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츄와 불령선인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보래관(寶來館)에서 상영하는 선전 영화는 지루했고, 단골 티 룸(Tea room)의 커피는 오늘따라 쓰디썼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길 기대하며 윤조의 사무실이 있는 장수통을 거닐었으나 무슨 일인지 점포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불란서 제 루주라도 하나 사야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아 미나카이 백화점으로 가는데 부청에서 나온 소녀 셋이 걸어오며 재잘대는 소리가 화연의 관심을 끌었다.
“그라믄 그 언니야는 내일 우리하고 같이 안 가는기가?”
“신사분이 결혼할 사이라믄서 델꼬갔는데 당연히 안 가겠지.”
“좋겠다!”
자기들끼리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해맑던 제 소녀 적을 연상시켜 화연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우째 그래 반짝거릴 수가 있노?”
“맞제! 딱 들어오는데 내는 불이 켜진 줄 알았다. 말도 을매나 멋지게 하드노. ‘여기 김선 씨는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별안간 들린 익숙한 이름에 화연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 언니야는 무슨 복이 있어가 징용도 면하고, 그런 남자한테 시집을 갈꼬. 부러버 죽겠, 옴마야!”
화연이 달려들어 앞을 가로막자 한참 떠들던 소녀가 놀라서 말을 멈췄다.
“너 방금 뭐라고 했니? 김선?”
경계의 눈초리로 보는 세 소녀에게 화연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으니 말해 봐. 김선이라고 한 거 맞지? 그치?”
“아시는 분입니꺼?”
“스무 살쯤 되지 않았어? 얼굴 하얗고 이마에 곱슬머리.”
제대로 짚었는지 세 소녀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자세히 말해 줄래? 어떤 남자가 그 앨 데리고 갔다는 거야?”
“키도 크고 배우처럼 잘생긴 신사분이었습니더. 야, 경자야. 이름이 뭐라 카대?”
“멍청아! 미야코다 유지라고 안 하드나. 무신 지점장이라고…….”
귓가로 벼락이 내리친 것 같았다.
“……뭐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다고?”
“결혼할 사이라고예.”
이를 악문 화연은 그길로 우편국에 달려가 부산 재판소로 전화를 청했다.
“민병기 판사의 동생입니다. 매우 급한 일이니, ……예.”
오라비에게 전화가 연결될 동안 화연은 손바닥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 민병기요.
“해결한다더니 무슨 일을 어찌하신 거예요, 오라버니!”
날카로운 화연의 외침에 민병기가 당황했다.
- 갑자기 왜 그래?
눈물이 펑 터졌다.
“윤조 씨가 부청 책임자한테 선이를 결혼할 사이라고 했대요. 아시냐고요!”
침묵이 전화선을 타고 남매 사이를 옭아맸다.
- 그걸 어디서 들었니?
“……오라버니?”
- 면목이 없구나. 겁만 좀 주랬더니 그 멍청한 놈들이 대뜸 끌고 오는 바람에 일이 좀 커진 모양이다.
“말도 안 돼!”
화연의 절망에 민병기가 급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덧씌웠다.
- 설마 진심이겠니? 빼내느라 그리 둘러댄 모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뇨, 오라버닌 몰라요.”
- 내가 뭘 모른단 말이야? 흥분하지 말고 이따 차분히 얘기하자. 섣불리…….
화연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애써 외면했던 진실이 해일처럼 밀려와 화연을 쓰러뜨렸다.
그날 아침, 선이 입맞춤을 했을 때 윤조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러서려는 선을 잡았다.
나중에 어깨를 민 것도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기 위함이었지 선을 떼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 알았음에도 모른 척했다.
그래야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젠 해결해야 했다.
파도가 자신을 집어삼켜 심해로 영영 처박히기 전에 헤엄쳐 나와야 한다.
화연은 우편국 밖으로 나가 제일 먼저 보이는 인력거를 잡아탔다.
“초량으로.”
오랜만에 사람을 태우고 시내를 누빈 자동차를 꼼꼼히 점검하는 권 주임에게 윤조가 다가갔다.
“좀 어떻습니까?”
권 주임이 보닛을 닫으며 말했다.
“아메리카 놈들이 물건 하나는 잘 만들잖아요. 별 이상 없습니다. 차도, 저놈도.”
갈색 가죽 여행 가방에 흘깃 시선을 준 권 주임이 주변을 살핀 후 낮게 속삭였다.
