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벌레가 된 태양
바스락거릴 만큼 빳빳하게 풀을 먹인 모시 치마가 한 시간도 안 되어 축 처질 만큼 습하고 더운 오후, 어딘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슬주렴을 헤치자 약재 썩는 냄새가 숙경의 코를 찔렀다.
“어후, 있는가?”
하도 어두컴컴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머리가 허연 노파가 구석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판사 댁 마님 또 오셨소.”
“깜짝이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네.”
“없긴요. 죽으나 사나 여기 붙어 있는 뎁쇼.”
“할멈이 약방에 붙어 있건 매달려 있건 내 소관 아니고, 저번에 사갔던 그 고약이나 주시게.”
노파가 헤벌쭉 웃자 앞니가 뭉텅 빠진 입 속이 마치 동굴처럼 보였다.
“잘 듣지요?”
“그나마.”
숙경이 떨떠름하게나마 인정하자 노파가 킬킬대며 뒷방으로 사라졌다.
“제가 뭐랬습니까? 오쿠로 약방, 후지다 약방 그것들 다 가라(から, 가짜)라니까요. 담마진(蕁麻疹, 두드러기)엔 제 고약이 최고지요, 암! 회엽과 명아주를 밤새 달여서…….”
야미(やみ, 무허가) 약방 주제에 잘난 척은.
하지만 한편으론 그럴만하다 싶기도 했다.
기절한 화연이 인력거꾼에게 업혀 들어온 것이 일주일 전이던가?
밀랍처럼 허옇게 질려서 사지를 벌벌 떠는 모습에 놀라 의사를 불렀고 좀 진정되는 듯했으나 곧 더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으니 온몸에 발진과 가려움을 동반한 두드러기가 올라온 것이었다.
몇 년 전 이혼 문제로 고생할 때도 그랬던 적이 있는지라 다시 의사를 불렀지만 주사를 맞아도, 유명 약방에서 사온 일본제 연고를 발라도 전혀 차도가 없던 것을 이 노파의 고약이 잠재웠으니.
“왜 하나뿐인가? 한 서너 개 더 주시게.”
노파가 약을 내놓자 숙경이 말했다.
“뭘 그리 많이 찾으십니까?”
“못돼 처먹은 성격이라 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잔말 말고 더 주시게.”
화연의 두드러기가 가라앉은 것은 고약의 효과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시간일 것이라고 숙경은 짐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틀림없이 지 성질머리를 못 이겨 뒤집혔던 피부가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이리라.
“지금은 만들어 둔 게 없으니 며칠 내로 갖다드리리다.”
“그러엄…….”
숙경이 아무도 없는 주변을 살피며 말꼬리를 늘였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도 되건만 직접 나선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우리 판사님이 8월 복더위에 기력이 바닥나 그런가 밤만 되면 영 시난고난하신데…….”
이 무허가 약방이 부잣집 마나님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유가 바로 자양강장, 그중에서도 남성 정력제 때문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판사 부인을 통해 진작 용하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허름한 꼴이 영 못 미더워서 고약만 사갔던 것인데 약효를 확인하니 용기가 났다.
“알겠습니다. 원래는 진맥을 해야 하는데 워낙 나랏일에 바쁘시니 내 특별히 좋은 약재로만 지어 드리리다.”
단번에 속내를 알아챈 할멈에게 내친 김에 약값까지 치르고 나온 숙경이 후련한 기분으로 본정 상점가를 걷는데 고급 양장점에서 나오는 남자의 뒤태가 어딘가 익숙했다.
‘혹시……?’
역시 윤조였다.
반가운 마음에 알은척을 하려던 숙경이 뒤따라 나오는 젊은 여자를 보고 주춤 걸음을 멈췄다.
얇은 벨트로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흰 원피스에 우아한 반 묶음 머리를 한 신여성과 양산까지 받쳐 주며 정중히 에스코트하는 윤조.
숙경은 그만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래서 화연이 다 죽어 갔던 거였어?’
