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지막 시험이 무사히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인턴십 준비와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의 마무리 정도였다. 오후에는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선배들과의 대담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행사에 참여하기 전 인영과 나는 학과실에 들러 사물함을 정리하기로 했다. 학과실에는 시험을 이미 끝낸 졸업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민재이, 넌 진짜 좋겠다. 취업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내가 세현 자동차 대표의 딸이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퍼지면서 여기저기서 질시 섞인 부러움의 눈초리가 쏟아지곤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나 취업 준비를 소홀히 했던 건 아니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회사에 걸맞은 인재가 되기 위해 다방면으로 스펙을 쌓았다. 저들이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전공 책을 읽었고, 저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동안 나는 공모전에 도전했다 여러 차례 물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노력은 가진 자의 여가쯤으로 치부되고 폄하되는 게 속상했다. 그들은 내가 학점에 아등바등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내가 너희들보다 더 노력한다고,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다고 열을 올리며 말했지만, 지금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다.
“요즘 같이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에 참 복도 많아.”
“재벌들이야 취업난 같은 걸 알기나 하겠어?”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서 몇 년 일하는 척하다가 같은 재벌가의 남자랑 정략결혼 하는 거지 뭐.”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종알거리는 입을 닫아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복이 많아서 참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것도 사과해야 하니?”
분위기가 싸해지자, 남학생들이 수습에 나섰다. 이번 주 금요일에 종강 파티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장소 투표에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조금 가벼워졌다.
“근데, 지난주에 엄청 잘생긴 남자가 재이 너 찾아왔었다며. 외제 차 타고 와서 모시고 갔다고 하던데. 그 남자는 누구야?”
동기 중에 누군가 재이에게 물었다.
“오빠야.”
“친오빠?”
“…응.”
‘응’이라는 대답이 단박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뭐였을까. 이젠 정말로 재현과 나는 남매가 아닌데, 그를 친오빠라고 누군가에게 소개하기가 겁이 났다. 재현이 얼마나 잘생겼는가로 설전이 오가는 동안 나는 그와의 섹스를 상기했다.
일요일, 우리는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여러 번 몸을 섞었다. 욕실, 거실, 침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물고 빠는 그의 체력에 나는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교접했던 부위가 뭉근하게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재현과의 섹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의 눈빛, 손길, 내 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쾌감을 안겨 준 그의 몸.
재현의 관심과 사랑이 없는 민재이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남자 친구 한번 사귀지 않고 집과 학교만 왔다 갔다 했던 것도, 다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 모든 결정에 재현의 의견이 개입되었던 것 같다. 물건을 고를 때는 이걸 오빠가 마음에 들어 할까부터 생각했고, 옷을 고를 때는 오빠의 취향을 먼저 고려했다. 미니스커트, 타이트한 원피스, 야한 디자인의 옷은 내 옷장에 걸리지 못했다. 클래식하고 단정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취향을 닮았다.
내 정치적인 관점도, 사물을 보는 시각도, 경제관념도 모두 그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하다못해 대학 전공도 그가 권하는 학과 중에 가장 내 관심사와 맞는 분야를 골랐으니, 말 다 한 거다.
이렇게 숨 쉬듯 자연스럽게 내 삶을 쥐고 있던 재현이 어느 날 내게서 완전히 관심을 돌린 건, 내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아이돌을 덕질하듯 그만을 바라봤던 내 존재는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의 맥주를 마시러 가자는 제의를 뿌리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혼자 저녁을 먹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연말이라 부모님은 모임이며 행사가 많아 거의 매일 저녁 늦게 돌아왔다. 그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욕조에 장미 향 입욕제를 뿌리고 거품을 잔뜩 풀었다. 그리고 평소 즐겨 마시는 달콤한 아이스 와인을 잔에 따라 욕실로 향했다. 욕실엔 최신 음향기기가 설치되어 있어 음성으로 듣고 싶은 노래를 선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틀어 놓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하게 몸을 적시는 물의 감촉에 피로가 녹아든다. 거품을 옷처럼 몸에 두르고 나는 뒤로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은은한 장미 향과 따스한 물의 감촉, 잔잔한 음악에 와인까지. 완벽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이 욕실은 가끔 손님이 올 때 외에는 나 혼자 사용했다. 부모님과 재현은 각자의 욕실이 따로 있었으니까. 그래서 갑자기 낮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잠깐 졸았던 건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재현이 욕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조금 지친 얼굴로 욕조 옆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른한 눈동자로 선 그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호텔에서의 일은 꿈이었던 것처럼.
그는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반쯤 잡아 내린 채, 욕조에 엉덩이를 걸쳤다. 나는 거품 때문에 오빠에겐 보이지 않는 무릎을 끌어당겨 안으며 물었다.
“일찍 왔네. 밥은 먹었어?”
“먹었어.”
재현은 욕조 한편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남은 와인을 비우고, 새로 따랐다.
“지나치게 달아.”
그가 코를 찡그렸다.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래서 꼭 너처럼 달아.”
나는 시선을 깔며 얼굴을 붉혔다. 재현은 나를 쳐다보며 넥타이를 끌러내고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내 눈은 문 쪽으로 향했다.
“오빠, 여기서 씻으려는 건 아니지?”
“뜨거운 물이 필요해.”
그러는 사이 셔츠 앞섶이 벌어지고 가슴과 배의 근육이 드러났다.
“엄마 아빠 오실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같이 목욕할 순 없어.”
그러나 재현은 개의치 않고 바지를 벗었고, 팬티를 내리자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크고 장대한 페니스가 불쑥 튕겨 나왔다. 위를 향해 꼿꼿하게 고개를 든 기둥은 제 주인처럼 기고만장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내가 나갈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신을 보이며 욕조에서 일어섰지만, 이내 재현의 손에 붙들려 다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리 와.”
