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어서 오세요.”
들어오는 손님을 맞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메리카노요. 따듯한 걸로 주세요.”
“아, 저는 따듯한 라테요.”
오늘따라 손님이 적은 카페는 이제 막 두 테이블이 채워지고 있었다. 이제 오후가 지나가는 시간인데도 이 정도였다. 아마 옆 건물에 새로 생긴 카페 때문인지도 몰랐다. SNS에 홍보도 많이 하는 그 핫하다는 카페 때문에 요새 사장도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쿨하게 털어 내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커피 맛으로 승부하면 되지!’ 하고 주먹을 쥐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쳐지며 덩달아 힘이 솟았다.
그리고.
해율이 문득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지난밤, 해율은 우경에게 신호를 보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택한 것은 상당히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그가 무시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둘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는 것이라 이해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해율을 찾아왔다.
평소의 여유로운 그답지 않게 숨을 헐떡이던 그는, 멀끔하게 차려입었으리라 보이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넥타이는 온데간데없었고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올곧은 시선만은 똑발랐다. 오로지 해율을 향해 있었다.
반년 만의 만남이었다. 얼굴을 제대로 본 데에는 그만큼의 간극이 존재했다. 못 보던 사이에 우경의 얼굴선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해율로부터 두어 발자국 떨어져서 그녀를 살폈다. 막상 거절이 두려운 듯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손을, 해율이 먼저 내밀었다.
체온이 맞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경이 조심스레 해율의 어깨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기더니 그의 품에 안았다.
우경의 입에서 짙은 탄성이 터졌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사람처럼 해율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는 작게 헐떡였다.
해율 또한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우경이 그에 작게 움칠하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해율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게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해율아.’
‘……응.’
‘해율아.’
그는 연신 해율의 이름을 되뇌었다. 해율도 끊임없이 대답해 주었다.
둘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은 그때부터였다.
‘보고 싶었어.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의 말에 해율은 울 것 같았다. 자기도 그랬노라고, 애써 외면해 왔지만, 애써 덤덤한 척해 봤지만 그래도 자신 또한 너를 놓지 못했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꾹 삼켰다.
그 밤,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있던 둘은 서로의 체온이 엇비슷해질 때쯤 겨우 떨어졌다. 그를 올려다보며 해율이 작게 웃자 우경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해율을 바라봤다.
‘너랑 함께해 보고 싶어. 곁에 있고 싶어. 곁에서 너를 알아 가고 싶어.’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라도 괜찮으니까.
‘그러자. 그럴게.’
앞으로 남아 있는 많은 시간 동안 그렇게 하자, 우리.
우경 또한 그렇게 대답했다.
가을바람이 사이를 파고들 틈도 없이 둘은 또다시 꽉 마주 안았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금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얼굴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후, 하고 뜨거운 숨을 터뜨리며 손등으로 볼을 쓸었다.
“저 왔어요!”
“아.”
카페 문이 열리며 정우가 우렁찬 인사와 함께 들어왔다.
“오늘도 일찍 왔네.”
“앗, 네. 시간이 좀 붕 떠서요.”
정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히히, 하고 웃는 모습이 어릴 적 보던 만화 캐릭터 같게도 보여서 설핏 미소 지었다.
“오. 누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어?”
그러자 돌연 해율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해율이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 아니 그냥요. 뭔가 그래 보여서요. 아니면 말고요. 하하.”
정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해율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와, 근데 오늘 손님 진짜 없네요. 손님 다 뺏긴 거 아니겠죠?”
“글쎄.”
“단골손님들까지 뺏긴 거면 어떡하죠? 으아. 나 여기 잘리면 안 되는데.”
“너무 섣부른 걱정이야.”
해율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자 정우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때였다.
띠링.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해율이 막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하려던 순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
“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누나, 제가 말했던 그 남자 단골손님 있죠. 그분이에요.”
정우가 해율의 뒤에 바짝 붙어서 들리지 않게 소곤댔다. 하지만 해율의 눈은 이제 막 카페에 들어온 남자에게 못 박혔다. 우경이었다. 그는 미미한 호선을 입가에 걸친 채로 해율을 보며 그녀가 서 있는 계산대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
“어서 오세요!”
정우가 해율의 뒤에 붙어선 채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우경은 그제야 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우경의 입가에 걸쳐 있던 미소가 사그라들며 정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차게 가라앉는 듯했지만, 해율이 어색하게 입을 열자 우경은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해율을 바라봤다.
“주문, 하시겠어요?”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이 카페에 자주 찾아온다던, 정우가 말했던 손님이 우경이었던 것이다. 얇은 니트와 면바지를 걸친 우경은 어느 누구의 눈길도 확 빼앗을 만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카페에 있는 손님들이 흘긋거리며 우경을 쳐다봤다.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님을 대하는 해율의 태도는 조금 삐걱거렸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따듯한 걸로 드릴까요?”
“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우경이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POS기에 주문을 입력한 해율이 우경을 다시 쳐다보자 우경이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테이크아웃으로 해 주세요.”
카드를 꽂아 넣자 우경이 계산대에 놓인 패드에 사인을 했다. 뒤에서 정우가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사인을 지켜보다가,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화면에 글씨가 쓰여 갔다.
사인이 완성되어 갈수록 해율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커피 나왔습니다.”
결제를 하고 곧바로 테이크아웃 잔이 내밀어지자 우경이 “감사합니다.” 하고서는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해율은 아직까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뒤에서 정우가 요란스레 떠들기 시작했다.
“오, 봤어요? 봤어요? 독일어 맞죠? 아씨,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진짜 모르겠더라고요. 누나는 알죠?”
“……정우야.”
“네?”
“나 오늘은 일찍 나가 봐도 될까? 급한 일이 생겨서.”
“아, 네네. 당연히 되죠. 그리고 어차피 십 분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가 보세요.”
“응. 고마워.”
해율은 정신없이 앞치마를 벗고는 사물함에서 제 소지품을 챙긴 후 카페 문을 활짝 열었다. 우경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으려나.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다. 그리고 해율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우경이 차에 기댄 채로, 해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Ich liebe dich〉
그가, 우경이 사인한 문구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홀로 외치던 그의 말이었다.
해율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품에 뛰어 안겨 들었다. 우경이 해율의 무게를 오롯이 떠받들었다. 그와 동시에 해율이 고개를 치켜들고는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술을 대었다가 떨어트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경이 놀란 눈을 하고 해율을 바라봤다.
해율이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속삭였다.
“나도.”
잔뜩 굳어 있던 우경이 다시금 해율을 꽉 안았다. 탄식과도 같은 말과 함께.
“응, ……나도.”
문득 해율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간지러운 그녀의 웃음소리가 우경의 가슴팍에 흩어졌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사랑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우경이 해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미끄러지듯 손가락 사이로 찰랑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서늘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따듯했다. 빠져나가지 않도록 아래를 받치듯 살며시 손안에 쥐었다.
흩어지는 일 없이 손안에 가득 들어왔다.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손에 잡힌 감정이 띠는 온도가 얼마나 따듯한지, 이제야 겨우.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계절들이 벌써 기다려졌다.
〈배움의 미학〉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