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음, 저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아, 그리고 치즈 케이크도 하나 주세요.”
“네, 주문 확인해 드릴게요.”
POS기를 두들기며 커피 주문을 받은 해율이 손님을 향해 싱긋 웃었다. 서비스 직군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가는 의례적인 미소였다. 눈앞의 어린 학생 손님은 그런 해율을 보며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고는 자리를 찾아갔다.
“해율, 입꼬리 떨린다, 너.”
뒤에서 들리는 타박에 해율이 고개를 휙 돌렸다. 짓궂게 눈을 접은 사람은 해율이 일하는 카페의 사장이었다.
젊은 나이에 창업을 한 이 여사장은 당차고 활발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딱딱하기만 하던 해율의 면접을 웃음으로 끝마치게 했으며, 일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마치 2년은 넘게 알고 지낸 사이처럼 해율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렇듯 아직은 어색한 업무용 미소밖에 짓지 못하는 해율을 향해 가끔 대놓고 잔소리를 하고는 했다.
그것도 사장의 짜증이라기보다, 아는 언니의 장난기 어린 농담에 더 가까웠기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약간 마음이 따스해지기만 했다.
“어이구, 이제야 예쁘게 웃네.”
“네? 아…….”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나 보다. 해율이 멋쩍게 머리카락을 꼬아 대자, 사장이 해율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 그냥 손님한테는 원래대로 로봇처럼 대해도 돼.”
무슨 뜻인지 몰라 왜냐고 묻자 사장이 깔깔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남자 손님이 바글바글할 거 아냐. 어휴, 지금도 장사가 너무 잘돼서 바빠 죽겠는데. 여기서 더 잘되면 나, 감당 못 해.”
“아하하.”
해율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익살스러운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딸랑.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커플 손님이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손님이 계속 들이닥쳤다. 해율은 급히 웃음을 삼켰다.
“주문 내가 받을게. 해율이 넌 98번 주문 좀 만들어 줘.”
“네.”
사장의 말에 해율이 에스프레소 추출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향긋한 커피 내음이 퍼졌다. 연이어 받은 주문에 해율은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카페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였지만, 요새 한창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뜨는 상권에 위치해 있어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었다.
해율은 방학과 동시에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손님이 많아 일이 바쁘기는 해도 사장도 좋고 카페 특유의 따듯하고 아늑한 분위기도 포함하여 만족하고 있었다.
그 일로부터 벌써 반년이 지났다.
기만의 계절을 지나, 폭렬하는 더위를 견디고 나니 어느새 발밑에서 바닥에 흩뿌려진 낙엽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해율은 우경을 잊으려 노력했다. 두 달이 지나던 날 어떻게든 돈을 그러모아 진형에게 과외비를 돌려주었다. 우경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형의 이름으로 변제된 불법 사채 금액은 액수가 꽤 되었다.
하지만 그런 해율을 붙들고 늘어진 것은 진형이었다.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해율을 속인 것에 대해 사죄를 했다. 우경과는 집안끼리 옛날 옛적부터 얽혀 있었다고 하며, 어릴 때부터 형성된 알력 관계로 인해 진형은 우경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그러나 관심 없었다. 진형은 우경의 요구에 의해 자신이 이름을 대신 빌려준 상황이라고 해율을 향해 읍소했다. 해율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사채 금액은 천천히라도 꼭 갚아 나가겠다고 하자, 진형이 한 말은 이것이었다.
‘해율아, 네가 빌렸던 원금이 천만 원이야.’
그 금액은 이모의 병원비였다. 미성년자인 해율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사채업자뿐이었다.
진형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 말만은 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런데 사채업자들이 이자를 불리고 불려서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된 것뿐이야. 그놈들과의 변제는 이미 깨끗하게 정리됐어. 그러니…… 정 돌려주고 싶으면 원금만 줘. 네가 말한 대로 천천히.’
‘그럴 수는 없어요. 불법이든 뭐든 이자까지 포함한 제 빚을 선배가……. 아니, 현우경이 대신 감당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해율아…….’
완고한 태도의 해율을 향해 진형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생각을 꺾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마디가 해율의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우경이가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라.’
