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탐닉, 녹엽(綠葉)
#1. 길을 찾는 자
충칭은 어디일까?
지난 열흘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을 간직한 선이 대나무 바구니를 끼고 사랑채 중문에 붙어 섰다.
왜놈들 등쌀에 추석인데 떡도 마음대로 못 한다 한탄하며 애꿎은 아랫것들만 들들 볶던 마님이 행랑아범의 귀띔에 부리나케 사랑채로 건너가셨으니 틀림없을 터였다.
“……점심은 어쨌는?”
“친구들과 먹었습니다.”
쾌활한 대답이 들리자 역시 예상이 맞았다 생각하며 선이 살며시 문을 밀었다.
“오랜만에 오구선 또 한뎃밥이야? 쯔쯔.”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린 문틈으로 잘나기로 소문이 자자한 개성의 인삼 부호 삼형제 중 막내인 영조가 보였다.
문 너머로 훔쳐본 영조의 미소는 햇살처럼 따스했다.
어젯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만 얼핏 영조를 봤던 선이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새벽부터 어딜 갔었어?”
햇살을 베어내듯 서늘한 목소리.
선이 움찔했다.
윤조 도련님이 함께 계신 줄은 몰랐는데.
“형님 나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동무들과 한증(汗蒸)을 했습니다.”
벌어진 문틈으로 윤조가 보이자 선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영조가 봄볕이라면 둘째 도련님인 윤조는 강렬한 여름 태양 같은 분이었다.
그만큼 화려하고 눈에 띄는 미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양을 가린 구름이 땅에 쉴만한 그림자를 드리우듯 개성 처자들을 몸살 나게 했던 윤조의 미모는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날카로움은 누그러들고 우수는 더해져 완연한 남성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잊지 마라. 넌 지금 징병을 피하는 중이라는 걸.”
“네 형 말이 옳다. 폐병으로 요양 갔다 했는데 들키면 어쩌는.”
“걱정 마십시오. 온천도 치료라고 하면 되지요.”
생글생글 웃는 영조의 모습에 선이 미소를 지었다.
영조 도련님이라면 충칭이 어디인지 아실 것이었다. 경성에서 대학까지 다녔으니 가는 법도 알고 계시리라.
기회를 보아 여쭙기만 하면…….
“선이 너, 게서 뭐하는 거네?”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선이 아니라 윤조였다.
황록빛이 일렁이는 또렷한 다색(茶色)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선은 심장이 쿵 떨어지고 뺨이 홧홧해졌다.
황급히 몸을 돌리니 복순과 귀순이 한 쌍의 장승처럼 선을 쏘아보고 있었다.
선과 열아홉 동갑이나 작년에 시집을 간 복순과 두 살 아래인 귀순은 언니는 쪽을 찌고 아우는 귀밑머리를 드리웠다는 것 외엔 한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넙데데한 얼굴도, 몽탕한 몸집도 똑 닮은 자매였다.
“솔잎 따러 간다더니 거가 소나무네?”
복순이 비아냥거렸다.
“여쭐 것이 있어서…….”
“네가 사랑채에 뭣을?”
당황한 선이 어물대자 언니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귀순이 코웃음을 쳤다.
“칫! 신랑 될 사람이 와서 기웃거린 거믄서.”
신랑?
선은 놀랍고 두려워 가슴이 두근댔다.
하지만 아무리 복순 자매가 자신을 싫어한대도 도련님들을 두고 방자히 주둥이를 놀릴 리는 없는데.
그때서야 선은 시아버지가 될 허 서방을 따라 종만이 왔음을 눈치챘다.
추석 전 주인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왔으리라.
“싫은 척 내숭 떨더니 앙큼한 년.”
대문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선의 꼭뒤에 복순의 악담이 따라붙었다.
“네년이 아무리 허 서방네로 시집을 가봐라. 떠돌이 고아에 하녀 출신이라는 것이 없어지는가!”
대문을 열려던 선이 복순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들어먹지도 않기에 평소 복순이 무슨 암상을 부려도 대꾸조차 않는 선이었으나 오늘은 울컥 억울함이 솟았다.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바란 적 읎긴! 죽자고 머슴은 마다허더니 허 서방네 아들이라니까 옳다구나 시집가는 주제에 어디서 거짓부렁이네.”
선이 입술을 꾹 물었다.
