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생 재이가 죽은 것은 그 애가 일곱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재이가 다니던 유치원에 화재가 나 두 명의 아이가 죽고, 10여 명이 화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혼자 놀다가 잠이 들었던 재이는 화재가 건물 전체로 번질 때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시신도 온전하게 수습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화재였다.
깨어났다가 기절하기를 되풀이하던 어머니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울음소리가 집안에 그칠 날이 없었다. 우리 재이가 죽었을 리 없다고, 어딘가에서 엄마를 찾아다니며 울고 있을 거라고, 어머니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름시름 앓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는 건 아닐까, 재현은 막막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특히 한밤중에 어머니가 귀신처럼 돌아다니며 동생을 찾아다닐 때는 절망감이 그를 덮쳐누르곤 했다.
어머니는 재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다시는 아이를 만날 수 없을까 봐, 그게 두려웠던 걸까.
어느 날은 멍하니 누워 창밖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당장 재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집안은 오랫동안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이듬해 봄, 아버지는 전국의 고아원을 뒤져 여자아이를 데려왔다. 재이보다 말랐지만, 놀랍도록 동생을 닮은 얼굴이었다. 사슴처럼 크고 맑은 눈망울, 자그마한 콧방울과 귀엽게 비죽거리는 입술, 오동통한 뺨과 숱 많은 까만 머리카락까지.
판박이처럼 똑같은 얼굴에 재현도 잠시나마 진짜 동생이 살아 돌아온 건가, 착각했다. 아이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재이 연기도 잘 했다. 엄마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니,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재이의 얼굴이 조금 달라진 이유를 화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전처럼 집안일을 하고, 밥을 먹었다. 재현과 아버지는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자아이는 생긴 건 재이와 비슷했지만, 성격은 무척이나 달랐다. 재이는 떼쟁이에 어리광이 심한 편이었는데, 그 애는 조숙하고 차분했다. 결핍된 애정을 애써 감추며 의젓한 척 구는 게 귀엽기도 하고.
그러나 재현은 그 아이를 제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쩐지 동생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저 땅에 차갑게 묻힌 동생은 제 미래가 어찌 생겼을지도 모르고 눈을 감았는데, 그 녀석 자리를 대신한 아이가 반가울 리 없었다. 동생 대신 부모의 사랑을 받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걸 먹으며 행복해하는 그 애가 염치없어 보이기도 했다.
‘재현아, 그 아이를 네 동생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건 안다.’
어느 날, 곁을 맴도는 아이를 차갑게 내치는 재현을 본 아버지가 그를 불러 타일렀다.
‘재이를 네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라는 게 아니다. 그 아이는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게다. 우린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난… 네 엄마까지 잃고 싶지는 않구나.’
딸을 보낸 순간에도 의연했던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였다. 부모님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애정은 절대적이었다. 막말로 재이는 가슴에 묻으면 되지만, 아내가 죽으면 자기는 살 수 없다고 했다. 딸을 먼저 보낸 것도 가슴이 아픈데, 아내까지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저 아이가 없으면 엄마가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구나.’
어머니는 정원의 그네에 앉아 그 아이가 비눗방울을 불며 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죽은 듯 까맣게 가라앉았던 눈이 따스한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재현 또한 어머니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부터 재현은 여자아이의 안전에 특히 신경을 썼다. 그 애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아프지 않도록. 아무도 그 애를 상처 주지 못하도록. 아끼고 보살펴 주었다. 어쩌면 제 친동생보다 더.
그런 아이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그녀를 본 재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학생이 된 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못난 새끼 오리가 겨울이 지나 백조가 된 것처럼.
말랐던 몸은 살이 올라 볼륨 있는 몸매로 변했고, 지나다니는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어당길 정도로 감각적인 자태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 잘록한 허리, 적당히 둥근 골반과 길고 매끈한 다리. 질끈 묶고 다녔던 생머리는 염색을 하고, 웨이브를 넣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원래도 하얀 피부는 도자기처럼 윤이 나고, 적당히 화장을 해 입체감이 살아 있는 얼굴은 다채로운 표정으로 얼이 빠지게 만들었다.
가슴에 안겨 오는 몸은 예전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당황한 재현은 다소 거칠게 그녀를 밀쳐냈다. 그런 저의 제스처가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외면했다. 불쑥 제 중심을 단단하게 만드는 그 애의 존재를. 껴안고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간 눈망울을. 그리고 사달은 어느 비 오는 여름밤에 벌어졌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는 밤이면 그 애는 유독 울적해했다. 특히 번개와 천둥이 치면 화들짝 놀라면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파들파들 떨곤 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긴 했으나, 무서워하는 건 지금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날도 몇 분 단위로 천둥이 울리고,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부모님은 행사에 참석하느라 귀가가 늦어진다고 했다.
재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빨리 와 줄 수 없겠느냐고. 혼자 있어서 무서워 죽을 것 같다고. 재현은 일이 밀려 있었지만, 천둥 번개가 난무하는 집에 혼자 있을 그 애가 걱정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현이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재이는 거실 소파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이 풀려 흐릿했다. 탁자를 보니 깨끗이 비운 소주병 하나가 뒹굴고 있다.
“히끅! 오빠, 왔어?”
