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6년 전, 여름. 언니는 장마가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장마 끝나면 가자. 귀찮아. 그보다, 언니. 이것 좀 봐 줘. 크림이 이상해.’
‘응. 어디 봐.’
그 대화가 있었던 다음 날이었다.
그날은 비가 그쳐 세상이 소강상태였다.
창문으로 조용한 세상을 바라보며 바다를 보러 가자던 언니의 말을 떠올리던 나는 큰마음 먹고 함께 가 주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곧장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먼저 가게에 나간 줄 알았다. 파티셰가 꿈이었던 언니는 일하는 베이커리의 양해를 받아 남들보다 먼저 가서 연습하곤 했다.
동트지 않은 새벽이 피곤하지도, 무섭지도 않은지 열심인 언니가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그렇게 열정을 쏟을 만한 대상이 없었다. 그나마 언니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건 다른 것보다 재미있어서 하고 있었지만.
뒤늦게 언니를 뒤쫓아 가게에 나갔을 땐 문이 닫혀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언니는 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혼자가 되었다. 일주일 동안.
‘언니 뭐야?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화도 안 받아!’
‘…….’
‘일주일 지났어. 그동안 대체…… 꼴이 왜 이래?’
‘…….’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
‘뭐 때문에 나 버리고 갔냐고!’
일주일 만에 돌아온 언니는 몰골이 이상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처음 보는 이상한 원피스였으며, 얼굴엔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에게 왜 나를 버리고 갔냐고 화를 냈다.
왜 나를 혼자 두었느냐고. 피차 외로운 인생이니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살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그 말만 믿고 보육원에서 나와 언니네 집에 들어온 거 모르냐고.
그녀의 상태보다 외로웠던 나의 감정을 앞세웠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럼 나는 다른 말을 했을 텐데.
안아 줬을 텐데.
같이 울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같이 죽었을 텐데.
‘죽어!’
죽었을 텐데.
* * *
이불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언니의 피인가. 아니면 원장의 피인가.
멍한 눈으로 피범벅이 된 이불을 바라보며 잠깐 현실과 과거를 혼동하다가, 뒤늦게 내 다리 사이에서 새어 나온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생리대를 언제 갈았지? 남자가 간 지는 얼마나 되었지? 모르겠다.
머리맡에 빈 생수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가 마신 모양인데 언제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그저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어 나가 물은 마셨다는 게 우스울 뿐이었다.
남자는 떠난 날 아침의 통화 이후로 소식이 없었다. 도중에 휴대폰이 꽤 울리긴 했지만 민석에게서 온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툭하면 전화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어이가 없다.
“…….”
잠시 엉망이 된 이불을 바라보다 그냥 다시 몸을 눕혔다.
이대로 몸 안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서 과다 출혈이 되면…….
Rrrr-. Rrrr-.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벨 소리가 울렸다.
희미한 눈을 치켜뜨고 화면을 바라봤지만 민석이가 아니었다.
거짓말쟁이.
Rrrr-. Rrrr-. Rrrr-. Rrrr-.
“…….”
Rrrr-. Rrrr-.
‘상무님’은 남자에게 전화를 하는 여러 사람들 중에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Rrrr-. Rrrr-.
짜증 나.
Rrrr-. Rrrr-.
시끄러워.
Rrrr-. Rrrr-. Rrrr-. Rrrr-.
거짓말쟁이.
Rrrr-. Rrrr-.
“하.”
욱해서 휴대폰을 내리쳤다.
웬만하면 다들 금방 끊지만 가끔 이렇게 집요한 인간들이 있었다. 이럴 땐 한마디 해 주면 그 뒤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달칵, 통화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입을 열었다. 당신이 찾는 놈은 지금 여기 없으니 작작 전화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내가 널 이렇게 한심한 놈으로 키웠던가.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그대로 동작이 굳었다. 간신히 눈동자만 굴려 화면에 뜬 이름을 다시 읽었다.
상무님.
―이만하면 실컷 놀았지?
“…….”
―좋은 말로 할 때 그년 데리고 와.
뚝, 끊어졌다. 상대 쪽에서 할 말만 하고 끊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손을 허공에 띄운 채로 굳어 있었다.
남자의 휴대폰에 저장된 상무님은 내가 아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죽어!’
‘이 미친년이!’
내가 찌른 보육원 원장의 목소리.
권민철.
다시금 그의 지독한 생존 본능이 떠올랐다.
‘쓸 만하게 만드는 중이라고 전해.’
본능적으로 통화 기록을 지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 * *
혈에 절여지다 못해 엉망이 된 생리대를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샤워를 했다.
어느덧 생리는 끝나 있었다. 생리가 끝날 때까지 남자는 전화도 하지 않았고, 돌아오지도 않은 것이다.
좆같은 장미 로션은 거들떠보지 않고 깨끗해진 몸으로 나왔을 때 식탁에 놓여 있는 비빔밥 한 그릇을 발견했다. 근처만 가도 쉰내가 났다.
비빔밥 옆에는 남자의 까만 카드도 놓여 있었는데, 둘 다 무시하고 신발만 끼워 신고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하자마자, 무턱대고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였다.
지하 복도는 여전히 구린내가 진동했다. 천천히 복도를 가로지르며 잠깐 옆집을 돌아봤다.
거짓말쟁이.
쏴아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하늘에 구멍이 난 거 아닐까. 이렇게나 비가 오래 온 적이 있었나?
언니가 죽었던 해는 유독 가물어서 사람들이 장마를 반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언니도 오랜만에 맡는 비 냄새를 그렇게 좋아했으리라.
공동 현관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세상을 찔러 댔다.
“…….”
우산을 챙기지 않았으니, 맨몸으로 박하 맨션을 벗어나 빗날을 맞았다. 쓰레기장을 지나기도 전에 온몸이 쫄딱 젖었다. 방금 씻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운 없는 다리를 질질 끌며 고요한 골목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올 때도 그렇고, 도중에 남자와 잠깐 나갔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유난히 사람이 없는 동네다. 비가 와서 그런가?
앞만 보고 걸어가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지난번 4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후드 쓴 사람이 떠올라서였다.
“…….”
또 있다. 같은 집 창문에 서 있는 후드를 발견하곤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저 사람보다 거무죽죽한 건물이 더 시선을 사로잡았다.
건물에도 생명이 있다면 박하 맨션은 죽어 있을 거다. 후진 외관과 구린 냄새만 봐도 뻔하지, 뭐. 그래서 내가 금방 적응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 다시 4층을 바라봤을 땐 아무도 없었다.
시선은 건물에 고정한 채 발만 앞으로 옮기는데, 일순 뭔가에 어깨가 부딪쳤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
“…….”
옆집 남자와 비슷한 또래에 생긴 것도 퍽 준수했다. 우산 없이 쫄딱 젖어 있는 꼴도 옆집 남자와 비슷해 보이고.
“예쁘게 생겼네.”
옆집 남자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이러니 눈 돌아갈 만도 하지.”
“…….”
“어디 가?”