윤조가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도 두드러기가 난 꼴을 보여주기 싫어 막은 것이 아니라 여자 문제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숙경은 처음으로 화연이 불쌍해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이 나쁜 시누이이긴 했지만 막상 배신의 현장을 보자 공분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윤조와 여자는 숙경이 뒤를 밟는 것도 모르고 중간 중간 멈춰서 상점도 구경하고, 귀엣말도 속삭이며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미나카이 백화점으로 걸어갔다.
‘흥, 아주 당당하구먼. 그런데 누구지?’
언뜻언뜻 보이는 여자는 말간 인상으로 보아 화류계는 아닌 듯했다.
그 와중에 미모는 화연과 견주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숙경을 진짜 놀라게 한 것은 윤조였다.
화려하고 차가운 미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따뜻한 얼굴이 있을 줄이야.
숙경은 윤조를 저리 변화시킨 여자가 누구인지 견딜 수 없이 궁금해 백화점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곧장 귀금속 매장으로 가는 둘을 벽에 붙어 살피던 숙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 진열대에 고개를 숙인 여자의 옆태가 간질간질할 만큼 눈에 익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하긴 지역 유지의 딸이면 사교 모임에서 스치듯 봤을 수도.
있어 봐, 그렇담 윤조가 화연과 어떤 사이인지 다 알 텐데.
숙경이 코웃음을 쳤다.
‘알만하구먼. 저년도 헛바람 든 못된 걸(모던 걸)임이 틀림없어.’
이 사실을 화연에게 전해 줘야 하나 고민이 되는데 윤조가 여자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자 숙경이 입을 틀어막았다.
‘반지라니, 생각보다 심각한 관계인 거 아냐?’
초조하게 서성대던 숙경은 윤조와 여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재빨리 귀금속 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숙경이 데파트 걸(백화점 점원)에서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말씀하십시오.”
“요기 있던 반지, 어떤 반지였수?”
숙경이 가리키는 진열대 빈자리를 보고 데파트 걸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 금으로 만든 쌍가락지요?”
“……싸, 쌍가락지?”
“예, 방금 나간 남자분께서 며칠 전에 직접 주문하신 반지예요. 결혼 기념으로 나눠 끼신다고.”
“겨, 결혼!”
경악한 숙경이 윤조와 여자가 서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윤조와 함께 막 승강기를 오른 여자가 몸을 돌려 정면을 보는 순간 숙경은 손이 닿지 않아 미칠 듯 간지럽던 등을 누군가 할퀴고 간 듯 충격에 빠졌다.
그 아이였다.
윤조의 하녀, 선.
“아가씨! 아가씨!”
집을 울리는 올케의 목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화연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막 뜨거운 약물로 목욕을 한 터라 온몸이 화끈거리고 노곤했다.
“일어나 봐요. 큰일 났수! 이 망신을 어쩌면 좋아!”
노크는커녕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어깨를 흔드는 숙경 때문에 간신히 가라앉힌 화연의 마음이 다시 불쾌해졌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나가요.”
“지금 그렇게 한가한 소릴 할 때가 아니우. 불쌍도 하지. 남들은 평생 한 번도 안 겪는 일이 또 일어나다니. 팔자가 어찌 그리 사나울꼬.”
한 번도 안 겪는 일이 또 일어나?
숙경이 이 난리를 치는 이유가 자신과 관련된 것임을 깨닫자 화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내가 무슨 꼴을 보고 온 줄이나 아슈? 아, 일어나라니까!”
올케가 이불을 들추고 화연을 강제로 일으켜 앉혔다.
“왜 이래요?”
“도 지점장이 데리고 있던 하녀 년하고 혼인을 했수. 그냥 살림을 차린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해버렸다고.”
화연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못 믿겠지요? 그런데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까지 하고 오는 길이유.”
“……확인이라뇨?”
“개성에서 온 그년하고 반지 나눠 끼고, 결혼사진도 박고, 부청에 혼인 신고까지 했단 말이우.”
