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9)

06

남자는 정말로 나를 감금했다.

문을 걸어 잠그거나, 팔다리를 결박하는 물리적인 감금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답답한 기미를 보이면 가슴을 빨았고, 나가자는 말을 하면 아래를 쑤셔 박았고, 심심하다고 하면 엉덩이를 때리는 등, 다른 생각은 조금도 들지 못하게 섹스로 가뒀다.

광합성이 어쩌고 했던 놈답지 않은 이상 행동이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는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떡볶이 먹고 싶어.”

“사 올까?”

“포장 안 된다며.”

“거짓말인 거 알잖아.”

쏴아아-.

장맛비는 멈추지 않았다.

“장마 언제까지래?”

“이제 거의 끝물이긴 한데, 되게 길어지네.”

“그러게.”

“바깥은 난리야.”

“왜?”

“산은 무너지지, 강은 넘치지, 농사는 좆 됐지. 비 때문에 전국이 어수선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모양인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잘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마지막 발악처럼 유난히 사납게 내리치는 빗소리는 파도 소리와 얼추 비슷했다. 멍하니 불투명한 창문을 바라보자, 남자가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후으…….”

“여긴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걱정 안 하는데.”

“다른 생각도 하지 말고.”

“으응, 응.”

“오빠 봐야지.”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쿵쿵, 안을 쑤셔 박을 때마다 남자의 얼굴도 함께 흔들리고, 상쾌한 냄새가 요동쳤다.

“깨물어 줘.”

내 부탁에 그가 이를 세우고 가슴을 깨물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어깨와 팔뚝, 목 따위를 전부 가리켰다. 몸 곳곳에 남자의 잇자국이 남았다.

“엉덩이 때려 줘.”

짜악!

“가슴도.”

짝!

“꼬집어 봐.”

분명 남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산산조각 내 주는데도 이상하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왜일까.

유두를 뭉근하게 비틀며 얼굴에 짧은 입맞춤을 뿌리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자꾸, 간지럽게 구는 걸까. 그의 얼굴을 밀어 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네 친구는 어떻게 됐어?”

“…….”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몸을 더 깊이 내려 왔다. 유난히 진한 향기가 나를 짓눌렀다.

“나 보라니까 다른 놈 이야기를 꺼내네.”

“아읏.”

푸욱, 푹.

그 남자 이야기를 꺼내면 차에서 그랬듯 거칠어질 줄 알았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 네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 주든가.”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푹.

부족해.

“음…… 네 이야기 해 봐.”

“하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내 안에 사정했다.

느리게 성기를 빼낸 남자가 녹아내린 내 몸을 품에 안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작은 소파는 남자의 커다란 몸을 고작 절반밖에 받아 내질 못했다.

나는 남자의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 쾌락의 여운에 잠겨 있었다. 머리가 몽롱했다.

섹스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처음엔 그게 좋아서 시작한 건데, 지금은 모르겠다.

남자는 쓸데없이 다정하게 나를 쓰다듬고, 낯선 감정을 띤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벼운 욕정만 있었던 처음과 달라졌다. 뻔뻔하게도.

아마 그래서 나도 달라진 것 같다.

이건 다 남자 때문이다. 그는 내 기대를 저버렸다.

“내 이야기 듣고 싶어?”

“응.”

“그래. 물어봐.”

“그냥 네가 알아서 주절대. 처음부터.”

새침한 명령에 그가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남자는 잠깐 말을 골랐다. 생각에 잠긴 듯도 했다.

“건물 앞에 쓰레기 쌓인 거 봤지?”

고개를 끄덕였다. 미관을 해치고 악취를 풍기는 박하 맨션 앞 쓰레기 더미.

“시작은 거기.”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남자의 입술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비닐봉지에 버려져 있었다던데.”

“뭐?”

쪽. 쪽. 이마에서 볼로 내려온 입술이 간지럽게 살결을 지분거렸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피하다, 남자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진짜야?”

“응.”

“나도……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는데.”

“…….”

“나는 지하철역에 버려져 있었대. 신문지에 싸서.”

신문지에는 매직으로 내가 태어난 날과 ‘윤서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고 들었다. 버릴 거면 그냥 버리지, 그딴 건 왜 적어 둔 건지 가끔 생모를 찾아 묻고 싶었다.

“우리 닮았네.”

그가 내 손을 잡아 내리고 나를 품에 가득 안았다.

“버려지고, 그다음은?”

“그러다 누가 주워 가서 길렀고, 지금은 이렇게 장성했지, 뭐.”

“…….”

“예쁜이도 만나고.”

“…….”

“그 외엔 딱히 특별한 거 없어.”

30년의 인생을 뭉그러트리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내가 널 이렇게 한심한 놈으로 키웠던가.’

“20대 초반엔 뭐 하고 살았는데?”

“그땐 거의 중국에 있었어.”

“몇 살 때까지?”

“스물넷.”

“그 뒤론 한국에 들어온 거야?”

“응.”

남자는 6년 전에 한국에 있었다.

“내가 사람 찔렀을 때네.”

“…….”

“그때도 장마 길었는데, 기억나? 올해만큼 길었잖아.”

“그땐 이렇게 비가 오래 오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히려 가물었지.”

“그랬나.”

모르는 척 떠보는 물음에 남자는 직접 겪은 듯 말했다. 장마 기간에 한국에 있었던 거다.

언니는 6년 전 장마 기간에 죽었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를 두른 뱀을 풀어냈다.

“떡볶이 좀 사 와. 배고파.”

“진짜 먹고 싶은 모양이네, 계속 말하는 거 보면. 웬일이야?”

“그리고 향수도 좀 사 와. 이젠.”

“…….”

“내가 진짜 많이 봐주고 있는 거 알지?”

그가 떨떠름하게 제 입술을 혀로 핥으며 몸을 세웠다.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하지.”

쪼옥, 진득하게 입술을 빨아들인 그가 나를 소파에 눕혀 두고 혼자 몸을 일으켰다.

“얌전히 있을 수 있어?”

“내가 무슨 망아지야?”

“이렇게 예쁜 망아지가 어디 있어.”

“됐고. 그때 그 케이크도 사 와.”

바닥에 나뒹구는 옷을 주워 입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하고 싶은 거 있다고 했잖아.”

“…….”

“궁금해.”

그의 얼굴에 음흉한 기색이 떠올랐다. 뭔가를 상상하는 듯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특히 유두를 집요하게 바라보면서.

일부러 양 손바닥으로 가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바지 버클을 마저 채웠다. 셔츠를 챙겨 입고 재킷까지 걸치려고 할 때 저지했다.

“겉옷은 나 줘. 입고 있을래.”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리네, 착각일까?”

“좋을 대로 생각해.”