그러나 그와 같은 냄새는 나지 않았다. 되레 이 사람에게서는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은 짙은 꽃향기가 나서 불쾌했다.
말 섞을 가치도 없어서 스쳐 지나가는데, 돌연 강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다.
“확실히 떡 칠 맛 나겠네.”
“…….”
“권 이사가 길 잘 뚫어 놨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권 이사? 의아한 얼굴을 하는데 남자가 나를 품에 안고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브라자도 안 차고, 젖꼭지는 발딱 세우고, 어디 가는 중이야?”
“…….”
“아무나 잡고 떡 치려고?”
“…….”
“난 어때?”
멋대로 가슴을 주물러 대는 손아귀가 우악스러웠다. 천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비벼 대는 손가락도 거칠었다.
그러나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상하다. 나는 쥐어짜일 듯 아프면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그러고 있는데, 왜 몸이 달지 않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잡았다.
“젖통 존나 크네. 비싸게 팔리겠다. 감촉도 좋고.”
“…….”
“근데 씨팔, 반응이 왜 이래?”
짜악!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할 맛 나게 굴어. 이 바닥은 원래 연기가 생명이야.”
화끈거리는 볼 안을 혀로 훑었다. 나 왜 맞은 거지? 모르겠다. 뇌가 텅 빈 기분이었다. 그러나 잡념이 사라져 상쾌한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좋아 죽겠다고 매달려 봐. 오빠, 오빠. 아양도 좀 부려 가면서.”
그가 내 팔을 멋대로 제 목에 두르게 했다. 그러곤 다시 가슴을 꽈악 쥐어짰다.
상대가 누구인지,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쎄, 딱히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정확하게는 궁금해할 의욕이 없었다. 몸도, 머리도 시들시들해진 것 같았다.
대신 그가 원하는 것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선명하니 인형처럼 입을 열었다.
“으응, 응.”
어차피 막 나가기로 한 거, 꼭 상대가 옆집 남자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이상하게 개운해지지 않았다.
집게손가락이 유두를 꼬집었다.
“아!”
“그래, 그렇게.”
“아, 아.”
옆집 남자를 곯려 주려고 신음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목을 울리자 손아귀가 더 거칠어졌다. 흥분한 듯 거세진 숨소리도 들렸다.
“하, 씨팔, 존나 꼴려.”
아무도 없는 골목 한복판에서 내 가슴을 주물러 대던 남자의 손이 점점 내려가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팬티도 안 입었네. 아주 걸레로 만들어 놨구만?”
맨엉덩이를 움켜쥔 그가 낄낄대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별 감흥이 없었지만, 연기를 했다.
아, 아, 응, 흐응. 옆집 남자가 나를 만져 대던 감각을 떠올리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러다 엉덩이를 감싼 손이 더 아래로 뻗어 가는 순간이었다.
퍼억!
“으윽!”
나를 뒤덮은 몸뚱어리가 한순간 떨어져 나가더니 시커먼 인영이 그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게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간 수없이 매달린 몸이니까.
퍽! 퍽! 퍽! 퍽!
“자, 잠깐!”
퍼억!
쏴아아-.
날카로운 빗속에서 옆집 남자는 이방인을 때렸다. 누군가 박하 맨션에서 달려 나와 말릴 때까지 계속.
“이사님!”
“넌 뭐 하고 있었어, 씨발놈아.”
“전 이사님이 보내신 줄 알고…….”
“놔.”
지금 알게 되었다. 4층에 사는 후드는 남자였고, 옆집 남자와 아는 사이였다.
“일단 저쪽부터 챙겨야 하지 않습니까.”
“…….”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던 옆집 남자가 잠깐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곤 기절한 놈을 밟고 넘어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내 몸에 둘러 주었다.
비로소 그 냄새였다.
“저 새끼 데리고 들어가.”
남자의 말에 후드가 곧장 쓰러진 남자를 끌고 박하 맨션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 다시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
“…….”
빗물에 젖은 남자는 표정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여태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던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불쑥 나타났을까. 신기하기도 했지만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냥 재킷을 던지고 스쳐 지나갔다.
타닥, 곧장 남자가 쫓아와 내 몸에 다시 재킷을 둘렀다. 아예 꼼짝도 못 하게 소매로 매듭까지 지었다.
몸이 칭칭 감기는 안정감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원하지 않았다. 남자는 거짓말쟁이니까.
“치워.”
팔을 뿌리치며 쏘아붙여도 그는 꿋꿋하게 매듭을 두 번까지 묶어 내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화가 난 얼굴이었는데,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잠시간 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어디 가?”
“알아서 뭐 하게.”
“같이 가려고.”
“바쁘잖아. 가서 일이나 해.”
“끝나고 온 거야.”
“됐어. 이제 필요 없어.”
“전화 안 해서 기분 상했어?”
대답하기도 전에 몸에 번쩍 들렸다. 내 목뒤와 무릎 아래에 양팔을 끼운 남자가 가볍게 나를 받쳐 들고 걸음을 뗐다.
박하 맨션으로 가려는 듯해서 나는 얼른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철썩, 물 때문에 유독 따가운 소리가 났다.
“집에 안 갈 거야.”
“그럼 어디 가려는 건지 말해.”
“내려.”
“너…….”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깊이 가라앉았다.
“얼굴이 왜 이래?”
“…….”
“맞았어?”
대답 대신 아까 맞은 뺨을 손으로 감쌌다. 잠깐 잊고 있던 얼얼함이 되살아났다.
“쟤 네 친구야?”
“저 새끼가 때렸어?”
“어. 할 맛 안 나게 군다고.”
“…….”
까득, 남자의 턱이 굳는 게 보였다.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삼킨 남자가 나를 품에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건물이 아닌 골목 쪽이었다.
“내려.”
딱히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어깨를 밀어 냈지만 이 막대한 에너지를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두어 번의 반항 끝에 포기하고 몸을 늘어뜨리는데, 그가 골목 초입에 세워진 까만 차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곤 나를 뒷자리에 던지듯 눕혔다.
“네 차야?”
“…….”
그는 내 말을 씹어 먹고 위에 올라탔다. 동시에 문이 닫히고 빗소리가 작아졌다. 타닥타닥, 차체를 두드리는 진동에 가까운 울림만 가득했다.
“…….”
“…….”
내부를 채운 냄새가 그의 것인 걸 보니 차도 남자의 것이 맞는 모양이다.
잠시 눈을 굴리다 머리맡을 짚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젖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 가던 중인지 말해 봐.”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차분했다. 억지로 그렇게 만드는 듯했지만,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잠깐 잊을 만큼 착한 어투였다.
“바다.”
“바다?”
“응.”
“갑자기 왜?”
“갑자기 가고 싶어서.”
“데려가 달라고 말을 하지. 혼자 어떻게 가려고.”
남자의 손이 뺨을 감싸 왔다. 맞았던 부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어이없었다.
“말할 틈이 있었어?”
“미안. 바빠서 전화 못 했어.”
“그러시겠지.”
