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3. 모던 걸, 버려진 조강지처

곳곳에서 폭격을 대비한 소개(疏開)가 시작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용두산과 영도대교, 부두와 기차역 인근의 집과 건물들이 헐려 나가 공터로 변해 갔다.

역과 가까운 초량도 소개 예정지라 떠나기 시작한 사람들로 동네가 뒤숭숭했지만 봄은 변함없이 도도히 찾아들었다.

돌아온 것은 봄만이 아니었다.

화연이 도착한 건 이젠 일상이 된 공습경보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후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못 보던 아이네? 누구니?”

5개월 만에 만난 선을 화연은 알아보지 못했다.

“작년 가을, 역에서 뵌…….”

“네가 그때 걔라고?”

붓기와 시퍼런 멍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뽀얗게 드러난 선은 스무 살이 되면서 젖살이 빠져 윤곽이 한층 여성스러워진데다 키도 약간 더 자란 상태였다.

새순처럼 신선한 선의 자태에 화연은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 윤조를 흘겨보았다.

“왜 말 안 했어요?”

“뭘 말이오?”

윤조가 화연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방 두 개를 터서 응접실을 겸하여 쓰고 있는 윤조의 방에 단둘이 남자 화연이 나직이 불만을 터뜨렸다.

“본가에서 데려온 아이가 예쁘다는 거 말이에요.”

“예뻐?”

“예쁘잖아요, 누가 봐도.”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오?”

연못 방향으로 난 유리문을 열어젖히며 윤조가 무심히 대꾸했다.

어느 정도로 무심했냐면 화연의 불안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무심했다.

그만 할 말이 없어진 화연이 꽁하게 입술을 모은 채 의자에 앉았다.

축음기 뚜껑을 연 윤조가 토라진 화연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화연이가 더 예뻐.”

짜릿한 속삭임.

오감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외모.

화연이 처음 일본으로 건너갔던 4년 전, 윤조는 이미 유학생들 사이의 유명 인사였다.

개성 부호의 아들로 동경 제국 대학에 입학한 엘리트, 수묵화인 듯 유려한 얼굴선과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눈, 결벽하리만큼 깔끔한 멋쟁이에 미혼이라는 희귀함까지 겸비해 일본 고위 장성의 딸이 흠모하여 쫓아다닐 정도였다.

“얄미워.”

두 번 다시 남자에 목매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화연은 친구의 선을 넘지 않는 윤조 때문에 애를 태우다 먼저 애정을 고백했다.

따르는 여성이 많았음에도 스캔들 하나 만들지 않았던 담백한 태도는 사귄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아 섭섭하기도 했지만 필요할 땐 이리 센스를 발휘하니 윤조는 화연에게 딱 적당한 남자였다.

‘적당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 텐데.’

화연이 고민하는 사이 축음기 태엽을 감은 윤조가 레코드 위에 바늘을 얹었다.

Auf Flügeln des Gesanges Herzliebchen, trag ich dich fort,

노래의 날개 위에 그대를 보내오니

Fort nach den Fluren des Ganges, Dort weiß ich den schönsten Ort;

행복이 가득 찬 그곳 아름다운 나라로

이국(異國) 소프라노의 고아한 음성이 화사한 햇살, 따사로운 공기와 어울려 윤조의 입맞춤으로 고조된 화연의 예술가적 감성을 건드렸다.

화연에겐 지금 여기가 ‘아름다운 나라요, 사랑스러운 임과 함께 있는 향기로운 낙원’이었다.

가볍게 따라 흥얼거리던 화연은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위의 프리마돈나처럼 ‘노래의 날개 위에’를 열창했다.

끝물이라 약간만 바람이 불어도 와르르 쏟아지는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으며 노래를 마무리 지은 화연이 정원 구석에 서서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는 선을 발견했다.

경외와 찬탄이 가득한 눈빛에 화연은 우월감에 잠겨들었다.

‘그래, 하녀를 질투하다니 말도 안 되지.’

화연이 뿌듯하게 윤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윤조의 얼굴은 과히 밝지가 않았다.

“별로였어요?”

“여태 들었던 당신 노래 중에 제일 훌륭했소.”

“그럼 레코드가 별로였어요?”

“그것도 훌륭했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리 훌륭해도 당신 목숨과 바꿀 정도는 아니오.”

아, 차가울 만큼 화려한 남자에게서 가끔씩 드러나는 연정보다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화연은 감격에 겨워 윤조의 품에 몸을 기댔다.