염산을 들이부은 것처럼 화연의 눈앞이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일부러 그 계집을 부산에 데려온 거랍디다. 연분은 진작 개성에서부터 났고, 부모가 반대할 것이 빤하니 둘이서만 혼인하려고…….”
헛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데 일주일 전 윤조가 했던 말이 기습적으로 화연의 마음을 찔렀다.
‘당신 덕에 내 죄를 낱낱이 깨달았으니 회개하고 다시는 이중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오.’
맙소사!
그게 진심이었단 말인가?
그 진심을 이리 잔인하게 행동으로 옮겼고?
“아가씨, 괜찮수? 고개 좀 들어 봐요, 응?”
“더 말해 봐요. 또 뭘 봤어요?”
망설이던 숙경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도 지점장이 그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수. 보란 듯이 그년하고 팔짱을 끼고 본정을 누비고 다니니 보는 사람마다 숙덕거리고 손가락질에, 아이고!”
숙경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덕분에 우리 집안만 멸시를 당하게 생겼수. 망신, 망신, 그런 개망신이 또 있을까? 저번엔 아가씨 여학교 동창이라 수준이라도 비슷했다지만 이번엔 천한 아랫것한테 남자를 뺏겼으니…….”
“입 다물어요!”
눈에서 불을 뿜으며 일어난 화연이 장롱을 열었다.
“옷은 왜 꺼내우?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못 믿어요.”
“확인은! 동래 온천으로 신혼여행인가 뭔가까지 갔는데 무슨 확인이 더 필요하우. 꼴에 할 건 다 해. 아유, 이게 무슨 망조람.”
화연은 쉴 새 없이 ‘망신이다, 망조다’를 중얼대는 숙경을 밀어내고 문을 잠가 버렸다.
네까짓 게 마지막까지 날 이리 모욕해?
화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끝을 내도 내가 내고, 버려도 내가 버릴 거야.
두 번 다시 비참하게 버림받지 않아.
피가 맺힌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덧칠하며 화연은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종점인 온천장역에서 전차를 내린 윤조가 향한 곳은 온천이 아니라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있는 한 무덤이었다.
선과 함께였기에 지척에 두고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을 용기를 내어 찾아간 것이다.
무덤은 아침저녁으로 살피는 손길이 있는지 잘 깎은 상고머리처럼 그 흔한 잡초 하나 없이 말끔했다.
“누구 무덤인가요?”
선의 물음에 윤조는 아무런 대답 없이 다만 준비한 술을 부어 열여덟에 비극적으로 멈춘 친구의 청춘을 처음으로 추모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
“뉘신가?”
윤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앞치마에 뭔가를 감싸 쥔 늙은 여인이 서 있다.
처음 보았지만 윤조는 단번에 그 작달막한 여인을 알아보았다.
“아무도 아닙니다.”
윤조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가방을 드는데 여인이 말했다.
“동석이 친구지? 개성 출신이라던. 맞지?”
“잘못 아셨습니다. 가자, 선아.”
윤조는 선의 손을 끌어 서둘러 여인을 지나쳤다.
“꼭 한번 보고 싶었네.”
등골을 찌르르 울리는 여인의 진심에 윤조의 걸음이 멈췄다.
“때마다 쌀도 보내주고, 인삼에, 돈까지. 덕분에 모자람 없이 잘 살았어.”
다리가 늪에 빠진 듯 움직이질 않는다.
그렇게 윤조는 어쩔 수 없이 친구와 눈매가 닮은 여인과 대면했다.
그리고 여인이 앞치마에 조심히 감싸고 있는 것이 샛노란 참외 한 알임도 알게 되었다.
윤조의 시선을 의식한 여인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우리 애가 참외를 좋아해서. 출출할 시간이라 간식 삼아 주려고 왔다가 이리 귀한 친구를 만나게 됐구먼.”
윤조는 가슴이 미어져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닙니다, 전…… 저 때문에 동석이가…….”
울먹이는 윤조의 어깨를 여인이 다정히 짚어 주었다.