“저 새끼가 어디 만졌어.”
다시금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짜증 섞인 한숨도 뒤따랐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아 가슴 위에 얹었다.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또?”
이번엔 손을 이끌어 엉덩이로 가져다 댔다.
남자가 다시금 턱을 굳히곤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러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거 잘 데리고 있어.”
“…….”
탁! 그의 손에서 날아간 휴대폰이 앞좌석으로 내리꽂혔다.
“아까 그 사람 네 친구 맞지?”
“친구라기보다는…… 아무튼 내가 아는 새끼는 맞아. 미안해. 그런…….”
“뭐가 미안한데?”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한창 좋았는데 방해해서?”
“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던 남자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킷의 매듭을 풀어 보려고 애쓰는데 그가 내 손을 거칠게 잡아 눌렀다.
“좋았다고?”
“생리 끝났어.”
“…….”
“드디어 할 수 있었는데 방해했잖아, 네가.”
“…….”
“조금만 있었으면 손가락 들어왔을 텐데.”
“하.”
그가 짧은 실소를 뱉었다.
“네가 진심이랑 다른 말 하는 거 되게 귀여운데.”
“진심으로 하는…….”
“지금은 기분이 좆같네?”
남자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너 안 좋아했어, 아까.”
“네가 어떻게 알아.”
“좋은데 그딴 표정이었겠어?”
내가 어떤 표정이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가 더 강해져서 말이 나오다 말았다.
우습게도 손목만 잡혔는데 달뜬 숨이 흘렀다. 개새끼라 그런가.
하아, 하. 짧게 터져 나오는 신음에 남자가 얼굴을 구기며 한 손으로 내 양 손목을 붙들었다. 그의 오른손이 곧장 내 바지 안으로 들어가더니, 젖은 음부에 닿았다. 잠시 손가락을 움직여 아래를 훑은 그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젖었어?”
“응.”
“젖었어.”
“…….”
“젖었어, 씨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이 멍청해 보였다. 픽, 웃음을 흘리자 그가 눈을 치켜떴다.
“거리 한복판에서 추행당하면서 젖었어?”
“…….”
“싸대기를 맞으면서 젖어?”
“나 원래 맞는 거 좋아하잖아.”
남자가 잇새로 욕을 씹었다.
“그게 이거랑 같아?”
“다를 건 없지.”
사실 남자의 냄새와 온기, 힘 따위가 나를 젖게 만들었으나,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이 통쾌해 일부러 뻔뻔하게 굴었다.
나도 남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니 그도 나 때문에 기분이 나빴으면 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정체도 모르는 새끼한테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이렇게 쉽게 굴어?”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생각하다 그때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남자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부담스러워서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그 상태로 정적이 감돌았다.
“…….”
“…….”
타닥, 타닥, 타닥, 타닥. 차체를 내리치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적막하기만 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상쾌해지곤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뭔가를 잘못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걸리적거렸다.
“여태 굶은 거야?”
한참 말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힐끔 눈을 굴렸다가 다시 시선을 피했다.
“알 게 뭐야.”
“며칠 만에 얼굴이 야위었는데. 뱃가죽도 납작하고.”
바지 안에 있던 손이 어느새 아랫배를 덮고 있었다. 따끈한 손바닥의 온기에 그제야 한기가 느껴졌다. 비에 젖은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도 이제 인지했다.
“전화 못 해서 기분 많이 나빴구나.”
“누가 그래?”
“그래도 밥은 먹지 그랬어.”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나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바들바들 떠는 나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본인이 매듭지은 재킷을 풀어 바닥에 던지곤 내 옷을 벗겨 알몸으로 만들었다.
가뜩이나 추운데 왜 벗기나 싶어 원망스레 바라보자 앞쪽으로 팔을 뻗은 남자가 두꺼운 담요를 가져와 내 몸에 둘렀다.
“뭐 하는 거야?”
“감기 걸려.”
어깨부터 무릎까지 미라처럼 칭칭 감겼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나를 옆에 내려 두고 운전석으로 상체를 기울여 뭔가를 건드리는데, 이내 차 안에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담요에 갇힌 채 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빗물을 뚝뚝 흘리는 남자의 턱은 아직도 단단하게 굳어 화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시 돌아와 나를 품에 안는 동작은 조심스러웠다.
이상한 괴리였다. 부어오른 얼굴을 쓰다듬는 손도,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가락도, 전부 다 부드러워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 혼란을 겪다 버티지 못하고 담요를 풀어냈다. 다시 알몸이 되어도 히터 덕에 이젠 춥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나중에 앓지나 말고.”
“하고 싶어.”
“…….”
“생리 끝나면 실컷 박아 주겠다고 했잖아.”
알몸으로 허벅지 위에 올라타자 다리 사이가 금방 묵직해진다. 그러나 어쩐지 그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시트에 등을 묻고 가만히 바라보는 얼굴이 유쾌하지 않은 애틋함을 담고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나는 그걸 무시하고 남자의 몸에 달라붙은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는 젖었고, 나는 떨고 있어서 마음대로 되진 않았지만, 어찌 저찌 다 풀어냈다.
곧장 달라붙어 맨가슴을 그의 몸에 문질렀다. 바짝 올라붙은 돌기로 살살 긁자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빨아 줘. 깨물어 줘.”
“…….”
“오빠, 해 줘. 응?”
‘좋아 죽겠다고 매달려 봐. 오빠, 오빠. 아양도 좀 부려 가면서.’
아까 들은 말을 떠올리며 아양을 부리니 과연 반응이 있었다.
침을 크게 삼켜 낸 남자가 쯧, 혀를 차며 내 가슴을 양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역시 남자는 섹스가 전부네. 들은 이야기가 맞는다는 걸 상기하며 조소하는 동시에 안도했다. 그래야 가볍게 붙어먹기 좋으니까.
“그 새끼한테도 이랬어?”
대답 대신 몸을 들썩이며 남자의 부푼 앞섶으로 다리 사이를 자극했다. 꾹꾹 틈을 누르는 압박만으로도 배 안이 뜨겁게 달궈졌다.
한 손은 그의 팔에 새겨진 뱀 위에, 다른 손은 뒤로 뻗어 남자의 무릎을 짚은 채 아래를 비벼 대자 그가 가슴을 좀 더 세게 비틀었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가 짓눌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하으, 읏!”
“말해 봐. 그 새끼한테도 해 달라고 매달렸냐고.”
“후으…….”
조금만 더. 더. 더.
쾌락을 좇으며 바르작대는데, 그가 갑자기 내 허리를 잡아 들었다.
“아…….”
아래가 떨어지고 가슴도 허전해지니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허공에서 엉덩이가 앞뒤로 움직였다.
“대답해.”
“으응, 뭘?”
“진짜 좋아서 그 새끼 받아 준 거야?”
아직도 그 이야긴가. 그딴 걸로 도중에 끊어 낸 남자를 짜증스레 바라보며 목을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그가 더 단호하게 나를 떼어 냈다.
