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9)

#8.

재현이 예진에게 따로 연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3주 후였다. 그녀는 긴말 없이 사진을 한 장 보냈다. 그와 재이가 지난 주말 근교 호텔에 들러 하룻밤을 보내던 날 다정한 한때를 찍은 장면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예진이 저의 뒷조사를 했다는 걸 아는 건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걸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재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 얘기할 생각이 있으면 집으로 날 찾아와요.

전화를 걸었을 때, 예진이 남긴 멘트였다. 재현은 예진이 사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서울 외곽의 초고층 빌딩이었다. 그녀 혼자 사는 주거지에 발을 들이는 게 꺼림칙했지만, 그곳이 아니면 만나지 않겠다 고집을 부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녀와 만나는 걸 사람들 눈에 띄게 해서 좋을 것이 없는 것은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이든, 술집이든 밖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들어오세요.”

평소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 대신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요가복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예진은 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적절한 식이요법과 요가, 운동으로 다져진 그녀의 몸매가 럭셔리한 인테리어의 아파트의 일부처럼 보였다.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꽃무늬 찻주전자와 찻잔이 단아하게 놓여 있었다. 이 집은 아마도 재현과 헤어지고 나서 구입한 모양이다. 그녀가 예전에 비해 얼마나 성공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예진이 차를 따르며 물었다.

“한 잔 드실래요?”

“난 됐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 잔을 따르며 예진이 말했다.

“1년 넘게 사귀면서 난 재현 씨에 대해 몰랐던 것이 참 많았더라고요. 예를 들면, 재이 씨가 친여동생이 아니라는 사실 같은 거.”

목소리에 서운함이 배어 있었지만, 재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재현은 거실 한가운데쯤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이 넓은 집 어디에도 그가 편히 앉을 곳은 없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래도 밀려드는 배신감은 어찌할 수가 없던데요. 내가 민재현 씨한테 대단한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기분이랄까요.”

“우리 집안의 문제야. 우리 사이에 그 사실이 크게 중요했던 것도 아니고.”

“아뇨. 잘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중요했고, 지금은 더욱 중요한 쟁점이죠. 우리 모두의 관계를 재정립시킬 수 있을 만큼 말이에요.”

재현과 예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의 패를 탐색하고, 어떤 식으로 패를 써야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눈길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재현은 그녀가 가진 패를 읽고 있었다. 그녀가 뭘 가지고 협박을 하든 그에 응할 생각은 없었고.

“우리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심플하게 협상하죠. 재이 씨와의 관계 정리하고, 저와 결혼해요. 재이 씨와 깊은 관계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재현 씨가 여기까지 와서 나랑 마주 볼 일 없었을 테니까.”

깔끔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재현은 창가 쪽으로 걸었다.

“부인할 생각 없어. 재이와 나, 일시적인 감정 아니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

너무나 순순히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재현의 태도에 조금 김이 빠졌는지, 예진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재이 씨를 친딸로 생각하신다면서요.”

“어머니도 언젠가는 아셔야 할 사실이야.”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친딸이 아닌 입양한 아이라고 해도 15년 동안 남매로 키워 온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하게 내버려 둘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친자식으로 알고 키워 온 딸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그 아이가 아들과 결혼까지 한다면, 그 충격은 재현 씨의 예상을 뛰어넘을지도 모르죠.”

그걸 모를 재현이 아니었다. 수십 번, 어떤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걱정했다.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건, 숨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재이와의 관계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 때문에 재이를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지.”

“15년간 키워 준 분들의 은혜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재이 씨도 다 동의한 건가요?”

“그건 조예진 씨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내가 아는 재이 씨는 재현 씨처럼 그리 냉정하고 무 자르듯 관계를 정리하지는 못할 텐데요. 내 예상이 맞다면 재이 씨는 재현 씨가 아닌 어머니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요.”

“재이는 결국 내 뜻을 따라 줄 테니까,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예진은 빙글빙글 돌리던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재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이 사실을 언론에 밝혀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거군요.”

“그건 아니지. 터트려도 내가 터트리고, 허락을 받아도 내가 할 테니, 조예진 씨는 이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녀는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면요?”

“그럼 나도 조예진 씨와 박 의원의 관계를 모른 척할 수 없겠지.”

그제야 내내 자신감에 넘치던 예진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증명할 만한 증거는 충분히 갖고 있으니까, 발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물론 이 증거를 당장 어떻게 써먹을 생각은 없어. 그러니 우리의 관계는 여기서 더 변화하지 않게 두자고.”

재현이 돌아서서 현관에 이를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던 예진이 불쑥 물었다.

“언제부터예요?”

“뭐가.”

“재이 씨와 부적절한 관계, 언제부터냐고요. 내게 온전한 마음을 주지 않았던 거, 재이 씨 때문이었나요?”

“굳이 알고 싶다면 얘기하지. 재이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건 영국 유학을 다녀온 직후부터였어. 우리 관계에 재이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장담하지.”

“정말 재이 씨와의 그 말도 안 되는 관계 계속할 생각이에요?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죠?”

“…글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어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간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단한 사랑의 힘도 아니었고.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 욕정이라고 치부하기에도 모자란 어떤 불가항력. 그녀와 그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실, 정도라고 설명하면 될까. 운명이니, 영원한 사랑이니,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믿지 않는 그였지만, 재이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어떤 ‘힘’의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재현은 아버지에게서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미루어 재이와의 관계에 대해 뭔가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와 재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재현아, 너 무슨 잘못을 한 거니? 아버지가 역정이 많이 나셨어.”

“걱정 마십시오.”

재현은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고, 그 안에는 예진이 저에게 보냈던 것과 같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언론에 터트릴 순 없어도 가족들에게는 알려야겠다는 건가.

조만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는 건 과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 사진 어떻게 된 거냐?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아버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라고 말해라. 이 사진은 그냥 너희 둘이 같은 호텔에 묵었던, 남매로서 시간을 함께 한 그냥 의미 없는 사진이라고, 내가 상상하는 그런 추악한 진실의 단면은 아니라고 말해.”

마지막 희망의 빛을 놓지 않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오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안의 중대함은 더 무겁게 두 사람을 짓눌렀다.

짝!

