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비로소 출소를 한 기분이었다.
퇴원을 하고 보니 장마는 끝나 있었고, 세상은 낯설 만큼 보송해진 후였다.
그중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태껏 내가 몸담았던 박하 맨션이었다.
메마른 박하 맨션은 의외로 쨍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 세찬 빗속에서도 건물 옆을 둘러싼 담쟁이덩굴은 꿋꿋하게 버텨 냈다. 붉은 벽돌을 휘감은 초록색 풀이 첫인상과 달리 싱그러워 보여 신기했다.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남자의 차에 올라타 멀어지는 건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갈 곳 없는 내가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준 박하 맨션을 보는 것은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재개발 예정지라 주민들 다 빠져서.”
“여기 네 구역이라며. 그럼 네 땅이야?”
“일부는 그래.”
“그럼 너 부자야?”
어느덧 박하 맨션이 보이지 않게 되어 시선을 떼고 돌아보자, 남자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왜 웃어?”
“귀엽잖아.”
“……그 소리 하지 마. 듣기 거북해.”
“여태 잘 들어 놓고 이제 와서?”
그거야 헛소리로 치부할 때고, 지금은 닭살스러운 눈길이 뒤따라서 몹시도 불편했다.
애꿎은 안전벨트를 죽죽 당기며 창밖만 바라보자 남자가 골목 초입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안타깝게도 여긴 경적을 울려 재촉할 만한 다른 차가 없었다.
“뭐 해. 안 가고.”
의미심장한 공기를 품고 돌아보는 것에 얼른 재촉했지만 커다란 상체가 내 쪽으로 넘어오는 게 더 빨랐다.
코앞에 드리운 잘난 낯짝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 입술을 눌러 대기 시작했다.
쪽. 쪽.
“읏, 하지 마.”
“왜.”
쪽.
“하지 말라고.”
이미 집을 나서기 전에 자기 좋을 대로 실컷 나를 괴롭혔으면서, 진짜 얄밉다.
입원해 있는 동안 갖은 유혹을 해도 흘려 넘긴 남자는 몇 안 되는 내 짐을 챙기기 위해 박하 맨션에 들렀을 때야 드디어 고삐가 풀렸는지 달려들었다. 환자는 안 건드린다는 그의 되도 않는 다짐 때문에 강제로 금욕을 해야 했던 나 역시 욕구가 쌓여 있었던지라, 내심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말도 안 되게 상냥한 섹스로 나를 전혀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 때리지도, 꼬집지도, 깨물지도, 쑤셔 박지도 않고 어찌나 느릿느릿 안을 탐하는지, 속이 타들어 가 죽는 줄 알았다.
쪽. 쪽.
그랬던 주제에 이렇게 간지럽게 굴기까지 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혀를 밀어 넣으려고 쭉 빼는 그때, 남자가 냉큼 발을 뺐다.
“왜 메롱 해?”
“…….”
넣을 곳이 사라져 허공에 내민 혀를 보며 그가 뻔뻔스럽게 조롱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굳어 있는 나를 내버려 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남자는 아주 재밌어 죽겠는지 쪼개기 바빴다.
뒤늦게 혀를 다시 집어넣고 남자를 노려봤다.
“재수 없어.”
“설마. 나처럼 운 좋은 놈이 또 있으려고.”
소매를 걷은 셔츠 아래로 뱀이 얄밉게 꿈틀댔다. 주먹으로 뱀 대가리를 세게 내리쳤지만, 단단한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 주먹만 깨질 듯 아팠다.
“키스 안 해 줘서 삐쳤어?”
무시하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중간중간 귀엽다는 눈으로 돌아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입고 있는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브래지어도 함께.
내가 난데없이 가슴을 까자, 남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벨트를 당겨 가슴 사이를 가로지르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남자가 목울대를 크게 울렸다.
“뭐 하는 거지, 이건.”
“아깐 너만 좋고 끝났잖아. 나도 기분 좋게 해 줘.”
“…….”
“때려.”
“얼씨구.”
그가 손을 뻗어 내 옷과 속옷을 한 번에 잡아 내렸다.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아.”
“때려 줄 거야?”
“아니. 이제 안 때려.”
“왜.”
“다신 네 자해에 동참 안 해.”