딸꾹질을 하면서 헤실헤실 웃는 재이.
“이걸 혼자 다 마셨어?”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재이는 무겁게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떠올렸다.
“술을 마시면 무서움이 좀 가시거든. 오빠 없는 동안에도… 히끅… 가끔 혼자 마시면서 두려움을 이겨 냈어. 나 좀 바보 같지.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다니….”
그녀의 말에 의하면 고아원 앞에 버려지던 날,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쳤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원장님이 말했다고 한다.
말을 하면서도 졸리는지 연신 하품을 해댄다. 눈만 감으면 잠이 들 기세였다.
재현은 망설였다. 재이를 그냥 거실에 두어야 할지, 안아서 2층으로 데려갈지. 상태를 보니 혼자서 2층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여기 두기엔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실실거리는 재이. 그녀에게 몸이 닿으면 어김없이 제 중심이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걸 안다. 저리 취해서도 그녀에게선 몹시 색스러운 기운이 엿보였다. 발그레한 뺨과 가물거리는 눈망울만 보면서도 이미 흥분은 도를 넘었다.
미친. 정신과 치료라도 받아야 할 지경이다. 참으려 할수록 욕구 불만은 점점 심해지고, 갈증은 더 깊어져, 그녀가 조금만 건드리면 신경이 터질지도 몰랐다.
“그만 가서 자.”
그에게서 차가운 대답이 나갔다.
“오빠… 내가 뭐… 잘못했어?”
그녀가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 줘. 그럼 사과하든지… 고치든지 할게.”
“그런 거 없어.”
“그럼… 그럼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가워? 왜 없는 사람 취급해?”
곧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
참다못해 기어이 던진 질문에 저 혼자 서러운 듯 입술이 씰룩였다.
“이젠… 내가 싫어진 거야? 내가 미워? 아니면… 내가 쓸모가 없어졌나….”
지금 하는 말들을 이 아이는 내일 아침에 기억이나 할까. 저렇게 많이 취해서 내 얘기를 제대로 들을 수는 있을까. 재이가 눈을 감자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재현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취기에 흔들거리며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 욕정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어린애한테 무슨 상처를 줘버린 건지, 후회가 밀려들었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손을 재이가 가만히 붙잡더니 눈을 떴다.
“오빠, 나 밀어내지 마. 미워하지 마. 부탁이야.”
살짝 벌린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천둥이 울렸고, 깜짝 놀란 재이는 그에게 매달리며 품으로 안겨들었다. 떨리는 몸을 꼭 안아 진정시켰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따뜻한 체온.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여성스러운 몸의 감촉. 풀잎, 나뭇잎, 바람, 꽃 향이 어우러진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술 냄새에 섞여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탱글탱글 솟은 젖가슴이 그의 가슴에 뭉개졌다. 그의 손이 그러쥔 허리는 한 줌밖에 안 될 정도로 잘록했다.
아까부터 발기의 전조를 보이던 페니스가 단단해졌다. 터질 것 같은 충동을 누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해 본 적 없었다. 여자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고, 좋다고 매달려도 제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선뜻 욕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됐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년간 여동생으로 여겨 온 아이를 갖고 싶은 게 말이 안 된다.
파들거리던 몸이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조금씩 진정이 되어 갔다. 반대로 재현의 몸은 점점 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고. 욕망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 뭐라도 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았다. 재이가 재현의 뺨을 두 손으로 쥐고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빨간 입술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말할 때 언뜻언뜻 혀가 보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빨고 싶어서. 핥고 싶어서. 빌어먹을.
“난 오빠를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재이의 입술을 덮친 건 충동이 저지른 짓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을 한껏 머금고 그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꿈이라고,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속을 휘젓는 뜨거운 혀를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넘어오는 타액을 받아 마시며 그에게 매달렸다. 몸이 열기에 휩싸였다. 맞닿은 감촉이 그를 미치게 흥분시켰다. 저와는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혀끝에 닿는 감촉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위험 수위였다. 그는 키스 말고 더 많은 걸 원했다. 그 욕정에 덜컥 겁이 났다.
허물어지듯 떨어지는 재이를 놔두고 재현은 2층으로 올라갔다. 몸과 머리를 식히려고 차가운 물을 틀어 그 아래 섰다. 빳빳하게 발기한 좆이 꺼떡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듯 서 있었다. 기둥을 잡고 흔들자 어김없이 재이의 취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구나.
***
언제부턴가 나를 향한 오빠의 시선이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다.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빛이 탈색된 것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차오른 열기, 그리고 불만. 문득 시선을 들어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입이 마르고,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매일 보던 같은 얼굴인데, 눈빛이 달라진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냥 눈빛만 달라진 거면 좋겠는데, 태도마저 변해 버려 난 솔직히 어리둥절하다.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매정하게 뿌리친다든가, 영화 보러 가자고 조르면 그럴 시간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한다든가. 전엔 수시로 드나들던 방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옆에 가서 앉으면 일어나 다른 데로 가버리곤 했다.
원래 재현은 다른 사람에겐 얼음처럼 차가워도 나에게만큼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른 여자들에겐 눈길 한번 살뜰히 챙겨 주지 않으면서, 내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해줬다. 내게 급한 일이 생기면 열 일을 제치고 뛰어왔다. 솔직히 그래서 내 버릇이 좀 나빠지기도 했고.
