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해율아, 어디야?]
캠퍼스 안을 가로지르던 해율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간단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해율이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연이어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늘 약속 안 잊었지?]
[지금 경영관 쪽으로 가고 있어]
[오늘 날씨 좋은데 점심 먹고 드라이브하러 갈까? 뒤에 있는 강의 째고]
오형욱과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해율은 그제야 그 약속을 상기해 냈다. 지치고 피곤해서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지만 오형욱은 잊지 않고 연락을 해 왔다.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샜다.
‘아냐. 점심 한 끼 먹는 건데 뭐.’
오형욱이 표해 오는 친근함의 종류는 무엇일까. 이성에 대한 성적 호감, 분명히 그것일 터였다. 해율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뭇 사람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관심이었다. 차라리 그때 점심 약속 따위 하지 말 걸 싶었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차라리 오형욱에게 딱 잘라 말하는 게 나을 터였지만, 과연 친구 혹은 동기로서의 호감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의 호감인지 약간 헷갈리는 구석도 있었기에 해율은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약속을 당일에 파투 내는 것은 해율의 성격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경영관 앞에서 기다릴게.]
해율이 메시지에 답을 하자마자 오형욱이 득달같이 답장을 보내왔다.
[일 분 뒤 도착!]
오형욱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시지였다. 해율은 가방끈을 고쳐 매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기해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진형이 그녀를 향해 설렁설렁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배, 오늘은 또 어쩐 일이에요?”
“야아, 인사보다 그게 더 먼저냐? 기해율, 이 얼음 인간, 진짜 알아줘야 한다니까. 너 별명 엘사였던 거 너만 모르지. 으휴.”
장난이 섞인 실없는 타박에 해율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난 수업 한 개만 듣는데도 왜 이렇게 빡센지 모르겠다. 넌 수업 끝난 거야?”
“네, 지금요.”
“그래? 흠.”
진형이 잠시 목을 울리더니 이내 씩 웃었다.
“그럼 점심 먹을래?”
“죄송해요. 저 점심 약속 있어요.”
“어?”
해율의 말에 진형이 그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웬 약속? 너 점심 약속 잘 안 잡잖아. 누구랑?”
“아, 그게…….”
해율이 막 입을 떼려던 때였다.
빵빵-!
클랙슨 소리가 캠퍼스에 울리며 학생들의 시선이 가운데로 모였다.
“해율아, 여기! 어서 타!”
커다란 소리로 해율을 부른 오형욱이 운전석에서 팔을 창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해율과 진형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동기랑요. 저 가 볼게요.”
“뭐? 아니, 잠깐만 기해율.”
“네?”
해율이 막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진형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진형을 바라보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약간 곤란한 표정을 하고는 손바닥으로 하관을 감쌌다.
“너, 그…….”
“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진형을 향해 해율이 되물었다.
“너 과외, 아니. 현우경…….”
“해율아! 여기 오래 정차 못 한다. 얼른 와!”
“아.”
오형욱의 외침에 진형의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해율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진형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계속해서 시끄럽게 구는 오형욱 때문에 자꾸만 몰려드는 주변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다음에 얘기해요, 선배.”
“엇, 야.”
해율은 잰걸음으로 오형욱의 차가 있는 쪽으로 가서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오형욱은 자신이 예약한 레스토랑이 얼마나 유명하며, 또 어떤 연예인이 다녀갔는지를 연신 신나서 떠들어 댔다.
차가 경영관 앞을 빠르게 지나칠 때까지 진형은 해율이 탄 차의 후미를 가느다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점심을 먹는 한 시간 내내 해율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오형욱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랑과 앞으로 미래 계획 등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해율은 적당한 말로 응수하거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화가 안 될 것 같아 코스 요리의 절반도 먹지 못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얻어먹고 싶지는 않았던 해율은 음식 가격에 기함하고 말았다. 월세를 내고 남은 약 200만 원 남짓의 잔고가 있는 게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해율이 고민할 틈도 없이 오형욱은 자신이 먼저 계산을 해 버렸다. 어쩐지 빚을 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서 다음에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했더니 오형욱이 어깨를 들썩이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나 수업은 못 째.”
“어? 어어, 알겠어. 드라이브는 네가 밥 쏠 때 가자. 느긋하게 저녁 먹자, 그때는.”
“나 저녁은 안 돼. 드라이브도 못 갈 것 같아.”
해율이 그렇게 읊자 오형욱이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래? 그럼 너 시간 될 때…….”
“아니.”
