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0)

05

……씨.

……율 씨.

…….

…….

“…….”

“해율 씨!”

헉.

멍하니 턱을 괴고 있던 해율이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망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여섯 개의 눈동자가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아…….

해율이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침을 삼켰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어요?”

그제야 상기했다. 지금은 한창 조 모임을 하던 도중이었다.

“왜 이렇게 넋 놓고 있으세요. 다들 시간 많아서 여기 모인 거 아니잖아요. 네 명이 겨우 시간 맞춘 마당에 딴생각하시면 곤란해요.”

까칠한 어투로 톡 쏘아붙이는 말에 해율이 시선을 돌렸다. 모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치 외교학과에 속한, 저보다 두 학번 아래의 여자애였다. 조 모임은 이제 네 번째였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해율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 왔었다. 해율이 반응하지 않고 무던하게 넘기기에 더욱 뿔이 난 듯 그녀의 말투는 갈수록 격해져 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해율은 그저 고개만 숙이며 순수하게 미안한 감정을 담아 사과를 건넬 뿐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어어, 해율 씨. 혹시 어디 몸 안 좋은 건 아니죠? 요새 갑자기 날이 더워져서 괜히 애먼 거 먹었다가 탈 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그러게. 몸 안 좋으면 먼저 가세요. 어차피 각자 분장도 다 했고 지금은 PPT에 들어갈 내용 확인하는 게 다니까.”

사과를 하기가 무섭게 같은 조원인 남자 둘이서 해율을 향해 걱정 어린 빛을 띠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에 팔짱을 낀 채 해율을 쏘아보던 정치 외교학과의 여자애가 혀를 차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는 게 보였다.

해율은 그저 곤란한 듯 설핏 미간만 찡그릴 뿐이었다.

“아니에요, 몸 안 좋은 거. 잠깐 제가 정신을 놓고 있었네요. 계속해요, 우리.”

“그래요? 아, 그럴까요.”

해율의 담담한 말에 호들갑을 떨던 남자 중 하나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가만히 PPT를 훑자 헛기침이 잠시 터지고 어색한 공기가 잠시 흐른 후 곧 조 모임이 이어졌다.

해율은 어지러운 속을 잠시 달랬다.

극치의 절정 후 기진해서 잠들고 나서 잠시 정신을 차렸던 그날 밤의 일을 상기하느라 정신을 빼 놓고 있었다.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살며시 눈을 뜨자, 어슴푸레한 달무리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방 안이 컴컴해져 있었다.

멍하니 누워 있다가 이내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두꺼운 체온을 인식했다. 아, 하고 단발의 음성을 내뱉으며 눈꺼풀을 완전히 들어 올리자, 눈앞에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우경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표정이 아예 사라진 얼굴을 한 채.

고요한 적막 속에서 해율은 그저 조용히 눈만 깜박였다. 서로를 응시하던 시선이 공중에서 뒤엉킨 것도 잠시, 해율이 입을 열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몽롱하게 젖어 든 목소리였다.

‘……저 얼마나 잤어요?’

‘얼마 안 됐어요. 한 십 분?’

속삭이듯 건네는 말에 해율의 얼굴이 또다시 화끈거렸다. 한번 감각이 트이자, 온몸이 어떤 상태인지 확연히 느껴졌다.

아래는 아직도 무언가 꽉 들어차 있는 것처럼 얼얼했다. 가슴 끝은 하도 빨려 살짝 쓰라리기까지 했고, 그에게 내리 잡혀 있던 오금은 조금 뻐근했다. 배 속이 어릿했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샘솟았다. 격정적인 정사 후에 그의 침대에서 까무룩 정신을 잃다니.

‘일어날게요.’

‘더 자도 돼요.’

그가 약간 어깨를 도닥이듯 해율의 뒤척임을 잠재웠다. 해율은 또다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우경은 미소 한 점 없는 얼굴로 해율을 마주 봤다. 문득 해율의 입이 열렸다.

‘……저랑 왜, 하신 거예요?’

‘뭘요? ……섹스?’

‘네.’

해율은 속에 담겨 있던 궁금증을 직설적인 물음으로 표했다. 언제나처럼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는 혹시 자신을 쉽게 쾌락에 빠지는 여자라고 여기는 것일까. 유혹에 넘어오기 쉬운 여자로 보였을까.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경과 재회하면서 해율의 가슴속에는 이미 거센 풍랑이 일었다. 멈출 수 없는 거친 파도는 그를 만날수록, 그를 가까이할수록 더욱 그 세기를 더해 갔다.

하지만 우경은? 그는 해율을 모른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과외를 받는 입장이었던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섹슈얼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말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해율을 보며 우경이 설핏 곤란한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표정은 마치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금세 사라졌다.

‘왜요? 싫었어요?’

‘아뇨.’

‘그럼.’

‘……좋았어요.’

고백이 아니었다. 그와의 정사에 대한 감상이었음에도,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 같아서 목소리 끝이 떨려 왔다. 우경이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관능적인 미소였다.

‘나도 그랬어요.’

‘…….’

‘나도 좋아요.’

쿵.

그의 말에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다. 고백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느낌일 뿐인데, 좋아요, 라는 말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둔중하게 울려 댔다.

하지만.

‘선생님이랑 섹스하는 거, 기분 좋아요.’

그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섹스가 기분 좋았다고 말한다.

아.

엉망으로 온몸을 두들기던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그렇구나. 그에게는 단순한 흥미였을 뿐이다. 해율의 몸이 그의 구미를 당겼을지도 모를 그런, 말초적인 본능에 의한 흥미와 그에 따른 만족.

순간 해율의 얼굴이 드물게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누가 보더라도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려 고개를 시트 쪽으로 파묻었다. 문득 얕게 헛바람이 내비치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 같기도 했고, 어처구니없다는 한숨 같기도 했다.

‘그런데…….’

‘네?’

‘아니에요.’

