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날 이후로 남자는 툭하면 나에 대해서 캐물었다.
남자가 나를 찾아와 하는 일에 끼니를 챙기는 것, 몸을 섞는 것 외에 캐묻는 것까지 추가되었다. 귀찮아서 무시하려고 하면 향수를 들먹여서 마지못해 입을 열게 되었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사이라고?”
“응.”
“친언니도 아닌데 복수할 정도면 많이 친했나 봐.”
“그래.”
“얼마나 친했는데?”
나는 남자가 식탁에 올려 둔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황당하게 바라보다 눈을 치켜떴다.
“나 케이크 싫어한다니까.”
“맛만 봐. 맛만. 얼마나 친했어?”
“많이.”
“언제 만났는데.”
“아홉 살.”
“그때부터 보육원에서 쭉 같이 지낸 거야?”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귀찮아 죽겠다. 남자가 플라스틱 포크로 케이크를 푸욱 떴다. 예쁘게 모양 잡힌 케이크가 순식간에 망가졌다.
“보육원에서 같이 살다가 나 열아홉 생일 지나자마자 언니 따라 퇴소했어. 그때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고. 됐지? 케이크 치워.”
“그랬구나.”
분명히 치우라고 했는데도 남자는 그걸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 유명한 데야.”
“…….”
“이거 산다고 한 시간 줄 섰어. 성의를 봐서라도 한 입 먹어 봐.”
누가 그딴 성의를 보이라고 했나. 난데없이 덜렁 사 들고 온 주제에 생색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쭉 뺐다.
이젠 끼니에 이어 디저트까지 챙기고 난리다. 밥 먹는 것도 귀찮은데 이런 거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아, 보다 단호한 얼굴을 하니 그제야 남자가 손을 거뒀다.
“사실 오늘 내 생일이야.”
그러곤 뜬금없는 자기 정보를 밝혔다.
“그래서 케이크나 나눠 먹으려 했더니, 섭섭하네.”
“…….”
“난 이제 우리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주는 거야?”
“친하긴 뭐가 친해.”
시큰둥한 대답에 그가 눈에 띄게 과장된 한숨을 뱉었다. 연기 못하는 배우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씹질 횟수가 얼만데 냉정해라.”
“헛소리 멈추고, 이제 하자.”
파블로프의 개는 옆집 남자를 보기만 해도 다리 사이로 침을 흘린다.
달은 몸을 비틀며 바라보는데, 남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케이크를 난도질하기만 했다. 답답해서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딴 거 사 온다고 도중에 나갔으면, 마저 해야 할 거 아니야.”
케이크가 싫은 것도 있지만, 그가 섹스할 타이밍에 돌연 나가 버리는 바람에 혼자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도 지금 내 심기를 뒤틀리게 하는 큰 요인이었다.
나를 찾아와 밥을 먹이고, 섹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섹스를 하는. 평소의 루틴을 저딴 케이크로 어그러트린 것이다.
덕분에 나는 혼자 남은 그 시간 동안 다시 밀려든 잡념에 빠져 있어야 했다.
“내가 요 며칠, 네 이야기 들으면서 생각을 해 봤거든.”
“뭘 생각해.”
“나는 이제 네가 고아인 것도 알고, 피 안 섞인 언니 때문에 사람을 찔렀다는 것도 알고, 네 이름도 알고, 나이도 알고, 케이크를 싫어하는 것도 알고, 김밥보다 떡볶…….”
“됐고. 본론만 말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늘어놓는 게 답답해서 재촉했다.
“아무튼, 너에 대해서 제법 알게 되었단 말이지.”
“네가 시도 때도 없이 캐물었으니까.”
“그래. 물었으니까.”
그가 포크를 케이크 중앙에 푹 꽂아 넣었다.
“근데 우리 예쁜이는 오빠한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네?”
“뭐?”
“하다못해 이름 한번 안 물어.”
“…….”
그러고 보니 붙어먹은 지 꽤 되었는데도 나는 아직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들은 적도 없고, 물어본 적도 없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몸만 섞는 사이에는 이 정도 거리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되레 캐묻는 그가 이상한 거 아닌가.
“안 궁금한 얼굴이네.”
“응.”
“솔직도 하셔라.”
“이름 몰라도 섹스하는 데는 아무 지장 없잖아.”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뭐. 네 섹스관 존중할게.”
“그럼 이제…….”
“참, 내가 말 안 했지?”
대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생겨서 가 봐야 돼.”
“……뭐?”
“안녕.”