병원에서부터 퇴원을 한 지금까지의 남자는 여태 내가 본 모든 모습을 통틀어 제일 짜증 났다.
어찌 됐든, 나는 맞아야 짜릿함을 느끼는데 그는 손목을 그은 뒤로 도무지 내가 원하는 대로 굴지 않았다.
더 짜증 나는 건, 저딴 말을 하는 남자는 나에게 쓸모가 없어진 건데도 버리겠다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는 나였다.
쓸모없다. 버릴 거다. 다른 놈을 데려와라. 맴도는 말은 많았지만 하나도 내뱉지 못한 채 입만 벙긋대는 사이 남자의 차는 커다란 건물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익숙한 곳인 듯 망설임 없이 주차한 그가 뚱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안 맞아도 기분 좋게 해 주잖아.”
“안 좋았어.”
“어? 아까 질질 싸던 건 누구지? 방금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혹시 못 봤어?”
가당치도 않은 연기와 함께 벨트가 풀렸다.
“가자.”
마지못해 문을 열고 내리자 남자가 쇼핑백 하나에 담기는 내 짐을 들고 팔을 벌려 왔다. 이렇게 깨끗하고 넓은 지하 주차장은 처음 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다가 일단 익숙한 남자의 품으로 들어갔다.
“여기 어딘데?”
“우리 신혼집.”
“…….”
가벼운 주둥이를 콱 꼬집어 주었다.
남자의 집은 박하 맨션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커다란 오피스텔이었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자신을 치장하고 왔다고 너스레를 떨며 엘리베이터로 나를 이끌었다. 남자가 가장 꼭대기인 25층 버튼을 누르는 동안, 나는 바깥이 내다보이는 통유리 엘리베이터가 아찔해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냄새만 맡았다.
“비밀번호는 네 생일로 바꿔 둘게. 그게 외우기 쉬울 테니까.”
“알아서 해. 근데 너 이 정도로 부자야?”
25층에 하나뿐인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절로 그 말이 다시 튀어나왔다. 현관문이 민영의 집에 비해 다소 크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안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
긴 통로를 지나 나타난 광활한 거실은 한쪽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불안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자, 남자가 커튼으로 바깥을 가렸다.
“예쁜이 고소 공포증 있나 본데.”
“그런가…….”
늘 바닥에 딱 붙어 살아서 몰랐다. 커튼을 치니 괜찮아지는 걸 보면 남자의 말이 맞는 듯싶다.
“반지하에서 계속 살 걸 그랬나.”
“아니.”
그러기엔 여기가 훨씬 쾌적하다. 집 전체에 감도는 남자의 냄새도 좋고.
그 외에도 방이 여러 개 있고 주방도 넓고, 화장실엔 큰 욕조도 있었다. 내내 민영의 집에서 샤워만 했던지라 욕조를 보니 약간 구미가 당겼다.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는 찰나 남자가 선수 쳤다.
“같이 목욕할까?”
“넌 왜 끼어?”
“그럼 오빠 두고 혼자 하려고 했어?”
“어. 나 혼자 할 거니까 빠져.”
집주인을 밀어 내고 문을 걸어 잠갔다.
똑똑.
“계세요?”
남자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무시하고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화장실을 가로질렀다. 화장실이 민영의 집만 한 것 같다.
따끈하게 목욕을 하고, 선반에 놓여 있는 샤워 가운을 멋대로 입고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남자도 가운 차림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싱크대에서 씻었어?”
그가 소리 내 웃으며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 집에 욕실이 세 개라는 건 그에게 혀가 빨리면서 알게 되었다.
“후으…….”
“입 안이 따끈하네.”
느릿느릿 움직이는 혓바닥 때문에 답답해서 그런 거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남자의 다리 위에 올라타 양 귀를 세게 붙잡았다. 고개를 옆으로 꺾고 게걸스럽게 혀를 움직이며 재촉했지만, 그는 조금도 받아 주지 않고 한가롭게 굴었다.
결국 혼자 혓바닥을 들쑤시며 원맨쇼를 하는 꼴이었는데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서 배 안이 울컥거렸다. 입술을 떼어 내고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가 코를 간지럽게 비벼 댔다.
“네 말대로 나 돈 많아.”
키스나 제대로 할 것이지 웬 자기 자랑인가 싶어 코끝을 깨물었다. 그런 내 행동이 재밌다는 듯 남자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보조개도 파였다.