아아, 그가 목을 울리며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난데. 심부름 좀 해라.”

얼른 일어나 휴대폰을 빼앗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저번의 그 후드였다.

남자는 나를 가두는 만큼 자신도 민영의 집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전엔 내가 자다 일어나면 남자는 가고 없었는데, 요즘은 잠결에도 그의 기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게 있으면 늘 후드에게 가져오라 시켰다.

주로 남자와 내가 먹을 음식, 남자의 슈트를 가져다줄 때마다 후드는 어딘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곤 했다.

연락하면 바로 오는 걸로 봐선, 4층에서 늘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감시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요즘 남자는 집요하게 나를 집밖에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지레짐작했다.

곧장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폰을 등 뒤로 숨겼다.

“네가 직접 가. 왜 툭하면 심부름을 시켜. 얘가 네 부하라도 돼?”

“친한 동생이라니까.”

웃기고 있네. 마음속으로 조소했다.

“껍데기보단 본체랑 같이 있는 게 좋을 텐데.”

“나도 좀 쉬자. 이 짐승 새끼야.”

“…….”

“잘 거니까, 그사이에 다녀오라고.”

“자는 거 보고 있지, 뭐.”

“보기만 할 거 아니잖아.”

“그거야 상황 봐서.”

“너 요즘 좀 미친놈 같아. 원래도 밝혔지만 바다 다녀온 뒤로 더 심해.”

“…….”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그와 붙어 있으면 할 거라곤 섹스, 혹은 헛소리를 들어 주는 것밖에 없는데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 도저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나머지 나는 얼굴도 퀭하고, 기력도 없고, 머리도 몽롱했다.

이건 내가 원하는 망가짐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흐물흐물해져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조각나는 걸 원한 거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자신의 재킷을 입혀 주었다.

“불안해서 그래.”

“뭐가?”

“예쁜이 승천할까 봐.”

“무슨 헛소리야.”

“그런 게 있어. 왜. 오빠랑 떡 치는 거 싫어?”

“…….”

“아닐 텐데.”

장난스레 웃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불안하다, 라. 짐승 새끼라 그런지 감이 좋은 모양이다.

나는 모르는 척 덤덤한 얼굴로 남자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빨리 다녀와. 그래 봤자, 한두 시간밖에 안 걸리잖아.”

“…….”

“네가 힘 다 빼 놔서 꼼짝도 못 하겠어. 잘래.”

거짓 하품을 뱉자 남자가 따라 했다. 애초에 나는 가짜였으니 연쇄는 없었다.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응.”

그가 사 준 내 휴대폰을 챙겨 침실로 들어갔다. 이불을 말고 눕자, 남자가 넌지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얌전히 자고 있어.”

“알았다니까.”

졸음 섞인 대답에 그제야 그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나갔다.

“…….”

남자의 재킷에 코를 묻고 숨죽이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잠깐 귀를 기울였다.

저번에 나가는 척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도 모자라다. 이불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밖을 내다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민영의 속옷이 아닌 내가 처음 입고 왔던 걸 찾아 입고, 옷도 원래 내 것으로 입었다. 잠깐 고민하다 남자의 재킷도 걸쳤다. 이건 그냥, 좋은 냄새가 나니까.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도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증상이었다.

“…….”

밋밋한 휴대폰에는 남자의 번호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저장된 것이 없다. 그러나 머릿속에 자리한 번호는 있었다.

천천히 숫자를 눌렀다.

공일공.

‘사사사사. 사사사사. 응. 꺼지라는 소리야.’

언젠가 남자가 던진 헛소리가 잠깐 떠올랐지만 무시하고 손가락을 제대로 놀렸다.

―여보세요?

“저예요.”

―…….

휴대폰 너머로 눅눅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왔다는 말은 들었다.

“원장님.”

―그래. 서하야.

“어디 계세요?”

―그건 왜 묻니.

“죽이고 싶어서요.”

하하하, 권민철이 나를 비웃었다.

* * *

쏴아-.

출소할 때 들고 왔던 우산을 펼치자마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후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도 그는 옷에 딸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뭐야. 왜 나왔어.”

내 예상대로 감시가 맞는 모양이다. 난데없이 바깥에 나온 나를 짜증스레 노려보는 걸 보면.

“어디 가? 이사님이 부른 거야?”

“알아서 뭐 하게.”

“기다려. 확인부터 하고.”

그가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기에 고개를 저었다.

“부른 거 아니고. 튀려는 거야.”

“뭐?”

“걔 오면, 그냥 도망갔다고 해.”

“미쳤냐? 들어가.”

무시하고 걸음을 떼자 거친 발소리와 함께 후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남자들 사이에선 비 맞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 쫄딱 젖은 꼴이 우스웠다.

“가뜩이나 좆같은데 불 지피지 말고 얌전히 들어가.”

“뭐라는 건지.”

“야. 씨발, 나라고 좋아서 너 보호하는 줄 알아?”

“보호?”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뭐가 위험해서 나를 보호해?”

“들어가라고.”

“웃기고들 있다.”

옆으로 지나치려고 했지만, 다시 앞이 가로막혔다.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뱉어 낸 후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이사님 앞에서 너 치우고 싶어.”

“…….”

“요즘 이사님이 너 때문에, 씨발, 이렇게 정신 팔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 말 이사님이 들으면 되게 서운해하겠다. 걔는 너 친한 동생이라던데.”

“이게, 진짜.”

“원하는 대로 사라져 줄게.”

“…….”

“그러니까 모른 척해.”

“무슨…….”

끼익-.

내 말에 후드가 동요하는 그때, 차 한 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빗소리에 묻혀 오는 줄 몰랐던 건지 후드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차에서 새까만 슈트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내렸다. 그들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진짜 유행인가. 심드렁하게 생각하는데, 후드가 정말로 나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앞에 섰다.

“뭐야, 너희.”

퍼억!

두 사람이 동시에 후드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나 깡패들에게 맞는 깡패를 내려다보았다.

“핑계 대.”

“으윽!”

“보호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깡패들이 쳐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놓쳤다고.”

“무슨, 씹! 윽!”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된 후드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쓰레기 더미에 우산을 버리고 차에 올라타자, 후드를 패던 남자들도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으로 들어왔다.

나는 창문 너머로 후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야, 이 미친년아!”

행인의 우산과 민영의 집.

내가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준 것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천천히 차가 출발했다.

* * *

‘파라다이스’.

처음 방문하는 술집은 의외로 겉만 봤을 땐 멀쩡해 보였다.