가차 없이 뒤돌아 가 버리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쫓았다.
그새 신발을 신고 있는 남자의 팔을 붙잡자, 그가 탁탁, 구두코를 바닥에 두드리며 나를 돌아봤다.
“왜?”
“어디 가?”
“말했잖아. 일 있다고.”
“거짓말하지 마. 백수 한량 주제에.”
“얘 봐라. 내가 백수면 무슨 돈으로 여태 널 먹였겠어.”
백수 한량답게 여태껏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찾아왔던 주제에 남자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도 본업이 있는 사람이야.”
“한 번도 일하러 안 갔잖아.”
“달콤한 휴가였지.”
그새 남자는 신발을 다 신은 뒤였다. 정말로 나갈 듯한 뉘앙스라 마음이 초조해졌다. 꽈악, 슈트를 붙잡았지만, 그는 꽤 단호한 얼굴로 내 손을 떼어 냈다.
“그, 그럼 몇 시에 오는데?”
“글쎄. 오늘은 생일 파티가 있어서. 못 올 듯싶은데.”
“…….”
“그리고 휴가가 워낙 길었어서, 당분간 못 볼 거야.”
“……뭐?”
“가진 돈은 있어?”
대답 대신 애타게 올려다보자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끼니는 이걸로 챙기고.”
그러곤 홀연히 나가 버렸다.
쿵, 가차 없이 닫히는 문이 충격적이었다. 최근 들어 이렇게 당황스러운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세상이 나에게 익숙한 곳이었다고…….
남자의 카드를 손에 쥐고 멍청하게 서 있던 나는 카드를 신발장에 던지고 소파로 향했다. 한순간 모든 의욕과 기운이 빠져나가 걸음걸이가 축축했다.
소파 손잡이 위에는 남자가 주고 간 담배와 라이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찰나였다.
삑삑삑삑-.
도어 록 소리에 고개가 퍼뜩 돌아갔다. 다시 문이 열리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밝히는 놈이 그냥 갈 리 없지.
그도 몸이 달았는지 신발을 벗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나는 필터를 빨며 기대하는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
“이거 깜빡해서.”
그가 내 손에 들린 담배와 라이터를 쏙 빼 갔다.
“왜 또 줬다 뺏어?”
“빌려주는 거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얼이 빠져 바라보니 남자가 내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 다시 몸을 돌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또 슈트 자락을 붙들었다.
“왜?”
“꼭 지금 가야 돼?”
“가야 된다니까.”
“…….”
“예쁜아, 놔.”
아무리 생각해도 바쁘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백수는 아니라고 쳐도, 이렇게 가야 하면 밥을 먹기도 전에 섹스부터 했을 인간이다. 케이크 따위에 허비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하려 들었을 거고.
갑자기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식탁에서의 대화를 복기하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케이크 안 먹어서 삐쳤어?”
“살짝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
“…….”
“정확하게 말하면 예쁜이 무관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야.”
“…….”
“그래서 일이나 하면서 기분 전환 할까 봐.”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안 바쁜데 바쁜 척 사람을 애태우고 있는 거다, 이 쫌생이는.
남자는 대체로 착하지만, 가끔 이렇게 치사할 때가 있다. 울컥 짜증이 솟아 옷자락을 던지듯 놓았다.
“그래. 일 열심히 해.”
피우고 있던 담배도 대충 바닥에 던진 뒤, 소파에 누워 등받이에 얼굴을 묻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외면하기 위해서였다.
민영의 소파는 2인용짜리 작은 소파라, 내 몸이 전부 들어가기에는 부족하다.
다리를 구부리고 몸을 말아야 가득 차는데, 그 자세로 한껏 웅크리자 이내 남자가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어 록을 해제하고, 문을 열고, 닫고.
다시 혼자 남은 나는 몸을 조금 더 말고 얼굴을 깊이 묻었다. 싸구려 가죽 소파에선 설명하기 힘든 불쾌한 냄새가 났다.
코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운이 빠져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유난히 세상이 적막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가 그친 모양인데, 그 고요가 모든 걸 깊이 가라앉히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올해 장마가 길 거라고 했는데, 벌써 끝난 걸까?
‘밖에 비 와. 나가자!’
‘아, 싫어. 언니는 왜 맨날 비 올 때마다 난리야.’
‘오랜만이잖아. 좋지 않아? 시원하고, 냄새도 좋고.’
‘냄새가 뭐가 좋아. 비 오면 하수구 냄새 올라와서 구리기만 하구만.’