“너도 알겠지만, 나눠 쓸 가족이 없어서 그런지 나날이 돈은 쌓여만 가는 중이야.”
“어쩌라고.”
“케이크 다시 만들어 볼래?”
“뭐?”
“이제 뭐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집에만 박혀서 살 순 없잖아.”
“…….”
“아니면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원래 하던 섹스.”
이번엔 그가 내 코를 살짝 깨물었다. 아프진 않지만, 한 번도 공격당한 적 없는 부위라 무방비해졌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코를 문지르는데 그가 내 가운 끈을 잡아당겼다. 하얀 천이 벌어지고 창백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만 벗는 것은 불공평하니 나는 남자의 가운을 풀어 헤쳤다.
짙은 색의 몸뚱어리는 많은 상처를 담고 있었다. 그동안 딱히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제야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권민철 사건 때 새로 생긴 것도 있었다.
옆구리에 새로 꿰맨 자국을 힐끔대다 손바닥으로 슬쩍 쓸어 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마음으로 느꼈어.”
“…….”
번죽대는 얼굴을 대충 흘기며 몸을 밀착해 안겼다. 말랑한 내 몸과 탄탄한 남자의 몸이 맞닿으면 형태가 일그러지는 건 나뿐이었다. 대신 형태가 변한 굵은 성기가 엉덩이에 닿았다.
나는 그의 귀 뒤에 얼굴을 묻고 연신 코를 킁킁댔다.
여전히 상쾌한 향은 났다. 아직은 나에게 이것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으응…….”
혀로 목을 할짝대며 몸을 비비적거리니 그가 순순히 목을 대주고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좀 더 꽉 안았으면 좋겠는데 말 그대로 가볍게 감싼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도 온기는 느껴지니까 일단 참는다.
“디저트 가게 할 생각이었다고 했지?”
흥분이 뒤섞인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게 내 줄 테니까 취미 삼아 해 볼래?”
“…….”
“해 보고 하기 싫으면 관둬도 돼.”
비비대는 짓을 멈추자 남자가 욕정이 들끓는 얼굴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
“뭘.”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 주려고 난리냐고.”
“…….”
“그냥 하던 대로 섹스나 잘하지 무슨 가게를 차려 줘. 돈이 남아돌아?”
“돈이야 남아돈다고 했고.”
“그래, 뭐. 돈 많아서 낭비하고 싶은 건 네 사정이니까 그렇다 치는데, 왜 그게 나냐고.”
“…….”
“우리 그냥…… 섹스만 하는 사이잖아.”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새 내 고백은 잊어버린 거야?”
“네가 언제 고백을 했어.”
“했는데. 병원에서.”
“그게 무슨 고백이야. 살인 예고였지.”
남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가까이에 있으니 안면 근육이 움직이는 게 세세하게 들어왔다. 오른쪽 눈썹이 내려가고, 눈도 살짝 작아지고, 턱이 단단해지고 입술이 한쪽만 비틀렸다. 보조개는 파이다 말았다.
“예쁜아.”
“…….”
“너랑 붙어먹다 보니까 오빠가 진짜 초능력이 생겼거든.”
“또 무슨 헛소리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됐어.”
왠지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사리 분별 잘하는 애가 그걸 진짜 살인 예고로 들었을 리는 없는데.”
“…….”
“예쁨받고 살라는 말도 잊었을 것 같지 않고.”
“…….”
“같이 살자는 말에 거절 안 했으니 너도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듯싶고.”
“뭐, 뭐가.”
“그런데도 이렇게 얄밉게 구는 건…….”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쁨받는 게 어색해서 삐죽대는 것밖에 안 되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당황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양쪽 볼에 연이은 입맞춤을 남겼다.
“씨발, 귀여워.”
“읏.”
“이러니까 안 넘어가고 배겨?”
볼을 타고 내려온 입술이 목에도 닿았다. 여기저기 입술로 지분댈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따지고 보면 몸 구석구석 그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간지럽고 배 안이 울렁거려 기분이 이상했다.
버둥거리다 참지 못하고 남자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공격이 멈췄다.
“미안한데, 교도소 생활 6년이면 여기저기서 별소리 다 들어.”
“뭘 들었는데?”
“남자들 머릿속엔 섹스밖에 없고 진심, 사랑 그딴 거 없다고.”
