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9/9)

에필로그

불안정.

그것이 남자가 여자를 처음 봤을 때 내린 정의였다.

“선고합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여자는 어렸다. 거구의 성인 남자를 칼로 찌른 살인 미수범이라기에는 너무 앳된 얼굴이었다.

남자는 재판의 시작부터 5년 10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될 때까지 같은 자세로 여자만 응시했다.

고작 스무 살짜리가 해탈한 듯 시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놓아 버릴 것처럼 처연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잠깐 눈을 뗀 사이 홀연히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아 본능적으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존나 예쁘네. 빵에 넣긴 아깝다.”

뒤쪽에서 다른 조직원이 중얼대는 게 들렸다.

그제야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여태 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흐르는 공기를 주시하고 있던 거라, 새삼스레 이목구비를 훑어보니 확실히 빼어난 외모였다.

예쁘네.

감상은 짧았다.

반쯤 눈을 내리깔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여자가 그를 돌아본 탓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를 보는 건 아니었다. 그의 뒤로 나 있는 법정 문을 바라보는 거였다.

“…….”

미세하게 그를 비껴간 눈길이 한동안 같은 곳에 머물렀다.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건가, 짐작만 했다.

권민철은 자신도 쉽게 들이받기 힘들다. 강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한 인간이기 때문에 남자는 차근차근 어머니의 복수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가진 것을 전부 빼앗아 몰락시키리라 결심했다.

그런 인간을 웬 여자애가 선수 쳐 찔렀다기에 궁금해서 와 봤는데, 예상외로 너무 무력한 모습이라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러게, 왜 대책 없이 달려들어서 저 꼴일까.

저 작은 몸으로 무슨 복수를 하겠다고.

세상이 얼마나 좆같은데.

아직 어린데.

예쁘고.

어쩌다 늙은 여우 새끼랑 얽혀선.

‘왜 절 버렸는지 물어도 됩니까.’

‘……내가 사는 세상은 시궁창이야, 이헌아.’

‘…….’

‘이런 데서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나아.’

‘…….’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널…… 버렸어.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어서…….’

‘…….’

‘그런데 이렇게 큰 모습을 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

‘살다 보면 살아지는데. 어떻게든 살아지는데…….’

‘…….’

‘미안하구나.’

어쩌다…… 늙은 여우 새끼랑 얽혀선.

씨발.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 * *

쏴아아-.

5년 10개월. 햇수로는 6년이 지난 장마의 초입,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종종 그녀를 생각했던 탓인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낯설지 않았다. 혹은 그녀가 여전히 같은 공기를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남자는 그간 여자를 자주 생각했다.

권민철을 보면 어머니가 떠오르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여자의 불안정한 모습이 자연히 뒤따랐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반대로 여자가 먼저 생각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생각을 하다 보면 궁금해지기 마련이라, 그는 가끔 유인책으로 들여보낸 최민영에게 여자에 대해서 보고받기도 했다. 말이 많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던데,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여자에게선 찾을 수 없는 모습이라 믿기진 않았다.

―이사님, 태각 건설 긴급회의 시작했습니다. 권민철 지금 막 사람 보내고 회의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권민철이 직접 여자를 데려갈 거라는 말을 듣고, 그의 발을 묶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자가 만든 회의였다. 남자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비가 많이 오니 여기까지 오는 데 30분은 족히 걸릴 터였다. 시간은 충분하다.

운이 좋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돌아본 교도소 문 앞에는 여전히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앞으로 뻗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뭘 하는 건가 싶어 빤히 바라보다 그 의도를 깨달은 남자는 가벼운 혀를 차며 우산 하나 쥐여 주지 않은 교도소 건물을 훑었다.

우산 없이 손바닥에 비를 받던 여자가 이내 그 빗속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가서 하나 구해 볼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세찬 빗속을 여자는 느리게 걸었다.

“…….”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점점 여자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남자는 까만 우산 속에 얼굴을 숨긴 채 움직이는 그녀의 다리를 응시했다. 그러다 혹시나 해서 여자가 바로 옆을 스쳐 갈 때 고개를 기울여 우산 너머로 시선을 던졌으나, 그녀는 앞만 보고 있었다. 법정에서 그러했듯 그녀의 시선은 남자를 향하지 않았다.

기어이 여자는 남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쳤다.

쯧, 짧게 혀를 찬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에 우산을 끼웠다.

쫄딱 젖은 꼴이 너무 연약해서, 이대로 계속 비를 맞다간 박하 맨션에 도착하기도 전에 객사할 것 같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여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기에 남자는 여자가 움직이는 만큼 몸을 옆으로 물렸다. 반대쪽으로도 똑같이 했다.

“…….”

여자가 의문을 품는 건 두 번이 전부였다. 그 이상은 귀찮았는지, 아니면 그냥 궁금하지 않은 건지 이내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쩐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남자는 벌써 자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만약 여자가 집요하게 돌아봤다면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을 거다. 여자와의 첫 만남은 박하 맨션으로 계획했으니까.

적당히 이웃 주민인 척 경계를 허문 뒤, 일자리를 핑계 삼아 권민철 몰래 지방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깡패 새끼와 얽히는 바람에 조진 인생 하나 구제해 주고, 겸사겸사 여자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를 가는 권민철 속도 좀 긁을 심산이었다.

분명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한 태도가 왠지 거슬렸다.

여자는 남자의 우산을 쓰고 박하동까지 걸어갔다. 그 뒤를 밟으며 남자는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우산뿐 아니라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웅덩이가 나와도 피하지 않았고, 도중에 비가 잠깐 멈춰도 우산을 접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튄 물이 옷을 더럽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여자는 아무 의욕 없이 시들시들했다. 6년 전과 똑같이.

남자는 최민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기했다.

‘어릴 때부터 수감 생활을 해서인지,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어린아이 같아요. 의존적이라고 해야 하나…….’

‘말 없을 줄 알았는데 대화도 곧잘 해요. 이것저것 물어보면 의외로 빼는 거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더라고요. 언니 일도 그렇고. 누가 자기한테 관심 가져 주는 걸 내심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만큼 정에 굶주린 애라 저한테도 쉽게 마음을 열긴 했는데…… 자꾸 신경이 쓰여요. 제가 서하한테 못 할 짓 하는 것 같아서…….’

세상 다 산 노인네도 저것보단 생기가 있는데.

아이 같다고? 말이 많다고?

그러고 보니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문득 여자가 입을 열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궁금했다.

* * *

박하 맨션 102호.

다행히 여자는 남자의 계획대로 움직여 주었다.

오래 걸어서 지친 건지, 그녀는 현관문을 닫을 생각도 안 하고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허공만 응시했다.

남자는 현관 앞에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흐린 햇빛에 의존해서, 나중에는 어둠 속의 실루엣까지.

천장에 달린 종이 모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자는 그 자신도 허공에 매달린 듯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눈을 떼면 사라질 것 같아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어느 찰나, 탁, 신발장에 뭔가가 떨어졌다. 그가 준 우산이었다.

잠깐 그것을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

“…….”

어둡지만, 어둠에 익숙한 남자의 눈에는 마주친 눈동자가 선명히 보였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건데, 여자는 남자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 멍하니 풀어진 얼굴이 딴생각에 잠긴 듯해, 역시나 남자는 조금 심기가 거슬렸다.

잠시간 그녀를 응시하다 떫은 기분을 털어 내려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타악, 피어오른 라이터 불을 빨아들일 때였다.

“저기.”

일순 알 수 없는 전율이 끼쳤다.

“나도 하나만.”

탁, 라이터를 세게 닫자, 다시 어둠이 드리웠다.

“하나만 줘.”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는데.

말을 건 이유도 그가 아닌 담배라는 게 기가 막혔다.

더 웃긴 건, 남자가 그 순간 묘한 쾌감에 젖었다는 거였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절로 아래가 동했다.

그 발정에는 목소리가 예쁘고, 말투가 귀엽고, 생각이 당돌하다는 여러 이유도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줄곧 세상을 무심하게 지나치던 여자가 그를 발견하고, 또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 가장 큰 자극점이었다. 예상치 못한 여자의 돌발 행동이 남자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자는 연이어 남자의 예상을 벗어났다.

순진하게 생긴 얼굴로 담배를 야하게 빨고, 야하게 빨길래 같이 꼴렸나 싶었지만 거절했고, 거절했으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까 봐. 보고 내키면.”

새침한 언사와 달리 입에 물자마자 정신없이 빨기도 했다.

그뿐인가. 아래를 빨릴 땐 성욕이라곤 없을 것처럼 시들어 있던 몸이 경쾌하게 요동쳤다. 그건 여자에게서 처음 발견한 생기였다.

남자는 쾌락에 젖은 여자를 보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단순히 성욕에 국한되지 않았다. 물론 눈 돌아가게 예쁘기도 했지만, 추가적인 욕망이 동반했다.

시들시들한 여자를 생생하게 되살려 내고, 맥없는 그녀를 요동치게 하고 싶은 욕심.

아마도 권민철이 만들어 냈을, 어쩌면 제 어머니도 가지고 있었을, 무기력에서 여자를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

“사람은 타인의 온기를 느껴야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한대.”

권민철은 한창 여자의 행방을 찾는 중이었다. 남자와 그의 최측근, 최민영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여자가 박하 맨션에 있다는 걸 모른다. 아마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며칠은 괜찮겠지.

“우리 계속 붙어먹을까?”

“왜?”

여자를 생각하면 어머니가 생각났고, 어머니를 생각하면 여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녀는 살았으면 싶었다.

“타인의 온기를 느껴야 살아 있는 걸 실감한다며.”

“…….”

“우리 예쁜이 살려 주려고.”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나.

* * *

여자는 낮엔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시큰둥하다가도, 잘 때는 애처럼 울었다.

“언니…… 흐으, 언니…… 미안해…….”

갓난아기처럼 몸에 이불을 두르고 울면서 우승지를 찾을 때마다 남자는 최민영의 말을 되새겼다.

어린아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먹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면서도 막상 먹을 게 입에 들어가면 꽤 적극적으로 숟가락질을 한다든가, 처음 해 보는 섹스에 겁먹고 떨다가도 거칠게 쑤셔 박히는 걸 좋아한다든가, 새침하게 굴면서도 툭하면 달라붙어 바르작거린다든가, 정체도 모르는 자신의 접근에는 경계하지 않았으면서 낯선 분식집에서는 바짝 쫀다든가, 남자가 실없는 소리를 하면 무심한 얼굴이 살짝 풀어지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여자는 매번 예상을 벗어났고, 남자는 그게 흥미로웠다. 계속해서 눈이 갔다.

―이사님. 권 상무가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자꾸 이사님과 그 여자 이야기하시는데, 아무래도 빨리 보내시는 게…….

“그거 하나 알아서 해결 못 해서 전화질이야?”

―네?

“쓸 만하게 만드는 중이라고 전해.”

―아……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둘러대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요즘 건설 쪽 지분이…….

“버, 번호 좀 주세요!”

“…….”

“너무, 너무 예쁘셔서, 제가 원래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지금 안 하면 후회할 거 같아서…….”

―이사님?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는 여자를 좀 더 보고 싶은 욕심에 보내는 걸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게 어긋남의 시작이었다. 계획도, 그녀와의 관계도.

“감방 들어가기 전엔 뭐 하고 살았는지 이야기해 봐.”

남자는 갈수록 여자가 궁금했고.

“근데 우리 예쁜이는 오빠한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네?”

그녀의 관심을 바라게 되었다.

“너랑 하면 아무 생각 안 나서 좋아. 아프고 좋기만 하니까.”

상처를 외면하기 위해 섹스에 집착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 같다.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나중엔 후회가 되었다.

“그래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생각해 보면, 여자는 죽음을 쉽게 입에 올렸다.

“살면서 딱 두 번 바다에 갈 뻔한 적이 있었어.”

상처가 많았고.

“만약에 파도가 머리 위까지 쳐서 나를 휩쓸어 가면.”

“…….”

“그냥 그렇게 둬.”

“…….”