“물건은 창고로 옮겨 놓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저야 뭐 이골이 난걸요. 선이는 좀 진정이 됐습니까?”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으며 권 주임이 묻자 윤조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들오들 떨면서도 윤조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던 선.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빼내 왔기에 저리 정신을 못 차려요?”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에! 아, 아니, 민화연 씨가 알면 어쩌려고……?”
화연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수년간 공들였던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권 주임의 말엔 놀람을 넘어선 책망이 담겨 있었다.
“선이를 데려간 자가 기무라 겐이치였습니다.”
“누구……?”
뒤늦게 기억이 났던지 권 주임이 입을 벌렸다.
“설마 일본군 위안소에 여자들을 팔아넘긴 그 기무라 말입니까?”
“네.”
수많은 조선 처녀들을 취업을 미끼로 속여 중국과 남방의 위안소로 송출한 악질적인 중간 브로커였던 기무라가 징용 책임자라며 나타났던 순간이 떠오르자 윤조는 또다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자를 본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났습니다. 그저 선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엔.”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리면 뭐가 가장 중요한지 선명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을 뿐.
“진심이시군요?”
권 주임의 말에 윤조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난데없이 개성에서 데리고 오셨을 때부터 짐작은 했습니다. 아이 뭐, 오래 버티셨지. 마음에도 없는 여자하고.”
말은 그리해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던지 권 주임이 구두 뒤축으로 땅을 밀었다.
“그럼 작전은 중지되는 겁니까?”
“아뇨. 어렵게 들여온 물건인데 어떻게든 사용해야죠.”
“생각하신 거라도?”
“이제부터 궁리해 볼 작정입니다.”
권 주임이 장갑으로 허벅지에 탁, 치며 짐짓 호탕하게 말했다.
“하긴 터뜨릴 곳이 조선소만 있는 건 아닙죠. 안 그렇습니까?”
두 남자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데 순용이 들어오다 권 주임을 보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남순용! 거기 서봐. 야, 이눔아!”
하지만 순용은 뒤도 안 돌아보고 꽁무니를 뺐다.
“짜식, 뿔이 단단히 났나 보네.”
차에 폭탄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을 순용을 놀란 마음에 너무 무자비하게 다룬 것 같아 미안했던 권 주임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냥 두세요. 언젠가 사정을 설명할 날이 오겠죠.”
“제발이지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윤조가 이만 가보겠다는 권 주임에게 저녁을 권하는데 갑자기 마당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아가씨, 와 이라십니꺼! 말로 하이소, 말로.”
“이거 놔!”
의령댁의 걸걸한 목소리를 단박에 제압하는 앙칼진 음성.
“민화연 씨 아닙니까?”
권 주임과 함께 마당으로 달려간 윤조가 본 건 선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화연이었다.
“네까짓 게 날 능멸해! 네가 나타나고 일이 몽땅 다 어그러졌어, 알아!”
처음 보는 화연의 거친 행동에도 놀랐지만 저항 없이 몸을 맡기고 있는 선에게 더 화가 난 윤조가 화연에게서 선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화연은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어 선의 뺨을 때리고도 또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무슨 짓이오!”
윤조가 가로막자 화연의 손이 망설임 없이 윤조의 뺨을 내갈겼다.
화연이 윤조에게 손을 대자 멈춘 영사기 속 배우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굳어졌다.
“당신이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저년하고 결혼할 거라고 말할 수가 있어?”
의령댁과 순용이 놀라서 선을 보았고, 권 주임은 묘한 눈길로 화연을 응시했다.
“역시 당신이었군.”
윤조의 말에 화연이 뱀처럼 차갑게 웃었다.
“그래요, 나였어요. 윤조 씨가 상전 노릇을 제대로 못 하니 나라도 천지 모르고 날뛰는 아랫것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아서.”
의령댁의 품에 안긴 선을 화연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천한 것. 진작 매로 다스렸어야 했는데.”
“선이는 천하지 않을뿐더러 이제 이 나라에 반상의 구별은 없소.”
화연이 코웃음을 쳤다.
“반상의 구별이 없다뇨? 당신을 나리라 부르는 저것들은 뭔데? 세상은 여전히 핏줄이, 돈이, 그리고 권력이 양반이에요.”
의령댁과 순용, 권 주임을 스쳐 간 화연의 시선이 선에게 고정되었다.
“조츄(じょちゅう, 하녀의 비어) 주제에 감히.”
“민화연!”
“왜! 저년한테 조츄라고 하니까 화나요? 걱정 마요, 당신한테 불러 줄 이름도 있으니까.”