재현은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가슴에 맞닿은 내 등으로 그의 열기가 전염된다.
“문은 잠갔고,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부모님은 일찍 못 오셔. 걱정 안 해도 돼.”
“하지만….”
나는 오빠처럼 대범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이라도 누군가 저 문을 열고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조금 젖은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재현은 한숨 쉬듯 읊조렸다.
“오늘 좀 힘든 하루였어. 잠시만 이렇게 안고 있자. 숨 좀 쉬게.”
내 어깨 위로 흐르는 그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무척이나 고단하게 들렸다. 주어진 일은 그게 무엇이라도 완벽하게 해내는 그에게도 힘든 하루는 있겠지. 가지지 못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자신만만한 그에게도 가끔은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오겠지.
내게는 거대한 산처럼 무너지지 않는 존재였지만, 그건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일 뿐, 속에선 얼마나 많은 소용돌이가 일고 있을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재현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 고민되는 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가만히 잡으며 나는 탄탄한 그의 가슴으로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다지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돌기처럼 비죽 튀어나온 페니스는 내 등을 찌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내가 다 들어 줄게.”
재현은 제 인생에 너무나 큰 오점을 찍었던 존재가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나 저의 평온했던 하루를 완전히 망쳐 버린 사건을 떠올렸다. 신차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원래 광고를 촬영하기로 구두계약이 되어 있었던 배우가 사고를 당해 계약이 파기되면서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재현은 광고 모델의 자격을 까다롭게 제시했다.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스캔들이 없는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 모델료를 과다하게 요구하지 않을 것. 톱급의 유명한 배우가 아닌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일 것. 촬영 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계약서의 조건을 잘 지킬 것, 등등.
그런데 광고 기획 팀에서 올린 후보 중에 그녀가 있었다.
조예진. 후보자 프로필을 받아 든 재현의 인상이 굳어지자,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직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차장님? 마음에 안 드시는 분이라도….”
“조예진 씨는 뺍시다.”
“아니, 그건 왜… 조예진 씨가 가장 강력한 후보인데요.”
그 자리에서 재현은 조예진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릴 수 없었다. 동글동글 선하고 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본 모습이 뭔지. 상냥하고 싹싹한 태도 뒤에 발톱처럼 감춘 야망이 얼마나 큰지. 조예진의 본성은 제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누구든 배신할 수 있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 재현은 진심으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차장님께서 제시한 그 모든 조건을 다 맞출 수 있는 배우 1순윕니다. 얼마 전에 공익 광고도 찍어서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도 좋고요. 데이트하고 싶은 여배우 1위로도 뽑히지 않았습니까?”
기획 팀장이 열을 올리며 조예진을 추켜세웠다.
“그래도 안 됩니다.”
난색을 표하는 기획 팀장을 대신해 본부장이 나섰다.
“휴식 시간을 좀 갖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민 차장?”
직원들이 회의실을 나갔다. 재현은 책상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 조예진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 입 안이 깔깔해졌다. 그녀는 민재현의 인생에 가장 큰 오점이었다. 믿었지만 배신당했고, 좋아했지만 상대의 마음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조예진이라는 여자한테 이용을 당했다. 그 시절의 재현은 아직 어렸고, 에너지가 넘쳐나던 때였다. 완벽주의적 성향이 그때라고 덜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런 성향 때문에 예진을 곁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예진은 완벽해 보였다. 어리고 순진하고 아름다운 배우 지망생. 사람들은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다.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조예진이 인간관계를 만들면서 얼마나 저울질을 하는지. 저에게 도움이 되는 이들에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면서, 필요 없을 땐 얼마나 가차 없이 관계를 쳐내는지 모른다.
그녀는 굉장히 계산이 빠르고 영악했다. 저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사람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저의 매력 속으로 끌어들이는 기술도 뛰어났다. 도움을 줄 사람이 원하는 건 마음이든 몸이든 개의치 않고 내줄 수도 있었다. 특히 그녀의 어장 속에 있는 남자들은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줄 모르면서도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꼭두각시처럼 내 몸에 줄을 매단 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사장님께 아직 아무런 언질을 못 받은 모양인데, 조예진 씨는 사장님께서 특별히 추천한 모델이네.”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국내 사업부 본부장은 재현보다 나이는 훨씬 많았지만, 재현이 오너의 아들이다 보니 깍듯하게 대했다. 일의 권한도 상당 부분 재현에게 많이 넘겨주고, 중차대한 일과 최종 승인에만 직접 관여했다. 그는 해외 사업부의 고문직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아 재현이 그를 대신해 처리할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가요?”
재현의 눈동자에 짙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예진을 가족들에게 소개한 적이 없었다. 재이와 몇 번 스치듯 만난 적은 있지만, 부모님은 예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예진이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몇 번 얘기한 적은 있었지만, 재현은 부모님의 간섭이 싫어 거절했다. 그런 아버지가 예진을 추천했다는 것은 사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데….
설마….
재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기분 나쁜 가설을 이내 지워 버렸다.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조금 감기 기운만 보여도 안절부절못하며 약을 사다 바치고, 병원에 직접 데려가는 그였다. 폐경을 겪을 무렵 우울해하는 어머니를 위해 모든 스케줄을 뒤로 미룬 채 10일간의 유람선 여행도 감행했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바람을 피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아버지에게 그런 압력을 넣을 만큼 강력한 권력이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 예진의 아버지는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니, 가족은 아닐 거고….
“무슨 이유로 조예진을 제외시키라고 하는지 모르겠네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거면 잠시 접어 두게. 사장님의 특별한 지시가 없었어도 조예진 만큼 현재 적절한 후보가 없어. 자네가 내건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몇 안 되는 배우가 아닌가. 경쟁업체인 SR 자동차에서 김나은을 이미지 모델로 스카우트했다는군. 김나은도 요즘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떠오르는 신예라면서.”