“자연에 순응하는 게 동물의 역할이야.”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 갈 것 같았다.

그녀는 늘 불안정했다.

정말로 홀연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섹스로 가두었다.

여자는 섹스할 때만큼은 남자가 기대한 대로 생기가 돌았다. 적극적으로 달라붙고, 이것저것 요구하고, 쾌락에 젖어 예쁘게 올려다보는 여자를 보고 있으면, 계속 보고 싶은 게 자신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걸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착각이었다.

여자는 늘 남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던가.

여자가 원하는 떡볶이와 케이크를 들고 박하 맨션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건 피투성이가 된 부하뿐이었다.

“설명해.”

“윤서하, 그 미…… 하, 씨발, 튀었습니다.”

“…….”

“어떤 새끼들이 데리러 왔는데…… 아무래도, 권민철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

남자는 쓰레기 더미에 박혀 있는 우산을 응시했다. 그가 줬던 것이 버려져 있었다.

“접니다, 상무님.”

―그래, 이헌아.

“윤서하 데려가셨습니까?”

―그래. 그년이 먼저 연락했다.

“……그렇습니까.”

―뒹굴 만큼 뒹굴었으니 질릴 만도 하지. 너도 이제 정신 차려. 전부 내팽개치고 여자에 정신 팔려 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린다.

그는 들고 있던 걸 전부 내팽개쳤다. 케이크 박스를 뚫고 빵칼이 튀어나왔다.

―그년 빼돌린 건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마. 생긴 게 그러니 홀릴 만도 하지. 내가 그 정도 이해 못 할 만큼 꽉 막힌 사람 아니지 않냐.

“…….”

―어차피 그건 씹질 외엔 따로 쓸모도 없었을 거고.

“…….”

―어쨌든 윤서하는 이제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내년 입찰이나 신경 써. 중요한 건이다. 너니까 믿고 맡기는 거야.

여자의 도망은 남자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권민철의 눈을 피해 여자를 보낼 게 아니라, 여자의 눈을 피해 권민철을 보내야 했다.

그는 여자를 계속 봐야겠으니까.

여자의 불안정을 지켜보며 느꼈던 초조함은 답을 찾고 나니 해갈되었다.

“애들 불러.”

“이사님,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영진아, 나 없을 때 윤서하 지키는 게 네 일 아니었나.”

“…….”

“한 번 봐주기도 했는데.”

“…….”

“일 이따위로 해 놓고 주둥이 나불대지 말자.”

어차피 죽일 놈, 좀 더 빨리 보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남자는 빵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죽였다.

복수가 아니었다. 분노였다.

여자에게는 복수지만 남자에게는 분노였다.

모든 게 처음의 계획과 달리 흘러갔다.

자연에 순응하는 게 동물의 역할이라던 여자의 말대로 남자도 하염없이 휩쓸려 갔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있었다.

“너……!”

“…….”

“윤서하!”

여자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지를 왜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까.

* * *

남자는 한평생 악착같이 살았다.

비닐봉지에 묶여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을 때도, 권민철 밑에서 개처럼 구르며 싸움박질을 하고 살 때도,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일 때도,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어머니를 만났을 때도, 그녀의 이기적인 사죄를 받아들일 때도,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다준 상실감을 겪었을 때도, 그것을 잊기 위해 더 험하게 몸을 굴릴 때도, 어머니가 겪었을 수모를 알았을 때도, 복수심을 가졌을 때도,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꼈을 때도.

섹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여자와 몸을 섞었다. 그럴 때 여자가 요동치는 게 좋았다. 마치 자신이 여자를 살려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내가 너랑 왜 잔 줄 알아?”

“…….”

“너랑 그러고 있으면 내가 망가지는 거 같아서 좋았어.”

정작 그녀는 부서지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땐, 어머니의 수모를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절망을 느꼈던 것 같다.

“너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처음 만난 온기였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

“그냥 네 생각 하면…… 너랑 있으면,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

“그것도 그냥, 네가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냥 그런 거지, 네가 특별한 거 아니야.”

여자는 신기한 존재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불안정한 공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살겠다고 그에게 매달려 냄새를 맡았다. 그 모순이 안타깝고 예뻐서 남자는 또 휩쓸리는 수밖에 없었다.

“때 되면 내가 죽여 줄 테니까, 네 목숨 나한테 맡기고 그때까진 마음 편히 살아.”

남자는 완전히 함락된 자신을 인정했다.

기존의 것들이 부서지고, 다시 조립되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만 뽑았던 남자에게,

사람을 죽이고 살아온 남자에게,

웃을 일 없이 삭막했던 남자에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애틋함과 살아 달라는 고백, 원 없이 예쁨만 주고 싶은 애정이 만들어졌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이번엔 그것에 휩쓸려 갈 차례였다.

기꺼이.

Next Month

“나쁜 놈.”

“착하다고 해 줄 땐 언제고.”

어처구니가 없다.

“너야말로 살 만하게 해 주겠다고 한 지 얼마나 됐어.”

“…….”

“믿은 내가 바보지.”

“이리 와.”

“꺼져.”

달라붙는 몸뚱어리를 밀어 내고 이불을 몸에 칭칭 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이지 않게 숨어 버리자 이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째로 나를 품에 안았다.

“놔. 놓으라고.”

“싫어.”

인상을 찌푸리는 동시에 머리를 덮고 있던 이불이 말려 내려갔다.

힘으로 나를 이겨 먹은 그가 빼꼼히 드러난 눈두덩에 입을 맞춰 왔다. 받아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이마로 코를 쾅 박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쪽쪽거렸다.

“나라고 아무 대책 없이 이런 말 했을까.”

“…….”

“떨어져 있는 동안 영상 통화 하자. 그럼 같이 있는 거 같고 좋잖아.”

“거짓말하지 마.”

바쁘다고 전화 한 통 없던 전적이 있는 놈을 내가 어떻게 믿을까.

“계속 옆에 있어 줄 것처럼 말했잖아.”

원망스럽게 쏘아보자 그제야 이헌이 하던 짓을 멈추고 손에 머리를 받쳐 모로 누웠다.

“그럴 거야.”

“웃기지 마. 내일부터 다시 일하러 간다며.”

“그래야 우리 예쁜이 먹여 살리지.”

“그냥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

“이제 그렇게 못 해.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거 맛 들어서.”

커다란 손바닥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흔들어 치워 내도 꿋꿋하게 달라붙는 게 짜증 나서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손을 가만히 내어 준 채 닭살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 되게 좋긴 한데.”

“누가 집착을 해.”

“현실적으로 평생 집 안에서 붙어살 수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같이 산 지 이제 고작 한 달 됐어.”

목소리가 흔들렸다. 선명하던 이헌의 얼굴이 흐릿해지기도 했다. 무언가 울컥 북받쳐 오르며 감정이 널뛰었다.

“한 달 만에 나 버릴 거면서 왜 데려왔어?”

“뭐?”

“겨우 한 달 살자고…….”

“버리긴 누가 버려.”

“…….”

“비약이 심하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며 내 눈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꼼꼼히 닦아 준 이헌이 이불째로 나를 들어 배 위에 올렸다.

크고 넓은 가슴팍에 얹어지니 진짜 내가 무슨 벌레가 된 것 같았다.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벌레 나부랭이.

이헌의 냄새를 맡으며 불안하게 물었다.

“혹시 나랑 사는 거 재미없어졌어?”

“무슨 소리야.”

“섹스도 할 만큼 했으니까 질렸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이헌이 허리를 가볍게 쳐올렸다. 이불 너머로 두툼한 기둥의 윤곽이 느껴졌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다행히 아직 내가 환영받을 구석이 있다는 거니까.

나는 이불을 풀어내고 그의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이미 한차례 섹스를 한 후라 나도 그도 헐벗은 상태였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성기를 손에 쥐고 위아래로 문지르니 이헌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시선을 내렸다.

“우는 애한테 좆 물리는 취미 없다고 했는데.”

“안 울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 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양손을 뻗어 왔다.

“나중에 하고 이리 와. 하던 이야기 안 끝났잖아.”

무시하고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양껏 입을 벌려 귀두를 물고 소리 나게 빨아들이자 어쩔 수 없는 짐승 새끼는 금방 욕망에 젖었다.

특히 반응이 좋은 귀두를 핥아 대니 낮은 신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맛있어?”

눈을 치켜뜨자 진득한 시선이 얽혔다. 당장이라도 좆을 쑤셔 넣고 싶은 짐승의 본능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다행이다.

쪼옥,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 내고 그가 발정 난 틈을 노렸다.

“안 가면 내가 매일 빨아 줄게.”

머리를 쓸어 넘기던 이헌이 행동을 뚝 멈췄다.

빠는 것보단 넣는 걸 더 좋아하니까 얼른 그의 골반에 올라타 아래를 맞췄다.

두꺼운 귀두를 질구에 가져다 대고 앉으려는데, 대뜸 겨드랑이 안으로 손이 들어오더니 몸이 딸려 올라갔다. 상쾌한 향이 온몸을 감쌌다.

“섹스로 거래하는 나쁜 짓은 어디서 배웠어.”

황당하게 그를 마주 봤다.

“벌써 까먹었어? 담배 줄 테니까 좆 빨라고 한 건 너잖아.”

“아, 오빠는 태생이 나쁜 새끼라.”

“헛소리할 시간에 넣기나 해.”

“근데 내가 네 덕에 천사가 되고 있잖아.”

“미친놈.”

“그래서 이제 섹스에 조건 달면 속상해.”

“…….”

“좋아서 붙어먹어야지. 우린.”

그가 코를 맞비벼 왔다.

“떨어져 있어도 안 외롭게 할게.”

“…….”

“믿어 봐.”

“…….”

Rrrr-. Rrrr-.

그때 협탁에 놓인 이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흘깃 눈을 돌려보니 ‘영진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이헌은 연이어 울리는 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빤히 쳐다봤다.

“전화나 받아.”

“안 받아도 돼.”

“계속 울리잖아. 급한 전화 아니야?”

“예쁜이 기분 풀어 주는 게 더 급해서.”

“……결국 가긴 갈 거라는 말이네.”

나는 훌쩍이며 이헌의 목에 코를 묻었다. 휴대폰은 요란하게 울리고, 그는 내 등을 토닥였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좀 시끄럽지만, 정리되면 그땐 같이 출근해도 돼.”

“……내가 거길 왜 가.”

“내가 같이 있고 싶으니까.”

“…….”

“금방 정리해 볼게.”

나긋한 손길에 요동치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Rrrr-. Rrrr-.

그는 한 달 동안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혼자 있으면 우울에 잠식되는 나를 위해서 집 안에서도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고, 밖에 나가면 끌어안든, 손을 잡든 반드시 붙어 있었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권민철이 죽었다.

그건 단순히 나와 이헌의 복수를 성공한 것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한 조직의 임원 자리가 비었으니 그것을 대체할 사람은 필요하다. 그게 이헌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대책 없이 칼만 쑤신 나와 달리 그는 권민철의 목숨과 자리까지 다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고 했으니까.

실제로 지금처럼 툭하면 조직원들에게 전화가 왔고, 서재엔 알 수 없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내가 잠든 틈에 따로 일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Rrrr-. Rrrr-. Rrrr-. Rrrr-.

쉬지 않고 울리는 벨 소리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여태 옆에 있다가, 출근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정말 급한 거겠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자꾸 귀찮게 하면…… 진짜로 버림받게 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물고 늘어지면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외로운 게 낫다. 버려지는 것보단.

“알았으니까 전화받아.”

“뭘 알아?”

“가도 된다고.”

“…….”

여태 투정을 부리다 다짜고짜 받아들이니 이상한지 그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벨 소리 시끄러워. 빨리 받기나 해.”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면서도 이헌의 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듯 눈빛이 집요해졌다.

“그래.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

“알았다고, 새끼야.”

그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여는데, 내가 먼저 말했다.

“전화 안 해도 돼.”

“뭐?”

“어차피 바빠서 못 하잖아. 그냥 하지 마. 방해되기 싫어.”

“…….”

“지금 오래? 가 봐.”