유명 소프라노의 절판된 음반을 구하느라 일본에 갔던 화연이 돌아오는 배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직후 미국의 대공습으로 도쿄가 초토화되었다.

나고야, 오사카, 고베 등이 잇달아 공격당하며 열흘 넘게 배가 뜨지 않아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윤조의 걱정 한마디에 싹 녹아 사라진다.

‘도윤조. 민화연의 인생에 가장 짜릿한 반전이 되어 줄 남자.’

마침내 찾아낸 완벽한 표현에 미소 짓는데 윤조가 화연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뭔가 싶어 보니 얼굴을 붉힌 선이 다과 쟁반을 든 채 문간에 서 있었다.

화연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괜찮아. 들어와.”

떨어질 생각이 없는 화연 때문에 선이 머뭇대자 윤조가 먼저 물러났다.

“넌 어땠어?”

비로소 안으로 들어온 선에게 화연이 물었다.

“뭘 여쭙는 것인지?”

“방금 내 노래 들었잖아.”

“아!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그래? 아우프 플뤼겔른 데스 게상에스…….”

혀를 굴려 가며 과장되게 가사를 읊은 화연이 윤조에게 말했다.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요?”

“독어는 잘 몰라서.”

“제국 대학 출신이 독일어를 모르다니 농담도. 얘, 네 귀엔 어떻게 들려?”

선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쇤네는 잘…….”

“그러지 말고 느낌이라도, 응?”

곤란해서 어쩔 줄 모르는 선을 윤조가 구해 주었다.

“나가 봐.”

선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화연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묻고 있는데 왜 내보내요?”

“놀리는 거잖소.”

“놀리다뇨? 무식한 하녀라 느끼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에요.”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모던 걸이시라 역시 다르군.”

화연이 샐쭉해서 윤조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비꼬지 말아요.”

“이사는 언제 가는 거요?”

바뀐 화제에 화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요. 같은 일을 두 번 할 걸 생각하면 신경질 나 죽겠어.”

오빠인 민병기 판사가 부산에 부임하며 구했던 서정(西町)의 집이 소개로 헐리게 되자 부랴부랴 재판소 인근인 부평정(富平町)에 새집을 구해 이사를 할 예정이라 화연의 집은 어수선했다.

“아무래도 전황이 심상치 않은데 당신이라도 경성에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걱정 마요. 난 공습도 피해 간 사람이니까. 윤조 씨야말로 내 옆에 있어야 안전할걸요.”

뼈있는 농담을 던진 화연이 슬쩍 윤조의 눈치를 살폈다.

“이사 후에 오라버니께서 식사 한번 하자고 하셨어요.”

“알겠소. 조만간 날짜를 잡지.”

“그런데 내가 그 애 얘길 했거든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윤조가 물었다.

“그 애라니?”

“아까 그 애요. 지나는 말로 음식 솜씨가 괜찮다고, 개성 출신이라 다르더라 했더니 드셔 보고 싶어 하시네요.”

“그건 곤란하오. 집도 좁고.”

“그래 봐야 세 사람밖에 더 돼요? 오라버니가 개성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고, 꼭 다시 드셔 보고 싶다고 하니 그렇게 해요. 네?”

“선이는 집에서 먹는 찬이나 만드는 정도요. 내가 좋은 요릿집으로…….”

“얘!”

윤조가 완강하게 나오자 화연이 빨랫감을 들고 지나는 선을 대뜸 불러 세웠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내가 조만간 손님을 모시고 올 텐데 개성 음식을 아주 좋아하시거든. 할 수 있지?”

“제가요?”

“화연이.”

막으려는 윤조를 뿌리치며 화연이 말을 이어 갔다.

“윤조 씨한테 아주 중요한 손님이야.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고. 서툴 수 있다고 말씀드려 놓을게.”

“아니야, 선아. 가서 일 봐.”

“미야코다 상!”

아랫것에게 부탁하는 모양새가 된 것도 우스운데 윤조가 선을 과도히 싸고도는 것 같아 화연은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왔다.

“하겠습니다, 아가씨.”

공손히 말한 선이 윤조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점장님.”

선이 재빨리 연필과 공책을 챙겼다.

의령댁은 아랫집으로 애국 반상회를 갔고, 순용은 동래 온천 기념품점에 인삼 배달을 갔다가 근처 사는 동무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으니 다시없을 기회였다.

유난히 삐걱대는 골마루를 걸어 윤조의 방 앞에 이른 선이 살그머니 미닫이를 열었다.