‘…….’
‘불어난 이자는 네 잃어버린 시간과 맞바꾼 것이라고.’
한창 청춘을 즐길 나이인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지난했던 시절, 미친 듯이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은 얼마나 허덕였던가. 남들이 여행이다 뭐다 신나서 떠들어 댈 때, 해율은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 좁은 방 안에 누워 간신히 눈을 붙여야 했다. 내일이 오는 것이 싫었다.
진형의 말에 해율이 눈을 크게 뜨자 진형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자기가 너를 기만했을지언정 그 되돌릴 수 없는 시간만큼은 자기가 보상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더라.’
그것만큼은 하게 해 달라고.
진형이 이제껏 자신을 후배로서 아끼고 배려해 주었던 마음까지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빚이 없었다면 좀 더 많이 웃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고 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일 이후로 학기 중에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다달이 빠져나가는 막대한 금액의 이자가 없으니 학교생활과 병행하는 데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
이번 학기는 휴학을 결심했다. 그동안 지금 일하고 있는 카페를 포함해서 짬짬이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해율의 꼼꼼한 번역에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점점 많은 분량의 일을 주고는 했다. 번역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은 해율을 믿고 맡겨 주는 이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박힌 번역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꿈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가 문득,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살짝 벌어져 있는 마음의 틈새를 비집어 벌리는 순간이 있었다. 현우경, 바로 그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다가 문득문득 그와의 기억이 돌연 머릿속을 메웠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노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사람의 마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내비쳤던 것처럼, 금세 그 흥미는 사그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어떤 신호를 주었을 때 그가 이미 마음을 접었다고 해도, 자신은 그것을 계기로 이 마음에 종지부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는 일주일에 네 번,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했다. 저녁 타임은 오후 시간 아르바이트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오후 시간의 아르바이트생은 해율보다 두 살 어린 남자애였다. 군대를 남들보다 일찍 전역하고 나왔다던 그는 바리스타가 꿈이라고 했다. 이름은 정우였다. 그와는 오전과 오후 타임이 겹치는 짧은 시간에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구김살 없이 해맑은 성격이라 해율에게도 친근하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동생은 없지만 마치 남동생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저 웃으며 그의 얘기를 들어 주는 정도였지만.
딸랑.
“안녕하십니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오후 타임의 아르바이트인 정우가 우렁찬 인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해율이 컵을 닦다가 그쪽을 돌아보며 웃음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왔어?”
“넵. 저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요.”
3시보다 항상 이른 시간에 도착하는 정우에게 왜 이렇게 일찍 오냐고 물었더니, 그가 커피 냄새를 빨리 맡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십 분가량의 짧은 대화가 가능했다.
“오, 오늘은 손님 별로 없네요? 사장님은요?”
“남자 친구 만나러 가신다고 하더라.”
“헐, 그 저번에 카페에 왔던 스리피스 슈트에 올백 머리 아저씨요? 와, 사장님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굴 너무 밝히시는 거 아니에요?”
앞치마를 동여매고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에 해율이 큭큭 웃었다.
“아니, 뭐 하긴, 그렇게 얼굴을 밝히니까 아르바이트도 우리 같은 애들을 뽑았겠죠. 안 그래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원두 리필해 줘.”
“여전히 칼 같으시다. 넵.”
다르르륵. 원두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별로 없어 한가한 덕분에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아,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 그 손님만 안 오면 되는데. 그 손님 오면 다른 손님도 엄청 많이 온단 말이에요.”
“그 손님?”
“앗, 네. 누나한테 말씀 안 드렸었나? 오후 타임에 되게 자주 오시는 손님이 있거든요. 키 엄청 크고 와, 몸은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처음 봤어요. 얼굴도 거의 연예인급인데 귀티가 잘잘.”
앞치마에 손을 탁탁 털은 정우가 말을 이었다.
“항상 혼자 와서 저기 구석 자리에서 책 읽다가 가거든요. 그런데 그 손님 올 때마다 다른 손님들이 자리를 안 떠요. 특히 여자 손님들. 커피도 계속 리필 주문하면서 그 남자 손님 엄청 훔쳐보고 그래요. 나만 알고 싶은 눈 호강 맛집이라나? 되게 웃기죠. 하긴 남자인 나조차도 입이 떡 벌어지던데요, 뭘.”