“동석이가 자네 얘길 참 많이 했어. 참 재미있는 친구라고. 부자라 밥도 잘 사주고, 코오피라나? 뭐 그런 것도 사주고. 공부도 제일 잘해서 시험 칠 땐 가끔 답도 보여준다고. 함께 있으면 생기는 것이 많은 친구라고 좋아했었지.”
제 속에 서러움이 이리 많았던가.
윤조는 선이 곁에 있다는 것도 잊고 눈물을 흘렸다.
“그놈이 사람을 참 잘 봤어. 세상 떠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이리 끊임없이 주는 친구가 세상천지 어디 있겠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네, 잘 왔어. 우리 동석이도 반가워했을 거야. 이쁜 색시하고 꼭 또 오게. 다음엔 아이들도 데리고, 알았지?”
동석의 어머니는 선을 보며 웃었고, 윤조는 땅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오래오래 울었다.
온천욕을 마친 윤조가 여관방으로 돌아오니 선이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다.
이부자리도 깔려 있는데 누워서 편히 자지 않고.
곁에 앉아도 깨지 않는 선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던 윤조가 팔을 괴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아 그런가?
뜻밖의 서늘함이 배어나는 선의 콧대에 점점이 흩뿌려진 주근깨가 귀엽고 안쓰럽다.
피곤하기도 할 테지.
익숙지 않은 옷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들을 한 후 전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동래에 도착해선 불편한 구두로 산까지 올랐으니.
목욕 후라 더욱 발그레해진 볼을 쓰다듬자 선이 조용히 눈을 뜨더니 사람을 처음 보는 어린 짐승처럼 윤조를 빤히 응시했다.
새삼 체면도 잊고 엉엉 울었던 것이 창피해진 윤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지점장님이 재밌는 사람이었다고요?”
선의 잠긴 목소리는 물음이 아니라 불신에 가까웠다.
뭐, 믿기 힘들긴 하리라.
“어. 되게 까불고, 사람들 웃기는 것도 좋아했어.”
“설마.”
“진짠데. 보여줄까?”
윤조가 손으로 양 귀를 쭉 당기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은 채 원숭이 흉내를 내며 온 방을 펄쩍펄쩍 뛰어다니자 뜨악해하던 선이 나중엔 배를 잡고 깔깔댔다.
“어우, 뭐야! 그만하세요.”
“봐. 웃기지?”
“어이가 없어 웃었습니다, 뭐.”
느슨해진 유카타 끈을 조인 윤조가 벽에 기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서기 좋아하고, 장난 많이 치고. 나 돈도 막 썼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 모아다 영화 보고, 요릿집 가서 청요리도 실컷 먹고, 하숙집에서 몰래 술도 마시고. 그러다 모임도 내가 만들었는데…….”
회색 먼지처럼 내려앉는 목소리.
선이 윤조의 손을 끌어 입술에 댔다.
“역시 지점장님은 주고 또 줘서 사람을 끄는 태양 같은 분이셨네요.”
선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며 윤조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음지를 기는 벌레가 되어 버렸지.”
갑자기 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연 아가씨가 마음에 걸리세요?”
“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전에 화연이 벌레 어쩌고 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던 모양이다.
시무룩한 얼굴이 예뻐서 놀리고 싶어진 윤조가 짐짓 심각한 척했다.
“그러고 보니 좀 미안하긴 하네.”
윤조가 금세 뾰로통해지는 선의 뺨을 장난스럽게 콕 찔렀다.
“바보야. 그런 생각 안 했어. 단 한 번도.”
“참…….”
옅게 웃으면서도 선의 미간이 풀리질 않자 윤조가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내가 벌레라는 말을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알아?”
“화연 아가씨 말고요?”
“말고. 경찰서 취조실이었어.”
비밀 회합을 갖던 중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연행된 지 이틀 만이었던가?
한방에 몰아넣고 몽둥이찜질만 하던 전날과 달리 새로 들어온 조선인 고등계 형사는 눈매부터가 달랐다.