나직이 읊조린 우경의 낯이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그것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 * *

다음 수업까지도 해율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뜨끈하게 달아올랐던 그 밤의 그 행위가 떠올랐다. 아직도 몸속에 잔열이 남은 듯한 생경한 느낌은 해율의 의식을 자꾸만 현실로부터 떨어트려 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불쑥 떠오르는 막연한 생각에 해율의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들었다.

아직 남아 있는 과외와 그와의 행위. 그리고 혹시나 돌려줘야 할지도 모를, 해율에게는 너무나 거액의 과외비. 여기서 간단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

당연한 일이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하면 된다.

선생과 학생 그 이상의 관계는 원하지 않는다고.

그럼 그는 뭐라고 말할까. 어쩌면 깔끔하게 수긍하며 더 이상 과외도 받지 않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순간 해율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돈, 그리고 우경과의 연결 고리. 그 둘을 같은 무게 추에 놓고 저울질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처지도 그랬다.

응당 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몇백이란 돈은 해율이 쉬이 구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으며 당장 수중에서 떠나간 돈도 있었다. 해율에게는 꿈같은 몽상보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현실의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은 그에게 앞으로 보지 말자고, 이런 가벼운 관계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아…….’

순간 떠오른 생각에 해율의 눈꺼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해율은 망설임 없이 끊어 냈을 것이었다. 이제까지 해율에게 성적인 흥미를 보이며 접근해 왔던 남자들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해율 또한 둔하긴 했지만 그런 관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생활고만으로도 버거운 해율이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면 웬만한 남자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그에 대해 해율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경은, 아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해율이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사람이다. 그는 아련한 추억이었다. 어차피 손에 닿지 않는 사람이었고 인연이 없는 옛 기억이었다. 잠깐 쉴 때 살며시 들여다보다 다시 현실로 되돌아올 때면 마음 한쪽에 밀어 두는, 먼지 쌓인 예쁜 유리구슬이었다. 홀로 쓰다듬는 것만이 해율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고, 유일하게 반짝이는 기억 그 자체였다.

그런 그는 비록 해율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해율은 가슴에 날개라도 돋은 것처럼 설레었다. 그가 해율에게 건넨 선택권을, 해율은 끝내 발을 내디뎌 잡았다. 도무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낯설고도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체향. 간지럽게 달아오르는 그의 체온. 그 모든 것을 해율은 거부할 수 없었다.

해율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허벅지 안쪽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누구도 침범한 적 없는 좁은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던 거친 욕망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아래를 열 때의 통증은 아주 잠깐이었다. 어디랄 것 없이 자극해 오는 커다란 성기는 해율의 몸속, 아니 좀 더 내밀한 깊은 곳까지 무자비하게 들이쳤다. 그 침입자는 부드러우면서도 흉포하게 속을 완전히 헤집었다. 하지만 곧 그 어릿한 통증은 쾌감으로 돌변했다.

머릿속에 하얀 불꽃이 터지며 시야가 점멸하는 그 감각은 아직도 몸에 잔열처럼 남아 있었다. 그가 격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아래를 더욱더 벌리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다.

‘미쳤어…….’

해율이 무릎에 힘을 주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자신의 몸은 그의 크기에 아주 쉽게 맞추어져 갔으며, 눈 깜짝할 새에 쾌감에 다다랐다. 그가 치받는 동작에 맞춰 허리가 흔들렸다.

그의 진입을 돕는 애액이 질펀하게 뿜어져 나와 아래가 잔뜩 젖었음에도, 우경은 한껏 벌어진 해율의 구멍에 얼굴을 처박고는 양껏 빨아 대며 가뜩이나 젖은 아래를 더욱 질척하게 만들었다.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달콤했다.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내지를 정도로 거세게 빨린 젖꼭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의 행위를 상기하자 딱딱하게 솟아올랐다.

‘밖에서 자꾸만 떠올리지 마.’

해율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저리를 치며 그 기억을 떼어 내려 했지만 제 의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움직였다.

이런 야릇한 욕망이 제 안에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런 감각이 존재하는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그가 토해 낸 정염에 해율도 환희에 차 몸을 떨었다.

그럴 수밖에.

해율은 아직도 우경을 보면 가슴이 떨렸다.

아직도, 우경을 좋아한다.

하지만, 우경이 해율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몸뿐인 관계일 것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섹스가 좋았다고.

해율이 경험이 없긴 하지만 성적인 지식이 전무하거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관계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게 계속해서 해율을 고뇌에 빠트린 원인이었다.

해율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치닫는 생각에 달아올랐던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조 모임 후에 모두가 떠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해율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아래가 젖은 느낌이 들었다. 끈적거리는 애액이 속옷을 적신 것이 틀림없었다. 해율이 겨우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내디뎠다.

캠퍼스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청량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짙푸른 녹음을 에워싸며 잎사귀를 이리저리로 흔들었다. 얇디얇은 이파리는 바람이 치면 치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무심한 낯으로 그 가녀린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때였다.

“해율아.”

“……?”

귀에 따갑게 내리꽂히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뭐 해? 거기서 멀뚱히 서서는.”

“아.”

오형욱이었다. 그는 그 특유의 거칠면서도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활짝 웃자 그의 이가 새하얗게 드러났다.

“아, 너 혹시 아직도 몸 안 좋아? 저번에도 몸 안 좋다고 하더니. 너 이렇게 말라서 그래. 팔 봐. 어?”

해율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오형욱은 해율이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자 저 혼자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마치 해율의 뭐라도 되는 양 한껏 걱정 어린 얼굴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냐, 나 아무렇지 않아. 수업 가는 거야?”

“아무렇지 않기는!”

오형욱이 가까이에 다가왔다. 해율이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듯이 발을 뒤로 내디뎠다. 오형욱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새까만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자 볼을 붉히며 더욱 크게 이를 내보였다.

“수업 끝났지, 나는. 너도 끝난 거지? 너 아무래도 수액이라도 맞아야겠다.”

“아니, 됐…….”

“우리 삼촌이 하는 개인 병원 있거든? 거기 가면 끝내주게 효과 좋은 거 놔 줄 거야, 공짜로. 그런데 혈색은 나쁘지는 않은, 데…….”