회의를 미루고 대표실로 올라간 재현은 아버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누구라고 직접 언급할 순 없지만, 이번 신차 출시와 관련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신 분의 부탁이 있었다. 알아보니 이미지도 깨끗하고, 평판도 좋고, 우리 회사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추천한 것이니, 큰 결격 사유 없으면 기용하는 게 어떻겠느냐.”
대단하네, 조예진. 엄청난 뒷배를 얻은 모양이지. 주로 단역을 맡으며 저보다 먼저 유명해진 동기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유명해진 이유겠구나, 그 뒷배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현재의 남자를 버리고, 널 더 높은 곳으로 보내줄 다른 남자로 옮겨 갈 수 있는 여자니까.
그렇게 해서 신차 출시 광고 모델은 조예진으로 낙점되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적절한 이유 없이 그녀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기한테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고 예진이 오해라도 하면 곤란했다.
“얘기, 안 할 거야?”
재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재현의 상념을 깨웠다.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오빠가 회사에서 무슨 일로 힘들었는지 나도 알고 싶어.”
“넌 몰라도 되는 일이야.”
뾰로통해진 볼에 재현은 살짝 입술을 눌렀다.
“우리 꼬맹이가 다음 달부터 광고 기획 팀 인턴으로 일을 시작한다니, 시간이 빠르다. 졸업 시험은 잘 봤고?”
“그럭저럭. 인턴으로 일하는 거 무척 기대돼. 일하는 오빠의 모습은 어떤지도 궁금하고.”
“회사에서 내 별명이 ‘냉혈한’이야. 기대할 거 없어.”
“오빠가 얼마나 차갑고 냉정했으면 그런 별명이 붙었을까.”
재현은 복잡한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관계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선을 긋고, 제 영역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가 관계를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냉정하고 무심한 태도였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최근 들어 오빠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지 확실히 깨달았어.”
“그건….”
“알아, 나에 대한 감정을 밀어내려고 했다는 거. 근데, 오빠의 그런 모습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어. 죽을 만큼 힘들었거든.”
“이제 그럴 일 없어. 이렇게 네가 내게 왔으니까.”
재현은 재이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재이의 호흡이 조금씩 빨라졌다. 벌어진 음부 틈새로 손가락을 비볐다. 다리를 오므린 재이가 속삭였다.
“오빠,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좋겠어.”
재현은 대답 대신 재이의 얼굴을 돌려 입술에 키스를 했다. 입 안을 싹싹 핥으며 밑으로는 손가락을 넣었다. 보통 때보다 더 빨리 흥분한 질에서는 이미 애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보며 혀로는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난간 붙들고 서서 엉덩이 내밀어.”
재현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명령했다.
“오빠….”
“말 잘 들어야 일찍 끝나.”
“하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지. 신음 소리만 잘 막아 봐.”
재이의 하얀 엉덩이에는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하얀 거품 사이사이로 보이는 말간 속살이 더욱 흥분을 돋운다. 애액은 충분히 흐르고 있었지만, 아직 충분히 풀어진 상태는 아니었다. 2층까지 올라가기엔 너무 번거로웠다. 그의 페니스는 당장이라도 저 좁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이고.
욕조에 몸을 담근 뽀얀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흥분한 녀석. 단맛을 한번 보고는 더욱더 미쳐 날뛴다. 기둥을 쓸어 거품을 닦아 내고, 마지못해 상체를 구부려 엉덩이를 뒤로 내민 재이의 몸을 붙잡았다. 구멍에 맞춰 조금 뻑뻑한 안쪽으로 반쯤 밀어 넣었다. 재이가 흠칫 놀라 허리를 한 번 털었다.
“젠장….”
엄청난 압박감이 성감을 위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단번에 허리를 쳐올려 뿌리까지 완전하게 재이의 몸 안으로 파묻었다. 귀두가 뭉그러질 정도로 깊게 삽입하자 재이의 몸은 반사적으로 그를 꽉 조여 물었다. 재현은 밭은 숨을 내쉬며 손을 내려 구멍 위쪽의 클리토리스를 살살 문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좁아서 움직이기 힘든데, 안이 젖지 않으면 힘들었다. 그를 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재이는 이를 물고 신음을 참아 내고 있었다. 다리 길이의 차이로 인해 재이는 발꿈치를 든 채 흔들거렸다. 재이의 오른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균형을 맞추고, 재현은 엉덩이를 뒤로 살짝 뺐다가 앞으로 튕겨 보냈다.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충돌에 흔들렸다. 그 모양새조차 야하고, 사랑스러워 재현도 이를 물었다. 절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질 속이 젖어 갔다. 들고나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정수리까지 뻗어 오는 짜릿함.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집에서 몰래 벌이는 정사에 대한 죄책감이 흥분을 두 배 세 배 돋워 사정감은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재이는 한 손은 욕조 난간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무섭게 밀려드는 쾌감을 버텨 내고 있었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지고, 흥분이 커갈수록 버티기 힘든지 앓는 소리를 했다.
“오빠, 힘들어.”
“빨고 싶어 죽겠다. 샤워 부스로 가자.”
욕조에서 나와 샤워 부스로 자리를 옮긴 재현은 따뜻한 물을 틀어 재이를 씻겼다. 춥지 않도록 따뜻한 물을 맞게 해놓은 뒤 바닥에 앉아 재이의 다리 한쪽을 제 어깨에 걸치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꿀이 흐르는 음부에 입술을 처박았다.
