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0)

07

해율은 정신없이 전공 서적과 필기류 등을 챙겨 가방에 욱여넣었다. 일어나니 벌써 9시 반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10시부터 수업이어서 학교까지 가는 데에 시간이 빠듯했다.

“아, 정말.”

하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순전히 자신이었다. 아직도 허벅지와 허리가 뻐근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 몸이 긴장한 탓인지 아직도 무릎이 굽혀진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가랑이 사이 또한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정신없이 집에서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9시 5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걸어서 거리가 꽤 되었기에 속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삼켰다.

막 강의실에 도착해서 숨을 헐떡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후.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나니 그제야 둔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나마 이 뒤에 공강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오늘은 조용한 데서 책이나 읽어야겠다.

해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자, 그럼 다음 수업까지 개별 리포트는 이메일로 제출하시면 됩니다.”

교수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강의실을 채우던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율은 느릿하게 가방을 정리한 후에 모두가 나간 뒤에 강의실을 나섰다.

분명히 제 기억에 이 건물 뒤쪽에 벤치가 하나 있었다. 조용한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다.

……요새 일상이 너무 우경으로 점철된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오늘은 잠깐이나마 다른 곳에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다.

해율은 우경을 떠올리자마자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진득하게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떠오르자 귓가에 솜털이 일어섰다.

손으로 귓바퀴를 감쌌다. 팔딱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건물 밖을 빙 돌아갔다. 벤치는 주차장을 지나 구석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기에 찾는 이가 드물어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해율이 주차장을 막 가로지르려던 때, 누군가의 곤란한 듯한 음성이 들렸다.

“……어, 아니. ……하, 그래도 그걸 내가 어떻게…….”

드문드문 끊기는 말은 주차된 차의 뒤편에서 들렸다. 누구랑 싸우나. 단순한 감상을 뒤로하고 막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어……. 아니, 알지. 그래, 우리 아버지가……. 너한테는 신세 많이 지고 있다. ……하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해율이를 내가 어떻게.”

순간 들린 자신의 이름에 해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멈췄다. 아니겠지. 자신과 동명이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해율이 흘긋 통화음이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등이 보였다. 남자는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그런데.

“……진형 선배?”

뒷모습이 익숙했다. 저건……. 

해율이 저도 모르게 입 밖에 음성을 뱉자, 한창 통화를 하는 중이던 진형이 깜짝 놀라 몸을 휙 돌렸다.

“어?! 해, 해율아.”

“선배, 여기서 뭐 해요?”

“아, 잠깐만.”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띤 진형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해율을 향해 걸어왔다.

“야, 이거 우연이다. 수업 있었어?”

“네, 방금 끝났어요. 선배는…… 교수님 뵈러 오신 거예요?”

“어? 응, 그렇지.”

진형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공강이야? 그런데 여기 주차장인데 왜 이런 곳까지 왔어?”

차가 없는 해율이 올 일이 없는 장소였다. 해율은 손가락으로 저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벤치에서 책이나 읽으려고요.”

“아아, 그랬구나.”

진형이 시선을 모로 흘긋거리며 대꾸했다. 해율이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평소의 진형 같지 않았다. 진형은 해율을 향해 실없는 소리도 자주 했다. 네가 그렇게 책만 보니까 놀 시간도 없는 거라는 둥, 그러지 말고 자기랑 농땡이나 까자는 둥. 원래대로였다면 금번에도 이런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무슨 일 있으세요, 선배?”

“응?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어. 나 알잖냐, 걱정 없이 사는 거.”

어깨를 으쓱 추어올린 진형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쳐졌다. 하지만 그게 어쩐지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망설였다. 혹시 진형이 통화로 언급한 해율이란 사람이, 자신을 말하는 건지. 누군가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는 건지, 하는. 그것도 상당히 곤란해 보이던 진형의 모습에 해율은 잠시 망설였다.

“나 근데 이제 볼일 끝났거든. 아버지가 급하게 찾으셔서 가 봐야겠다.”