“그래?”
그런 손님이 있었단 말이야? 해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 오늘은 그 손님 안 왔으면 좋겠다. 좀 한가하게 보내고 싶어요.”
“그럼 나도 안 오길 빌어 줄게.”
항상 저녁 시간에 온다니. 해율은 언제나 오전 타임만 맡았었기에 모를 만도 했다.
“누나는 진짜 남자에 관심 없나 보네요. 보통 그러면 자기도 보고 싶다고 막 그러던데.”
정우의 말에 해율이 멋쩍게 웃어넘기자 그가 아, 하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 독일어 잘하시죠?”
“음? 잘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읽고 이해하는 정도 수준 정도야.”
“에이, 또 겸손은. 그 손님 보니까 누나 생각 나더라고요.”
“왜?”
“진짜 특이한 게, 커피 주문할 때 카드 결제 사인 받잖아요. 그때마다 하는 사인이 되게 독특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보니까 독일어더라고요. 뜻은 모르겠지만요.”
“…….”
독일어?
해율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설마.
“혹시, 그 남자가…….”
아니, 아니다. 괜한 억측이다. 외양이 조금 비슷하고 독일어를 쓴다고 해서 전부 현우경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지나친 생각이었다.
“향수도 겁나 고급스럽던데. 다음에 오면 무슨 향수 쓰냐고 물어보려고요. 막 동성이 물어본다고 식겁하지는 않겠죠?”
“……무슨, 향이었는데?”
“아, 머스크 향이요. 되게 묵직한데 또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더라고요.”
“…….”
해율이 숨을 멈췄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몸에 밴 듯 그런 향에 감싸인 남자를, 자신은 알고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어? 아, 응.”
“시간 됐다. 얼른 가 보세요. 이제 여기 제가 맡을 테니까.”
“응, 부탁해.”
해율이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정우에게 인사를 건네며 카페를 나섰다. 발걸음을 빨리했다. 정말로 우경인 걸까. 우경이 어째서.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와 엮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걸음을 우뚝 멈췄다.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울릴 정도로 커다랬다.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선연했다. 박동 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해율이 입술을 잘근 물었다.
‘미쳤어…….’
앓는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손으로 짚은 이마가 뜨끈했다.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하는 의혹과 함께 드러난 것은, 기대였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가만히 그렇게 서 있던 해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을바람이 해율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에 맞추어 가슴이 둔탁하게 뛰었다.
* * *
“으음.”
휴대폰의 알람 소리와 함께 일어난 해율은 어깨를 두들기며 이불을 정리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이를 닦았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8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다. 애초에 사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둔 터였다. 오늘은 이모의 기일이었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부모님의 장례는 이모가 대신 치러 주어 해율의 기억 속에 그들의 기억은 많지 않았다. 다만, 어렸던 해율의 손을 꽉 그러잡아 주던 이모의 포근하고 따듯한 체온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는 길이 썩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성년자였던 해율에게 이모의 유골을 모실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외가 쪽 고향에 정부에서 관리하는 묫자리를 하나 받을 수 있어서 그곳에 이모를 모시게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해율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광역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했기에 단출하게 짐을 챙겼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해율은 언제나처럼 매년 들르는 꽃집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꽃집 주인이 해율을 맞이했다.
“안개꽃 주세요.”
“안개꽃만 드릴까요?”
“네.”
“어머.”
오늘 안개꽃이 잘 나가네. 꽃집 주인은 고개를 잠시 갸웃하더니 알겠다며 웃고는 정성스레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안개꽃은 이모와 해율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안개꽃은 언뜻 수수해 보이지만 은은한 매력만큼은 일품이라고 이모는 얘기했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갖가지의 꽃 사이에서 안개꽃은 그 작은 꽃망울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해율은 몽글몽글한 안개꽃을 품에 가득 안았다. 꽃집을 나서서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이번엔 조금 더 거친 도로를 지나갔다.