“아아,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당혹감이 가라앉았다.
“네가 딱 그 표본이었어.”
“섹스를 잘해서 그런가.”
“그런데 왜…….”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왜 예뻐하기까지 해?”
“…….”
“난 별로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 네가 나쁜 놈 아니라는 거 알았으니까, 이젠 그냥 하던 대로 같이 자기만 하면 되는데. 같이 살자고 하질 않나, 섹스도 이상하게 하고, 자꾸 그런 눈으로 보고…….”
“…….”
“왜 그러는 거야?”
“…….”
“왜, 왜 나 같은 애한테, 왜…….”
20대의 절반을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온 나는 눅눅한 과거와 캄캄한 미래만 남아 있는 빈털터리에 불과했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 나는 젖어 있고, 보송해진다 해도 내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여기서 조금 건조해질 뿐.
그에 반면 남자는…….
“너는 착하고, 힘도 세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고, 또…….”
“사람을 죽였고, 깡패고.”
“…….”
“자꾸 네가 착하다고 하니까 가끔 내가 진짜 착한가 싶어.”
“착해, 너. 그러니까 가게도 차려 준다고 하지. 나 같은 애한테.”
볼을 만지작대는 손길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가 궁금한 모양인데.”
진짜 초능력이 있나 보다.
잠깐 말없이 내 얼굴 곳곳을 훑어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예쁘잖아.”
“……너 그렇게나 얼굴 밝혀?”
고작 얼굴 때문에 이럴 정도로 멍청한 인간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네가 널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넌 얼굴만 예쁜 게 아니야.”
“…….”
“몸도 예쁘거든.”
“결국 겉모습이네. 손 치워.”
가슴으로 내려온 손을 치워 냈다. 역시 그냥 동물에 불과한 놈이었어. 왠지 짜증이 나 씨근대는데 그가 나를 다시 붙들었다.
“그렇게 삐칠 때도 예쁘고.”
“무슨…….”
“다른 땐 다 새침하게 구는데, 섹스할 땐 솔직한 것도 예뻐. 물론 때려 주진 않을 거지만.”
“…….”
“겁 많아서 툭하면 앵기는 것도 그렇고.”
“…….”
“외로움 많이 타는 거 보면 무작정 옆에 있어 주고 싶어지고.”
“…….”
“손 놓으면 하늘로 승천할 것 같아서 조마조마한데, 이건 천사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열심히 붙들어 볼게.”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천사 소리 누가 했더라.”
다른 의미로 죽고 싶었다.
“그, 그건 나도 세뇌당해서 한 말이야.”
“그래. 그럼 세뇌당한 것도 예쁜 걸로 해.”
“…….”
왠지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는 입술을 잘근대다 허둥대며 남자의 품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허리를 감아 오지만 않았으면.
“어디 가. 이제 시작인데.”
“……졸려. 좀 자야겠어.”
“마침 그 이야기 하려고 했어. 자는 거 예쁘다고.”
“…….”
“처음 빨아 준 날, 너 갑자기 잠드는 바람에 자는 얼굴 구경하느라 라이터 기름 다 썼는데, 몰랐지?”
내가 알게 뭔가. 팔을 풀어내려고 낑낑대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불 말고 자는 것도 애기 같고.”
“…….”
“너 그 상태로 잠꼬대도 해. 언니, 언니 불러 대길래 오빠 부르게 시켜 봤는데 아직 성공은 못 했어.”
“좀…… 놔.”
“그러면서 혼자 울어.”
“……거짓말하지 마.”
“우는 것도 예뻐.”
“…….”
“예쁜데, 안 울었으면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건, 참…… 기분이 묘해.”
“…….”
“나한테도 그런 착한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어.”
남자가 내 몸을 바짝 끌어당기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러다 나까지 천사 되는 거 아닌가 몰라.”
“미쳤어?”
질색하는 내 반응에 그가 작게 웃었다.
“솔직히 나도 평생 나쁜 놈으로 살아서 이런 건 좀 낯선데.”
“…….”
“그냥, 더 이상 네가 우승지 생각하면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쪽.
“혼자 있어도 외로움 안타고, 계속 이렇게 예뻤으면 좋겠다 싶어.”
쪽. 쪽.
“어때?”
“뭐가.”