“아, 그러세요? 네, 다음에 봬요. 조심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응? 다음에 보자.”

진형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고는 빠른 걸음으로 운전석 문을 열고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한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자동차의 꽁무니를 시선으로 쫓던 해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선배가 왜 저러는 거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해율은 무지근한 머리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아서 짧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다음에 제대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형은 무엇이든 솔직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해율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며 우거진 수풀 한가운데로 걸음을 향했다.

* * *

 조 모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하지만 오후 강의를 마치고 느지막한 시간에 모인 것이었기에, 시간은 벌써 저녁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조원 중 하나가 해율을 보며 혹시 감기라도 걸린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해율은 아니라고 설핏 웃으며 대답했지만, 손을 이마에 가져가니 약간 뜨끈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유야 알고 있었다.

‘너무 무리했나.’

이모의 병간호를 하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때에도 이렇게까지 쉽게 열이 오르는 체력은 아니었다. 나름 몸만은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컨디션 난조는 아무래도 정신적인 이유에 더 가까운 듯했다.

요새 너무 한쪽으로만 신경이 몰리긴 했지.

우경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아슬아슬하게 몸과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우경은 자신이 봐 왔던 학창 시절의 그 모습과는 또 사뭇 달랐다.

가까이서 접한 우경은…… 어딘가 집요한 구석도 있었고, 또 어떨 때는 무자비한 점도 내비쳤다. 그래서 새삼스럽고 새롭기도 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없었구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그래서 해율은 자각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해율은 자꾸만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숨까지 뜨끈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제 신경을 잡아먹는 것에는 다른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오형욱이었다. 차에서 연락이 끊긴 이후로 해율은 그에게 따로 연락을 주지는 않았다. 오형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전화를 받은 해율이 아무 말도 없이 덜컥 끊어 버린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혹여 신음이 새어 들어갔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에게 무어라 해명할 사항은 아니었다.

자취방이 있는 빌라촌 근처에 다다른 해율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짙은 노을빛이 땅 위에 길게 늘어지며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지저분한 골목 구석구석에는 다른 곳보다 더욱 빠르게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그곳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가방을 들치어 메고는 계단에 올라서다가 어딘가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고는 천장을 바라봤다. 센서 등이 꺼져 있었다. 아, 또 고장 났나 보다. 이 센서 등은 수시로 고장이 났다. 빌라 주인이 싼 것을 고집하는 데에서 비롯된 듯했다. 문득 피식 웃음이 샜다.

이런 구질구질한 빌라를 우경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고,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조금 우스웠기 때문이다.

탁. 탁.

계단을 오르는 해율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해율이 사는 층도 마찬가지로 불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고장 날 줄이야. 빌라 주인아저씨에게 연락을 해 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키를 꽂아 돌리며 문을 열었다.

적막과 고요함이 감도는 어둑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철컹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잠금장치를 돌려 문을 잠갔다. 문을 한 번 당겼다 놓으며 제대로 닫혔는지 재차 확인했다. 한숨과 함께 신발을 벗으며 노곤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때였다.

“……해율아.”

“무……! 흡!”

목구멍을 긁는 듯한 거친 음성이 들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해율의 앞을 막아섰다. 비명을 지르기 직전, 우악스러운 손길이 해율의 어깨를 잡고 몸을 휙 돌렸다. 동시에 입이 틀어막혔다.

해율이 눈을 부릅떴다. 누군가, 누군가가 해율의 집 안에 여태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귀가하자마자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남자였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도 커다란 남자의 그것이었다. 해율은 눈을 홉떴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읍……, 흐읍…….”

누구야.

그렇게 묻는 말은 입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도인가? 아니, 강도는 아니었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가. 해율아, 라고. 그리고…… 목소리도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해율아. 해율아.”

“……!”

등 뒤에서부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해율이 어깨를 굳혔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는 오형욱이었다.

“소리 지르지 마.”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마치 쇠를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을 듯 기분 나빴다.

