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4. 비 꽃

화연은 손재주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해본 적이 없어 서툴 뿐 익숙해지면 음식이고 살림이고 꽤 야무지게 해낼 것이라고 화연의 칼질을 보며 선은 씁쓸히 생각했다.

“마늘은 이 정도 다지면 돼?”

“예. 냄새가 배니 얼른 손부터 씻으십시오.”

“괜찮아. 음식 하면 당연한 거지. 이제 뭐 하면 돼?”

윤조가 좋아하는 음식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온 화연은 선이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배추를 다듬고 버섯을 썰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노력하는 화연 앞에서 선은 자꾸만 초라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쯔쯔, 아주 안방을 차지했구마.”

켜켜이 소를 채운 배추를 찜 솥에 올리는 것까지 직접 한 화연이 잠깐 쉬러 가자 꼼짝도 않던 의령댁이 비로소 부엌으로 나오며 투덜댔다.

“여가 즈그 집이가? 뻔질나게 드나들믄서 일만 만들고. 귀찮아 죽겠다, 마.”

판사 오라비와 방문한 일요일 이후로 화연이 연통도 없이 불쑥불쑥 오는 일이 잦아지자 동네 여자들을 불러 심심파적 삼던 화투를 못 치게 되어 의령댁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 아랫것들 시킬 거믄서 무신 현모양처가 될 기라고. 참, 야야! 그라고 보니 지점장님 장가가실 때 니가 찬모로 따라갈 수도 있겠네.”

“싫어요.”

“싫기는. 그기 니 맘대로 되나?”

“그만두면 돼요. 전 안 갈 거예요.”

화연과 혼인한 윤조라니.

상상만으로도 선은 칼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의령댁이 울적해진 선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는데 윤조의 사무실로 심부름을 갔던 순용이 보자기에 싼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기 뭐꼬?”

“인삼입니더. 제사 갈 때 큰댁 어른들 드리라꼬 지점장님이 주셨습니더.”

“세상에!”

보자기를 풀어 본 의령댁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초록색 이끼 위에 곱게 드러누운 인삼들은 한눈에 봐도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는 최상급이었다.

“이 은혜를 우야믄 좋노. 천출이라고 괄시받을까 봐 이래 신경을 써 주싰는갑다.”

“천출이라니? 죽은 순용 아비가 얼자였는가?”

언제 왔는지 화연이 끼어들었다.

지난 갑오년에 사노비까지 해방된 것이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건만 뼛속 깊이 박힌 신분제는 양반이었던 화연에게도, 노비로 태어났던 의령댁에게도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우리 아가 이래 뵈도 의령 남씨 양반가 자손입니더. 곧 집안 제사가 있어가 다녀온다 했드마는 지점장님이 이래 귀한 선물을 주신다 아닙니꺼.”

“제사? 언제 가는데?”

“내일 아침 일찍 나갑니더.”

“갔다가 언제 와?”

순용의 핏줄을 밝힐 때만 해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의령댁은 화연이 엉뚱한 것만 캐묻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해졌다.

“제사 보고 친척 집도 들르고 하면 사나흘은 안 걸리겠십니꺼?”

“아주 안 오는 건 아니지?”

화연의 질문은 꽤 타당한 것이었다.

신문과 라디오에선 연일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선전했지만 연합군이 제주도 아니면 부산으로 상륙할 것이란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시골로 피난 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의령댁은 혼인 얘기까지 나온 마당에 진짜 안주인 행세를 하려고 자신과 순용을 쫓아낼 심산인가 싶어 펄쩍 뛰었다.

“아닙니더! 지점장님 아니믄 입에 풀칠도 몬하는데 우리가 가긴 어딜 갑니꺼.”

불안해진 의령댁이 눈치를 보았지만 정작 화연의 시선이 머문 곳은 화덕 앞에 쭈그려 하릴없이 숯을 쑤석대는 선이었다.

“선아. 야야! 쟈가 정신을 어디 빼놓고.”

그때서야 꿈에서 깬 듯 바라보는 선에게 화연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배추찜은 아직이야?”

“속대가 두꺼워 조금 더 쪄야 합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순용아, 인력거 좀.”

직접 한 배추찜으로 윤조와 저녁 식사까지 할 거라더니.

“곧 지점장님 퇴근하실 텐데.”

“급한 일이 생겼어. 대신 네가 말해 줘. 배추찜 내가 만들었다고. 꼭!”