기실 일이 흘러간 모양새가 그렇게 된 셈이긴 했다.
“두고 보라. 입때껏 마님 믿고 나댔지만 이젠 어림 읎어. 허 서방 댁이 천한 하녀가 아들을 꼬여냈다고 얼마나 벼르는지 아는? 아주 독살스러운 시집살이를 하게…….”
“뭣들 하는!”
복순의 저주를 끊기라도 하듯 사랑채 문을 열리고 마님이 나오셨다.
“쯔쯔, 왜놈 때문에 나라에 망조가 든 걸로 모자라 네년들 때문에 집안에도 망조가 들겠구나!”
언니를 위해 귀순이 나섰다.
“그게 아니고요, 마님. 선이가 사랑채를 몰래…….”
“일거리가 없어 주둥이가 바쁜 게지?”
“아이, 그거이 아니고…….”
“어허!”
귀순의 입을 엄히 틀어막은 마님의 시선이 묵묵히 서 있는 선을 향했다.
“손님이 계시니 네년들 잡도리는 이따 할 것이다. 너희 둘은 광으로 따라오고, 선이 넌 네 할 일 하라.”
추상같은 명령은 겉으론 공평한 듯 보였으나 사실은 복순과 귀순 자매를 겨냥한 것임을 알기에 선은 민망했다.
마님이 안 그런 척하며 선을 우대할수록 복순은 더더욱 선을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광으로 가던 복순이 사랑채 문 너머로 뭘 봤는지 선을 희번덕 쏘아보았다.
집을 나온 선이 배천을 건너 자남산(子男山)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언제부터 이리되어 버린 걸까?’
복순이 처음부터 선을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행랑살이를 시작했던 일곱 살 적엔 엄마를 찾으며 우는 선에게 몰래 강정도 훔쳐다 주고, 유채꽃도 따주었던 복순이었다.
그러다 열두어 살 즈음 손끝이 야무지고 음식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며 마님이 선을 귀애하는 티를 내자 점점 샘을 내더니, 결정적으로 선을 좋아했던 행랑아범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서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선은 행랑아범의 아들이 눈에 차지 않아서도, 더 잘난 신랑감을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을 이 집에 맡기고 꼭 돌아오겠다며 눈물로 약속한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오면 언제라도 떠날 곳이라고 생각했기에 선은 이곳 개성에 한 터럭의 인연도 남길 마음이 없었다.
‘그랬는데…….’
선이 자남선 중턱, 추석을 맞아 새로 단장한 활터를 지나 개성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관덕정(觀德亭)을 등지고 섰다.
12년 전 처음 봤을 때처럼 개성은 조촐하지만 번듯하고, 번화하지만 단정했다.
남의집살이가 서러울 땐 우뚝 솟은 송악산 너머를 보았고, 어머니가 그리울 땐 기찻길을 눈으로 따라 그리곤 했다.
그러면서 곳곳이 눈에 익고 마음에 익어 불안한 마음에 평온을 주는 풍경이었으나 오늘은 도무지 안정이 되질 않았다.
곧 첫서리가 내릴 것이다.
그러면 꼼짝없이 시집을 가야 하겠지.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 빽빽하게 머리를 맞댄 기와지붕이 꼭 떠나온 군산 앞바다의 밤물결 같아서 가슴이 시린데 푸르르 말의 요란한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퍼뜩 돌아보니 우람한 흑마 위에서 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윤조였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데 준비 없이 마주친 윤조의 모습에 매료된 선은 그러질 못했다.
풀 먹여 다린 빳빳한 셔츠, 한 손에 감아쥔 가죽 채찍, 윤이 나는 승마 부츠, 조끼 주머니에서 늘어진 회중시계의 반짝이는 백금 줄.
찰나의 순간 선의 눈 끝에 걸린 건 겨우 그런 것들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소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엔 충분했다.
말에서 내린 윤조가 고삐를 정자 기둥에 묶을 때에야 선이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발자국 소리에 살짝 눈동자를 치켜든 것이 실수였다.
조끼 단추로 팽팽하게 당긴 단단한 허리를 본 순간 선은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열아홉, 몸은 성숙했으되 아직 사내를 몰랐기에 본능을 자극하는 야릇한 흥분에 당황한 것이다.
“어딜 가려고?”
“……소, 송편을…….”
치마 속에 감춰진 다리처럼 목소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송편?”