세련된 간판은 물론이거니와, 입구에는 핀 조명이 있어서 정말로 천국으로 발을 들이는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순결해 보이는 하얀 벽을 비웃으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로 문지기처럼 서서 나를 감시하는 남자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입구 문을 열자마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이마에 붕대를 두르고 목발을 짚고 서 있는, 내 뺨을 때렸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곤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씨발, 네년 때문에!”

“권민철 어디 있어?”

씩씩대던 놈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제 발로 온대서 미친년인 줄은 알았지만, 또라이네 이거. 상무님이 네 친구냐?”

“…….”

“하긴, 얼굴이랑 몸이 먹어 줄 만하니까 대가리는 좀 나빠도 되지, 뭐.”

그가 험악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넌 내가 제일 먼저 따먹는다.”

“제일 먼저는 아니지. 권 이사가 실컷 따먹은 후인데.”

“이거 대가리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뒤쪽을 향해 씨근대는 말에 돌아보니 비슷한 인상의 남자들 대여섯 명이 바에 모여 있었다. 손님은 아닌 듯싶다.

“나 패려고 모였어?”

“널 왜 패. 돌려 먹기도 바쁠 텐데.”

저속하게 낄낄대는 남자들을 대충 훑어보곤 목발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권민철 어디 있는데.”

그가 어딘가로 턱짓을 했다. 술집의 가장 구석진 방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로 발을 옮겼다. 허전한 홀 안엔 감미로운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같잖다. 이러면 뭐라도 있어 보이는 줄 아나. 비웃으며 목적지에 다다르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

“…….”

권민철은 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보다 많이 늙었고 머리도 하얗게 셌지만, 여전히 다부진 몸과 냉랭한 눈빛 따위가 70대로 보이지 않는 위압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았다.

“더 예뻐졌구나.”

“…….”

“앉으렴.”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시키는 대로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디귿자로 방을 둘러싼 긴 소파의 중앙에는 권민철이, 나는 그의 오른편 날개 끝자리였다.

“그래, 그동안 권 이사랑 좋은 시간 보냈고?”

“나쁘지 않았어요.”

“그랬겠지. 그러니 그놈이 정신을 못 차리겠지.”

“…….”

“그렇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새 많이 헤퍼졌나 보구나.”

권민철의 눈동자가 내 몸을 훑어 내렸다. 여전하구나 싶어 웃기지도 않았다.

“옷은 그게 뭐니?”

그가 남자의 재킷을 가리키며 물었다.

“알 거 없잖아요.”

“그래도 제법 쓸 만해졌어.”

“…….”

“남자를 너무 모르면 안 팔리거든.”

“…….”

“승지가 그래서 많이 맞았다.”

쩌어억-. 쪼개진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이 자꾸 싸고돌아서 짜증 나던 참인데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맙다.”

“네, 뭐.”

“그런데 죽이겠다더니, 맨손으로 온 거야?”

“…….”

“예전엔 칼 쥐는 호기라도 있더니.”

“아닌 거 아시잖아요. 제가 무슨 수로 원장님을 죽여요. 한 번 실패했는데.”

“그 원장 소리는 그만해도 될 것 같구나. 보육원 없앤 지도 꽤 됐고.”

“왜요? 쓸 만한 여자들이 없었어요?”

권민철이 날카롭게 나를 돌아봤다.

“하마터면 네년 때문에 다 들킬 뻔해서 급히 처분했잖니.”

“그랬구나. 그럼 요즘은 여자들 어디서 조달해요?”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넌 그저 네 몸뚱어리로 승지 몫까지 열심히 다리 벌리면 된다.”

“…….”

“권 이사가 어떻게 길들여 놨는지 맛이나 볼까?”

그가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리 와.”

“…….”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권민철이 미간을 구겼다.

“하는 짓이 승지랑 똑같구나. 피도 안 섞인 것들이.”

쩌어어억-. 또 쪼개진다.

“승지는 일주일 걸렸는데, 넌 얼마나 걸리려나.”

“…….”

콰앙! 그가 발로 중앙 테이블을 거칠게 밀었다. 쓰러진 테이블을 밟고 다가온 권민철이 곧장 내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짝! 짜악! 짜아악! 연이은 손찌검에 몸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율 보육원 원장 권민철에 대해 고발합니다.]

언니는 자살하면서 자신이 겪은 일을 수기로 작성한 고발서를 남겼다.

그녀의 시체를 발견한 것도, 종이를 발견한 것도 내가 처음이었다.

[원장 권민철은 폭력 조직 태각 그룹의 임원입니다. 보육원은 조직의 자금 세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는 일부 원생들을 조직에서 운영하는 성매매 업소로 빼돌리는 등의 범죄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저 또한 그 피해자로…….]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럼 나는 다른 말을 했을 텐데.

안아 줬을 텐데.

같이 울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짜악! 짝!

맞으니까 좀 살 것 같다.

죽을 것 같아서 살 것 같다.

더. 더.

망가져도 된다.

망가져야 한다.

나 같은 건.

죽어야 하니까.

“씨발년. 내가 네년 때문에 이 나이에 눈칫밥 먹은 거 생각하면!”

퍽!

나는 언니의 유서를 곧바로 경찰서에 제출했다. 그것을 필두로 경찰은 조직을 조사하는 듯했으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건은 종결되었다.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찾아갔을 때 경찰들은 나를 외면했다. 경찰서 안에서 서장과 하하 호호 떠드는 권민철을 발견하고 상황 파악은 금방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죽어!’

고작해야 발악 정도.

짜악!

‘나 박하 맨션으로 보낸 거, 혹시 그 사람이 시킨 거야?’

‘…….’

‘말해 줘. 알고 싶어서 그래.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할게.’

‘서하야…….’

‘민영아, 부탁해. 난 아무것도 몰라. 가르쳐 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

‘…….’

‘제발.’

‘……그, 그렇게 해 주면, 내 이름으로 잡힌 빚 없애 준다고 해서…….’

‘그럼 도둑질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 그냥 나 유인하려고 들어온 거야?’

‘미안해, 서하야. 나는, 나는 지금 내 삶이 너무 끔찍했어.’

‘탓하려고 온 거 아니라니까. 정말이야. 잘했어. 빚 많다며. 해결해서 다행이야.’

‘…….’

‘그런데 왜 그랬을까?’

‘…….’

‘그냥 출소하자마자 잡아가도 될 텐데, 그 사람은 왜 너를 이용하기까지 해서 나를 유인했을까? 그럴 필요가 있어?’

“내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나오자마자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는데!”

퍼억!

‘이건…… 나도 권 이사 부하들 접대하다 들은 건데.’

콰앙!

강한 타격음이 머리를 울렸다. 나를 때린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쓰러져 기운 시야에 덜렁거리는 문짝이 들어 왔다.

