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춘정이 난분분
첫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낮, 순용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내미는 서류 봉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윤조가 물었다.
“왜 네가 왔어?”
“누부가 지보고 가라카든데예. 이 봉투만 드리믄 된다꼬예.”
분명 의령댁에서 전하기를 선도 이젠 혼자 다닐 줄 알아야 하니 전차만 태워 보내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서류를 핑계로 선을 불러내 시내 구경도 시켜 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싶었던 윤조가 나직이 한숨을 쉬자 순용이 눈치를 살폈다.
“가서 누부보고 오라 하까예?”
“아니다, 수고했어. 권 주임한테 말해서 냉차 한잔 마시고 가.”
냉차라는 말에 입이 벙싯 벌어진 순용이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화연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꺼!”
“어? 어, 그래.”
“요즘은 왜 집에 안 놀러 오십니꺼?”
천진난만한 물음에 화연이 손수건으로 땀만 찍어내자 윤조가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선이 자신의 말을 거역한 것은 기분 나빴지만 이리되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어린것이 웬 넉살이 저리 좋대.”
“그래서 사환으론 딱이지. 더운데 어쩐 일이오?”
“집에 들르겠다고 말만 하고 한 번도 안 왔잖아요.”
입술을 비쭉이는 화연에게선 그날, 없어진 향수를 대신하여 윤조가 선물한 새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랬나? 미안하오. 사무실을 정리하느라 좀 바빴소.”
의자에 앉은 화연이 어수선한 실내를 빙 둘러보았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점원도 다 내보낸 것 같던데?”
“가게를 비웠으니. 이제 권 주임과 나만 남았소. 인수자만 나서면 끝이지.”
“초량 집은 어쩌기로 했어요?”
화연이 가방에서 레이스 부채를 꺼내며 무심한 척 물었다.
“내놓았소. 팔리는 대로 선이도 개성으로 돌려보낼 거요.”
윤조가 먼저 선의 얘기를 꺼내자 부채질을 하던 화연이 발끈 성을 냈다.
“누가 물어봤어요?”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허를 찔린 김에 솔직해지자 싶었던지 화연이 부채를 탁 접었다.
“굳이 그 애를 집이 팔릴 때까지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죠? 약속대로 빨리 내보내요.”
“누명을 씌운 것으로 모자라오?”
“누명이라뇨! 무슨 말을…….”
찌를 듯 맑은 윤조의 시선 앞에 부채를 쥔 화연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요. 내 오해였고, 성급한 행동이었어요. 그런데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 발칙한 것과 윤조 씨가 같은 집에 있는 거 소름 끼치게 싫어.”
“그럼 화연이도 와 있지 그래? 저번처럼 말이오.”
“윤조 씨!”
“가게, 창고, 동래와 해운대 기념품점 두 곳과 거래처들. 전부 돌면서 인사하고, 재고 처리하고, 관청에 서류 정리까지 하루도 일찍 들어간 날이 없소. 들어갔어도 그 좁은 집에 의령댁과 순용이까지 있는데 정말 뭐가 가능할 거라 믿는 거요?”
그건 수많은 거짓 속에 유일하게 진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의령댁과 순용이 돌아온 후 윤조는 선과 단둘이 있고 싶어 기갈이 날 지경이었다.
도둑처럼 선을 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그를 미치게 했다.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 애가 윤조 씰…….”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알잖소. 내가 여자에 별 관심 없는 거.”
그 또한 진실이었다.
윤조는 평생 여자를 기다려 본 적도, 매달려 본 적도 없었다.
선 외에는.
“경성에 갈 준비나 해요. 이번에 자작님을 뵈면 정식으로 청혼을 드릴 테니.”
윤조의 대답에 화연이 쉰 한숨은 안도의 의미리라.
어리석고 불쌍한 여자.
하지만 미안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번 일요일에 같이 점심 먹어요. 오랜만에 오라버니도 뵙고요.”
“그러지.”
화연을 배웅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순용이 문을 두드렸다.
“이만 가보겠십니더.”
윤조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자.”
영 입맛이 없었다.
더위 탓이리라 생각하며 선이 남은 보리밥을 손에 덜어 연못가로 갔다.