“금욕하기로 나랑 약속하지 않았나?”
“하.”
불현듯 억울함이 치밀어 남자의 팔뚝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약속은 너도 안 지켰잖아.”
퍽, 퍽. 연이어 때릴 때마다 딱딱한 근육은 되레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전화한다고 해 놓고 한 번도 안 했잖아.”
“…….”
“거짓말쟁이.”
“…….”
“한 번도 안 했어. 한 번도…….”
그새 감기가 든 건지 코맹맹이 소리가 나왔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도 얼굴 위를 마구 가로질렀다. 코를 훌쩍이며 노려보는데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약속 지켰어.”
“…….”
“여태 계속 참았고, 아까 그 사람도…… 흐.”
도중에 숨이 가빠 잠깐 말이 멈췄다.
“지 혼자 주물러 댄 거지 나는 하나도 안 좋았어.”
“…….”
“그 사람은 냄새도 별로고…….”
“그럼 왜 젖었어.”
“네가 왔으니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아니었다.
“너 머리 나쁘구나? 나 개새끼 된 거 잊었어?”
파블로프의 개는 옆집 남자를 보기만 해도 다리 사이로 침을 흘린다.
가슴을 만져 대는 낯선 이의 손길이 아닌, 난데없이 등장한 남자의 실루엣이 나를 젖게 했다.
“이럴 거면 휴대폰 왜 주고 갔어?”
“…….”
“전화도 안 할 거면서. 왜 귀찮게 주고 가?”
“하려고 했어. 하려고 두고 간 건데, 못 했을 때 네가 이렇게 울 줄 몰랐어.”
“안 울어!”
가쁜 숨을 토해 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그제야 허리를 내려 주었다.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남자가 내 볼을 감싸 들어 올렸다.
“이 정도로 외로움을 타는 줄은 몰랐는데.”
“무슨 헛소리야.”
“잘못했다고.”
“…….”
“이제 약속 잘 지킬게. 마음 풀어.”
“뭐라는 거야…….”
손바닥에 짓눌려 튀어나온 입술에 그가 짧은 입맞춤을 했다.
“윤서하.”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렸다.
“왜 갈수록 너를 더 알고 싶을까.”
남자에게는 처음이었다.
* * *
“언제, 흐으, 언제 넣을 거야?”
“조금만 더 빨고.”
“아읏, 넣어 줬으면, 좋겠는데…… 흣!”
나는 한쪽 다리를 시트 위에, 다른 쪽은 조수석 목 받침을 디딘 채 가랑이를 활짝 벌린 자세였다.
넣기 좋은 자세인데도 남자는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게걸스럽게 혀를 놀리기만 했다.
“아아…….”
감질나게 음순을 하나하나 핥고, 구멍에 혀를 깨작거리며 미미한 자극을 주다가 안달 낼 때쯤엔 음핵을 굴려서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고, 절정에 이르려고 하면 다시 주변만 핥아 대며 갈 듯 말 듯 애매하게 만들어 몸이 달아 미칠 지경이었다.
“오빠, 오빠…… 응?”
“그거 하지 말라니까.”
남자가 다리 사이에서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조금 전 그의 사과로 온화해진 공기 속에서 내 뺨을 때린 남자가 한 말을 일부 전해 주었더니, 아양을 부릴 때마다 남자는 짜증을 냈다.
“싸구려 취급 하는 거 일일이 새겨듣지 마.”
“아깐 지도 좋아해 놓고.”
“응. 오빠는 싸구려거든.”
얄미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빨리 넣기나 해, 이 싸구려야.”
“오랜만인데 좀 더 맛보게 둬.”
“그럼 나는!”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몸 달아 죽겠어?”
“보면 몰라?”
“보여. 구멍 뻐끔대는 거. 물도 줄줄 흘리고.”
“후으…….”
“내 얼굴 젖은 거 보이지? 이거 비 아니야.”
헛소리에 반응할 여유가 없어,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순순히 따라 올라온 그가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재수 없게 쪼갰다.
“빨리 꺼내.”
“네가 꺼내 줘.”
그가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시야에 근육 잡힌 가슴이 들어오고 하반신이 손을 뻗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벨트를 급하게 풀어내고 앞섶을 파헤치자 까만 드로어즈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앞쪽이 끈적한 걸 보면 분명 다른 것이리라.
“지도 줄줄 흘리면서.”
“부끄럽게 왜 그런 말을 해.”
가증스럽게 수줍은 척하는 건 무시했다. 드로어즈를 내리자 성기가 무겁게 아래로 떨어졌다.
반갑기까지 한 기둥을 손에 움켜쥐니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내 손에 대고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하…….”
눈앞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고 성기가 손안을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게 야해서 다리 사이가 더 축축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나는 좀처럼 넣을 생각을 안 하고 내 손으로 혼자 즐기는 남자를 답답하게 바라보다 눈앞의 유두를 입술로 쪽 빨았다.
정수리 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잘생긴 낯짝이 시야를 채웠다. 쥐고 있던 성기도 빠져나갔다.
“난 빨아도 안 나와.”
그가 당연한 헛소리를 하며 내 가슴을 입에 물었다.
“나도 안 나와.”
“아니야. 가능성 있어. 이렇게 큰데. 도전해 보자.”
“무슨 미친 소리야.”
유두를 입에 머금은 남자가 쪽쪽 소리를 내며 빨기 시작했다. 목울대도 연신 꿀렁이는데, 누가 보면 진짜 젖을 빨아 먹고 있는 줄 알 만큼 뻔뻔했다.
“맛있네.”
“후으…….”
“확실히 처음보단 뭐가 느껴지지?”
그래서 더 애간장이 녹는 중이었다.
“아까, 응, 아까 다 빨았잖아.”
“또 빨고 싶어서.”
“그러면 때려 줘.”
뱀을 툭툭 쳐서 요구했지만 답이 없었다. 아까부터 남자는 때려 달라는 내 요구를 깡그리 무시하는 중이었다.
아주 갖은 방법으로 나를 애태우고 있다. 나쁜 놈.
“흐윽.”
짜증이 치밀어 이를 악무는데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아, 서러워.”
“…….”
“감질나 죽겠어.”
“…….”
“근데 때려 주지도 않는대. 나쁜 새끼.”
“…….”
“이런 얼굴이네.”
진짜 재수 없다. 약이 바짝 올라서 노려보자, 남자가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으며 눈두덩을 닦아 냈다.
“울지 마.”
“안 울어.”
“그래도 안 때려 줄 거야.”
“왜…….”
“지금은 때리면 부서질 거 같아서 손이 안 가.”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건데, 남자는 단호한 얼굴로 가슴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쓸데없이 부드러운 손놀림이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빨리…….”
코를 훌쩍이며 애타게 올려다보자,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아래를 맞춰 왔다.
“아, 이거 맛 들일 거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던 남자가 단단한 귀두를 음부에 비비고, 가슴을 빨고, 쇄골을 핥고 목을 타고 올라와서 턱과 볼, 입술, 콧등과 눈까지 연신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오랜만이라 좀 아플 거야.”