“씨발, 소리 지르지 말라고. 손 뗄 테니까. 어? 나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거야. 알지? 응?”

욕설과 함께 그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오형욱은 자신의 집 안에 숨어 있다가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었다. 맙소사.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해율은 어리석지 않았다. 소리를 질렀다가 그를 흥분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오형욱이 계속해서 욕을 짓씹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서서히 손을 떼어 냈다.

허억, 헉. 입에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렸지만, 최대한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서히 몸을 돌렸다. 좁은 방은 조명 하나 켜지 않은 상태였다. 유일하게 있는 사각형의 창문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그조차도 구름에 가려져 내부는 끔찍하게 어두웠다.

암순응을 마친 눈에 오형욱의 얼굴이 들어왔다. 오형욱은 얼굴을 가릴 것처럼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 상태였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해율의 입에서 나왔다.

“……왜, 온 거야. 어떻게 들어온 거야.”

간신히 그렇게 물었다. 오형욱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떻게라니. 이렇게 방범 장치 하나 없는 허술한 집 문을 못 뚫는 게 병신이지. 그리고 왜인지 몰라서 물어? 당연히 너 만나러 온 거 아니겠어?”

“…….”

해율이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오형욱은 이딴 허술한 문 잠금장치를 뚫을 수 있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건 엄연히 범죄였다. 하지만 그런 단어를 굳이 입에 담아 그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지금 오형욱은 어딘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해율이 그 몰래 목을 꿀꺽 울렸다.

“미안. 일단 오늘은 돌아가 줘. 내일, 다시 얘기하자.”

“웃기지 마!”

돌연 오형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율이 미간을 좁혔다. 떨리는 입술을 이로 잘근 물었다.

“하하, 왜? 그 새끼 만나려고?”

“뭐?”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저번에 그 상판대기 잘난 놈한테 홀려서 다리 벌려 주는 거?”

“…….”

“기해율, 네가 그런 부류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나도 그럴 걸 그랬지. 어? 고상한 척, 세상 다 밑으로 깔보는 것처럼 굴길래 얼마나 깨끗하고 고결한가 싶어서 장단 맞춰 줬더니, 씨발. 내 생각이 틀렸더라?”

오형욱은 웃는 듯 찌푸리는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저 혼자 큭큭거렸다. 두려움에 바닥을 지탱하고 선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대뜸 오형욱이 소리를 내지르며 해율의 어깨를 덥석 잡아챘다.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펄떡 뛰었다. 오형욱의 눈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휴대폰, 휴대폰이 어디 있더라. 어딘가에라도 연락을 넣어야…….

“너한테 전화했을 때도 너 그 새끼랑 떡 치고 있었잖아.”

오형욱이 고개를 들이밀며 이로 짓씹듯 말을 뱉었다. 해율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입을 달싹이던 때였다.

“내가 잘못 이해한 거라고 말하진 마. 그딴 걸 모르는 게 병신이지. 안 그래?”

“…….”

“씨발, 하긴. 그 새끼가 네 빚을 전부 대 줬는데 몸 하나 못 주겠어? 가랑이 하나 못 벌려 주겠냐고. 아아. 나는 다 이해해, 해율아. 응?”

오형욱이 화를 내다가 갑자기 부드러운 음성으로 해율을 어르기 시작했다. 휙휙 변하는 태도에 본능적으로 구역질이 일었다. 정상적인 인간의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해율의 신경을 사로잡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빚을 갚아 줬다고……? 그 말은 마치 자신이 돈 때문에 그에게 몸을 대 준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폄훼하는 말에 순간 욱하는 기분이 들어, 해율은 오형욱을 향해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빚을 갚아 주다니. 그런 적 없어. 그 사람이 독일어 과외를 구한다길래 과외만 해 줬을 뿐이야. 그건 정당한 보수였어.”

“하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은 오형욱이 배를 부여잡고 뭐가 그리 웃긴지 어깨를 들썩였다.