뺨을 휘갈기는 소리가 서재 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 눈앞이 아찔해지도록 강한 충격이었다. 뺨이 얼얼해 재현은 잠시 얼굴 근육을 찌푸렸다. 밖에까지 소리가 들릴까 아버지는 큰소리도 못 낸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의 반응이 이 정도라면 어머니의 반응은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다시 올라가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어머니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좋게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손찌검을 해요!”

“당신은 상관할 거 없어. 재현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당신은 나가 있어.”

아버지의 시뻘게진 눈이 희번덕거렸다. 아들의 용서할 수 없는 패륜 앞에 선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었다.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어머니를 억지로 내보낸 아버지는 서재의 문을 잠갔다.

몇 번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냐고 묻던 어머니가 잠잠해져서야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구나. 이 사진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냥 무심히 보아 넘긴다면 다정한 남매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진일 뿐인데….”

깊은 한숨 뒤, 아버지는 탄식을 이었다.

“그날… 너희들은 분명 따로 출장을 간다고 했었지. 같이 간다는 말은 없었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어!”

재현은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일 수밖에 없는 얘기를 꺼냈다.

“재이랑 결혼하겠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헛소리를 지껄여. 세상천지에 제 여동생하고 결혼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파양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표정으로 재현을 노려보았다. 숨을 쉬는 것마저 어렵게 만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나름대로 소화해 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생을 탄탄하게 받쳐 왔던 지지대가 그의 발아래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일에서도 성공하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만 믿었던 아들의 미래가 눈앞에서 산산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그려 놓은 아들의 앞날이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지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무덤덤하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재현의 마음도 아버지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이 가정의 평화를 온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진정 네 엄마가 거품 물고 쓰러지는 꼴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일순 아버지의 목소리가 평온해졌다.

“어머니도 이제 아실 때가 되었잖습니까.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세요.”

“할 수만 있다면 죽는 그날까지 모르게 해야지. 가뜩이나 심장도 좋지 않은 사람인데, 이번 충격으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놈이 책임질 수 있겠어?”

“재이 이제 성인입니다. 일곱 살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어머니도 받아들이실 겁니다.”

“네 어머니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네가 재이를 포기하는 게 더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진즉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의 눈에 들어찬 간절함을 아버지는 보았을까. 재이를 향한 마음만큼이나 어머니를 위한 마음도 가볍지는 않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그가 고민하고 망설였는지를 아버지는 한순간만이라도 짐작해 줄까.

“놓을 수 있었다면 놓았을 거고, 접을 수 있었다면 접었을 겁니다. 제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되는 바 없으세요?”

아버지는 마른세수를 하고, 비척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그의 무거운 한숨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이 사진을 보낸 사람은 누구냐.”

“조예진입니다. 그 여자는 이 스캔들을 터트려 저와 결혼을 원합니다.”

“막을 방법은 있고?”

“박 의원의 스폰을 받고 있더군요. 제게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 스캔들이 터질까 염려하진 않아도 되겠구나.”

“그건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더니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는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게 시간을 좀 다오.”

“…….”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말하려다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 말대로 그들 모두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시킬 시간.

“당분간 재이와 떨어져서 지내거라.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 여자가 알고 있다는 건 또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떨어져 지낸다고 제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네 마음이 아닌 재이의 마음을 들여다봐. 재이가 나와 제 엄마에게 버림받고 너랑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지, 그걸 생각하란 말이다.”

“…….”

“재이를 딸이 아닌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네 엄마도 나도 마찬가지일 테니.”

결국 아버지는 재현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만약 재현이 고집대로 하겠다면 부모의 연을 끊을 작정을 해야 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서재를 나온 재현은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두 여자를 보았다. 재이가 얼음주머니를 내밀었다. 이제 막 부어오르기 시작한 그의 뺨을 보는 눈길이 걱정에 잠겼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네 아버지가 저렇게 역정을 내셔. 이날 이때까지 너한테 단 한 번도 매를 든 적 없으셨는데, 다 커서 이게 무슨 일이야.”

재현은 어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그는 어머니의 걱정을 들을 자격조차 없었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어머니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말 그는 패륜아였다.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네 아버지하고 얘기를 좀 해봐야겠구나.”

어머니가 서재로 들어간 후, 재이는 재현이 멍하니 들고 있는 얼음주머니를 가져가 그의 뺨에 댔다. 화끈거리던 뺨이 조금 시원해졌다. 재이는 눈물 맺힌 눈망울로 그를 살폈다.

“설마 아버지한테 말씀… 드린 거야? 나하고 상의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조예진이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어. 아버지한테 사진을 보내 알려 드린 것도 그 여자고.”

재현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오빠, 나… 무서워.”

떨고 있는 재이의 어깨를 안으며 재현이 부드럽게 일렀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이야. 이 정도 반대도 없이 우리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내게서 등 돌려도 너만 날 보고 있으면 돼. 우리 앞에 가로막힌 것들은 내가 다 치울 테니까, 넌 그냥 날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난…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을지… 아버지 저렇게 화내시는 거 보니까 자신이 없어졌어.”

왜 이렇게 불안할까. 재현은 재이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절 보게 만들었다. 그녀의 불안에 떠는 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더 애처로웠다. 작은 등불 앞의 나방처럼.

“지금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러시는 거야. 우리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아시면 언젠가는… 받아들이시겠지.”

“만약… 엄마가 알고 쓰러지시면? 나 때문에 엄마가 잘못… 되면….”

재이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조금씩 확실하게 차올랐다.

“그럴 일 없어. 어머니는 강한 분이니까 이겨 내실 거야.”

“…….”

“마음 약해지지 말고, 네가 날 도와줘야 해. 네가 날 붙잡아 줘야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어.”

“…….”

“대답해. 약속할 수 있지?”

재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약속은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

수묵 담채화 같은 고즈넉한 한옥. 잘 다듬어진 정원 곳곳에 나지막하게 걸린 조명이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급 한정식 레스토랑은 예약이 꽉 차 있음에도 한적했다. 손님 20여 명은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온돌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좌탁에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가짓수대로 놓여 있었다.

“우리 둘이서만 데이트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

아버지가 하얀 술잔에 말간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재현과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내게 별말이 없었다. 최소한 어떻게 네 오빠와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는 비난 정도는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침묵은 더욱 내 속을 바싹 타게 했다.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으로 사는 것에 지칠 때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아버지는 오늘 퇴근하고 만나서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나는 말없이 술을 몇 잔 받아 마시고 고개를 떨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15년간 키워 주고, 길러 준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이미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배신을 했으니 어떤 욕을 먹어도 괜찮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스커트를 적셨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다 이 못난 애비 탓이고, 몹쓸 재현이 탓이다.”