그런 오빠가 달라졌으니, 내 세상은 완전히 뒤집힌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를 심각하게 잘못했거나, 나의 어떤 점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뭣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보기는 겁이 났다. 뭔가 엄청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네가 귀찮다거나, 네까짓 게 뭔데 내 일에 신경 쓰냐거나, 그런 말을 듣고 상처받을까 봐.
무엇보다 넌 이제 이 집에서 필요 없는 존재니까 그만 나가 달라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을 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좀 여린 구석이 있어서,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다. 특히 오빠의 변심은 견딜 수 있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가 같은 피를 나눈 진짜 형제가 아니라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내겐 오빠의 애정이 절대적인 내 삶의 지표 같은 거였다.
“엄마, 아빠.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모처럼 다 같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금요일 저녁.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오빠는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세현 자동차의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었다. 입사하기 전부터 큰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출근한 그는 요즘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야 퇴근을 했다.
그래도 금요일 밤에는 가족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마저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지만. 딱히 연애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일에만 미쳐 있었다.
“얘기해 봐.”
아버지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 무심한 말투가 가장 다정한 말투라는 걸 잘 아는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오빠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다.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건조하고 냉담한 성격. 저 무심한 말투까지 똑같다.
눈이 멀게 빛이 나는 얼굴만 엄마 쪽이다. 엄마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미인 소리를 들을 만큼 아름다웠다.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예뻤고, 관리를 꾸준히 한 몸은 여전히 날씬했다.
“자, 너도 한 잔 받아라. 요즘 신차 출시 때문에 정신없겠지만, 몸 상하니 건강 살펴 가면서 해.”
아빠가 따라 주는 술을 받는 오빠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할 얘기가 뭐지, 우리 재이는?”
“저… 우리 과에 복학한 선배가 있는데….”
“선배?”
“그 선배가 저한테 사귀자고 했어요.”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화제였을 것이다. 매일 학교와 집만 오가는 난 순진한 대학생일 뿐이고, 오빠의 감시 덕분에 남자랑 데이트는커녕 손 한번 못 잡아 봤다. 친구들은 소개팅이며 미팅이며 그런 자리에 잘만 나가고, 남자 친구도 수시로 바꿨지만, 내겐 딴 세상일이었다.
사실 이 얘기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부모님과 오빠의 허락을 받고 사귀는 게 낫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부모님이나 오빠 모르게 사귈 수도 있었지만, 오빠한테 들키는 날엔, 내가 아니라 선배가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오빠는 내 안전에 관한 일이라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 학교에도 꼬박꼬박 데려다줬고, 하교 후엔 김 기사를 시켜 집으로 데려오게 했다.
무릎이 까여 피가 나면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여 주는 것도, 고열에 시달리며 끙끙거리면 밤새 간호를 해주는 것도 그였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친동생이 죽고, 어머니마저 잃을 뻔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기에 아플 때만 그가 얼마나 날 걱정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내게 관심 있는 남자애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을 때는 날 그들로부터 지키는 게 그의 의무가 되었다.
재현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복학한 선배는 어떤 사람인데?”
엄마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면 뭐하게요?”
오빠의 삐딱한 말투에 식탁은 때아닌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물론 부모님도 그를 어려워한다.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비상한 두뇌와 운동선수 못지않은 운동 신경을 가진 완벽한 아들이었다. 결코 부모를 실망시켜 본 적 없고,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세현 자동차뿐 아니라 세현 그룹 전체를 이끌어 갈 인재라 해도 손색없는 그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일단 재이 말부터 들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는 어머니는 부드럽게 아들을 구슬리려 했다.
“들어 보고 말 것도 없어요. 벌써 졸업반이고,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야. 시답잖은 연애할 생각 말고, 성적에 신경 써. 데이트할 시간 있으면 책을 한 권 더 읽든가.”
당연히 반대할 거라 예상은 했다.
“성적은 충분히 신경 쓰고 있어. 지금도 하는 거라곤 공부뿐이라고. 선배 좋은 사람이야. 걱정되면 오빠가 한번 만나 봐.”
“넌 졸업하고 집안에서 골라 주는 조건 좋은 남자랑 결혼하면 돼. 이놈 저놈 만나고 다녀서 좋을 거 없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냉담한 결론에 내 나름대로는 화가 났다.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사귀어 보겠다는 건데, 그것조차도 잘라 버리는 건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그런 것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언제 이놈 저놈 만난댔어? 선배는 옆에서 오랫동안 봐왔던 사람이고, 가족들에게 소개해도 부끄러울 게 없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내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더 들을 가치도, 시간도 없다는 듯 일어나 버리는 재현 때문에.
“잘 먹었습니다. 저는 올라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오빠가 2층으로 올라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혼자서 울컥 치솟는 감정을 삭이고 있던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재이야, 오빠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부드럽게 위로했지만, 아버지는 오빠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네 오빠 말이 맞아. 근본도 모르는 놈들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내가 좋은 사람으로 소개해 주마.”