“어?”
해율의 단호한 말에 오형욱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오늘은 내가 의도치 않게 얻어먹게 돼서 미안해서 그런데, 나 시간은 못 낼 것 같아. 학교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바빠서 그래.”
차가운 거절의 말에 운전대를 잡은 오형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형형색색으로 바뀌었다. 약간 씩씩대는 숨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금세 차 안이 고요해졌다.
학교 앞까지 도착했을 때 오형욱이 차를 끼익 세우며 약간 분기가 어린 말투로 해율을 향해 말했다.
“야, 내가 뭐 너랑 뭐라도 하재? 그냥 밥 한 번 먹고 드라이브 가자는 거잖아. 에이씨, 됐다. 들어가라.”
“……오늘 밥 잘 먹었어. 고마워.”
해율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쾅! 하고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해율이 약간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보니 이내 오형욱은 부웅- 소리가 나도록 시꺼먼 연기를 흘리며 저 멀리 도로로 격하게 내달렸다.
심신이 피로하고 노곤했다. 하지만 오형욱 때문이 아니었다.
일주일은 금세 지나갔다.
오늘은 다시금 찾아온 수요일이었다. 해율이 입술을 사리물며 자신의 아랫배를 한 팔로 감싸듯 꽉 끌어안았다. 벌써 배 속이 근질거렸다. 발끝이 곱아들 정도로, 미친 듯이.
* * *
“실례합니다.”
해율이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을 향해 그렇게 읊조리며 대문을 열었다. 오늘로 세 번째 과외였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풀 향기가 쌉싸름했다. 해율은 저도 모르게 가방끈을 꽉 쥐었다. 오늘따라 유독 사위가 고요했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토록 긴장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사박사박. 발아래 풀이 짓이겨지는 소리조차 선연히 들릴 정도로 온 감각이 일어서 있었다.
‘아직 일곱 번이나 남았어.’
우경의 존재는 해율을 자꾸만 비이성적으로 만들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을 툭툭 건드리듯 일깨웠다. 고단하지만 평온했던 일상이 이제는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해율은 열려 있는 현관문으로 들어서며 실내화를 갈아 신었다.
거실까지 걸어가자 컴컴한 실내가 해율을 맞이했다. 오늘은 도우미 아주머니도 안 계신 듯했다. 주방 쪽 조명이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나.’
저번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 저택은 그 크기에 비해서 인적이 유독 적었다. 우경의 부모님은 크게 사업을 하는 분이라고 했다.
같이 사는 게 아닌 건가. 해율은 새삼 떠오른 의문을 속으로 삼켰다. 우경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현우경은 어디에 있는 거지.’
싸한 공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첫 번째 수업에서 우경은 현관문까지 해율을 마중 나왔었다.
방에 있나?
해율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오셨네요, 선생님.”
정수리 위에서 들린 저음에 해율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는 신체 반응에 해율이 계단 손잡이를 꽉 그러쥐었다. 비단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2층 계단 끝에 선 그는 벽에 기대서서 고개를 기울인 채 팔짱을 낀 채로 해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그런 건지, 어쩐지 그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제껏 해율을 대하던 느긋하고 사근사근한 평소 우경의 태도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
우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그녀가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걸음 하나하나, 그에 따른 호흡마저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지긋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해율이 2층에 다다르자 우경이 몸을 돌리더니 앞장서 걸었다. 걸음을 할 때마다 우경의 어깨가 성이 난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탄탄하게 단련이 된 근육이 저마다 제 의지를 갖고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다. 우경의 옷차림은 이제까지와는 또 달랐다. 그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니트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경은 말이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방 안에 먼저 들어선 우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자꾸만 목이 탔다. 깔깔하게 잠기는 목구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슴이 심하게 펄떡였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방 안에 감돌았다. 해율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손을 올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칼이 공중에서 출렁였다.
나란히 앉은 상태로 해율이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가방 안에서 교재를 꺼냈다. 우경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듯 앉아서 해율이 하는 양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잘게 끊어지는 숨이 터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진한 머스크 향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체취였다. 그의 몸에서 나는 내음.
해율의 아랫배가 다시금 꽉 조여들었다. 저번 수업 때 화장실에서 확인했던 아래의 질척한 감각이 다시금 찾아왔다.
‘안 되는데, 왜 자꾸.’
저를 속으로 질책하고 다잡으려 애써 봤자 자꾸만 허물어지는 몸은 그녀의 의지를 코웃음 치듯 계속해서 열기를 더해 갔다.