‘잘 맡아 봐. 흙냄새도 나고, 풀 냄새도 나고, 얼마나 좋은데.’
다시 잡념이 밀려들었다.
빗소리조차 없는 조용한 세상 속에서 머릿속이 두서없이 복잡해졌다.
무의식중에 코를 훌쩍였지만 구린 가죽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몸에 쩍쩍 달라붙는 감촉도 기분 나빴다.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장마 끝나면 가자. 귀찮아. 그보다, 언니. 이것 좀 봐 줘. 크림이 이상해.’
‘응. 어디 봐.’
어쩐지 막 출소했을 때보다 더 깊이 잠겨 가는 기분이었다.
‘언니 뭐야?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화도 안 받아!’
‘…….’
‘일주일 지났어. 그동안 대체…… 꼴이 왜 이래?’
“흡…….”
숨이 크게 삼켜졌다.
지난번처럼 내 삶과 관련 없는 남자를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더 나빠졌다. 애초에 그가 나를 버리고 갔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것 아닌가.
이건 남자 때문이다.
남자가 툭하면 과거를 캐묻는 바람에, 묻어 둔 기억이 강제로 선명해진 거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이렇게까지 다 떠오르진 않았는데. 이 정돈 아니었는데.
‘죽어!’
다시금 코를 훌쩍였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었기 때문인지 미세하게 남자의 상쾌한 향도 공기 중에 감돌았다.
고작 향수 하나 얻겠다고 과거를 더듬은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뭘 믿고 잘 알지도 못하는 옆집 남자에게 내 이야기를 줄줄 해 댔을까. 이게 뭐라고. 이따위 게 뭐 대단하다고. 언제든지 나를 버릴 수 있는 이방인인데.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그러면서도 코는 연신 향을 끌어 담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소파에서 얼굴을 떼고 몸을 돌렸다. 남아 있는 냄새를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
“……왜 있어?”
현관 앞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러하듯 고요한 공기를 품고서.
혹시 헛것인가 싶어 눈두덩을 비비는데 손등이 축축해졌다. 뭐지? 의아해하는 순간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나를 번쩍 들어 제 품에 안았다.
“섹스 안 해 준다고 우는 거야?”
울어?
“변태 다 됐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그가 나를 안은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고개를 들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양 볼을 감싸 왔다.
“예쁘게도 운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울긴 누가 울어.”
단호한 말과 달리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시 말을 고쳐 하려고 했지만 이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이 칼칼해서 이로 아랫입술을 꾸욱 짓눌렀다.
“…….”
“…….”
그는 말없이 내 얼굴을 쓰다듬기만 했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의 손바닥에서 나는 냄새만 맡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예쁜아.”
“…….”
“너 생리한다.”
* * *
민영의 집에 있던 생리대를 부착하고 나왔을 때, 남자는 혈이 묻은 바지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속옷 없이 짧은 바지만 입고 있었던 탓에 흘러나온 게 그에게도 조금 묻었다.
실례를 한 거니 미안해야 맞지만 그런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껏 남자가 가지 않았는데, 생리 때문에 섹스를 못 하게 생겼으니 억울할 뿐이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허벅지 위에 안겨 들자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가차 없이 가 버릴 땐 언제고 지금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여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참느라 나만 죽어나게 생겼네.”
“나도 참아야 되거든?”
그는 자위라도 하면 되지, 나는 뭔가.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나선…….
“생리 중에는 섹스하면 안 되겠지?”
내 멍청한 물음에 남자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무리 떡 치는 게 좋아도 자기 몸 소중한 줄은 알아야지.”
“별로 안 소중한데.”
쓰읍, 그가 나무라는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았다. 발기한 성기가 생리대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바람에 더 몸이 달았다.
이 적막한 세상에 짜릿한 쾌락이 내리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텐데.
“좋게 생각해.”
“안 좋은데 뭘 좋게 생각해.”
“참았다가 하잖아? 그럼 훨씬 좋아.”
“뭐래.”
“나 못 믿어?”
“응.”
“오빠가 섹스를 그렇게 잘하는데?”
“…….”
남자가 부어오른 내 눈두덩을 엄지로 문질렀다.
“생리 끝나면 실컷 박아 줄 테니까, 참아 봐.”
“그럼 너도 참아.”
“…….”
“나만 못 하는 거 억울해. 자위도 하지 마, 너.”
남자의 입꼬리에 웃음이 맺혔다.
“내가 왜?”
“…….”
“나는 안 박아도 쌀 방법이 수십 가지야.”
눈두덩에서 내려온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입에 물려도 되고.”