차마 키워 주신 부모님 앞에서 정략결혼 같은 건 할 뜻이 없다는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이분들의 은혜를 10분의 1이라도 갚는 길은 집에서 정해 주는 대로 집안 좋은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일일 테니. 얼굴도 모르는, 조건만 따져서 결혼한 남자랑 행복하게 사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런 물음은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어차피 집안에서 맺어 주는 남자랑 결혼해야 한다면 연애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해보면 안 되는 걸까. 나는 한숨을 속으로만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이야, 오빠한테 감초차 좀 갖다 줄래? 요즘 술도 많이 마시는 것 같고, 매일 야근이니 걱정이구나.”
어머니에게 받은 감초차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빠의 방문 앞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았던 그 문은 이제 굳게 닫혀 있었다. 지금 재현의 마음처럼. 다정했던 눈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리게 차가운 무관심이 남았다. 가끔 열기가 차올랐다 엷어지고 나면 거기엔 전보다 더 냉정한 그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오빠를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일까. 영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실연이라도 당한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연을 당했다고 저리 변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연 같은 걸 당할 사람도 아니고. 그에게 고백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떨어져 나간 여자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재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나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방에 켜진 불빛을 다 가릴 정도로 우뚝 솟은 그의 앞에서 전보다 작아진 기분이 든다. 짙은 쌍꺼풀 아래 깊이 박힌 눈이 짧은 순간 번뜩였다가 이내 잔잔해졌다.
그에게선 빛이 났다. 얼굴에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등불 하나 매달고 사는 사람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성형외과 의느님도 저리 완벽한 얼굴을 깎아내진 못했을 테다. 특히 저 얼굴선과 턱선, 그리고 섹시한 입술은 예술에 가깝다. 무려 자연산이다.
예전엔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면서 몇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 매일 같이 사는 나도 이런데, 다른 여자들은 오죽할까.
재현은 말없이 내게서 쟁반을 가져가고, 문을 닫으려 했다.
“오빠, 잠깐만.”
더 이상 그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 고민이 생겼어.”
멋대로 튀어나온 얘기였다. 내게 심각한 고민이 있을 때 오빠는 곧잘 해결책을 던져 주곤 했으므로. 이렇게라도 하면 내게 조금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얄팍한 계산이었다.
“고민?”
그가 반응을 보였다. 눈썹을 추켜올리는 걸 보니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날… 아, 아니다. 그냥 말 안 할래.”
궁금증을 유발해 그를 낚아 보려는 속셈이었지만,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내가 돌아서자, 그제야 문을 조금 더 열어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찻쟁반은 근처 서랍장 위에 올려놓은 채, 오빠는 날 문에 붙여 세웠다. 더 이상은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문과 재현 사이에 갇힌 나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오빠의 얼음 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
“설마 진짜 좋아한다는 놈이 사귀자고 했다는 그 선배 놈은 아니겠지.”
말끝마다 ‘놈’ 자를 붙이는 걸로 보아 오빠는 얼굴도 모르는 그 선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누군들 그의 눈에 찰까.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니, 그의 기준에 맞는 상대를 찾기는 모래밭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아니야. 내가 진짜 좋아하는 남자는 진짜 잘생겼는데, 좀 무뚝뚝하고 차가워서 다가가기가 힘들어. 나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칠 수 있는데, 그 남자는… 날 쳐다보지도 않아.”
내 얘기를 듣는 재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인 걸 눈치챘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화를 내는 걸로 봐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미쳤어? 간이고 쓸개고 다 갖다 바치게? 너 내 얘기를 어디로 들었어? 얌전히 공부하다가 집에서 정해 주는 남자랑 결혼하랬지.”
“결혼할 때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해 보고 싶어. 오빠도 연애하잖아. 왜 나만 못하게 해?”
“여자하고 남자는 달라.”
“뭐가 다른데.”
“너 같이 순진한 애는 남자들 먹잇감이나 되기 십상이라고. 남자 새끼들 원하는 게 너랑 손잡고, 영화 보고, 그런 건 줄 알아?”
“그런 게 아니면 뭔데? 키스? 같이 자는 거?”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갈색 눈동자가 진하게 물들어 내 얼굴을 찌를 듯 훑었다. 분명 그의 시선은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고, 내 눈과 코를 지나쳐 입술에 내려앉았다. 섹시한 입술이 달싹이자, 내 아랫배가 무지근하게 내려앉았다. 입이 바싹 말라,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적셨다. 나만 보이는 것처럼, 그의 세상에 나 하나만 있는 것처럼 온 신경이 내게 집중된 모습.
처음이었다. 그의 세상 안에 한 발 디딜 빌미를 제공받은 것 같은 짜릿함이 온몸으로 번져 간다.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이건 남매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전류였다. 손끝까지 아려 오는 짜릿함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는 손을 문에 짚고 날 내려다봤다. 빛이 가려진 그곳에 또 다른 빛이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것은, 나였다. 손끝 하나 대지 않았는데, 마치 온몸을 애무당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상한 기분. 말도 안 되는 기분이라서 열심히 부정해야 할 것만 같은.
“나도 키스… 하고 싶어. 좋아하는 사이면 같이 자고 그러는 거지.”
괜스레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턱이 들려 올라갔다. 억지로 시선이 맞춰진다.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너한테 손 못 대.”
“……!”