“이러면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가 좀 설명이 되나.”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어서 한 말이었다. 아직도 나는 왜 내가 남자의 눈에 예뻐 보이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알겠고, 남자의 말을 얼추 이해는 했다. 그 방증으로 온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대도 안 맞고 새빨개진 몸을 가운으로 슬쩍 가려 봤지만, 눈치 빠른 남자는 냉큼 가운을 벗겨 내고 붉은 몸을 감상했다.
“누가 보면 때린 줄 알겠다.”
“……나도 눈 있어. 말하지 마.”
“아, 눈도 예쁘지.”
“그만해라, 이제.”
“모르겠다고 하길래 보충 설명 한 건데.”
얄미운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자 그가 혀로 손금을 죽 핥았다. 뜨끈하고 미끄덩한 살덩이에 손을 유린당하다, 몸을 들어 아래를 맞췄다.
남자가 방심한 사이에 무게를 싣고 확 주저앉으려고 했는데 곧장 엉덩이가 붙잡혔다. 힘으로 내 무게를 이겨 먹은 그가 강제로 천천히 내 몸을 내렸다.
“으응…….”
부드러운 침입에 멍청한 세포들은 나를 보호하기는커녕 좋다고 그를 받아들였다. 순순히 공간을 내어 주고, 따뜻하게 감싸고, 환영하는 것처럼 맞이했다.
겨우 끝까지 품고 주저앉은 나는 가쁜 숨을 뱉으며 남자의 가운을 붙잡았다.
“내가, 내가 움직일래. 넌 가만히 있어.”
“알았어.”
보나 마나 또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게 뻔해서 양발로 남자의 허벅지 옆을 딛고,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 아응!”
나름대로 쾅쾅, 그의 몸짓을 떠올리며 거칠게 움직였다. 엉덩이가 단단한 허벅지에 부딪치며 철썩대는 마찰 소리를 만들어 내고, 젖은 아래가 찌걱거렸다.
“후으…….”
어떻게든 온 무게를 실어서 성기를 박아 넣었지만, 애초에 남자와 나의 힘 차이는 여실했고 그건 삽입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리가 저릿한 탓에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이제…… 네가 해.”
얼굴을 쓰다듬던 남자가 순순히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거칠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몸이 튕겨 올랐다가 반동으로 푹 주저앉을 때마다 쾌감이 일었다.
“흐아, 읏.”
“아무리 봐도 만족하는 거 같은데.”
“더, 더 세게 하면, 읏, 더 만족할 수 있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 이름 불러 봐.”
“으읏, 뭐?”
“내 이름 부르면서 애교 부리면, 혹시 알아? 눈 돌아서 해 달라는 대로 해 줄지.”
“…….”
“너한테 이름 불리면 좀 감격스럽거든. 내가 사람 된 거 같아서.”
“뭐래…….”
잠깐 고민했지만,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게 별 건가. 나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이헌아, 더 세게.”
“…….”
“더 세게 해 줘, 아아, 이헌, 으응!”
푸욱, 박히는 깊이와 힘이 달라졌다. 드나드는 속도도 빨라졌다. 푹, 푹, 오랜만에 안을 거세게 들쑤시는 감각에 몸이 한순간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으……!”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허리가 곡선을 그리며 넘어갔다. 남자는 나를 단단히 붙든 채 좁아진 내벽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느낌으론 안에서 사정을 하고 있는데 삽입은 멈추지 않았다.
천장에 달린 전구를 바라보며 신음하다 다시 내려다봤을 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읏, 아응.”
잔뜩 흥분해 목에 핏대가 선 남자를 보고 있자니, 쾌감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
이름 한번 불러 줬다고 발정 난 거 보니까 왠지 방법을 찾은 기분이다.
“이헌 오빠. 나 엉덩이 때려 줘. 응?”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양을 부리자,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엉덩이를 움켜쥐더니 나를 소파에 냅다 엎드리게 했다. 남자의 소파는 그가 길게 누울 수 있을 만큼 커서 내 몸은 안락하게 담기고도 남았다.
기대하며 엉덩이를 움찔대는데 남자가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내 위에 바짝 붙어 누웠다. 양팔이 그의 팔에 덮이고, 등과 엉덩이, 다리까지 전부 짓눌렸다.