나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 내 울었다. 차라리 욕을 해줬으면,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해 줬으면,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덜 했을 텐데.

아버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음을 진정하려 애를 썼다.

“울지 마라.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네가 죽은 재이 대신 딸 노릇을 잘해 줘서 네 엄마도 나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15년 동안 한 번도 네가 내 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넌 우리 집에 온 그 순간부터 내 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말의 의미는 딸이 며느리는 될 수 없다는 것임을 나도 잘 알았다. 진짜 딸처럼 키운 아이를 별안간 딸이 아니라고 강요한다면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아버지는 내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 엄마 심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 게다. 네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쓰러져서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몰라. 거기다 재현이 녀석은 너랑 결혼까지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네 엄마는 절대로 이해 못 하실 거야. 나는 솔직히 겁이 나는구나. 네 엄마가 잘못될까 봐… 정말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저도 엄마가 쓰러지길 바라진 않아요. 그게 저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래, 안다. 그 녀석은 한번 꽂힌 건 절대 놓지 못하니, 이제 우리 집안의 평화가 너한테 달렸다.”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이 눈물로 흐릿해졌다.

“네 성격상 재현이를 모질게 떨쳐 내지도 못 할 테니, 당분간 외국에 나가 있는 게 어떻겠니.”

“…….”

“몇 년 떨어져 있다 보면 그 녀석 마음도 정리될 테고, 그간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살았는지 알게 될 거야. 너도 재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면 앞뒤를 잴 겨를이 생기겠지. 네가 재현이를 유혹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그 녀석이 들이댔겠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가질 때까지 놓지 않는 놈이니까.”

“…….”

“잠시 떨어져 있으면서 네 마음을 정리하도록 해라. 그사이 재현이 녀석 혼처를 알아봐서 결혼도 시키고 그럼 모든 게 잘 해결될 것 같구나.”

아버지는 내 침묵을 동의의 뜻으로 알아들으셨다.

“회사 일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마. 네가 어디로 떠났는지 네 엄마한테도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너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조용히 준비해서 떠나도록 해. 적당한 때가 오면 다시 부르마.”

현실적으로 아버지의 제안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내게는 재현을 밀어낼 힘이 없었다. 그를 밀어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그를 원하는 마음이 컸으니까. 그렇다고 부모님을 배신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진리일지도 몰랐다. 아버지 말대로 2, 3년 떨어져 있다 보면 서로의 마음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도피처로 캐나다를 선택했다. 광활한 대지만큼이나 숨을 곳은 많지만, 외롭고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 줄 자연이 있는 그곳. 눈으로 뒤덮인 꽁꽁 언 그곳에서 내 마음도 꽁꽁 얼어붙길 바랐다.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다시는 녹지 않기를. 아버지가 모든 수속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그저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 날,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나는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일하던 직원이 급한 전화를 받고 떠난 지 10분이나 되었을까. 조용한 사무실 안으로 재현이 들어섰다.

“그만 가자.”

내 자리로 다가온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내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보며 말했다.

“오빠 먼저 가.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나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내가 하려는 일들이, 내 생각들이 고스란히 그에게 투영될 것 같아 두려웠다. 도망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럼 여기서 하는 수밖에 없겠네.”

낮게 뇌까리듯 하는 말에 정수리 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그건 기대이기도 했고, 두려움이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대꾸도 못 하는 사이, 재현은 내가 앉은 의자를 뒤로 빼고, 날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할까? 아니면 오피스텔로 갈래?”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낯설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린 욕정의 무게가 잘못 건드리면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2주 전이었던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밤을 같이 보낸 게. 그동안 회사와 집만 오가며 반쯤은 아버지의 감시 속에 지냈다. 아버지와의 충돌 이후 재현은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나도 그의 오피스텔로 가지 않았고.

숨 막힐 것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 눈길을 거둔 나는 중얼거렸다.

“이러지 마, 오빠. 우리 이러면…!”

그러나 내 입술은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내 항의는 짓이겨졌다. 그는 날 아프도록 빨고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힌 입술이 이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를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내 몸짓은 미약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의 혀와 코끝으로 스며드는 상쾌한 체취.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내 열망도 그 못지않았지만, 무겁게 내 심장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쾌감을 방해했다.

“올라가.”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서류를 옆으로 밀어내고, 의자 위에 있던 방석을 책상 위에 깐 재현은 날 책상 위로 올려 보냈다.

“싫어. 이러지 마. 여기선 하지 말라고.”

“늦었어. 그러니까 내가 가자고 할 때 일어났어야지.”

스커트가 허리 위로 밀려 올라가고, 스타킹과 팬티는 허벅지 중간 어디쯤까지 벗겨져 내려왔다. 나는 엉덩이를 재현 쪽으로 내민 채 책상 위에 꿇어앉았다. 정말 이상야릇한 자세였다. 건너편 책상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면 내 표정을 모두 볼 수 있었겠지.

텅 빈 사무실의 모든 사무 집기들이 우리가 하는 짓을 감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현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꽉 붙잡고 바지의 지퍼를 내려 페니스를 꺼내 들었다.

아래쪽 구멍에 귀두가 맞춰지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깐의 키스에도 이미 흥분한 내 몸은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말로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 몸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그게 또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해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삽입을 피하려고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재현의 숨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러면 내가 더 흥분한다는 사실을 몰라?”

그가 내 귀에 속삭이며 귓불을 깨물었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아래쪽은 조여들었다. 좁은 길을 뚫고 커다란 기둥이 안으로 바득 밀려 들어왔다. 아찔한 쾌감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몸과 몸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질 내부가 채워졌을 뿐인데, 공허한 마음이 채워진 것처럼 꽉 찬 기분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천천히 페니스가 빠져나갔다가 치고 들어올 때는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지며 만족스러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그만 바라고 기다려 왔던 것처럼. 질질 물을 흘리며 쾌감에 떠는 내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헤어질 거냐고, 머리가 묻고 있었다.

“오빠, 제발… 그만해.”

나는 칸막이를 붙잡은 채 엉덩이를 흔들었다. 좋아 죽으면서도 입으로는 그만하라고 하는 내가 재현은 얼마나 한심할까.