“키스? 섹스? 그게 니가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일 같지. 낭만은 개뿔. 사내새끼들한테 그딴 낭만 같은 건 없어.”
“오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남자들이 다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저질인 줄 알아? 어딘가엔 분명…!”
“순진해 빠진 네가 남자에 대해 뭘 알아. 그 새끼들 머릿속에는 온통…! 그만두자. 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그는 씹어뱉듯 결론을 내고서 나를 내쫓았다. 한시도 나와는 한방에 더 있기도 싫다는 듯이.
***
아침부터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바람에 흔들거리던 낙엽들이 비에 쓸려 우수수 떨어졌다. 굉장히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몸속까지 한기가 스며든다. 벌써 한 시간째 강의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관자놀이를 누른 채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요즘 내 머릿속엔 온통 민재현 생각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그가 저리 변한 이유가 뭔지, 그걸 알아내서 원래대로 돌려놓지 못하면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구천은 또 뭐람. 나도 이제 애늙은이가 되어 가나 봐.
혼자 자조하며 먹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을 봤다. 금요일 밤 재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남자 새끼들이 원하는 게 손잡고 영화 보고 그런 건 줄 알아, 하던 그의 눈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위험하게 번뜩거렸었다. 시시때때로 덮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강인한 맹수. 그 발에 차이면 아무리 버둥거려도 빠져나올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
그 눈빛 아래서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었다. 말도 안 되는 감정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짜릿함이 쉬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오빠가 나한테 그런 위험한 욕망을 품었을… 리가 없으니까. 우린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매사에 앞뒤가 분명한 민재현이 그런 감정을 어찌….
하아….
요즘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사납게 헝클어져 무슨 수를 써도 풀리지 않는 복잡한 기분. 친구들에게 요즘 오빠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했을 때, 그랬다. 오빠들은 원래 여동생한테 무관심한 거라고.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게 된다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솔직히 너네 오빠가 지나치게 다정했던 거지, 다른 집 오빠들은 여동생 괴롭히는 일에 더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네 오빠 같은 오빠를 가졌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숨이 넘어갔을 텐데, 넌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도 했다.
나는 큼큼 답답한 목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목이 살짝 부어 있다. 어제부터 감기 기운이 들었다. 요새 기운이 없어 잘 먹지도 못 했고, 잠도 편하게 못 잔 탓인가 싶었다.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재현이 날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한때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다정한 오누이였던 적도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담한 그 때문에.
그 생각을 하니 괜히 서러워졌다. 무뚝뚝하지만 불편하지 않게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아버지와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며 사랑해 주시는 어머니. 나는 넘치도록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 돌 무렵 고아원에 버려졌지만, 지금의 가족이 진정한 내 가족이라 생각할 만큼, 나의 진짜 부모님은 누구일까 궁금해하지 않을 만큼, 나는 지금이 좋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족이 있어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리고 가족들 중 누구보다 재현을 믿고 따랐다. 내가 어떤 위험에 처해도 곧장 달려와 구해 줄 것같이 든든한 사람. 내 외로움과 슬픔을 나누고 위로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을 잃었다는 절망감이 무겁게 날 짓눌렀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김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들과 약속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전했다. 그러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걸어서 족히 두 시간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세찬 비는 아니었지만, 조금 걷다 보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 가을이라 기온도 꽤 떨어졌다. 이 비를 맞고 나면 감기가 찾아오겠지.
작정한 거였다. 아프면, 죽을 만큼 아프면 오빠가 돌아봐 줄 것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상처를 입거나 감기에 들면 늘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던 사람이니까. 아픈 여동생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다.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몸은 추워 달달 떨면서도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지만, 집에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다. 물을 뚝뚝 흘리며 현관에 들어섰을 때, 마침 2층에서 재현이 내려왔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민재이,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환영을 본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빠… 일찍 왔….”
말을 하다 말고 풀썩 쓰러지는 나를 재현이 붙들었다.
“몸이 불덩이인데, 너 미쳤어? 이 비를 맞고 도대체…!”
이까지 부딪쳐 가며 덜덜 떠는 나를 일으킨 재현은 가방과 카디건, 신발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서둘러 1층에 있는 욕실로 갔다. 나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끙끙 앓는 소리를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재현이 영국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내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 또렷이 기억했다. 그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내가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으려 하자 허리를 잡고 끌어안았다. 덕분에 그의 옷도 축축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야, 너. 이 비를 맞고 어디서부터 걸어온 거야?”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이리도 멍청한 짓을 한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학교가 어디라고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와. 옷 벗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자고 싶어.”
나지막한 욕설이 들린 것도 같다.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엄마는….”
오빠가 날 씻겨 주는 상황을 원했던 것은 아니기에 나는 마지막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며 물었다.
“두 분 다 오늘 행사에 참석하시느라 늦으실 거야. 이대로 잘 수는 없으니까, 내가 벗기는 수밖에 없겠어.”
손을 놓으면 곧바로 쓰러질 나를 붙들고 재현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그의 따뜻한 체온, 옷을 벗기는 부드러운 손길, 야릇한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브래지어를 벗길 때는 그의 손이 조금 떨린 것 같기도 했다. 입에서는 여느 때보다 거칠고 깊은숨이 흘러나왔고.