“아픈 거 좋아.”
“얼씨구.”
“아프게 해 줘. 응?”
그가 머리맡에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더 낮춰 왔다. 거리가 더 가까워져서 상체가 맞닿았다. 말랑한 가슴이 마음에 드는지 힐끔 내려다본 그가 이내 내 몸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로소.
“그냥 푹 쑤셔 넣어.”
처음 했을 때처럼 요구했지만 남자는 그때와 달리 신중하게 아래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 싫어. 읏, 그러지 말고, 그냥 세게, 으응, 세게 넣어.”
“…….”
“이런 거 싫어.”
느릿느릿 아래가 벌어지니 아픈 느낌보다는 뜨거운 열기만 느껴졌다.
내가 원한 건 나를 쑤셔 대는 살인 행위지, 이렇게 상냥한 삽입이 아니다.
너무 부드럽게 침입해서 멍청한 세포들은 나를 보호하기는커녕 좋다고 그를 받아들였다. 순순히 공간을 내어 주고, 따뜻하게 감싸고, 환영하는 것처럼 맞이했다.
애가 타는 것 이상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 남자의 어깨를 손톱으로 긁었다.
“뭐 하는 거야…… 흐윽.”
“믿어 봐. 기분 좋게 해 줄게.”
“아프게, 읏, 아프게 해 줘…… 아픈 게 좋아…….”
“이게 더 좋을 텐데.”
기어이 그딴 식으로 뿌리까지 밀어 넣은 남자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뿐인가.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이상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아까부터 자꾸 마주치기 거북한 눈빛이라 시선을 피하며 삽입질을 재촉했지만, 그의 몸으로 골반이 짓눌린 탓에 내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여…….”
“천천히.”
“싫어. 천천히 하지 마. 원래 하던 대로 해.”
“그러면 부서질 거 같다니까.”
“부서트려!”
욱해서 소리쳤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볼을 핥았다.
“아…….”
겨우 움직이나 싶었는데, 빠져나가는 짓거리도 느려 터졌다. 내벽 주름 하나하나를 훑으며 나가는 기둥이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느긋하게 느껴 봐. 내 좆이 어떻게 생겼는지.”
“많이 봐서 잘 아니까 헛짓 그만해.”
귀두까지 빠져나갔을 때 직접 넣으려고 허리를 흔드는데, 아예 툭 빠져 버렸다.
“아아…….”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바들바들 떨며 남자의 어깨를 붙잡자 그가 다시 아래를 밀어 넣었다. 또 느려 터진 동작이었다.
“안이 쫀득해. 너도 느껴져?”
“몰라, 흑, 이렇게 하는 거 싫어.”
“아, 따뜻하다.”
“흐응…….”
성기 모양대로 질벽이 모양을 잡으면 다시 빠져나가고, 느릿느릿 파고들고, 야릇한 느낌은 들지만 날카로운 짜릿함은 없는 답답한 행위였다.
거칠게 안을 후벼 파고, 엉덩이를 내리치고, 가슴을 쥐어뜯던 원래의 섹스가 간절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그냥.”
“너도 세게 하는 거, 흐읏, 좋아하잖아.”
“난 특별히 선호하는 거 없이 다 잘 먹어.”
“아으…….”
“굳이 따지면 이게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앞으로도 이딴 식이라면……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자꾸 볼을 빨아 대는 남자의 얼굴을 밀어 냈다.
“그럼 나 이제 너랑 안 자.”
“뭐?”
“차라리 아까 그 사람이랑 잘 거야.”
“뭐라고?”
아양을 부릴 때마다 사나워지던 걸 떠올리며 쏘아붙였다.
“그 사람은 내 몸도 제멋대로 만졌으니까 섹스도 거칠 거 같아. 네 친구 불러 줘.”
“…….”
“걔도 나랑 자고 싶어 했어.”
꽤 효과는 있는 듯했다. 다시금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보면. 쓸데없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았다.
“쓸모 있게 굴어.”
“…….”
“저번에 말했잖아. 쓸모없어지면 버릴, 윽!”
퍽,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아래가 꿰뚫렸다. 차체도 같이 흔들렸다.
“뭐. 이렇게?”
그가 허리를 쾅쾅 내리찍으며 사납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응, 그렇게, 흑!”
“씨발…….”
“아아, 엉덩이, 엉덩이도 때려 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엉덩이를 바짝 들어 올리자 그가 내 몸을 확 뒤집어엎었다. 그러곤 완전히 무게를 싣고 성기를 쑤셔 왔다.
거대한 몸뚱어리가 나를 올라타고 누르니 도망칠 곳 없이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그 황홀함에 넋을 놓은 채 허리를 들썩였다.
짜악!
날카롭게 엉덩이를 내리치는 손길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너는, 하, 사람이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해도.”
“으응! 응!”
짜악!
“하으윽!”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신음하자, 드러난 목에 남자가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이로 콱 깨무는데, 이건 또 다른 자극이었다.
푸욱, 푹. 거칠게 안을 쑤셔 댈 때마다 가죽 시트가 찌걱거렸다.
민영의 소파와 달리 이 가죽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
문득 그에게 묻고 싶었다.
“아, 으응! 윽!”
있잖아.
“아으응!”
너 권민철 어떻게 알아?
“또, 때려 줘, 흣.”
그러나 묻는 대신 부탁했고, 그는 기꺼이 제 쓸모를 보여 주었다.
짜악!
“아, 좋아……!”
쩌어억-. 쩍-.
또다시 관념 속에서 무언가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잠깐 있어.”
“응.”
“아무리 너라도 알몸으로 나가진 않겠지.”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진심이었다. 나는 남자가 둘러 준 담요를 덮은 채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옷만 챙겨 올 거니까, 꼼짝하지 말고 있어.”
“몇 번을 말해. 빨리 가기나 해.”
“…….”
“바다 가 준다며.”
찜찜한 얼굴로 나를 훑어본 남자가 이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조용해진 차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아까보다 비가 더 거세게 내리는 바깥은 어둠이 자욱했다. 몇 시일까? 대충 늦은 밤이라는 것만 가늠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
분식집 할머니는 남자의 팔자가 사납다며 혀를 찼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은 내가 비싸게 팔릴 거라고 했다.
후드 입은 사람은 그를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남자의 휴대폰에 권민철은 상무님이라고 저장되어 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년 데리고 와.’
‘할 맛 나게 굴어. 이 바닥은 원래 연기가 생명이야.’
‘쓸 만하게 만드는 중이라고 전해.’
권민철과 이방인, 남자의 목소리가 연이어 차 안에 울렸다.
처음 박하 맨션에 왔을 때 왜 나를 보고 있었나 했더니. 그가 왜 내게 접근했는지 대충 유추가 되었다.
‘옆집 또라이는 아직 거기 살려나 모르겠다. 수작 부리면 그냥 거시기를 까 버려!’
아마도 남자는 민영이 말한 옆집 또라이가 아닐 거다.