“지금 그만두면 내 좆이라도 물고 늘어질 기센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점점 빨라지는 마찰열이 전신으로 쾌감을 퍼 나르고 있었다. 절정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전율이 일렁일렁 피어올랐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물린 서로 다른 질감의 육체가 서로를 탐하며 끝없이 마찰했다.

“하아….”

재현이 만족스러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살 것 같다.”

재현의 손이 블라우스 아래로 기어들어 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유두가 꼿꼿하게 서서 비틀렸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뭉그러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아버지가 했던 말들, 우리의 계획, 내 마음. 낱낱이 그의 앞에 드러내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비겁한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 외에는 내게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재현은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리도 당부하고 약속을 요구했는데, 결국 내가 한 짓은 아무것도 해결 못 한 채로 떠나는 것밖에 없었으니.

내가 언젠가 잘못을 빌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을 하면, 오빠는 날 용서해 줄까. 내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아래를 점령해 오는 뜨거운 쾌감도 그 수위가 높아 간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저 핏속을 번져 가는 전율만 느끼려 애를 썼다. 이성이 아닌 감각으로만 재현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짧은 불장난 같은 재현과의 사랑을 끝내야 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도 상처 주지 않으려 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쳐올리는 재현의 움직임이 점점 강하고 빨라졌다. 넓은 공간에 턱턱 살 부딪치는 소리와 찌걱찌걱 음란한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오르가슴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거친 호흡을 뱉어 내며 달달 떨었다. 질 내부에서 시작된 떨림이 엉덩이로, 아랫배로, 가슴으로, 팔다리로 이어졌다. 함께 오르가슴을 맞이한 후, 재현은 티슈로 내 몸을 정리해 주었다.

사무실에서의 짧은 정사가 끝나고, 재현은 날 오피스텔로 데려갔다. 그는 오늘 밤 날 놔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고집을 부려 집에 갈까도 생각했으나, 어쩌면 우리들의 밤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 이건 내게 주는 마지막 상이야. 오빠와 보내는 마지막 밤.

우리는 샤워를 하면서 사랑을 나눴고, 밤새 서로를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오늘 밤 오피스텔에서 자겠다는 문자만을 남기고, 휴대폰은 꺼두었다.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 하셨어?”

날 뒤에서 껴안고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재현이 물었다.

“…아니. 그래서 불안해.”

“널 회유하려 드실 거야. 어떻게든 네가 내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겠지.”

“…….”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셔도 절대 거기에 넘어가선 안 돼.”

“…알았어.”

그래, 내가 더 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에게도 재현에게도 나는 한없이 약한 존재였다. 그들은 내 감정적 약점을 쥐고 있었으니까. 하라는 대로 하는 것 말고는 실제 선택권이 내겐 없었다.

재현이 내 몸 안에 제 존재를 박아 넣었다. 천천히 들고 나는 그의 커다란 페니스의 형태를 고스란히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나를 잠식한 재현의 뜨거운 숨결, 존재감. 그를 향한 나의 거짓 없는 마음.

사랑해, 오빠. 나는 속으로만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뻔한 거짓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요일 오후. 나는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8월까지 입학 준비를 하고, 9월부터는 대학원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버지가 렌트해 놓은 아파트는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짐을 풀어 정리해도 마치 빈집처럼 휑하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을 잤다.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피로가 쌓여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일어나 시계를 보니 만 30시간이 흘러 있었다. 한국에서 쓰던 휴대폰은 가져오지 않았기에 여기서 새로 휴대폰을 개통해야 했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기로 아버지와 약속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방이 핑그르르 돈다. 심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나는 만 사흘 동안 지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다.

외딴 세상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여기서 잘못되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철저한 고독 속에 내팽개쳐졌다.

***

재현은 극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재이가 사라지고 2주.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아버지는 끝내 재이의 거처를 알려 주지 않았다. 어머니도 재이가 유학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어떻게든 재이의 출입국 기록을 알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신차 론칭이 무사히 끝났다. 론칭 전부터 몰린 관심은 어마어마한 예약 판매로 이어졌고, 론칭 당일 언론의 조명을 받은 세단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을 같이 해야 할 사람이 없었다. 샴페인도, 플래시 세례도 공허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임원들이 함께한 축하의 자리. 모두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할 때, 가만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재현은 기어이 아버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장내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술잔이 탁자 위로 가지런히 놓이고, 음악 소리마저 볼륨이 줄었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자, 메아리처럼 방 안 가득 울린다.

“아들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를 먼 이국땅에 던져 놓고, 신차 출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이제 만족하시냔 말입니다.”

두리번두리번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는 어머니도 참석해 있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기를 참으며 재현은 남은 술잔을 비웠다. 그는 분명 취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치부를 드러낼 리 없으니까.

“재현아,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라니. 이국땅에 던져 놓다니.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구나.”

분명 어머니도 재현이 취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녀석이 긴장이 풀어져 술을 좀 먹더니 취했나 봐. 그만 일어나거라.”

아버지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둘러댔지만,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솔직히 괜찮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재이가 내 눈앞에 없으면, 그 애가 곁에 없으면 잊을 수도 있을 거라, 시간이 지나면 이 미칠 것 같은 마음도 조금씩 진정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현의 말을 막았다.

“그만하지 못해? 술이 취했으면 곱게 가서 잠이나 자 둬.”

“여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재이 얘기가 왜 나와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어머니를 모두가 주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헛소리를…!”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미칠 것 같습니다. 내 옆에 그 녀석이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고,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고요. 하물며 제가 이런 상태면 재이는 어떨까요? 그 녀석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 땅에서 시커먼 울음을 삼키고 있을까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참는 제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귀를 막고 연회장에서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어머니는 꼼짝 않고 재현을 쳐다보았다.

“재현아, 너 갑자기 왜 이래? 재이가 그렇게 보고 싶어? 여보, 재이 어디 있는지 왜 얘기 안 해줘요? 알려 줘요, 나도 그 애가 보고 싶으니까.”

“그 애는 안전한 곳에 잘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재현은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더 이상은 일분일초도 견딜 수 없었다.