선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은 화연이 인력거를 타고 멀어지자 대문간에 서 있던 의령댁이 가래침을 퉤 뱉었다.

“무신 꿍꿍이고?”

맥없이 돌아서는 선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의령댁이 갑자기 걸음을 재게 놀려 선을 가로막았다.

“니 뭔 일 있제?”

“아니요.”

“귀신을 속이라. 일단 일로 와봐라.”

의령댁이 주변을 어슬렁대는 순용을 피해 선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왜 이러세요?”

“순용이 듣는다. 목소리 낮춰라.”

무슨 얘길 하려고 이리 조심을 시키는지 불안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의령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니 나리하고 잠자리했드나?”

“아뇨! 그냥 입맞춤만…….”

너무 놀라서 엉겁결에 실토를 해버린 선의 입을 의령댁이 황급히 막았다.

“조용히 하라 안 캤나.”

얼굴이 새빨개진 선이 고개를 숙이자 의령댁이 장탄식을 뱉었다.

“그럴 줄 알았다. 요새 나리 눈빛이 심상치 않드만은.”

“그날 한번 뿐이었어요. 그 뒤론 아무 일도 없었고요.”

왜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선이 변명을 했다.

어쩌면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아무 내색이 없는 윤조를 원망하고 싶은 것이었을 수도.

“곧 무슨 일이 있게 될 기다.”

의령댁의 말에 드리워진 야릇한 그림자에 기대감이 올라오자 선이 세차게 도리머리를 쳤다.

그건 감히 품을 수도, 품어서도 안 되는 소망이었다.

“말도 안 돼요. 화연 아가씨가 계신데 어찌…….”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가 있는 줄 아나? 잘나고 젊은 상전이 하녀 하나 후리는 것쯤이야 흉도 아니고.”

“도련님은 그런 분 아니세요.”

의령댁이 코웃음을 쳤다.

“가시나야, 니가 더 문제다.”

“……예?”

“내가 볼 때 니는 지점장님이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믄 몸도 마음도 싸그리 갖다 바칠 년이다.”

“무슨! 아니에요.”

“아니기는. 밤마다 잠도 못자고 끙끙 앓으면서 안달복달을 하드마는.”

“그건……!”

말문이 막히는데 갑자기 병풍 뒤에서 했던 윤조와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밀어내긴 커녕 엿가락처럼 윤조에게 달라붙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선은 그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와? 곰곰이 생각해보이 내 말이 맞제?”

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해야 해요, 전?”

“숨기라.”

단호한 의령댁의 말이 선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떠나라는 것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조심해라도 아닌, 숨기라?

“느므 좋은 티도 내지 말고, 그렇다고 싫은 척 빼지도 말고. 적당히 도도하게 굴믄서 애를 태우라 이 말이다. 내 말 알아듣제?”

이게 무슨 된장 풀어 고추장찌개 끓이는 소리인가?

알아듣긴커녕 숨기라는 말보다 더 모르겠어서 백치처럼 쳐다보자 의령댁이 끌끌 혀를 찼다.

“남들은 스무 살이믄 얼라를 낳아 키우고만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노?”

의령댁이 인기척을 살피더니 바짝 다가앉았다.

“똑똑히 들으래이. 사내는 무정하고 상전은 잔인한기라. 사내는 계집이 넘어왔다 싶으면 마음이 식어 뿌고, 상전은 아랫것이 기어오르믄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상전을 사내로 상대하는기 을매나 어려운지 아나?”

의령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양반의 천첩(賤妾)으로 살았던 삶에서 우러난 차갑고 서러운 진실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마음을 다 보여주지 마라. 니처럼 티 내믄 얼마 안 가 헌신짝 신세가 되는 기라.”

충고는 선에게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했으나 문제는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인 일본어 신문처럼 도무지 읽어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는 마음을 어찌 숨깁니까?”

“인자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쫌 있다 나리 들어오시믄…….”

의령댁의 지시는 어렵진 않았지만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무엇보다 현실감이 없었다.

도련님 앞에서 웃지 말라고?

눈도 마주치지 말고, 인사는 대충, 묻는 말에만 새침하게 대답을 하라고?

그러다가 가끔 우연인 척 손끝을 스치며 웃어 주라고?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말이다.

“첩 자리를 확실히 꿰차기 전까지는 얼라도 가지믄 안 된다.”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에 선이 경악을 금치 못하자 의령댁이 곰방대에 봉초담배를 채우며 툴툴거렸다.