눈만 감으면 의식을 잃을 것 같은 상태로 나는 팔로 가슴을 가렸다. 날씬한 몸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큰 가슴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지였다.
“빌어먹을… 민재이, 너 진짜….”
재현이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바지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린 뒤 척척해서 잘 내려가지 않는 옷을 힘겹게 벗겨 내렸다.
“다리를 바지에서 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마저도 잘 되지 않아서 결국 그가 빼주었다. 이제 남은 건 팬티 하나였다. 재현은 차마 그건 벗기지 못하겠는지 내 허리를 붙잡고 샤워 부스 안으로 데리고 간 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재현의 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부끄러움이고 뭐고 빨리 씻고 나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를 안은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금만 참아.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린애 같은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흐린 눈으로 재현을 올려다보니 여전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샴푸를 손에 묻혀 내 머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이상했다. 재현이 발가벗은 날 씻겨 주는 이 순간이 싫지 않은 게.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날 내팽개쳐 두지 않고 이리 신경 써 주는 게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오빠는 뭔가를 참으려는 듯 이를 악문 채 빠르게 내 머리를 감기고, 몸에 물을 뿌려 거품을 씻어 낸 뒤 씻기는 것을 끝냈다.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서둘렀다.
커다란 목욕 타월로 내 머리를 닦고, 아직 그대로 입고 있는 팬티도 대충 물기를 닦은 뒤 몸에 타월을 둘러주었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
오빠는 날 변기 뚜껑 위에 잠시 앉혀 둔 뒤, 자기 옷을 벗었다. 그의 옷도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근육으로 탄탄한 상체가 드러나자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했다.
욕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이유가 열 때문인지, 이상한 분위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하반신에만 타월을 두른 채 드라이어로 내 머리를 말려 주었다. 자꾸만 의식이 없어져 고개를 떨어뜨리는 나를 데리고 머리를 말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현이 날 침대에 눕히고, 잠옷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몸을 흔드는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드니 재현의 얼굴이 보였다.
“약 사 왔어. 일단 해열제부터 먹고, 내일 아침에 병원에 가자.”
“못… 삼키겠어. 목이… 아파.”
말을 할 때마다 골이 울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가루로 달라고 했으니까 삼킬 수 있어.”
내가 예전부터 목이 부으면 알약을 잘 못 삼킨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만 든 채 약과 물을 삼켰다.
“푹 자.”
돌아서 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은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오빠… 내 옆에 같이 있어 줘. 나… 너무 추워.”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음에도 떨리는 몸이 주체가 안 됐다. 체온이 필요했다. 아플 때면 내 옆에서 지켜 주던 재현의 체온이 간절히 그리웠다. 이까지 달달 떠는 나를 내려다보며 한참 망설이던 재현은 마지못해 내 옆으로 와 누웠다. 나는 그의 따뜻하고 든든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이불로도 진정이 되지 않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안락함이 전신으로 퍼져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난 꿈을 꾸었다. 정말이지 아침에 일어나 다시 떠올리기에도 너무나 민망한 꿈을.
꿈속의 재현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내 이마를 짚어 주고,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쓸어 주며 키스를 했다. 살며시 닿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기운. 열이 오른 나는 그의 입술을 생명수라도 되는 것처럼 빨고, 그의 타액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등을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바닥의 감촉에 연신 야릇한 신음을 뱉기도 했다. 엉덩이를 꽉 쥐었다 펴주는 것도, 허벅지며 종아리를 만져 주는 것도 좋았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뭉쳤던 근육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아서. 꿈인데도 손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무거운 그의 숨소리도, 보통 때보다 빠른 심장 박동도 들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재현은 내 옆에 없었다. 재현은 내가 병원에 다녀온 것을 확인한 뒤론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었다.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비 오는 날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가 눈을 피했다는 점이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에게 난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나도 솔직히 벌거벗은 몸을 내보인 처지에 떳떳하진 못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쪽은 오히려 나인데도, 재현은 그런 날 다독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부모님은 오랜만에 단둘이 여행을 가셨다. 10월로 예정되어 있었던 여행은 하루 이틀 미뤄지더니, 한겨울이 되어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소녀처럼 수줍게 들떠 있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나는 잠시 골목길에 서 있었다.
12월에 접어들었지만, 날씨는 포근했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 둔 휴대폰이 울렸다. 사귀자고 했던 선배였다. 얼마 전 과 모임에서 같이 술을 마시다 고백을 받았다. 평소에도 자주 내 앞자리나 뒷자리에 앉고, 음료수를 주거나, 커피를 사 주거나 하면서 내게 관심을 보여, 고백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선배도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늘 근처에 후배며 동기며 여학생들이 북적거렸다.
딱히 그가 마음에 들었거나,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곁에 맴도는 남자들 중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여서 한두 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요즘 내 관심이 지나치게 민재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해 가면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뭐지? 무관심. 배척. 시리게 차가운 눈빛. 무슨 수를 써도 받지 못할 애정이라면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나으려나.
“선배. 난 아무래도 안 될….”
선배는 보기보다 적극적이었다. 거절의 기미를 보이자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다. 토요일이었고, 약속이 없었다. 재현은 오늘 토요일인데도 회사에 들렀다가 친구를 만난다고 했다.