안개꽃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히 잡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팻말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숨이 턱에 조금 차오를 때쯤 매년 보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후.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랐다. 하지만 그때, 해율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
단발의 음성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묘석 앞까지 다다른 해율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안개꽃이었다. 커다랗게 만개한 안개꽃이 묘석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꽃다발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수수하게 빛나는 하얀 꽃다발에는 청량한 머스크 향이 배어 있었다.
* * *
‘기해율!’
멀리서부터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복 재킷은 어디에 뒀는지 셔츠 소맷단을 걷어 올린 불량한 차림의 남자애가 손을 크게 흔들며 다시금 이름을 부르곤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기만 해도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머릿결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가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남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달막한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오른 듯 보였다. 무표정이었지만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자꾸만 시선으로 좇다 보니 알게 된 것이리라.
‘우경아, 표정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어?’
‘응?’
옆에서 말을 거는 통에 그녀의 모습을 놓쳤다.
‘아니.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입가에 만들어진 미소를 걸친 채 턱을 쓸자, 자신의 옆에 거추장스럽게 붙어 다니는 무리 중 한 남자애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 그냥. 약간 얼굴이 굳었길래.’
‘그래? 흠. 아까 족구에서 져서 그런가.’
의미 없는 말에 남자애가 시끄럽게 떠들었다.
‘어어! 그니까 말야. 에이씨, 완전 아까웠어.’
맞장구치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다시금 시선을 멀리 내던졌다. 소녀가 아까 그 남자애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신경을 끌던 존재감이 뒤로 멀어졌다.
기해율.
요새 우경의 모든 시선을 앗아 가는 소녀의 이름.
그 아이를 처음 본 것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옥상에서였다. 얌전해 보이는 유순한 인상과 달리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꾸가 유쾌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작은 입술만 조곤조곤 움직이는 것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졌다. 극히 짧은 대화였다. 머릿속에 깊이 박힌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우경은 왜인지 스스로 납득 가지 못할 정도로 멀리서도 소녀의 모습을 쉽게 알아챘다. 언제나 조용히 홀로 다니는 소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울함을 눈치챈 것은 소녀를 눈으로 좇고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에서 비롯됐다.
* * *
‘여기까지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죠.’
단호한 어투의 말투는 학교에서 떨어진 후미진 골목에서 들려왔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 아래로 짓이겼다. 성실한 우등생을 가장하고 있는 우경은 이곳에 나와 혼자 담배를 피우곤 했었다. 부모가 학교에 끼치는 영향력은 우경을 이런 골목으로 내몰았다.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우경이 후, 하고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제가 이자는 꼭 갚는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못 믿는대? 이것 봐라. 아저씨는 그냥 지금 성실히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일을. 어?’
깐죽거리는 남자는 척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단정한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꽉 그러쥔 소녀의 청빈함과는 괴리감이 상당했다.
이자……? 사채업자인가?
금융권에 종사하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합법적인 종류는 아닐 것이었다.
‘뭐, 금방 갚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응?’
‘지금 아르바이트도 하나 더 찾고 있고요. 1년만 지나서 대학에 들어가면 과외도 할 거예요.’
‘네가? 대학? 하하. 야, 그냥 좀 더 빠른 길을 찾아보라고.’
‘왜요? 저 충분히 대학 들어갈 성적 돼요.’
이죽거리는 말에 숨겨진 음흉한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소녀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똑바로 응시하는 눈을 보며 사채업자는 입맛을 쩝 다셨다. 놀리려고 한 말에 겁먹지도 않고 대드는 태도에 재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이자 잊지 말아라, 라고 툭 던지듯 말을 뱉으며 골목 어귀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소녀와, 그리고 조금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던 우경의 눈동자가 좇았다. 그리고 막 사채업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후우.’
큰 한숨과 함께 소녀가 털썩 아래로 무너졌다. 온갖 센 척은 다 하고 있었는지 긴장이 풀린 듯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경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돈이 없구나. 절박해서 저런 불법 사채업자한테서 돈을 빌릴 정도로, 빈곤하구나.
속으로 심드렁한 감상을 삼켰다. 우경으로서는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뿐더러, 앞으로도 겪을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숙이자 새까만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지저분한 바닥에 닿았다. 언젠가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손으로 받쳐 주고 싶었다.