내려가려고 몸을 옆으로 물렸지만, 그가 허리를 놓아주지 않아서 미수에 그쳤다.

“갑자기 왜 이래. 사람 불안하게.”

“뭐가.”

“가지 말라고 좆까지 빨던 애가 왜 갑자기 쿨해졌지.”

“가야 한다며. 그래서 가라는데 뭐가.”

“보통 이럴 땐 진심 아니던데.”

“…….”

그가 가볍게 혀를 차며 내 얼굴을 감싸 올렸다. 볼이 짓눌려 웃긴 꼴일 텐데도 닭살스러운 눈길은 여전했다.

같이 사는 내내 이렇게 봐서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지만, 그래도 아직은 좀 불편하다. 어색하고.

이리저리 눈을 피해도 고개를 흔들어가며 쫓아와 자꾸 시야에 걸리는 바람에 그냥 질끈 눈을 감았다.

“예쁜아, 이러지 마.”

“네가 자꾸 징그럽게 보…….”

“설득은 내 몫이고, 너는 네 좆대로 해야지.”

“…….”

움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관두고, 나한텐 꼴리는 대로 굴어도 돼.”

“……왜?”

“내가 너 좋아하잖아.”

“…….”

“그래서 네가 뭘 해도 예뻐 보이거든.”

“……귀찮을 텐데.”

“누가 그래?”

조심스레 눈을 뜨자 여전한 눈빛이 있었다.

“쿨한 척하지 말고 더 집착해 주라.”

“…….”

“난 네 집착 받는 거 좋거든. 내가 진짜 너한테 뭐라도 되는 거 같아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배 안이 파도치듯 울렁거리고 심장은 평소보다 빨리 뛰고, 몸은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이헌은 신기하다. 말 한마디로 사람 기분을 바닥에 나뒹굴게 하고, 다시 하늘에 붕 띄우기도 한다. 나는 바람에 떠밀리는 파도처럼 그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자꾸 이렇게 내가 원하는 온기를 주니까, 나는 거기에 맛이 들어 만족을 모르고 더 바라게 되는 거 같다.

한참을 머뭇대는 동안 그는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권이헌.”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는 들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있기 싫은데…….”

기어들어 가듯 하는 말에 그가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

“알았어. 혼자 안 둘게.”

* * *

“거짓말쟁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휴대폰 화면 속의 이헌이 느물느물 웃었다.

―우리 예쁜이는 화면으로 봐도 예쁘네.

“약아 빠졌어.”

―오빤 어때?

“별로야.”

―실물이 더 잘생겼다는 말이지? 고마워.

슈트 차림으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이헌의 등 뒤로 검은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이러니까 같이 일하는 거 같고 좋지 않아?

그는 기어이 출근을 했다. 속내를 털어놓게 꼬셔 놓고, 진짜 어이가 없다.

그나마 마음이 좀 풀린 건 현관문을 나가자마자 영상 통화를 연결했고, 그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 틀어 뒀기 때문이었다.

비록 실체는 없지만, 얼굴을 보고 있고,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혼자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허전한 구석은 그의 셔츠를 꺼내 입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래도 속았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어 뚱하게 노려보았다.

―저녁 시간 다 됐어. 밥 먹자.

“귀찮은데…….”

―얼른.

자꾸 재촉해 대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

화면을 보면서 걷느라 식탁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걸음이 멈췄다. 곧장 걱정스러운 물음이 되돌아왔다.

―뭐야. 왜 그래?

“부딪쳤어.”

―어디?

와이셔츠 밑단을 들어 붉어진 허리를 보여 주자 그가 쯧, 혀를 찼다.

―내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정신은 팔지 말아야지.

“뭐래.”

―아파?

“조금.”

―나중에 가서 호 해 줄게.

유치하게 무슨 헛소린지.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예쁜아.

“왜.”

―너 내 옷 입고 있으니까, 처음 섹스하던 날이 자꾸 생각나네. 집중 안 되게.

그가 책상에 턱을 괴고 야릇하게 웃었다.

―섰어.

“어쩌라고.”

―어쩌긴.

탁, 탁, 탁.

“너 진짜 뻔하다.”

나는 익숙한 마찰 소리를 뒤로하고 식탁에 휴대폰을 세워 둔 뒤, 냉장고를 열었다.

그가 미리 사다 둔 반찬들을 꺼내서 하나씩 늘어놓고, 밥도 조금 퍼 와서 앉으니, 그새 눈매가 나른해진 이헌이 생긋 웃고 있었다. 회사에서 야한 짓 하는 주제에 예쁘게도 웃는다.

탁, 탁.

“밥 먹을 거야. 이따가 해.”

―반찬 삼아.

“입맛 떨어지는 소리 좀 하지 마.”

―지금 입맛 다시던데.

“…….”

―보여 줄까?

입 안에 고인 침이 크게 넘어갔다.

―알았어. 보여 줄게.

“그렇게 말 안 했는데…….”

작게 항변했지만, 짙은 회색 바지 틈으로 솟아오른 성기가 화면을 가득 채운 순간 입이 다물렸다. 커다란 손이 흉악한 기둥을 죽죽 훑어 대는 음란한 영상에 다시금 침을 꿀꺽, 삼켰다.

―입맛이 좀 돌지?

“…….”

대답 대신 넋 놓고 화면만 들여다보는데 불시에 이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먹으면서 관람해.

“…….”

―빨리.

떨떠름하게 쌀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대충 턱을 움직이는데 다리 사이에서 액이 주룩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도 해 볼까?”

―뭘.

“자위.”

―…….

“네가 만지는 것처럼 만지면 되겠지?”

늘 그에게 몸을 맡기기만 하니 자위는 해 본 적이 없다. 입술을 핥으며 셔츠 자락을 움켜쥐는데 이헌이 하던 짓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의외의 대답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나중에 직접 볼 거야.

“…….”

―지금은 그림의 떡이라, 고문밖에 안 돼.

“나도 그러고 있잖아.”

―아, 내 좆이 그렇게 먹고 싶어?

뻔뻔하게 묻는 그를 흘겨보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짐승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난 그거 말고 너 말한 거야.”

―뭐?

“그림의 떡이잖아. 이거. 이렇게 얼굴만 보고 있는 거.”

―…….

“혼자 안 둔다고 했으면서 치사하게…….”

투덜대다 문득 입이 다물렸다.

―…….

“…….”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이헌과 눈이 마주쳤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로 들…….

나도 모르게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엎었다.

심장이 흔들거렸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허공에 우왕좌왕하던 손으로 겨우 젓가락을 쥐었다. 밥을 크게 떠 입 안에 밀어 넣는 동시에 얼굴도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

별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종일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는 있어도, 온기와 냄새는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 불만을 털어놓은 것뿐이다.

그가 꼴리는 대로 굴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뿐인데 견딜 수 없는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Rrrr-. Rrrr-.

흠칫,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보니 당연히 이헌이었다.

또 영상 통화라 선뜻 받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내가 보이지 않게 화면을 엎었다.

―내 그림의 떡은 어디 갔어?

웃음 섞인 목소리가 얼굴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휴대폰을 흘겨보며 밥을 우물거렸다.

―얼굴 보여 줘.

“나 밥 먹는 중이야. 방해하지 마.”

―부끄러워하는 목소린데, 착각일까?

“…….”

무시하고 밥과 반찬을 막무가내로 입에 넣는 그때였다.

―나 지금 차 타러 가.

“……어?”

―얼굴 보여 주면 30분 걸릴 거 20분으로 줄여 볼게.

“…….”

―어때?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달아오른 내가 화면에 적나라하게 비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와?”

―잠깐 들를게.

“잠깐만 들르는 거야?”

―미안해. 시간이 그렇게밖에 안 나.

진짜 그의 뒤로 주차장이 보였다. 잠깐이라니 아쉽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하루 종일 혼자 있을 뻔했는데.

이만하면 타협의 여지가 있어서 꼬였던 심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는 얼른 입 안을 비워 내고 이헌을 재촉했다.

“알았어. 빨리 와.”

―그래.

그가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켜고, 도로를 질주하는 일련의 과정을 식탁에서 함께 보냈다.

―다행히 차가 안 막히네. 운이 좋다, 그치?

“응.”

운전하는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간지러운 것도 참을 수 있을 만큼, 그가 온다는 게 흡족했다.

익숙한 오피스텔 주차장이 보일 때 식탁을 벗어나 신발장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탔어. 어떻게 반겨 줄래.

“뭘 어떻게 반겨.”

―문 열자마자 안기면 보람 있을 거 같은데.

“뭐라는 건지.”

헛소리는 흘려 넘기고 현관과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몇 층이야?”

―10층 막 지났어.

“……지금은?”

―15, 16.

“…….”

―20, 21.

다 와 간다. 왠지 두 발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몸이 좌우로 움직였다.

―되게 귀엽네, 진짜.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타이밍에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더 이상 화면은 보지 않았다. 현관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기를 몇 초.

삑. 삑. 삑. 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쁜아, 나 왔…….”

문이 벌컥 열리며 이헌의 실체가 등장한 순간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던지고 와락 안겨 들었다. 단번에 단단한 품 안에 몸이 파묻히고, 상쾌함이 나를 둘러쌌다.

“뭐야.”

“뭐가.”

“안 해 줄 것처럼 새침 떨더니 사람 설레게 하잖아.”

“…….”

몸이 번쩍 들렸다. 목을 끌어안고 바짝 달라붙자, 그가 단단한 팔로 엉덩이를 받쳤다.

“하여튼 매번 예상을 벗어난다니까.”

이헌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귀 뒤에 코를 묻었다. 살 것 같다. 아무리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면 뭐 할까. 역시 실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가 닿고서야 비로소 외로움이 걷혔다.

“되게 보람 있네, 이거.”

엉겨 붙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픽 웃었다.

그대로 주방에 들어간 이헌은 나를 품에 안은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양다리를 벌리고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몸을 비비적거리니 나른한 신음이 그에게서도, 나에게서도 흘러나왔다.

“고개 들어 봐.”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자 곧장 입술이 삼켜졌다. 느릿느릿 파고드는 혀를 덩달아 핥으며 종일 혼자라 느낀 불안함을 잠재웠다. 부푼 이헌의 사타구니에 아래를 문지르기도 했다.

“으응, 하고 갈 거야?”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해.”

“짧게 하면 되잖아.”

“불가능한 거 알면서.”

입술을 비비며 장난스레 속삭이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너도 인간이면 조절이라는 걸 좀 해 봐.”

“너랑 떡 치면서? 못 하지.”

“짐승 새끼.”

“새삼스럽긴.”

이헌이 뻔뻔스럽게 웃어 보였다.

“밥 아직 많이 남았네. 먹여 줄게.”

“나중에 먹을 테니까 그냥 나랑…….”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숟가락과 밥그릇을 든 이헌이 멋대로 내 입에 밥을 물렸다. 이어서 반찬까지 살뜰하게 먹이는데, 정말로 섹스를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표정만 그랬다.

“안 할 거면 세우지나 말든가.”

“걘 자아가 따로 있어. 존중해 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자, 그가 씨익 웃으며 다시 내 입에 숟가락을 물렸다. 밥 먹는 행위를 귀찮아하는 내게 툭하면 먹여 대서 그런지 동작이 능숙하다.

혼자 먹는 것보단 시중을 받는 게 편하니 잠자코 받아먹는데, 문득 그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는 이헌을 화면으로 구경한 게 전부였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그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았다.

“얼마 안 남았어. 마저 먹자.”

“너도 밥 안 먹었잖아.”

“그런데?”

“너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

“온 김에 먹고 가.”

거의 다 비워 가는 밥그릇을 가지고 무릎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한 움큼 퍼서 돌아왔을 때, 잠깐 주춤해야 했다.

“…….”

“……왜?”

이헌이 쓸데없이 너무 예쁘게 웃고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빤히 쳐다보는 눈을 피하고 다시 그의 품으로 되돌아와 따끈한 밥을 크게 퍼 올렸다. 그러곤 곧장 쪼개고 있는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먹여 주는 거야?”