“와 그리 놀라노? 몸 섞기 시작하믄 얼라 들어서는 거는 시간문제지. 우리 같은 신세는 배불뚝이가 되믄 그날로 끝이다. 사내들은 몸을 안 섞으면 마음도 안 섞는 족속이라 절대 믿으면 안 되는기라.”

얼결에 임신을 피하는 법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듣고 어질어질해진 선이 부엌에 갔다.

“어머!”

화연의 배추찜이 여태 끓고 있었다.

선은 급히 솥을 화덕에서 내리고 뚜껑을 열었다. 하지만 배추찜은 익을 대로 익어 살짝만 눌러도 뭉그러졌다.

“이걸 어째?”

망연자실하던 선이 텃밭에서 배추 한 포기를 뽑아 오는데 의령댁이 나타났다.

“뭐 하노?”

“아가씨의 배추찜을 제가 망쳤어요.”

“그래서?”

“다시 하려고요. 특별히 부탁하셨는데…….”

의령댁이 배추를 빼앗더니 텃밭으로 도로 던져 버렸다.

“니가 맨든 거를 아가씨가 맨드셨십니더, 하고 갖다 바칠라꼬? 이기 내 말을 어디로 들었드노!”

선이 어깨를 움츠렸다.

화연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안 나왔는데 왜 호통을 치는지 이해가 안 됐던 것이다.

“정신 채리라. 이제부터 민가 년은 상전이 아니고 니가 싸워야 될 상대다.”

하도 어이가 없어 선은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아가씨와 어떻게 싸워요?”

“꼭 머리채를 잡아야만 싸움인 줄 아나? 본처를 이길라믄 여우 짓도 하고, 술수도 부리야지.”

부엌에 들어간 의령댁이 그릇을 꺼내 곤죽이 되건 말건 아랑곳없이 배추찜을 담았다.

“요대로 상에 내라.”

“……이걸요?”

“거짓부렁도 아닌데 뭐 어땠노. 내 말대로 해라.”

고리눈을 뜨고 윽박지르는 의령댁을 거역할 수가 없어 어정쩡하게 그릇을 받아 드는데 윤조가 권 주임을 대동하고 퇴근을 했다.

“이게 누고? 한 달 만에 보는 것 같네. 잘 다녀왔는교?”

중국 출장을 갔던 권 주임은 역에서 바로 왔는지 커다란 가방을 든 상태였다.

가방을 받으려는 순용에게 괜찮다 손짓하며 권 주임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지점장님이 저녁 먹고 가라고 하셔서 염치 불고하고 들렀습니다.”

“고생했는데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제. 마침 화연 아가씨가 해놓고 간 특별 요리도 있으니까네 잘됐구마.”

“화연 아가씨의 특별 요리요? 와, 기대되는데요.”

의령댁이 그럴수록 민망해 죽겠는 선에게 윤조가 말했다.

“정미소 어르신도 오실 거야. 준비해 줘.”

윤조의 목소리만으로도 선은 가슴이 떨렸다. 그런데 의령댁이 선을 팔꿈치로 밀며 눈을 찡긋댄다.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부엌으로 들어온 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짓을 계속해야 한다고?’

샘처럼 솟아나는 감정을 어찌 숨기란 말인가?

윤조가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지만, 멀어지는 것은 더 무서웠던 선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더구나 윤조는 혼인을 앞두고 있는 상황.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하여 선의 마음이 흐물흐물해진 배춧잎처럼 짓이겨졌다.

맹장지(盲腸紙)를 두 겹씩 겹쳐 발라 빛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조치한 윤조의 방에 냉랭한 공기가 휘돌았다.

“기어이 민영석 자작의 사위가 되겠다?”

권 주임이 충칭에서 받아 온 선생의 편지를 읽고 신 사장이 말했다.

그는 부산 토박이로 초량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 중이라 통칭 정미소 어르신이라 칭하는 지역의 유지였다.

“조선소를 출입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그 이유뿐인가?”

“어르신, 그게 무슨……?”

윤조가 발끈하는 권 주임을 제지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합니다만.”

“처음 만났던 날, 자네가 그랬지. 전쟁은 돈으로 하는 거라고. 동의하네. 독립운동한답시고 여기저기 손만 벌리는 작자들한테는 나도 질렸으니까.”

신 사장이 잔을 채운 후 술이 떨어지자 권 주임이 골마루에 술병을 내놓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지킬 선이라는 것이 있네. 자넨 이미 조선소 투자 건으로 의심을 받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민영석의 여식과 혼인이라니.”