“독일어 과외? 씨발, 존나 웃기네.”

“뭐가 그렇게 웃겨.”

“독일에서 몇 년이나 살다 온 새끼한테, 한국에서만 독일어 공부 잠깐 한 네가 과외를 해 준다고? 그딴 거짓말을 누가 믿어. 응?”

“……뭐?”

해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독일에서, 살다 왔다고? 누가?

“몰랐나 보네. 아니, 알면서도 그랬던 건가?”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겠지.”

“시침 떼기는.”

뭐 그건 어쨌든.

오형욱이 피식 웃더니 품 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휙 꺼내더니 펼쳐 들었다. 그리고 해율의 눈앞에 그것을 들이밀었다.

“네가 이제까지 사채업자한테 빌렸던 빚 전부, 그 새끼가 갚았잖아. 이래도 모른 척할 거야? 아, 그런데 그 새끼도 참 용의주도하더라. 자기 이름이 아니라 김진형 이름을 대고 갚았던데. 씨발, 내가 이거 알아내느라 얼마나 좆 빠지게 다닌 줄 알아?”

해율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내민 서류에는 해율의 모든 채무가 변제되었다는 확인서가 쓰여 있었다. 약간 비뚤어진 것을 보니 복사본인 듯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김진형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순간, 해율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진형의 통화 내용이 생각났던 것이다. 진형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것과 자신의 이름이 들먹여진 것…….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긴. 그거 돈 받는 대신 떡 친 거 맞잖아. 그런데 해율아.”

“…….”

“너 그렇게 사정이 힘든 거면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그까짓 몇천이고 몇억이고, 나도 뽑아내서 줄 수 있는데, 어? 씨발, 그 돈으로 너 따먹을 수 있는 거 알았으면 내가 먼저 했을 거라고! 그 새끼가 선수만 안 쳤어도!”

애써 고른 숨이 자꾸만 목구멍 뒤로 꼴깍 넘어갔다. 오형욱의 사고 회로는 단순히 해율을 돈만 받으면 누구에게나 몸을 내맡기는 싸구려로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분노보다는 당장 자신의 눈앞에 놓인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걸 내가, ……내가 어떻게 믿어? 난 전혀 모르는 일이야. 네가 이 서류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괜한 억측이야.”

“자꾸 빼면 재미없어, 해율아.”

“헉.”

오형욱이 해율의 어깨를 잡더니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미처 반항할 새도 없었다. 더운 숨이 훅 끼쳤다. 해율이 팔로 그의 어깨를 밀어도 그는 더욱 힘을 주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랑 만나자. 어? 내가 이딴 푼돈보다 더 많이 줄게. 돈줄이야 내가 꽉 잡고 있어. 걱정 마. 너한테 예쁜 가방도 사 주고. 오피스텔도 하나 해 줄게.”

“하, 하지 마. 비켜, 제발. 이러지 마.”

“하아, 해율아. 해율아.”

“싫……!”

해율이 고개를 내저으며 막 소리를 지르려던 때에 오형욱이 해율의 입을 가로막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제발, 누가 좀……!

그때.

쾅!

“……!”

쾅! 쾅!

“뭐야.”

현관 쪽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둔탁한 타격 음은 무언가 무겁고 단단한 것으로 내려치는 소리와 같았다.

“씨발, 뭔데!”

“흐읍……!”

쾅!

마지막으로 커다란 타격 음이 울리고 철컹, 하고 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끼익. 문이 열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으악! 미친, 뭐야!”

“아!”

휙. 그 그림자는 오형욱의 뒷덜미를 가로채더니 현관문 쪽으로 내던졌다.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오형욱은 꼴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듯 어정쩡하게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위를 올려다봤다.

해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란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을 것 같았다.

제 눈을 의심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쉰 사내가 해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해율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

해율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이 개새끼가!”