“형님, 어디 계십니까?”
“여기다.”
“정상까지 가자 하시더니 왜 여기…… 어, 선아! 어머니한테 혼나더니 여기 있었구나.”
영조가 나타나자 그때서야 마음이 놓여 고개를 든 선의 뺨이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뭐 그럭저럭. 여기서 뭐해?”
“송편을 쪄야 해서 솔잎을 따러 왔습니다.”
“소나무 숲은 좀 더 올라가야 하잖아.”
“그것이…….”
“여긴 변함이 없구나.”
불쑥 끼어든 윤조가 뻐근한 듯 어깨를 휘돌리며 방금 선이 그랬듯 개성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이 동네 재미없는 게 한두 해도 아니고.”
온 나라가 왜놈 세상이 됐다지만 이곳, 개성만은 예외였다.
고려 왕조가 망한 후 무려 500년을 정치와 담을 쌓은 채 상업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장다운 배타성 때문이었다.
아무리 신기한 상품을 보여줘도, 싼값에 끼워 주기까지 해도 개성 사람들은 왜인 상점에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번번이 망해 나가니 이젠 들어오는 일본인도 없었고, 지역 유지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똘똘 뭉치니 관리조차 일본인은 발붙이질 못했다.
“그 덕분에 네가 무사한 것이다.”
가볍지만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윤조의 말투.
표정 또한 그렇다.
깎은 듯 수려한 옆태도 여전했고 어깨는 더 너르고 강건해지셨건만 왜 저리 쓸쓸해 보이실까?
선은 문득 재작년 김장할 적에 행랑어멈과 찬모들이 절인 배추를 씻으며 숙덕거리던 게 떠올랐다.
‘주인어른께서는 왜 윤조 도련님을 그 먼 부산까지 보내서 장사를 시키시는 거니까?’
‘왜겠는? 잘난 얼굴로 왜년이고 뙤년이고 다 홀려서 삼(蔘) 팔아먹으려고 그런 거이디!’
‘조선 년은 왜 빼놓으시우? 조선 년은 눈이 읎나?’
깔깔대며 지껄이던 말처럼 3년 전 동경 제대를 졸업하고 부산에 개성인삼주식회사의 지점을 내어 지점장으로 부임한 윤조는 놀라운 수완으로 첫해부터 상당한 수익을 냈다.
하지만 호시절(好時節)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시장 개척을 위해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남방(南方)까지 순회하며 개성 인삼을 홍보하는데 앞장섰던 윤조의 기세가 꺾인 건 올해 초부터였다.
“전쟁 때문이지요?”
뜬금없는 선의 말에 영조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아니, 아닙니다.”
도리질을 치는 선에게 윤조가 물었다.
“괜찮으니 말해 봐.”
“……요번 추석 때 못 오신다고 했다가 갑자기 오신 거 말입니다.”
삼복더위가 가실 즈음 도착한 윤조의 전보에 마님은 며칠을 끙끙 앓으시다 곡식과 군입거리를 넉넉히 장만해 직접 부산을 다녀오셨더랬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차에서 짊어지고 간 곡식을 순사에게 죄다 뺏겨 빈손이 된 데다 윤조가 급한 일로 중국에 가는 바람에 엿새도 못 있고 개성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오셔서 부산은 도무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주인어른을 얼마나 원망하셨는지.
그리고 그 한탄은 언제나 살림을 맡고 있다는 ‘의령댁’을 욕하는 것으로 끝났다.
‘내 살다 살다 그리 음식 못하는 여편네는 처음 보았소. 솜씨가 없으면 부지런하기라도 하던가! 크지도 않은 집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설라무네. 어구, 천불이 나서. 내가 그 망할 여편네를 쫓아내고 새 찬모라도 구해 주고 왔어야 했는데.’
당장이라도 부산 지점을 작파하고 개성으로 불러올리자며 주인어른을 조르던 마님이 어떨 땐 극성스럽다 싶기도 했는데 이리 지근거리에서 윤조를 대하니 선은 마님의 불안이 조금 이해가 될 듯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윤조가 물었다.
하녀의 생각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상전은 드물었기에 선은 떨리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삼이란 것이 본래 사치품인데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 중에 사치품이 팔릴 리가 없잖습니까? 도련님 탓이 아닙니다.”
바람에 윤조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넌 참.”
수줍게 눈을 내리는 선에게 영조가 말했다.