교재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우경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몸을 굳혔다. 우경이 해율을 침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책상 위에 한쪽 턱을 괸 채 약간 기울어진 눈으로 해율을 응시했다.
‘왜…….’
해율이 입을 달싹이던 때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고막에 직격으로 내리꽂히는 낮은 음성. 곧 그가 짙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제가 옛날부터 감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래요?”
해율은 목이 깔깔함을 느끼며 겨우 되물었다. 우경의 말투는 느긋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편에는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기민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짙게.
“저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나, 반대로 적의를 보이는 사람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요.”
해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 안이 말라 왔다.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우경이 말을 이었다.
“특히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는 더더욱 쉽게 알아채죠.”
“…….”
우경이 해율을 빤히 응시했다. 깊은 눈매에 음영이 져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해율은 침조차 제대로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아주 쉽게요.”
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사선으로 걸린 그 미소를 바라보던 해율이 입을 달싹였다. 그때 우경이 그 입매를 야릇하게 벌리며 말했다.
“젖었죠?”
“……네?”
해율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쿵.
심장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멈췄다. 아니,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전신이 바짝 굳었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못 들으셨어요?”
“…….”
해율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문득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상체를 해율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숙였다.
“보지, 젖었냐고 물었어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난데없이 저급한 언어를 입에 담은 우경에게 화를 낼 새도 없었다. 말을 더듬은 해율의 기분은 황당이나 당황을 넘어서 정곡을 찔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해율의 반응을 관찰하듯 진득한 시선을 보낸 우경이 돌연 눈을 가느다랗게 휘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쉽게 알아챈다고.”
우경의 체취가 짙어졌다. 아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어떻게 몰라요.”
그리고.
“저번처럼 젖은 걸.”
“네? 저번이라니.”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경은 착실히 대답했다.
“저번 수업 때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선생님. 아래가 완전히 흥건하게 푹 젖은 얼굴.”
아.
해율이 덜덜 떨면서 입을 작게 벌렸다. 자꾸만 벌어지려는 무릎에 힘을 주어 간신히 모았다.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느닷없이 지금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내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서 이대로 방을 나서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아도 될 만한 발언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해율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주박에 걸린 사람처럼 그대로 얼어붙은 채, 가녀린 숨만 할딱거렸다. 그 숨에 깃들어 있는 열기를, 우경이 모를 리 없었다.
“선생님이 원하시면.”
그의 묵직한 음성이 배 속을 간질였다.
해율은 조명에 비쳐 뚜렷한 음영이 그려진 우경의 얼굴을 빼곡하게 눈에 담았다. 우경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코끝까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순간적으로 해율이 촉촉하게 젖어 가는 눈을 찡그리듯 반쯤 감았다.
“저번에 빨아 준 것처럼, 똑같이 빨아 드릴 수 있어요.”
해율은 그가 말하는 바를 단번에 이해했다.
그녀의 가슴이 스쳤던 손등을 빨던 그의 모습. 흘러내린 복숭아 과즙을 혀로 핥아 뜨거운 입 안에 넣고 울혈이 생길 정도로 세게 빨아 대던 모습. 전부 그녀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젖어 버린 아래의 감각까지도.
“어때요.”
속삭이는 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해 드려요?”
선생님.
해율은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런 것 바란 적 없다고, 단 한 번도, 그를 향해 그따위 음탕하고 음란한 생각을 한 적 없다고,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런데 머릿속 한편에 자리한 생각과는 다르게 입 안에 단침이 돌았다. 붉은 입술이 설핏 벌어지고 눈꼬리가 발갛게 붉어지며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룽졌다. 한동안 우경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키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그는 해율을 향해 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해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거의 아래로 미세하게 까닥인 수준이었다.
그와 동시에, 우경이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부드럽게 눌러 왔다.
“아…….”
작은 탄성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혼란스러움에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하지만 무어라 생각할 틈도 없이 우경이 입을 벌리더니, 그녀의 입꼬리를 살짝 머금고는 살살 빨았다.
목구멍에서 비음이 샜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술과 숨결을 느꼈다.
‘어떡해. 어떡…….’
“흐읏!”
돌연 가슴이 그의 손안에 쥐어졌다. 티셔츠 위로 올라온 우경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한쪽 가슴을 부드럽지만 강하게 꽉 움켜쥐었다. 그것만으로도 해율의 허리가 무너졌다. 의자 위로 미끄러지기 직전, 우경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무릎 위로 그녀를 앉혔다.