거절의 말조차 제대로 귀담아들을 생각 없이 제멋대로 떠들던 오형욱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해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웃음을 지운 채 입을 달싹이며 해율을 보고 있었다.

해율의 혈색은 오형욱의 말마따나 나쁘지 않았다. 아니, 외려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이전의 딱딱하기만 했던 해율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진 것이 보였다. 멀리서는 알 수 없는, 해율을 집요하게 지켜본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단조로운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알게 모르게 농염함이 감돌았다.

가만히 있으면 유순하게 보이는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는 사람들의 눈길이 진득하게 머무를 정도로 색기가 어려 있었다.

해율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형태의 분위기로 드러났다.

오형욱은 어딘가 모르게 바뀐 듯한 해율을 보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바보처럼 입만 달싹이던 그가 목이 타는지 침을 그러모아 꿀꺽 삼켜 댔다.

해율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네 쪽 같은데. 너야말로 수액 맞아야 하는 거 아냐?”

“어? 아, 아니……. 나, 난 괜찮…….”

그는 숫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했다.

뭐지.

반면에 해율은 의아하기만 했다. 평소에 좀 거북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진짜로 몸이 안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해율도 그와 오래 상대할 마음은 없었기에 이만 걸음을 떼려고 했다.

“너 아무래도 병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이만 가 볼게. 몸조리 잘해.”

그렇게 조곤조곤 말을 건네며 막 발길을 돌리려던 때였다.

“야! 자, 잠깐만!”

아.

해율의 팔목이 확 휘어졌다. 억센 손길이 그녀의 팔목을 휘어잡는 바람에 몸이 갸우뚱하고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다급하게 해율의 걸음을 가로막은 오형욱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막아서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찬 사람처럼 여유가 없는 손길로 해율의 손목을 꽉 그러쥐었다.

‘아파.’

해율이 눈을 찡그렸다.

“같이 가자. 나, 나 아무래도 병원 가 봐야 할 것 같거든? 간 김에 너랑 같이…….”

“기해율.”

오형욱이 더듬거리며 크게 내뱉은 말 사이로 누군가의 부름이 끼어들었다. 해율이 막 오형욱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을 때였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선배.”

진형이 쓴웃음을 입에 걸친 채로 해율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해율이 진형을 부르다가 이내 눈을 크게 홉떴다.

진형의 어깨 너머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해율은 제 눈을 의심했다.

왜, 현우경이. 현우경이 왜 여기에.

“안녕하세요.”

묵직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가 해율의 고막을 자극했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까까지 해율의 머릿속을 꽉 채우던 그 사람이, 우경이 이 자리에 있었다.

우경은 캐주얼한 세미 정장 차림을 한 채였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탄탄한 몸매와 눈에 띄는 커다란 키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거기에 뚜렷하고 정갈한 이목구비까지 갖추어져, 지나가다가 그를 보며 저들끼리 수군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해율은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우경의 모습만이 망막에 새겨질 듯 비치어졌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와서 호흡을 잘게 들이쉬었다.

그가 입가에 웃음을 걸친 채로 해율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곧 해율의 손목 쪽으로 움직였다. 입매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고요한 눈동자가 해율의 가녀린 손목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뭐냐, 해율아. 누구야?”

“어?”

옆에서 짜증스레 건네는 말에 해율이 휙 고개를 돌려 오형욱을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아, 하고 단발의 음성을 뱉으며 손목을 털었다. 꽉 그러쥐고 놔주지 않을 것 같던 오형욱의 손길은 예상과 달리 쉬이 떨어져 나갔다. 껄끄러운 남성을 앞에 두고 신경이 쏠려서였다. 오형욱의 미간이 종이처럼 와작 구겨졌다.

“누구냐니까?”

재차 물었다. 그는 이렇게 따지듯 물을 정도로 해율과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고, 해율 또한 평소 같았으면 냉정하게 대꾸했겠지만, 지금은 당황함에 어찌할 줄 모른 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아, 네. 그런데 댁한테 물은 거 아니에요.”

오형욱이 날 선 말투로 대꾸했다.

그의 말투에는 초조함이 짙게 묻어났다. 저보다 우월한 객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탓이었다. 초조와 불안이 여실히 드러난 오형욱은 다리까지 부산스럽게 떨었다.

우경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언뜻 냉기가 흐르는 웃음이었다. 해율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오형욱을 향해 말했다.

“미안. 나중에 보자.”

“어?”

“나랑 친한 선배야.”

“선배?”

해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형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진형 또한 오형욱과 같은 과이기는 했지만 접점은 없었다. 오형욱이 입대하는 시점에 진형이 전역하여 등록 학기가 미묘하게 어긋난 까닭이었다.

“누구?”

집요하게 묻는 말에 해율이 이름을 말하자, 그제야 오형욱이 “아.” 하고 작게 단발의 음성을 냈다. 그러더니 저 사람이 김진형이라는 사람이구나, 하는 뜻으로 대놓고 가늠하듯 흠 소리를 내며 목을 울렸다. 학교 내에서 진형은 꽤 유명 인사였기에 오형욱 또한 진형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해율의 단호한 태도에 삐딱하던 표정을 푼 오형욱이 슬금슬금 해율의 눈치를 봤다. 끈덕지게 물어 늘어지고 싶은데 짜증을 숨기고 애써 참는 눈치였다.

“……연락 주는 거지?”

“응, 다음에.”

“꼭이다? 어?”

해율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형욱이 잠시 우경이 있는 쪽을 흘긋 보더니 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억지로 걸음을 떼어 냈다. 험악하게 찡그린 얼굴에서는 난폭함이 엿보였다. 우경은 그런 시선을 쉬이 흘려 넘기며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해율에게로 곧바로 눈을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해율이 진형과 우경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경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진형의 눈만 쳐다보았다. 진형이 씨익 웃었다.

“우경이가 마침 이 근처에 볼일이 있었다지 뭐야. 그래서 겸사겸사 커피나 한잔하려고.”

“그랬어요?”

해율이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어쩐지 가슴속이 답답했다.

“응. 근데 저 새끼는 뭐야?”