“그러니까 사업이 시들해진 것은 형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전쟁 때문이다? 이야! 선이 너 제법이다. 시집간다더니 철이라도 든 것이냐?”
“시집은, 마님이 시집 안 가면 왜놈이 끌고 간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맞다!
이런 닭대가리가 있나?
그리 기다려 놓고 막상 기회가 닿자 새까맣게 잊어버리다니.
“도련님, 충칭이 어딥니까요?”
“충칭?”
“어떡해야 갈 수 있습니까? 간도보다 멀다던데 걸어서는 힘들까요? 기차나 배를 타면 며칠이나……?”
영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정신없게. 갑자기 충칭은 왜?”
“거기서 어머니를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어미? 누가?”
“장에서 만난 장사꾼이요.”
“뭐?”
영조의 표정이 허물어지자 선의 말이 빨라졌다.
“참말입니다. 가죽 팔러 중국 전역을 다니는 사람인데 1년 전에 충칭에서 저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봤다고 했습니다.”
“알던 사람이야?”
윤조의 물음에 선이 움칠하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본 사람의 말을 어찌 믿고?”
선이 제 이마를 가리켰다.
“머리 난 모양이 저와 같다고 했습니다. 제 어머니도 앞머리가 이렇게 고실거려서 고실댁이라고 불리셨거든요.”
나팔꽃 덩굴처럼 이마에서 애교스럽게 고불거리는 잔머리가 선에겐 충분한 근거였건만 영조는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얼굴도 저와 똑 닮았다고…….”
윤조가 말했다.
“여전히 넌 무모하구나. 아홉 살짜리가 겁도 없이 야반도주를 하려더니, 이젠 혼인을 앞두고 전쟁터를 가겠다니.”
뜻밖의 말에 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쟁터라니요?”
“충칭은 사흘이 멀다 하고 일본군이 폭탄을 떨어뜨리는 곳이다. 가기도 힘들뿐더러, 간다 해도 목숨 부지를 장담할 수 없어.”
하얗게 질린 선에게 윤조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 잊어. 네 어머니도, 충칭도.”
윤조가 고삐를 풀더니 말을 타고 떠났다.
“하여간 인정머리 없기는.”
혀를 차는 영조에게 선이 물었다.
“정말 거기가 전쟁터예요?”
“요즘은 폭격이 좀 덜하다고 하더라만.”
“……그럼 그새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뭐 어쩌겠어? 조선 천지에 너 같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선은 울컥 얄미운 마음이 치솟았다.
자신은 돈과 인맥으로 학도병 징병을 면해 놓고 어찌 저리 쉽게 말한단 말인가?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장사치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잖아.”
“정말 갈 방법이 없을까요?”
“여자 혼자는 절대 못 가. 아! 남편 될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겠네. 인삼 장사를 하면 중국도 다녀야 하니 언젠가 충칭에 갈 일도 있을 테지.”
말에 오른 영조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댔다.
“너처럼 예쁜 아내가 부탁하면 틀림없이 들어줄 게다.”
영조가 사라질 때까지 눈자위에 힘을 준 채 서 있던 선이 어깨를 떨어뜨리고 소나무 숲으로 올라갔다.
남편 될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선은 진저리를 쳤다.
종만의 끈끈한 눈길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갖은 핑계로 집을 드나들며 어떻게든 단둘이 남으려 수작을 부리는 것이 두려웠다.
‘어머니는 어찌 그리 먼 데까지 가신 걸까? 설마 아버지가 어머니까지 팔아 버리신 걸까?’
솔잎을 따는 선의 손길이 우악스러워졌다.
어릴 땐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했는데 이젠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자신을 지켜 주기 위해 그러신 거였다.
선은 그래서 종만이 싫었다.
종만이 대처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없애지 않았다면 허 서방은 절대 혈혈단신인 선을 며느리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선에게 장가들여 달라며 어깃장을 부리니 혹여 마음잡고 살까 하여 청을 넣은 것이고, 이 근방에 허 서방만큼 유능한 삼포 관리인이 없기에 주인어른께서 선선히 허락을 하신 것이었다.
그 과정 어디에도 선의 의사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이 선을 더욱 울울하게 했다.
‘도망쳐 버릴까?’
어머니만 아니면 굳이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10년 넘게 하녀로 살았는데 어디서든 입에 풀칠이야 못할까?