어둑한 방, 노을이 비껴든 탁자 위에 축음기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다.

선은 아까 화연이 앉았던 의자 옆에 서서 조심스레 축음기 태엽을 돌렸다.

반지르르 광이 흐르는 검은 레코드가 스르륵 돌아가더니 선을 황홀경에 빠뜨렸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쩜, 사람의 목소리가 이리도 달짝지근할까?

나긋하게 착착 감기는 것이 마치 윤조가 사준 미루꾸 같았다.

딱 한 알을 까서 먹고 그 달콤함에 깜짝 놀라 벽장 깊숙이 간직한 미루꾸 캬라메루 말이다.

유창한 외국어로 노래하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윤조를 안을 수 있는 화연에겐 캬라메루 따윈 흔하디흔한 간식일 테지.

화연을 떠올리면 늘 그러하듯 명치 언저리가 저릿해 오자 선이 도리질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공책을 채 펼치기도 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상회가 벌써 끝났나?’

허둥대느라 미처 축음기를 끄지도 못했는데 윤조가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탁자 위를 훑는 차가운 시선.

선이 초조하게 입술을 축였다.

“송구합니다.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엄마야!”

멈춘 줄 알았던 레코드에서 쾅 터져 나온 우렁찬 피아노 소리에 선이 머리를 감쌌다.

공습경보도 없었는데 폭격이 시작됐나 싶었던 것이다.

윤조가 바늘을 치우고 축음기 뚜껑을 닫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때서야 상황을 파악한 선이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윤조는 묵묵부답, 선이 탁자에 올려 둔 공책을 펼쳐서 살필 뿐이었다.

“지점장님……?”

“오랜만에 확인 좀 할까?”

선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낭패다.

단지 노래를 들으며 어떤 음식을 대접할지 생각하면 더 멋질 것 같았을 뿐인데.

“뭐해? 빨리 연필 들어.”

잠시 후 신문을 든 윤조와 연필을 쥔 채 바짝 긴장한 선이 탁자에 마주 앉았다.

“눈을 위하야 미술이 있다면, 코를 위하야 향수가 있다. 이제 조선에서도 향수를 잘 쓰고 못 쓰는 것이 미인의 한 조건이 되야 가고 있다.”

윤조가 읽어주는 광고 문구를 받아 적던 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정말요?”

“딴생각하지 마. 다음. 1년간 사용 확실 보증품. 고무신은 거북션. 경고. 가짜 거북션표가 만사오니 속지 마시고…….”

연필에 침을 발라 가며 꾹꾹 눌러쓰던 선이 다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너무 빠릅니다.”

하지만 윤조는 가차 없었다.

“아레 그림과 갓티 거북션 상표에 물결 바닥 고무신으로 사십시오.”

선은 받아쓰기를 하다 말고 오늘이야말로 반상회에서 고무신 배급표를 뽑아 오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의령댁 생각에 킥킥댔다.

“감히 시험을 보는데 웃어?”

윤조가 꿀밤을 먹이자 선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쓰고 있잖습니까? ……고무신으로 사십시오. 됐습니다.”

“다음.”

신문을 한 장 넘긴 윤조가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일본어 기사를 번역하여 불러 주었다.

“대본영(大本營)에서는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를 격침시키고, 전투기 120대를 격추했다고 발표했다. 신속적 스피드로 성과를 수하였다는 것은 충용한 황군 장병이 우월한데 기인한 것으로 다 같이 축하할 바이다.”

눈을 든 윤조가 뒤늦게 선이 빤히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안 받아 적고 뭐해?”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뭘?”

“저 겁주려고 일부러 일본이 이긴 기사만 읽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씁쓸한 그늘이 윤조의 눈가를 스쳐 갔다.

“이 신문에 일본이 진 기사는 없어.”

선이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야 모르지요. 전 일본말을 못 읽으니.”

윤조가 싱긋 웃는 순간 달무리가 걷힌 하늘에서 별이 반짝인 것 같다고 선은 생각했다.

“일본말은 언제부터 가르쳐 주실 거예요?”

“한글 다 떼면.”

“이 정도면 다 뗀 거 아닙니까?”

선의 항의에 윤조가 연필로 공책에 동그라미를 쳤다.

“‘마싯게’ 아니라 ‘맛잇게’다. ‘아래’는 ‘아레’라고 써야 하고, 여기 보면 ‘갓티’를 ‘가치’로…….”

“아유, 됐습니다. 조선어 맞춤법은 정리가 덜 되었으니 뜻만 통하면 된다 하시고선 이리 하나하나 따지시면…….”

