 권 주임의 눈을 피해 다다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일이라고.”

“참! 그럴 거면 뭐 하러 그 먼 데까지 사람을 불렀답니까?”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권 주임이 화를 냈다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민병기 판사를 만나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권 주임이 품에서 구깃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지점장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윤조의 편지를 받는 선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 쉬십시오.”

권 주임이 나간 후 선이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굴러다니는 전단지였는지 흙먼지가 묻은 종이에 쓰인 익숙한 필체를 보자 선은 눈물부터 쏟아졌다.

평소처럼 유려한 글씨가 아니라 획이 흔들리고 피로 짐작되는 얼룩까지 군데군데 묻어 있어 겪은 고초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선은 자꾸만 앞을 가리는 눈물을 닦고 편지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아내 선에게,

떠나라 했는데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럴 거라 짐작은 했으나 혼자 울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오.

나는 평안하오.

그리고 당신이 몹시 보고 싶소.

당신은 번민으로 잠을 못 이루겠지만 나는 이제야 어린 날, 혼자 구차하게 제외되었던 곤욕을 친구들과 함께 치르는 것 같아 마음이 가볍소.

그러니 네 걱정은 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개성으로 떠나시오.

반드시 내가 당신을 찾아가겠소.

선.

나는 오랜 세월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소.

당신은 나를 태양이라 했으나 실상 나는 벌레와 같이 비루했소.

그런 나에게 당신은 벌레가 되어 곁에 와줘서 고맙다고 했지.

당신은 언제나 그랬소.

헌신적이고 솔직하여 외로운 나를 달래 주었고, 한결같고 심지가 굳어 지친 나에게 새 힘을 주었소.

나는 견디기 위해 당신이 필요했소.

당신을 부산에 데리고 오면 위험해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을 훔쳐 왔소.

당신을 곁에 두는 것으로 현실을 버텨 보려 했으나 끌리는 마음은 점점 그 이상을 원하고 원해 결국 당신을 가지고야 말았소.

그 밤, 얼마나 미칠 것 같았던지, 얼마나 두려웠던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던지.

선.

순결한 푸른 잎사귀로 벌레인 나를 품어 준 나의 아내.

당신의 변함없는 흠모와 믿음으로 나는 거짓된 삶에서 걸어 나와 다시 태양처럼 살 수 있게 되었소.

고맙소.

내 영혼을 다해 사랑하오.

다시 만나는 날까지 꼭 건강하시오.

나의 녹엽.

나의 푸른 잎사귀

나의 선.

녹엽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선의 눈물이 편지 위로 툭툭 떨어졌다.

돌아와 말해 준다더니 왜 편지에 썼어요? 왜?

선은 자신의 눈물로 윤조의 글씨가 지워질까 편지를 고이 접어 가슴에 안고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밤새 울었다.

다음 날 새벽, 역으로 가기 위해 권 주임이 왔을 땐 깨끗이 치워진 방에 화연이 준 쪽지만 덩그러니 남긴 채 선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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