그 너머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반으로 부러진 우산을 들고 있는 내가 아는 옆집 남자.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이마에서 핏물이 흘렀다. 내 얼굴도 별반 다를 건 없을 거다. 입 안이 비릿한 걸 보면.

‘권 이사 어머니도 나율 보육원 출신이래.’

‘뭐?’

‘박하동이 옛날에 유명한 사창가였던 거 알아? 그때부터 권 상무가 원생들 사창가에 빼돌렸는데, 그중 하나가 권 이사 어머니였어.’

‘…….’

‘너희 언니가 고발한 편지 있잖아. 권 이사가 그거 보고 자기 어머니가 겪은 일 알게 된 모양이야.’

‘그래서?’

‘그래서 권 이사가 이 갈고 권 상무 칠 생각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몇 년 동안 권 상무 밑에 있던 애들 권 이사 쪽으로 많이 옮겼는데, 보통 세력 키울 때 그렇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넌 그냥…… 권 상무 긁으려고 빼돌린 거 아닐까.’

‘…….’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해. 다 주워들은 거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랑 친해져서, 너를 내 집에 보내는 것뿐이어서…….’

‘…….’

‘그래도 서하야, 시작은 그랬지만 나는 진심으로 네가 좋았어.’

퍽!

남자가 집어 던진 우산이 권민철의 이마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아까 버리고 온 그 장우산의 절반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먹먹하던 귓구멍이 뻥 뚫렸다. 동시에 룸 밖에서 온갖 비명과 고함, 타격음과 욕설이 들렸다. 남자의 커다란 실루엣 때문에 그 뒤가 보이지는 않았다.

“너 이 새끼! 지금…… 이게 다…….”

남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내 멱살을 붙잡고 옷을 벗기려 드는 권민철에게로.

퍼억!

“윽!”

머리를 걷어차인 권민철이 옆으로 크게 구르며 넘어갔다. 찢어진 티셔츠를 멍하니 내려다보는데 머리 위로 재킷이 떨어졌다. 내가 입고 온 남자의 재킷이었다. 언제 벗겨진 건지는 모르겠다.

퍼억! 퍽!

잠깐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도 타격음은 이어졌다.

“네가 감히!”

더듬더듬 옷을 치워 내고 바라본 곳엔 권민철을 깔아 눕힌 남자가 빵칼을 들고 있었다.

내가 찔렀을 때는 쇠로 된 날카로운 칼이었지만,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케이크용 플라스틱 칼이었다. 그런데도 권민철은 저것을 더 위협적으로 느끼는지 혈안이 되어 있었다. 6년 전엔 나를 비웃었는데.

“네가 감히, 나한테 그딴 걸 겨눠?”

“…….”

“내가 여태 너 먹이고 키웠어, 새끼야!”

“…….”

“여기까지 오게 거둬 준 것도 나라고! 나 네 아버지야!”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예쁜아.”

찢어진 소매 안으로 힘줄이 선 뱀이 보였다.

“복수하자.”

원장의 지독한 생존 본능을 실감했을 때 나는 내가 그것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무시하고 사람을 죽이려면 아주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에게는 더 이상 그럴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그럴 에너지가 충분했다.

남자가 지닌, 자연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생명력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거 놔! 아무나 이 새끼 좀 잡아 봐!”

권민철이 바깥을 향해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힘 필요하면 말해. 빌려줄게.’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줘.”

“…….”

“나는 그럴 힘이 없어.”

푸욱.

곧장 늙은 목덜미에 빵칼이 처박혔다.

“아악!”

권민철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몸뚱어리는 발악하며 뒤틀렸고, 비명 소리는 고약했다.

힘이 센 남자는 흔들림 없이 권민철을 짓눌렀다.

목 안에서 플라스틱을 비틀던 그가 부러진 조각을 뒤로 집어 던졌다. 그것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 앞에 떨어졌다.

손이 저절로 뻗어 나갔다. 플라스틱 조각을 손안에 움켜쥐고, 남자의 재킷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상쾌함과 비릿함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짜냈다.

쩌어억-. 쩍-. 쩌어어억-.

여러 날에 걸쳐 쪼개지던 것들은 결국 나의 세포들이었나 보다.

나를 살리고자 했던 그것들이 드디어 쪼개져서. 망가져서.

마침내.

푸욱.

죽일 수 있었다.

그 순간 재킷이 걷어졌다.

“너……!”

피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윤서하!”

다급히 나를 끌어안는 그를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나 같은 건.

죽어야 하니까.

* * *

나는 언제나 죽고 싶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동생이 태어나 양부모의 외면을 받을 때도, 여행인 줄 알고 따라가 파양을 당할 때도, 언니가 사라졌을 때도, 돌아왔을 때도, 죽었을 때도, 죽이려고 했을 때도, 법정에 섰을 때도, 교도소에 갔을 때도, 출소를 했을 때도, 섹스를 할 때도.

간혹 그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도 있었다. 이를테면 언니와 케이크를 만들 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언니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그리고 웃기게도 하나가 더 있었다.

남자의 냄새를 맡을 때.

남자는 상쾌했다.

나는 그의 냄새가 좋았다.

그의 목에 코를 묻고 있으면, 나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나는, 무의식중에 그것이 나의 피비린내를 씻어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끊임없이 죽이는 이 관념의 피비린내.

그것 역시 지독한 생존 본능이, 나를 살리려고 무던히 향을 끌어안은 것 아닐까.

남자는 신기한 존재였다.

생존 본능을 뚫고 죽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힘과 생존 본능을 활성화하는 상쾌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아…….”

눈이 떠졌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 죽었네, 였다. 아쉬움인지 안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그 모순을 품은 남자가 앉아 있는 탓이었다.

“…….”

“…….”

남자는 예의 그 고요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머리맡의 링거액과 내부의 풍경으로 말미암아 병원이라는 건 짐작했다. 1인용 병실인지 침대는 내 것뿐이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다 내려다본 왼쪽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나…… 왜 여기 있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굳이 가다듬진 않았다.

“네가 데려온 거야?”

“…….”

“왜 데려왔어?”

“…….”

“나도 거기서 그냥 죽게 놔두지 왜 데려왔어?”

굳어 있던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지금 그걸…….”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말이라고 해?”

유달리 거친 목소리는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억누른 것이라면 나도 못지않았다.

답답한 숨을 뱉었다. 왜 나는 늘 죽이는 데 실패만 할까. 6년 전도, 지금도. 한 번은 성공해도 될 텐데.

“섹스 못 할까 봐 그래?”

“…….”

“하긴, 남자들은 섹스가 전부니까 그럴 수 있지. 너처럼 발정 난 새끼는 나처럼 쉽게 따먹을 수 있는 애가 죽으면 아쉽겠지.”

“뭐?”