새빨간 화연의 입술이 불길하게 오므라졌다.
“후테에센진(ふていせんじん).”
후테에센진.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
일본에 원한을 품은 조선인.
그리고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
그때까지도 제정신인지 아닌 건지 헷갈렸던 윤조는 비로소 화연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윤조가 권 주임을 돌아보았다.
“다들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요.”
“아뇨! 모두 똑똑히 들어. 너희 주인 나리는 대일본 제국의 반역자야. 테러의 배후인 범죄자고, 목적을 위해 여자도 서슴없이 이용하는 벌레 같은 인간이지.”
정적에 휩싸인 마당에 쓰디쓴 윤조의 웃음소리가 퍼져 갔다.
“고맙군. 내 정체를 정확히 알려 줘서.”
“흥, 경찰서 취조실에서도 그렇게 잘난 척할 수 있을까?”
뒷덜미가 찡하고 울리더니 역겨운 오물 냄새가 코 아래를 스쳤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선의 불안한 눈빛을 의식하며 윤조는 필사적으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다스렸다.
“뭘 말하고 싶은 거요?”
“용서해 줄 테니까 버려요. 저년만 쫓아내면 다 덮고 없던 일로 해줄게요. 하던 일도 계속해요. 여태까지처럼 내가 방패막이 되어 줄 테니.”
비열한 제의였다.
그리고 참 화연다운 제의이기도 해서 오히려 윤조는 뒤집혔던 속이 가라앉는 듯했다.
“비밀은 비밀로 간직될 때만 의미가 있는 거요.”
“……그게 무슨?”
눈살을 찌푸리는 화연에게 윤조가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 덕에 내 죄를 낱낱이 깨달았으니 회개하고 다시는 이중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오.”
“윤조 씨?”
“나가요. 우린 이제 끝이오.”
윤조가 아랫입술을 벌벌 떠는 화연의 팔을 잡고 대문으로 갔다.
“미쳤어요? 당신 지금까지 내 덕분에 무사했어. 앞으로도 내가 필요…….”
밖으로 밀쳐진 화연이 대문을 닫으려는 윤조를 황급히 붙잡았다.
“정말 나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이었냐고? 그건 아니죠, 네?”
“몰랐소? 난 단 한 번도 당신한테 진실했던 적 없어.”
까맣게 퇴색하는 화연의 면전에서 윤조는 문을 닫았다.
그날 저녁, 선은 부산에 온 이후 처음으로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
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의령댁마저 불평 없이 혼자 저녁을 준비하던 그 시간, 선은 문간방에 박혀 화연의 악의에 찬 말들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후테에센진.
대일본 제국의 반역자. 범죄자.
그리고 쓰디쓴 윤조의 웃음에 ‘취조실에서도 그렇게 잘난 척할 수 있겠느냐?’ 빈정거리던 화연.
선은 머리를 감쌌다.
화연의 폭로는 윤조가 친일 사업가를 가장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 도련님이 고작 자신 때문에 위험을 자처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윤조가 형사에게 잡혀 가는 것이었다.
‘안 될 일이야. 어떻게든 되돌려 놔야 해.’
선이 벽장문을 열어 보따리와 옷을 꺼내는데 순용이 문을 두드렸다.
“누부야, 밥 묵으라.”
문을 연 순용이 짐을 싸는 선을 보고 눈이 퉁방울이 되었다.
“뭐 하노, 지금?”
선이 놀란 순용을 지나쳐 윤조의 방으로 갔다.
“접니다.”
허락도 없이 문을 여니 손도 안 댄 저녁상 앞에 윤조와 권 주임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좀 있다 하자.”
“지금이요.”
눈치를 보던 권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일인가 본데 먼저 얘기 나누시죠.”
권 주임이 선의 곁을 지나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달라진 태도가 불편했던 선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윤조와 단둘만 남은 방엔 정적만 무겁게 흘렀다.
“무슨 얘길 하려고.”
선이 마른침을 삼켰다.
“떠나겠습니다.”
예상했던 걸까?
윤조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알겠어. 기차표를 끊어 줄 테니 개성으로…….”
“아뇨. 개성으론 안 갑니다.”
두 번 다시 윤조와 닿지 않을 곳.
도련님과 영영 인연이 끊어질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야 그가 안전할 것이었다.
“그럼 어딜 가겠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화를 억누르듯 윤조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 거야?”
“쉽진 않겠지만…….”
“딸을 둘이나 팔아치운 네 아비가 마누라는 잘 데리고 있을 성싶어? 험지에서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매몰찬 윤조의 말에 선이 눈을 부릅떴다.