어쩐지 지나치게 잘생겼다 싶더라니. 그런 얼굴에, 의외로 착한 면까지 있는 남자를 민영이 그렇게 싫어했을 리가 없지. 남자는 얄밉기는 해도 미운 구석은 없지 않나. 의외로 착하고, 웃는 얼굴은 귀염성도 있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벌컥, 차 문이 열렸다.
“금방 왔지?”
우산을 접고 안에 올라탄 남자는 보송한 새 슈트로 갈아입은 뒤였다. 내가 그대로 있으니 안심한 눈치였다.
“옷 입자.”
“입혀 줘. 꼼짝도 못 하겠어.”
“그러려고 했어.”
그는 민영의 가느다란 티 팬티부터 브래지어, 긴 청바지와 셔츠, 카디건까지 꼼꼼히 입혀 주었다.
“한여름에 왜 이렇게 두껍게 입혀?”
“비 와서 추워. 이럴 때 바닷바람이 얼마나 센 줄 알아?”
“나야 모르지. 안 가 봤으니까.”
“안 가 봤어?”
“응.”
챙겨 온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아 주는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한 번도?”
“응. 한 번도.”
“뭐, 그럴 수도 있지.”
얼굴과 목에 남은 물기를 닦아 준 그가 입술을 비벼 왔다. 쪽. 쪽. 쪽.
“앞에 앉아.”
“뒤에서 좀 자고 싶은데.”
“앞에서 시트 눕히고 자.”
“왜?”
“자는 거 구경하게.”
쪽. 쪽.
“너 자는 거 되게 귀엽거든.”
“…….”
쪽. 다시 입술이 붙었을 때 날름 혀를 밀어 넣었다. 간지러운 행위보다는 질척한 게 우리랑 더 잘 어울린다. 맞닿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키스를 받아 주었다.
남자는 눈을 뜨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굴렸다. 처음에는 잠깐인 줄 알았는데, 시선은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게 쳐다보는 게 또 관찰당하는 기분이라 눈을 찌푸리자, 남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눈가도 살짝 접혔다.
나는 짜증스레 남자의 얼굴을 밀어 냈다.
“뭐 하는 거야.”
“키스.”
그는 여상히 대답하며 내 이마와 볼에 연달아 입을 맞춘 뒤, 앞으로 턱짓했다.
나는 찜찜한 심정으로 닿은 부위를 닦아 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어 남자도 운전석으로 넘어와 내 앞에 벨트를 채워 주었다.
“벨트만 해도 야하네.”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려보니, 안전벨트가 가슴 사이를 가로질러 굴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왜, 아주 가슴 꺼내고 매라고 하지?”
“그럼 오늘 바다 못 갈 텐데 괜찮겠어?”
그가 시트를 뒤로 젖혀 주면서 씨익 웃었다. 또 입술을 빨아 와서 곧장 얼굴을 밀어 냈다.
“뽀뽀 좀 그만해.”
“더한 것도 한 사이에 쪼잔하네. 쫌생이 다 됐어.”
“그건 너겠지.”
그러고 보니 잠깐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얼른 남자의 코앞에 손바닥을 펼쳤다.
“향수 사 온다며.”
“아, 그거.”
“내놔.”
“음…….”
그가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빨리 오려고 열심히 일하느라 깜빡했어.”
“하…….”
힘없이 손을 떨구자 남자가 느물느물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오늘만 날인가.”
“빨리 안 왔잖아.”
“나름 빨리 온 거야.”
“넌 거짓말만 하는구나.”
창문 쪽으로 몸을 틀고 눈을 감았다.
“좀 자. 비가 많이 와서 가는 데 시간 좀 걸릴 거니까.”
“말 걸지 마.”
“잘 자, 예쁜아.”
커다란 손바닥이 등을 토닥였다. 몸을 털어 치워 내도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짜증이 치밀었다.
* * *
탁, 탁.
“…….”
탁, 탁, 탁.
“으음…….”
탁, 탁, 탁, 탁.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기어이 잠을 깨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뒤척이다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몽롱한 시야에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직감적으로 동트기 전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끔 언니와 함께 이른 새벽에 출근할 때마다 세상은 이렇게 시린 회색이었다.
탁, 탁.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찰나 또다시 같은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눈을 완전히 뜨니 나를 보고 성기를 흔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깼어?”
“……대단하다, 너도.”
황당을 넘어선 경탄이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퍼 사이를 뚫고 나온 성기를 더 세게 흔들어 댔다.
“자는 게 귀여우니 별수 있나.”
무시하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시린 빛이라 그런지 유독 눈이 따끔거렸다.
“어제 많이 울어서 부었어. 손대지 마. 가라앉게.”
“울긴 누가 울어.”
“참, 안 울었지. 깜빡했네.”
“…….”
“하…….”
낮은 신음과 함께 사정한 남자가 티슈로 손을 닦아 내고 바지를 추슬렀다. 그러곤 내 쪽으로 상체를 넘겨 와 멋대로 시트를 세웠다.
몸이 뻐근해서 더 누워 있고 싶었는데 강제로 일으켜져 뚱한 얼굴을 하는 찰나,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잠시 몸을 굳혔다.
“비는 좀 전에 그쳤어.”
“…….”
회색빛 세상에 커다랗게 자리한 바다는 파랗고 시커먼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나갈래?”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냉큼 나를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쫄았나 보네.”
왜인지 남자는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답 대신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데 일순 처얼썩- 파도 소리가 강하게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남자가 창문을 미세하게 연 탓이었다.
차단되어 들리지 않던 소리가 차 안에 몰아치니 심장이 불쾌하게 요동쳤다. 나는 좀 더 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문 닫아.”
“진짜 쫀 거야?”
떨리는 내 몸을 알아차린 그가 얼른 창문을 닫았다. 다시 조용해지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오고 싶었던 거 아니야? 뭘 이렇게 겁을 먹어.”
“겁먹은 거 아니야.”
“그럼 이건 뭐지?”
자신의 허벅지를 꽉 조이고 있는 다리를 가리키며 장난스레 묻는다. 무시하고 남자를 붙든 채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남자에겐 부정했지만,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들 만큼 커다랗고 시커먼 바다의 첫인상은 공포가 맞았다.
“…….”
그리고 혐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는 얼핏 정열을 품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체념만 가득했다.
될 대로 되어라.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여 주겠다. 그런 식의 수동적인 흔들림.
어렴풋이 동족 혐오를 느끼고 있는 찰나, 고개가 훅 돌아갔다. 남자가 내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코앞에서 생긋 웃었다.
“섹스도 바다도 오빠랑 처음이네.”
“…….”
“그럼 바다에서 섹스하는 것도 처음이겠지?”
어쩐지 그물로 건져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다를 등진 채 섹스를 한 후, 남자가 뒷좌석에서 뭔가를 바스락거리며 가져왔다. 그동안 나는 하반신만 알몸이 되어 그의 성기를 깔고 앉아 아래를 비비대고 있었다.
“뭐야?”
