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등화관제
“이걸 어째!”
손수건으로 탁자를 닦던 화연이 달려온 선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넘어진 병에서 쏟아진 잉크가 하얀 탁자 보와 화연의 옷을 검게 물들이는 참이었다.
“윤조 씨한테 편지 한 통 쓰고 가려다 실수로.”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아냐. 옷은 됐고, 탁자 보나 걷어.”
“주십시오. 빨리 빼지 않으면 얼룩이 집니다.”
“괜찮은데. 그럼 대충 씻어만 줘. 말리는 건 집에 가서 할 테니.”
평소와 다른 화연의 태도에 선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인편으로 보내 드릴 테니 괘념치 마셔요.”
블라우스의 리본을 풀며 화연이 말했다.
“나 때문에 일이 많아지니 미안해서 그렇지.”
눈이 휘둥그레진 선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그런 말씀 마십시오.”
블라우스와 치마, 손수건과 탁자 보가 담긴 함지를 이고 선이 빨래터로 가자 화연이 전화로 교환수를 불러 윤조의 사무실로 연결을 요청했다.
잠시 후 권 주임이 전화를 받았다.
“민화연이에요. 윤조 씬요?”
- 잠시만요, 바꿔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냥 전해만 주세요.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전화를 끊은 화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밤새 윤조가 건너오길 기대하다 실망감에 잠을 설친 화연은 동이 트자마자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방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윤조를 찾다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다가간 화연은 선이 윤조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놀란 것도 잠시, 윤조가 선의 어깨를 밀어내자 화연은 얼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감히 내 남자를 훔치려 들어?’
몰래 향수를 뿌리곤 시침을 뚝 떼던 선을 떠올리며 화연은 이를 악물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보았다.
아버지에게, 오라버니에게, 전남편에게.
돈과 명예를 가진 남자에게 부나방처럼 몸을 던지던 싸구려들.
선 또한 그런 천한 부류라 생각하니 오히려 일말의 불안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순진하게만 보이던 선이 사실은 꽤나 발칙하고 대담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좀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치면 선도 화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당한 대로 반드시 갚아 주는 성품 같은 것 말이다.
세상은 화연을 남편과 친구의 배신으로 고통당한 피해자로만 알고 있지만 실상 이미 연인 사이였던 둘 사이에 끼어든 것도, 일본에서 재결합한 그들을 이간질해 끝내 결별케 한 배후에도 화연이 있다는 것은 잘 몰랐다.
그런 화연에게 촌스러운 하녀쯤은 장애물도 아니었다.
화연은 향수를 들고 선의 방으로 갔다.
지금쯤 윤조는 여자 둘만 있는 집안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으리라.
‘그럼 시작해 볼까?’
화연은 제 남자를 탐내는 앙큼한 하녀를 응징하기 위해 쌀 네 가마니 값이 넘는 비싼 향수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비가 그쳐 얼마나 다행인지.
구름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이 처음부터 잉크 따윈 묻은 적 없던 것처럼 하얘져서 빨랫줄에서 펄럭이는 화연의 블라우스를 어루만졌다.
선이 어깨가 빠져라 주물러 빤 덕이었다. 달라진 화연의 태도가 이상하기도, 미안하기도 해서 더 신경 써 옷의 주름을 펴는데 윤조가 다급히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퇴근하긴 이른 시간인 데다 분명 오늘부터 여관에서 머문다고 하셨는데.
“어찌 이 시간에……?”
윤조가 곧장 선에게 오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너 괜찮은 거야?”
“예? 뭐가요?”
“도둑이 들었다며?”
“도둑이요! 어디에요?”
선이 도리어 되묻는데 현관에 화연이 나타났다.
“왔어요, 윤조 씨.”
“어떻게 된 거요? 집에 도둑이 들었다더니?”
“저기 있잖아요. 도둑.”
화연의 손가락이 선을 똑바로 가리켰다.