토라져서 참새처럼 쫑알거리는 선에게 윤조가 물었다.

“정말 괜찮아?”

“예? 뭘요?”

“손님 접대하는 거.”

“아, 좀 걱정되긴 한데 아주머니가 도와주시면 밥 한 끼 못 하겠습니까?”

“억지로 안 해도 돼. 화연이한테는 내가…….”

선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화연 아가씨가 지점장님께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셨잖아요.”

“중요…… 하지.”

또 텅 비는 윤조의 얼굴이 속상해 선이 일부러 밝게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하고 싶기도 하고요. 재료 구할 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 무렵 배급은 여전히 쥐꼬리였지만 암시장을 통한 식량 사정은 오히려 나아진 참이었다.

폭격으로 바닷길마저 막혔는지 일본으로 길길이 실어 가던 곡식의 수송이 적체되며 암시장에 풀렸던 것이다.

그러나 선이 필요한 것은 개성에서 난 식재료와 양념들이었다.

채소도 개성 것이 실했고, 과실의 풍미도 달랐다.

무엇보다 마님이 담그신 된장과 간장 없이 맛이 날까 생각하면 심란했다.

“여긴 해물이 싱싱하니 궁리를 더 해보겠습니다. 대신 맛이 별로다 하시면 재료 때문이라고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벌써 핑곗거리부터 만드는 거야?”

“저도 살아날 구멍은 있어야지요.”

윤조가 소년처럼 웃으며 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 어르듯 하는 손길이 좋기보다는 불편해서 피하려던 선은 어느 순간 깊어진 윤조의 눈빛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졌다.

윤조의 손끝이 눈가를 가린 고수머리를 치워 주다 선의 눈썹을 스치자 비단실처럼 가는 털을 통해 전율이 퍼져 간다.

어떡해? 또 저 눈빛이야.

저 눈빛과 마주치면 앉지도, 서지도 못하겠어.

“이거는 말도 안 된다!”

돌처럼 응축된 시공간을 와장창 깨버린 것은 애국 반상회에서 돌아온 의령댁이었다.

“설탕도 즈그끼리 뽑아 가드만은 고무신 배급표도 반장 년이 뽑아? 짠 게 아니라믄 있을 수 없는 일이구마! 아이 씨, 이건 와 이르케 안 벗기지노!”

꿰매 신은 낡은 고무신을 패대기쳤는지 찰싹 소리가 울렸다.

선은 황급히 공책과 연필을 챙겨 일어났다.

“아주머니가 제비뽑기에 또 실패하셨나 봐요.”

후다닥 방을 나온 선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두근대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 * *

화연 남매의 방문은 얘기를 꺼낸 지 한 달이 훌쩍 지난 5월 하순 일요일에 성사되었다.

새로 구한 집에 문제가 생겨 이사가 늦어진데다 화연의 오라비인 민병기 판사가 총독부에서 주목하는 재판을 맡는 바람에 시간 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선은 바다와 산과 하늘을 아우르는 성찬을 제법 그럴 듯하게 준비할 수가 있었다.

인삼이 들어간 갈비찜, 닭과 돼지, 쇠고기를 모두 사용하여 풍미가 남다른 무찜, 기름에 지져 고소하고 쫄깃한 찹쌀 우메기, 통배추에 싱싱한 새우를 켜켜이 다져 넣은 배추찜은 윤조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거기에 민병기 판사가 특별히 부탁하여 준비한 조롱떡국까지, 맛도 그만이거니와 만듦새와 담음새가 어찌나 조화로운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때요, 오라버니? 제 말이 맞았죠?”

“맛은 있다만 깊이가 부족해. 정통 개성식도 아니고.”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리면서도 경성에서 미식가로 날리던 티를 내고 싶던지 민병기가 덧붙였다.

“개성 배추찜은 새우가 아니라 쇠고기를 쓰는 것이 정석이거든.”

혹시나 맛을 지적당하면 변명해 달라던 선을 생각하며 윤조가 민 판사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식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아 절충을 좀 했습니다.”

“불러오게.”

“네?”

“묻고 싶은 게 있으니 데려와 보라고.”

시중을 들던 순용이 부엌으로 달려가 선을 데리고 왔다.

생각보다 앳된 선의 등장에 민 판사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네가 이걸 다 만들었느냐?”

“예, 나리.”

“어째서 배추찜에 새우를 썼느냐?”

“갈비찜과 무찜에 쇠고기가 들어가서 배추찜까지 고기면 질리실 것 같아…….”