“……첫술만 떠 준 거야. 나머진 네가 먹어.”

“안 돼. 내 손은 지금 다른 일이 생겨서.”

그가 실실대며 내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부딪친 부위였다. 살살 문지르는 손길이 부드러우니 그냥 각자의 일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다시 밥을 먹여 주었다.

“멍들었는지 보자.”

“살짝 부딪친 거야.”

“호 해 주기로 했잖아.”

“나잇값 좀 해.”

“네, 누나.”

쯧, 혀를 찼다. 이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끌어 올려 속살을 들여다보았다.

“아파?”

“아니.”

“여긴?”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숟갈 먹였다.

한쪽 볼이 볼록해진 채 다부진 턱을 움직이며 내 몸을 살피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섹시하기도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볼에 입술을 붙였다.

쪼옥.

“…….”

“아…….”

내가 저지르고도 당황해 눈을 크게 뜨는데, 이헌은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 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에 숟가락을 쑤셔 넣었다.

“왜, 뭐, 뭐가. 방금 전까지 키스도 했는데, 뭐.”

“…….”

“그리고 너도 툭하면 뽀뽀하잖아. 지도 그러면서…….”

“…….”

다분히 충동적인 짓이었다. 그냥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바쁜 와중에도 여기까지 와서 나를 안아 주는 그가 좀…… 예뻐 보였던 것 같다.

“내가 뭐, 못 할 짓 했어?”

더듬더듬 웅얼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헌이 숟가락을 퉤, 뱉어 냈다.

“누가 못 할 짓이래.”

덥석 나를 끌어안는 팔뚝이 평소보다 더 단단했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흥분한 숨을 뱉었다.

“미치겠네.”

이마를 비벼 대는 걸 어쩌지 못하고 안겨만 있는데 이헌이 번뜩 고개를 드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네 말대로 키스도 했는데, 뽀뽀 가지고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내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그를 황당하게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입술을 잘근대며 허공을 응시하다 작은 기침을 뱉자, 이헌이 멋대로 내 얼굴을 잡아 정면을 보게 했다.

“꼴리는 대로 해도 된다니까.”

“…….”

“또 입술 붙이고 싶은 데 있으면 마음대로 갖다 붙여. 오빤 늘 열려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거 좀 놔.”

그의 손을 치워 내고 잠깐 볼을 감쌌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뜨거웠다. 손등으로 문질러도 도무지 식지를 않아서 그냥 이헌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피했다.

“예쁜아.”

“…….”

“뽀뽀 더 해 주라.”

“싫어.”

“그럼 내가 하지, 뭐.”

쪽. 쪽. 쪽.

멋대로 내 얼굴을 들어 뽀뽀를 퍼붓는 이헌의 입술을 어쩌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만 뱉었다.

배 안이 일렁이고, 얼굴은 홧홧하고, 심장이 요동치는 건 역시 낯설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창피하고. 어디론가 숨고 싶고.

대체 이런 건 언제쯤 적응이 될까.

“그만 좀 해…….”

“왜? 싫어?”

“…….”

그렇다고 이런 기분이 싫은 건 아니다. 익숙해질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지.

“좋아하는 거 같은데, 내 착각이야?”

“……몰라.”

붉어진 얼굴로 흘겨보자 이헌이 느슨하게 웃으며 몸을 좌우로 살살 움직였다. 안정감 있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날뛰는 심장을 좀 가라앉혔다.

“가게 내 준다고 한 건 생각해 봤어?”

이헌이 내 등을 토닥이며 나긋하게 물었다.

“나 아무것도 못 하는데 무슨 가게를 차려. 언니한테 배운 거 다 까먹었어.”

“그럼 다시 배우면 되지.”

“…….”

“집에 있기만 하면 심심하잖아. 너도 할 게 생기면 덜 외로울 거야.”

코끝에 입술이 닿았다.

“가볍게 생각해.”

“…….”

“일단 해 보고, 아니다 싶으면 관두면 되잖아.”

“…….”

“그냥 시간 때울 겸. 어때?”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헌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을 제외하곤 일상이라는 것이 없으니, 잠깐이라도 그가 사라지면 하루가 무의미해진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고작 케이크 따위를 만든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더군다나 그건…… 언니를 떠오르게 하지 않나.

언니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케이크를 둘러싼 특별한 기억이 생긴다면 모를까.

‘사실 오늘 내 생일이야. 그래서 케이크나 나눠 먹으려 했더니, 섭섭하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잠깐 멍해졌다.

“천천히 생각해 봐.”

“…….”

쪽쪽.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는 나를 이헌이 다독여 주었다. 나는 잠자코 입술을 받다가 그의 목을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케이크.

특별한 기억.

권이헌.

나에게 뭐든 해도 된다고 말한 권이헌.

나에게 뭐든 해 주려 하는 권이헌.

권이헌의 생일.

꿀꺽, 긴장된 침이 넘어갔다.

“그…….”

“응.”

“해, 해 볼까?”

“그럴래?”

“……일단은 학원부터.”

“그래.”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이헌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Next Year

관둘까.

엉망이 된 부엌에 덩그러니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손에 든 스파츌라에는 생크림이 묻어 있고, 돌림판 위에는 허접한 아이싱 결과물이 놓여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걸 내려다보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나이트가운 차림의 이헌이 나른한 얼굴로 주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 속상해.”

잠깐 훑어보고도 내 속을 훤히 읽어 낸 그가 다가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하긴, 모를 수도 없다. 제과 제빵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이런 한심한 모습은 여러 번 보였으니까.

뚱한 얼굴로 스파츌라를 내려놓자 그가 내 볼을 핥아 왔다.

“맛있는데?”

볼 말고도 얼굴 곳곳에 묻어 있는 크림을 핥아 먹으며 이헌이 속삭였다.

“크림이야 맛있겠지. 레시피대로 했으니까. 내 손이 문제지.”

“손이 왜. 예쁘기만 한데.”

그가 능청을 떨며 내 어깨에 턱을 얹었다.

가뜩이나 기운 안 나는데 무거운 몸뚱어리가 얹어지니 더 처지는 기분이었다. 어깨를 비틀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밀착해 왔다.

“천천히 해, 천천히. 시간 많아.”

“시험이 코앞이야.”

“또 보면 되지.”

“……이미 한 번 떨어졌잖아.”

언니는 한 번에 붙었었는데 나는 이렇게 고전하는 거 보면 아무래도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할 거 없어서 그냥 시작한 거고, 크게 재미도 없지 않았나.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습관처럼 이어지는 부정의 연쇄를 끊기 위해 이헌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부루퉁한 내게 입술을 비벼 왔다.

“관둘래?”

역시나 속을 읽어 온다. 쪽쪽대는 입술을 같이 빨다가 고개를 내려 그의 어깨에 기댔다.

잠시 어깨 너머로 내 손을 바라봤다. 왼손 약지에는 올봄에 이헌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 볼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도 같은 게 반짝였다.

생일 선물이랍시고 난데없이 반지를 사 와서 얼떨결에 받았는데, 다음 날 본인도 똑같은 걸 끼고 있어서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넌 왜 그걸 가지고 있느냐 물었더니 자기도 예뻐서 샀을 뿐이라고 뻔뻔하게 나오기도 했다.

은근슬쩍 커플링을 맞춘 걸 모를 순 없었다.

어차피 내 돈으로 산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만, 이걸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관두고 싶으면 관둬.”

“섣불리 굴지 마. 누가 관둔대?”

“방금 되게 때려치우고 싶은 얼굴이던데.”

“네가 뭘 알아.”

“내가 뭘 몰라?”

“……그런 게 있어.”

대답을 피하며 몸을 좀 더 밀착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너 이거 시작한 뒤로 단내 나서 아주 죽겠어.”

그가 내 머리와 귀, 목 따위에 코를 묻으며 앓았다.

“이래서 우리 예쁜이가 오빠 냄새에 환장을 했구나.”

“환장까진 안 했거든?”

“아, 달아.”

쇄골을 핥는 이헌의 목소리가 음험했다. 나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옆에 잔뜩 쌓인 생크림을 살폈다.

“방에 들어가자.”

“만세.”

“뭐? 읏……!”

한순간에 입고 있던 앞치마와 티셔츠가 벗겨졌다. 졸지에 잠옷 바지 하나만 덜렁 남은 채 다시 곁눈질을 했다. 저걸 보기 전에 빨리 장소를 바꿔야 하는데.

“다리도 들고.”

초조해하는 사이에 바지까지 사라졌다. 집 안에선 속옷을 입지 않는 게 그와 나의 무언의 약속 같은 거라 알몸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이헌의 가운도 어느새 풀어져 속이 훤히 드러났다. 나는 묵직하게 솟아오른 그의 기둥을 손으로 문지르며 유인했다.

“방에 가자. 침대에.”

“그래.”

“……근데 왜 안 움직여?”

꿋꿋하게 버티고 선 이헌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아, 불안한데.

그의 오른손이 옆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실크 소매가 흘러내리며 뱀 대가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그 끝에 있는 게 생크림 볼인 걸 깨닫자마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거 씻는 거 짜증 난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씻겨 주잖아.”

“나 연습하려고 만들어 둔 거야.”

“또 만들면 되지.”

“좋은 말로 할 때 손 떼.”

“나쁜 말로 해도 돼. 알아서 해석할게.”

기어이 그가 볼을 끌어 와 검지로 크림을 푸욱 떴다.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지만 곧장 붙잡혀 끌려갔다. 허리를 꽉 붙들어 맨 이헌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맛있겠다. 그렇지?”

예쁘게 굴어도 안 넘어간다. 생크림이 몸에 발리면 아무리 핥아 내도 미끈거리는 게 남아서 씻을 때 얼마나 귀찮은데.

“하지 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내 유두에 크림을 찍어 발랐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순식간에 양쪽 가슴이 생크림으로 치덕거렸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싼 거 같네, 야하게.”

“씨…… 너 깨끗하게 빨아. 찝찝한 거 남기지 마. 알았어?”

사납게 다그치는 것에 그가 잠깐 입술을 말아 물더니 나를 번쩍 들어 작업대에 앉혔다.

혀를 내밀고 나를 빤히 응시하며 다가오는 얼굴에 장난기가 스며 있어 쓸데없이 귀여웠다. 쯧, 혀를 차며 그의 광대에 파인 보조개를 손으로 가렸다.

“아응…….”

커다란 혓바닥이 크림을 뭉개며 유두를 비벼 왔다. 이러면 그냥 침만 묻을 때보다 훨씬 미끄러워서 감촉이 남다르다. 더 진득하기도 하고.

크림을 넓게 펴 바르듯 혀를 이리저리 굴려 댈 때마다 배 안이 찌릿해서 허리가 마구 비틀렸다.

언젠가 이헌이 말한 것처럼 가슴만 빨아도 자지러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서 좀 무섭다.

지금도 아래를 쑤시며 가슴을 빨면 못 견디고 절정에 이르는데, 쾌락의 강도가 더 세지면 어떤 기분일까. 인간의 쾌감은 어디까지 발달되어 있을까.

“으으응…….”

입술로 뭉근하게 유두를 깨무는 것에 애타는 신음이 흘렀다. 그가 자꾸 바르작대는 내 허리를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더 밀착해 왔다.

쪼옥, 쪽. 빨아 댈 때마다 크림을 삼키는 이헌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려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짐작만 했다.

한참 동안 한쪽을 핥아 낸 그가 반대쪽으로 넘어가 같은 짓을 반복했다. 그동안 나는 끙끙대며 깨끗해진 가슴을 손으로 훑었다.

열심히 빨아 내긴 했지만 그래도 미끈거리는 것 같아 입을 삐죽이는데,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짓궂은 기색이 떠 있어서 불안했다.

“가슴 만지면서 자위하는 거야?”

“뭐라고?”

난데없는 헛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니, 유두를 비비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그러나 맹세코 자극을 원해서 건든 게 아니라 잔여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런 거다.

얼른 손을 떼어 냈지만, 이헌이 더 빨랐다. 내 손을 붙들고 아예 손바닥으로 가슴을 덮게 만들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보니까 꼴린다. 계속해 봐.”