향긋한 거품 비누, 장미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구멍 주위를 핥고 부드럽고 여린 속살을 빨았다. 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어서 그런지 혀에 감기는 촉감이 여느 때보다 더 말랑말랑했다. 하루 종일 여기에 코를 박고 있으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숨이 넘어갈 듯 진저리치던 재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오빠… 제발 그만…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애원하는 목소리가 곧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물기가 가득 찼다. 재현은 일어나서 재이의 엉덩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구멍에 좆을 맞추고 재이를 아래로 내려앉히자, 안쪽 깊은 곳까지 박히는 느낌이 묵직하다. 재이는 그의 목에 매달린 채 구멍을 강하게 조여 댔다. 두 개의 육체가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합을 맞추는 소리가 요란하게 욕실 내에 울려 퍼졌다.
찰박찰박. 재이의 구멍에서 물처럼 흐른 액이 재현의 고환을 적시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참을 수 없는 사정감을 느끼며 재현은 조그마한 엉덩이를 쥐락펴락했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오르가슴을 참지 못하고 재이가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경련을 일으킨 질벽은 더욱더 거세게 페니스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안에 든 모든 것들을 다 뽑아 먹을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마터면 구멍 안에다 정액을 전부 쏘아 보낼 뻔했다.
간신히 뽑아낸 페니스에서 하얀 액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려 물줄기에 쓸려 간다.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던 스트레스도 모두 정액과 함께 휩쓸려 갔다. 이 앙증맞은 녀석을 품에 안고 자고 싶은 욕망이 불쑥 치밀었다. 그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엔 분명 중독성이 있었다.
“오늘 밤 오빠랑 같이 잘래?”
“싫어. 엄마 아빠 오실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나 먼저 나갈게.”
재이는 대충 몸을 헹구고 목욕 타월을 두른 뒤 욕실 밖의 상황을 살폈다. 그러고는 안도하며 재빨리 나가는 걸 보니 웃음이 났다.
***
“우리 재이, 오늘 크리스마슨데 데이트 안 하니?”
모닝커피를 내리며 어머니가 물었다. 부모님은 오늘 전시회에 들렀다가 발레를 보러 간다고 했다. 같이 갈 거냐고 물으셨지만, 두 분만의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기 싫어 거절했다. 원래는 오늘 재현과 처음으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같이 가려고 맛집도 찾아 두고, 연인들을 위한 낭만적인 장소도 물색해 두었는데, 재현이 어제 전주 공장에 내려갔다. 신차 출시를 앞두고 그는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공장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어제 내려가서 오늘까지 일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기다리지 말라는 전화 한 통 해주고서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원래는 오빠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취소됐어요.”
“얘는. 크리스마스를 오빠랑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어머니가 건네는 머그잔을 받아 들고, 나는 향을 들이마셨다. 깊고 그윽한 커피 향이 어쩐지 재현을 닮은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 친구도 없는데, 그럼 어떡해요.”
“지상이랑 만나. 약혼 전에 몇 번 만나 보기로 했다며.”
지난 주말 지상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도 좋고, 크리스마스도 좋으니 만나서 데이트하자고.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언제까지 거절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너는 지상이랑 따로 만나지 말라고 경고하던 재현의 굳은 얼굴을 떠올렸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재현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를 두고 그의 친구인 지상과 결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지상을 만나서 우리 결혼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이대로 결혼이 진행되는 건 우리 모두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머그잔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지상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오늘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있어요.
잠시 후, 지상에게 전화가 왔다.
두 시간 후 집 앞으로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날씨가 몹시 추우니 멋 낼 생각하지 말고, 따뜻하게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옷장 밖에 걸린 아웃핏을 쳐다보았다. 재현과의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위해 구입한 아이보리색 원피스와 초록색 코트. 오늘 이걸 입을 수 있을까. 재현에게선 언제쯤 돌아올 건지 연락조차 없는데,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옷을 입고 지상을 만나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블랙 진에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그레이 니트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롱 패딩을 걸쳤다. 아이보리색 털모자와 털 부츠까지 신고 나니 눈밭에 굴러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지상을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부모님은 반색을 하셨다. 지상은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다시 연락을 할까 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어. 나랑 잠깐 갈 데가 있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며 지상이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어디를요?”
“가보면 알아.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잠깐 얼굴만 비추고 우린 데이트하러 가자.”
“실은 나 오빠한테 꼭 할 얘기가 있어서 보자고 한 거예요.”
“나도 할 얘기 있으니까 이따가 하자.”
지상이 날 데리고 간 곳은 뜻밖에도 교외의 집안 별장이었다. 오늘 여기서 선주 그룹의 수장이자 지상의 할아버지인 박 회장의 재혼 1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고 했다. 모두 벌레 씹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박 회장은 네 번의 결혼을 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여자는 30대 후반으로, 누가 봐도 그의 돈을 보고 결혼한 게 뻔한 일이라,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반기지 않았다.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와 여자의 사이에는 열 살 된 아들이 있었다.
“미리 동의 구하지 않고 여기 데려와서 미안한데, 요즘 할아버지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셔. 죽기 전에 나 결혼하는 거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 그런데 얼마 전에 너와 결혼 얘기 오갔다는 소식 들으시더니 오늘 꼭 데리고 오라고 당부하셨거든.”
“오빠, 나는….”
“할아버지한테 잠깐 인사만 하면 돼. 뭘 약속하고 그러는 자리 아니니까 부담 느낄 필요 없어.”
“그래도….”