해율은 어찌할 새도 없이 다리를 벌린 채 우경의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됐다. 탄탄하고 굵은 허벅지 탓에 해율의 다리가 가로로 완전히 벌어졌다. 창피함에 약간 버둥거리자, 해율의 허리를 받친 우경의 팔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그에 해율의 가슴이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오게 됐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해율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 좋은 냄새. 그거 알아요? 선생님 몸에서 복숭아 냄새 나는 거.”
“아, 무, 슨……. 흣…….”
“진짠데.”
우경이 그렇게 읊조리더니 해율의 티셔츠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가 닿은 부근이 찌릿찌릿했다. 우경과 이렇게 밀착하게 되다니. 해율은 그야말로 현기증이 밀려와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아…….”
그가 문득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은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와 있었다. 심장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
우경이 살짝 해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젖꼭지 빨고 싶은데, 티셔츠 올려 주실래요?”
부드러운 음성 속에 음란한 언어가 섞여 있었다. 그 간극이 오히려 더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해율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네?”
“우, 우경 씨, 하지만…….”
“어서요, 선생님.”
해율이 망설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듯 눈을 슬쩍 감았다 뜨며, 마치 가상의 가슴을 애무하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 선단이 있는 쪽으로 숨결을 내뱉으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그에 해율의 이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야릇한 흥분과 달아오르는 성감에 당장 어떻게든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티셔츠 아랫단을 잡았다. 그리고 살짝 끌어 올렸다.
그가 해율을 올려다봤다.
마치 더 올리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해율은 홀린 듯이 좀 더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그녀의 뽀얗게 올라붙은 한쪽 가슴이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은 속옷에 감싸인 채였다. 민무늬의 아이보리색 속옷은 그 어떤 특징도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성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 탓에 터질 것처럼 압박된 풍만한 여체가 속옷 위로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 아래에 이런 야한 몸뚱이를 가졌다는 것을 해율은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우경의 눈이 순간 음험하게 빛났다.
“잘했어요.”
칭찬의 말과 함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로 티셔츠 잡고 있어요. 젖꼭지 빨기 쉽게.”
말만으로도 앞이 단단해지는 느낌에 해율이 티셔츠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내리더니 이를 세워 속옷 위를 물고는 아래로 스윽 내렸다. 그러자 출렁, 하고 커다란 젖가슴이 밖으로 튀어나오듯 우경의 얼굴 앞에 드러났다. 파란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뽀얗고 투명한 살결이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자리한 살굿빛 유두는 해율의 흥분을 증명하듯 꼿꼿하게 발기해 있었다.
“하, 미친.”
우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곧이어 동시에.
“아, 으응!”
해율이 신음을 터트렸다. 그가 혀를 내밀어 빳빳하게 올라선 유두를 툭 건드린 탓이었다. 작은 동작임에도 가뜩이나 예민하게 일어선 감각 탓에 해율이 허리를 꼬았다.
지금도 이런데 세찬 힘으로 입에 넣고 빨기라도 한다면. 눈앞에 들이닥친 상황임에도 상상을 하자 젖꼭지가 더욱 단단해졌다. 해율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우경도 눈치챘다. 문득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의 기대를 알겠다는 듯, 그리고 그대로 기대에 응하겠다는 듯.
그러고는.
“흐, 아앙!”
옅은 분홍빛의 젖꼭지를 입 안으로 가져가서 한 움큼 집어삼킨 그가 게걸스럽게 해율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터진 신음에 놀란 해율이 아랫입술을 질근 물었다.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세차게 돌기를 빨리는 감각은 해율은 생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결박한 채 한쪽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입술로 물던 그가, 이제 본격적으로 젖꼭지를 탐하기로 결심했는지 손을 들어 젖가슴의 밑단을 받치듯 세게 움켜쥐었다. 남자다운 커다란 크기의 손이 분명한데도 그 안에 다 들어차지 않아 넘치듯 출렁였다.
“아읏, 잠, 까안, 너무, 흐응!”
“응. 왜요. 너무, 좋아요?”
아니, 아니. 해율이 신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마치 해율의 유두를 전부 집어삼켜 버릴 듯이 세차게 빨았다. 입술로 물고 이로 간질이다가,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자신의 입 안에 들어찬 유두를 맘껏 찌르고 희롱했다. 해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강렬한 감각이었다.
“선생님, 그거 알아요? 지금 허리 흔들고 있는 거.”
“흐윽. 아, 아니, 응!”