“으흠, 어린것이 제법이구나. 손맛도 좋고, 얼굴도 곱고.”

미식가일 뿐 아니라 호색가로도 유명한 민 판사의 말에 윤조의 목이 뻣뻣해졌다.

하지만 민 판사는 한술 더 떠 안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척 내밀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감히 기생집에서나 하던 짓을 선에게 하다니.

“그러지 마십시오, 영감님.”

“음식이 마음에 들어 주는 것이니 네 주인은 상관 말고 받아라. 어허, 받으래도!”

민 판사의 강권에 결국 선이 돈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너 혹시 전라도 출신 아니냐?”

무릎걸음으로 물러나던 선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예, 군산이올시다.”

“그렇지! 어쩐지 개성 음식에 전라도 느낌이 난다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오라버니?”

신기해하는 화연과 달리 올케 숙경은 시큰둥했다.

“괜히 미식가겠수? 팔도에 단골 요릿집 없는 곳이 없는 양반이니.”

그 요릿집마다 단골 기생을 둔 바람에 적잖이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숙경이 가시 돋친 눈길을 보냈지만 민 판사는 선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군산에서 어찌 개성까지 간 것이냐?”

“아버지가 빚으로 땅을 잃으셔서…….”

“어이구, 어쩌다?”

“그게…….”

선이 차마 노름빚이라는 말을 못 꺼내자 민 판사가 요란하게 혀를 찼다.

“쯔쯔쯔, 알겠구먼. 하여간 제 자식 건사도 못하는 이 게으른 족속을 개조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걸세. 아니, 100년도 모자라지!”

돈 한 푼 쥐여 주더니 아버지를 조선인의 대표인 양 모욕해대자 선의 이마가 상기되었다.

“가봐.”

윤조가 선을 내보낸 후에도 민병기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나 같은 유자격자가 죽도록 노력해서 판사가 되면 뭐하나? 저런 버러지 같은 놈들 때문에 인정을 못 받는데.”

윤조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나 같은 유자격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출셋길이 열린 이들은 고등관이 될 수 있는 자라 하여 소위 ‘유자격자’라 불렸다.

그중에서도 사법과는 신원과 사상을 철저히 조사받아 통과된 자만이 임용되었고, 이렇게 판사가 된 조선인들은 총독부에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사상범에게 더욱 가혹한 형을 선고하곤 했다.

자신이야말로 검증된 친일파이면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민병기를 보는 윤조의 눈에 분노와 자괴감이 조용히 타올랐다.

“또 재미없는 얘기하신다. 언니, 우린 나가서 정원 구경이나 해요.”

“손바닥만 한 거, 뭐 볼 게 있다고 그러우.”

화연이 투덜대는 올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뒤 곁은 제법 넓어요. 배도 꺼뜨릴 겸, 어서요.”

화연과 숙경이 방을 나가자 민병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언제까지 이리 지낼 건가? 화연이가 졸업했으니 올핸 혼인을 해야지.”

드디어 기다리던 얘기가 나왔건만 윤조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혹시 화연이가 재혼이라 그러는가?”

시큰둥한 윤조의 태도에 애가 타는지 민병기가 상체를 기울였다.

“이해는 하네. 망설여지겠지.”

화연의 첫 남편은 민병기의 후배이자 명망 높은 양반가의 외동아들이었다.

양갓집 규수가 으레 그러했듯 여학교 졸업을 앞두고 선을 본 화연은 졸업과 동시에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예식만 신식이었을 뿐 시집살이는 구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못했다.

화연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조강지처 흉내를 내는 동안 일본유학을 간 남편은 다른 여성에게 빠져 현지에서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불륜녀가 화연의 여학교 동창이자 성악의 라이벌이었던지라 화연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이혼 과정이 호사가들에 의해 기사화되며 엄청난 심적 고통에 시달렸다.

“다 내 탓일세. 그리 나쁜 놈인 줄도 모르고 시집가라고 떠민 내 잘못이야.”

민 판사가 연못의 잉어를 보는 화연을 보며 한탄했다.

“자넬 만나고 화연이가 안정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자넨 내 은인일세. 아버님도 이젠 자넬 인정하시고, 오히려 혼인을 재촉하는 형편이니 예전 반대 때문이라면 마음을 풀고…….”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실은 부산 지점 철수를 논의 중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군요.”

“소식은 들었네. 키요시 사장이 조선소에 들어오라 했다던데 거절했다며?”