“누가 빨아 준대? 안 할 거야.”
가슴으로도 내려왔다.
“이 사이에 끼워도 되고.”
“건들기만 해.”
겨드랑이 사이에도.
“여기다 쑤시거나.”
허벅지 사이.
“저번에 이걸로 꽤 많이 뺐는데, 넌 모르지?”
“손 치워라.”
양손을 깍지 껴 온다.
“대딸도 좋고.”
“분명히 말했어. 난 안 해 줄 거야. 꿈 깨.”
“발로 밟아도 돼.”
그건 좀 괜찮은 거 같은데. 얄미워서 밟아 주고 싶은 심정이라 잠깐 머뭇대는 사이 그가 입술을 빨아 왔다.
혀를 넣지 않고 입술로만 쪽쪽거리는 짓거리가 왠지 낯설게 느껴져 고개를 뒤로 쭉 빼자, 남자의 얼굴이 따라왔다. 그걸 피하느라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손이 잡혀 있어서 중심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도 꿋꿋이 따라붙은 그가 이번엔 눈두덩을 입술로 지분거렸다. 지난번처럼 속눈썹을 핥는 그에게 이마를 쾅 박자 그제야 웃으며 떨어져 나갔다.
“이리 와.”
양팔을 벌리고 안기라는 듯이 구는 남자를 못마땅하게 훑어보다 그냥 폭닥 안겼다. 쾌락을 못 느끼니 온기라도 좇아야지. 냄새라도 맡아야지.
여전히 다리 사이를 짓누르는 성기를 의식하며 몸을 꾸욱 내리자 그가 내 귓가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꼬시지 마.”
내가 쏘아붙였다.
귓가에 흘리는 웃음소리가 간지러워서 고개를 털어 내고 남자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일 있다는 거 거짓말이었지?”
“진짜야.”
“웃기지 마. 나 엿 먹이려고 나가는 척 쇼한 거잖아.”
“삐친 거 알아줬으면 해서 쇼한 건 맞지만 가긴 가야 돼.”
“언제?”
“해 지기 전엔 출발해야지.”
얼마 안 남았는데…….
고개를 들어 마주 보자 그가 다시 뽀뽀를 해 왔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뭐?”
“어차피 섹스도 못 하는데 같이 있어 봐야 서로 몸만 달지, 안 그래?”
“…….”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남자랑 할 건 섹스뿐이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색기를 줄줄 흘리는 놈이 옆에 있어 봐야 애만 탈 게 뻔하고. 맞는 말인데도 또 혼자 남을 생각을 하니 다시금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있잖아.”
나는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생일 파티 나랑 하면 뭐가 좀 달라져?”
“…….”
“그냥 물어보는 거야. 확인차.”
남자의 입술이 잠깐 안으로 말렸다가 다시 나왔다.
“왜? 축하해 주려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네가 축하해 준다면…….”
뜸을 들이는 것에 침이 무겁게 넘어갔다.
“오늘은 그냥 같이 있을까.”
“……일은?”
“하루 더 미루지, 뭐.”
“꼭 가야 하는 것처럼 말했잖아.”
“축하해 준다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아무래도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게 맞는 것 같다. 재수 없는 놈. 노려보자 그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남자가 다시 등장한 후로 숨통이 좀 트이지 않았나. 그의 진한 향수 냄새와 헛소리 따위가 머리를 개운하게 만들었고. 섹스는 불가능하지만, 혼자 있으면 또 언니 생각이 나겠지…….
당장 내일부터는 어떡하나 싶지마는,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먼저니 잠깐 생각하다 남자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어디 가?”
대답 대신 힐끔 훑어보곤, 식탁에 가서 엉망이 된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그런 나를 발견한 남자가 담배를 물려다 말고 허공에 손을 멈췄다.
“해. 나랑.”
“…….”
“같이 먹어 줄게.”
그가 벙찐 얼굴로 가죽 소파에 재를 털었다. 저러니 소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원인을 찾아 눈으로 힐난하는데, 돌연 남자가 고개를 젖히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아, 씨발.”
“왜 욕해?”
“귀여워서.”
“별 게 다 귀엽다, 넌.”
“그러니까. 별 게 다 귀엽다, 넌.”
옆으로 가서 앉을 때까지도 남자는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길고 굵은 목과 울대, 턱선이 뿜어내는 남성성에 저절로 눈길이 그쪽으로만 향했다.