집에 혼자 있기는 싫다. 황량한 골목길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원래 사람 심리가 마음에 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면, 반항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처음으로 오빠에게 반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귀지 말라면 사귀고, 만나지 말라면 만나고, 키스하지 말라면 키스하기로.
말 잘 듣는 아이로만 사는 게 결코 좋은 결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으니, 이제라도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스물세 살이나 먹고도 남자랑 손 한번 못 잡아 본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내년이면 사회 초년생인데. 친구들도 ‘네가 무슨 천연기념물이냐’며 놀렸다.
대시해 오는 그 많은 남자들을 다 차버리고 혼자 살 거냐고 걱정을 했다. 무엇보다 이 좋은 계절에 연애를 해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가슴 아프게. 이 선배랑 그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선배와 만나기로 하고, 화장을 했다. 미니스커트 길이의 은행잎 색을 닮은 블라우스 셔츠에 까만 쇼트 팬츠를 입고,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쳤다.
재현은 짧은 바지, 미니스커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옷, 이런 건 질색해서 못 입게 했지만, 이제 상관없다. 앞으로는 아주 제대로 심기를 거스를 작정이니까.
약속 시간에 맞춰 선배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사해 보이는 바이크를 타고 왔다. 라이더 재킷을 입고. 생긴 건 곱상해서 취미는 또 이쪽인 모양이다.
“예쁘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헬멧을 쓰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선배가 자연스레 내 손을 제 허리에 두른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바이크가 출발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찔한 속도감에 심장이 벌렁거리며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게 하는 효과는 탁월하다.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다. 남자들이 이래서 바이크를 타나 보다.
선배와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카페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길거리도 구경했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는 늘 오빠에 대한 생각이 눌어붙어 있었다. 선배와 재현을 자꾸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선배가 정말 시시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키도 상당히 크고, 잘생긴 편인데도 재현에 비하면 어린애 같기만 하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의 기준은 늘 재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세상에 오빠보다 잘난 남자는 보지 못했다. 눈만 높아져서는 과연 남자 친구를 사귈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재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디야.
선배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제대로 반항해 볼 요량이었으니까.
-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어딘지 말해.
확연하게 굳은 목소리가 은근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오빤 상관하지 마. 좀 늦을지도 몰라.”
그러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계속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집에는 일부러 늦게 갔다. 10시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2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바이크에서 내려 헬멧을 벗는데, 담벼락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 재현이 쓱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다.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복잡한 표정 안에 뭐가 들었는지 따져 볼 새도 없이 재현은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내 뒤에 선 선배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뜩였다.
“오빠.”
“어, 오빠야? 안녕하세요!”
재현은 선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우리 재이가 얘기 안 했나? 재이 결혼할 사람 있는데.”
“……예?”
선배도 나도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집안끼리 결혼을 약조한 사람이 있다고.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녀도 되는 애 아니라고. 또다시 재이한테 연락하거나 추근거리면 두 번 다시 바이크 같은 건 못 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낮게 뇌까리듯 하는 말투가 사람을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빡 돌면 그 손에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과 커다란 키 때문에 더 그랬다. 후광처럼 버티고 선 자신감은 감히 맞서 볼 생각도 지워 버린다.
“오빠 지금 무슨 말을…!”
“넌 조용히 해.”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결혼할 사람 같은 거…!”
재현의 심상치 않은 눈을 본 나는 뒷말을 흐린 채, 선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게 완전히 속았다는 듯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렇게 반항을 해보려던 나의 원대한 계획은 맥없이 무너졌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는 재현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따져 물었다.
“오빠가 뭔데 내 연애까지 간섭해? 내가 누구랑 사귀든 오빠가 간섭할 이유 없잖아. 왜 나는 연애하면 안 되는 건데? 오빠는 연애 할 거 다 하면서 왜 나는 못 하게 해?”
억울하고 분했다. 계획을 제대로 실행해 보기도 전에 방해를 받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계단참에서 재현의 팔을 붙잡았다.
“저 선배 아니어도 남자는 많아. 오빠가 아무리 못하게 해도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른 남자…!”
오빠가 내 팔을 잡고 벽으로 붙여 세웠다. 옆에 걸린 액자가 흔들거린다. 화를 참고 있는 재현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씰룩였다. 눈에선 레이저가 쏟아져 나와 내 눈을 뚫어 버릴 듯 강렬했고.
도대체 그의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손만 대도 모조리 얼려 버릴 것처럼 차가웠다가도, 지금 그의 눈은 눈길에 닿는 것은 전부 태워 버릴 듯 뜨거우니까. 예전에 알던 민재현이 아니라서 더 혼란스러웠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그가 야속하고, 미웠다.
“남자들이 널 보면서 무슨 생각하는지 보여줘?”
“……뭐?”
“저런 새끼들이 너한테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보여준다고.”
“나도 안다고 했잖아.”
“알긴 개뿔. 넌 아무것도 몰라. 남자가 뭔지. 그 새끼들이 품은 좆같은 환상이 어떤 건지.”
쏟아져 나오는 건 다정한 말 대신 험한 욕설이었다. 평소의 재현은 쓰지 않는 저속한 단어들. 그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셔츠블라우스 위로 내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젖가슴이 우악스러운 재현의 손에 쥐어지자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찌르르 울었다.