윤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입대를 권유하더군요.”

“본인도 해군 중장이고, 조선소가 중요 군수 시설이니 어쩔 수 없잖은가?”

민 판사가 윤조의 기색을 살피더니 슬며시 입을 뗐다.

“유력 인사가 신원 보증을 선다면 길이 없는 건 아니네만.”

“유력 인사라 하시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신원 보증이 어디 있겠나? 아버님께는 내가 운을 띄워 놓겠네.”

민 판사가 예상대로 움직였음에도 윤조는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나?”

그러게.

3년을 기다렸던 기회인데.

그때 선이 후식을 들고 연못가로 사뿐히 걸어 화연 앞에 섰다.

어찌 저리 다를까?

화연이 불꽃놀이처럼 타올라 한순간 눈을 사로잡는 요염함이라면 선은 조촐하나 어느 틈에 배어들어 향기를 남기는 은은한 어여쁨이었다.

“게다가 키요시 사장이 먼저 제안했다니 다시없을 기회야. 자네 능력이면 단숨에 취체역(取締役, 이사)도 가능할걸세.”

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윤조가 말했다.

“썩 내키지가 않는군요.”

“……위선적이구먼.”

윤조가 묻듯이 바라보자 민 판사가 턱을 치켜올렸다.

“그렇잖은가? 주주로 배당금을 두둑이 챙긴 것은 괜찮고, 직접 군함을 만드는 건 탐탁하지 않다는 말이.”

윤조의 눈에서 빛이 꺼져 들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조선은 스스로 독립할 수 없네. 그러니 우리 같은 엘리트가 내지인과 동등한 지위에 올라 조선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지금도 충분히 높으신 것 같은데요, 영감님.”

“허허, 비꼬긴.”

사람 좋은 웃음, 그 끝에 뱀 같은 교활함을 번뜩이며 민 판사가 말했다.

“잘 생각하게. 인삼이나 판 푼돈을 충칭에 보내는 것보다 내 말대로 하는 편이 장차 조선의 독립에도, 자네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걸 말일세.”

윤조는 뒷골이 싸늘해졌다.

“그게 무슨……?”

“대일본제국 사법부 판사를 핫바지로 보지 말란 뜻이야. 경찰서 취조실이 얼마나 무서운 데인지는 열일곱 살 때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하얗게 질리는 윤조를 보며 민 판사가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였다.

훅 배설물 냄새가 끼치더니 선이 남긴 아슴푸레한 향기를 뒤덮어 버렸다.

“아이고마! 허리 뿌사지겠다.”

민 판사 내외와 화연을 배웅하고 들어오자마자 의령댁은 부뚜막에 퍼질러 앉아 버렸다.

“처먹으면 퍼뜩 갈 일이지 세월아 네월아 느적거리고 지랄이고. 내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갑다. 남들은 이 나이에 메느리가 해다 바치는 뜨신 밥 먹고 호강하드마는 내는 나라 팔아 묵은 년놈들 밥까지 해다 바치야 되이.”

가만두면 밤새 불평을 늘어놓을 기세라 선이 행주치마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이거, 판사 나리께서 주셨어요.”

참기름을 두른 듯 의령댁의 눈알에 윤기가 돌았다. 하지만 덥석 받기 뭐했던지 대꾸가 뚱하다.

“니한테 준 걸 와?”

“저한테 주신 게 아니라 다 같이 고생했다고…….”

“그라믄 첨부터 니를 줄게 아니라 내를 불렀어야지.”

몸빼 안주머니에 돈을 넣으며 의령댁은 어찌 나누겠다 말 한마디 없었다. 하지만 받을 때부터 찜찜했던 선은 치마가 가벼워진 듯 홀가분하기만 했다.

지폐 한 장에 힘을 얻어 일어서긴 했지만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 앞에 의령댁의 눈살이 다시 찌푸려졌다.

“이걸 은제 다 씻어 정리하노?”

“잠깐 쉬세요. 제가 치우고 있을게요.”

“그래도 되겄나? 그라면 쪼매만 눕었다가 나오꾸마. 내가 허리가 느므 아프네.”

의령댁이 앓는 소리를 하며 들어간 후 선이 소매를 걷는데 윤조의 방에서 상을 들고 나온 순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부야, 지점장님이 쫌 이상하시다.”

“이상하시다니?”

“허옇게 질리 가꼬 꼼짝도 안 하시는데.”

문간방 미닫이가 열리더니 곰방대를 입에 문 의령댁이 참견을 했다.