“근데 너 잘생겼다니까. 나 말고도 기회 많을 텐데 뭐 하러 나를 살려.”

“하…….”

“왜 살려. 왜.”

“…….”

“왜 그딴 거 때문에 나를 살려!”

까득, 이를 악문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닦아 낸다고 닦아 낸 모양인데 원래 그런 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도 겪어 봐서 안다.

“윤서하.”

“…….”

“너 무슨 배짱으로 권민철 찾아갔어?”

“…….”

“네가 먼저 연락했다던데.”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거길 제 발로 기어들어 가?”

화를 품고 있지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억지로 누그러뜨린 목소리와 어투, 서늘한 표정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역시 복수가 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딴, 배짱부렸어?”

피식, 웃음이 흘렀다.

“내가 찌른 게 권민철인 것도 알고 있네.”

“…….”

“스무 살 때 그런 거, 칼로 찌른 거, 그거 내가 섹스하면서 말해 준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비꼬는 말에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긴, 이 상황에 숨길 생각도 없으리라.

“그래. 상관없어. 이제 와서 그딴 게 뭐가 중요해.”

“…….”

“사실 거짓말이었어. 나 복수한 거 아니야.”

“…….”

“보호한 거야.”

“…….”

“언니 다음은 나였거든.”

“뭐?”

“그날 권민철이 나 찾아와서 강간하려고 하길래 그냥 칼로 찌르고 자수했어.”

남자의 눈이 구겨졌다.

“나는 복수를 할 만큼 강하지 않아. 간신히 보호만 하는 수준이지.”

“…….”

“누구나 생존 본능은 있잖아. 나도 있어. 그냥 누구나 가지고 있는 딱 그 정도.”

“하…….”

“난 감옥으로 도망간 거야. 권민철이 거긴 못 찾아올 테니까.”

이 말은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정당방위 처리될까 봐 변호사에게도 입을 다물었고, 교도소 사람들에게도, 하다못해 민영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걸 왜 지금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 권민철을 찔러 줘서?

그렇다 한들 그가 권민철과 다를 게 뭐 있다고.

“씨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말하면?”

“더 고통스럽게 죽였겠지.”

“너 웃긴다.”

“뭐?”

“네가 권민철이랑 다를 게 뭐야?”

손가락 사이로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착한 척 사람 꼬셔서 좆 물린 새끼가, 나 강간하려고 달려든 놈이랑 뭐가 다르냐고.”

“…….”

“그래, 뭐. 나도 너랑 떡 치는 거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건 원망 안 할게. 나도 나 좋자고 너 이용한 거니까.”

“…….”

“근데 생색은 내지 마.”

“…….”

“너도 어차피 네 목적으로 권민철 죽인 거면서 왜 나 위해서 그런 척해?”

“…….”

“너 키워 준 아버지라서, 죄책감 들어서 내 핑계 대는 거야?”

남자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어이없게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대충 다 알아.”

“그러니까 뭐.”

“네 엄마가 우리 언니 꼴 난 것도 알고.”

“…….”

“그래서 권민철한테 복수하려고 칼 갈고 있었던 거.”

“…….”

“네가 권민철 열받게 하려고 민영이랑 짜고서 나 빼돌린 거랑 박하 맨션, 그 구린 건물에 처박아 놓고 씹질하면서 시간 끈 거.”

“…….”

“나 쓸 만하게 만들어서 팔아넘기려고 한 거.”

“무슨…….”

“그때까지 나 가지고 권민철 자극하고, 네 욕구 풀고, 실컷 이용해 먹고 나서 버릴 생각이었잖아.”

“윤서하.”

“어차피 그럴 거였으면서, 내 발로 직접 가 줬는데 난 왜 데리고 나와? 그냥 나도 거기 시체들 틈에 썩게 놔두지. 왜?”

주먹을 쥐고 싶은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손가락만 겨우 꿈틀댔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접근한 주제에, 무슨 나를 위해서 죽인 것처럼 생색이야.”

“…….”

“꺼져. 미친놈아. 너 때문에 강제로 살아나서 기분 엿 같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침대 바로 옆에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복수하려고 간 게 아니고, 죽으러 갔구나, 너.”

“그래, 맞아. 죽으러 간 거야.”

“…….”

“내가 너랑 왜 잔 줄 알아?”

“…….”

“너랑 그러고 있으면 내가 망가지는 거 같아서 좋았어.”

“뭐?”

“아니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놈 좆을 왜 빨아?”

“하…….”

“탓하는 거 아니야. 네가 먼저 발정 나 준 덕에 막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하는 거지.”

그가 잇새로 욕을 씹었다.

“근데 너 요새 멍청하게 굴었잖아.”

“…….”

“자꾸 다정한 척하고, 툭하면 뽀뽀하고, 이상한 눈으로 보고, 안 아프게 때리려고 애쓰고…….”

“…….”

“쓸모없이 굴었잖아!”

숨이 가쁘게 뱉어졌다.

“그래서 너 버리고 나 망가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찾아갔어. 생각나는 게 권민철밖에 없었거든. 됐어?”

불시에 그가 내 위를 뒤덮었다. 멋대로 키스를 하는 남자를 밀어 내고 싶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입 안으로 침투하는 혓바닥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번져도 남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입 안을 헤집어 댔다.

“읏, 꺼져!”

안간힘을 써서 이마를 부딪쳤지만 그 역시 무시당했다.

“윽…….”

아예 턱을 잡아 벌리고 게걸스럽게 입 안을 탐하던 남자는 내 목에서 이상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나서야 하던 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으윽…….”

목구멍이 콱 막힌 것 같았다. 남자의 피가 넘어와 핏덩이로 뭉쳐진 걸까.

“으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배 안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고,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아 너무나도 불쾌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안면 근육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구겨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나도 나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혹시 너도 우리 언니 죽는 데 가담했어?”

“…….”

“너도 권민철처럼 언니 다음이 나야? 어?”

남자는 코앞에서 이상해지는 나를 목격하고 있었다.

“담배 달라고 말을 걸지 말 걸 그랬어.”

“…….”

“주는 대로 받아먹지 말았어야 했어.”

“…….”

“좆 빨라는 소리도…… 붙어먹자는 말도, 전부…… 흐윽, 전부 거절할걸.”

남자는 내 과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불편한 기억과 분리되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내 삶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과 닿아 있었다. 만약 그가 언니의 죽음으로 엮인 놈인 줄 알았으면, 내 삶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

“괜히 들였어. 괜히 문 열었어.”

“…….”

“그냥 혼자, 혼자 그러다 죽었어야 되는데…….”