얼떨결에 지상의 가족들에게 결혼 상대로 소개되는 이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지상 오빠,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차에서 내리는 나와 지상을 발견한 친척들이 인사를 해오는 통에 나는 해야 할 말을 미처 다 하지 못 했다. 얼떨결에 별장 안으로 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가고는 누가 누구인지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족들을 만났다. 박 회장이 워낙 여러 번 결혼을 한 데다 각 처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다 합쳐 여덟 명이었다. 그 자식들이 낳은 자식들과 친척까지 합쳐 50명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생신이나 결혼기념일 외에는 이렇게 많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일은 드물다고 하지만, 늘 단출한 식구들과 조용한 모임에 익숙한 나로선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게다가 회장님이 날 너무나 반갑게 맞아 주어서 지상과 결혼할 계획 같은 건 없다고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상의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참하고 예쁘게 생겼을까. 우리 지상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여보?”
“그렇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연회장에서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치만 보다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간신히 자리를 피했다. 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재현이었다. 하필 지금 전화가 오다니, 난감했다. 어디 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며 지상이 다가왔다.
“우리 그만 갈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어.”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아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말씀드렸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화 온 거 아니야?”
지상이 진동하는 내 휴대폰을 가리켰다. 나는 집에 가서 전화를 받고 싶었다. 지금 누구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재현에게 말하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아서. 거짓말은 서투르니 재현이 물어보면 모두 사실대로 말할 게 뻔했다.
“안 받아도 돼요. 이제 근처 카페라도 가서 얘기 좀 해요.”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다.”
지상도 나도 연회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상은 근처에 괜찮은 스테이크집을 안다고 했다. 그가 데리고 간 레스토랑은 강변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좋았다. 옅은 안개가 서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강.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지나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가방 속에서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마음이 점점 불편해진다. 지상은 안심 스테이크를, 나는 트러플 탈리아텔레를 주문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때라 무척 배가 고팠다.
“할 얘기는 뭔데?”
“사실 회장님께 인사드리기 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 버렸어요. 오빠, 저… 이 결혼… 못 할 것 같아요.”
지상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그건 말하기 좀 곤란해요.”
“집안에서 반대하는 사람이야?”
부모님이 알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사람인 건 맞다.
“아직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분명 반대하실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상대가 다름 아닌 재현인 것을 알면 지상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따뜻한 물로 입술을 축였다.
“기다려 줄 테니까, 정리해.”
“…….”
“집안에서 반대할 남자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재현이부터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너 아직 젊고 연애 경험도 별로 없어서 한때의 불같은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어. 나도 그랬으니까. 다들 그런 감정 한 번쯤 겪어 봤을 테지.”
“…….”
“지금은 그 남자만 보이고, 그 사람 없으면 죽을 것 같겠지. 하지만 그거 다 한때야.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되어 있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내가 아니어도 넌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하게 될 텐데, 이왕이면 이름도 모르는 남자랑 하는 것보다는 오빠 친구인 내가 낫지 않겠어?”
나는 무척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지상을 쳐다보며 눈만 깜박거렸다. 내게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데도 이 사람은 그걸 눈감아 주겠다는 건가. 쿨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리 결혼에 대해 졸업하고 내년 후에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 그건….”
“드라마에서나 보는 삼류 막장 드라마 찍고 싶지 않으면 네가 지금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선택이 뭔지 잘 생각해 봐. 마음이 더 깊어지지 않았을 때 정리하는 편이 쉬워.”
지상의 말에 틀린 데는 없었다. 재현과 나의 관계는 그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할 거고, 우리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이건 사랑도 뭣도 아닌, 그냥 불륜 같은 걸까.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지금 먹는 음식이 소화가 될 것 같지 않다. 음식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파스타를 앞에 두고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삼류 막장 드라마. 재벌 아들을 사랑한 가난한 여자. 그 여자에게 돈을 주어 떼어 내려는 엄마. 나와 재현이 찍게 될 드라마는 어쩌면 삼류도 아닌 사류가 될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굳이 찍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네가 너무 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포크로 면을 빙빙 돌리면서 강가에 떠다니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내 앞길도 저 안개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면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스테이크를 자르다 말고 지상이 코트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재현인데.”
사레들린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어, 지금 같이 있어.”
지상은 내게 냅킨을 건네며 전화를 받았다.
“여기? 교외야. 같이 점심 먹는 중. 여기로 온다고? 야, 넌 남의 데이트 방해하지 말고 여자나 찾아봐. 일에 파묻혀 살더니 크리스마스에 만날 사람이 없어서 남의 데이트를 방해하냐? 이 자식이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됐고, 끊는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 오빠가 뭐래요?”
“너랑 같이 있냐면서 오겠다고 하길래 데이트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장난기 잔뜩 서린 눈동자를 빛내며 지상이 웃었다. 원래 오빠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것처럼 굴었다. 툭툭 던지는 한마디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서로 그걸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재현은 분명 열이 받았을 것이다.
“자식, 크리스마슨데 여자도 안 만나고 뭐 하냐. 재현이 그 사건 이후로 여자라면 질색을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었나.”
지상은 혼자 생각에 잠긴 듯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재현과 지상은 지난 3년간 서로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조예진과 헤어진 이후의 재현에 대해 지상은 많은 부분을 놓쳤을 것이다.
“무슨 사건이요?”
“있잖아, 조예진이 재현이 차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간 그 사건.”
조예진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신인 배우이고, 예전에 재현과 사귄 적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예진과는 1년 넘게 사귀었기에, 나도 몇 번 스치듯 만난 적이 있다. 재현은 자신과 만났던 어떤 여자에게도 날 정식으로 소개해 주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인사시키지 않았고. 마치 오래 만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때도 나는 홀린 듯 예진을 바라보았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과 볼륨 있는 몸매가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남달랐다. 헤어진 이유에 대해 재현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영국으로 유학을 간 게 그 여자 때문이 아닌가 짐작만 했을 뿐.
“우리 오빠가 차인 거예요, 찬 게 아니고?”