“아니긴. 더 해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가슴도 내밀면서.”
은근하게 내뱉은 말 또한 뜨겁고 습한 숨결에 섞여 젖꼭지에 자극으로 다가왔다. 춥, 소리가 나도록 질기게 괴롭히던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로 기울이며 재차 세차게 빨았다.
미칠 것 같아.
해율이 몽롱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단지 가슴을 빨린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그 순간, 그가 상스러운 단어를 섞어 가며 빨아 준다던 다른 부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성의 가장 내밀한 그곳. 지금도 찌릿하게 젖어 가고 있는 그곳. 그 상상만으로도 아래에서 왈칵 애액이 터진 것처럼 완전히 젖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경이 말한 대로 허리가 절로 앞뒤로 흔들렸다.
“전에도 빨린 적 있어요?”
그때였다. 음험하게 낮아진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해율이 학학, 하고 밭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렸다.
우경은 해율과는 달리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멀끔한 모습 그대로 빤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거.”
“흣.”
그가 젖가슴을 움켜쥔 채로 검지를 사용해 질척하게 젖어 있는 유두를 가볍게 퉁겼다. 하얀 살결이 진동하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젖꼭지, 전에도 빨린 적 있냐고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의문도 잠시였다. 당연히 없었다. 이제까지는 단 한 번도, 그녀 자신 외의 다른 남성에게 몸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이렇듯 친밀하게 그녀의 몸을 탐한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경이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를 뜯어보듯 살폈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듯, 그렇구나, 하고 부드럽게 읊조렸다.
“제가 처음인 사람한테 너무 세게 했나 봐요. 죄송해요, 선생님.”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말투였지만, 또 반면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는 말투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버거울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큼 흥분도 커다랬다. 해율이 집채만 한 쾌감의 파도가 자신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반대쪽도 빨아 드릴까요?”
그는 마치 배려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음탕하게 혀를 놀리던 방금까지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진짜로 제자가 선생님을 대하듯 예의까지 갖춘 말에 해율은 입술을 사리물며 흥분했다.
해율이 자신의 반대쪽 티셔츠도 천천히 끌어 올렸다. 두 젖가슴 위쪽으로 완전히 올라간 티셔츠 탓에, 그녀의 풍만한 살결이 그의 얼굴 앞에 여실히 드러났다.
“네, 선생님.”
착실하게 대답한 그가 속옷을 휙 끌어 올렸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며 짙은 색을 띠게 된 한쪽 유두와는 다르게, 그 누구의 손길도 타지 않았던, 아까의 유두와 같은 옅은 색의 유두가 드러났다.
몇 번 빨아 줬다고 금세 색이 진하게 변한 음란한 정점은, 해율의 내밀한 곳 깊숙이 숨겨져 있던 어떤 비밀스러운 성적 본능을 나타내는 듯했다.
우경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더니 아까와 같이 순결한 젖꼭지를 입 안으로 가져가더니 거세게 빨기 시작했다.
“아앙! 아, 흐앙!”
해율이 그의 양어깨를 꽉 그러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뒤로 몸이 넘어갈 것 같았다. 허리를 받친 단단한 팔 덕분에 그럴 일은 없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절로 신음이 터졌다. 단정하고 차갑기만 하던 목소리에 비음이 섞이자 외설스러움이 극에 달했다. 해율은 신음을 죽일 정신도 들지 않았다.
우경이 한쪽 손으로는 방금 전까지 빨던 젖꼭지를 잡고 당기고 비틀며 희롱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얼굴을 파묻고 마구 빨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흐응, 기분이, 이상, 흑.”
“선생님, 기분 좋아요? 하. 저도 기뻐요. 선생님이, 좋아해 주셔서.”
그의 말투는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속뜻은 음란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뚫어질 듯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은 마치 그녀 안에 똬리를 튼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것처럼 진득하고 끈질겼다.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끈적한 시선이었다.
하얀색 티셔츠는 가슴 위쪽에서 돌돌 말아져 올라간 상태였고, 남자의, 그것도 우경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해율은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생각할 여유 따위 전혀 없었다. 유두에서 전해지는 질척한 애무가 머릿속을 뭉근하게 짓이겼다.