성격처럼 그는 슈트도 가볍게 차려입는다. 하얀 셔츠에 까만 재킷, 넥타이는 없고 단추는 늘 두 개씩 풀어 헤쳐 두는데 그래서 목이 잘 보이긴 하지만, 회사도 저러고 나가나 싶어서 한심스러웠다.
어쨌거나 나는 무릎에 케이크를 올려 두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자니까.”
“그러게. 하고 싶다.”
음험해진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니 남자의 다리 사이가 아까보다 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그것을 응시하는데 남자가 고개만 내 쪽으로 비틀어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과 눈동자, 잇새에 끼워진 담뱃불이 전부 붉었다.
“노래도 해 줄 거야?”
“애야?”
“애 하지 뭐. 몇 살 할까? 누나가 정해 줘.”
“또라이.”
기가 막혀서 픽, 웃음이 나왔다. 역시 그는 머리를 희석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케이크에 꽂힌 포크를 뽑았다. 묻어 있는 크림을 혀끝으로 살짝만 핥아 보니, 과연 남자가 한 시간 걸렸다고 생색을 낼 만큼 맛은 괜찮았다. 그렇다고 좋다는 건 아니지만.
“어때?”
“그냥, 뭐.”
“나도 줘.”
남자가 상체를 바로 세우곤 입을 벌렸다. 군말 없이 크림과 빵을 떠서 먹여 주었다.
“맛있네.”
씨익 웃는 입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가 내 턱을 잡아당기고 입술을 맞대 왔다. 그러곤 입 안에 있는 걸 내 쪽으로 넘기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 거부도 못 하고 꿀꺽 삼켰다.
남자는 크림으로 질척대는 내 입 안을 혀로 샅샅이 핥아 낸 뒤에야 떨어져 나갔다.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뭐 어때, 우리 사이에.”
떨떠름하게 입 안으로 혀를 굴리는데 그가 케이크와 나를 번갈아 보며 노골적인 한숨을 뱉었다.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뭘?”
“있어, 그런 게. 못 하게 된 마당에 말해 봐야 속만 상하지.”
“…….”
“그건 나중에 하고.”
남자가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이리 와.”
시키는 대로 케이크를 내려놓고 다시 안겼다. 마주 보고 빈틈없이 안겨 든 자세가 꼭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했다. 물론 다리 사이의 물건은 좀 이질감이 들지만, 참아야지 별수 없다.
두꺼운 팔뚝을 손으로 슥슥 쓸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예쁜아.”
“응.”
“왜 울었어?”
“안 울었어.”
냉큼 대답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에피소드 쌓아야지. 향수가 머지않았어. 힘내 봐.”
“…….”
“진짜 섹스 안 해 줘서?”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게 그렇게 좋아?”
“지도 좋아 죽으면서.”
“그래도 난 울 정도는 아니야.”
“안 울었다니까.”
“네, 네.”
고집스럽게 우겼지만, 딱히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얄미운 귀를 쭉 잡아당겼다.
“너랑 하면 아무 생각 안 나서 좋아. 아프고 좋기만 하니까.”
“…….”
“그런데 아깐 네가 섹스도 안 하고 그냥 가 버리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원치 않는 케이크를 강제로 먹어서인지, 아니면 다시금 피어오르려 하는 기억들 때문인지. 물리적인 건지 추상적인 건지. 확실한 건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남자의 목에 코를 묻고 후욱, 그를 빨아들였다.
“너무 많은 생각이 났을 뿐이야.”
“예를 들면?”
“…….”
“무슨 생각이 났는데.”
“……스파츌라가 뭔지 알아?”
“뭔데?”
“케이크에 크림 펴 바르는 도구 있어.”
“아아, 쇠로 된 작대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나를 좀 더 깊이 안았다. 이미 틈 없이 안겼다고 생각했는데도 더 파고들 구석이 있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웠다.
“언니는 그걸로 자살했어.”
“…….”
6년 전, 여름. 언니는 장마가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밝고 명랑한 평소와 다른 고요한 분위기를 품고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날 새벽 부러진 스파츌라의 단면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나는 그때 자고 있었는데.”
“…….”
“일어나니까 욕조는 피바다가 되어 있었어.”
“…….”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을 때.”
“…….”
“언니가 죽었어.”
점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연에 빨려가는 듯해 나는 다급히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빨아 줄까?”
“…….”
“아까부터 계속 세우고 있었잖아. 빨아 줄게.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더듬더듬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남자가 나를 도로 들어 앉혔다.
“안 해 준다며.”
“마음 바뀌었어. 너도 좋잖아.”
다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가 내 몸을 팔로 감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뭐야. 밝히는 놈이 왜 안 어울리게 튕겨.”