내가 아는 재현은 여자를 버렸으면 버렸지 차이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그 자식이 자세한 얘기는 안 해서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조예진이 재현에게 뭔가를 부탁했고, 그 부탁을 거절하니까 조예진이 미련 없이 떠난 게 아닌가 싶어. 제 부탁을 들어주는 다른 남자에게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수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사귀던 당시 예진은 정말로 재현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뭔가 엄청난 부탁이었을까. 재현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여자에 대한 불신이 아주 깊어. 누군가 제게 다가오면 순수한 의도보다는 불순한 목적을 먼저 계산하게 됐지. 그런 점을 보면 녀석 보기보다는 순정파인가 봐. 여자들이 절 이용했다면 저도 적당히 이용해 주면 되는 거 아냐?”
“재현 오빠가 냉정하긴 해도 사람을 적당히 이용하다 버리는 짓은 못 할 거예요.”
“물론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내가 그 자식을 좋아하는 거고.”
재현은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다 바칠 만큼 재현이 순정파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조예진을 특별히 아끼고 좋아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1년 넘게 사귀었던 것만 봐도.
“입맛이 없어? 아니면 맛이 없어? 다른 거 시켜 줄까?”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보며 지상이 물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나는 몇 입 더 먹으며 성의 표시를 했다.
“저 집에 좀 데려다주세요.”
“그래. 내가 한 얘기 잘 생각해 봐. 우리 쪽이나 너희 쪽이나 이 결혼이 성사되기를 무척 바라고 계셔. 그건 어떻게든 이 결혼이 성사될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지.”
“잘 생각해 볼게요.”
서울 시내에 진입할 때부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물체에 닿으면 녹아 없어질 만큼 드문드문 내리는 눈이었다. 길이 조금씩 척척해진다. 집 앞 골목길에 당도하니, 차고 안의 자동차에서 재현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를 향한 시선이 복잡하면서도 화가 난 듯 굳어 있었다. 지난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공장에 문제가 있었다며.”
지상이 말을 건넸다.
“잘 해결됐어. 그만 가라.”
“저녁에 특별한 일 없으면 클럽으로 와라. 애들 모여서 술 한잔할 것 같던데.”
“됐어.”
짧은 대꾸를 끝으로 재현은 대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지상에게 얼렁뚱땅 인사를 하고, 나는 곧바로 재현의 뒤를 따랐다. 전화도 안 받고, 만나지 말라는 사람을 만났으니 재현이 화가 난 것도 이해할 만했다. 재현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오빠, 전화 못 받은 건 미안해.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 왔는지 몰랐어.”
사실대로 얘기했다가는 그의 기분만 더 상하게 할 게 뻔했다. 거짓말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재현이 화를 내는 건 더 싫었다.
“지상 오빠랑은 왜 만났냐면….”
“됐으니까, 나가 봐. 난 씻고 한숨 잘 거니까.”
“…….”
문고리를 붙잡은 내 손이 얼어붙었다. 물론 그가 피곤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공장에서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1박 2일 꼬박 붙잡혀 있었던 건 중대한 사안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잠을 못 자 조금 까칠해진 그의 얼굴을 보면 지금은 그냥 쉬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휴일. 오늘만을 기다리며 기대해 왔던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실망감이 가슴 깊이 차올라 위험 수위까지 넘나들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일수록 눈물이 그렁그렁 눈가에 매달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대로 돌아서는 대신 좋은 말로 설득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원하는 내가 더 불쌍해질 것 같아서.
나는 돌아서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내 방에 돌아와 외투를 벗었다. 니트 스웨터도 벗고, 바지도 벗고, 편한 파자마 바지와 티셔츠를 걸쳤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눈물이 비 오듯 흘러 여기저기 뚝뚝 떨어졌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별일 아닌 일에 눈물을 흘리다니. 원래 누군가를 좋아하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원래 재현은 기념일 따위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이 세는 100일, 1,000일, 1주년 기념일 이런 것에 관심도 없고, 여자 친구들에게도 그런 날을 챙겨 주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라고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원래 그런 남자라고 받아들이며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는 이로울지 몰랐다. 크리스마스 같은 거 재현에게는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냥 수많은 날 중 하루 쉬는 날에 불과하니까. 주말이나 공휴일과 다름없는 날.
그런 걸 다 알면서도 이렇게 서러운 이유는… 아마도 너무 많은 감정의 변화를 한꺼번에 겪어서가 아닌가 싶었다. 오빠의 돌변한 태도. 재현과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데 대한 죄책감. 갑작스러운 지상과의 혼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처럼 불안한 미래. 내가 지금 믿고 의지할 사람은 민재현밖에 없는데, 그마저 이렇게 차가우니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예 침대 이불 속에 파묻혀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음껏 우는 편이 감정은 더 개운해질 수도 있으니까. 한참을 울었더니 기운이 없다. 물이라도 마실까 하여 이불을 들추는데,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나는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침대 옆으로 온 재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흐느낌이 멈추질 않아 그 소리만 적막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 딸꾹질까지 나온다. 이불이 걷혔다. 쏟아지는 빛과 재현의 시선. 나는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이불을 들추고 내 옆으로 들어온 재현은 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그를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뺨에 닿은 그의 심장의 울림이 전해져 왔다. 셔츠가 내 눈물로 젖는데도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그에게서 샴푸 냄새, 스킨 향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점점 진정시키고 있었다. 잠시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방심하고 있는 틈에 재현이 내 얼굴을 붙잡고 잠시 들여다보더니 키스를 해왔다. 나는 지금 그의 키스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입술을 떼려는 나와 억지로 입술을 벌려 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는 그. 결국 이기는 쪽은 힘이 센 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깊게 키스하며 재현이 날 깔아 눕히고 위로 올라왔다. 나는 셔츠 안으로 불쑥 헤집고 들어오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헉헉거렸다.