“재이, 어머니 친딸 아니에요. 제 친여동생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제 마음을 숨겨야 할 이유 같은 것도 없는 겁니다. 어머니도 이제 진실을 직시할 때가 됐어요. 언제까지 진실을 숨긴 채 어머니를 기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재현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머니는 아마도 기절을 하신 듯했다. 정신 차리라고 간절히 애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재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

흔들리는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속 켜켜이 쌓여 있던 근심들이 한 올 한 올 풀려 바람에 떠내려간다. 그렇게 떠내려가는 내 마음 조각들이 희미하게 사라질 때쯤이면 남은 내 마음도 저렇게 풀릴 수 있을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풍경들이 마치 내 인생의 한 토막인 것처럼 의미를 가졌다가 서서히 퇴색된다. 내 과거가 잊히듯이 풍경들도 한동안 내 마음 한편을 차지했다 잊히곤 했다.

나는 주말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잡아타고 무작정 길을 떠났다. 어떤 버스는 북적거리는 시장을 지나고, 어떤 버스는 눈이 부시게 파란 빛깔을 머금은 바다를 지나고, 또 어떤 버스는 끝없는 빌딩 숲을 지났다.

사람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제각각의 풍경들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동하면 버스에서 내려 무작정 걸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걷다 보면 번잡한 마음이 단순하게 한곳으로 모이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주말 시장이었다.

겨울 끝자락.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시장에서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계절이 녹고 있음을 실감했다. 더불어 나의 얼어붙은 마음도 저 다가오는 봄처럼 따뜻하게 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꽃과 과일, 오래된 인형과 장난감들 사이를 걷는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롭지 않을 거라 스스로를 설득했다. 내 혀는 미각을 잃었고, 내 심장은 뛰기를 멈추었고, 내 눈은 멀어서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보아도 먹고 싶지 않았고, 멋진 것을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재현과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은 분명 독을 먹은 것처럼 치명적이었지만,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그를 생각해도 울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를 품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섞이기를 갈구했다. 혼자 있으면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으니까.

아침 일찍 어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빈 시간에는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 틈에 섞여 책을 읽었다. 오후 5시가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 근처 레스토랑에 나갔다. 손님들의 주문 사항을 해결하다 보면 몇 시간이 마술처럼 지나갔다. 10시까지 일을 하고 고단한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집에 돌아오면 내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저 자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잊어야 할 것이 있었기에 미치도록 잊는 데 골몰했다. 잊는 데 몸을 혹사하는 것만큼 훌륭한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날짜를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떠나온 날로부터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 밤이 늦어서야 나는 렌트한 아파트 앞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꿈에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를.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열 걸음쯤 떨어진 그곳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믿을 수 없어서.

내 눈과 귀와 코는 잠시 감각을 상실했을지라도 내 심장이 그를 먼저 알아보았다. 거북이처럼 뛰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 왜 도망쳤는지 모르겠다. 보고 싶어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으면서 막상 그가 내 눈앞에 있는데, 왜 도망을 쳤는지. 잊으려 노력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 억울해서였을까. 아니면 도저히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얼마 못 가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도망치려는 나와 붙잡으려는 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물론 내 힘은 너무나 미약했기에 이내 반항을 멈춘 채 그에게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쉬… 울지 마. 괜찮아. 이제 다 괜찮을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진정시키며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안고 있었다. 북받친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가 내 입술을 더듬어 찾았다. 심장이 두 조각 나는 것 같은 아픔이 찌르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두려웠다. 그와 다시 시작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왜 왔어. 여기까지 뭐하러 왔어. 나 같은 거 그냥 잊고 살지, 뭐하러 여길 찾아와.”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는 그의 손에 붙잡혀 아파트로 들어갔다. 휑하니 비어 있던 싸늘한 아파트가 재현이 들어서자 꽉 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여기 캐나다까지 날 찾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이켠 나는 실내를 어두운 눈길로 돌아보는 재현에게 물었다.

“엄마… 는?”

“병원에 입원하셨어.”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나는 15년 전 어머니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 겨우 일곱 살 된 딸을 잃은 어머니의 눈은 상심에 잠겨 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어. 네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고는 쓰러지셨지만, 다행히 심장에 이상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시고 울기만 하셨어. 그래도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의연하게 받아들이셨지. 물론… 우리의 결혼에 동의는 안 하셨지만.”

“그러시겠지. 아버지는?”

“날 호적에서 파버리시겠다고 하셨어.”

잠시 침묵이 오갔다. 나는 희망을 갖고 싶지 않았다. 재현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그를 잊는 연습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잊는 건 연습한다고 잘 하게 되는 건 아니었다. 또다시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이 따르겠지. 그래서 섣불리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그만 돌아가.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그만 가.”

재현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생수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쥔 채 냉장고에 붙어 섰다.

“우리는 여기까지야. 그러니까 더 흔들지 말고 가줬으면 해.”

“넌 끝까지 비겁하구나.”

어느 틈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재현은 무겁게 비난했다.

“내 옆에만 있어 달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내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꼴이 이게 뭐야. 호기롭게 떠났으면 잘이라도 있던가. 사람 사는 것 같지도 않은 싸늘한 아파트에서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자지도 못하면서, 이런 귀신 같은 몰골로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 꼴이, 이게 뭐냐고. 이러려고 도망쳤어? 낼이면 죽을 사람처럼 창백한 꼴 살려고 도망쳤냐고!”

끝내 그가 소리를 질렀다. 내 몰골이 어떻다는 걸까. 귀신같다고? 죽을 사람처럼 창백하다고?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거울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얼굴이 안돼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도 생각났다. 사람들이 나만 보면 밥은 먹었냐, 잠은 잔 거냐 걱정스레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억지로 눈이 맞춰졌다. 그의 얼굴도 많이 수척해졌다. 윤기가 흐르던 피부는 조금 까칠했고, 깊은 눈매는 푹 꺼져 있었다.

“네 꼴을 봐.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그에게 붙들려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비쩍 마른 여자가 날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푸석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어깨를 덮었고, 푹 꺼진 뺨은 열흘쯤 굶은 것 같았다. 비쩍 마른 몸은 툭 건드리면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꼼작 말고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게?”

“냉장고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데, 뭐라도 사 올 테니까.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해?”

“배 안 고파.”

아니, 사실은 무척 배가 고팠다. 재현을 본 순간부터 허기가 지고, 배 속이 텅 빈 느낌이 급격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샤워하고 쉬고 있어. 너 조금만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으니까.”