“우는 애한테 좆 물리는 취미 없어.”
“안 울었다니까.”
쏘아붙이다 기대고 있던 남자의 재킷이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울컥 짜증이 솟구쳐 애꿎은 그의 어깨를 때렸다.
“너 때문이야. 네가 물어서.”
“…….”
“기분 괜찮아졌는데 왜 또 짜증 나게 해.”
“그래, 미안해.”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가 나를 옥죄고 있어서 떨리는 몸을 억지로라도 억누를 수 있다는 거였다.
“더 세게 안아.”
내 명령에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몸뚱어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조여들었다.
만약 사람이 공기로 이루어졌다면 진작에 터지지 않았을까. 내 몸이 뻐엉, 터져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남자라면 할 수 있을 거다. 힘이 넘쳐 나니 말이다.
“좋겠다, 넌.”
“뭐가?”
“힘세서.”
“너도 못지않아. 방금 네가 때린 어깨 부서지기 직전인데, 안 보여?”
그가 일부러 맞은 어깨에 힘을 툭 풀었다. 남자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며 내 몸도 같이 기울었다.
그 반동으로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고, 또 반대로, 또 반대로, 재미가 들렸는지 좌우로 번갈아 가며 몸을 흔드는 바람에 어지러워서 그만하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힘 필요하면 말해. 빌려줄게.”
“어떻게?”
“이렇게.”
다시금 몸이 꽈악 조여들었다.
“해 달라는 대로 해 주지, 뭐.”
“…….”
“남아도는 게 힘이니까.”
“그럼 방금 한 거 다시 해 봐. 옆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노려볼 땐 언제고.”
“하라면 해. 대신 좀 약하게.”
“네, 누나.”
그가 다시 몸을 흔들었다. 아까보단 가벼운 동작이라 흔들림이 훨씬 편안했다. 이런 걸 요람 같다고 하는 건가.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짐작했다.
그에게 안긴 채 몸에 힘을 풀곤 남자를 힐끔댔다. 나도 모르게 훌쩍 코를 삼키기도 했다.
“힘 빌려준다는 거, 약속할 거야?”
“그래.”
“못 믿겠는데.”
“내 좆에 대고 맹세할게.”
“왜 그딴 거에 맹세해.”
“오빠 자부심이거든. 믿음직스럽지 않아?”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가 흉통을 타고 내 몸에 진동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
“응?”
“생일 파티 그냥 이러고 마는 거야?”
고작 케이크 한 입 나눠 먹은 게 전부라 약간 신경이 쓰였다. 혹여, 그가 제 친구들에게로 훌쩍 떠나 버릴까 봐. 조금 전에 내가 때리기도 했고.
내심 걱정하고 있는데, 남자가 은근하게 속삭여 왔다.
“선물 주게?”
“나 돈 없어.”
“둘 중에 골라.”
“뭘?”
“1번, 생일 노래를 불러 준다. 2번, 축하한다고 말하고 뽀뽀한다.”
본인 생일에 한 시간 동안 줄 서서 케이크를 사 오는 거 보면 태어난 날에 꽤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한데, 바라는 게 참 소박하다. 그 정도라면 못 해 줄 것도 없다.
“노래는 부를 기분 아니야.”
“그래. 그럼 2번.”
“…….”
“뽀뽀는 하고 싶은 데 아무 데나 찍어. 난 다 좋으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내려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입을 여는데, 어째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동안 남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새, 생일 축하해.”
“고마워.”
“…….”
“다음?”
뽀뽀야, 온몸을 물고 빤 사이에 별스럽지 않다.
나는 곧장 그의 귀 뒤에 입을 맞췄다. 쪽, 짧게 떨어지는 입술에 그가 또 몸을 울리며 웃었다.
“너랑 있으면 내가 기생물인가 싶어.”
“무슨 소리야?”
“냄새가 본체고 나는 거기에 기생하는 몸뚱어리인 거지.”
“…….”
무시하고 몸을 기대니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뭐야, 진짜 그런 거야?”
“…….”
“섭섭하다. 네가 좋아 죽는 섹스는 내 몸이랑 하는 건데, 응?”
“졸려.”
“가는 사람 붙잡았으면 더 놀아 줘야지. 어딜 자.”
사실은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그냥 감았다.
“좀 잘게.”
“웃기지 마. 눈 떠.”
“…….”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든 척을 했다.
“안 속아.”
“…….”
“진짜 잘 때는 이것보다 더 애기 같은 얼굴이라서 모를 수가 없거든.”