바보같이 기다리기만 했던 미련을 탓하며 급히 산을 내려가던 선이 사냥 모자를 비딱하게 올려 쓴 남자를 보고 소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종만이 어찌 산에까지 왔단 말인가?
사방을 두리번대는 것이 틀림없이 자신을 찾는 것이었다.
선은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야!”
상당히 떨어진 거리임에도 선은 얼어붙어 버렸다.
뛰다시피 다가온 종만이 거친 숨을 들먹거리며 물었다.
“여기서 뭐해?”
선이 어깨를 움츠리자 순사처럼 코 밑 수염을 고이 기른 종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벙어리야! 여기서 뭐했냐고!”
“소, 솔잎을…….”
“솔잎? 니미럴! 겨우 그거 따는 게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허세기가 다분하긴 했지만 첫눈에 반했다는 말마따나 점잖게 구는 척이라도 했는데 왜 돌변하여 욕까지 하는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 만났어? 방금 막내 도령 내려가는 걸 내 눈으로 봤으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도련님이요? 그게 무슨……?”
“이 썅년이!”
종만이 선의 뺨을 후려쳤다.
휘청한 선은 아픔보다 얼얼한 충격에 휩싸였다.
“딴 놈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 날 그리 슬슬 피했던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침 떼지 마! 막내 도령과 네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다 들었으니까.”
선의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도무지 영문을 모를 말이었다.
“하긴 너처럼 반반하고 호리 낭창한 종년을 그냥 두고 봤을 리가 없지.”
징그러운 눈길로 선을 훑어 내린 종만이 허리를 껴안자 선이 기겁해 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왜, 왜 이래요?”
“가만있어.”
선이 자신을 나무둥치로 밀어붙이는 종만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놔요!”
“나도 손해 보는 장사는 못 하지. 혼인 전에 네년이 상전한테 따먹혔는지 확인을 해야겠어.”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아들은 선의 눈이 새파란 불을 토했다.
“뭐라고요?”
“아니면 네가 처녀라는 걸 증명하면 되잖아. 지금 여기서.”
선은 순수한 증오로 고름을 풀려는 종만의 손을 힘껏 물어뜯었다.
“앗!”
종만이 잇자국이 선명한 손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년이! 마님의 굄을 받는다고 정말 네가 그 집 딸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제야 선은 종만이 누구에게 무슨 소릴 듣고 이러는지 짐작이 됐다.
복순이.
무심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마님의 편애가 부른 묵은 시기가 겹쳐 이 사달이 난 것이리라.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염증으로 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어찌 도련님을 이런 천한 이간질에 끌어들였단 말인가.
이 용천할 수작을 믿고 날뛰는 종만은 또 뭐고!
“비켜요.”
“그렇게 째리면 어쩔 건데? 어쩔 건데!”
선이 뺨을 건드리는 손을 탁 쳐내자 종만의 눈이 유리알처럼 번뜩하더니 선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이게 죽을라고!”
“악!”
벗어나려 애썼지만 혈기 왕성한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종만은 한참이나 선의 머리채를 무지막지하게 줴흔들다 풀각시처럼 패대기쳤다.
“처녀 아닌 것이 들킬까 봐 아주 발악을 하지, 엉!”
종만이 선의 저고리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뽀얀 젖무덤 언저리가 드러나자 종만의 눈이 발정 난 개처럼 벌게졌다.
“살결 봐라. 죽여주네.”
“싫어!”
선이 종만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다 코를 세게 쳤다. 얼결에 타격을 당한 종만이 선의 얼굴을 내리쳤다.
“더러운 년! 내가 오늘 네 버릇을 고치고 말 것이다.”
무작스러운 주먹질이 쏟아질 때마다 선의 눈앞에 번개가 번쩍거렸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데 갑자기 가물가물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큰언니를 노름빚으로 유곽에 넘기고 온 날, 미친 듯이 대드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이렇게 사정없이 두들겨 패셨지.
경성에서 둘째 언니가 끌려간 날도.
그렇게 두 딸을 팔아넘기고도 또 노름에 손을 댄 남편에게서 막내딸을 지키려 개성 제일가는 부잣집 앞에 엎드려 일곱 살 어린 선을 하녀로 써달라고 무작정 매달렸던 어머니의 붓고 멍든 얼굴.
종만과 혼인하면 자신도 어머니처럼 되리라는 선명한 예감에 선은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목을 맬지언정 절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놔!”