그때, 거품을 문 오형욱이 몸을 확 일으키더니 우경 쪽으로 몸을 날렸다. 육중한 두 개의 몸이 퍽, 하고 부딪쳤다. 아니, 부딪친 게 아니었다. 오형욱이 커다랗게 팔을 회전시켜 우경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순간 우경이 발을 뻗어 오형욱의 배를 걷어찼다.

마치 제 손을 다시 더럽히기 싫다는 듯 발을 사용하여 다시금 오형욱을 넘어트린 우경은 혀를 한 번 쯧 찼다.

오형욱은 바닥에 쓰러져 쿨럭하고 기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세운 채 치욕감과 패배감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우경이 문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것을 다시 곱게 접더니 제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야! 네가 기해율을 어떻게 꼬드겼는지 모르겠는데, 이 새끼, 너만 돈 넘치는 줄 알아? 씨발, 나도 그깟 돈 어떻게든 구하기만 하면!”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단호하고 조용하게 읊조린 우경의 말에 오형욱이 흥분에 차서 악다구니를 썼다. 그가 다시금 몸을 일으키더니 우경을 향해 돌진했다. 우경이 그의 멱살을 잡고는 쾅! 하고 벽에 밀쳤다. 큭, 하는 밭은 신음이 터졌다.

“너랑, 큭, 내가 뭐가……. 달라, 쿨럭.”

“다르지. 애초에 더럽고 천박한 너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일 정도로 완전히.”

우경이 말을 이었다. 부드러운 어조였다.

“네가 지금 한 짓거리는 과연 얼마나 깨끗한 순정이길래 이렇게 가택 침입 같은 중범죄까지 저질렀는지, 오 의원님께 물어볼까?”

“……뭐? 무슨 개소리야.”

갑작스레 우경의 입에서 튀어나온 오 의원이란 한마디에 오형욱이 눈을 홉뜨며 말을 더듬었다. 우경이 피식 웃더니, 벽에 밀어붙인 오형욱의 귓가에 입을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오형욱의 낯이 순식간에 파리해지며, 그가 입술을 달달 떨었다.

“이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말귀는 제법 알아듣나 보네.

우경이 낮게 뇌까리며 오형욱을 결박하던 멱살을 풀었다. 오형욱은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 괴롭게 고개를 숙였다. 씨발, 하고 욕설을 지껄인 오형욱의 음성과 낯빛에서는 아까와 같은 광기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경을 질린다는 눈빛으로 흘긋댔다.

“하, 미친 새끼…….”

“두 번의 기회는 없어.”

우경의 말뜻을 오형욱도 알아챘다. 다시는 기해율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오형욱에게 무어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형욱은 자신의 창창한 미래와 해율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이내 욕설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해율을 향해 잠시 시선을 던졌다. 이런 놈과 지독하게 얽힌 해율의 상황 자체가 자못 질린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시선을 떼어 내더니 우경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접근 안 해. 안 할 테니까…….”

“내가 손수 내보내 줘야 하는 건가?”

“아, 알겠다고! 씨발, 진짜.”

오형욱은 그 말을 끝으로 비척거리며 해율의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이 어둠이 깔린 내부에는 둘만 남았다.

우경은 제 손 하나 더럽히지 않고 떠나보낸 오형욱에게서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걱정이 어린 얼굴을 하고 해율을 향해 다가왔다.

“많이 놀랐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요. 괜찮…….”

“아까.”

우경이 손을 뻗어 해율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려던 때, 해율이 그의 말을 끊었다. 손이 가슴께로 올라갔다.

“아까, 오형욱이 나한테 한 말이 있어요. 그게 사실인지 묻고 싶어요.”

“무슨 말을 했어요?”

우경은 선선히 물었다. 해율이 아랫입술을 질근 물었다.

“우경 씨가 진형 선배 이름으로 내 빚을 대신…… 갚아 줬다고.”

거짓말이길. 날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사람이 당신이 아니길.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으로 간신히 물었다. 눈으로는 똑바로 우경을 쳐다봤다. 우경은 해율을 대하던 언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에 해율의 마음속에 잠깐의 기대가 피어올랐다. 오형욱이 거짓말을 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맞아요. 내가 갚았어요.”