자신의 무게로 나를 깔아뭉갠 남자가 천천히 아래를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누굴 바보로 알아.”
급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볼이 빨렸다.
“아아…….”
그리고 다시 느리게 빠져나간다. 넘어온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사리 분별은 나보다 남자가 더 잘하는 듯싶다.
“너무해…… 흐윽, 또, 또 이렇게…….”
“내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거든.”
“흐으…….”
“안달 나서 우는 게 또 존나 예뻐.”
“안 울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건 장르가 다르지.”
다시 들어오고.
“거긴 멜로.”
느릿느릿 나가고.
“여긴 에로.”
“씨…… 짜증 나.”
울먹이며 남자의 팔을 깨물었다. 뱀의 꼬리쯤 되는 것 같았다. 턱에 힘을 주었지만 딱딱한 팔은 살짝 파인 잇자국만 겨우 남길 수 있었다.
“흐으응…….”
“이상하네. 분명히 되게 좋아하는 거 같은데.”
혼잣말인 척 나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그를 노려보자 이번엔 입술이 빨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고 간신히 혓바닥을 받아 내다 무심코 몸에 힘을 꽉 주었다. 질벽이 움츠러들며 저릿한 쾌감이 일었다. 남자도 느꼈는지 키스를 하다 말고 신음을 뱉었다.
“하, 내 좆 터지면 누구 손해야?”
“……너.”
“그래, 네 손해야.”
“너라고 했어.”
“나라고 들리던데.”
“그럴 거면 제대로 해 주, 흐응!”
그도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그제야 허리를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탄한 가죽 소파가 몸을 받치고 있어서 남자가 내리꽂힐 때마다 자극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비록 맞을 때만큼의 강렬함은 없으나 그래도 굵은 성기가 안을 들락거리면 몸은 필연적으로 달아오른다.
“아으, 좋아, 기분 좋아, 응…….”
“이러면서 투정은.”
“아, 흑!”
손찌검을 바라는 게 죽고 싶은 심리를 반영한 간접적인 자해 행위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더는 그것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남자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원망하면서도 달라붙는 모순을 보이고, 눈치 빠른 남자는 능청으로 받아 준다.
“서하야.”
“흣, 아……!”
“일단은 살아 보자.”
푸욱, 푹.
나를 죽이지 않는 섹스는 아무래도 낯설었다.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고, 쪼개지지 않고, 망가지지 않고, 그냥 쾌감만 번지는 이 감각이 생소했다.
“살다 보면, 또 살아져.”
“아응!”
“나 봐. 어머니 죽고, 아버지란 인간 내 손으로 찔러 죽이고도 멀쩡하게 살아서 떡 치잖아.”
“하으…….”
푸우욱.
“자연에 순응하는 게 동물의 역할이라며.”
“…….”
“그냥 이렇게 만들어진 삶에 순응하고 살아 보자.”
“흣.”
“내가 살 만하게 해 줄게.”
“…….”
“응?”
“으응…….”
“그래. 착하다.”
남자가 내 신음을 냉큼 대답으로 치부했다. 나는 목덜미를 핥아 오는 그를 헐떡이며 돌아봤다.
만약 그가 열렬하게 사랑을 토로하고 애정을 고백했다면, 나는 전혀 믿지 못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상 같은 것에 설레기엔 내 마음은 전혀 예쁘지 못하니까.
‘때 되면 내가 죽여 줄 테니까, 네 목숨 나한테 맡기고 그때까진 마음 편히 살아.’
그러나 남자의 고백은 죽지 말라는 사정이었다.
한평생 죽고 싶었던 나에게,
나를 향해 칼날을 세우고 있던 나에게,
그래서 삶이 눅눅했던 나에게,
살라며, 칼을 가져가고, 상쾌함을 뿌렸다.
“윽.”
꽈아악, 좁아 드는 질벽에 그가 이를 악물고 사정했다. 나 역시 스스로 이끌어 낸 쾌감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와 나의 신음이 번갈아 공기를 맴돌았다.
“권이헌.”
“응.”
평생 품어 온 삶에 대한 회의감이 쉽게 사라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살아 보자.
남자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살아 보자.
살아 보자.
살아 보자.
“권이헌, 너 착해.”
“그래, 알았어. 장마 피해 지역에 기부할게.”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자, 권이헌도 따라 웃었다.
마음에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