“자위 아니야. 네가 크림 덜 핥은 거 같아서, 난 그냥…….”

“만져 보라니까.”

빨던 것도 멈추고 작업대를 손으로 짚은 그가 은근하게 종용해 왔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하던 거나 마저 해.”

상체를 기울여 그의 입술에 가슴을 가져다 댔지만, 훌쩍 물러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빨고 싶다고 더럽혀 둔 게 누군데. 기막혀하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가 내 검지로 유두를 굴려 대기 시작했다.

“야……!”

“아, 너는 이렇게 튕기는 걸 좋아하지.”

내 손이 타의로 유두를 툭툭 튕겼다.

가끔 이헌은 나에게 자위를 시켰다. 그가 없을 때야 외로움을 풀기 위해 혼자 하지만, 같이 있을 때는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싶어서 매번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보다 능숙한 놈을 두고 서툴게 몸을 달구면 애만 타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흐읏, 그냥 네가 해 줘.”

“빨리 젖꼭지 튕겨 봐.”

“씨…….”

“같이 자위하자.”

그가 음흉하게 속삭였다. 이미 아래는 거칠게 흔드는 중이었다.

“너는 갈수록 짐승으로 퇴화하는 거 같아.”

“괜찮아. 예쁜이가 이름 불러 주면 다시 진화해.”

달아오른 얼굴로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팔을 움직이며 뽀뽀를 해 댔다. 이마를 쿵 찍어 떼어 내고 잠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살덩이에 조그맣게 달린 유두가 자극을 갈구하듯 바짝 올라붙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다 검지로 슬쩍 쓸어내리니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 떨렸다.

피부에 와 닿는 자극과 시각적인 야릇함, 나 스스로 만지고 있고, 그걸 이헌이 보고 있다는 정신적인 흥분감에 사로잡히는 건 금방이었다.

살덩이는 손바닥으로 움켜쥐고 검지를 세워서 돌기를 살살 긁자 배 안이 저릿하게 울렸다. 다리 사이는 축축하고 허벅지는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흐응, 응.”

“…….”

“아, 으…….”

한쪽만 만지는 게 아쉬워서 반대쪽도 똑같이 움켜쥐었다.

여긴 아직 크림이 남아 있어서 손이 미끄덩했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더 빠르게 튕길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내 몸을 만지면서 낑낑대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코앞에 시뻘게진 이헌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자위를 하던 것도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너는 안 해?”

“얘 봐라.”

“흐읏.”

헐떡이며 유두를 더 빠르게 비비는데 대뜸 손이 붙잡혀 내려갔다. 내 손을 작업대에 내리누른 이헌이 입 안으로 혀를 굴렸다.

“그새 늘었네.”

“뭐가. 왜 또 멈춰…….”

“혼자 자주 했나 봐?”

“…….”

어떻게 알았지.

“이러다 오빠 필요 없어지겠어, 아주.”

뭔 소린가 잠깐 생각하다 이해했다. 동시에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후회 중이야. 이러다 빨아 달라는 소리 안 하고 혼자 만지고 말까 봐.”

“…….”

“야하긴 야하네. 쌀 뻔했잖아.”

“만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확실히 해.”

안 그래도 달아올라서 감질나는데 이랬다가 저랬다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퉁명스럽게 바라보자 물끄러미 시선을 든 그가 이내 바람 빠지듯 웃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아니.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혼자 만지기도 하고, 빨아 달라고도 해.”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그래. 지금은 뭘 원해?”

“…….”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빨아 줘.”

“…….”

“기분은 그게 더 좋으니까.”

그가 목을 울리며 곧바로 내 가슴을 입에 물었다.

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단 확실히 능숙한 이헌의 혓바닥이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긴 한데, 왜 속은 기분이지? 분명히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중인데 미묘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으응!”

그러나 이내 이헌이 이로 잘근대는 바람에 생각은 휘발되었다.

헐떡이며 머리를 움켜쥐고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기둥이 내 허벅지 안쪽에 액을 묻혀 댔다. 더듬더듬 손을 내려 성기를 훑자 그가 유두를 문 채 웃었다.

“넣고 싶어?”

“응. 넣고 싶어, 흣.”

다리에 좀 더 힘을 주어 몸을 이끄니 그가 가슴에서 입을 떼고 구부린 몸을 세웠다. 곧장 젖은 성기가 맞닿았다.

귀두를 아래에 비비며 끙끙대자, 얼굴 곳곳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내가 하는 양을 내버려 둘 것 같아서 그대로 아래를 맞추고 밀어 넣으니, 좁은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귀두를 삼켜 냈다.

“흐으응.”

팔과 다리로 이헌의 몸을 끌어당겨 아래를 빈틈없이 메웠다. 아, 좋아. 성기 모양에 맞춰 금방 자리를 잡는 내벽의 세포들 덕에 충만한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넣는 것도 혼자 잘하고.”

“후으…….”

“예쁜이 혹시 나 없을 때 딜도도 써?”

“뭐라는 거야…….”

터무니없는 말을 무시하려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것도 이렇게 좋아?”

이헌이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기만 해.”

“…….”

“이 안에 다른 좆 넣기만 해 봐, 어?”

말 안 하면 알게 뭔가. 입을 다물고 빤히 바라보자 그가 쓰읍, 소리를 내며 아래를 푹 쑤셨다.

“흐읏.”

“쑤셔 보면 답 나온다고 했어.”

“……네가 먼저 이야기 꺼냈잖아.”

“그러게. 나 왜 자꾸 무덤 파지.”

그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삽입질을 시작했다.

“후으…….”

목을 끌어안자 이헌이 내 엉덩이를 받치고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허공에 매달리니 기둥이 더 깊은 곳까지 박혀 들었다.

“그래도 혼자 만지는 것보단 나랑 붙어먹는 게 낫지?”

“아…… 그렇지만, 너 바쁘니까…….”

그가 걸음을 옮겼다. 움직일 때마다 굵은 성기가 안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며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애가 타서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들었다가 내렸다.

“아으, 읏.”

힘들지 않게 받쳐 주는 손바닥에 의지한 채 연신 몸을 들썩대다 이헌의 입술을 빨았다.

내내 연습하느라 생크림에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또 그렇지도 않았다. 혀를 내어 달달한 입술을 할짝대니 그가 입을 벌리고 호응해 왔다.

“달아 죽겠네.”

역시 그는 나와 생각의 흐름이 같았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나를 눕힌 이헌이 내 위를 완전히 뒤덮고 정신없이 혀를 얽어 댔다. 그러면서 뭉근하게 허리를 찧어 올려, 나른한 쾌감이 퍼져 나갔다.

“우으…….”

“하아.”

느리게 뿌리까지 밀어 넣고, 다시 천천히 빠져나갈 때마다 전신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양다리를 그의 허리에 완전히 감고 함께 엉덩이를 들썩이자, 안에서 찰박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으응, 좋아…….”

“좋아?”

“응, 응.”

“섹스가 좋은 거야, 내가 좋은 거야.”

은근슬쩍 던지는 물음에 반쯤 감긴 눈으로 올려다보자 이헌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춰 댔다. 배 안이 뜨겁게 달궈지는 게 느껴졌다. 가쁜 숨을 뱉어 내는 내게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래, 알았어.”

“흣, 뭘 알아.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빠 초능력자잖아.”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자 다시 입술이 집어삼켜졌다.

“아, 아.”

점차 빨라지는 허리 짓에 쾌감도 박차를 가했다. 내벽이 절정을 바라며 수축과 이완을 정신없이 반복해 기둥을 자극해 댔다.

그 역시 참기 힘든 듯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단단한 공간 속에서 그가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을 때,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으읏!”

나는 그의 입 안으로 가쁜 숨을 토해 내다, 목을 좀 더 끌어안았다.

호흡하느라 들썩거리는 이헌의 어깨 너머로 다시금 내 손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반지를 한참 응시하다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쿵쿵. 심장이 요동쳤다.

* * *

“아직도 붙어 다니는겨?”

분식집 할머니가 나란히 들어서는 우리를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헌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얼굴을 하고선 중앙 자리에 먼저 들어가 앉았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만 꾸벅 숙인 뒤 곧장 그의 옆에 붙었다.

“넌 언제까지 그렇게 쭈뼛거릴겨.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네? 아…….”

할머니의 타박에 이헌이 나를 품에 당기곤 테이블에 턱을 괬다.

“왜 우리 애 기를 죽여?”

“얼씨구.”

“무시해. 노망났나 봐.”

한결같이 버르장머리 없는 게 대단하다 싶다마는, 할머니 눈 수술을 시켜 준 걸 보면 또 아주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노인네 멀쩡하게 세상 보고 사는 거, 얘 덕이니까 다정하게 굴어. 겁 많으니까 부드럽게 대하라고 몇 번을 말해.”

“염병 떤다. 누가 해 달래?”

“자꾸 그렇게 까칠하게 구니까 애가 쫄잖아.”

할머니가 쯧, 혀를 차며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이헌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뭐가 내 덕이야.”

“네 덕이지, 그럼.”

여기 떡볶이를 종종 사 달라고 했더니, 그는 필요 없다는 할머니를 억지로 수술 받게 했다.

내 입맛에 맞는 식당을 잃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댔지만, 올 때마다 눈 이야기를 하는 걸로 봐선 사실은 진작부터 할머니를 신경 쓰고 있었을 거다.

할머니는 오래전 박하동이 사창가였을 때부터 분식집을 운영했고, 그의 어머니도 알고 있으며, 이헌이 버려진 것부터, 살아온 세월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은 사창가가 주택가로 바뀌고, 새로운 건물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는 박하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는 아무리 와도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이헌을 알고 있는 곳이니까.

“할머니랑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야?”

“배고파서 김밥 훔치다가.”

“뭐라고?”

한심하다는 눈길에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러게. 나 착한 놈 아니라니까.”

“권민철이 키웠으면 돈 많았을 거 아니야. 김밥을 왜 훔쳐 먹어?”

“호적에나 올렸지 진짜 아버지 노릇까진 안 했어.”

대답은 할머니에게서 들려왔다. 어느새 쟁반을 들고 나온 할머니가 예의 그 시큰둥한 얼굴로 접시를 탁탁 놓아 주었다.

“쪼끄만 할 때 쫄쫄 굶고 다녔어, 이놈.”

“…….”

“김밥 훔쳐 가는 거 몇 번 모른 척해 줬더니 그 뒤로는 아주 당당하게 들어와서 먹을 거 내놓으라고 하지 뭐냐.”

“굶어 죽느니 도둑놈 하지.”

어릴 때도 뻔뻔했구나. 생존 본능 하나는 탁월하다 싶다.

“그래서 거둬 먹였더니, 싸움박질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

“아가씨 웬만하면 이놈이랑 그만 어울려. 질 나쁜 놈이야.”

“노망난 거 맞네, 무시해.”

“버르장머리도 없고.”

할머니가 쟁반으로 이헌의 머리를 툭 치곤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뒤를 눈으로 좇다가 이헌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버릇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큰 거로 때릴 것까지 있나 싶다. 수술도 시켜 줬는데.

떨떠름하게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내 편 들어 주는 거 같은데, 착각일까?”

두 번 더 쓰다듬고 손을 떼어 냈다.

“착각 아니야.”

“…….”

왠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포크로 떡볶이만 집어 먹었다.

말캉한 떡, 달달한 양념은 언제 먹어도 맛있어서 가게가 문을 닫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데가 있어서, 이헌이 그나마 배를 곯지 않았다는 것도 다행인 거 같고.

몇 개를 더 집어 먹다가 옆이 이상하리만치 잠잠해서 물 마시는 척 힐끔 보는데, 하마터면 물을 흘릴 뻔했다.

“…….”

“…….”

보조개가 한껏 파인 이헌의 얼굴에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왜, 왜 그렇게 예쁘게 웃어?”

그래서 아무 소리를 지껄였더니, 그가 아예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마.”

“안 웃는데.”

“웃잖아.”