억눌린 숨이 핏덩이와 함께 토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파양을 당해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도 나는 이렇게 울지 않았다. 언니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울지 못했다. 항상 무언가가 나를 옥죄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 감정을 터트린 것은 권민철을 찔렀을 때가 유일했다.

그때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발악했다. 내 옷을 벗기려 드는 거친 손바닥이 무서워서, 살아야겠다고, 나의 세포들이, 살아야 한다고, 칼을 쥐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럴까. 왜 감정이 사방팔방 날뛸까.

살고 싶어 했던 그 날처럼. 왜.

“너 애초에 꿍꿍이 가지고 나한테 접근한 거잖아.”

“…….”

“그래서 너 엿 먹이려고 간 거야. 너랑 권민철 사이 안 좋으니까, 엿 먹으라고.”

“…….”

“나만 당할 수는 없잖아. 나만, 나만 기분 잡치는 건 불공평하니까.”

“…….”

“나쁜 새끼. 착한 척해 놓고. 그거 싹 다 연기였지, 너.”

“…….”

“그래 놓고 뻔뻔하게, 왜 사람을 그딴 눈으로 봐?”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뱉어지는 대로 내뱉으며 추하게 소리 내 우는데, 가만히 있던 남자가 내 혼란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나한테 배신감 느꼈어?”

“뭐?”

“나한테 배신감 느껴서, 자포자기하고 죽겠다고 권민철 찾아간 거야?”

“…….”

그렇게 말하니까 그가 나한테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동작에 가속이 붙어 어느 순간부터는 안간힘을 써서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아니.”

“…….”

“나는, 나는 원래 죽고 싶었어.”

“…….”

“항상 죽고 싶었어. 배신감을 왜 느껴? 네가 나한테 뭐라고.”

“…….”

“너는 그냥 착하고, 힘이 세고, 냄새가 좋고…….”

도중에 흐느낌이 터졌다.

“그, 그나마 네 냄새 맡으면 좀 살 만했는데…….”

“…….”

“오해하지 마. 너 나한테 특별하다는 말 아니니까.”

“…….”

“너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처음 만난 온기였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

“그냥 네 생각 하면…… 너랑 있으면,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눈물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 네가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냥 그런 거지, 네가 특별한 거 아니야.”

“…….”

“어차피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잖아.”

“…….”

“흐, 거짓말이니까…….”

목이 아플 정도로 울음소리가 커졌다. 얼굴은 보지 않아도 얼마나 추할지 뻔하다.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없으니까…….”

“…….”

“그래서 나는…….”

죽고 싶었나.

분명히 나는 남자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는데, 왜 결론은 인정이 되었을까.

“너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

“왜, 왜 나를……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왜!”

“…….”

“너 때문이야. 네가, 네가 착하게 굴어서!”

“…….”

“네가 오지랖 부리지만 않았으면…… 그냥, 나는 그냥……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만약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담배와 끼니, 쾌락과 온기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민영의 집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서서히 우울에 잠겨 죽어 갔을 거다.

남자는 나를 살렸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불빛을 보고 나면 어둠이 더 캄캄한 법이니까.

멍청하게 우는데 한순간 상쾌한 향이 나를 뒤덮었다. 남자의 커다란 몸뚱어리가 나를 감싸 안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품에서 숨을 들이켰다.

“왜 너 같은 새끼한테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야…….”

그에게선 상쾌한 냄새가 난다.

나는 이 냄새가 좋다.

이것에 코를 묻고 있으면, 나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이렇게 있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씻겨 내려간다.

나는 온몸으로 그의 향을 끌어안으려 애썼다. 내 의지가 아니라, 본능이었다.

생존 본능.

왜 나는 늘 죽고 싶은 주제에 살고 싶어 하는 걸까.

스스로의 모순에 잠겨 목 놓아 울었다.

* * *

“처음부터 주절댈 거니까 중간에 내 말 끊지 말고 들어.”

밤새 울기만 한 내가 간신히 진정했을 때, 남자가 나를 품에 안고 말했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쉰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밀어 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 등 뒤에 달라붙었다.

“설명할 시간 좀 줘.”

“필요 없다고.”

“시작은 저번에 말한 것처럼 쓰레기장.”

“야.”

그가 멋대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비닐봉지에 싸여서 버려져 있는 거 권민철이 주워 키웠고, 그 인간 뒤따라서 조직 생활 했어.”

1인용 침대에 덩치 큰 남자와 함께 올라와 있어 몹시도 불편했다. 몸보다 더 불편한 건 마음이었다. 남자를 향한 배신감과 더불어 그의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었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스무 살 때 알았는데, 누가 병원에 불러서 갔더니 다 죽어 가는 여자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더라.”

“관심 없으니까 놓으라고.”

이를 악물고 내 몸을 붙든 손등을 할퀴어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엔 안 믿었는데 보니까 또 알겠어.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

“하…….”

“나를 버린 주제에 자기 죄책감 덜자고 불러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게 웃겼는데, 피는 못 속이는지 계속 보다 보니까 애틋한 마음도 들고, 뭐…… 그냥 나쁘진 않았어. 금방 죽었지만.”

그냥 무시해야겠다.

“어쨌든 죽기 전에 낳아 준 사람 얼굴 봤고, 대화도 했고, 나쁘지 않은 시간 보냈으니까 그만하면 충분했어.”

“…….”

“덕분에 생일도 알게 됐고.”

“…….”

“그 뒤로는 한동안 중국에서 살았어. 여기저기 시키는 대로 굴러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는데, 갑자기 조직이 시끄러워져서 한국에 들어왔더니 엉망이더라.”

어깨에 남자의 턱이 내려앉았다. 귓가에 흩어지는 숨결이 불쾌해서 인상을 찌푸리는 그때였다.

“우승지가 고발서 남기고 자살해서.”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쪼잔하게 변명 좀 할게.”

“…….”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남자는 언니가 죽고 난 뒤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 말은…….

“우승지 일, 나는 몰랐어.”

언니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사람 중에 남자는 없었다.

“물론 우리 조직 일이니 아주 상관없는 건 아니겠지만.”

“…….”

“몰랐어, 정말.”

“…….”

“그러니까 마음 조금만 풀어.”

숨이 탁, 뱉어졌다. 기가 막히게도 안도의 한숨이었다.

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안도하다니.

남자가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마음을 놓다니.

나는 미친 게 분명하다.

벗어나려 버둥대던 몸에 힘이 풀어졌다. 그만큼 남자가 나를 더 꽉 안았다.

“그 고발서 무마하느라 조직에서 경찰에 돈깨나 쓴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권민철 입지도 줄어들었고. 하여튼 여러 가지로 난장판이었는데, 그때 나도 고발서 봤어.”

“…….”

“그거 보고 알았어. 내 어머니도 권민철한테 팔려 왔다는 거. 어머니도 나율 보육원 출신이고, 박하동 사창가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거든.”