“너희들은 벌레다.”
형사가 감정 없는 목각 인형처럼 선포한 직후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윤조의 지옥은 친구들과 좀 달랐다.
비명, 피와 땀, 구토.
공포에 못 이겨 내지른 똥오줌 냄새가 가득하던 취조실에서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러진 고통에 울부짖다 기절하는 친구들을 윤조는 의자에 묶여 꼼짝없이 지켜봐야 했다.
왜 자신만 제외인지도 몰랐지만 왜 완전히 제외시켜 주지 않는지도 몰랐다.
친구들의 피와 난무하는 비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윤조는 흔적도 남지 않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아버님이 손을 쓰신 거였어. 뒷돈을 받았으니 손은 못 대겠고, 그런데 주모자는 나인 것 같으니 그냥 둘 순 없고, 그래서.”
돈으로 고문을 면했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풀려나 개성에 돌아온 직후 알게 된 윤조는 후에 동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눈을 감을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어. 그러면 친구들이 더 심하게 맞았거든. 아직도 기억나. 살이 타던 냄새. 맨발에 묻었던 토사물. 날 보던 저주와 원망의 눈빛까지 전부 다.”
그리고 가장 키가 작고 말랐던 동석의 목숨이 서서히 빠져나가던 그 순간.
“결국 난 벌레처럼 짓밟혔지.”
눈물이 옥 같은 선의 뺨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졌다.
“미안해요.”
“네가 왜?”
“도련님이 벌레가 돼서 난 좋아요. 태양이었으면, 계속 태양이었으면 눈이 부셔서 감히 다가가지도 못했을 테니까.”
윤조가 눈물을 닦아 주자 그마저도 황송한 듯 선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이런 생각해서.”
윤조가 선의 턱을 살그머니 들었다.
“이리 눈물이 많으면서 어찌 참고 살았을까?”
“도련님이 울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기억 안 나세요? 엄마 찾아간다고 몰래 나왔던 밤에.”
“……아, 그날.”
취조실로 돌아가 있는 악몽을 꾸고 집 안팎을 미친놈처럼 휘돌다 보따리를 안고 도망가려던 아홉 살 선과 마주쳤었다.
“쥐방울만 한 계집애가 엄마를 찾겠다는 말까지는 당차게 하더니.”
“날 밝으면 가라고 하셨잖아요. 안 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나가라니 어찌나 서럽던지.”
“그래서 울었어? 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우는 통에 얼마나 당황한 줄 알아?”
선이 눈물을 닦으며 작게 웃었다.
“그날 도련님께 조국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어미에게 자식은 조국 같은 거라고, 반드시 돌아오실 테니 울지 말라고.”
“그 말 때문에 여태 안 울었다고?”
달래느라 뭐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했던 말이었는데 그걸 금처럼 간직한 선을 보며 윤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울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믿고 싶어서요.”
윤조가 선의 얼굴을 애틋하게 감싸고 입을 맞췄다.
이 여자는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기나 할까?
어린 선이 견디고 있던 건 자신처럼 치기 어린 패배감이나 실체 없는 무력감이 아니었다.
굶주림은 고향을 떠나게 했고, 그 여정에서 함께 자란 언니 둘이 사라졌으며, 자신 또한 낯선 땅에 홀로 버려진 생생한 현실이었다.
죄 없는 아이가 눈물로 버티고 있는 고통이 곧 이 땅의 고통이라는 자각이 자기 연민에 허우적거리던 윤조를 회복시킨 단초였다.
윤조에겐 선이 조국이었다.
“고맙다.”
이마를 맞대고 속삭여 준 윤조에게 선이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무릎을 세워 목을 끌어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그리 고백하곤 다시 윤조의 입술을 맞아들였다.
태양 같아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던 남자가 벌레가 되어 자신에게 숨어들어 준 것이 고마워 선의 손길이 과감해졌다.