쿵. 그 대답에 해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 거부감 서린 행동을 우경이 기민하게 알아챘지만, 해율을 향한 눈빛에는 여전히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 왜요? 왜 그랬어요? 그건 마치…….”

화대 같잖아요.

해율은 자신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그 단어를 괴롭게 삼켰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오형욱이 한 말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잔바람 앞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렸다. 애처롭게까지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경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 말을 고르는 듯 약간 고개를 기울인 그의 얼굴에는 금세 나긋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일단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사실에 그녀가 충분히 놀랐을 터였다.

해율을 천천히 손에 넣기 위해 꽤 여유롭게 생각하던 우경의 입장에서 오늘 일은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돌발 상황이었지만, 우경은 침착하게 말을 읊었다.

“일단 오늘은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쉬어야겠어요. 병원에 가요. 이참에 입원하는 것도 나을 것 같아요.”

“아뇨. 아니, 난 지금 확인해야겠어요, 당장.”

단호한 말을 뱉으며 해율이 물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랬는지 말해 줘요.”

우경이 코로 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해율 씨에게 여유를 주고 싶어서 그랬어요.”

“……무슨 여유요?”

우경이 진중한 눈빛을 하며 해율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고백했다.

“나랑 함께 있을 여유. 당신이 생활에 치이지 않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여유. 그것들을 주고 싶어서요.”

“무슨, 무슨 소리예요, 그게. 난 지금 우경 씨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잠깐, 잠깐만…….”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해율은 혼란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현우경.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멀리서나마 알고 있던 사람이자, 진형 선배의 지인이자, 자신과 가장 깊숙이 결합되었던 사람.

하지만.

과연 그게 이 사람이 맞는 걸까?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게, 현우경이란 사람이 맞는 걸까?

해율이 가슴에 얹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과연 나는 현우경의 무엇을 알아 왔던 것일까. 이 사람을 어쩌면 제대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순간적으로 느낀 절망감에 가슴이 턱 메어 왔다.

“해율 씨.”

“가까이 오지 마요!”

날카롭게 소리친 해율이 뾰족하게 선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우경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시에 해율을 향해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걸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보다는 당장 해율의 몸 상태가 더 걱정된다는 표정.

하. 해율은 기가 찼다. 어이가 없었다.

“여유라니. 당신이 말하는 건 그냥 궤변으로밖에 안 들려요. 제가 당신이랑 자서, 그래서 돈을 갚아 준 것 아닌가요?”

이런 말을 제 입으로 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옅게나마 남아 있던 자존심을 망치로 두들겨서 쩍쩍 금을 내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그저 해율 씨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무슨 말이에요? 우경 씨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당신이랑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은 작게 덧붙였다. 그러나 정말이었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그랬다. 그와 자신은 과외를 인연으로 만난 선생과 학생이었다. 순간 해율이 떠오른 생각에 몸을 굳혔다. 설마.

“……하나만 물을게요. 독일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다는 거, 사실인가요?”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길. 그러면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 우경이 고개를 기울이며 제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사실이에요.”

“뭐라고요?”

해율이 순간 찾아온 어지러움을 참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우경은 담담히 고백했다.

“그런데 왜 독일어 과외를 받겠다고 했어요? 대체 왜!”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우경이 그렇게까지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어서요, 해율 씨를.”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막을 파고드는 저음에 해율이 어지러운 시야를 다잡으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혼란스러움에 무너지려는 해율의 앞으로 그가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 말했다.

“해율아.”

“……!”

그가 해율을 불렀다.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어떠한 장난기도 엿볼 수 없었지만, 기시감이 들었다.

“너를 알고 싶어서 그랬어, 해율아.”

“무슨…….”

“옥상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너를 알고 싶었어. 오랫동안 헤맸지만.”

해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옥상.

옥상에서 처음 만난 너.