뜻밖의 지목에 선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요시코, 아니 선이가 내 향수를 훔쳐 갔어요.”
선은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무슨 그런.”
미동 없는 화연의 차분한 시선 아래 선이 파랗게 굳어 갔다.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지점장님.”
“집에 두고 온 걸 착각한 거 아니오?”
윤조의 말에 화연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여기서 사용한걸요. 실은 저 애가 목욕실에서 몰래 제 향수를 쓰는 걸 봤어요. 내 말 맞지?”
선은 당황하고 말았다.
호기심에 한 번 뿌려 본 것이 의심의 증거로 튀어나올 줄이야.
“그, 그건…….”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선을 대신해 윤조가 나섰다.
“어떻게 그걸로 도둑이라 단정한단 말이오.”
“그리 말할 줄 알았어요. 얘, 너 이리 들어와. 어서!”
화연의 서슬 퍼런 명령에 선이 주춤주춤 집으로 갔다.
“앞장서.”
“어딜?”
“네 방이지, 어디겠어.”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선은 떠밀리듯 문간방 앞에 섰다.
“열어.”
불안해진 선이 윤조를 흘깃 살폈다.
다행히 그의 눈에 담긴 건 걱정과 신뢰였다.
그래, 사실이 아니니까.
아가씨께서 뭔가 잘못 아신 걸 거야.
선은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었다.
걱정과 달리 방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윤조가 미간을 찡그리며 코밑을 막는다.
그때서야 선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한 향기가 온방에 넘실대고 있음을 알았다. 너무 긴장해서 냄새도 맡지 못했던 것이다.
“이걸 봐요.”
안으로 들어간 화연이 베개를 윤조 앞에 던졌다. 하얀 광목에 남은 누런 자국은 분명 향수의 흔적이었다.
화연이 선을 쏘아보았다.
“어제처럼 몰래 뿌리려다 잘못해 쏟은 게지. 그러곤…….”
화연이 벽장을 뒤져 보따리를 꺼내자 선이 놀라서 손을 뻗었다.
“안 됩니다.”
“이거 놔.”
“아가씨, 제발…….”
선의 애원에 화연은 더 기세가 등등해져서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솜을 두어 누빈 겨울 저고리 두 벌과 토시, 손수건과 목도리 따위가 다다미에 마구 흩어졌다.
그와 함께 향수병도 굴러떨어졌다.
내용물이 조금밖에 남지 않은 향수를 집어 들며 화연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들킬까 봐 겁이 났으면 더 깊이 숨겼어야지. 칠칠맞긴.”
선은 입 속을 꽉 깨물었다.
“아닙니다.”
“끝까지! 윤조 씨, 이래도 저 애만 감쌀 건가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모른다면서 왜 보따리를 숨기려 했어?”
캬라메루 때문이었다.
너무 소중해 먹지도 못하고 아껴 둔 혼자만의 정표.
바닥에 나뒹구는 물건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캬랴메루 갑을 챙기는 선을 본 윤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할 말이 없겠지. 이해는 해. 견물생심이라고 얼마나 욕심이 났을까? 더구나 향수는 여자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니.”
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죽어도 아닙니다.”
“흥! 실토하면 한번은 용서해 줄 셈이었는데.”
화연이 윤조에게 돌아섰다.
“손버릇 나쁜 데다 거짓말까지 하는 하녀라니. 두고두고 화근이 될 테니 되도록 빨리 개성으로 돌려보내요. 아니면 진짜 도둑으로 신고…….”
“일어나.”
윤조가 명령하자 선이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일어나라고!”
성큼 들어온 윤조가 선의 손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길로 윤조가 선을 데리고 나가자 화연이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뭘 하려고요? 윤조 씨?”
마당 한가운데서 윤조가 걸음을 멈췄다.
또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두꺼워지는 하늘 아래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어와 그나마 희미하게 떠돌던 향수 냄새마저 싹 쓸어냈다.
“윤조 씨, 그렇다고 지금 당장 쫓아내자는 건…….”