조금씩 떼어 뿌리자 잉어들이 입을 뻐끔대며 잘도 받아먹었다.
“너희들은 좋겠다. 상전도, 종도 없어서.”
윤조의 부름을 거절했다.
선도 바보는 아닌지라 그가 왜 불러내는지 짐작이 되었다.
밀회를 즐기려 시집도 안 간 처녀를 벌건 대낮에 불러내다니, 온 세상이 손가락질할 일이었다.
여종이라 쉽게 여겨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선을 절망스럽게 한 건 윤조와의 미래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거였다.
의령댁의 말처럼 잘 돼봐야 첩이겠지.
선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윤조를 화연과 나눠 가질 것을 생각하면 끔찍했다.
잠자리를 갖기 전엔 몰랐다.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윤조와 화연이 안고 입을 맞추는 상상만으로도 선은 가슴이 부서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를 떠나기엔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자꾸만 서글퍼지는데 이웃집에 갔던 의령댁이 들어오다 선을 발견했다.
“벌써 갔다 왔나?”
“순용이 보냈어요.”
선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와? 니보고 오라 캤다이가.”
“오란다고 무조건 가야 돼요?”
의령댁이 선의 속도 모르고 킬킬거렸다.
“가스나, 인자 사내 애태울 줄도 아네.”
“그런 거 아니에요.”
선이 손을 묻은 보리밥 알갱이를 씻어내는데 순용이 대문을 열었다.
“왔나? 니가 대신 왔다고 뭐라 안 하시드나?”
순용이 의령댁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는 순간 윤조가 들어왔다.
“선이 어딨어?”
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달려온 그의 모습에 설레는 자신이 바보 같은데 윤조가 갑자기 서류 봉투를 들이밀었다.
“이거 네가 찾아 보냈어?”
“예.”
“너, 아직도 동래와 해운대 글자를 구별 못해?”
뜻밖의 말에 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잘못 보냈어.”
나 때문이 아니라 일 때문에 온 거였어?
선은 맥이 탁 풀렸다.
“그럴 리가요. 분명 겉봉에 동래 봉래관(蓬萊館)이라고 적힌 것으로 보냈습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을 뿐더러 설사 여직 까막눈이었다 해도 글자 수도 못 세는 천지는 아니었다.
“해운대라고 했어. 동래가 아니라.”
당황한 선이 의령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동래라고…….”
“아니다. 내는 해운대라고 했다.”
의령댁의 부인에 저만 바보가 된 것 같아 억울한데 윤조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공책 들고 따라와. 정신 딴 데 둔 거였는지, 글자를 몰라서였는지 확인을 해야겠어.”
“예?”
선이 씩씩대며 공책을 꺼내는데 의령댁이 슬그머니 문간방으로 들어왔다.
“말씀해 보세요. 정말 저한테 해운대라고 하셨어요? 동래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그기 문제가? 순용이 있데이. 소리 안 새어 나가게 잘해라.”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쯔쯔, 나리가 와 대낮에 들어와 보란 듯이 저라시겠노. 다 구실 맨드는 기다. 편하게 만날라꼬 불러냈는데 니가 안 나오니까네 저라시는 거 아이가.”
선의 눈이 강아지처럼 댕그래졌다.
설마.
“잠자리에서 내가 시킨 대로 하고 있제?”
의령댁이 능글맞게 웃자 선의 뺨이 석류처럼 빨개지는데 윤조의 목소리가 온 집을 울렸다.
“김선!”
“아이고마, 안달이 났구마. 얼른 드가 봐라.”
정말일까?
정말 날 보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시는 걸까?
얇은 공책을 방패처럼 끌어안은 선이 기대감으로 한 발을 조심히 들여놓은 순간 윤조가 손목을 당겨 입을 맞췄다.
“읍! 무, 문을…….”
등 뒤로 장지문이 닫히자 윤조의 입맞춤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대로 뒀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선이 온 힘을 다해 윤조를 밀어냈다.
“여기선 안 돼요.”
“그럼 어디서 되는데?”
갖은 핑계를 대며 윤조를 멀리했던 선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오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십니까?”