“…….”

“그제야 어머니가 왜 나를 버렸는지 이해 가더라. 원치 않는 아이였겠지.”

“…….”

“그래도 혹시나 해서 권민철 찾아가서 물었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냐고.”

“…….”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인정하더라.”

그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좆같겠지, 뭐.”

무뚝뚝한 대꾸에 그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흥분되던데.”

“뭐?”

“맨날 시키는 대로 어디 가서 누구 패고, 잡아 오고, 돈 뜯어내는 짓만 하다가 드디어 새로운 자극이 온 거지.”

“…….”

“아, 이 새끼 죽이고 싶다.”

어떤 종류의 흥분감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분비되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아득함.

“근데 나보다 먼저 그 새끼를 찌른 애가 있대.”

움찔하자 그가 내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궁금해서 재판 보러 갔어.”

“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데 바로 옆에 있던 남자와 입술이 닿았다. 다급히 얼굴을 되돌렸다.

“기, 기억 안 나는데…….”

“그렇겠지. 너 그때 넋 놓고 있었으니까.”

“…….”

“우리 쪽 변호사가 몰아붙이는데 한마디도 안 해.”

“…….”

“형량 줄여 보겠다는 의지도 없고, 자기변호도 안 하고, 네 변호사도 그냥 입 다물고 있고.”

그 순간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나는 언니의 시체를 본 뒤로는 늘 불행의 바람결에 떠밀리기만 했으니까.

“그렇게 한마디도 못 하고 징역 받는 거 보는데, 기분이 이상하더라.”

“…….”

“사람 찌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도 처음 칼 들었을 때 얼마나 떨었다고.”

“…….”

“근데 내 몸의 반도 안 되는 애가 그 늙은 여우를 찔렀어.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땐 권민철이 그 지랄 한 거 몰랐으니까, 우승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직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는 알잖아.”

“…….”

“고작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이 더러운 세계랑 얽히는 바람에 범죄자가 됐어. 그걸 보는데, 참…….”

그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좆같더라.”

“…….”

“…….”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조용히 호흡하다 내가 먼저 정적을 깼다.

“네가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생각을 해. 남이사 범죄자가 되든 말든.”

“그러게.”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너를 보는데 어머니가 생각났을까.”

“…….”

“권민철 그 개새끼랑 얽혀서 인생 망가진 게 비슷해서 그런가.”

그가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아무튼.”

“…….”

“고발서 본 뒤로 권민철 밀어내려고 준비했어. 그 새끼 가진 거 전부 다 빼앗고 무너뜨릴 생각이었어.”

“…….”

“권민철이 너 나오는 거 벼르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오기 전에 최민영 집어넣어서 박하 맨션으로 끌어들인 것도 맞아.”

“왜 하필 박하 맨션인데?”

“거긴 내 구역이라서. 안전하니까.”

“네 구역에서 내 뺨 때린 놈도 있는데 안전은 무슨.”

“…….”

싸늘한 대꾸에 잠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 새끼는 내 실수야. 미안해.”

“…….”

“원래 내 밑에 있던 놈인데 몰래 권민철이랑 붙어먹었나 봐.”

“…….”

“그래서 둘이 같이 보냈어.”

너무 부드러운 어투로 말해서 그냥 여행을 보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둘 다 죽은 거야?”

“그래.”

“……너 살인죄로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어.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졌으니까.”

“어떻게?”

“무서운 이야기 들어서 뭐 해.”

그래도 궁금했다. 특히 권민철의 끝은 알고 싶었다.

“말해 봐. 바다 같은데 던졌어?”

“네 언니 있을 곳에 뭐 하러.”

“…….”

“그냥 좀, 외진 곳에 묻었어. 더 묻지 마.”

잠깐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무섭다기보단 통쾌했다. 나는 언니를 괴롭혔고, 나를 괴롭힌 놈들을 동정할 만큼 착하지 않으니까.

별수 있나. 사람을 찌르고, 6년 동안 범죄자들과 함께 살다가, 나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깡패니, 도덕성이 변질될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빠진 이야기가 있는데.”

대뜸 귓불이 쪽 빨렸다.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캉한 살을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재판에서 처음 본 뒤로 종종 네 생각이 났어.”

“…….”

“권민철이 네 이야기 할 때마다 거슬리기도 하고.”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왜?”

“말했잖아. 너 보고 어머니 생각했다고.”

“…….”

“나중엔 어머니 생각 하니까 네 생각 나더라.”

“…….”

“번갈아 가면서 생각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

“그 침 흘리는 멍청한 개새끼 있잖아. 그 꼴 난 거지, 뭐.”

파블로프의 개. 언젠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도 내 어머니랑 같은 보육원 출신이고, 네 언니는 그렇게 죽었고, 넌 20대의 절반을 감방에서 보내야 하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지.”

“내가 불쌍했다는 말이야?”

“그래. 불쌍했어.”

“…….”

대놓고 동정을 받았음에도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나는 그럴 만했고, 그 역시 그럴 만하니까.

“그것 봐. 너 착하다니까.”

남자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원래는 권민철 몰래 빼돌려서 그 새끼 없는 지방 보내서 살게 할 생각이었어.”

“무슨…….”

“이딴 세계랑 그만 얽히게 하려고 했어.”

“…….”

“그랬는데…….”

쪽, 볼에 입술이 닿았다.

“네가 자꾸 예상을 벗어나.”

“…….”

“한번 예쁘더니, 갈수록 예뻐.”

“…….”

“한 번만, 한 번만, 그렇게 미루다 보니까 여기야.”

“…….”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콜록, 작은 기침을 뱉자 그가 연이어 볼과 귀에 쪽쪽 댔다.

“난 내가 권민철 죽일 때, 다른 이유로 죽일 줄은 몰랐어.”

“…….”

“너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어머니고 뭐고, 아무 생각 안 나.”

“내 핑계 대는 거야?”

“고백하는 거야.”

덜컹, 심장이 헐겁게 흔들렸다. 낯선 기분이었다.

“윤서하.”

내 이름조차 낯설게 들렸다.

“네 말대로 작정하고 접근한 건 맞지만, 권민철이랑 같은 의도는 아니었어.”

남자의 목소리는 여느 때 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난 순수하게 너한테 발정한 거야. 그건 계획한 거 아니야.”

“…….”

“그러니까 나 한 번만 봐줘.”

순수와 발정이 한 문장에 쓰이는 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남자가 하는 말이 이해되었다.

“…….”