“누구……. 아, 형욱이요? 그냥, 동기예요.”

“흠, 그래?”

진형은 어쩐지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로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어?”

진형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해율 또한 눈을 들었다. 우경이 작게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이렇게 다 같이 만나다니 엄청난 우연이네요.”

“아, 그러네. 내가 너희 둘 연락처를 휴대폰으로 전달만 했었지, 참. 내가 너무 중간에서 예의가 없었나 싶다.”

“이제 와서요?”

“야야.”

농담조의 말에 진형 또한 허물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해율이 눈동자를 굴려 둘을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우경과 진형은 친분이 두터워 보였다.

“이렇게 좋은 과외 선생님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새삼스럽지만.”

“일부러 그러지, 너 지금.”

“진심이에요.”

“아니, 뭘 또 감사까지야.”

그렇게 대꾸하는 진형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쩐지 이렇게 새삼스러운 감사 인사를 받는 게 멋쩍은지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좋은 과외 선생님.

그런 지칭이 과연 저에게 맞는지 모를 말이었다. 추켜세우는 말에 민망해서 얼굴이 화드득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해율아. 너 수업 다 끝났냐?”

“네? 네.”

진형의 물음에 해율이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아쉽다. 난 이제 교수님 호출이어서 가 봐야 하는데.”

“한창 바쁘실 때잖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럼.”

진형과 해율의 대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경이 고개를 까딱이며, 해율을 향해 말했다.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아.”

해율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올곧은 시선으로 해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의 제 머릿속을 그대로 내보이는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해율이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집까지 금방이에요.”

“그래도 걸어서 이십 분은 가잖냐. 버스 타기도 애매한 거리고.”

진형이 눈치 없게도 ‘금방’이라고 한 해율의 말을 불식시켰다.

“이제 슬슬 해도 저물고 퇴근 시간까지 겹쳐서 버스는 엄청 붐비겠네요.”

우경이 제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제 차로 모셔다드리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게 하실 거죠?”

선생님.

그가 말미에 그렇게 해율을 부르는 듯했다. 배 속 깊은 곳이 꽉 죄어들었다. 해율이 팔로 제 몸을 감싸며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우경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해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추우신 것 같아서 히터 켰어요. 곧 따듯해질 거예요.”

“감사해요.”

차 내부에는 클래식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클래식 음악만 틀어 주는 전용 채널로 라디오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었다. 클래식을 듣는 취미가 없는 해율은 그런 조용한 피아노 음률이 조금 어색하기만 했다. 고상한 취미를 가지지 못해 듣기 거북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클래식이 조수석에 앉아 엉덩이까지 힘이 들어가 잔뜩 긴장한 자신의 경직된 몸과 상충하는 느낌이 강해서였다.

차라리 시끄러운 댄스 음악이라도 흘렀으면 좀 덜 긴장했을지도 모르는데.

음악조차도 현우경이라는 사람과 얼핏 닮아 있는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미롭게 다가와 온몸을 에워싸는 듯한 부드러움과 어느덧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강렬함.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날씨였지만 밤은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해율이 어색하게 몸을 움츠리자, 그녀가 추위를 탄다고 생각해서인지 우경이 히터 온도를 높였다. 후끈거리는 공기에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차는 고속 도로를 조용히 질주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해율의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해율이 일전에 불러 주었던 편의점 주소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더러운 빌라촌을 보이기 싫었던 해율의 비루한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차는 전에 해율을 내려 줬던 편의점을 지나쳤다. 어? 하고 해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에 차가 멈춰 섰다.

“잠시만요.”

그가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차에서 내렸다. 해율은 고개를 운전석 쪽으로 빼꼼히 내밀었다. 차창 밖에 표시된 낡은 상가 건물의 하얀색 간판에는 ‘약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다시 액셀을 밟아 차를 구석진 골목으로 돌렸다.

샛노란 가로등 하나가 보닛 위를 비추며 내부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있으세요?”

차가 멈춰 서자 해율이 새까만 눈동자를 그를 향해 옮기곤 다소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약국에서 무슨 약을 산 걸까.

“아뇨.”

우경이 고개를 돌렸다. 해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팔 줘 보세요.”

“네?”

“여기, 이쪽.”

그의 묵직한 저음에 해율이 아, 하고 단발의 음성을 내뱉었다. 그가 가리킨 쪽의 팔을 올렸다. 그 순간.

“아!”

찌릿한 감각이 손목 안쪽에서부터 내달렸다. 왜 이렇게 아픈 건가 싶어서 다시 팔목을 보니, 푸르죽죽하게 조금 부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 때문에 어두운 내부에서도 그 선명한 색깔이 더욱 눈에 띄었다.

“팔, 줄 수 있어요?”

그의 목소리에 언뜻 날카롭게 벼린 예기가 서렸다. 우경이 약국 이름이 쓰여 있는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파스였다.

“제가 할게요.”

그가 산 게 파스였구나. 해율이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팔을 내밀었다. 파스를 저에게 달라는 뜻이었지만, 우경은 해율의 요구를 산뜻하게 무시하고 그녀의 팔꿈치로 이어지는 하완을 살짝 부여잡았다. 통증이 어린 손목을 좀 더 유심히 살피려는 동작이었다.

“……많이 부었어요.”

“별로 아프진 않, ……아!”

해율의 담담한 말과 동시에 그가 살며시 막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부근을 그러쥐었다. 기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동작이었음에도 해율이 통증을 호소하며 눈을 찡그렸다.

“이래도요?”

“흣…….”

그의 커다란 손안에 잡힌 손목이 유독 더 가늘어 보여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해율이 눈을 들어 우경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 불쾌한 것을 상기하며 참아 내듯.

“아까 그 사람, 친해요?”

“네?”

“선생님 여기 이렇게 만든 사람.”

우경의 읊조리는 듯한 낮은 말에 해율이 오형욱을 떠올렸다. 억세게 잡아채던 그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이렇게 상처까지 입은 해율이었지만,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형욱과의 친분은 이렇다 할 게 전혀 없었기에 사실을 말했다.

“전혀요. 그냥, 같은 과 동기예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네?”