* * *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돈까지 빌리고?
가업으로 2대째 군수 관련 사업체를 경영 중인 친부는 사업 수완이 좋아 국내 정재계에 끼치는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 덕에 일반적인 아이들이 갖는 것과는 다른 친분을 태어나기 전부터 쌓아 왔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친부의 천부적인 사업가 기질을 물려받은 우경은 남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있었다.
‘재밌네.’
작게 읊조리며 길게 뉜 몸을 일으켰다.
옥상은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옥상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왜 안 오는 거지? 그렇게 자문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왜 이래. 안 오면 좀 어때. 예전처럼 나 혼자 있으니 좋은데, 뭐. 넓고 쾌적하고.
소녀와 마주쳤던 그때 그 눈동자가 떠올랐다. 직시하던 눈빛을 받은 그때, 온몸이 땅에 박혀 있는 듯했던 아득한 감각은, 우경이 느낀 최초의 절망감이었다.
어쩐지 절대로 이기지 못할 존재를 만난 것만 같은 굴복감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약간 불쾌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자신의 발밑에 둔 적은 있었어도, 자신의 머리 위에 둔 적은 없었다.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하긴 했지만 그 무엇도 진심이 아니었고, 그 누구와도 평등한 관계를 이루지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 어린 날의 치기였다.
이렇게 어리석게도 그 당시에 우경은 알지 못했다. 그 굴복감을 인정하지 못하는 수년으로 인해 잃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그 감각에 굴복하고 패배하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랬다.
사랑인 줄 몰랐었다.
몇 년간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에 충분히 잊은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계속해서 소녀가 궁금했다. 못 보던 사이에 얼마나 자랐을지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독일 대학과의 교류회에 참석하게 됐다. 고루하고 지루한 행사였다. 독일에서 대학을 졸업한 우경의 친모는 국제 교류 재단의 이사로 역임 중이었다. 그에 웬만한 교류회의 주최를 맡기도 했고, 또 의외로 그런 자리에서 상류층 간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지기도 했었기에 독일에서도 사업 확장에 성공한 친부 또한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그렇게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얼굴만 비치기 위해 온 곳이었다. 구석에 처박혀서 지루한 표정을 하고는 와인만 홀짝이던 우경은 그곳에서, 성장한 그녀를 보았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새카만 머리를 늘어트리고는 흰 수염의 늙은이 옆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해율은 어디선가 빌려 입은 듯 옷매무새가 어색하고, 그녀의 가녀린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커 보이는 까만 정장을 입고 있었다.
순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귀 뒤로 넘긴 머릿결에서는 어쩐지 향긋한 내음이 풍길 것 같았다. 해율은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었지만, 달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그런 착각까지 일었다.
독일인 교수와 한국인 교수 사이에서 성실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작은 입술을 움직여 조잘거리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작고 가지런한 치아에 숨을 삼켰다.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온몸에 혈류가 들끓는 감각이었다. 욕심이 났다, 그녀가.
사고는 단순하게 흘러갔다.
호기심이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결여가 지금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것이라고.
이날로 결심했다. 그녀를 가지리라고. 한 번, 아니면 두세 번 정도 그녀의 몸을 취하고 나면 끝이 날 감정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형을 이용해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곤란해하는 해율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였고 그녀를 돈으로 기만했다.
널 가지면 끝인 줄 알았어.
그 얼굴을 가까이 보면, 그 몸을 가지면 해소될 호기심인 줄 알았어.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 네가 나를 돌아보게 만들면 그게 끝인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야. 아니었어. 그게 바로 시작이었던 거야.
너를 알아 가기 위한 첫걸음이었던 거야.
너와 함께하고 싶은 욕망이 연소할 일은 결코……, 없었던 거야.
* * *
탁.
후우.
차 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이 까슬했다.