이제 와 생각해 주는 척하는 화연이 죽도록 미운데 윤조가 선의 뒤에 서더니 갑자기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것이 아닌가!
선은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쳐다보고 있던 화연의 충격은 훨씬 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선이 몸을 빼내려 하자 윤조가 허리를 감싸더니 더 깊숙이 코를 문질렀다.
몸을 관통하는 낯선 감각.
선은 목을 젖히며 전율했고, 색정적이기까지 한 모습에 화연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당장 떨어져요, 당장!”
“아무 냄새도 안 나.”
“……뭐라고요?”
고개를 든 윤조가 선을 화연 쪽으로 떠밀었다.
“그 정도로 쏟았으면 향수 냄새가 나야 하는 거 아니오? 온 집 안에 저렇게 진동할 정도니까. 그런데 안 나. 어제 뿌린 당신한테도 나는 냄새가 선이한테는 안 난다고!”
화연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내 앞에서 저 애 편을 드는 거예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오.”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던 화연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가씨!”
윤조가 쫓아가려는 선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어쩌려고 그러세요? 빨리 아가씨 잡으세요, 예?”
믿을 수 없다는 듯 윤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바보야?”
“빈 몸으로 나가셨어요. 저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
선이 윤조를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나갔지만 어디에도 화연은 보이질 않았다.
집 둘레를 한 바퀴 돈 선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말했다.
“안 계세요. 지나가던 인력거라도 타신 거면 다행인데…….”
마당엔 아무도 없었다.
“지점장님? ……지점장님?”
혹시나 싶어 손님방을 보니 화연의 가방이 보이질 않았다.
화연 아가씨에게 가셨구나.
그때서야 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마루턱에 힘없이 앉고 말았다.
그날은 부산에 등화관제가 시작된 이후 가장 어두운 밤이었다.
짙게 드리운 먹구름이 불 꺼진 도시의 유일한 빛인 그믐의 흐리멍덩한 월광마저 완벽히 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은 불붙은 숯처럼 마음이 들떠 초조하게 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안달 난 계집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밤은 깊어 갔고, 윤조는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알 수가 없건만 선은 가슴이 답답해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화연 아가씨를 만나셨겠지?
미안하다고 하셨을까?
나를…… 내보내겠다고 하셨을 테지.
선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바보 같은 년.
따라가라 해놓고 안달복달하는 실없는 년.
후회로 손톱을 물어뜯는데 대문이 살짝 흔들렸다.
인적이라기엔 미미했으나 선은 지체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지나는 바람이었던 듯 잠잠했지만 선은 빗장을 열었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겁도 없이. 누군 줄 알고.”
기둥을 짚은 윤조는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깨를 적신 비 때문인지, 곁을 스치는 순간 풍겨 온 술 냄새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선은 재빨리 마른 수건을 챙겨 윤조를 따랐다.
그런데 넥타이를 풀던 윤조가 방으로 들어오는 선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나가.”
“이부자리를…….”
윤조가 선의 팔을 잡아 마루로 사정없이 몰아냈다.
닫혀 버린 문 앞에 우두커니 섰던 선이 힘없이 몸을 돌렸다.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런데 좋기도 했다.
곁에 있으니 안심이 돼서 가슴의 화기가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 미친년.
방으로 돌아온 선이 쭈그려 앉았는데 윤조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씻으러 가시나?
순용의 방 앞으로 지나간 윤조의 기척이 문간방쯤에서 조용해졌다.
그러곤 급박하게 집안 문들을 여닫으며 헤맨다.
왜 저러시지?
나가보고 싶었지만 방금 전 차갑게 밀려났던 기억이 선을 망설이게 했다.
그때.
“선아! 김선!”
심상찮은 윤조의 목소리에 선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윤조가 선을 발견하고 주춤 멈췄다.
“왜 거기서……?”
윤조는 선이 왜 순용의 방에서 나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문간방에 향수 냄새가 빠지질 않아서…….”