선은 버둥거리며 종만을 할퀴고 꼬집었다. 그렇게 맞았음에도 수그러들긴커녕 무섭도록 형형한 선의 눈빛은 종만도 움찔하게 할 정도였다.
“독한 년.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구나.”
선은 입 안 가득 고인 피를 종만의 야비한 낯짝에 뱉었다.
“이런 개 같은 년이! 죽어라, 이년! 이 화냥년!”
종만은 이제 욕정이 아닌 분노로 주먹을 퍼부었다.
입 안엔 다시 피가 고였고, 선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그때였다.
가죽 채찍이 살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더니 종만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치쿠쇼!(ちくしょう, 빌어먹을) 어떤 새끼가……!”
당장이라도 때려눕힐 듯 등을 비틀며 일어난 종만이 멈칫 굳어 버렸다.
채찍을 든 남자, 윤조와 눈이 마주친 직후였다.
상전 집 아들이기도 했고, 치켜든 채찍이 두려운 까닭도 있었으나 제일 큰 이유는 윤조의 존재, 그 자체였다.
호리호리하게만 보이던 몸매는 성난 짐승처럼 부풀어 셔츠를 찢을 기세였고, 계집처럼 매끈하다고만 여긴 얼굴은 뭉쳐진 불덩어리인 양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물러나라.”
분노와 권위가 어우러진 명령에 오금이 저렸지만 명색이 사내인지라 종만은 애써 턱을 쳐들었다.
“상관 마십쇼. 마누라 될 계집의 버릇을 고치려는…….”
바람 소리가 획 지나가더니 채찍이 종만의 어깨를 세게 후려쳤다.
“으악!”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당장 물러나!”
“그게 무슨…….”
채찍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헉! 그만……! 알겠,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종만이 채찍을 피하며 가까스로 모자만 주워 황급히 사라졌다.
선은 앞섶을 여미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 차려야 해.
이런 꼴을 도련님께 보이면 안 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목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입가의 핏물을 닦기도 힘에 겨웠다.
“가만있어.”
윤조가 쓰러진 선의 상태를 살폈다.
들이쉬는 거친 숨소리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분노.
그것만으로도 선은 서러움이 조금 삭아지는 기분이었다.
윤조의 팔이 등을 감싸자 선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옷에 피가 묻…….”
“가만있으래도.”
윤조가 선을 안아 올렸다. 더 이상 만류할 기운이 없었다.
그대로 선은 혼절했다.
* * *
윤조가 데려간 신식 병원에서 이틀을 머물며 치료를 받은 선은 추석 내내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고 앓았다.
명절이라 쉬쉬하기도 했고, 무시로 손님이 드나드는 때인지라 상한 얼굴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다들 바빠 혼자 누워 있었던 덕에 선은 빠르게 마음이 차분해져서 나흘째 밤, 결심이 서자마자 마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
“꼬락서니하고는.”
본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흉하게 부은 선에게 마님이 나직이 쏘아붙였다.
“가까이 와 보라. 더 바짝.”
선을 코앞에 앉힌 마님이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쯧쯧. 점잖은 제 애비나 닮을 것이지 어디서 계집한테 손질하는 못된 것만 배웠누. 몹쓸 놈.”
고왔던 선의 얼굴 반쪽을 짙게 물들인 자주색 멍에 마님은 새삼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누워 있을 일이지 뭣 하러 나왔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개성을 떠나겠습니다.”
어렵게 서두를 꺼냈건만 마님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하도 기척이 없어 고개를 들려는데 마님이 말했다.
“심정은 이해헌다만 그딴 소린 허는 게 아니다. 허 서방 댁을 불러 단단히 주의를 줄 것이니 몸조리나 잘하라.”
“싫습니다.”
“……싫다니?”
선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딜 가든 이제껏 거둬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이니!”
버럭 화를 내신 마님이 잠시 숨을 골랐다.
“네가 그러면 주인어른 면이 안 선다. 허 서방이 특별히 청을 넣어 허락허신 거인디 네까짓 게 싫다 한다고 혼인을 무르는 게 말이 되겠는?”
선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마님이 선을 귀애하게 된 것은 선이 오기 얼마 전 여섯 살 막내딸을 호열자(虎列刺)로 잃은 탓이 컸다.