해율의 되물음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습관처럼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니, 친하다고 했으면 엄청나게 화가 났을 것 같아서요.”

“……저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요.”

“네? 아.”

아하하.

해율의 뾰로통한 말에 그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팽팽하게 긴장감 서려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하지만 해율은 그가 말한 의미가 이게 아니었던 건가 하는 마음에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오형욱이 무례한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당연히 그도 느꼈을 것이었다. 그는 우경이 맘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은 과격한 종자였다.

“그럼 저는 어떻게 보여요?”

“…….”

우경이 가느다란 호선을 입에 걸치며 팔 안쪽의 여린 부근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웃음이 언제 터졌냐는 듯 다시금 돌변한 분위기 탓에 해율의 등줄기가 빳빳해졌다.

그리고 그가 닿은 부근에서 시작된 저릿한 감각이 금세 머리끝까지 내달렸다. 오소소 소름이 일 정도로 오싹했다.

해율이 잠시 움칠거리자 그가 돌연 얼굴을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손목 언저리의 푸른 멍이 든 곳에 입술을 눌렀다.

“흣.”

해율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우경은 해율을 뚫어질 듯 응시하며 촉, 하고 소리를 내어 손목에 키스했다. 야릇한 접촉에 해율이 또다시 아랫배를 꽉 죄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농밀하게 달아올랐다. 밀폐된 차내의 공기가 해율의 온몸을 꽉 짓누르는 듯한 감각으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음? 선생님, 저는요.”

“……우경 씨는…….”

해율이 입을 달싹였다.

자신의 첫사랑. 그 언젠가의 장난기 어린 소년의 모습에서 어느덧 밀도 높은 부드러움을 몸에 두르게 된 남자. 웃음 한 번만으로 자신의 가슴을 멈추게 만드는 남자. 해율에게 쾌락을 알려 준 남자. 그리고, 해율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기분 좋은 행위라면, 만난 지 다섯 번도 안 된 낯선 여자와도 쉽게 행할 수 있는 남자.

그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글쎄요. 아직 어떻게 보인다고 할 정도로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해율이 그 많은 말들을 숨긴 채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 꽤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다.”

우경의 입꼬리가 깊게 팼다.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선생님조차 이제까지 제대로 본 적 없는 깊은 부분까지 전 닿았잖아요. 이 정도면 꽤 잘 아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경이 작게 말을 이었다. 해율은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입술을 손목에서부터 움푹 팬 팔오금까지 쭉 미끄러트렸다.

“아!”

오싹오싹한 전율이 정수리에서 등까지 내달렸다. 부드럽고 여린 살을 입술로 감쳐물 듯이 움직인 남자가 커다란 상체를 움직였다.

“아흡.”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해율이 숨을 멈췄다. 미지근한 온도의 살이 물컹하게 짓눌러 왔다. 절로 입술이 벌어졌고 그 틈을 축축한 살덩이가 가볍게 파고들었다. 질척하고 끈적한 입맞춤이 그대로 이어졌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해율의 입 안에 고여 있는 타액을 혀끝으로 살살 돌리며 빨아 댔다. 마치 갈급증에 목이 마른 사람처럼 그 행동은 조금씩 더 거칠어져 갔다.

“흐읍. 으응.”

목에서 비음이 터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세 그가 가르쳐 주었던 것을 상기해 냈다. 코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열심히 반복하며 가슴팍을 잘게 들썩이자 문득 그가 귀엽다는 듯 설핏 목구멍으로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피식 샌 숨이 입 안으로 들어와서, 깜짝 놀란 해율의 몸이 튀었다.

“하아…….”

맞붙었던 입술이 달라붙었다가, 살을 늘어트리며 춥,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겨우 떨어졌다.

눈을 깜빡거리며 뜨자 시선이 마주쳤다.

“가르쳐 준 대로 잘했어요? 숨 쉬는 거.”

나직하게 읊조린 말에 해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우경이 어딘가 허탈한 듯, 혹은 미처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금 헛웃음을 치더니 참지 못하고 해율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쪽, 쪽. 얕게 물장구치는 듯한 소리가 차 내부에 울려 퍼졌다.

간지러웠다. 입술도 그렇고 그가 잡고 있는 팔도 그렇고.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간지러웠다. 특히 심장 부근은 간지럽다 못해 뻐근했다. 차라리 그가 가슴을 세차게 빨아 주는 것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어쩔 줄 몰랐다.

“나 오늘 왜 학교에 왔는지 혹시 눈치챘어요?”

“네? 아까 진형 선배 만나러 왔다고 했잖아요.”

“전혀 눈치 못 챘네요.”

뭘요?

그의 숨이 가까워 해율은 입술로만 그렇게 물었다.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어서 왔어요.”

“……!”

쿵.

간지러움에 괴롭기까지 하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까지 떨어졌다. 우경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해율의 심장이 요동을 쳐 댔다.

“이렇게.”

“…….”

“이렇게 젖은 얼굴을 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약간 미칠 것 같기까지 하던데요.”

“아.”

해율이 설핏 입을 열었다. 그 뜻이었구나.

“선생님은 어땠어요. 나 보고 싶었어요?”

야릇한 목소리는 해율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담고 있었다. 해율 또한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말하는 것은 정서적인 그리움이 아니었다. 육체적이고 즉각적인 그 무엇을 뜻하는 말이리라. 해율은 내심 그의 말에 기대를 품었던 자신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우경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아까까지 그와 나누었던 쾌감을 상기하며 아래를 적시던 게 생각나서였다. 비단 자신도 플라토닉하고 고결한 무언가를 위해서는 아니지 않았던가.

해율은 이제야 깨달았다.

10대 그 시절 그를 보며 막연하게 품어 왔던 순수했던 마음은 이제는 조금 그 결을 달리했음을. 그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단순한 육체적인 쾌감을 자신 또한 원하고 있음을. 순수하지만은 않은 감정의 발현에 해율은 조금 생경함을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네. 저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

해율이 귓불을 발갛게 물들이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그러자 우경은 마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동공을 조금 크게 키웠다.