“……젠장!”
제 머리를 헝클어뜨린 윤조가 거칠게 선의 어깨를 스쳐 자신의 방으로 갔다.
선은 입술을 깨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치미는 서러움에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아예 눈물길을 막아 버렸다.
그렇게 애써 흘러넘치는 슬픔을 틀어막는데 느닷없이 방문이 열렸다.
윤조였다.
선은 윤조의 옷깃이 벽을 긁으며 내려가는 소리에도 잠든 척 꼼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리꽂히는 눈길이 어찌나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등이 화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숨죽인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싶던 그때, 윤조가 말했다.
“화연이와 결혼할 거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널 개성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도 했어.”
선은 입술을 더욱 꾹 물었다.
소망이 꺾인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배신당한 기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울지 마. 이 정도는 울 일도 아니야.
“그런데 난…… 널 원해.”
선이 번쩍 눈을 떴다.
“미쳐 돌만큼.”
메마르게 잠겨 드는 윤조의 음성에 선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안 자는 거 알아.”
흠칫 어깨를 떤 선이 천천히 일어나 윤조를 돌아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타오르는 눈동자가 선의 얼굴을 더듬었다.
“지금뿐이야. 싫으면 말해.”
싫으냐고?
자신이 어찌 윤조를 싫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선은 도망가고 싶었다.
소망과 기대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순간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윤조가 선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미처 닿기도 전에 선이 움찔 고개를 돌리자 윤조의 눈빛이 흐려졌다.
윤조가 일어서자 놀란 선이 황급히 옷자락을 잡았다.
두려웠지만 그래도 그가 멀어지는 건 싫었다.
선택지가 둘밖에 없다면 죽어도 뛰어들리라.
그가 이끄는 욕망의 바다로.
윤조가 선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숨도 못 쉴 만큼 짙은 입맞춤이었다.
한참이나 입을 맞추던 윤조가 저고리 앞섶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선의 목으로 입술을 댔다.
“으음.”
목덜미를 핥는 물컹한 살덩이가 혀라는 것을 알고 놀란 순간, 윤조가 선을 눕히더니 단번에 가슴 가리개를 끌어 내렸다.
“도련님!”
가리려는 선의 시도를 손목을 잡아 저지한 윤조가 부푼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젖꼭지가 미지근한 입 속으로 쭉 빨려들자 선이 눈을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잠깐만…….”
“가만있어.”
윤조의 혀가 젖꼭지가 이리저리 쓸어대자 선은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다리를 버둥거렸다.
“도려, 읍.”
입술로 선의 말을 막은 윤조가 조끼를 벗어 던지고 선의 치마를 올렸다.
윤조의 손이 선의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를 탐욕스럽게 훑고 올라갔다.
“저기, 아읏!”
윤조의 어깨를 밀던 선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그의 손이 속옷 속, 자신도 만져 본 적 없는 은밀한 곳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선은 잡고 있던 윤조의 팔뚝에 손톱을 세웠다.
그러나 손톱이 파고들지 못할 만큼 단단해진 윤조의 팔은 선의 미지의 음지를 거침없이 탐험해 갔다.
“제발, 거긴……!”
가장 민감한 곳을 자극받은 선이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뭐지?
안타깝고, 절박하고, 목이 마르는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고통과 쾌락, 당혹감과 안정감, 수치심과 기쁨.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이 윤조의 손길을 따라 육체를 제멋대로 점령해 갔다.
마침내 몸속 깊은 데서 흘러나온 물이 손가락을 적시자 윤조가 선의 다리를 벌리고 바지 단추를 열었다.
아래를 꾹 찌르는 새로운 존재에 불안해진 선이 몸을 뒤틀자 윤조가 얼굴과 가슴에 무차별적으로 입을 맞추며 선의 두려움을 교란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리 사이로 묵직하게 밀착해 오는 윤조의 허리.
“으음!”
찢어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찢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탄력적인 가죽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이건 그걸 넘어서는 버거움이었다.