“…….”
“어? 입꼬리 올라간다.”
급히 입을 앙다물었다.
“속눈썹 떨리는데.”
안 되겠다 싶어 아예 안 보이게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근데 우리 예쁜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을까.”
“…….”
“뽀뽀가 부끄러웠을 리는 없고. 좆도 빤 사이에.”
“…….”
“생일 축하해, 하고 애교 부린 게 부끄러워?”
“누가 애교를 부려. 미쳤어?”
발끈해서 받아쳤지만, 고개는 들지 못했다.
“귀엽길래 애교가 좀 섞인 줄 알았는데, 착각인가?”
“그래. 너 착각 잘한다며.”
“그럼 일부러 애교 부린 거 아니고 그냥 타고난 귀여움인 거야?”
“어.”
대답하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곧장 눈이 마주친 남자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예쁜 것도 알고, 귀여운 것도 알고.”
“…….”
“모르는 게 없네.”
“너 진짜 얄밉다.”
쪼개는 입술이 짜증 나서 손가락으로 주욱 잡아 늘렸다. 우스꽝스럽게 입이 벌어져도 잘난 낯짝은 유지되어 썩 보람 없었다.
“아, 큰일 났다.”
그가 내 손을 떼어 내고 제 목을 두르게 하더니 코를 맞대 왔다. 슥슥, 높고 곧게 뻗은 콧날이 내 콧등을 긁어 댔다.
“갈수록 예쁜이 귀여움에 함락되는 기분인데.”
“작작 해라.”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얼마나?”
“빠르면 나흘 정도.”
“느리면?”
“장담 못 해.”
“…….”
고개가 아래로 떨궈지려는 찰나 쪼옥, 말캉한 입술이 또 닿았다.
“최대한 빨리 와 볼게.”
“…….”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오빠 생각만 하고 있어.”
그를 생각하며 잡념을 물린 전적이 있어 조금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네 생각을 왜 해.”
“쓸데없는 생각 하느니 잘생긴 얼굴 떠올리는 게 낫지 않아?”
쪽, 쪽.
“참, 내 좆은 생각하지 마.”
“그건 또 왜?”
“그럼 너 혼자 발정 나서 아무나 붙잡고 쑤셔 달라고 할까 봐 겁난다.”
그런 방법도 있구나. 잠깐 생각하는데 그가 낌새를 느꼈는지 이마를 쿵 부딪쳐 왔다.
“만약 그러잖아? 그럼 향수는 영영 물 건너가는 거야.”
말 안 하면 알 게 뭔가.
“숨기면 내가 모를 것 같지?”
“…….”
“쑤셔 보면 답 나오니까 헛생각하지 마.”
“너 혹시 초능력 있어?”
속내가 훤히 읽혀 불쾌한 심정으로 노려보자 다시금 입술이 쪽쪽 빨렸다.
키스를 할 거면 하든지 왜 자꾸 간지럽게 구는지 모르겠다. 먼저 고개를 비틀고 혀를 밀어 넣었지만, 남자가 얼굴을 쭉 빼고 떨어져 나갔다.
“왜 피해.”
“최선을 다해서 참고 있는데 더 자극하지 마.”
“…….”
“좆 터지겠어.”
“그러니까 빨아 준다고.”
다시 제안했지만 무시당했다.
“어쨌든 나 없는 동안 밥 잘 챙겨 먹고, 금욕하고 있으면 올 때 향수 사 올게.”
“……진짜?”
“더불어 24시간 섹스 서비스까지.”
“…….”
“어때?”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빨았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없었다.
밤새도록 나를 안고 있던 온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남자가 한참 쪽쪽거린 탓에 입술의 감각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짧게 붙었다 떨어지는 건데도 횟수가 수십 번이니 꽤 자극이 된 모양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몸을 웅크린 채 다시 눈을 감는 그때였다.
Rrrr-. Rrrr-.
돌연 머리맡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퍼뜩 고개가 들렸다. 나는 휴대폰이 없으니 내 건 아니고, 머리 옆에 남자의 까만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익숙한 벨 소리다 싶더라니. 흘리고 간 건가. 칠칠맞지 못하게. 쯧, 혀를 차며 휴대폰을 바라보다 그냥 도로 눈을 감았다.
Rrrr-. Rrrr-.
“…….”
Rrrr-. Rrrr-. Rrrr-. Rrrr-.
“짜증 나.”
쉬지 않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주인 없으니까…….”
―일어났어?