윤조가 쓴웃음을 지었다.

“절 걱정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 친일파 이혼녀를 방패로 목숨을 구걸하는 기둥서방 아닙니까?”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통렬한 인신공격을 본인이 덤덤히 옮기자 신 사장이 혀를 찼다.

“그리 말할 것까지야.”

“그들이 어찌 여기건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이 자리도 어르신께만은 미리 작전을 알려 드려야겠기에 마련한 것뿐입니다.”

본론이 나오자 신 사장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그것도 이해가 안 돼. 광복군의 진입에 맞춰 조선소를 폭파하겠다니. 거긴 연합군의 공격 1순위야. 가만있어도 폭격을 당할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무모한 일을 하려는 건가?”

“OSS(미국 전략 정보국. CIA의 전신)와 광복군의 조선 진공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무모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해방이 된다 해도 지금처럼 내 나라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만 반복될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하나 옳은 가치도 옳은 방법으로 실현할 때 의미가 있어. 뜻을 이뤘으나 내가 사라지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안쓰러움이 담긴 신 사장의 충고에 윤조의 미간이 흐려졌다.

“전 사라질 수도, 죽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십시오.”

신 사장이 혀를 찼다.

“신념은 가상하네만 더 이상은 자넬 변명해 주긴 힘들 듯하네.”

일어선 신 사장이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적이 많네. 부디 조심하게.”

신 사장을 배웅하고 돌아온 권 주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빈 술잔을 만지작대는 윤조를 보며 권 주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년해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친일파 계집 하나 이용하는 게 뭐 대수라고 저리 빡빡하게 구시는지. 그리고 막말로 임정(臨政)에 자금은 어르신보다 지점장님이 훨씬 더 많이 댔습니다. 그뿐입니까? 일본에 중국, 남방까지 다니며 연락책에 자금 모금까지 온갖 위험을 무릅쓴 게 누군데 안방에 앉아 변절자 취급이라니.”

“들리겠습니다.”

“어르신까지 저러니 억울해서 그러지요. 억울해서.”

두 남자가 한동안 말없이 앉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선이 들어왔다.

남자 손님이 오면 부엌 밖으론 얼씬도 않던 사람이 직접 술을 갖고 온 것도 놀라운데 한술 더 떠 선이 권 주임에게 말을 건넸다.

“여행이 힘들진 않으셨는지……?”

눈이 휘둥그레진 권 주임이 제 가슴을 짚었다.

“나 말이야? 뭐, 여행은 대개 고생스럽지.”

“출장이 길어 걱정했습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으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윤조는 말투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네가 내 걱정을 했다고? 왜?”

“……그냥요.”

선이 어물대며 나가자 권 주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뭘 잘 못 먹었나?”

벌떡 일어난 윤조가 문밖에서 부엌으로 가는 선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 왜 그래?”

“놓으십시오. 누가 봅니다.”

윤조가 문간방 옆 복도로 선을 이끌었다.

“무슨 일이냐고?”

손을 잡아 뺀 선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일 없습니다.”

“정말이야?”

“예.”

어두운 공간에서 숨죽여 속삭이자 필연적으로 병풍 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으나 다시 마주 선 지금, 뜨겁게 교차했던 숨결의 기억이 윤조의 못다 한 갈망을 부추겼다.

“저번엔…….”

“야, 선아!”

“예!”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선은 윤조를 두고 순식간에 도망쳐 버렸다.

젠장.

이놈의 집구석은 너무 좁고, 식구가 많다.

윤조는 처음으로 순용과 의령댁을 집에 들인 것이 후회하며 벽에 등을 기댔다.

‘정말 나는 사라지고 있는 중일까?’

부도덕한 자에게는 부도덕하게 상대하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매국 행위로 받은 은사금에 전쟁으로 불의한 부를 이룬 민영석 자작이었기에 그의 딸 화연을 이용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통쾌했다.

그런데 왜 이리 타는 듯 갈증이 나는지.

윤조는 지쳐 가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이중적 생활에 지쳤고, 매 순간 도박에 가까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긴장감에 지쳤다.

두렵기도 했다.

잡힐까 봐 불안했고, 죽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지독하게 외로웠다.

선에게 입 맞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실 윤조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관덕정에 멍하니 서 있는 선의 뒷모습을 봤을 때부터.