윤조가 선의 턱을 게걸스레 핥으며 속삭였다.
“그럼 어떡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남세스럽게 밖으로 불러내는 건…….”
“남세스럽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윤조가 혀를 찼다.
“내가 짐승이야? 그냥 너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어. 시내를 구경시켜 주려고 했다고.”
“……정말이요?”
윤조가 빙긋이 웃더니 다시 입술을 내렸다.
그것만으로 봄볕 아래 눈처럼 마음이 사르륵 녹는데 의령댁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젠장.”
윤조가 첫 입맞춤을 했던 병풍 뒤 도코노마로 선을 데리고 갔다.
“이러려고 절 불러낸 거 아니라면서요.”
“이러려고 날 불러들인 건 아니고?”
“아니, 읍.”
해마다 더 덥게 느껴지는 더위처럼 윤조와의 입맞춤도 할 때마다 더 짜릿해져 갔다.
한 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 정도의 좁은 공간에 정염이 빨간 능소화처럼 주렁주렁 피어올랐다.
“혀 내밀어.”
선이 허공에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서.”
윤조의 재촉에 선이 살짝 혀를 냈다.
그러나 윤조의 혀가 겹쳐지자마자 재빨리 물러난다.
“도망가지 말고.”
다시금 나온 수줍은 혀끝을 윤조가 장난치듯 할짝거리자 선이 또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윤조가 더 빨랐다.
“내게서 도망가지 마.”
윤조가 선의 혀를 강하게 빨아들이는 동시에 저고리 밑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음.”
치마로 들어온 윤조의 손이 속옷을 헤치자 선의 눈이 몽롱하게 풀려 갔다.
이미 촉촉하게 물이 흐르는 길로 긴 손가락이 들어온다.
선은 숨죽여 전율했다.
“아파?”
이게 아픈 것이라면 죽음은 얼마나 황홀할까?
아마도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찬란해 눈이 부셔 죽게 되는 것이리라.
손가락을 조이는 선의 힘에 윤조도 달아올랐다.
윤조는 선을 엎드리게 하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바지 단추가 열리고 강건한 기둥이 선의 습지를 벌린다.
“읏.”
윤조가 선의 귓불을 빨며 뽀얗고 차진 엉덩이에 허리를 턱턱 부딪쳐 댔다.
한 치(寸)가 들어오면 그 열 배인 한 자(尺)만큼의 기쁨이 선을 잠식해 나갔다.
이러다간 몸 전체가 윤조로 가득 차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래에 품은 그가 확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안에 하면 안 돼요.”
멈칫하더니 윤조가 다시 몸을 움직이자 선이 골반을 뒤틀었다.
“아기씨는 밖에…….”
“들키고 싶어? 조용히 해. 한 번만 더 말하면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 줄 테니.”
빈말이 아님을 알려 주듯 윤조가 선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으…….”
이를 악무는 선의 턱을 잡아 입을 맞추며 윤조는 하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쾌락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비벼지는 속살이 여름보다 뜨거웠다.
선이 다다미에 고개를 처박고 허리를 퍼덕이며 절정에 오른 직후 아랫도리에서 그가 쑥 빠져나가더니 미지근한 것이 엉덩이를 적셨다.
신음을 참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으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선은 떨리는 손으로 치마를 여미고 저고리 고름을 맸다.
“뭐하는 거야?”
“아주머니가 이상히 여기실 거예요. 순용이도 있고.”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윤조가 뒤에서 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시만. 조금만.”
이리 아이 같은 분이셨던가?
의령댁이 사내는 무정하다고 했는데.
더구나 몸을 섞게 되면 마음이 식어 버린다고 했는데.
이리 연약하고 다정해진다고 말해 주진 않았는데.
선은 혼란스러워졌다.
아주머니가 깜빡 잊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면 혹시 윤조는 보통의 사내와는 다른, 특별한 남자인 것이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그래서 아무와도 그를 나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선의 목에 입술을 비비며 윤조가 나른하게 속삭거렸다.
“단둘이 있고 싶어. 더 오래. 더 많이.”
“……담에 부르시면 나갈게요.”
윤조가 웃는 것이 살갗을 통해 선에게 전해졌다.