“진짜. 사람 정말…….”

문득 그가 그렇게 읊조린 듯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거센 동작이었다. 해율이 시트에 등을 털썩 기댈 정도로 강하게 들이쳤다. 우경은 숫제 상체가 조수석까지 넘어올 정도로 깊게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아!”

티셔츠 아랫자락을 헤치며 손가락으로 살결을 어루만졌다. 외기에 닿은 얇은 배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입이 그의 것으로 가로막혀, 해율은 그저 혀를 받아 내기에 급급했다.

투둑. 지익. 청바지의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이 속옷을 헤치고 안으로 불쑥 침범했다.

제일 긴 손가락인 중지가 얇은 음모를 살며시 쓰다듬다가 더욱 아래로 내려왔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틈새를 음미하듯 손끝으로 쓰다듬던 우경의 손가락이 좀 더 깊숙이 침범했다.

으응! 하고 목구멍에서 비음을 삼켰다. 혀가 입 안의 점막을 헤집었다. 마치, 아래도 이렇게 하고 싶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음란한 혀 놀림이었다. 해율의 몸이 쾌락에 젖어 갔다. 음부에서는 애액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들이닥친 성적인 긴장감에 좁게 조여든 구멍 사이로 천천히 손가락이 들어왔다. 내벽을 살며시 긁어 대며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질구까지 만져 댈 기세였다.

“아응! 아!”

“여기가 얼마나 좁고 부드러운지 알고 있어요?”

“무슨, 흐읏!”

“보지 너무 좁아요.”

하.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지금 이렇게 손가락 하나 먹기도 빠듯한데, 내 자지는 어떻게 먹었을까.”

우경의 손가락은 치밀하게 움직였다. 단순히 아래를 넓히고 풀어 주기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집요한 사냥꾼처럼 해율이 흥분하는 지점을 찾아서 낚아챘다. 어느 한 곳을 스치자 해율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우경은 그녀의 아래를 빨았던 것과 비슷한 동작으로 해율의 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빨아 댔다. 혀뿌리가 얼얼해질 정도로 세차게 빠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은 음부를 들쑤셨다.

“흣! 으응……!”

미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허벅지 사이가 벌어졌다. 청바지는 이미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무리 차 안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 지나갈지도 모를 후미진 골목에서 이런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도 잠시, 내벽을 흔들어 대는 손짓에 해율의 몸은 착실하게 흠뻑 젖어 갔다.

“여기 동시에 자극하는 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하으읏, 아, 아니……!”

“진작에 해 줄 걸 그랬어요.”

손가락을 하나 더 내벽에 꽂은 우경이 손바닥을 음부에 밀착시켰다. 음핵이 압박된 순간 아찔한 쾌감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가 난잡하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래가 손바닥으로 완전히 감싸인 채 스폿이 자극되고, 거기에 빳빳하게 솟은 클리토리스가 손바닥 안에서 뭉개지기까지 하자,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흥분이 해율을 엄습했다.

코로 숨을 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배 속이 끓어올랐다. 무언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해율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우경이 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해방이 아니었다. 해율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에 의해 쾌감에 잠식되어 가는, 미칠 듯이 음란하고 야한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이제껏 그의 입 안에 가로막혀 있던 신음이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해율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근 물었지만, 우경이 다시금 혀로 살살 아랫입술을 핥는 통에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구 흔들리며 젖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우경의 얼굴이 망막에 비쳤다. 우경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는 만족감과 소유욕이 점철된 얼굴을 뒤로 숨기고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해율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그를 처음 만났던 때의 그 소년처럼.

반면 우경의 손짓은 더욱 속도를 올렸다. 손바닥을 철썩 붙인 채로 눌렀다가 앞뒤로 문지르며 절묘하게 음핵을 애무했다. 손가락이 박힌 상태에서 넓은 면적으로 자극당하는 통에 해율이 이 쾌감으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 너무 예뻐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 해율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흐읏! 아, 잠, 안, 안 돼요, 이, 이상……!”

“괜찮아요. 하아……. 가도 돼요.”

“안, 흐읏……!”

“다 적셔도 되니까.”

문득 요의가 몰려왔다. 아랫배가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해율이 울먹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손가락을 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자 우경이 단호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싸.

강한 어조였다.

“아, 아아……!”

그 순간 무언가가 툭 끊기듯, 안에서 끓던 것이 이내 터졌다. 해율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고개를 젖혔다. 내벽을 질척하게 적시던 애액이 물줄기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푸슛 소리를 내며 치솟는 게 보였지만, 해율은 그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엄청난 전율이었다. 머리카락 끝까지 활짝 펴질 정도였다. 전신의 솜털이 일어날 정도로 극치의 절정이었다.

차 내부와 옷이 젖을 것이라는 걱정도 잠시, 우경이 좀 더 강하게 손가락을 빼냈다가 쑤셔 올렸다. 두어 번 손가락을 처박는 박자에 맞춰서 액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으응……! 아흣……!”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됐다. 작은 입이 헤벌어져서 입가에 타액이 고였다. 그 모습을 우경이 오롯이 눈에 담았다.

터져 나오는 액체를 보며 우경이 입맛을 다셨다. 갈증이 일어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눈빛은 집요하기만 했다.

“하아, 하아…….”

해율이 격하게 가슴을 들썩거렸다.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아직도 질구에는 그의 손가락이 박힌 채였다. 우경이 장난스레 진심인 듯 말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흐윽, 이제, 이제 빼 줘요.”

“빼 줬으면 좋겠어요?”

“네, 당연, 히……. 흣!”

“보지가 꽉 조여서 안 놓아주길래 계속 쑤셔 주길 바라는 줄 알았어요.”

더 이상의 이물감은 없었다. 절정이 지나간 여파로 온몸의 감각이 잔뜩 곤두세워져,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가 벌름거렸다.

“아응……!”