아니, 사랑채 문 너머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더 이상 선과 오누이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 아이를 부산에 데려가면 틀림없이 곤란해지리라.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선을 곁에 두고 싶다는, 격랑과 같은 갈망을 저항하기엔 윤조는 너무 약해져 있었다.

선이 종만에게 당하는 것을 봤을 때 폭발적으로 솟아나던 분노를 이길 만큼, 그 짐승 같은 사내 곁에 선을 두고 떠날 만큼 윤조는 강하지 못했다.

그는 선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짐을 선에게 나눠 지우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려고 선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기에 윤조는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따로 부탁드린 일은?”

“아, 여기.”

권 주임이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5개월 전까지 머물렀답니다. 계속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은 했는데 이 사람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윤조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작전이 시작되면 자신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민 판사에게 정체를 반쯤이나 들킨 상황.

혹여 일이 잘못되어 손발이 묶이기 전에 선을 위한 일을 단 하나라도 해두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지금 윤조에겐 선의 어머니를 찾는 것만이 선을 향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뿐이었다.

* * *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선의 입에서 자꾸만 비시시 웃음을 샜다.

‘진짜로 효과가 있었어.’

술병을 들린 것도 모자라 권 주임에게 먼저 말을 걸라 시켰을 땐 의령댁이 미쳤나 했다.

그런데 윤조가 그렇게 당장 쫓아올 줄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보다 한 가지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으로 속이 든든한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의령댁과 순용이 떠나고 홀로 집을 지키던 터라 대문으로 가는 선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누구시오?”

“나야.”

화연의 목소리에 선이 놀라서 빗장을 열었다.

“아가씨가 이 시간에 어찌……?”

그런데 정작 열린 대문으로 들이닥친 것은 잠방이 바람에 커다란 가방을 두 개나 든 인력거꾼이었다.

그 뒤로 화연이 진흙으로 엉망이 된 치맛자락을 들고 성큼 대문을 넘었다.

“의령댁이 돌아올 때까지 묵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

“묵으신다고요? 여기서요?”

“그렇다니까. 목욕물부터 준비해 줘.”

“목욕물은 왜요?”

화연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보면 모르겠니? 인력거에서 내리다 넘어져서 이 꼴이 됐다고. 찝찝해 죽겠으니 빨리 움직여. 아, 얼룩지면 안 되니까 옷도 빨고.”

선은 얼떨결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고, 진흙투성이 옷을 빨았다.

목욕통까지 씻고 나니 물이 끓었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더운물을 목욕실로 옮기느라 땀투성이가 되자 점점 화가 치밀었다.

‘왜 도련님은 미리 말씀해 주시지도 않고!’

설상가상, 없는 동안 쓰라고 순용이 넉넉히 떠다 놓은 물이 거의 바닥나 저녁부터 당장 물지게를 지게 생기자 선은 윤조에 대한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아랫것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한숨으로 마음을 달랜 선이 윤조의 방 중간에 장지문을 닫아 임시로 마련한 손님방으로 화연을 모시러 갔다.

“목욕물이 준비됐습니다.”

가방만 덩그러니 놓였을 뿐 화연은 보이질 않았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여깄어.”

목소리가 들린 곳은 뜻밖에도 문간방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들여다본 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침 공부한다고 펼쳐 놓았던 공책을 화연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이 화연의 손에서 공책을 낚아챘다.

“뭐 하는 짓이야?”

황당해하는 화연을 보고서야 선은 자신이 분별없이 굴었음을 깨달았다.

“송구합니다. 괴발개발 쓴 글씨라 부끄러워서.”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렇지. 어디 버릇없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선이 납작 엎드리자 화연이 거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공책 이리 내. 얼른!”

윤조와의 추억을 침범당하는 느낌에 적대감이 치솟았으나 도리가 없었다.

선은 공책을 주며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이왕 배우는 거 일본말을 배우지 왜 쓸데없이 언문을 배워?”

“언문이 아니라 한글이라고 하셨어요. 우리나라의 글이라고.”

공책을 휘리휘릭 넘기던 화연이 눈썹을 치켰다.

“윤조 씨가 가르쳐 준 거야?”

숨겨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악하게 싸우는 법을 아직 모르는 선은 그저 도전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예.”

화연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이 동정심이 많긴 해. 갈 데 없다고 매달리는 의령댁을 거둔 것만 봐도, 그렇지?”

공책을 툭 던진 화연이 뻣뻣하게 굳은 선의 곁을 지나 목욕실로 갔다.