“그때부터 너를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었어.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지. 만난 그 순간 알았어. 너도 나를 알고 있었다는 걸. 너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걸.”

놀란 해율의 다리가 떨렸다.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알아본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우경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너랑 내가 아무것도 아니야. 이래도,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야?”

한없이 깊은 눈이 자신을 직시했다. 해율은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우경이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그때부터 너를 잊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옛날의 나는 미처 몰랐어.”

“…….”

“이게 첫사랑이라고 하는 것일 줄은.”

정말 미처 몰랐어, 어리석게도.

해율은 말을 잃었다. 첫사랑이라니. 가슴이 철렁였다. 아니, 이런 말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의 말을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적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해율이 자신의 양팔을 감싸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며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집에 처음 과외 하러 갔던 날은 왜 모른 척한 거야? 대체 왜, 이제까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녀리게 흐트러지는 숨조차 안타깝다는 듯 해율을 바라보던 우경이 입을 열었다.

“단순한 호기심인 줄 알았어. 너를 한 번 보고, 그리고 너와 가까이 있으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어. 이 감정이 나에게는 그 옛날 동화책에서만 봤던 환상과도 같았거든.”

“…….”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그 무언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감정. 이제껏 유복하게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느껴 본 적 없는 우경이 유일하게 끊임없이 의심해 왔던 환상과 같은 사람. 환상과도 같은 너.

“처음엔 네가 환상처럼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언제나 그런 예쁘고 좋은 걸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네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고…….”

“…….”

“네가 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모든 걸 가져 본 적이 있을 것 같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온 남자가 말했다.

담담하게 읊고 있는 우경은 계속해서 해율을 관찰하며 찾고 있었다. 하지만 우경의 절절하기까지 한 이 고백은 더욱 해율을 비참하게 했다.

“그래서 그랬다고? 빚을 갚은 이유를 지금 너는.”

고백으로 대체하는 거야?

그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타고, 그의 곁에서 얼마나 설레었는데. 그랬던 감정들까지 흙탕물로 뒤집어쓰는 것 같았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어. 애초에 몰랐어. 누군가의 마음을 잡는 방법은 나는 몰라. 그래서 그랬어. 너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없애 주고 싶었어.”

그는 진심이었다. 잘 몰랐다고. 해율의 생활에 여유를 주기 위해 그녀를 도울 방법이 이거밖에 없었다고, 이거밖에 생각나지 않았다고.

해율의 숨이 흐트러졌다. 그간 그와 눈을 맞대고, 얼굴을 맞대고, 살결을 맞대면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입술 끄트머리가 파르르 떨렸다.

“너 때문에 난 이전보다 더 괴로워. 나 이제 너 같은 거, 보기 싫어. 정말 꼴도 보기 싫어.”

“해율아.”

해율이 진저리 치듯 거절의 말을 뱉자 우경이 다소 조급한 어투로 해율을 불러 왔다.

“이런 건 애정이 아니야. 네가 나한테 한 건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거지, 그 어떤 애정도 아니야.”

우경의 숨이 순간 뚝 멎었다.

“나는 너를 모르겠어. 내가 이제까지 알아 왔던 사람이 정말 너인 건지. 너는 대체 뭐야? 너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어.”

“……해율아.”

“아니,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졌어.”

가느다랗게 떨리는 그녀의 말에 우경의 가슴팍이 커다랗게 한 번 들썩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눈을 내리깔고 있는 해율과 눈동자를 맞추었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해율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우경은 간절하게도 애원했다.

“그럼 이제부터 네가 알려 줘. 너를 제대로 알아 가고, 너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나도 하고 싶어. 알고 싶어, 해율아.”

우경의 동공이 흔들렸다. 갈색빛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아득히 침잠한 눈빛이었다. 해율의 단호하고 끊임없는 거절에 잔뜩 나약해진 그의 마음이 순수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심을. 그녀의 애정을.

하지만.

해율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나가 줘, 제발. 부탁이야.”