윤조의 연한 귓불을 물고 목을 더듬어간 선의 입술이 앞섶을 젖히고 가슴까지 내려갔다.
촉촉한 혀로 가슴을 핥아 주자 윤조의 호흡이 급해졌다.
제대로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은 용기를 내어 옷깃을 더 벌리고 배꼽에 혀를 담갔다.
“으.”
떠밀리듯 나온 윤조의 신음에 선의 아랫도리가 흐뭇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선은 더욱 얼굴을 숙여 윤조의 뿌리까지 입술을 댔다.
윤조는 경직되었지만 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또한 사랑하는 윤조의 몸이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보들보들한 살갗을 머금으니 윤조의 체온이 선에게도 느껴질 만큼 훅훅 올라갔다.
괜찮다는 건가?
시험 삼아 물고 있던 입술에 꾹 힘을 주었더니 윤조가 선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틀어쥔다.
좋다는 거구나.
혀까지 쓰니 목 안쪽에서 긁는 듯 굵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맞춰 가다 보니 그를 입 안이 꽉 차도록 삼키게 된 선에게 윤조가 숨 가쁘게 속삭였다.
“더.”
여기서 더?
더는 공간이 없어 곤란한데 윤조가 허리를 들썩여 선의 아래를 들락거릴 때처럼 움직였다.
아, 그렇게!
마침내 깨달은 선이 머리를 앞뒤로 살살 움직이자 윤조의 뿌리가 더욱 크게 부풀었다.
“그만.”
윤조가 선을 일으켜 유카타를 벗겼다.
거친 기세에 곧바로 덮칠 줄 알았는데 윤조는 알몸이 된 선을 눕히더니 그저 부신 듯 내려다본다.
부끄러웠다.
항상 어둡거나, 급박하거나, 조심스러웠기에 이리 윤조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무방비로 있긴 처음이었다.
선이 어깨를 움츠리며 하체의 삼각지를 가리려 하자 윤조가 팔을 잡더니 잔잔한 입맞춤을 꽃잎처럼 흩뿌렸다.
아, 오늘은 이런 느낌인가 했는데.
윤조가 선을 뒤집어 동그란 언덕을 깨물곤 머리를 아래로 밀어 넣었다.
이상한 느낌에 다리를 붙이려는데 윤조가 골반을 당겨 선의 엉덩이를 치켜들게 했다.
다리까지 벌리게 하니 흡사 개구리 같은 자세라 선이 상체를 뒤틀었다.
“저기…….”
“괜찮아. 예뻐.”
윤조가 선의 다리 사이를 빨았다.
날쌘 혀가 다람쥐처럼 검은 숲을 돌아다니자 선이 요를 쥐어 잡았다.
“으음!”
“맛있어. 산딸기 맛이야.”
“……거짓말.”
“먹어 본 사람이 그렇다는데.”
증명이라도 하듯 더 열렬히 마시는 윤조 때문에 선은 곧 절정에 이르렀다.
벼랑에서 떨어진 듯 축 늘어진 선을 윤조가 반듯이 눕힌다.
이번에야말로 기대했는데 또 아니었다.
윤조가 선을 올라타더니 입을 맞추는 것으로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
아주 느긋하게.
입술이 안 닿은 곳이 없을 만큼 샅샅이.
심지어 발가락까지.
“싫어요.”
“괜찮아. 넌 다 괜찮아.”
“그래도…….”
“너한테서 나온 건 땀방울도 달콤해.”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은 혼미했다.
닿을 듯 닿을 듯, 그러나 윤조의 도움이 없으면 끝내 닿지 못할 지경에서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선이 애원했다.
“제발…….”
“제발? 어떻게 제발?”
“애태우지 말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미칠 것 같아요. 도련님.”
“이름을 불러 주면 원하는 걸 줄게.”
이름?
감히 상상에서조차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을 여기서 불러 보라고?
선이 손가락을 물며 망설이자 윤조가 다시 아래를 괴롭혔다.
“아흑!”
“이름을 불러 주면 혀 말고 다른 걸 넣어 주지.”