“착각이겠지.”

“착각 아니야.”

“그러게. 내 편 들어 주는 게 착각이 아니었네.”

“그야…… 나는 할머니보단 너랑 더 친하니까.”

“응. 친하니까.”

“…….”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큭큭대는 게 얄미워서 입술을 잘근대다 김밥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고마워.”

넉살 좋게 받아먹으며 끌어안는 품 안에 꼼짝없이 갇혔다. 몇 번 버둥거렸지만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권이헌, 너 다음 주도 바빠?”

“다음 주? 그렇긴 한데, 왜?”

몰라서 묻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이헌은 정말로 모르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일단은 그냥 넘어가야겠다.

“그냥 물어본 거야.”

“왜. 혼자 있기 싫어서?”

“응.”

“그러게 영상 통화 하자니까. 요즘은 왜 안 해 줘.”

“연습하는 데 방해돼.”

한때는 툭하면 영상 통화를 했지만, 그렇게 안 한 지도 꽤 되었다.

오전에는 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집에서 아이싱 연습을 하기 때문에 나도 나름대로 바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다.

사실, 지난달을 기점으로 완전히 권민철의 자리를 흡수한 이헌은 요즘 일주일에 한두 번 겨우 집에 들어올 만큼 바빴다.

가끔 너무 허전하면 전화를 걸지만 툭하면 그의 사무실에 사람이 드나들어서 대화를 할 틈도 없고, 일하는 걸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는 그럴 때마다 내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그를 방해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래서 그냥 관두기로 했다.

이제 나는 혼자 있는 것에 조금 익숙해졌으니까.

물론 불쑥 외로움이 치밀 때도 있고, 언니가 생각나기도 하고, 묵은 기억이 되살아날 때도 있지만, 집 안 곳곳에 이헌의 흔적이 있고, 내 손엔 그가 준 반지가 늘 끼워져 있고, 케이크를 만들 때도 그를 떠올리기에 금방 괜찮아졌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나 좀 섭섭해.”

“…….”

“자, 상상해 보자. 케이크랑 내가 물에 빠졌어. 누구부터 구할래?”

“헛소리 좀 그만해.”

“아무리 그래도 무생물보단 생물을 구하는 게 도의적이지?”

“극단적으로 가려면 생물이 죽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시큰둥한 대답에 그가 거짓 한숨을 뱉었다.

“오빠 상처받았어.”

“먹기나 해.”

되도 않는 연기를 하는 그의 입에 다시 김밥 하나를 쑤셔 넣었다. 순순히 받아먹은 이헌이 내 볼을 살살 쓰다듬더니 넌지시 말했다.

“바쁜 척해서 미안해.”

“…….”

그는 내 나름의 서툰 배려까지 훤히 읽고 순순히 제 잘못으로 돌렸다. 조금 멋쩍어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헌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볼에 닿았다.

“척 아닌 거 나도 알아.”

나직하게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식집 조명에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자꾸 시선을 끌었다.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다시 떡볶이를 입에 넣을 때, 가게 문이 열리더니 교복 입은 학생 여럿이 차례로 들어왔다.

“으, 비 존나 많이 와.”

“옷 다 젖었어. 짜증 나.”

쏴아아-.

투덜대며 우산을 터는 학생들 너머로 다시 시작된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 *

아무래도 나는 재능이 없는 게 맞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민영의 도움으로 겨우 케이크를 완성하고 나니 어쩐지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예쁘게 잘됐는데 표정이 왜 그래?”

“……네가 다 했잖아.”

“에이, 그래도 글씨는 네가 썼잖아.”

그녀가 깔깔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6년을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기술 배울 생각을 하지 않은 나와 달리 민영은 1년의 징역 생활 동안 야무지게 안에서 제과 제빵 기술을 익혔고, 그 덕에 배움의 속도가 남달랐다. 타고난 손재주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번 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따면 취직해서 돈을 모을 거라는 민영은 여느 때보다 표정이 밝았다. 더는 그녀가 빚 때문에 몸을 팔지 않아도 되어 진심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네가 말 안 하면 상무님이 어떻게 알겠어. 네가 했다고 해.”

“걘 모르는 게 없어.”

한숨을 푹 뱉으면서도 일단은 케이크를 상자에 담았다.

“아직도 적응이 안 돼. 네가 상무님을 그렇게 막 부르는 거.”

민영이 화려한 솜씨로 리본 끈을 묶어 주며 말했다.

“난 가끔 마주치면 눈도 못 보겠던데.”

“권이헌이 그 일로 또 뭐라고 했어?”

내가 민영에게 면회 가서 진실을 들은 걸 알고 이헌이 그녀를 한번 찾아갔다고 했다.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마 그때 어지간히 무섭게 군 모양이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게.”

“아니야. 그 뒤론 안 그랬어. 그냥, 상무님 무섭게 생겼잖아.”

“어?”

“웃지도 않고. 눈빛도 사납고.”

“…….”

“너네 집 갈 때마다 마주칠까 봐 얼마나 긴장하는지…… 어휴, 등이 쫄딱 젖는다니까.”

“…….”

“어디서 듣기론 자기 사람 아니면 눈길도 안 준다던데, 지금은 내가 네 친구라 그런지 눈길은 주거든? 근데 그게 더 무서워. 그냥 무시해 줬으면 좋겠어.”

“으음…….”

솔직히 납득되지 않아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나왔다.

“그치만 잘생겼잖아.”

“어?”

“되게 잘생겼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아무튼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워해?”

“…….”

“웃으면 그렇게 무섭지도 않아. 은근히 귀여운 얼굴인데……. 권이헌 보조개도 있어.”

민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남자는 얼굴이 전부라고, 네가 맨날 말했잖아.”

“으응. 그래. 서하야, 이제 가지고 가. 늦겠다.”

“……대답이 왜 그래?”

“아니야, 아니야. 내가 뭘?”

얼떨결에 상자를 들고 쫓겨나듯 학원을 나가야 했다. 유리문 너머를 돌아보니 민영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손짓을 했다.

마지못해 발을 떼면서도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어느새 민영은 다시 스파츌라를 쥐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끝났는데도 선생님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언니 생각이 나는 건 필연적이었다.

‘사실 오늘 내 생일이야. 그래서 케이크나 나눠 먹으려 했더니, 섭섭하네.’

그러나 연이어 떠오른 이헌의 얼굴이 더 선명했다. 덕분에 우울이 찾아올 틈이 없었다.

얼른 가기나 하자. 후우, 긴 한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상자가 빗물에 젖지 않게 우산을 최대한 기울이느라 한쪽 어깨가 축축해졌지만 상관없었다.

우산을 접고 태각 그룹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1층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곧장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게 해 주었다. 우산까지 살뜰하게 챙겨 줘서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이헌은 나에게 오며 가며 언제든지 자신의 사무실에 들러도 된다고 했는데, 직원에게 미리 내 사진이라도 보여 준 모양이다. 여태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데 나를 바로 알아보는 걸 보면.

굳이 남의 일터를 찾을 필요는 없으니 그간 발 들인 적 없지만, 오늘은 좀 필요해서 왔다.

깡패 회사 주제에 생각보다 건물 자체는 평범했다. 아무래도 태각 조직은 나에게 불쾌한 존재인지라 떨떠름한 표정으로 케이크 상자만 품에 안았다.

이헌이 몸담고 있는 곳이 아니면 이 건물은 아마 평생 얼씬도 하지 않았을 거다.

11층짜리 건물에서 이헌은 9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숫자에 입 안도 바짝바짝 말라갔다. 혀를 이리저리 굴리며 적셔 봤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쿵. 쿵.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몸 안에 흥분이 감돌았다.

이까짓 게 뭐 별거라고.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오늘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걸로 봐선 또 일하느라 집에 안 올 거 같으니 강행하기로 했다.

끌어모은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는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는 고영진을 발견하고 움찔 어깨를 웅크렸다. 박하 맨션에서 마주친 그 후드였다. 이헌과 자주 통화하는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내가 이헌과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볼 때마다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나 역시 딱히 반가운 사람은 아니라 대충 고개만 까딱해 인사를 대신하고 지나가려는 그때였다.

“상무님 어제 칼 맞았습니다.”

퍼뜩 고개가 돌아갔다.

“뭐?”

“작년에 윤서하 씨가 멋대로 권민철 찾아가는 바람에 예정보다 빨리 쳐서 잡음이 많아요.”

“…….”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깔끔했을 텐데.”

고영진이 나를 차갑게 훑어보았다.

“상무님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

“혼자 너무 꽃밭인 거 같아서 좀 아시라고.”

그가 내 손에 들린 케이크를 가리키며 빈정댔다. 칼을 맞았다는 말은 당황스럽지만, 나라고 해 줄 말이 없는 건 아니다. 그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너도 그때 내가 그냥 가길 원했잖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고영진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몇 대 맞았다고 바닥에 누워만 있었잖아. 딱히 쫓아올 생각 안 한 거 모를 줄 알아?”

“…….”

“내가 권이헌 앞에서 사라지길 바라고 보냈으니까, 네 잘못도 아주 없진 않을 텐데.”

“…….”

“그거 권이헌은 모르지?”

“하…….”

“모르겠지. 내가 말 안 했으니까. 넌 당연히 못 할 거고.”

“…….”

“걱정 마. 말할 생각 없어. 여태 안 했는데 이제 와 하겠어?”

입 다물어 줄 때 고마운 줄 알라는 말이다.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열리는 문 쪽으로 눈짓을 하자 고영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올라탔다.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 마.”

“…….”

“말 섞기 싫어. 여기 사람들 다 좆같거든.”

“…….”

“권이헌 빼고.”

버튼에서 손을 떼니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 사이로 노려보는 고영진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타이밍 좋게 이헌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왔어?”

연락하지 않고 온 건데도 그는 당연한 듯 나를 맞이했다.

이헌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잘생겼고, 이마를 깔끔하게 까고, 옷차림이 가볍고, 나를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는 어디를 봐도 칼 맞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고영진이 거짓말을 한 걸까? 잠깐 생각하는데 그가 대뜸 볼에 뽀뽀를 해 왔다. 또 시작이다.

쪽.

“그건 뭐야? 케이크? 연습했어?”

쪽쪽.

“옷 다 젖었네. 사 오라고 할게.”

쪽.

이헌의 어깨 너머로, 사무실 앞에 앉아 있는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경악한 얼굴을 하고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일단 이헌을 떼어 놓고 사무실 안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창문엔 새까만 블라인드가 꼼꼼하게 쳐져 있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나를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데스크 연락받고 꿈꾸는 줄 알았어.”

그가 문을 닫으며 능청을 떨었다.

처음 와 보는 이헌의 사무실은 딱딱한 풍경이었다.

책상과 컴퓨터, 서류, 명패, 접대용 소파, 책장 따위를 적당히 둘러보았다. 책상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는 막 끈 것 같은 꽁초가 희미한 연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걸 봐도 딱히 흡연 욕구가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담배를 찾는 빈도수가 현저히 줄었다. 아마 이헌으로 대체가 되어서이리라.

어쨌든 이만하면 충분히 구경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등 뒤에서 안아 오는 온기가 있었다.

“웬일이야, 우리 예쁜이가 오빠 보러도 다 오고.”

“바빴어?”

“보고 싶었구나.”

“바빴냐고 물었는데.”

“그 안에 담긴 마음까지 들었어.”

“얼마나 바쁘면 자기 생일도 까먹어?”

퉁명스럽게 뱉은 말에 귀를 깨작대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쯧, 혀를 차며 책상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 시간씩 줄 서서 케이크 사 올 때는 언제고.”

“…….”

“거기보다 맛은 없을 거야. 난 재능이 없으니까.”

“…….”

“솔직히 민영이가 많이 도와줬고. 나는 그냥 거든 수준이야.”

“…….”

“그래도 뭐…… 생일인데 케이크는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나는 내 생일이 버림받은 낙인이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의미도 두지 않지만 이헌은 다르다. 2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서 자신의 생일을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에게 의미 있는 날이 분명했다.