재현이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나는 샤워를 했다. 내가 씻는 동안 재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괜한 걱정을 하면서. 기대하지 마. 어차피 돌아가야 할 사람이고, 난 여기 남아야 해. 나는 자꾸만 부푸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도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의식하지 못하고 억눌러 온 호흡이 다시 터져 나온 것처럼 시원하게 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린 후에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재현이 돌아왔다. 두 손 가득 식품이 들려 있었다.

내가 현관문을 열어 주자 재현의 어두운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었다. 어쩐지 숨을 잠시 멈춘 것도 같았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고.”

나는 짐짓 그의 굶주린 듯한 시선을 외면하며 봉지에 눈길을 주었다.

“같이 먹어 줄 테니까, 걱정할 거 없어.”

“…….”

봉지에서 줄줄이 소시지처럼 재료들이 딸려 나왔다. 음료수, 과자, 빵, 채소, 과일. 이 음식들로만 열흘은 버틸 수 있을 듯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건 고기였다.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칠면조, 햄 등등.

스테이크 굽는 소리가 지글지글 들리고, 아파트 가득 고기 냄새가 퍼지자 배에서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입에는 침이 고였다. 한 번도 그가 요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많이 해본 사람처럼 곧잘 하는 걸 보니 신기했다.

온기라곤 없던 집안이 금세 따뜻해졌다. 외로움이 가시고, 공허함이 엷어졌다. 기껏해야 며칠 후면 다시 보내야 할 사람이라, 정을 붙이기 싫은데도 자꾸만 그의 곁에 붙어 있고 싶어졌다. 재현이 고기를 굽는 동안 나는 버섯, 파프리카, 양파, 아스파라거스 같은 채소를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15분 만에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두 접시가 차려졌다. 재현은 식탁 위에 접시를 세팅하고, 와인 잔이 없어 유리컵에 와인을 따랐다. 그러고는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내 앞으로 밀었다.

“다 비우기 전엔 못 일어나.”

그는 내가 한입 입에 넣는 것을 보고서야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기 맛은 여태껏 내가 먹어 본 것 중에 최고였다. 고기의 등급이나 육질 같은 건 상관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재현이 손수 구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맛있었다.

나는 커다란 고기 한 덩이를 다 먹으려고 노력했지만 반도 먹지 못했다. 오랫동안 비었던 위가 너무 많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많이 먹지 못하겠어.”

“그럼 날 버리고 잘 먹고 잘 잘 수 있을 줄 알았어?”

“누가 누굴 버렸다고. 난 그냥….”

“그냥, 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오빠를 위해서도, 부모님을 위해서도.”

“그럼 널 위한 건 뭔데.”

“…….”

나는 할 말이 없어 애꿎은 체리만 연신 씹어댔다. 날 위한 건 뭐였을까. 만약 가족들의 입장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당연히 나는 재현의 옆에 머물기를 원했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때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고, 여자답게 하고, 든든하게 하는, 그의 곁에.

“나 하나만 물러서면 모두가 행복해지는데 어떻게 내 입장만 생각해.”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네 행복은 포기해도 괜찮다는 거야?”

지난 몇 달간의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그런데 막상 재현을 눈앞에 두고 보니 욕심이 났다. 이만큼 힘들었으니 조금만 보상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잠시만 그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네가 우리 부모님께 선물해야 할 행복은 지난 15년간 충분히 드렸어. 15년간 네가 받은 것 이상으로 넌 많은 것을 부모님과 내게 베풀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딸이었고, 귀여운 여동생이었고, 산산조각 날 뻔했던 우리 가족을 결속시킨 것도 너였어. 그러니 너만 우리 가족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

“…….”

“너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어. 입양되었다고 너의 모든 결정을 부모님 뜻대로 따를 필요는 없는 거야. 그건 불필요한 희생이야. 네가 불행하면 결국 나도 불행하고, 부모님도 불행해져. 그러니 지금은 네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라고.”

정말 그래도 될까, 정말…. 마음속에 서서히 욕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제쳐 두었던 행복에의 욕심.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심장에 큰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 사실이 내게 용기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오빤 가서 씻고 와.”

잠시 후,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번 같이 샤워를 하고, 서로를 물고 빨며 한 몸처럼 살다시피 했는데도, 오늘의 재현은 어쩐지 조금 낯설었다.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해 보니 캐나다에 온 지 3개월이 지났다.

겨우 3개월이라니. 내 기분으로는 3년은 지난 것 같은데.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나자, 욕실 문이 열리고 재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상체는 벗은 채였다. 자잘한 근육들이 보기 좋게 자리를 잡은 그의 몸은 예전과 다름없이 근사했다. 수도 없이 본 광경인데도 나는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침실이 두 개였지만,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소파를 펼치면 침대가 되는데, 재현이 소파에서 잔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욕실로 피신을 했다. 등 뒤로 따라붙는 끈질긴 재현의 시선을 의식하며 문을 닫고, 이를 닦았다.

오빠는 여전히 저렇게 멋진데, 내 꼴은 이게 뭐야. 통통하던 뺨은 홀쭉해지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생겼어. 이마에 이 뾰루지는 언제 난 거람. 입술 표면은 거칠거칠, 쇄골은 더욱 도드라지고, 뼈밖에 남지 않은 허리는 부러뜨리면 쉽게도 부러질 것 같았다. 게다가 가슴은….

나는 셔츠를 들어 올려 예전보다 줄어든 것 같은 가슴 사이즈를 가늠해 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몸을 재현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살을 찌워야지. 일주일 만에 드라마틱하게 살이 붙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욕실에서 나오니 거실을 서성이며 통화를 하고 있는 재현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였다.

“지금 당장 어려운 것은 압니다. 몇 달이 걸려도 상관없어요. 급한 업무는 모두 끝냈으니, 당분간 크게 힘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없어도 본부장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일은 어떻게 하고 온 것일까. 워크홀릭인 재현이 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을 리는 없는데.

나는 침실로 들어가 옷장 안을 들췄다. 당연하게도 여분의 이불 같은 건 없었다. 봄이라 해도 아직 저녁 날씨는 쌀쌀해서 이불 없이 잠을 자는 건 힘들었다. 패딩 점퍼라도 둘러쓰고 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옷장 문을 잡은 내 손이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성큼성큼 다가온 재현이 옷장 문을 닫고는 내 엉덩이를 붙잡고 어린애처럼 들어 올렸다.