“으잉?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드시가 속이 놀랜 거 아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계신 거 보믄 체하셨나 싶기도 하고.”

순용의 말에 선은 어떤 예감이 스쳐 갔다.

아까 민 판사와 있을 때 윤조의 기색이 심상치 않더라니.

선은 서둘러 꿀물을 준비해 윤조의 방으로 갔다.

따라오는 순용을 손짓으로 물리친 선이 닫힌 문 안으로 말을 건넸다.

“선입니다.”

윤조는 대답이 없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선이 조심스레 장지문을 밀었다.

과연 순용의 말대로 윤조는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은 상태였다.

가늘게 떨리는 손엔 핏줄이 선명했고, 무엇인가 억누르듯 꼭 감은 눈 때문에 미간이 상처처럼 패었다.

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마나 끔찍한 기억이기에 10년이 지나도록 저리 괴로워하시는 걸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무게에 위로조차 건넬 수가 없어 선은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꿀물입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선이 물러나려는데 윤조가 손수건을 뗐다.

“옆에 있어.”

선을 붙든 윤조가 달콤하고 뜨거운 액체를 한 모금씩, 한 모금씩 천천히 마셨다.

경직되었던 어깨가 풀어지고,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가는 윤조의 모습은 안심이 된다기보다 그간 혼자 감내했을 고통이 연상되어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여태 이러셨던 거예요?”

“……가끔씩.”

“판사 나리 때문이죠?”

윤조가 슥 고개를 들어 선을 보았다.

특유의 광채가 흐려진 눈빛이 안쓰러웠다.

“넌 참…….”

“안 만나시면 안 돼요?”

철딱서니 없는 말에 윤조가 실바람처럼 웃자 선이 입술을 깨물었다.

민 판사는 지점장님의 매형이 되실 분인데 어찌 안 만날 수가 있으랴.

“그 영감이 그러더군. 내가 위선적이라고.”

위선이 무슨 뜻일까?

이럴 때 선은 자신의 무식이 한탄스러웠다.

“그 말이 맞아. 오늘 네가 본 것이 내 진짜 모습이다. 실망스럽지?”

선은 고개를 저었다.

위선이 무슨 의미건 윤조는 나쁘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이 돼서.”

“뭐가?”

“화연 아가씨와 혼인하시면 앞으로 판사 나리를 계속 봬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윤조의 눈 안에 선뜻 녹색 날이 섰다.

“누가 그래?”

“연못가에서 아가씨와 함께 오신 마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오늘 두 분 혼인을 의논하러 오신 거라고.”

선이 입술을 꾹 다무는 윤조를 살피며 조심스레 여쭈었다.

“정말 가을에 혼인하시는 거예요?”

윤조가 다 식어 버린 잔을 들었다.

“혼인하시면 지금처럼 글을 가르쳐 주시긴 힘들겠지요?”

선의 물음에 윤조가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마치 그게 대답인 것 같아 선은 쓸쓸해졌다.

이리 빨리 도련님과의 시간이 끝날 줄은 몰랐는데.

짙은 아쉬움을 삼킨 선이 유리잔을 드는 순간 윤조가 팔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에그머니.”

선이 놓친 유리잔이 탁자 모서리와 의자에 연이어 부딪히며 산산조각 깨어졌다.

“넌 그 생각뿐이야?”

“예?”

“너한테 난…….”

그때였다. 

화연의 목소리가 꾀꼬리처럼 명랑하게 집 안을 울렸다.

“어디 있어요, 윤조 씨? 나 뭐 물어볼 게 있어요.”

화연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데도 윤조가 팔을 놓아주질 않자 선은 당황하고 말았다.

“저기…….”

팔을 빼려 하자 윤조가 선을 당기더니 병풍으로 가린 도코노마(床の間)로 밀어 넣었다.

선은 순식간에 벽과 윤조의 가슴 사이에 갇혔다.

“도려, 읍…….”

윤조가 손으로 선의 입을 막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 얘, 지점장님 어디 계시니?”

“방에 안 계십니꺼?”

오히려 순용이 되묻자 화연의 말투가 뾰족해졌다.

“안 계시니 묻는 게지.”

“아까까지 계싰는데. 잠깐 나가싰나 봅니더.”

“가만 섰지 말고 가서 찾아봐.”

“예.”

밖이 조용해지자 화연도 나갔으려니 생각한 선이 윤조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화연이 깨진 유리잔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머나, 위험하게시리!”

선이 마른침을 삼키자 윤조 특유의 햇빛 냄새가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얘! 선아, 이거 좀 치워!”