“약속했다. 일요일에 같이 바다 보러 가자.”
선이 고개를 돌려 윤조를 바라보았다.
“참말로요?”
반짝이는 선의 눈동자를 보며 윤조가 따뜻한 미소로 약속했다.
* * *
[영감님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심히 송구스럽다고 전해 주시오. - 도윤조]
화연이 요릿집 사환 아이가 주고 간 종잇조각을 와르륵 구겨 버렸다.
오라버니께만 송구하고,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인 자신에겐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는 건가!
점포를 인수받을 임자가 나섰다고, 공교롭게도 일요일에만 시간이 난다는 그 사람이 기념품점에도 관심을 보여 해운대까지 동행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기에 기다릴 테니 늦더라도 오라고 했다.
하지만 해 질 녘, 윤조에게서 온 마지막 전갈은 일이 성사될 것 같아 접대 자리까지 가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속상해서 화장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올케 숙경이 불쑥 문을 열었다.
“아가씨, 저녁 드시우.”
“됐다고요.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이미 식모에게 안 먹겠다고 한 터라 화연의 대꾸가 뾰족해졌다.
“도 지점장 안 왔다고 섭섭해서 그러우? 뭐 그렇다고 애처럼 밥을 굶어.”
무신경한 올케의 태도가 화연의 화를 있는 대로 돋우었다.
“언니.”
“왜 그러우?”
“아무리 보통학교를 문턱도 안 넘었어도 그렇지. 노크도 없이 남의 방문 벌컥벌컥 여는 거, 예의 없는 행동인 거 몰라요? 오라버니 체면이 있어요. 제발 무식한 티 내지 말고 매너 좀 지켜요.”
얼떨결에 손아래 시누이에게 날벼락을 맞은 숙경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다 홱 몸을 돌렸다. 말로는 도저히 화연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가 화를 부른다고 올케에게 한바탕 퍼붓고 나니 더 열불이 났다.
윤조가 초량 집 때문에 약속을 어긴 거라면 기꺼이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은 여전히 팔릴 기미가 없다니 더 답답했다.
“밥을 안 먹는다고 했다며?”
민병기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흥, 아둔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오라버니가 여동생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쪼르르 일러바쳐?
아니, 잠깐만.
화연의 눈에 반들 빛이 돌았다.
“오라버니, 부탁이 있어요.”
“그래, 뭐든 말해 보렴.”
“윤조 씨 초량 집 말이에요. 오라버니가 사주시면 안 돼요? 윤조 씨는 모르게요.”
“도 지점장 모르게 집을 사라고? 왜?”
화연이 오라비의 팔짱을 끼며 아양을 부렸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묻지 마 투기라도 하란 말이냐? 난 총독부 판사다. 그렇게는 못 하지.”
“아이참! 오라버니도.”
민병기가 만만치 않게 나오자 화연의 생기가 급속히 가라앉았다.
“사실대로 말해. 도 지점장과 무슨 문제 있니?”
“윤조 씨가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 망설이는 화연을 민병기가 부드럽게 다독였다.
“남매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니? 걱정 말고 말해 봐. 그래야 대책을 세우지.”
“실은…….”
화연은 오라비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선에게 누명을 씌어 쫓아내려 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그깟 하녀 따위, 뭐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
이야기를 다 듣고도 민병기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게 아니에요. 그 계집애가 나타난 후로 윤조 씨가 이상해졌다고요.”
“승승장구하던 사업을 전쟁 때문에 접어야 했잖니. 헛헛해서 그런 걸 네가 오해한 걸 게다. 조선소에 출근하면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 마라.”
“하지만 오라버니도 그 앨 보셨잖아요. 곱다고 하셨잖아요.”
“곱기야 했지.”
무심코 수긍한 후에야 눈을 흘기는 동생을 발견한 민병기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감히 너에 비할까.”
“윤조 씨도 남자예요. 오라버니 말씀대로 헛헛해서 그 여우 같은 계집의 꼬임에 넘어가면 어떡해? 본가로 쫓아내면 그만인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버티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해요.”
“흠, 하긴…….”
처음으로 나온 색다른 반응에 화연은 더럭 겁이 났다.