윤조의 약속에 선의 습지가 본능적으로 물을 흘려댔다.
“착하지. 어서.”
뱀처럼 꿈틀대며 유혹하는 윤조를 이기지 못하고 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윤조 씨…….”
“옳지. 잘했어.”
과연 혀 대신 다른 게 파고들긴 했다.
깊숙이 들어와 살짝 구부린 채 빙 돌며 훑어 주는 윤조의 손가락.
좋긴 했지만 진짜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선의 속살이 움찔움찔 난리를 부렸다.
“도련니임…….”
짜증이 실린 부름에 윤조가 엄한 표정이 되었다.
“또.”
“……윤조 씨, 그거 말고…….”
“난 이걸 말하는 거였는데.”
그나마도 빼버리더니 과즙이라도 묻은 양 손가락을 핥는 윤조 때문에 선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만요, 네.”
“그러니까 원하는 걸 말해. 얼른.”
윤조가 흠뻑 젖은 선의 땅을 무거운 뿌리로 지그시 압박했다.
그것만으로도 황홀해 선은 눈이 감겼다. 그런데 윤조가 몸을 떼려 하자 선이 놀라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감았다.
“들어와요, 윤조 씨. 제발.”
“잘했어.”
윤조의 뿌리가 오래 기다렸던 선의 땅 깊숙한 곳에 단단히 심겼다.
“아!”
비할 데 없는 충만감이 윤조가 들이닥칠 때마다, 붉은 속살이 그로 그득히 채워질 때마다 선을 망망한 하늘로 밀어 올렸다.
“좋아? 선아, 좋아?”
“아, 좋아요!”
몸속에 심긴 윤조의 뿌리가 구석구석까지 뻗어 나가더니 어느 순간 전신을 빈틈없이 둘러 옥죄자 선이 허리를 휘며 자지러지듯 길고 높은 신음을 뱉었다.
암고양이처럼 사납게 뿌리를 물어대는 선을 버티느라 윤조의 등 근육도 덜덜 떨렸다.
“계속 있고 싶어. 네 속에 영원히.”
“있어요. 있어 줘요…….”
맹세는 밤새도록, 쉴 새 없이, 맹렬할 정도로 이어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어떻게 그런 힘을 받아내는지 서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창호지 문밖으로 어스름하게 여명이 밝아올 때에야 선과 윤조는 서로에게 기댄 채 숨을 돌렸다.
“신기해요.”
“뭐가?”
“머리카락이요.”
“머리카락?”
마침 어깨를 덮는 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놀던 윤조가 되물었다.
“엉덩이까지 치렁거리던 걸 잘라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다시 그렇게 머리 땋고 살라면 못 살 것 같아요.”
“내 아내가 됐으니 이제 그럴 일 없어.”
바라던 대답에 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진짜 신기한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윤조를 상전이 아니라 남자로서 받아들인 자신 말이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곧 남편으로서의 윤조도 적응되리라 믿으며 선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할 말이 있어.”
윤조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낀 선이 덩달아 굳어졌다.
“며칠 내로 부산을 떠나야 해.”
선이 불안한 눈으로 윤조를 올려다보았다.
“일본은 곧 패망할 거야. 순순히 물러서진 않겠지. 여기까지 전쟁이 번지면 본토처럼 폭격을 맞아 초토화될지도 몰라. 그전에 안전한 곳으로…….”
“혼자는 안 가요.”
폭격을 맞는 것보다 윤조와 헤어지는 것이 선은 더 무서웠다.
“걱정 마. 너 혼자 안 보내. 다만 남은 일이 있어서 네가 먼저 출발하고…….”
“싫어요. 같이 갈래요. 혼자서는 절대 안 가.”
선이 거의 울먹이며 매달리자 윤조가 등을 토닥였다.
“그래, 알았어.”
“정말이죠? 같이 가는 거죠?”
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고 첫 부탁이 이런 거라 미안하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아무것도.”
“그래, 같이 있자. 어디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