느닷없이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자 윤조가 다시금 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도 없어? 선아, 의령댁?”

치맛자락이 병풍 끝에 아슬아슬 걸쳐진 것을 알게 된 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화연이 어딜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치마를 여밀 수도 없었다.

그저 못 봤기만을 바랄 밖에.

혹여 화연이 눈치를 채고 병풍 뒤를 확인한다면 어떤 경을 치게 될지 상상조차 무서웠다.

“뭐야?”

화연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숨이 막히다 못해 터질 것만 같던 그때 민 판사의 부름이 선을 살렸다.

“화연아, 아직 멀었니?”

“잠깐만요. 다 어딜 간 거야?”

“곧 등화관제 시간이다. 별 얘기 아니면 집에 가서 전화로 하렴.”

“아이참! 알았어요, 나가요.”

화연이 멀어지자 선은 쓰러질 것만 같은 안도감에 윤조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런데 쿵 쿵 쿵 쿵.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선이 눈을 들어 윤조를 올려다보았다.

겨우 한 치 앞, 매끄러운 콧날과 탐스러운 인중, 광대 아래 사선으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더 할 나위 없이 고혹적인 윤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윤조가 입을 막은 손을 천천히 떼자 선이 참았던 숨을 왈칵 내뿜었다.

그의 손바닥에 부딪혀 돌아온 숨결이 뜨거웠다.

맞붙은 가슴.

밀착한 허리와 엇갈린 다리.

선이 윤조의 단단함을 온몸으로 의식하는 사이, 그의 엄지가 선의 입술을 깃털처럼 쓸었다.

야릇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선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만…….”

“쉬.”

그의 얼굴이 내려오고, 입술이 겹쳐졌다.

선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생경한 감촉. 그러다 확 깨달았다.

‘내가 도련님과 입을 맞추다니!’

가슴이 미칠 듯 뛰고 손발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아 선이 바들바들 떨자 윤조의 팔이 겨드랑이로 들어와 선을 당겨 안았다.

그 바람에 고개가 꺾이자 윤조가 살짝 움직여 선의 입술을 열었다.

숨결이 뒤섞이더니 축축한 것이 입술을 적신다. 징그러울 만큼 반지랍게 겹쳐지는 윤조의 혀에 선은 진저리를 쳤다.

‘어떡해!’

아교가 눌어붙은 것처럼 눈앞이 번져 보였다.

입술을 핥는 혀끝에 선이 신음을 뱉자 허리를 감싼 윤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압박감이 기뻤다.

하, 미친년.

세상이 뒤집힐 일이건만 어찌 요망한 계집처럼 눈이 감긴단 말인가.

어찌하여 도련님이 주시는 것은 하나같이 캬라메루처럼 달콤하고도 불안하단 말인가.

닿았다 떨어지고 다시 애타게 들어붙는 윤조의 입술이 선의 가쁜 숨마저 빨아들이는데 쉰다던 의령댁이 선을 소리쳐 불렀다.

“야는 지가 설거지한다드만 어데를 간기고? 선아!”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

순식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선이 엉겁결에 윤조를 밀쳐냈다.

“야야, 선아!”

“예, 가요!”

팔을 잡으려는 윤조를 피해 황급히 병풍 밖으로 나간 선이 주춤 멈춰 섰다.

방문 앞에 순용이 서 있었던 것이다.

“뭐꼬? 와 그기서 튀 나오노?”

순진하게 묻는 순용을 보니 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가 부끄러워졌다.

“벼, 병풍을 치울까 해서.”

“내가 하꾸마.”

방으로 성큼 들어서는 순용을 선이 막아섰다.

“일단 이 유리부터 치워. 나가서 빗자루 가져와, 얼른.”

순용을 밀어내 윤조가 빠져나올 틈을 벌어 준 선이 여전히 부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의령댁에게 갔다.

“니는 어데를 갔다 오노?”

“……잠깐 바, 밖에요.”

“얼굴은 와 그리 시벌겋노?”

당황한 선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우물댔다.

“더워서…….”

“아, 마 됐고. 퍼뜩 설거지부터 하자. 아이고, 내 팔자야.”

부엌으로 들어간 선이 의령댁을 등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함지박 가득 쌓인 그릇을 씻어내는 내내 윤조와 입을 맞춘 기억이 뱃속을 짜릿하게 울렸다.

그때마다 선은 그릇을 벅벅 문질러댔다.

마치 그게 제 입술이라도 되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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