“왜요? 뭐 짚이는 거라도 있으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나 장가가기 전이 생각나는구나.”
총각 시절 추억이라도 떠올랐는지 민병기는 흐뭇한 미소까지 띠었다.
“혼인을 앞두면 남자도 마음이 좀 그렇거든. 좋으면서도 아쉬운, 만개한 벚꽃처럼 약한 바람에도 춘정이 난분분한, 그런 싱숭생숭한 느낌이랄까?”
민병기가 잡지에 가명으로 미식 기행을 기고하던 감성을 너저분히 늘어놓자 화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그 춘정인지 뭔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두고 보란 말씀이세요!”
“진정하거라. 아무리 꽃이 핀데도 나무를 베어 버리면 뭐 어쩌겠니?”
자상한 얼굴에 담긴 낯선 섬뜩함에 화연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게 무슨……?”
“이 오라비가 해결할 테니 걱정 말고 저녁이나 들자는 말이다. 어서 나오렴.”
화연은 민병기가 나간 후에도 오싹한 감촉이 영 사라지질 않아 오래토록 팔을 문질러야 했다.
* * *
점심상을 들여오는 선의 광대뼈 부근이 검붉었다.
안 보이던 주근깨까지 톡톡 도드라진 것을 보고 의령댁이 무심코 말했다.
“송도 바닷가 함 갔다 왔다고 얼굴이 벌거이 익었구마.”
“송도? 누부, 어제 지점장님 아시는 분 잔치하는 데 일해 주러 간 거 아니가?”
숟가락을 집으려던 의령댁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망령이 났나 보다.
순용이 있다는 것을 깜빡하다니.
“중간에 잠깐 들렀어.”
역시나 삐꺽했던 선이 상 앞에 앉으며 최대한 자연스레 대답했다.
그런데 말투만 자연스러운 거였다.
“별장이 동래라 안 캤나? 송도하고는 영 반대덴 어떻게 중간에 들른단 말이고?”
미처 고려하지 못한 지리상의 허점에 선마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어제 지점장님하고 누부하고 같이 갔잖아. 그라믄 둘이서만 송도 유원지를 갔단 말이가?”
부모 잃은 10대 손자가 행여 바람이라도 들까 그렇게 조심했건만 제 눈을 찌른 격이 된 의령댁이 괜히 선의 다리를 꾹 누르자 선도 지지 않고 툭 친다.
그렇게 밥상 밑에서 티격태격하는 두 여자를 향한 순용의 눈에서 의심이 뚝뚝 떨어졌다.
“수상한데. 그라고 보이 요새 지점장님이 부쩍 누부를 챙기샀드마는…….”
“머시마야, 뭔 소리를 하노! 얼렁 밥이나 처묵으라.”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숟가락을 디밀던 의령댁이 잘못하여 순용의 턱을 때리고 말았다.
“아얏! 와 이라노!”
“머, 뭘 와 이래! 그랄 수도 있지. 이 자슥이 어데 할매한테 눈을 치키뜨고!”
“할매가 먼저…….”
다툼이 엉뚱하게 번지는데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중간에서 곤란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던 선이 묻지도 않고 대문을 여니 의령댁의 화투 동무인 구포댁이었다.
“니가 웬일이고? 밥은 묵었나?”
의령댁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구포댁이 대문 밖 낯선 사내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들어오이소. 이 집입니더.”
콧수염이 난 중년 사내와 젊은 남자 둘이 집을 휘 둘러보자 의령댁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구포댁이 누구던가?
배급과 공출, 온갖 근로 동원과 징용 사업 등에 적극 협조해야 하는 애국 반원이 아니던가?
의령댁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순용 쪽으로 옮기며 물었다.
“뉘신지?”
“부청(府廳)에서 징용 영장을 갖고 오싰단다.”
아니나 다를까, 구포댁의 말에 사색이 된 의령댁이 온몸으로 순용을 방어하며 부르짖었다.
“안 됩니더! 야 아부지도 징용 끌리갔다가 죽었는데 우째서 야까지…….”
“김선이 누구야?”
콧수염의 말에 의령댁의 애원이 일시에 무안해졌다.
남순용이 아니라 김선?