따라 들어간 선이 유카타를 벗겨 주자 화연의 몸에서 진한 사향 내가 확 번져 났다.

흠 하나 없이 매끈한 등을 부드러운 무명천으로 닦아 주는데 화연이 물방울을 튕기며 말했다.

“윤조 씨하고 결혼하면 일본말은 내가 가르쳐 줄까? 우선 이름부터 짓자. 착할 선(善)이지? 그럼 요시코(善子, よしこ)라고 하면 되겠다. 착한 아이.”

선이 대답을 않자 화연이 고개를 틀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생긋 웃은 화연이 팔을 쭉 펴며 하품을 했다.

“아, 일찍부터 서둘렀더니 피곤하다. 윤조 씨 집에 목욕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조선에 돌아오니 목욕하는 게 제일 불편한 거 있지. 어찌 된 것이 이 미개한 민족은 위생 관념이라곤 없다니까.”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얄밉게 말하는 버릇까지 제 오라비와 똑 닮았다.

“아까 인력거꾼한테도 어찌나 구린내가 진동하는지. 날씨는 더워지는데 코를 막고 다닐 수도 없고 큰일이야.”

“저, 손님방을 치워야 해서…….”

“어, 다 되면 부를게. 목욕 후에 한숨 잘 거야.”

“예.”

목욕실을 나온 선이 괜히 제 몸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물을 끓이느라 불을 지핀 탓인지 매캐한 탄내와 땀 냄새만 엷게 난다.

그날 병풍 뒤의 나에게선 무슨 냄새가 났을까?

며칠간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었으니 기름이나 마늘 냄새가 났으려나?

윤조가 그걸 맡았을 거라 생각하니 낭패감이 들었다.

깨끗이 닦은 다다미 위에 보송한 새 이부자리를 깔던 선이 문득 구석에 놓인 화연의 가방을 쳐다보았다.

저 안에…….

“요시코!”

“예!”

몸을 닦은 화연이 이부자리에 들고서야 선은 뒷정리를 위해 목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선은 습기 가득한 공간을 환기시키는 대신 선반으로 다가갔다.

거기 화연이 두고 간 길쭉한 삼각형 모양의 향수가 있었다.

목욕을 끝낸 화연이 유카타를 입기 전 몸 구석구석에 향수를 뿌리며 말했었다.

이걸 뿌려야 체취가 향기로워진다고.

선이 조심스레 병을 쥐고 황금빛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뭐가 들었기에 요 작은 유리병이 미인의 조건이라는 걸까? 막 사람을 홀리나?’

코도 갖다 대보고 병을 기울여 찰랑거리는 모양새도 살피던 선이 닫힌 문을 흘깃 돌아보았다.

낮잠을 잔다고 했으니 두어 시간 후에나 일어날 터.

선은 호기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화연이 하던 대로 금박 입힌 뚜껑에 달린 동그란 주머니를 꾹 누르자 암내 섞인 치자꽃 냄새가 정통으로 선의 코를 쏘았다.

분사구가 얼굴로 향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읏……!”

어찌나 독한지 콧속이 아릴 지경이었다.

소매로 얼굴을 닦는 사이 암내는 가셨지만 치자 본래의 향기보다 느끼한 냄새는 여전히 코안에 진득하니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좋다고 하기도 아리송해서 괜한 짓을 했다 싶기만 했다.

향수를 선반에 내려놓은 선이 젖은 수건을 챙기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내 향수 여기 있지?”

“예, 여기.”

큰일 날 뻔했다 생각하며 선이 향수병을 건넸다. 그런데 숨을 들이마시는 화연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혹여 들킨 건가 조마조마한데 다행히 화연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한시름 놓은 찰나.

“향기 좋지?”

화연의 기습에 선은 바짝 얼어 버렸다.

“예? 아, 예.”

“마음에 들면 줄까?”

화연이 선의 눈앞에서 향수병을 흔들어댔다.

“아닙니다. 쇤네한테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향수는 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품이야. 오늘은 가지고 온 게 이것밖에 없어서 안 되고, 다음에 어울릴만한 것으로 줄게. 이건 너한테 너무 어른스러운 향이거든.”

장난스럽게 향수를 칙 뿌리고 돌아선 화연의 등 뒤에서 선이 제 얼굴을 와락 감쌌다.