“이러지 마. 하기 싫어.”
그러나 재현은 내 말을 들어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순식간에 드러난 가슴이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두에 와 닿는 축축한 느낌. 내 울고 있다가 가슴 한번 빨렸다고 즉각 반응하는 내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찌르는 듯한 쾌감에 신음이 절로 났다.
“집에서는 하기 싫댔잖아.”
하지만 밥 한 끼도 먹지 못한 사람처럼 다급하고 격렬하게 젖가슴을 빨아대는 그를 밀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곤하다며 한숨 잔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지. 그의 입에서 가슴을 빼내기 위해 나는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재현은 너무나 간단하게 내 손을 잡아 내 머리 위로 올리고, 내 두 손을 한 손으로 잡아 눌렀다. 다음 차례는 내 바지였다. 순식간에 바지와 팬티가 끌려 내려갔다. 버둥거리는 내 귀에 대고 재현이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다쳐.”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집요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푸는 건 싫었다. 몸이 아닌 말로 대화를 하고 싶었다. 내 감정을 다독여 주고, 설명하고, 위로해 주기를 원했다. 지금이라도 데이트를 하러 가자는 말 한마디가 내게는 더 절실했다.
그러나 재현은 무릎으로 내 다리를 벌리고 페니스를 질 입구에 맞춰 비볐다. 민망하게도 그 짧은 애무에 젖어 버린 질구는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지막지한 기둥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재현의 몸을 환영하며 너무나 쉽게 길을 내줬다. 좁디좁은 길 안으로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살덩이를 삼키며 질 안에서 옅은 경련이 일었다. 밀어내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 노력은 오히려 그를 더 흥분시키는 역할만 한 것 같았다.
“하아… 미치겠네.”
재현은 입을 꾹 다문 채 끝까지 몸을 집어넣고, 그르렁거리는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몸과 몸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리자, 그가 고개를 숙여 다시 내게 키스를 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마지못해 키스를 풀었다. 까맣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집에선 하기 싫다고.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건데?”
다리를 벌린 채 애액을 내보내며 할 얘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재현이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은 밤늦게나 돌아오시겠지만, 나는 그래도 불안했다.
“싫다면서 이렇게 젖은 건 뭐야.”
“그거야… 오빠가 날 흥분시켰으니까….
“내가 지상이 따로 만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나 이 결혼 못 한다는 말 하러 간 거였어. 데이트 아니었다고.”
“넌 전화도 안 받지, 나중엔 지상이 녀석하고 같이 있다는 말 들으니 열 받아, 안 받아.”
그가 물으면서 빼냈던 페니스를 강하게 쳐올렸다. ‘헉’ 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들썩였다.
“다 설명하려고 했어.”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너 때문에 내가 열 받은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이런 일에도 질투를 하는 내가 한심해.”
“오빠… 질투한 거야?”
그는 대답 대신 속도를 올려 무지막지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조금 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휘몰아쳐 숨이 넘어갔다. 질 안쪽의 어떤 지점이 자극을 받아 그 안에 맺혀 있던 성감 덩어리가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멈췄던 눈물이 찔끔 날만큼 강렬한 자극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에게 애원을 해야만 했다.
“오빠… 제발 그만해….”
그의 허리에 감고 있던 다리를 꽉 조여 멈추게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한바탕 절정이 휩쓸고 간 후, 내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재현의 어깨를 붙잡고 한참을 매달렸다. 그가 나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좁아터질 것 같은데, 그게 좋아서 정말 미치겠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후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굵은 남성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감도 높은 쾌감이 전신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이미 한번 정상에 올랐는데도 성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직도 뭔가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부족했다.
“오빤 좋을지 몰라도 나는 싫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눈가를 적신 눈물을 핥으며 말했다.
“좋다고 말할 때까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을까?”
“그만해. 불안하단 말이야. 우리 이러는 거 아시면….”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럼 나랑 나가서 살래?”
“뭐?”
“나는 너랑 눈치 안 보고 마음껏 하고 싶으니까, 나랑 나가서 살자고.”
이 와중에도 질 속이 간지럽게 느껴진 나는 엉덩이를 조금 꿈지럭거렸다. 갑자기 아래에서 두꺼운 페니스가 쑥 빠져나갔다. 그 자리에 헛헛함이 가득 찼다. 그만하라고 해놓고서도 막상 재현이 나가 버리자 허탈함과 서러움이 다시 밀려들었다.
하지만 재현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물오른 쾌감으로 벌어진 구멍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주위에 흘러내린 물도 혀로 싹싹 핥아서 마시고, 갈라진 틈을 지칠 줄 모르고 혀로 지분거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부할 수 없는 희열이 몸을 휘감았다. 끝내 날 절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서야 그만둘 심산인 듯 그의 입술과 혀는 집요하게 나를 물고 빨았다.
어느 순간 불안감도 사라지고, 나는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몸이 뒤집혀 엎드리고, 엉덩이만 위로 올려졌다. 뒤쪽에서 깊게 삽입한 재현의 페니스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오빠의 마지막도 멀지 않은 듯 내 몸 안에 박힐 때마다 잔뜩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재현이 내 엉덩이를 잡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가 들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내 구멍이 그의 몸을 쑥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듯한 기분. 억제된 재현의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에게 엄청난 쾌감을 선사하고 있다는 희열이 내 몸짓을 더욱 과감하게 했다.
“하아… 씨발… 미치겠네.”
커다란 손이 내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페니스가 쑥 빠져나갔다. 풀썩 내려앉은 내 등 위로 뜨끈한 액이 쏟아졌다. 피로감과 만족감이 동시에 퍼진 몸은 녹작지근하게 풀어졌다. 재현이 내 등을 닦아 주는 동안 나른함에 빠져 있던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상자를 발견했다.