“전데요.”
그때까지도 대문 곁에 서 있던 선이 주춤 손을 들었다.
선을 위아래로 훑어본 콧수염이 턱짓을 하자 젊은 남자 둘이 마치 범죄자라도 연행하듯 선의 팔짱을 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떨이 상품만 드문드문 선반을 차지한 점포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 졸기를 반복하던 권 주임이 하품을 하다 말고 눈을 슥슥 비볐다.
‘더워서 헛것이 뵈나?’
그런데 헛것이 아니었다.
달려오는 검은 차는 분명 윤조의 세단이었다.
전차와 사람, 자전거와 인력거 사이를 아슬아슬 갈지자로 내달리는 위험한 주행에 권 주임은 잠이 깨다 못해 오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도, 윤조도 여기 있건만 누가 운전을 하는 것인가!
권 주임이 밖으로 뛰어나감과 동시에 차가 거친 마찰음을 내며 점포 앞에 멈춰 섰다.
“야, 너…… 너, 너 이 새끼 뭐야!”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운전자의 모습에 권 주임은 말까지 더듬었다.
“지점장님 어디 계십니꺼?”
차에서 내린 순용이 다급히 윤조를 찾았으나 권 주임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뭐냐고! 왜 네놈이 차를 끌고 와, 엉!”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더.”
사무실로 뛰어가려는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챈 권 주임이 순용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돌았어? 무면허로 운전하다 순사한테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와 때립니꺼! 그럴만한 일이 있어가…….”
“닥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이 새캬!”
“노으소, 으앗!”
권 주임의 억센 손길에 버둥대던 순용의 코에서 이내 코피가 터졌다.
“어이, 오치츠케요!” (おい。落ち着けよ! 이봐, 진정하라고!)
“아이고! 아 죽겄소. 고만하소.”
주변 상인들이 몰려들어 권 주임을 만류했다. 평소 점잖고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지라 다들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비켜요! 구경났어?”
이성을 잃고 다시 손을 쳐드는 권 주임을 막아선 것은 윤조였다.
“그만하세요.”
“이게 그만할 일입니까? 저놈 때문에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누부가……!”
순용의 고함에 윤조의 고개가 돌아갔다.
권 주임의 손을 떨쳐낸 순용이 반항적으로 코피를 훔치며 말했다.
“선이 누부가 부청에서 나온 사람들한테 끌리갔십니더.”
“……뭐?”
“징용 영장이 나왔답니더.”
불에 던져진 종잇조각처럼 윤조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 갔다.
부산 부청 소강당.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초로의 신사가 십수 명의 소녀들에게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에, 그라이까네 느그들은 전쟁 나간 군인들이 입는 군복을 맨드는 일을 하게 되는 기라. 드디어 느그들도 천황 폐하께 충성할 기회가 왔다 이 말이다. 이 을매나 영광스러운 일이고? 맞제?”
호응이 없자 노신사가 탁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우째, 대답이 없노!”
“예에.”
오뉴월 엿가락처럼 주욱 늘어지는 대답에 신사가 핏대를 올렸다.
“피죽도 몬 묵었나? 씩씩하게, 다시!”
“예!”
“옳거니! 에, 다시 말하지만…….”
소녀들 사이에 잔잔한 탄식이 퍼져 나갔다.
퇴직한 교장이라더니 말끝마다 ‘다시 말하지만’을 반복하여 듣는 사람을 질리게 하니 소녀들은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미친다. 와 저라노, 저 영감탱이.”
곁에 앉아 있던 경자가 속닥거리다 말고 선을 걱정스레 살폈다.
강제로 끌려와 겁을 질린 다른 소녀들과 달리 돈을 벌기 위해 어머니 반대를 무릎 쓰고 자원했다는 열여섯 소녀 경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름을 알려 준 당찬 아이였다.
“언니야는 와 그래 땀이 많이 흘리노? 덥나?”
“어? 어, 조금.”
선이 소맷부리로 이마에 맺힌 진땀을 훔쳐냈다.
아까부터 친근하게 말을 걸어 준 경자가 아니었다면 긴장감에 몰리다 못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만 하믄 배도 안 곯고,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잔소리를 가르며 한 남자가 강당 앞문으로 뛰어들었다.