막 출소했을 때 나는 집도, 돈도, 가족도, 살고자 하는 의지도, 목적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가진 거라곤 그저 행인이 준 우산과 민영이 내어 준 집이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남자는 담배를 제공하고, 끼니를 챙기고, 관심을 주었다. 그 오지랖에 홀라당 넘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의지해 버렸나 보다.

쩌어억-.

무언가 쪼개지는 관념의 소리는 분식집 앞에서 남자의 통화를 엿들었던 날 시작되었고, 서서히 그의 실체가 드러날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직감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 삶을 망친 권민철과 동족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막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죽은 언니를 제외하고 나에게 잘해 준 사람을 꼽아 보면 몇 되지 않았다. 그중 남자와 민영은 누구보다 나에게 결정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두 사람이 작정하고 나를 꾀어 낸 거라고 하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영은 이해한다. 나는 언니와 닮은 그녀가 나를 이용해서라도 행복해질 수 있으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대리 만족 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러나 남자는 반대였다. 나는 그로 인해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내내 눅눅하게 있다가 남자가 등장하면 상쾌해졌고, 살 만해졌다.

그런데 전부 거짓이었다. 쓸모를 다해 버려지면 다시 나는 혼자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말마따나 자포자기해 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버려질 거니까, 그냥 내가 먼저 버리자고. 남자도, 나도.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역시나 같은 냄새가 나를 뒤덮었다.

“너…… 향수 안 뿌리지?”

“…….”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이 냄새, 이거 나만 느끼는 거지?”

“그래.”

남자가 시인했다.

바다에 다녀온 뒤 그가 나를 섹스로 가두었을 때, 남자가 향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있었는데, 한 번도 향수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늘 같은 냄새를 풍겼고, 오히려 전보다 더 진했다. 그래서 눈치챘다.

어쩌면 나는 평범한 체취를 극대화해 끌어안을 만큼, 내 눅눅함을 밀어 내 준 남자에게 과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한 핑곗거리였을지도.

“왜 진작 말 안 했어?”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어.”

“그럼 왜 향수 사 준다고 했는데.”

“네가 궁금해서 미끼로 썼어.”

“…….”

“미안해. 그게 너한테 그런 의미일 거라는 생각 못 했어.”

굳이 따지면, 남자는 향수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애매모호한 대답만 내놓았었다. 나 혼자 강렬한 향에 사로잡혔을 뿐이지.

향수를 미끼로 나에 대해서 캐물은 건 좀 얄밉지만, 이제 와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가장 큰 오해가 풀려서인지 자잘한 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짧은 한숨을 뱉으며 붕대가 감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밤새 몰아쳤던 감정은 남자의 솔직한 해명으로 어느새 잔잔하게 가라앉은 뒤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너 나쁜 놈 아닌 거 알겠다고.”

나는 외로웠고, 남자는 그런 나를 해소해 주었다.

그가 한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귀결됐다.

그게 언제 나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되었을까, 생각하는데 문득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붕대 위를 감싸 왔다.

“이런 짓 하지 마.”

“…….”

“왜 널 죽여.”

“…….”

“사람 죽이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잖아. 그딴 걸 왜 또 해.”

남자를 향한 오해는 풀렸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이 끔찍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죽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태초부터 형성된 외로움과 언니의 아픔을 몰라준 죄책감, 그녀와 함께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살겠다고 칼을 든 모순이 쉬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는데 문득 그가 말했다.

“힘 빌려준다고 좆에 대고 맹세한 거 잊진 않았지?”

“…….”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무슨 헛소리냐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힘든 거 내가 해 줄게.”

“뭘 해 줘.”

“넌 내가 죽여 줄게.”

“뭐라고?”

귓가에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나 사람 잘 죽여. 봤잖아.”

“…….”

“때 되면 내가 죽여 줄 테니까, 네 목숨 나한테 맡기고 그때까진 마음 편히 살아.”

“…….”

남자의 손에 의해 고개가 돌아가며 입술이 맞닿았다. 미끄덩한 혓바닥이 파고드는 순간 얼굴에 열이 몰렸다. 이미 수십 번도 넘게 한 키스인데 왜 새삼스럽게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느릿느릿 혀를 섞던 남자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떼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부끄러워하는 거 같은데, 착각일까?”

“……착각이야.”

“그렇지? 이미 할 거 다 했는데 고작 키스 가지고 뭐가 부끄럽겠어.”

“그래. 맞아.”

“알았어.”

“…….”

“근데 진짜 착각인가?”

넘어가는 척하다가 다시 빤히 바라보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 이내 그가 나지막이 웃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둘러싼 몸뚱어리가 진동한 탓에 자연히 나까지 같이 흔들렸다.

“웃지 마.”

“나 안 웃는데, 착각하는 거 아니야?”

“웃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어.”

“야, 권이헌.”

그가 웃음을 뚝 멈추더니 꽤나 놀란 얼굴로 나를 들여다봤다. 왜 이러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남자의 귀가 내 입술에 닿았다.

“지금 내 이름 부른 거야?”

“…….”

“다시 불러 봐.”

“왜.”

“아니, 지금 나 사람 된 거 같아서.”

“…….”

“드디어 예쁜이가 나를 향수의 기생물이 아니라 본체로 인식한 거 같거든.”

“……너 향수 안 뿌리잖아.”

귀찮게 달라붙는 귀를 주욱 잡아당겨 밀어 냈다.

“서하야.”

“아, 왜.”

“같이 살자.”

잠시 혼란을 느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삶인지, 아니면 공간을 일컫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대는데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둘 다야.”

귀신같이 속을 읽는다.

“……왜?”

“알면 알수록 네가 궁금해.”

그가 내 몸을 틈 없이 끌어안고 속삭였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원 없이 예뻐하면 얼마나 더 예뻐질까.”

“…….”

“그게 보고 싶어졌어.”

“…….”

“내 옆에서 실컷 예쁨만 받고 살아 봐.”

“무슨…….”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가끔 시간 날 때 나도 예뻐해 주면 좋지만, 꼭 안 그래도 돼. 내가 알아서 찾아 먹을게.”

“…….”

“나한테 시간 쓰면 후회할 일 없을 거야. 약속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던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도 못한 채 더듬더듬 손을 그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이렇게 낯선 감정보다는 익숙한 쾌감이 훨씬 편하다. 그 생각만 하며 무작정 옷 위로 성기를 주물렀다.

“하, 할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앞으로 넘겼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양팔을 꽉 옭아매고 어깨에 턱을 기댔다.

“환자 건드리는 취미 없는데.”

“……착한 척하지 마.”

“누가 자꾸 착하대서 세뇌당했나 보지.”

“…….”

“같이 살아 보자.”

“…….”

“어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까지 후끈거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남자가 그 위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조그맣게 웃는 것까지 전부 생생하게 세포에 각인되었다.

이상하리만치 생소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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