“…….”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낮은 음성이 익숙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니 ‘민석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이 휴대폰은 남자의 것이니 그의 이름일 리는 없고, 민석이라는 사람의 것을 빌려서 전화한 것 같았다.
“바보야? 휴대폰을 왜 흘리고 다녀.”
―흘린 게 아니라 두고 온 거야.
“왜?”
―너 휴대폰 없으니까.
“…….”
잠시 눈을 깜빡이다 휴대폰을 귀 가까이 당겨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민석이 번호로 전화 오면 받아. 나니까. 나머지는 무시하고.
“…….”
―돌아가면 휴대폰 하나 사 줄게.
한층 풍부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필요 없어. 연락할 사람도 없는데.”
―나 있잖아.
“…….”
―점심시간 다 됐는데, 밥 안 먹었지?
“지금 일어났어.”
―그럴 줄 알았다. 밤새 뒤척거리더라니.
“네가 자꾸 뽀뽀해 대니까 귀찮아서 그런 거야. 지금도 입술에 감각이 없어.”
―나도 그래. 침 줄줄 흘리는 중.
일부러 발음을 어눌하게 내는 게 어이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침을 흘리는 남자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봤는데, 상상 속에서도 잘생긴 얼굴은 흐트러짐 없었다. 오히려 좀 섹시할 것 같다.
―무슨 생각 해?
“네가 침 흘리는 생각.”
―내 생각 했구나? 잘했어.
“바보 취급 당하고도 좋단다.”
―그러게.
나직하게 웃는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어서 그런가,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기계를 투과해서인지 목소리 톤은 살짝 다른 것 같고. 나른해진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안 바빠?”
―왜. 끊으려고?
“아니. 안 바쁘면 안 끊으려고.”
―…….
“계속 주절거려 봐. 목소리 듣기 좋다.”
휴대폰 너머가 조용해서 응? 하고 재촉하자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약간 신음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문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너 뭐 해?”
―자위.
“짐승 새끼. 회사에서 그래도 돼?”
―알 게 뭐야. 꼴리는데.
당당하기도 하다. 아예 본격적으로 움직이는지 탁탁, 치대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좋겠다. 나도……. 막연히 쾌락을 바라며 다리 사이를 딱 붙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가 쓰읍, 소리로 나무랐다.
―참으면 복이 온다니까.
“너는 왜 안 참는데.”
―나는 복을 줘야 하니까. 열심히 단련해야지.
“뭐라는 건지.”
투덜대다 시키는 대로 다시 다리를 떼어 냈다. 참았다가 하면 더 좋댔으니, 내심 그 기대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느긋하게 성기를 흔드는 소리가 얄미운 나머지 빨리 싸게 하고 싶다는 심술이 피어올랐다.
“으응, 응, 응.”
―……뭐야?
“나 아무것도 안 해. 그냥 소리만 내는 거야.”
―…….
“아아, 아, 응.”
―진짜 안 하는 거 맞아?
“흐으응, 응.”
―아…… 씹.
사정을 했는지 그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살갗을 치대는 소리도 사라졌다. 목표를 달성한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진짜 소리만 낸 거 맞아?
“좋을 대로 생각해.”
―혹시 다른 놈이랑 떡 치고 있는 거 아니야?
장난기 섞인 물음이라 진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우리 예쁜이는 연기도 잘하네. 종종 해 주라.
“생각해 보고.”
―식탁에 밥 차려 놨으니까 먹어. 굶지 말고. 냉장고도 채워 놨어.
“…….”
―카드도 있으니까 이번엔 던지지 마.
“너 배짱 좋다. 내가 어떻게 쓸 줄 알고 카드를 막 줘?”
내 말이 귀엽다는 듯 그가 피식 웃었다.
―막 써도 돼. 필요한 거 있으면 사고. 아, 이제 끊어야겠다.
“왜? 끊으래?”
―안 끊었으면 좋겠어?
“응.”
―…….
아아, 낮은 탄식이 들려왔다.
―다 때려치우고 진짜 백수 한량 할까.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휴대폰 너머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 날 때 전화할게.
“…….”
―밥 먹어. 응?
“응…….”
마지못해 대답하니 이내 전화가 뚝 끊어졌다. 뚜뚜뚜-. 종료음을 뒤로하고 몸을 반대로 눕혔다.
남자는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으려다 문득 든 생각에 휴대폰을 베개와 귀 사이에 끼웠다.
혹시 깊이 잠들면 벨 소리가 안 들릴지도 모르니까.
딱딱한 기계의 감촉이 남자의 단단한 어깨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