“오, 오빠….”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 있지, 너.”

“그게 무슨….”

“내가 지난 석 달을 무슨 정신으로 버텼는지 모르겠다.”

내 입술이 그의 입 안으로 파묻혔다. 입술이 맞닿자 잔뜩 쳐올렸던 벽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를 원하는 만큼 나도 그를 원했기에 키스에 반응하지 않기란 죽기보다 힘들었다. 입 안으로 밀려드는 축축하고 따뜻한 혀를 빨아 삼키며 나는 깊은 한숨처럼 신음을 흘렸다.

재현은 굶주린 늑대처럼 내게 키스했다. 아무리 마시고 핥아도 부족한 듯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나는 어느새 침대에 눕혀졌다. 그는 게걸스럽게 내 입술을 탐했다. 입술의 얼얼함이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가 내 파자마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제지했다.

“오빠, 잠깐만…!”

잔뜩 흐린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던 재현이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 말라는 소리 할 거면 그 입 다물어.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도 넌 내게 상을 줘야 할 테니까.”

내 항의와 상관없이 바지와 팬티가 동시에 벗겨졌고, 재현은 내 다리를 접어 올려 음부가 잘 드러나도록 벌렸다. 나는 다리를 오므리려 애를 쓰며 애원했다.

“오빠, 제발…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무슨 준비. 질질 싸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부끄럽게도 내 음부는 조금 젖어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꼴을 오빠한테 보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지금은 너무 말라서….”

“마른 걸 알긴 아네.”

“그러니까 살 좀 찌운 다음에….”

“내가 숨넘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기어이.”

그는 덥석 벌어진 아래쪽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두툼한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간 여린 속살이 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그 어떤 쾌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가 뜨거운 혀로 벌어진 음부를 길게 핥아 올릴 때마다 내 숨은 자지러졌다. 나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몸을 비틀었다.

“하아… 흐읏… 으음….”

듣기에도 민망한 신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신음 소리는 그가 쪽쪽 빠는 소리와 합쳐져 더욱 음란하게 들렸다. 그가 음핵을 이로 살짝 깨물었을 때는 내 엉덩이가 하늘로 치켜 올라갈 것 같았다.

나는 애원하고 싶었다. 나 좀 살려 달라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쭙, 쭈웁….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탐닉.

재현은 그동안 마시지 못한 것까지 전부 들이마시려는 듯 애액이 흐를 새도 없이 모두 빨아서 삼키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구멍 안으로 혀를 넣어 안에 있는 것까지 전부 핥아 가져갈 기세였다. 나는 하릴없이 절정에 올랐다.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무지개도 떠올랐다. 회색빛 내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달달 떠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재현이 거대한 페니스를 내 구멍 안으로 찔러 넣었다.

스윽. 길게 삽입해 들어온 페니스의 모양 그대로 구멍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어떤 침입도 없던 곳이었다. 애액으로 미끄럽다고는 해도 너무나 오래 접촉이 없던 곳이라 재현의 거대한 페니스를 품기가 힘에 부쳤다. 도저히 닿지 않을 것 같은 질 내부의 안쪽까지 꾹 누르는 느낌에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내가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교합된 부분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맞추려 하자, 재현이 눈을 질끈 감으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가만히 있어. 그렇지 않아도 힘드니까.”

재현이 내 셔츠를 벗기고, 내 머리 아래에 베개 두 개를 받쳐 주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우리의 맞물린 부분이 두 시선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두 팔로 가슴을 가렸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재현은 내 팔을 치워 내고 상체를 숙여 꼿꼿하게 선 유두를 핥았다. 당연히 아래쪽은 그에 반응해 수축했다.

“미치게 조이는군. 하아… 이렇게 좋으면서 나 없이 살려고 했어?”

“흐응….”

그가 천천히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밀려 나가고 다시 밀려들어 올 때마다 발끝이 곱아들었다. 빈틈없이 구멍을 가득 채우는 존재감에 아랫배가 뻐근했다. 열감이 질 내부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번져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느릿한 마찰이 성에 차지 않아 정신없이 박아 주었으면 싶었다. 내가 그 열망을 담아 허리를 움직이자 재현이 내 엉덩이를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도 무릎을 세워 반쯤 일어난 자세로 허리를 털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살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엄청난 강도의 쾌감이 내 구멍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재현의 페니스가 내 질 속 가장 예민한 부분까지 밀고 들어와 쳐댈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나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고통인지, 환희인지 모를 비명이 내 입에서 이렇게 터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절정은 집채만 한 파도처럼 급격하게 찾아왔다. 눈물이 쏟아지고, 애액이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재현의 단단한 품에서 오열했다. 서러움이 폭발해 멈출 수가 없었다.

***

아파트의 정원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재현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동안 꽃이 피는지,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무감했던 그의 시야에 온통 연초록빛을 머금은 자연이 가득 들어왔다.

이른 아침인데도 바람은 따스했고,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랬다. 재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가슴속에 가득 고였던 무거운 마음도 같이 날려 보냈다. 그동안 양껏 늘어 버린 담배를 줄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생으로 버티기엔 쓰라리고 아픈 가슴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몸과 마음이 땅 밑으로 꺼질 듯 가라앉을 때마다 담배 연기로 속을 달랬다.

그렇게 늘어 버린 담배가 이제는 하루에 몇 개비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다만 어젯밤엔 한 대도 피우지 않고 잠이 들었다. 재이가 도망친 후, 처음이었다. 그 조그만 게 뭐라고 굳건한 성 같았던 제 마음을 그리도 살벌하게 휘저어 놓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재현은 반쯤 태우다 만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 끄고, 돌아섰다. 저만치 재이가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뛰어오다 그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가 떠나 버린 줄 알고 찾아 헤매는 꼴이었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이 보였다.

재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눈에 물기가 촉촉이 고여 그를 올려다보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내가 떠난 줄 알고 잡으러 나왔나?”

“…….”

“이럴 거면서 돌아가라고 호기를 부렸어? 내가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재현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어깨가 더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오빠, 한국에 언제 돌아갈 거야?”

“안 가.”

재이가 우뚝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안 간다니.”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계속 걸었다.

“다 정리하고 왔어. 사표 냈다고. 그러니 네가 날 먹여 살려야 해.”