“저거… 뭐야?”
“네 선물.”
재현이 심상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고급 액세서리 브랜드 로고가 찍힌 조그만 종이 가방. 그 가방 손잡이에 묶인 은색 리본.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반짝거리는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백화점에 갔다가 예쁘다고 했던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하트 안에 조그마한 에메랄드가 박힌.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한참 동안 상자를 들고만 있었다. 솔직히 재현이 내 선물을 준비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내 뒤로 다가온 재현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
“이거… 오빠가 직접 골랐어?”
“네가 예쁘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는 상자에서 목걸이를 집어 들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과 직접 선물을 골랐다는 말에 나는 조금 전 오열하듯 울었던 것도 잊어버렸다. 목걸이를 채운 재현은 내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저 위쪽에 있는 재현의 얼굴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고마워, 오빠.”
내 목을 가볍게 터치하면서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내가 화낼 때마다 그렇게 울 생각이야?”
“모르겠어. 오빠가 화내는 거… 정말 싫어.”
“그럼 날 화나게 하지 않으면 되겠네.”
“…….”
“앞으로는 연락 안 되는 일 없도록 신경 써.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니까.”
재현은 내 침대에 놓인 두꺼운 쿠션을 내 등 뒤 책상에 깔고, 날 그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내 다리를 접어 올려 벌렸다. 아까부터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위용을 뽐내며 흔들거리던 그의 페니스가 다시 질 입구에 맞춰졌다. 구멍 속은 아직도 조금 전 섹스의 여운이 남아 벌름거리고 있었다. 페니스가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 뻐끔 입구를 벌리는 그곳은 내 몸이면서도 내 몸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재현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그의 몸의 일부가 아닐까 싶었다.
처음보다는 한결 풀어진 속살로 단단하고 두꺼운 페니스가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 야한 감촉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찌나 깊이 삽입되었던지 아랫배까지 꽉 채운 기분이었다. 나는 오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목이라도 졸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도 오빠한테 줄 선물이 있는데….”
재현은 페니스를 내 몸에 박아 놓은 채, 책상 위에 놓인 종이 가방에서 리본을 풀었다. 그 리본을 내 턱 아래서부터 머리 위로 감아올리더니 리본을 묶었다.
“뭐 하는 거야?”
“네가 내 선물이야. 다른 선물은 필요 없어.”
듣기에 따라선 입에 발린 느끼한 멘트일 수도 있지만, 재현은 빈말로라도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조금 전 서러움을 다 보상받은 것만 같았다.
“귀엽네.”
그가 씩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콧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간 그의 입술이 인중에 잠시 머물렀다 입술에 착지했다. 입 안으로 혀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는 페니스가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마찰이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감으로 다가왔다. 물려 있던 길을 트고 들어오는 단단함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 안이 마른다. 요의가 느껴질 정도로 깊이 들어와 치받는 페니스가 쑥 뽑혀 나갈 때마다 근사한 만족감을 던져 주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잘 느끼는 체질이었던 걸까. 경험도 없는데, 어쩜 이렇게 매번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지? 술 취한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경험담을 주워듣기론 여자가 매번 절정에 오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했는데. 여자들이 섹스에 관심이 없는 건 오르가슴을 느껴 보지 못해서라고도…. 아니면 재현이 워낙 능숙해서….
“쬐끄만 게 왜 이렇게 야하지.”
재현이 내 목덜미에 밭은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내게 걸어 준 목걸이의 펜던트를 입술 사이에 물더니 내 입 안에 떨어뜨렸다. 우리는 펜던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키스를 나눴다. 혀에서 혀로 오가는 펜던트가 맛이 날 리도 없건만, 다디달게 느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세상의 시간을 전부 가진 듯 천천히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가 선사하는 쾌락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이상하게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잡념도, 걱정도, 죄책감도 잠시 깊은 심해로 파묻혔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재현이 이 넓고 단단한 등으로 다 막아 줄 것만 같았다.
“날 봐.”
나는 감았던 눈을 떠 재현과 눈을 맞췄다. 몸과 몸이 마찰할 때 내 표정을 감상하듯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그가 이제는 별로 낯설지 않다. 어쩐지 우리의 합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내 죄책감에 대한 변명을 해본다. 우리는 동시에 절정에 올랐고, 같이 샤워를 했다.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 먹으러 나갈래?”
“아니. 그냥 집에서 먹을래. 강 여사님이 스테이크 해 먹으라고 고기 재어 놓으셨거든. 오빤 피곤할 테니까 소파에 누워서 쉬고 있어.”
나도 연이은 섹스로 몸이 노곤했지만, 오빠에게 크리스마스 특별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스테이크를 굽고, 레드 와인 소스를 만들고, 버섯과 양파도 구웠다. 신선한 채소샐러드와 브로콜리 스프를 곁들이니 멋진 크리스마스 식탁이 차려졌다.
내가 차린 식탁을 보더니 재현은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즘 나는 강 여사님에게 때아닌 요리 강습을 받고 있었다. 사람을 써서 직접 요리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남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음식 몇 가지는 있어야 된다며 어머니가 부탁한 일이었다.
나는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재현은 짧게 대답해 주었다. 넌 알 필요 없다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식사 후 우리는 같이 설거지를 하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기로 했다.
마침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너 오늘 박 회장님 연회에 갔었다며.”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옆에 앉은 재현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지상이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더라. 오늘 재이 보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아버님이 무척 좋아하셨다고 말이야.”
“저는 거기 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간 거예요. 지상 오빠가 같이 갈 데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나는 어머니가 아닌 오빠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잘 했어. 어차피 하게 될 결혼 서로 얼굴 익혀 놓고 그러면 좋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불안하게도 재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