커다란 정원을 가로질러 적막함이 감도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우경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저택은 항시 잘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듯 언제나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벌컥벌컥 마셔도 개운치가 않았다. 우경은 회색 스트라이프가 옅게 들어간 슈트 재킷의 앞 단추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피로한 자리에 얼굴을 들이민 것도 오랜만이었다. 독일에서 잠깐 귀국하여 근 3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부모로부터 느끼는 감상은 단순했다. 지겨웠다. 대충 눈도장만 찍고 나서 제 할 일을 마친 우경은 발을 붙잡는 부모를 떨쳐 내고 그 자리를 나섰다.
어차피 예전부터 우경에게 거는 기대는 한결같았다. 현씨 가문의 현우경이라는 인간 자체에 거는 기대는 그들의 성공을 위한 발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모를 따라 독일로 건너갔던 우경은 그들보다 일찌감치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긴 시간 동안 우경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 왔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계단을 오르며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고는 사납게 끌어 내렸다. 정돈된 머리를 쓸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요일을 가리키는 WED라고 쓰인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이렇듯 피곤한 이유는 카페에 가지 못해서일 것이다.
바로 해율이 일하고 있는 카페였다.
그녀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녀가 그리워서 흔적이라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기다린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부러 해율이 일하는 시간을 피해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것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긴 시간을 인내하리라 결심했지만, 한번 행동하고 나니 몸이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충동을 겪어 보지 못한 우경은 해율로 인해 매시간을 충동 속에서 몸부림치는 꼴이 되었다.
해율이 닿았을지도 모를 흔적들을 더듬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내음과 체온이 그리울 뿐이었다.
커다란 침대에 털썩 몸을 뉘고는 등을 굽혔다. 시트를 그러쥐며 얼굴을 파묻었다. 지독한 불면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카페에 가지 못하는 날은, 새벽 동이 터 올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익숙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그렇게 진한 후회와, 더불어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우경을 좀먹어 갔다.
하지만.
인내해야 했다.
해율을 향한 마음을 깨닫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밤을 닮은 새카만 눈동자를 쳐다보고 싶었다. 그녀가 가만히 자신을 응시할 때 느꼈던 추락감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우경은 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며 차가운 물 아래에서 머리를 식혔다.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적막하고 고요한 집 안을 휘 둘러봤다.
자신의 옆에 앉아 조곤조곤 예쁘게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드디어 미쳤나.”
우경이 자조와 함께 작게 읊조렸다. 그녀를 기다린다고는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우연인 것처럼 마주칠까. 의도한 것처럼 말을 걸까. 수만 가지 방법을 생각하던 우경은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고 느꼈다. 혹시라도 해율이 완전히 자신을 향한 마음을 떠나보냈을까 봐, 완전히 등을 돌렸을까 봐 겁이 일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우경이 손으로 얼굴을 덮어 마른세수를 했다.
점점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해율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찬바람이라도 쐬어야겠군.”
이러다가는 대뜸 그녀에게 연락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저 멀리 도망갈 정도로 끈적하고 어두운 집착을 내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식. 자조의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을 못 믿을 지경까지 다다라 있었다.
우경은 운동화를 꿰어 신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쌀쌀한 바람에는 쌉싸름한 가을 냄새가 묻어 있었다. 커다란 대문을 열어젖혔다. 차를 타고 멀리 나갔다가 올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해율을 데려다주던 편의점 앞까지 가지는 못하고 금방 돌아올 테지만.
피식 웃은 우경이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
우경이 미간을 좁혔다. 우체통 안에 무언가가 끼워 넣어져 있었다.
하얀색 종잇조각이 안까지 다 들어가지 못한 채 우체통 문 사이에 걸려 있었다. 고지서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그 종이를 꺼내었다.
하지만 그 종이를 내려다보던 우경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숨을 들이켠 우경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는 종이를 소중히 쥔 채로 차에 올라탔다. 심장에 혈류가 돌았다. 새빨간 피가 심장을 관통하여 커다란 박동의 펌프질을 통해 온몸에 전달됐다.
다시금 종이를 펼쳤다. 글자를 음미하며 짧게 숨을 내쉰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조수석 위에 올려놓은 하얀 종이가 흔들렸다.
그 종이에는 예쁜 필기체의 독일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를 알려 줘〉
우경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자신을 알려 주기 위해. 그리고 그녀를 알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