쿨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왈칵, 안에 고여 있던 애액이 쏟아졌다. 그 탓에 분출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려 자동차 시트 위를 축축하게 적셨다. 다행히 속옷과 하의가 무릎까지 내려가 있는 덕에 옷이 젖을 일은 없었지만, 차는 엉망이었다. 해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민망할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해율이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해요. 여기 전부 다 젖어서……. 세, 세차비 드릴게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목까지 불타는 것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우경은 자신의 차가 어떻게 되든 말든 해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더듬거리는 작은 입과, 동그란 콧방울, 오뚝하게 솟은 코, 쾌감의 잔열이 남아 눈물이 어룽져 있는 눈꼬리까지 샅샅이 훑었다.

“괜찮아요. 그런 것보다 앞으로 제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따로 있는데요.”

“……네?”

“조수석 볼 때마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아서요. 운전하다 사고라도 내면 큰일인데, 싶은 거요.”

“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해율이 후다닥 눈을 피하며 이거 티슈 좀 쓸게요, 하며 도어 트림 쪽에 꽂혀 있던 티슈를 빼내었다. 그러고는 그가 무어라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조수석 위를 얼른 닦아 냈다. 가죽 시트라서 시트 안쪽에 스며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의 아래를 추슬렀다. 바지 지퍼까지 올려 아래를 가리자마자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모로 돌려 그의 눈길을 피했다.

아랫배가 아직까지 흔들리는 느낌에 팔꿈치를 제 손으로 꽉 잡았다. 동시에, 해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열려 버린 몸이 받아들인 쾌락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고 있음을. 그가 주는 육체적 쾌락에 익숙해져 가고 있음을. 그래서 더욱 현재 자신의 처지와의 괴리가 지독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해율은 입을 열었다.

“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뭐죠?”

해율이 다시금 우경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를 향해 우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설핏 낮아진 목소리에는 아까와 같은 열락 어린 음성을 밀어내고 차가운 의아함이 들어찼다.

“이제 이런 짓 안 했으면 좋겠어요.”

말하는 어미가 조금 떨렸다. 자존심을 굽히고 솔직하게 털어놓아야만 했다. 어차피 자신의 상황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고, 거짓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애써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짓?”

“저는 사실 이럴 여유가 없어요. 저 혼자 생활하기도 빠듯해요. 그래서 우경 씨랑 이런……,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것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해율은 말을 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과외는 원래대로 진행했으면 해요.”

“음?”

해율이 어렵게 입을 떼어 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과외 시간은 과외 시간대로 지키고 싶어요. ……이미 보수를 받았고…….”

“그래요? 그럼.”

우경이 그렇게 되물음과 동시에 해율의 손목을 살짝 쓰다듬어 왔다. 해율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안광이 해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그 여유는 언제, 어떻게 생기나요?”

“…….”

여유라. 빚이 언제쯤 없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상 보수가 높다고는 해도, 나중을 생각한다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과외 시간 외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찾는 것이 맞았다. 지금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몸뿐인 관계만을 위해서 이렇게 정신 놓고 있어야 하는지 해율은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단호하게 다잡아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가 만약 진심이라며, 만약 그와 사랑하는 관계라도 된다면.

그렇다면…….

해율은 이에 따르는 물음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나한테 진심 아니잖아요.’

그런 해율을 보던 우경이 해율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해율이 흠칫 몸을 떨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내달렸다.

아…….

“저는 선생님이 좋아요.”

여유가 언제 생길지 모른다는 해율의 대답에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해율의 눈이 커졌다.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욕심이 나요. 자꾸만 놓치기 싫어져요.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지 지금 사실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바쁘게 머리 굴리고 있다고요.”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치는 우경을 보며 해율이 말을 잃었다.

그는 해율에게 관심이 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품어 왔던 마음과 결이 다를 터였지만, 명백하게 호기심을 표하고 있었다.

“제가 싫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싫지 않아요.”

아니. 좋아해요, 오히려.

엄청 예전부터 쭈욱.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뱉어 내지 못한 말은 침묵으로 감쌌다. 우경이 그 말을 듣더니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과외는 계속한다고 하셨으니, 그때까지만……. 조금 더 시간을 주고 만나 보는 걸로. 어때요?”

“…….”

적극적이면서도 한시적인 만남을 제안하는 우경의 말을 들으며 해율은 고민했다. 현실과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던 해율의 마음이 기울어진 건 충동적이었다.

“알겠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우경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살살 녹아내리는 듯한 음성을 뱉었다. 귓가가 저릿해졌다.

“……다만.”

속삭임에 가까운 물음에 해율이 자신의 요구를 드러냈다.

“대신에…… 이런, 이런 만남은 다른 날 했으면 좋겠어요.”

“…….”

“과외 하는 날 말고, 다른 날요.”

“과외 하는 수요일 말고 다른 날 만나고 싶다는 뜻이에요?”

“네.”

“즉, 섹스하는 날을 만들자는 거죠. 제 말이 맞아요?”

“……네.”

노골적인 표현에 해율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괜찮다면요.”

해율의 말에 우경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너무 제멋대로인 요구였나. 섹스하는 날을 따로 정하자는 말이. 하지만, 이렇게 그도 자신의 몸에 욕구를 보이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음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진형이 소개해 준 과외 일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해율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당하게 보수를 받고 일을 해내며, 욕구와 일을 별개로 분리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마치 그 돈이, 300만 원이라는 돈이 우경과의 관계를 사는 것으로 전락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우경이 선뜻 말을 이었다.

“만나는 장소는 제가 정할게요. 그리고 요일은, 선생님이 정하는 걸로.”

“알겠어요.”

“그리고.”

우경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짙은 체취가 콧속으로 훅 들이쳤다. 또다시 배 속이 간지러웠다.

“그런 날은 선생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게요. 그래도 되죠?”

“당연히…….”

“해율 씨.”

“…….”

“오늘은 ‘그런’ 날에 포함되는 거니까요.”

해율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가 입술을 맞물려 왔다. 침입자를 반기듯 이제는 부드럽게 벌어지는 입술 틈새로 우경이 혀를 밀어 넣었다. 점막을 핥고 치열을 쓰다듬자 어색해하면서도 우경의 애무에 반응해 왔다. 어색하게 우경의 혀를 할짝거리는 동작이 마치 사람의 손길을 타기 시작한 고양이 같았다. 우경이 목구멍을 거칠게 긁는 소리를 냈다.