끝이었다. 이제 우경과 자신은.

“돈은 앞으로 내가 찬찬히 갚아 나갈게. 그렇게 할 거니까.”

“아니, 안 돼.”

하지만 우경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에 거부를 표했다.

그녀를 직시하는 눈빛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우경은 그녀의 체향을 단 한 순간이라도 맡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의 포근하고 따끈한 아랫배에 얼굴을 묻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듯이 목을 그르렁거린 그가 인내와 닮은 말을 전했다.

“나는 너랑 못 떨어져, 이제. 아니, 안 떨어져. 그러니 나랑 함께하면서, 내 곁에 머물면서 나를 용서해 줘. 내가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이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가.

집착과 소유욕으로 득시글한 우경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해율이 우경을 당연히 용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해율이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이런 그의 간절한 말에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이었다.

나를 기만하고, 나를 속였던 이기적인 남자를 왜 이토록 자꾸만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인지.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제껏 해율이 간신히 쌓아 올려왔고 지탱하던 것을 그가 간단히 무너트렸다. 이런 관계가 오래 지속될 리 만무했다.

“해율아.”

그가 속삭였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게 미친 듯이 좋았어.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왜 그 어릴 때는 몰랐을까. 그 후회뿐이었어. 그래서 정말 지금 너를 놓치면 나는…….”

미칠지도 몰라.

“나를 받아 줘. 너 아니면 나는 이제…….”

그 말을 뱉어 내는 우경의 어깨는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해율의 애정을 갈구하며.

이런 우경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언제나 여유로웠고 언제나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애원하고 갈구하는 모습 따위 해율은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흔들렸다. 뚝뚝 흐르는 그의 눈물이 해율의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안될 것 같아.”

“…….”

마지막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우경의 몸이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순간 그의 눈에 흉흉한 기운이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가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해율을 가지려 해도, 해율의 마음까지는 가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 터였다. 그녀의 의지나 의사를 무시하고, 멋대로 금전적으로 그녀에게 베푼 것에 대해 그녀는 이미 지독하게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해율이 몸을 돌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망연히 절망에 빠져 있는 우경을 두고 그녀는 멀찍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겨웠다. 이렇게 끝을 맺어야만 했다. 그게 맞았다. 자신을 기만하고, 속여 온 그를 외면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드럽게 자신의 살결을 어루만지던 촉감이 아직 생생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귀가 저릿하고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달콤하게 속삭이던 언어들이 생생했다. 손끝이 자꾸만 그에게 뻗어 나가는 것이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해율은 아직도…… 그가 좋았다. 현우경이 좋았다.

딱딱하게만 굳어 있던 자신을 순식간에 마구 뒤흔들던 새파란 하늘 아래의 현우경이 좋았고, 세파에 찌들어 있던 자신을 구정물에서 건져 올리듯 농염한 몸짓으로 어루만져 주던 지금의 현우경이 좋았다.

“…….”

해율이 입을 달싹였다.

애써 마음을 다잡듯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해율이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 말에 우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가느다란 희망의 줄기가 보였다. 우경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리면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모르겠어. 안 될지도 몰라.”

자신도 그를 어떻게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확언도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경의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확약도 없었다. 해율은 그런 의심을 담아 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우경을 바라봤다.

우경도 당장은 자신이 그녀에게 그 어떤 확신도 심어 줄 수 없을 것이라 직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는 믿지 않으리라.

문득 가슴 한쪽이 지끈거렸다.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금 단단히 걸쇠를 걸어 잠가 버린 마음을 열어 주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몇 년이나 돌아온 세월을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껴안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아야 한다는 충동이 뇌리를 지배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경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해율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단 한 발자국도.

우경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해율아.”

“…….”

“기다릴 거야, 나는.”

우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단단한 암석과도 같은 언어였다. 그게 해율의 가슴속에 묵직하게 내리꽂혔다.

“언제라도 괜찮아.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해율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뒤에서 그가 떠나가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