훤칠한 외모에 값비싼 여름 양복을 입은 남자, 윤조의 등장에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고?”
“몰라. 옴마야, 억수로 잘생깄다.”
“혹시 우리를 인솔해서 간다는 사람이 저 사람 아이가?”
“진짜로!”
교장이 강단을 내리치며 소란을 잠재웠다.
“조용! 조용! 거 자넨 누군데 신성한 근로정신보국단(‘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정신대로 통용됨. 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정신대는 노동력을 수탈당한 것이고, 위안부는 성적 착취를 당한 것으로 별개임.) 설명회 자리에 함부로 들어오나?”
그때 소녀들 틈에서 창백해진 선을 발견한 윤조가 성큼성큼 강당을 가로질렀다.
“일어나.”
윤조가 선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자 소녀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어찌 아시고……?”
“얘긴 이따 하고 일단 나가자.”
집으로 왔던 젊은 남자 중 하나가 윤조와 선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책임자가 누구요? 책임자를 만나야겠소.”
“당신이 뭔데 다짜고짜 책임자를 찾냐고?”
윤조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개성인삼주식회사 부산 지점장 미야코다 유지(都雄司)요.”
명함을 받은 남자가 손짓을 보내자 뒷문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밖으로 나갔다.
“여기 김선 씨는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애초에 징용 대상자가 아니오.”
“무슨 소립니까? 이렇게 영장이 떡하니 나왔는데.”
마치 준비한 것처럼 내미는 징용 영장에 윤조의 미간이 꿈틀 요동쳤다.
“분명 착오가 있었을 거요.”
“그건 내 알 바 아니니 방해 말고 당장 나가요.”
“대체……!”
버럭했던 윤조가 소녀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일본어로 낮게 윽박질렀다.
[지금 바다에 얼마나 많은 기뢰(機雷, 물속이나 물 위에 설치한 폭탄)가 뿌려져 있는 줄 아시오! 군량미를 실은 배마저 못 건너가는 판에 징용? 이 아이들을 다 죽일 셈이오!]
내내 건방을 떨던 남자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윤조의 말마따나 무차별적으로 살포된 연합군의 폭탄에 민간 여객선까지 침몰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자 지난달부터 일본을 오가는 배편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붙임성 좋던 소녀 경자가 윤조의 마지막 말을 용케 알아듣고 파랗게 질려서 물었다.
“참말로 징용 가면 우리 다 죽습니꺼?”
“뭐라카노?”
“군인도 아닌데 우리가 와?”
소녀들 사이에 동요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안 그래도 불안에 떨던 몇몇 아이는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일본이 아니라 강원도 군복 공장으로 가는 것이외다.”
그때 강당으로 들어온 콧수염 사내의 얼굴에 윤조가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어이! 죽지 않을 테니 조용히들 해. 조용!”
“……설마 당신이 책임자요?”
콧수염 난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흠, 이 여자가 그쪽 회사 직원이라고?”
콧수염이 능글맞은 미소로 선을 훑자 윤조가 그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그렇소. 그리고 내 아내가 될 사람이오.”
눈이 휘둥그레진 선이 윤조를 올려다보았다.
아내?
통속 연애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에 소녀들이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선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도련님, 그게……?”
윤조가 선의 손을 꽉 잡아 말을 막았다.
그 모습을 본 콧수염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내가 소문으로 들었던 숙녀분과 많이 다른데?”
선이 고개를 숙였다.
윤조와 화연은 웬만한 부산 사교계 인사는 다 알 정도로 공인된 관계였기에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관리를 속이려 드는 윤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더 큰 벌을 받게 되면 어쩌시려고 이러시는지.
그때 급히 들어온 청년이 귓속말을 하자 콧수염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부부윤(副府尹, 부시장)이?”
새삼 윤조를 다시 쳐다본 콧수염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뭐, 본인이 결혼할 사이라고 하니. 어이!”
콧수염의 손짓에 젊은 남자가 막고 있던 길을 터주었다.
윤조가 선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자 소녀들의 낭만 가득한 탄성이 강당을 잔잔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