구봉산 아래 신작로가 끝나는 완만한 언덕배기에 앉은 윤조의 집은 아랫동네와 윗동네를 가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아랫동네엔 소개 전까지 정미소와 교회, 병원과 학교, 명태고방이라 불리는 창고, 작부까지 둔 음식점 등이 성업하던 번듯한 동네였지만 윤조의 집 뒤로는 가파른 산자락을 따라 조선인들이 움집을 짓고 사는, 소위 까꼬막이라 불리는 빈민촌이었다.

초량에 있는 일곱 개의 공동 우물 중 하나가 그 초입에 있었다.

순용은 길은 평탄하나 한참 내려가야 하는 아랫동네보다 좀 불편해도 가까운 우물을 다녔기에 선도 그곳으로 물을 길러 갔다.

그런데 좁고 구불구불한 데다 낮에 내린 비로 질척해진 흙길을 익숙지 않은 물지게까지 지고 오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겨우 한번 왕복하곤 혼이 쏙 빠졌으나 저녁까지 쓰려면 턱도 없었기에 선은 마음이 급했다.

“누가 달랬나. 필요 없다는데 왜 맘대로……!”

첨벙, 두레박을 떨어뜨려 우물물을 퍼 올리며 선이 입술을 짓씹었다.

장난인 척 꾸몄지만 일부러 그랬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창피하고 짜증이 났다.

힘겹게 물지게를 지고 집에 도착한 선이 퇴근하는 윤조와 마주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의령댁의 충고 때문이 아니라 화연이 분사한 향수가 눈에 들어가 심하게 충혈된 까닭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네가 왜 물을 떠? 순용이가 안 채워 놓고 갔어?”

“아가씨가 목욕을 하셔서 물을 다 썼습니다.”

“아가씨? 눈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조가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선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물지게 이리 내.”

“옷 더럽히십니다.”

“상관없어.”

윤조의 손을 피하며 선이 차갑게 말했다.

“아뇨, 이건 제 일입니다. 화연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 보십시오.”

굳어진 윤조를 두고 들어간 선은 저녁을 짓는 내내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윤조의 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기척에도 미쳐 돌 것 같았다.

화연을 불러들여 시중을 들게 한 윤조가 미웠다.

하녀 된 제 처지를 절절히 깨닫게 하는 윤조의 무심함이 싫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 질투라는 깨닫고 개성에서 함께 지냈던 복순이를 떠올렸다.

‘복순이도 날 볼 때마다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도무지 조절이 안 되는 괴로움을 껴안고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희한하게도 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위치만 다를 뿐 어쩌면 화연도 비슷한 결의 감정 속에 있는 건지 모른다.

하긴 화연이 왜 왔겠는가?

윤조가 하녀와 단둘이 있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겠는가.

화연처럼 지체 높은 아가씨가 자신을 경계한다 싶으니 오히려 조금 상쾌해지기까지 해서 숭늉을 올리러 가는데 화연의 말소리가 들렸다.

“왜 화를 내는지 난 정말 이해를 못 하겠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선의 귀가 쫑긋 섰다.

“뭐든 멋대로 결정하는 당신의 방식이 얼마나 큰 불편을 끼치는지 생각해 봤소?”

“대체 누가 불편했다고……?”

긴 침묵 끝에 화연이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요. 말 안 하고 와서 윤조 씨를 당황하게 한 건 내가 잘못했어요.”

뭐야, 지점장님께도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온 거였어?

그때서야 오해가 풀리며 아까 쌀쌀맞게 굴었던 것이 민망해지는데 이어진 윤조의 대답이 선을 놀라게 했다.

“나한테만이 아니오.”

“윤조 씨 말고 또 누구요?”

“누구겠소?”

아까보다 더 긴 침묵.

조마조마해진 선이 쟁반을 꽉 움켜쥐는데 문 너머로 화연의 어이없음이 뿜어져 나왔다.

“설마……! 걘 하녀잖아요.”

“하녀도 느낄 줄 안다고 말했던 건 당신이오.”

“그래서 그 애한테 미안하다고 하라는 거예요, 지금?”

선도 궁금했다.

대관절 어쩌시려고 저러시는 걸까?

“내일부터 여관에서 지내겠소. 그러니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요.”

윤조의 대답이 왠지 섭섭해진 선이 속절없이 식어 가는 숭늉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의령댁 올 때까지 여관에서 묵을 거예요?”

“약속하지.”

지점장님으로선 최선의 답이리라.

나직한 한숨으로 자신을 다독인 선이 속으로 열까지 센 후 들어가 숭늉을 올렸다.