선은 본능적으로 윤조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만…….”
“……힘 빼.”
“아파요.”
“참아.”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선이 윤조를 바라보았다.
관자놀이엔 푸른 힘줄이, 눈 안에 붉은 실핏줄이 선 윤조는 알 수 없는 뭔가를 버티는 듯했다.
“날 받아.”
윤조가 헐떡이며 선의 속으로 파고들었다.
“전부 다 받아.”
윤조가 선의 좁은 통로를 뚫고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채웠다.
“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윤조의 뜨거운 숨.
그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쳐 오는 윤조의 육체.
윤조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들이닥칠 때마다 선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살살…… 아읏!”
아랑곳없이 파고드는 단단한 살덩이는 상처를 내는 동시에 얄궂게도 상처를 어루만지며 선을 혼란스럽게 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윤조가 싫은데 그게 자신 때문인 것은 좋고, 배려라곤 없이 폭주하는 건 미운데 오래 참은 까닭이라 생각하니 기뻤다.
아, 얼빠진 년!
마지막까지 무자비하게 몰아붙인 끝에 윤조가 거친 신음과 함께 선의 배에 비릿한 액체를 쏟아냈다.
턱까지 닿았던 숨이 가라앉을 즈음 여전히 얼얼한 충격에 빠져 있는 선에게 윤조가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선은 제 욕심만 채운 윤조가 야속해 얼굴을 피했다.
“날 버리지 마.”
뜻밖의 속삭임에 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마저 그러지 마. 제발.”
눈 안에 맺혀 반짝이는 것이 설마 눈물인가?
생전 처음 본 윤조의 연약함에 선은 심장이 아려 왔다.
내가 뭐라고 이리 아름다운 분이 애원을 하시나?
견딜 수 없는 애달픔으로 선은 윤조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어미 개처럼 핥아 주었다.
윤조가 선의 위로 올라오며 깊숙이 입을 맞췄다.
선은 입술을 열고 윤조를 맞아들였다.
마음을 여니 갱지처럼 뻗대던 혀가 윤조와 사르륵 얽히며 캬라메루처럼 다디단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가슴을 쥐는 손길도, 젖꼭지를 감빠는 입술도, 배꼽을 훑는 혀도 수줍게 받아들이던 선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련님, 거긴……?”
선이 윤조를 제지한 곳은 도도록한 아랫배와 검은 수풀의 경계선이었다.
설마 입술이 그리로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선은 당혹스럽고 겁이 났다.
“걱정 마, 다신 아프게 하지 않을게.”
손깍지를 끼며 안심시킨 윤조가 선의 둔덕에 살짝 입술을 댔다.
민감한 곳만 아플 정도로 비벼대던 처음과 달리 먹이를 찾는 왜가리처럼 수풀 전체를 건드리고, 헤집으며 윤조는 선의 기색을 살폈다.
“으응.”
비단같이 매끄러운 진홍색 신음이 선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자 윤조의 혀끝이 부리처럼 선의 진주를 찌르고 쪼아댄다.
“으으읏!”
활처럼 허리를 젖히며 윤조의 목을 조이는 선의 허벅지 사이로 뜨거운 습기가 차올랐다.
머리는 뭉실뭉실 떠올라 흩어지고, 몸통은 산산이 뒤틀려 조각나고, 다리는 뽑혀 나갈 듯 짜릿하게 당겨지는 느낌.
선의 첫 절정이었다.
“안 되겠지? 너 힘드니까, 나도 알아. 아는데…….”
선의 절정을 목격한 윤조가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며 중얼댔다.
흥분을 이길 수 없는데, 선을 또 아프게 할 순 없으니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선이 사춘기 소년 같이 쩔쩔매는 윤조를 꼭 안아 주었다.
“선아.”
윤조가 다시 선에게 몸을 묻자 먹구름 사이로 그믐달이 은은한 자태를 드러냈다.
부산에 등화관제가 시작된 이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