울컥 내뱉는 내 숨을 그가 제 입술로 빨아들였다. 입술과 혀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비벼지고, 뭉개졌다. 그의 키스는 내게 상상 초월, 충격의 도가니였다. 단순히 입술을 맞댄 교감이 아닌, 동물처럼 물고 빨고 얽혀 질척한 타액이 이리저리 섞이는 교접의 난무였다.
프렌치 키스가 이런 거라는 건 이론으로만 알았을 뿐, 이렇게 저속하고 야릇한 느낌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빠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키며 내 입 속으로 들어와 헤집는 동안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리고, 브래지어 밑으로 들어온 손이 맨가슴을 아까처럼 움켜쥐었다. 젖꼭지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비틀렸다. 서늘한 쾌감이 혈관까지 확장시켜 터질 것 같았다. 짜릿한 전율은 정수리까지 차오르고, 내 입에서는 축축한 신음이 새어 나갔다.
도통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거칠고 억센 키스에 빨린 입술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밀어내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다리로 내 몸을 버티고 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키스… 이 열기…. 낯설지 않아. 천둥 번개가 치던 날 밤,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키스….
설마….
“민재이, 뭐해. 오빠 미쳤냐고, 왜 이러냐고 소리 질러. 내 뺨이라도 때려서 날 밀어내.”
재현의 거친 숨소리가 내 얼굴 위로 흩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거리에 붙을 듯 말 듯 여전히 가까운 그의 입술. 그가 말한 것처럼 반응해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더 알고 싶었다. 키스보다 더한 것. 키스 다음에 이어지는 것.
오빠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 안에 잡힌 가슴에 더 자극적인 쾌감이 퍼부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다리 사이도 축축해졌다. 뭔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간지럽고 미끌거렸다.
“…오빠….”
그의 눈이 내 시선을 옭아맸다. 생전 처음 맛보는 희열로 인해 내 머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밀어내라고 하면서도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 제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눈동자.
가슴이 툭 떨어져 내리는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내가 싫었던 게 아니라… 내가 귀찮았던 게 아니라….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사내새끼들은 너도 이걸 원한다고 생각해. 제멋대로 오해한다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인해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가슴이 더 뭉그러지고, 더 비벼졌으면 싶었다. 재현의 손 안에서 나는 동생이 아닌 여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싫지 않았다.
하아… 나 제정신이 아닌 걸까.
재현이 고갤 숙여 핑크빛 유두와 유륜까지 한꺼번에 입 속으로 욱여넣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내 허리를 붙잡아 지탱하며 오빠는 젖꼭지를 소리 내 쪽쪽 빨고, 혀로 유륜과 봉긋 솟아오른 정점을 빙글빙글 굴렸다. 천상의 쾌감… 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혀가 이런 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떤 오빠도 제 여동생에게 남자들의 욕정을 알려 주기 위해 직접 시범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그때부터 달라진 그의 눈빛, 시선, 태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재현의 어깨를 붙잡고 매달렸다. 등이 휘며 가슴이 더욱 쉽게 그의 입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입을 한껏 벌려 있는 양껏 가슴을 흡입한 재현은 아이처럼 젖을 빨았다. 마치 모유가 나오는 것처럼 그의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젖꼭지를 빨리는데, 왜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건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리를 붙여 몸을 꼬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오빠… 하아…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 마. 난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재현의 입술이 이번엔 반대쪽 가슴을 입에 물었다.
“기분이… 이상해.”
그가 혀로 유두를 튕길 때마다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엉덩이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그의 단단한 몸에 밀착되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딱딱하게 굳은 이건… 뭐지.
그녀가 배로 딱딱하게 일어선 기둥을 비벼대자, 재현이 깊게 신음하며 내 허리를 잡고 밀어냈다. 덩달아 가슴도 그의 입에서 쑥 빠져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축축해진 유륜 주위로 들러붙었다. 거칠어진 두 개의 호흡만이 서로를 붙든 채 떨어질 줄 몰랐다.
“민재이. 너 다른 남자가 이렇게 엉망으로 널 흔들어도 똑같이 반응할 거야?”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실망한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내 의식을 깨웠다.
“너 이렇게 음란한 애였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마음에도 없는 놈이 키스하고, 만지고 그러면 뺨이라도 때려서 쫓아야지, 왜 가만히 있어?”
“그거야….”
오빠니까. 오빠가 좋으니까.
“너 설마…!”
뒤이어 재현의 눈에는 짙은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뭐?”
“몸뚱이 함부로 굴리고 다닌 거야? 그랬으면서 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 재현의 뺨을 후려쳤다. 생각에 앞서 몸이 제멋대로 한 행동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그렇게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여동생을 물고 빤 사람은 저였으면서 누굴 의심하는 건지,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내 젖가슴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을 만큼 눈이 벌게졌다. 민재현은 이상해졌다. 변했고, 머저리가 되었다. 저런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였다. 나는 블라우스를 가운데로 여미며 몸을 돌렸다.
눈물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흘러내렸다. 나는 1층 내 방으로 내려가 문을 잠그고 펑펑 울었다. 재현이 문밖에서 그 소리를 다 듣고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민재현은 더 이상 예전의 오빠가 아닌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