“죽.”
“언제 샀어?”
“너 잘 때.”
어느덧 세상은 환해졌고, 강한 쾌락을 느낀 뒤라 기분도 괜찮아져서 그가 식은 죽을 떠서 입에 가져다주는 걸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여태 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먹을 게 들어 오니 온몸이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래를 치덕대는 것도 멈추고 다가오는 숟가락을 물자,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삐쳐도 밥은 챙겨 먹었어야지. 이런 건 너만 손해야.”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맞아. 약속 안 지킨 놈이 몹쓸 놈이지.”
“알면 됐어.”
씹지도 않고 죽을 삼켜 내자마자 다시 입을 벌렸다. 남자는 순순히 내 입 안을 채워 넣었다.
“다 먹고 나가 볼까?”
“…….”
수저를 문 채로 눈을 굴리자 그가 수저를 빼 가며 말을 이었다.
“파도가 잠잠해졌어. 오늘은 날도 꽤 좋은 것 같고.”
“…….”
“나 있는데 뭐가 무서워. 알잖아. 오빠 힘센 거.”
“한낱 동물 주제에 자연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말 되게 귀엽게 하네.”
그가 웃을 때마다 몸이 같이 흔들렸다.
평소 같으면 반도 못 먹을 커다란 죽 한 통을 싹 비워 내고 나니 그가 잘했다는 듯 볼을 쓰다듬었다. 조물락대는 손을 치워 내고 뒤를 돌아봤다.
그의 말마따나 새벽보다는 파도가 잠잠한 편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보니 시커먼 기운이 사라져서 푸릇푸릇하기도 하고.
하나,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라 막연한 긴장감은 있었다.
“만약에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파도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휩쓸려 가면 어떡할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상상은 극단적으로 해야 재미있다며.”
아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엉덩이를 잡고 앞뒤로 움직였다. 발기한 기둥이 틈 사이에 매끈하게 비벼졌다.
“같이 휩쓸리는 거야?”
“아니, 나 혼자.”
“그럼 얼른 잡아서 구해 줘야지.”
“너는 자연을 이길 수 없다니까.”
“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장담해?”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봤다.
밤새 운전을 했고, 섹스도 여러 번 했는데 그는 피곤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빗물이 제멋대로 말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데도 추하다기보단, 흐트러짐이 섹시했다. 확실히 남자에게선 자연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생명력이 엿보였다.
나는 이마 위로 가닥가닥 떨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넌 이마가 잘생겨서 까는 게 더 나아.”
“참고할게.”
기분 좋은 듯 씨익 웃을 땐 짙은 눈매가 접히고, 오른쪽 광대에는 보조개가 잡히며, 입술이 시원하게 찢어져서 꽤 귀여운 얼굴이 된다. 검지로 보조개를 문지르니 오목한 감각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잠자코 손길을 받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보조개 있는 거 네 덕에 처음 알았어.”
“왜? 살짝만 웃어도 보이는데.”
“딱히 웃을 일이 없기도 하고.”
의외였다. 사나운 외모와 달리 웃음이 헤픈 편인 것 같은데.
“살면서 한 번도 안 웃진 않았을 거 아니야.”
“웃어도 그딴 거 짚어 줄 만큼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 없어.”
관심은 나도 없는데. 말로는 내뱉지 않았다. 왠지 그가 아주 기분 좋아 보여서 그냥 내버려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원하는 대로 해 줄까 싶었다.
‘근데 우리 예쁜이는 오빠한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네?’
‘뭐?’
‘하다못해 이름 한번 안 물어.’
불빛을 보고 나면 어둠이 더 캄캄한 법이다.
“있잖아.”
보조개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뭐?”
“나이는?”
남자는 꽤나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
“…….”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직한 음성을 귀에 새기며 나는 달아오른 아래를 떼어 냈다.
“나가자.”
옷을 챙겨 입고 차에서 내리니 남자의 말마따나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짠 내가 신기해서 킁킁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따르는 남자를 비웃었다. 오른쪽 허벅지가 유독 두꺼워진 그는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 아쉬운 듯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큰 만족감에 잠긴 얼굴이었다.
“이리 와.”
한쪽 팔을 뻗는 그에게 순순히 몸을 묻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난생처음 모래사장에 진입했다.
오랜 장마로 질척한 모래는 신발을 마구 더럽혔지만, 나나 남자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철썩-. 처얼썩-.
쿵. 쿵.
자연의 소리가 심장에 요동을 주었다. 마른 입 안을 혀로 축이며 좀 더 달라붙자, 남자가 어깨를 감싸 왔다.
“갑자기 바다는 왜?”
또 캐묻는 타이밍인가 보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파도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살면서 딱 두 번 바다에 갈 뻔한 적이 있었어.”
“첫 번째는?”
“어릴 때 입양된 집에서 가족 여행으로.”
“…….”
“아홉 살 때였는데, 나는 처음으로 가는 가족 여행이라서 되게 들떴어.”
“그랬는데?”
“그래서 냉큼 차에 올라탔는데.”
처얼썩-.
“도착해 보니까 보육원이더라.”
“…….”
“파양당했지, 뭐.”
“…….”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양어머니가 동생을 낳았거든.”
“…….”
“임신을 못 해서 나를 데려다가 키운 건데, 아기가 태어났으니까 굳이 나까지 키울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 이해하라며 보육원 원장이 나를 달랬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권민철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두 번째는 언니가 가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어.”
“…….”
“혹시 모르잖아. 언니도 나랑 같이 지내는 게 싫었는지. 그래서 거절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언니가 불쌍한 거야. 언니도 나처럼 바다를 가 본 적이 없거든.”
“…….”
“그래서 그냥 같이 가 주려고 마음먹었는데, 사라졌어.”
“…….”
“사라진 다음에 돌아와서 자살했고.”
남자는 굳은 얼굴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묻지는 않았다.
“딱히 좋은 기억이 없는데 왜 여기가 오고 싶었을까.”
남자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며칠 전에 언니 기일이었어.”
“…….”
“자느라 그냥 지나갔지만.”
내가 피를 흘리며 무력하게 잠들어 있을 때 언니의 기일은 지나갔다.
나는 한 번도 언니의 기일에 멀쩡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 언저리만 되면 그렇게 잠이 와서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남자가 긴 한숨을 뱉었다.
“하필 그때 내가 자리를 비웠네.”
그러게 말이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언니 유해는 바다에 뿌려 주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한강에 뿌렸어.”
“잘했어. 어차피 물길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알아. 나도 거기까지 생각했어.”
남자의 조용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가까워진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이제 언니는 바다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
철썩, 철썩. 의지 없이 몰아치는 파도가 한순간 남자와 내 발등을 덮었다. 축축해진 발을 떨떠름하게 털어 내다 그냥 신발을 벗어 던졌다.
다시금 파도가 밀려와 맨발을 적셨다. 네다섯 번, 그렇게 파도에 발을 내어 주고 있다가 남자를 놓고 조심스레 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어느새 수면은 무릎 위까지 차올라 있었다.