어, 야! 편의점 어디 있냐?

몰라. 이쪽일걸? 와, 씨. 여기 왜 이렇게 어두워.

그때였다. 차 바깥에서 누군가가 수런거리는 대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남자와 여자가 시끄럽게 한마디씩 주고받는 소리였다. 그에 깜짝 놀란 해율이 몸을 화들짝 떼어 냈다. 우경이 작게 혀를 찼지만 해율은 바깥에 신경이 쏠려 알지 못했다.

“저,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알겠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해율 씨.”

“네?”

부산스럽게 차 문을 막 열려고 하던 해율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름을 불린 것이…… 처음이었다.

“들어가면 연락해요.”

해율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운전 조심하시고요.”

해율은 조곤조곤 말하며 차 문을 닫았다. 해율이 두어 걸음 옮겨도 그의 차는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집까지 걸어서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해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잰 발걸음을 재촉하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허벅지 안쪽의 찌릿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 * *

“……하.”

해율의 새까만 머리가 골목 어귀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경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까지도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초연한 척해도 조금만 흔들면 속 안의 여린 부분이 툭툭 튀어나왔다.

귀엽게도. 사랑스럽게도.

우경이 시트 위로 등을 길게 기댔다. 목을 뒤로 젖히며 짙은 숨을 터뜨렸다. 눈동자만 내려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두워서 해율의 눈에 보이지 않은 부근은 빠듯하게 부풀어 있어, 금방이라도 정장 바지를 뚫을 것처럼 일어서 있었다.

“좆 터지는 줄 알았네.”

상스럽게 지껄인 우경이 간단한 손동작으로 버클을 풀었다.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발기한 성기가 흉흉하게 퉁 튀어나왔다.

“아, 씹…….”

우경이 욕설을 짓씹으며 자신의 성기를 크게 훑었다. 이미 성기는 손도 대지 않고 분출해 버린 정액으로 인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손바닥을 쫙 편 제 손을 들여다봤다. 아직도 끈적한 액체가 마르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해율의 애액이었다. 분비물이 질척하게 묻은 중지와 검지를 입가로 가져갔다. 시큼하고 달큼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그녀의 부드럽고 촉촉한 내벽을 쓰다듬던 감각을 상기하며 그것마저 게걸스럽게 핥아 댔다.

마치 질 내벽을 무자비하게 헤집는 것처럼 우경이 눈을 감고 타액을 묻혀 가며, 손가락 끝까지 삼켰다가 뱉어 가며 그녀의 맛을 음미했다. 동시에 아래를 훑던 손놀림에 힘을 더했다.

“후.”

흥분에 찬 단발의 한숨을 내쉰 우경이 혀를 내밀어 손바닥을 핥았다.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귀두에서 분비된 프리컴이 기둥에 잔뜩 발라지며 손바닥의 마찰로 인해 젖은 소리가 울렸다.

유순해 보이는 얼굴은 흥분할 때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요염함을 더했다. 그게 남자를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해율은 입으로는 딱딱하고 차가운 말을 뱉었다.

사람 돌아 버리게.

우경이 혀로 샅샅이 핥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성기를 덮었다. 그리고 질금질금 새어 나오는 요도를 엄지로 자극하며 귀두를 둥글게 비볐다.

자위는 애초에 우경이 즐기는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위 횟수가 나날이 늘어 갔다. 해율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아래에 뻐근하게 피가 몰려왔다.

우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두텁고 단단한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가슴이 크게 부풀며 셔츠가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눈을 옆으로 돌렸다. 해율이 싸지른 애액이 시트 위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벌린 채 자신이 주는 쾌감으로 끙끙 신음하던 사랑스러운 모습을 혼몽한 시야 속에 담으며 빠르게 성기를 훑었다.

당장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좁디좁은 깊숙한 배 속에 자지를 박아 넣고 욕심껏 흔들고 싶은 흉포한 마음이 일었다. 아까 겨우 참아 낸 자신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진심으로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목구멍에서 그르릉 하는 거친 소리가 울렸다.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여린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 납작하고 하얀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정액을 쏟아 넣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니.

우경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갔다. 차라리 내가 미치고 말지.

속으로 그런 험악한 생각을 함과 동시에 허리를 들썩였다. 용두질을 하며 흉측하게 일어선 성기에 극치의 쾌감을 안겨 줄 그곳에 처박는 것처럼 난잡하게 허리를 튕겼다.

커다란 차체가 조금 흔들렸지만, 어차피 인적이 드문 지저분한 골목 어귀를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누군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지금 우경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흥분이 정수리 끝까지 치달았다. 지금 해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라도 한다면, 아니 그녀의 단정함이 묻어나는 향긋한 내음을 맡을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정액을 싸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곤조곤하게 당돌한 요구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욕망은 숨기려 드는 앙큼한 그녀의 귓불을 까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고 싶은 흉포한 욕구도 일었다.

그녀의 입 안에 고인 다디단 타액을 빨아먹고 싶었다. 그녀가 배 속에 숨긴 달콤한 애액을 남김없이 핥고 싶었다.

해율의 안에 들어갔던 손가락으로 귀두 끄트머리를 긁었다. 흥분한 해율이 흘린 야릇한 냄새가 우경의 콧속을 후벼 파듯 들이쳤다.

“크흣!”

우경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지독한 사정감이 그를 지배했다. 벌름거리는 요도구에서 희끗한 정액이 사출됐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손바닥 위를 흥건히 적셨다. 단단한 허벅지에 힘을 주고 허리를 부르르 털자 그 박자에 맞춰서 비릿한 정액이 성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미처 다 막지 못한 액체 방울이 자동차의 핸들과 가죽 시트 여기저기에 튀었다.

“……하.”

우경이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질펀하게 싸지른 정액의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떠돌았다. 우경은 일절 아랑곳하지 않고 대충 티슈를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훑어 냈다.

격하게 들썩이던 가슴팍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젖히던 우경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여유라.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깨끗한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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