“지점장님은 조선이 정말 독립할 수 있다고 믿어서 독립운동을 하신 겁니까?”
“뭐?”
“살려고, 버티려고 하신 거잖아요? 희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아닌가요?”
깊은 슬픔이 우물 같은 윤조의 눈동자에 텀벙 떨어졌다.
“나는 너에게 아무런 희망도 못 되는 사람이었구나.”
선이 대꾸를 않자 윤조가 이를 악물었다.
“상전이라 거부하지 못한 거야? 어쩔 수 없어서 날 견딘 거였어? 그런 게 아니면 왜 날 떠나려고만 해, 왜!”
아니라고, 오해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선은 침묵을 택했다.
차라리 그리 생각하셔서 자신을 미워하는 편이 두고두고 도련님께는 나으리라.
“좋아. 마음대로 해.”
윤조가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선 앞에 던졌다.
“가지고 나가.”
겉에 선의 이름이 적힌 두툼한 봉투 안에는 꽤 많은 양의 돈이 들어 있었다.
“이건……?”
“급료다. 여비 정도는 될 테지.”
아무리 선이 물정을 모른다지만 이 정도면 중국을 서너 번은 다녀올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함께 든 한 장의 종이.
重庆市渝中区莲花池20号
충칭스 위중취 리엔화츠 20호 / 충칭시 위중구 연못 20호
주소였다.
그것도 조선이 아닌 중국.
“이게 뭡니까?”
“네 어머니가 6개월 전까지 살았던 주소다.”
12년 전 헤어진 후 이리 구체적인 소식은 처음이기에 돈을 보고도 덤덤했던 선의 손이 벌벌 떨렸다.
“이, 이걸 어떻게……? 제 어머니를 찾고 계셨던 거예요? 왜요?”
“……왜겠어?”
바닥에 내던진 도자기처럼 윤조의 얼굴이 애련으로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널 사랑하니까. 네 소원을 이뤄 주고 싶었으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는 윤조의 말에 선은 정신이 아득했다.
“네 어머닐 찾으면서도 찾을 수 없기를 바랐어. 네가 가겠다고 할까 봐 영영 못 찾길 바랐다고. 그런데 넌 날 떠날 생각만 하는구나.”
상처를 드러낸 윤조가 방을 나가 버린 후에도 선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도련님이 날 사랑해?
나를?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데 갑자기 오래전 관덕정에서 들었던 윤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를 울렸다.
‘어딜 가려고?’
놀라서 고개를 돌린 순간, 굳어서 인사도 못 하던 자신을 향한 윤조의 강렬한 시선이 보였다.
‘가만있어.’
‘옷에 피가…….’
‘가만있으래도.’
종만에게 맞았을 때 휘둘렀던 분노의 채찍과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자신을 안아 산길을 내달리던 윤조의 강인한 팔도 느껴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성을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초조해하던 윤조의 미간.
그리고 이어진 구원의 손길.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선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기억은 걷잡을 수가 없이 휘몰아쳐 내면에 급류를 이루었다.
처음 탄 기차에서 멀미에 시달리자 무람없이 빌려주었던 윤조의 너른 어깨와 말없이 캬라메루를 내밀던 섬세한 배려까지.
‘선이는 그냥 선이오. 그 이름이 제일 어울려.’
화연에게서 이름을 지켜 주었듯 늘 선을 지켜 주고 곁에서 바라봐 주었던 남자.
윤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제 안에 이룰 수 없는 연정을 간직한 사실만으로도 벅차 윤조가 자신을 어떻게 돌보고 살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외로이 흐르고 흐른 윤조의 마음이 고인 돈과 주소를 가슴에 안고 선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알려 드려야 해.
혼자만의 마음이 아니라고,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라고.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왜 아직 여기 있어?”
성난 윤조의 목소리가 선을 날카롭게 찔렀다.
“보내준다고. 중국이든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 가라니까 왜……!”
윤조가 선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고 멈칫 섰다.
“뭐야?”
선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돌아온 그가 고마워서.
오랜 세월 억눌렀던 눈물이, 어느 순간부터는 짜내려 노력해도 안 나오던 눈물이, 그래서 정말 말라 버렸나 보다 체념했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너…… 울어?”
“……무서워요.”
“뭐?”
선이 눈물을 헤치며 더듬더듬 말했다.
“지점장님이 위험해질까 봐 너무 무서워요.”
“……다시 말해 봐.”
“나 때문에 도련님이 다칠까 봐…….”