“농담할 기분 아냐. 워크홀릭인 오빠가 사표를 내다니, 그게 말이 돼?”

“그동안 너무 일만 하고 살았어. 이제는 좀 즐기면서 지내야지.”

재이는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렸다. 그중 흑인 남자가 재이에게 알은척을 했다.

“I’m her fiance. (약혼잡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 놈에게 재현은 자신을 확실히 소개했다. “오, 오케이.”, 하더니 남자는 총총 사라졌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단둘이 되자 재이가 다시 물었다.

“장난치지 말고, 언제 갈 건지 말해 줘.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널 여기 두고 어떻게 가? 이제부터 우린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하지만 오빤 여기서 할 일이 없잖아. 캐나다에서 취직이라도 하게?”

“내가 취직할 데 없을까 봐. 이래 봬도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은 몸이야.”

“물론 그렇긴 하지만….”

“네가 벌어서 먹여 주면 더 좋고.”

재이는 그를 곱게 흘겨보며 납득할 만한 수준의 대안을 요구했다.

“곧 미주 사업 출장소가 생길 예정이야. 처음부터 내 손으로 만들다시피 해야 하는 사업이라 힘들겠지만, 도망간 너를 찾으러 다녔던 것보다는 쉽겠지 싶다.”

“…….”

“두 번 다시 널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 보낸 지난 3개월이 정말 지옥 같아서, 무슨 짓을 해도 그것보단 나을 거야.”

“…미안해, 오빠.”

“미안할 거 없어. 아버지 지시를 쉽게 거절할 순 없었을 테니까.”

현관문을 열고 재이를 먼저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재이가 입고 있는 카디건을 벗기고, 파자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단둘이 된 순간부터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좆이 아프게 꺼덕거렸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도망가지 마. 네가 어디로 도망치든 세상 끝까지 쫓아가겠지만, 제발 나 좀 그만 힘들게 해.”

“…오빠, 나 어학원 가야 돼. 이럴 시간이 없어.”

파자마 셔츠 아래로 성급하게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팔을 붙잡고 제지하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가지 마.”

“그건 곤란해. 오늘 스터디가 있단 말이야. 팀원들끼리 모여서 원서 읽고 토론하기….”

재현은 입술로 말을 막아 버렸다. 달콤하고 상큼한 입술을 한입 가득 베어 물고 빨았다. 그사이 남은 단추를 모두 풀고 셔츠를 벗기자 뽀얀 살결과 탱글탱글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희고 고운 살결은 그의 애끓게 만들었다.

“그럼 내 좆 빠는 거 봐서 보내주든지.”

재현은 신발장에 등을 기댄 채 트레이닝 바지를 살짝 내리고, 커다랗게 부푼 페니스를 꺼냈다.

“여기서?”

머뭇거리는 재이를 꿇어앉게 해 입에다 좆을 물렸다. 따뜻하고 축축한 온기가 기둥을 감싸자 나른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얼마나 많은 밤을 이 순간을 기다리며 뒤척였는지 모른다. 재이의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의 대비를 보면서 그 작은 입속에 좆을 처박고 흔들어대고 싶었다.

“내 좆 물고 있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는 거 알고 있어?”

쾌감에 잔뜩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귀두를 쪽쪽 빨며 고개를 젓는 모양새까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입 속에 넣어 두고 싶었다.

페니스를 빠는 볼이 홀쭉하게 들어가는 것만 봐도 쌀 것 같다. 재현은 기둥을 붙잡고 재이의 볼 안쪽 연한 살에다 귀두를 비볐다. 축축하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선득했다. 재이가 눈물 콧물을 쏟아 내고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입에다 처박기를 수십 번. 꽤나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울 텐데도 녀석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예쁜 게 예쁜 짓만 하지.”

재현은 재이를 아일랜드 식탁 위에 눕히고, 아직 만족을 모르는 페니스를 흥건히 젖은 재이의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극한 만족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하루 종일이라도 품에 안고 뭉개고 싶었지만, 절정은 너무나 쉽게 찾아왔다.

재이는 한 시간쯤 늦게 어학원에 도착했다.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이느라 그렇지 않아도 늦은 시간이 더 지체됐다. 오후 5시에는 레스토랑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재현은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다른 직원을 구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재이가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걸 지켜보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왜 여기서 굳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재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일을 곧잘 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면서도 손님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캐치해 빠르게 서빙하는 기술이 제법이었다. 적당히 웃어 주고, 적당히 대꾸하면서 부지런히 레스토랑을 오가는 모습을 보니 재현의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재현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다 먹지도 못 할 음식을 주문했다. 재이와 같이 일하는 다른 웨이트리스들이 재현 쪽을 힐끔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Are you Jaee’s boyfriend? (재이의 남자 친구인가요?)”

커피를 따라 주며 다른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No, I’m her fiance. We’re gonna get married soon. (아뇨, 약혼잡니다. 곧 결혼할 거라서요.)”

“You have many rivals in love. (연적이 아주 많으시네요.)”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멀끔하게 생긴 청년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

“They come here all the time, but she’s never interested in anyone. (저 사람들 여기 매일 오거든요, 근데 재이는 아무한테도 관심 없었어요.)”

재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올 때 팁을 두둑이 놓아두었다.

“오빠, 나 일 그만두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로 여행 갈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이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가자.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데려다줄 테니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빨간 머리 앤의 무대가 되었던 섬이 있거든. 기억나?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앤이 사는 곳에 가고 싶다고 오빠한테 떼썼던 거. 정말이지 꼭 한번은 가보고 싶어서 밤마다 소원을 빌었어.”

“기억나지. 앤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캐나다까지 앤을 만나러 갈 수는 없다고 널 달래느라 혼이 났던 것 같은데.”

“물론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앤의 그린게이블즈 하우스랑 샬럿타운이랑 다 그대로 있어. 거기 한번 가보고 싶어.”

이런 순간에 보면 녀석은 아직 소녀 같았다.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

“거기 진짜로 갈 수 있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지만, 여기서 혼자 있으면서 단 한 가지 위로가 되었던 게, 멀지 않은 곳에 빨간 머리 앤의 무대가 되었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실제로 살았을 아름다운 동네가 정말 존재한다는 거였어. 언젠가는 가볼 수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재현은 재이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함께 가자.”

재이는 재현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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