화연은 물론 윤조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이다.

“이거 말고 시원한 물로 갖다줘, 요시코.”

뒤늦게 자신을 부르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듣고 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 아가씨.”

“요시코라니?”

“지어 줬어요. 어울릴 것 같아서.”

윤조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왜요? 요즘 세상에 일본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딨다고?”

“선이는 그냥 선이오. 그 이름이 제일 어울려.”

공기가 차가운 눈처럼 차곡차곡 쌓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저녁, 윤조와 화연 사이에서 선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 *

투둑투둑 성글게 비 꽃이 피는 소리에 선이 눈을 떴다.

얇은 장지문 하나로 방을 가른 채 나란히 누워 있을 윤조와 화연 때문에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든 터라 머리가 영 멍했다.

하지만 비가 더 내리기 전에 물을 길어 와야 늦지 않게 조반을 지을 터였다.

선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물지게가 보이질 않는다.

‘이상하다. 늘 두던 자리에 뒀는데.’

짜증과 걱정이 몰려들던 그때, 처마 밑에 놓인 큰 물독 가득 물이 찰랑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독 표면에 맺힌 이슬로 보아 방금 뜬 신선한 물이었다.

혹시나 확인하니 부엌 안의 물독도 절반이나 채워진 상태.

뭐가 뭔지 어리둥절하던 선은 문득 꿈결인 듯 쏴아아 쏟아지던 물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리가 진짜였어?’

어제 일 때문에 윤조가 일부러 사람을 부른 것이 틀림없다 싶으니 면구스러워지는데 삐거덕 뒷문이 열렸다.

당연히 물장수라 여겼다.

그런데 지게를 지고 들어오는 이는 물장수가 아니라 윤조였다.

뜻밖의 광경에 선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도련님이 왜?’라는 생각만 어지럽게 빙빙 돌 뿐.

비 때문에 고개를 숙인 채 걸어오던 윤조는 부엌문 앞에서야 선을 발견하고 눈썹을 살짝 치켰다.

“비켜.”

비로소 얼음이 깨진 듯 선의 말문이 트였다.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지점장님이……?”

지게를 내린 윤조가 물통을 들고 부엌에 들어가 독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물지게를 지려 하자 선이 기겁해서 지게를 붙들었다.

“안 됩니다.”

“상관 마.”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윤조에게 어제의 앙금이 남았다는 것을.

선은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제가 할 테니 들어가십시오.”

“너나 비 맞지 말고 들어가.”

선이 입술을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뭐하는 거야?”

“쇤네가 잘못했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감히…….”

화연을 향한 질투에 눈이 멀었었다고 마음으로 고백하며 선은 고개를 수그렸다.

“용서하십시오.”

“일어나. 당장!”

윤조가 선의 팔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선이 비틀대다 윤조의 가슴에 손을 짚었다.

그런데 셔츠가 축축했다.

젖은 건 셔츠만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에서도 똑똑 물방울이 맺혀 흐른다.

비에 씻긴 윤조의 청순한 얼굴에 선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어떡해요? 저 때문에 이리 비를 맞으셔서…….”

“……넌 어떻게, 이렇게 사람 마음을…….”

거듭거듭 팔을 쥐는 손길.

엉겨드는 윤조의 보석 같은 눈동자.

코끝에서 인중으로 흘러 윤조의 입술 위에 맺히는 빗물을 본 선이 가슴 아리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었다.

손바닥 아래 단단한 근육만큼이나 젖은 윤조의 입술은 차가웠다.

그러나 선이 뜨거웠기에 맞붙은 두 입술의 온도는 곧 비슷해졌다.

놀람이 가라앉은 듯 윤조의 손이 선의 어깨를 쥐었다.

그 반응에 용기를 낸 선이 윤조의 뺨에 살그머니 손가락을 댔다가 이내 후회했다.

까슬까슬한 손끝이 미안할 만큼 매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던 것이다.

손을 떼려는데 윤조가 손목을 잡더니 더 깊이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이어지는 사이 빗발이 거세졌다.

입술 사이로 싱그러운 비 맛이 흘러들자 윤조가 선을 처마 아래로 밀었다.

그런데 뒷걸음질 치던 선의 발이 그만 물통을 건드리고 말았다.

뚜르르 굴러 댓돌에 부딪힌 물통 때문에 깜짝 놀란 선은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하얗게 질려 쏜살같이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잿빛 가랑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윤조는 또다시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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