우경이 혀를 내밀어 유두를 퉁, 튕기다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넣고 살짝 흔들자 그녀의 탱탱한 젖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언제나 단정하고 서늘한 얼굴을 하던 그녀가 쾌락에 젖어 볼을 붉히고 신음하는 모습은 그 간극으로 인해 더욱 외설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으응!”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애액이 쉴 새 없이 왈칵왈칵 쏟아졌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이렇듯 쉽게 반응하는 것을, 해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절로 허리가 활처럼 휘고 가슴을 그의 얼굴 쪽으로 내미는 자세가 됐다. 유두 양쪽이 은은한 빛무리 속에서 윤기가 어려 반질거렸다. 눅눅하게 젖은 가슴 선단은 딱딱하게 서 있으면서도, 젤리처럼 뜨거운 입 안에서 쉽게 뭉개졌다. 그녀의 아래가 뜨겁게 아려 왔다.
그때였다.
“아, 이런.”
“하으, 으……?”
“수업 시간 거의 끝났네요. 두 시간 다 돼 가요, 선생님.”
아.
해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느새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깜빡,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속으로 헉, 소리를 냈다. 그랬다. 해율은 여기에 독일어 과외 수업을 위해 온 것이었다. 당연히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었지만 그에게 가슴을 빨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쾌감에 빠져들었다.
해율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누구의 다리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인지 자각했다. 당황에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우경이 마지막으로 쭙, 하고 유두를 한 번 빨았다.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그녀의 브래지어와 티셔츠를 내려 꼼꼼히 정돈해 준 우경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아…….”
해율이 단발의 음성을 내뱉었다. 자꾸만 다리가 무너지려는 해율이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그를 올려봤다. 우경이 선선한 웃음을 입에 걸친 채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바래다 드릴게요.”
* * *
그녀를 바래다주는 차 안에서 우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까의 뜨겁고 축축하게 둘을 옭아맸던 감각이 거짓말인 것처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얼떨떨한 기분의 해율이 등 뒤에서 그렇게 말하는 우경을 향해 고개를 까딱 숙였다. 고막을 간질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수업에 봬요, 선생님.”
해율은 달싹이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차 문을 닫고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나중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철컥.
원룸 현관문을 닫고는 빠르게 걸어 잠갔다. 헉. 헉. 가슴이 육지에 나온 물고기처럼 마구 펄떡였다.
미쳤어.
미쳤어, 기해율.
앓는 숨을 내쉬면서 해율이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거기서 그렇게……. 아니, 정신이랄 게 있었던가.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성이랄 게 없었다. 온몸이 불타오르듯 뜨거웠고 그의 입이 닿았던 가슴은…….
지끈.
문득 얼얼하게 일어선 가슴 끝이 심하게 아려 왔다. 아니, 좀 더 안쪽 깊숙한 곳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듯 확 조이며 지끈거렸다.
‘……어떡하려고 그래, 진짜.’
아무리 속으로 그렇게 자책하듯 중얼거려 봤자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열감이 해소되지 않아 아직도 질척하게 젖어 가는 음부조차도, 그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 *
‘현우경!’
멀리서 외치는 소리에 그녀가 어깨를 살짝 떨며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놀란 속과는 다르게 새까만 동공만을 굴려 그쪽으로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어, 안녕.’
‘오늘 농구 한판 어때?’
‘좋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 특유의 선선한 웃음을 걸치고는 왁자하게 떠드는 친구들 사이로 걸어가는 우경은 훤칠한 키 덕에 머리통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보였다.
해율은 다시금 복도를 조용히 걸었다. 이렇듯 우경의 이름을 멀리서라도 듣는 게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도 새처럼 파드득 튀었다.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느리게 쿵쿵대는 심장을 애써 무시했다.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급우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해율은 단정하게 앉아 다음 수업 시간의 책을 폈다. 하지만 눈에 한 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현실이 힘들었다. 저 때문에 병들어 앓고 있는 이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할 시간을 쪼깨기 위해서라도, 고작 같은 학교 남자애에게 눈길을 줄 여유는 해율에게 없었다.
얼른 어른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할 생각이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면 허드렛일도 마다치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모는 꼭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언제든 배움의 기회야 오겠지만, 그래도 적기란 것이 있는 거라면서 말이다.
후.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샜다.
현우경.
그 이름을 남몰래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절대로 입 밖에 낼 일이 없는 그 이름을. 그리고 현우경이란 이름 석 자를, 그의 존재를 마음속에서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다.
여름이라서 그런지, 자꾸만 정수리가 뜨거워졌다.
유독 그의 웃음이 더욱 눈부셔 보이는 여름에는, 특히 더 그랬다.
해율은 교실의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교실 안으로 들이치는 햇빛이 너무나 눈이 부셨다. 빛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살짝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