대충 장마 기간이고, 언니 기일 전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서 몰래 그의 지갑을 뒤져 면허증을 확인해야 했다. 직접 물어보는 건 낯간지러우니까.

“그래도 이거 글씨는 내가 썼어.”

하얀 크림 위에 시럽으로 간신히 써넣은 문구를 가리키다 한숨을 뱉었다.

고작 이딴 거로 생색을 내고 있네…….

아직 이헌의 돈으로 생활하는 나에겐 다이아 반지 같은 걸 사 줄 능력이 없다.

그나마 챙겨 줄 수 있는 건 케이크를 만드는 것 정도였는데, 내 허접한 실력으로는 한참 부족해 민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거기다가, 나 때문에 일을 그르쳐 칼을 맞게 되었다는 말까지 듣고 나니 내가 아주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대체 이헌은 왜 나에게 잘해 주는 걸까.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방해만 되는 나를. 왜?

초를 툭툭 꽂고, 책상에 놓여 있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이상하리만치 뒤쪽이 조용했다.

혼자 주눅이 들어 있느라 그의 반응까지는 살피지 못했다.

왜 조용하지? 찾아오기만 해도 느물대는 놈이 손수 본인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왔는데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역시 별로인가? 민영이가 많이 도와줘서 겉보기엔 그럴싸한데…… 글씨가 별론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대다 뒤를 돌았다.

“…….”

“…….”

이헌은 벙찐 얼굴로 서 있었다.

당황한 거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난감한 것 같기도 한 기색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과 케이크를 번갈아 오갔다.

“……별로야?”

조그맣게 묻는 말에 그제야 그가 최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글씨 별로야?”

“뭐?”

“나 원래 글씨 잘 못 써. 그래도 읽을 수만 있으면 되잖아.”

“어? 글씨? 글씨가 왜. 예쁘기만 한데.”

“그럼 반응이 왜 그래?”

“음…….”

그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다가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기니 좀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원래는 좀 더 한심하게 능청을 떨어야 하지 않나. 내가 아는 이헌이라면 말이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데, 왠지 이리저리 굴러가는 이헌의 눈동자는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예쁜아.”

“왜.”

“너무 놀랍고, 감동이고, 고마운데.”

“…….”

“내 생일 다음 주야.”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왜, 왜? 왜 다음 주야? 네 면허증에 오늘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거 권민철이 출생 신고 할 때 날짜 대충 써서 그래.”

“…….”

“이번 주 내로 급한 일 마무리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기습 공격 받을 줄은 몰랐네.”

“…….”

“나 진짜 꿈꾸는 거 같은데. 착각 아니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다 초를 훅 불어 껐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불 꺼진 초를 뽑아 상자 안에 던지듯 집어넣는데 이헌이 내 손을 덥석 잡아 왔다.

“왜 그래?”

“…….”

생각해 보니 비닐봉지에 싸여 버려진 그의 생일이 서류에 정확하게 기입되었을 리 없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케이크 만드는 연습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그에게 의미 있는 날을 나에게도 의미 있게 만들고 싶은 욕심에, 내 생각만 하느라 멍청했다.

“나, 난 몰랐어. 당연히 주민 번호가 네 생일인 줄 알았어. 그래 봐야 네 생일 딱 한 번 같이 보낸 거고, 그때는 나도 날짜 개념 없이 그냥 막살 때였으니까, 정확하게 기억 안 났단 말이야.”

“그래, 알아. 근데 왜 그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웅얼대는 나를 그가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았다.

옆으로 피해도 따라붙고, 반대쪽으로 피해도 따라붙는 것에 울컥해 팔을 확 밀어 내는데 문득 그가 몸을 굳히며 뒤로 물러났다.

급히 올려다보니 미세하게 딱딱해진 턱 근육이 보였다. 방금 내 손이 닿았던 오른쪽 팔뚝으로 시선을 내렸다.

“착각한 게 민망해서 그래?”

“…….”

“난 지금 존나 좋은데. 저거 진짜 네가 쓴 거야?”

잠깐의 미묘한 반응이 금방 사라진 그가 웃으며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헌아, 생일 축하해. 이거 진짜 네가 생각하고 쓴 거야?”

“…….”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직접 한 거야?”

“…….”

“진짜, 너 스스로?”

나는 케이크를 들여다보는 이헌의 얼굴을 바라봤다.

“권이헌.”

“응?”

“너 칼 맞았다고 그러던데.”

“…….”

그의 동작이 뚝 멎었다. 다시 몸을 세우고 나를 마주 본 이헌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문득 명치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불안하게 이헌의 얼굴과 팔을 번갈아 보자, 그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그래?”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영진 만났어.”

“…….”

“그거 나 때문이라더라.”

“뭐?”

“내가 작년에 권민철 찾아가서 계획 틀어지는 바람에…… 나 때문에 칼 맞았다던데. 맞아?”

“무슨…….”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 개소리야. 흘려들어.”

“옷 벗어 봐.”

“…….”

“벗어 보라고.”

잠시 말 없던 그가 이내 순순히 재킷 단추를 열었다. 대충 의자에 던져 놓고, 셔츠 단추도 하나씩 푸는 걸 바라보는데 굳이 벗지 않아도 충분했다.

하얀 셔츠의 팔뚝 부분에 새어 나온 붉은 핏자국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히자, 이헌이 짜증스러운 숨을 뱉어 냈다.

“너 때문 아니야.”

“…….”

“설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입술을 꾹 깨물고 그의 셔츠를 직접 벗겼다. 팔뚝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도 붉었다.

잠시 그걸 노려보다 눈을 들자 이헌이 난감한 얼굴로 내 볼을 감쌌다.

“원래 죽이려고 한 놈이었던 거 알잖아.”

“…….”

“조금 빨리 손 봤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거 없어.”

“…….”

“이 정도 상처는 이 바닥에서 흔한 일이고, 별것도 아니야.”

내가 말없이 입술만 잘근대자 그가 다급히 키스를 해 왔다.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부드럽게 풀어 내고 입 안을 핥는 혓바닥은 나를 달래는 듯했다.

잠시 온기를 느끼고 있던 나는 가슴팍을 밀어 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구겨지는 이헌의 얼굴에 약간의 절망감이 감돌았다.

“서하야.”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어…….”

“누가 그래. 아니야.”

“나는 너한테 받기만 하잖아.”

“해 주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다 해 주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나는 생일이라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이런 거밖에 없는데, 이것도 민영이가 다 도와준 거야. 근데 날짜도 틀렸어.”

“그건.”

“나 때문에 넌 칼도 맞았대고.”

젠장, 그가 짓이기듯 중얼거리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나는 그전에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네 생일 케이크는 내가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배우기 시작한 거야.”

“……뭐?”

“잘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

“내년엔 이것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어. 그때는 날짜도 안 헷갈릴 거야.”

“…….”

“칼 맞은 건…… 내 탓이야?”

이헌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바보 같은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도무지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 물었다.

“나 때문이야, 그거?”

“……아니. 네 탓 아니야.”

“그땐 나도 네가 어떤 상황인지 몰랐잖아. 다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나는 스스로 이헌의 품에 안겼다.

“나도 몰랐으니까…… 네 생일에 얽힌 이야기도 몰랐고, 권민철 이야기도 모르고, 난 다 몰랐는데, 그게 내 탓이야?”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 돼?”

“누가 그러래. 하지 마.”

“그래. 사과는 네가 해.”

후욱, 그의 체취를 들이켰다.

“네가 생일 정확하게 알려 준 적 없잖아.”

“맞아. 진작 말할 걸 그랬어. 근데 날짜가 뭐가 중요해. 네가 내 생각 했다는 게 중요하지.”

“그래, 뭐. 그건 너 좋을 대로 생각해. 네 생일이니까.”

좀 더 그를 꽉 안았다.

“그리고…… 다친 것도 네가 사과해.”

“…….”

“너 아픈 거 보니까 기분이 별로야. 내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니까 네가 사과해.”

“지금 그 말은…….”

꿀꺽, 이헌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내가 다쳐서 속상하다는 말이지?”

“…….”

“응?”

“…….”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끄덕였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길 바라며 아주 작게. 그러나 이 눈치 빠른 놈이 모를 리 없다.

그가 냉큼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안심하는 듯하면서도, 기쁘고, 속상하고, 안타까운, 희로애락이 섞인 오묘한 표정이 섹시했다.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이헌이 내 얼굴에 연신 입술을 붙여 대며 거친 숨을 몰아 뱉었다.

쪽쪽대는 걸 고스란히 받고 나니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눈을 마주치기 겸연쩍어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너 그냥 백수 한량 하면 안 돼?”

“그럼 네가 오빠 먹여 살릴 거야?”

“……이 이야기는 자격증 따면 다시 하자.”

하아, 이헌의 입에서 긴장이 풀어진 숨소리가 유독 길게 뱉어졌다.

“십 년 감수했어.”

“뭘?”

“예쁜이 또 승천할까 봐.”

“뭐래…….”

나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기댄 채 피 묻은 붕대를 바라보았다.

“……팔 아프진 않아?”

“좆도 안 아파.”

거짓말.

사실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찌 됐든, 그가 다친 건 내가 자세한 걸 모른 채 권민철을 찾아가 만들어 낸 결과가 맞으니까. 내가 무지해서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하지 않은 인간이 대충 만든 가짜 생일을 축하한 꼴이니까.

하지만 그걸 사과하면, 인정해 버리면, 나는 이헌의 앞에서 더 작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어필을 하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고, 책임을 전가해 나를 포장하고, 죄책감을 덜어 냈다.

착해 빠진 이헌이라면 내가 어떻게 우겨도 받아 줄 걸 아니까 이렇게 염치없이 구는 거겠지. 진짜 뻔뻔한 건 그가 아니라 나다.

“그나저나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글자만 떼서 어디 보관할까?”

“오버하지 마.”

“진심인데.”

“……생일 때마다 써 줄 테니까. 그냥 먹어.”

멋쩍게 던지는 말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플라스틱 칼로 케이크를 푹 떠서 입에 넣은 이헌이 그대로 키스를 해 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넘나드는 케이크는 혀가 아릿할 정도로 달았다.

“으응…….”

그가 하반신을 맞비비며 나를 은근슬쩍 밀었다.

얼떨결에 뒷걸음질 치면서 혀를 섞는데 다리에 뭔가가 닿는 순간 몸이 뒤로 훅 넘어갔다.

당황했지만 이헌이 뒤통수와 등을 받치고 있어서 안정감 있게 소파에 눕혀졌다. 나는 약간 난감한 눈으로 문과 이헌을 번갈아 봤다.

“사무실에서 이래도 돼?”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위에 올라탔다.

“사무실에서 옷 벗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 어때.”

“……그건 다른 장르였어.”

“멜로?”

“아니, 액션.”

“그럼 지금은.”

“뭘 물어.”

버클을 푸는 이헌을 흘겨보았다.

“에로잖아.”

“아닌데.”

이헌이 다시금 내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침이 이렇게 단 건 크림 때문일까?

“로맨스지, 이건.”

슬금슬금 내 티셔츠를 끌어 올리는 그를 약간의 기대와 걱정으로 붙잡았다.

“누가 올지도 모르잖아…….”

“안 와.”

“네가 어떻게 장담해.”

“너 오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한 지 꽤 됐어.”

“…….”

“이제야 와 줬지만.”

쪼잔하게 덧붙이는 말에 샐쭉해져 입을 삐죽였다.

“너 일하는 데 내가 와서 뭐 해. 방해만 되지.”

“어떤 새끼가 그래, 방해된다고? 가뜩이나 통화도 안 해 줘서 속상한데, 어?”

그가 일부러 험악한 척 눈을 부라렸다.

“너 연기에 소질 없어.”

“얼굴이 아깝다, 그치?”

피식 웃으며 눈썹을 만지자 이헌이 내 손에 얼굴을 비벼 왔다. 그 모습이 예뻤다.

“회장이랑 회의하고 있어도 너 오면 쫓아냈을 거야.”

“미쳤어?”

“그만큼 기다렸다는 말이지.”