문을 닫은 윤조가 선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나 때문이야? 정말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떠나겠다는 것도?”
“……제가 도련님께 방해만 되니까…….”
윤조가 선을 끌어안았다.
“아냐. 절대로 아냐. 절대.”
“하지만…….”
“네가 필요해서 널 데려왔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내가.”
“도련님……….”
윤조가 선에게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태양빛을 받은 잎사귀처럼 싱싱한 생명력으로 가득해서 선은 절박하게 윤조의 목을 얼싸안았다.
선의 호응에 마음이 급해진 윤조가 선을 끌어당기다 밥상을 건드리고 말았다.
다행히 상을 엎진 않았지만 윤조와 선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가까이에 있었던 듯 권 주임이 물었다.
윤조가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얇디얇은 나무 벽, 종이를 바른 장지문 밖에 권 주임과 다른 식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의식한 선의 뺨이 빨개졌다.
짙은 아쉬움이 막 마음을 확인하고 뜨거워진 연인을 사로잡았다.
윤조가 선의 손을 잡았다.
“따라와.”
선을 데리고 반대쪽 문을 열어 정원으로 나간 윤조가 집 뒤로 걸음을 옮겼다.
“어딜?”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선을 조용히 시킨 윤조가 주차된 자동차의 뒷문을 열었다.
선을 먼저 태우고 뒤따라 오른 윤조가 가리개로 차창부터 전부 가렸다.
“도련님?”
윤조가 선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더니 뒷덜미를 당겼다.
자동차 뒷좌석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당황했던 선은 곧 윤조보다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것을 파악하고 과감하게 그의 머리카락을 훑으며 입맞춤에 몰입했다.
저고리가 열리고 윤조의 손아귀 안에서 가슴이 제 모양을 잃고 흔들리자 배 속에 든 나비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단단하게 불거진 윤조의 언덕이 느껴졌다.
벌써?
좀 빠르다 싶었다.
아니, 사실은 윤조보다 선이 더 빨랐다.
윤조의 손이 제 은밀한 숲에 도착하기도 전에 새벽안개가 낀 듯 축축해져 버렸으니.
검은 숲을 태우는 불길 같은 손길에 몸을 떨며 선도 윤조의 바지 단추를 풀었다.
“사랑해.”
윤조가 귓불을 물고 속삭였다.
여름밤, 그리고 여름보다 더운 차 안에 뿌옇도록 습기가 찼다.
늘어진 치마 아래 비밀한 맨살에도 끈적끈적하리만큼 땀이 찼다. 하지만 그와 살갗이 맞닿은 순간 선은 그것이 땀이 아님을 알았다.
그건 윤조와 선의 애욕의 정수였다.
“허리 들어.”
다음 순간, 윤조의 젊은 살갗이 선의 신선한 계곡을 강인하게 파고들었다.
“음!”
습관적으로 입술을 무는 선에게 윤조가 말했다.
“참지 마.”
“하지만.”
“날 안고 내 귀에 해.”
선은 윤조의 말대로 목을 안고 그의 귓가에 겨운 신음을 토했다.
새의 날개처럼 허벅지를 퍼덕이며, 쥐처럼 민첩하게 골반을 들썩이며 선은 윤조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 넌 대체…….”
윤조가 무른 복숭아의 과즙을 터뜨리듯 엉덩이를 움켜쥐고 세게 잡아당기자 날 선 쾌감을 이기지 못한 선이 그의 귓바퀴를 삼켰다.
기름을 압착하듯 조여드는 선의 속살에 윤조가 전율했다.
“더.”
윤조의 채근에 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제 선의 신음은 윤조의 귀를 지나 자동차 밖으로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사랑해, 선아. 사랑해.”
끈질긴 고백처럼 윤조의 정기가 선의 안에 남김없이 쏟아졌다.
“선아.”
선이 땀에 젖은 어깨에 기대 거친 숨을 고르는데 윤조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사랑해요.”
“결혼하자.”
선이 벌떡 얼굴을 들었다.
“예?”
“나하고 결혼하자.”
“도련님?”
놀란 토끼가 된 선의 입술에 윤조가 입을 맞췄다.
“이미 사람들 앞에서 널 내 아내 될 사람이라고 말했어.”
“그건 어쩔 수 없이…….”
“아기가 생겼을지도 몰라.”
결합된 두 몸 사이에 흐르는 것을 윤조가 상기시키자 선의 뺨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게 붉어졌다.
“이젠 절대 안 놓을 거야.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