“윤서하.”
낮은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복잡한 얼굴로 서 있었다.
‘쓸 만하게 만드는 중이라고 전해.’
“만약에 파도가 머리 위까지 쳐서 나를 휩쓸어 가면.”
“…….”
“그냥 그렇게 둬.”
잘생긴 눈썹이 마구 찌푸려졌다.
“자연에 순응하는 게 동물의 역할이야.”
다시 남자를 등지고 걸음을 떼는데, 첨벙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이 번쩍 들렸다.
한순간에 나를 어깨 위에 걸친 남자가 성큼성큼 바다를 벗어났다.
“돌아가자.”
“뭐 하는 거야. 내려.”
“싫어.”
“왜 이래?”
단숨에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차로 돌아온 남자가 나를 조수석에 던져 놓고 벨트로 가뒀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운전석에 앉는 남자를 바라봤다.
“실컷 놀게 해 줄 것 같더니.”
“…….”
그가 무시하고 시동을 켰다. 망설임 없이 후진하는 남자의 턱은 어제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핸들을 돌리는 동작은 거칠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길게 늘어선 해안선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 눈으로 감상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 봐.”
그러나 남자는 그것마저 방해했다.
“나 보라고.”
“왜?”
그가 다짜고짜 도로 한복판에 차를 멈춰 세웠다.
빠앙! 빵! 뒤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남자는 깡그리 무시하고 내 턱을 잡아 돌렸다.
새까만 눈동자로 한참 나를 담던 그가 슈트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타악, 라이터에서 솟은 불을 빨며 그가 사납게 속삭였다.
“파도가 너를 휩쓸어 가면 바다에 불 질러 줄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바보야? 물에 어떻게 불을 질러.”
“극단적인 게 재미있잖아.”
“…….”
“드라마틱하게 가 보자.”
“…….”
빠앙! 빵!
“그 전에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불 지르겠다. 출발이나 해.”
“고개 돌리지 마.”
“…….”
“내 얼굴이나 감상하라고.”
알겠다고 하기 전엔 도저히 차를 출발시킬 것 같지 않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남자가 액셀을 밟았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와 라이터를 빼앗아 똑같이 불을 붙였다.
남자는 운전을 하는 내내 이쪽을 흘깃댔다. 의심받는 게 귀찮아서 아예 몸을 운전석 쪽으로 틀자, 그제야 그가 입매를 살짝 풀었다.
“근데 너 좋다는 여자 되게 많았을 거 같은데, 아무도 보조개 이야기 안 해 줬어?”
완벽하게 떨어지는 옆 선으로 연기를 뿌리며 물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섹스도 잘하고, 몸도 좋고…… 착하고.”
“다른 건 인정하는데, 착하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아무튼, 보조개 이야기 정말 아무도 안 해 준 거야?”
“응.”
“민영이도?”
“그렇다니까.”
뻔뻔하게도 대답한다.
“다들 눈이 삐었나.”
시큰둥하게 말하자 남자가 옅게 웃었다. 나는 호선을 그린 남자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바로 집에 갈 거야?”
“어. 집에 가둬야지, 안 되겠어.”
“왜?”
“예뻐서 그런가.”
“…….”
“하늘로 승천할 거 같아.”
늘 하던 헛소리 같은데 딱히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농담을 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굳어 있어서 그런가.
“천사 같다는 거야?”
필터를 잘근대다 대신 덧붙이자, 그제야 남자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봐도 네가 예쁘지?”
“……너한테 세뇌당해서 그래.”
“예쁘다, 예쁘다 한 보람 있네.”
“됐고. 집에 가기 전에 어디 들렀으면 좋겠는데.”
“어디?”
“나 있었던 교도소.”
“거긴 왜?”
돌아보는 얼굴엔 전부 걷어 내지 못한 웃음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덤덤한 척 표정 연기를 하며 담배를 물었다.
“민영이 면회 가려고.”
“…….”
“왜? 안 돼?”
약간은 떠보는 의도가 담긴 물음이었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짧은 고민을 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건 없지.”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쩌어어억-.
* * *
“혼자 갈게.”
“왜? 같이 가. 피차 아는 사이잖아.”
“그래도 한때는 자기 애인이었는데, 나랑 붙어먹는 거 알면 기분 나쁠 거야.”
“알 게 뭐야.”
남자는 시큰둥한 얼굴로 계속해서 함께 가겠다 우겨 댔다. 면회 시간이 다가오는 중이라 짜증이 났지만 애써 참고 운전석으로 넘어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나한테 제일 잘해 준 애야. 민영이한테 미움받기 싫어.”
“…….”
“기다려. 응?”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아양을 떠니 그가 기세를 꺾었다. 그 틈을 노려 얼굴을 잡아 내리곤 입술을 맞댔다.
쪽, 쪼옥. 입술을 빨다가 혀를 밀어 넣자 그가 냉큼 입을 벌리고 나를 빨아들였다. 허리를 감은 손은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올라왔다.
“시간 다 됐어.”
“…….”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오니까.”
“이건 어쩌고.”
남자가 그새 부푼 아래를 가리켰다.
“끝나고 실컷 빨아 줄게.”
“…….”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빤히 보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내 신발은 바닷가에 두고 와서 그의 구두를 빼앗아 신어야 했다. 한참 큰 구두를 질질 끌며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창문을 끝까지 내려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틀에 양팔을 걸치고 물끄러미 응시하는 얼굴은 바닷가에서처럼 복잡하고 불안해 보였다.
나는 덤덤하게 그를 응시하다 건물로 몸을 틀었다.
6년간 몸담았던 교도소에 다시 발을 들이니 표정이 버석하게 말라붙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민영과 독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웬일이야. 네가 날 만나러 올 줄은 몰랐어.”
그녀는 여전히 밝고 명랑했다. 그 모습이 언니와 닮아서 남들보다 빨리 친해질 수 있었는데.
“내 옷 입었네? 네가 입으니까 옷이 산다, 얘.”
“…….”
“나가니까 얼굴도 더 좋아졌어. 거기서 더 예뻐질 수 있었던 거야? 부러워 죽겠어.”
“…….”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기껏 여기까지 와 놓고.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나는 교도소 안에서 언니와 닮은 그녀를 늘 관찰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닮은 모습을 뽑아내 언니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과장된 그녀의 태도를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 나가고 나니까 여긴 너무 심심해. 우리 순진한 서하, 이것저것 가르치는 맛이 있었는데.”
민영은 평소와 달랐다.
내가 찾아온 게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유달리 목소리를 높이 내고, 눈썹을 들썩이고, 깔깔대며 웃었다.
“민영아.”
“응?”
“권민철 알지?”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잠깐의 정적 끝에, 나는 남자에 대해서도 아느냐고 물었다. 민영은 남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내 눈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탓하려고 온 거 아니야.”
“…….”
“그냥, 궁금해서 온 거야.”
진심이었다. 나는 민영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 박하 맨션으로 보낸 거, 혹시 그 사람이 시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