“지금 왔으면 됐잖아.”

“그러니까. 난 참 운이 좋아.”

그가 넙죽 내 말을 받았다.

“예쁜아, 혀 좀 내밀어 봐.”

“…….”

못 이긴 척 슬그머니 내민 혓바닥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이렇게 단 게 단순히 케이크일까?

* * *

“칼은 내가 맞았는데, 왜 네 대가리가 맛이 갔어.”

어렴풋이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은 들었는데 몸이 축 늘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무거운 눈꺼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있는 것 같았고, 내 몸엔 이헌의 커다란 재킷이 둘러져 있었다. 잠결에 내가 매듭까지 지었을 리는 없으니 이헌이 직접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리라. 머리를 받치고 있는 딱딱한 것은 그의 허벅지였다.

볼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나를 더 나른하게 만들었다.

“네가 안 미쳤으면, 내 애인한테 화풀이를 할 수가 없지.”

가만히 그의 옷 안에 갇혀서 손길을 느끼는데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중인 것 같았다.

그는 조직원들과 통화를 할 때면 묘하게 어투가 거칠어지고, 음색이 사나워진다. 이럴 땐 민영이 왜 그를 무서워하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나도 이헌이 무섭다는 건 아니다. 무서워하기에는 손길이 너무 부드러우니까.

“아가리 그따위로 턴다고 바뀌는 거 있어?”

“…….”

“진짜 일을 그르칠 뻔한 건 너야, 새끼야.”

이헌이 짜증스러운 숨을 뱉었다. 내가 깰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는 게 느껴졌다.

“내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서하 앞에서도 하지 마.”

“…….”

“분명히 말했어. 한 번만 더 오늘 같은 일 내 귀에 들어와 봐.”

전화를 끊었는지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 더 몸을 웅크리며 자는 척을 했다.

그나저나 애인이라니.

되게 자연스러운 걸 보니 그동안 밖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고 다녔나 보다.

같이 살고, 섹스를 하고, 커플링을 끼고, 예뻐하고, 예쁨받는 관계이긴 하지만.

애인이라니.

입술이 꿈틀거렸다.

이헌이 쯧, 혀를 차며 내 볼을 다시 쓸어내렸다.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에 자꾸 입술이 간지러웠다. 다행히 몽롱한 상태라 온몸의 세포가 잠들어 있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따끈한 손바닥을 느끼고 있는 그때였다.

“서하야.”

갑작스러운 부름에 조금 당황했지만, 내가 깬 걸 알고 부르는 건 아니었다.

“윤서하.”

통화할 때와는 달리 나긋한 음색이었다. 난데없이 자는 사람은 왜 자꾸 불러 대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애인이라니.

“오빠, 해 봐.”

“…….”

“이헌아, 불러 보든가.”

‘너 그 상태로 잠꼬대도 해. 언니, 언니 불러 대길래 오빠 부르게 시켜 봤는데 아직 성공은 못 했어.’

진짜 나 몰래 그러고 있었나 보다. 어이가 없다.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나 찾을 때도 됐는데.”

혼자 중얼거린 그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가 하는 짓이 우스운 건 아는 모양이었다.

애인이라니.

“…….”

“…….”

볼을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넘어가 머리카락을 감았다. 헝클어진 부분을 살살 풀어내고, 머리와 관자놀이, 귀를 차례로 쓸어내리는 손길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참 나.

애인이라니.

“……권이헌.”

이헌의 동작이 뚝 멈췄다.

“뭐라고?”

내가 권이헌의 애인이라니.

나한텐 그런 거 강요한 적 없으면서 은근슬쩍.

커플링도 은근슬쩍 끼우더니. 물 흐르듯, 진짜 뻔뻔하기도 하다.

“다시 불러 봐.”

그런데, 뭐. 자연에 순응하는 게 인간의 역할 아닌가.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자연스럽게 나를 제 품에 두는 그에게 군말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다.

“이헌아…….”

“씨발.”

좀 더 솔직해지자면, 순응하고 싶다.

여긴 너무 상쾌하고, 단단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우니까.

“자꾸 부르는 거 보니까 내가 좋나 봐, 응?”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초점을 찾아가며 내려다보고 있는 이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다.

“나 때문에 깼어?”

“권이헌.”

“응.”

“내가 네 애인이야?”

“…….”

그가 엄지로 내 눈두덩을 쓸며 가볍게 혀를 찼다.

“난 또, 드디어 성공했나 했네. 깼으면 말을 하지.”

“내가 네 애인이냐고.”

“싫으면 안 해도 돼. 내가 네 애인 할게.”

그게 그거 아닌가. 어이가 없지만 뻔뻔한 궤변이 귀여워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게 좋았는지 이헌이 내 볼을 살살 쓸었다.

“너 자다 깨면 유난히 따끈한 거 알아? 애기 같…….”

“나 싫다고 안 했는데.”

“…….”

잠깐 말을 멈춘 이헌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좋아?”

그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잠시 이헌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내가 시킨 대로 예쁘게 까고 다니는 이마와 내 앞에서만 느슨해지는 눈매, 나를 보는 다정한 눈빛과 툭하면 내 코에 비벼 대는 곧은 콧날, 뽀뽀를 달고 사는 도톰한 입술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권이헌.”

“응.”

“너…… 예뻐.”

내가 예쁘다는 이헌의 말을 요즘 이해하고 있다. 단순히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낯 뜨겁게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예쁘다는 말을 붙이던 게 진심이라는 걸 실감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가 하는 짓이 다 예뻐 보이니까.

이게 어떤 감정인지는 미리 이헌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조, 좋은가 봐.”

숨을 훅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니었다.

“네 애인 할래.”

“…….”

“너도 해.”

“…….”

“……이제 다시 자야겠어.”

할 말을 끝냈으니 얼른 그의 아랫배에 코를 묻었다.

얼굴부터 귀, 목, 몸까지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장은 아까부터 날뛰었고 숨은 가쁘게 차올랐다.

이런 증상을 달고 산 지는 꽤 되었다. 그런데도 왜 매번 견딜 수 없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그에게 파고드는 그때, 부풀어 오른 사타구니가 볼에 닿았다.

“넌 진짜 시도 때도 없어?”

차마 얼굴은 볼 수가 없어서 질끈 눈을 감은 채 타박하자, 그가 침을 크게 삼키며 내 얼굴을 잡아 돌렸다.

“얘도 감격해서 그래.”

“뭐래…….”

“아, 씨발, 어떡하지.”

“…….”

“너무 좋은데.”

“…….”

“눈 좀 떠 봐.”

“싫어.”

“서하야, 나 봐 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자, 그가 내 손을 잡아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쿵쿵쿵쿵. 거친 뜀박질에 놀라서 절로 눈이 떠졌다.

“오빠 심장 터질 거 같아.”

눈이 마주친 이헌은 또 예쁘게 웃고 있었다.

“너…… 이러다 죽겠다.”

거기다 대고 나는 더듬대며 미운 말을 했다.

“그러니까. 죽겠다. 좋아서.”

느물느물 잘 받아 주니까 버릇이 잘못 들린 게 분명하다.

나는 열 오른 얼굴로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헌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곤 검지와 중지를 왼쪽 손목의 흉터로 가져갔다.

울퉁불퉁한 흉터의 감각에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헌은 내게 흉터 제거 수술을 하자며 몇 번이고 권했지만, 딱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거절했다.

그는 이걸 볼 때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이게 사라진다고 그날이 사라지진 않는다. 이게 있다고 해서 또 그때로 돌아가지도 않고.

이건 그냥 흉터 아닌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장 이헌의 몸만 해도 상처가 수두룩한데 굳이 나만 유난 떨고 싶지 않았다.

“진짜 수술 안 받을 거야?”

“너 바보지.”

난데없는 비난에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나는 좀 더 그의 손가락을 손목에 지그시 눌렀다.

“지금 이깟 흉터가 중요해?”

“그럼 뭐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이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늘따라 얼빠진 얼굴을 많이 보는 것 같다. 귀엽게.

쿵쿵쿵쿵.

내 손목을 타고 흐르는 빠른 심장 박동이 그의 손가락으로 흘러들어 갔다.

“나도 그렇다고.”

“…….”

“그러니까 이제 잘래.”

던지듯 그의 손을 놓아주고 다시 배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는 성기는 무시하고 이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아, 그의 목에서 애끓는 소리가 진동했다.

“넌 진짜 한 치 앞도 예상이 안 된다.”

“거짓말하지 마. 너 모르는 거 없잖아.”

“그게 내 꿈이야.”

“…….”

“너에 대해서 전부 아는 거.”

“뭐래…….”

수줍게 타박하며 얼굴을 더 깊이 묻자, 이헌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뒤통수를 가볍게 감쌌다.

“이러고 자면 난 어떡하지?”

“…….”

“자고 일어나면 오빠 죽어 있을 수도 있어.”

“…….”

“혹시 누가 물어보면 좋아서 뒈졌다고 해.”

저놈의 헛소리 진짜. 참지 못한 웃음을 비실 흘리는 순간이었다.

“사랑해, 서하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사랑한다고.”

일순 숨이 턱 하니 막혔다. 귀가 먹먹해지고, 명치가 울렁거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이없게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슬프지 않은데도 말이다.

입술을 짓이겨 물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왜 또 앞서가?”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허리를 더 끌어안자, 이헌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내렸다.

“나, 나는 이제 겨우 좋아한다고 했는데…….”

“응.”

“이것도…… 용기 내서 말한 건데.”

“알아.”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용기도 없는데, 네가 그러면…… 불공평하잖아.”

눈물이 마구잡이로 샘솟았다.

“자꾸 뒤처지면…… 너한테 미안해지는데…….”

슬프진 않지만, 서러운 부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솔직하고, 표현을 잘할 줄 알면 이헌의 마음에 응답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서러웠다.

사랑한다는 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고,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헌에게 그 말을 들어 놓고도 똑같이 되돌려 주지는 못할망정 바보처럼 우나 보다. 너무 낯설기만 해서.

왜 나는 매사에 능숙하지 못할까. 그런 나 자신이 또 싫어지려는 찰나, 그가 속삭였다.

“나는 네 말 한마디에 진화한다니까.”

커다란 손바닥이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천천히 와. 지금 속도도 충분해.”

“…….”

“더 빠르면 오빠 진짜 죽어.”

“…….”

“응?”

“……응.”

세포는 재생되고 성장한다.

찢어진 손목은 아물어 단단한 새살이 돋아났다. 보기에는 흉할지언정 이전보다 더 강력히 나를 지키려고 도톰하게 모였다.

하물며 세포로 이루어진 나 따위가 뭐가 다를까.

나도 찢어져 본 대가로 조금은 성장했다. 그 덕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걸 이헌은 이해해 주었고, 기다려 준다고 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쉬지 않고 관심과 애정을 쏟아 상처를 메꾸어 준 그의 덕이다. 그러니 생색을 내고 사랑을 강요해도 될 텐데, 하여튼 이헌은 착해 빠졌다.

“살면서 이렇게 기분 좋은 생일은 처음이야.”

“오늘 네 생일 아니잖아…….”

“앞으론 오늘도 생일 하지, 뭐. 케이크 두 번 만들어 줘.”

“……알았어. 두 번 해 줄게.”

훌쩍이며 대답하자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애인이 파티셰라니. 내가 운이 좋다, 그치?”

“나 아직 합격 못 해서 아무것도 아니야.”

“누가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데려와.”

“연기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앞으론 연습 시간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좀 더 달라붙었다.

“권이헌.”

“응.”

“아까 그거…… 한 번만 더 말해 보면 안 돼?”

“백 번도 하지.”

“…….”

“사랑해, 예쁜아.”

그는 툭하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짜 운이 좋은 건 나다.

그러니 내 인생에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겠지.

어쩌면 삶은 살아 볼 만한지도 모르겠다.

살아 보니 권이헌 같은 행운을 만난 걸 보면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메아리치는 품속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폐부 가득 그가 차올랐다.

눅눅한 나를 뒤바꾼 상쾌함.

나는 오늘도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권이헌의 품에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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