또래인 선을 죽은 딸처럼 여기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선 또한 마님을 성심껏 섬겼다.
하지만 아무리 아낀다 한들 하녀는 하녀일 뿐인 거였다.
진정 딸이라면 그리 사람을 개 패듯 패곤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못된 종자를 사위로 들일 턱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 야반도주했다고 하십시오.”
“이, 이런 발칙한 것을 봤나!”
마님이 괴고 있던 장침을 내리쳤다.
이 정도로 노하면 겁을 먹는 것이 당연했으나 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선의 결심은 단단했다.
그렇게 팽팽히 대치하던 그때, 문 너머 기척이 들렸다.
“어머니, 윤조입니다.”
윤조가 아직 개성이 있는 줄 몰랐던 선이 황망히 아랫방으로 물러났다.
병원에서 본 것이 마지막인 데다 추석이 지난 터라 부산에 가셨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흉한 몰골을 숨기느라 윤조를 외면한 채 서 있는 선에게 마님이 명했다.
“그만 나가 보라.”
돌아서려던 선이 우뚝 멈췄다.
이렇게 물러나면 기껏 낸 용기가 허사가 될 터였다.
“나가 보라는데 왜 그러고 섰는?”
선이 바닥에 풀썩 엎드렸다.
“떠나겠습니다, 마님.”
“안 된다는데도.”
“허락하지 않으셔도 갈 겁니다.”
“야가 근데!”
마님이 아들이 곁에 있다는 것도 잊고 한탄했다.
“이 철없는 것아. 계집이 뭘 해서 살겠다고 집을 나간단 말이냐. 넌 소문도 못 들었는? 처녀라면 나이가 들었건 어리건 닥치는 대로 끌고 간다는데 시집도 안 가고 있다가 순사한테 잡혀가면 어쩌려고!”
“차라리 순사를 따라가겠습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야?”
윤조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선은 움찔했지만 겁을 주어 주저앉히려는 속셈이라 생각해 마음을 다잡았다.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뭘 해서 벌 건데?”
“공장이나 요릿집 주방에서 일하면…….”
“오마에니 혼고데키루노.(お前日本語できるの)”
겨울처럼 엄혹한 윤조의 목소리에 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너 일본말 할 줄 알아? 일본말은커녕 조선말로 제 이름자 하나 못 쓰는 무식한 계집을 누가 일본까지 데려가 취직을 시켜 줄 성싶어?”
선의 입술이 자르르 떨렸다.
“꼭 일본이 아니라도…….”
“개성이나 그대로일 뿐, 이제 조선 천지 어디든 일본말은 필수다. 하다못해 작부나 여급을 하려 해도. 알겠어?”
작부? 여급?
선은 겨우 아문 입 속의 상처가 다시 벌어질 만큼 이를 악물었다.
“저를 작부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내와 혼인하느니 차라리 벙어리 노릇을 하렵니다.”
선은 마님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윤조를 노려보았다. 그 도전적인 눈빛에 마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런 독한 것을 봤나!”
이제 호되게 혼날 일만 남았구나 싶은데 뜻밖에 마님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어드럭허려고 그러니, 응? 계집이 너무 독해도 팔자가 사나운 법이거늘.”
속정이 느껴지는 말씀에 선은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선은 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떠나고 너무 많이 운 탓에 스스로 질려 아예 울 줄 모르게 됐다는 것이 정확했다.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소용없는 눈물은 배만 꺼뜨리는 미련한 짓이었으니까.
고집스러운 선과 눈가가 붉어진 어머니 사이에서 윤조가 입을 열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마님과 선의 시선이 윤조에게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네?”
“의령댁의 관절염이 심해져 도울 아이를 구하려던 참입니다.”
“선이한테 부산 살림을 맡기겠단 거네?”
“제가 데리고 있으면 징용도 피할 수 있고, 어머니 걱정도 덜지 않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돌파구에 마님이 이마를 짚었다.
“부산이라……? 야가 갈라고 허겠니?”
마치 선이 없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던 모자가 선을 돌아보았다.
윤조가 물었다.
“나와 함께 갈 테냐?”
선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이신 건가? 그리 윽박지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그것도 싫어?”
윤조의 미간에 미묘하게 떠도는 초조한 빛을 본 선의 가슴이 훅 들떴다.
개성을 떠날 수 있다.
시집을 안 가도 된다.
선의 마음이 온천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