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네.”
해율은 그가 안내하는 대로 2층 계단을 올라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너무나 조용해서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조용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도우미 아주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가족이 아니란 것은 아주머니가 우경과 해율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해 온 탓에 알게 되었다.
“실례합니다.”
작게 그렇게 읊은 해율은 크로스 백의 가방끈을 꽉 그러쥔 채 우경의 방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심장이 쿵, 쿵 불안하게 뛰었다. 우경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널찍한 등에 부러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방에 들어서자 해율은 격하게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청량하면서도 묵직한 머스크 향이 해율에게 어서 오라고 이끄는 듯,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방 안에 가득한 향은 마치 이 자체가 우경의 체취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공간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아, 네.”
해율은 우경의 말에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고 앞으로 걸었다. 은은한 오렌지빛 스탠드 조명만이 책상 위를 밝히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원목 자재를 사용한 책상은 양팔을 뻗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널찍했고, 그 앞에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해율은 크로스 백을 벗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녀를 따라 우경 또한 나란히 붙어 있는 의자에 몸을 내렸다.
거듭 목이 마르고 마른침이 삼켜졌다.
해율은 우경에게로 자꾸만 가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인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앉은 그의 존재가 갑자기 너무나 버겁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우경을 처음 봤던 옥상에서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해율을 맞이한 우경을 보고서 깨달았다. 우경은 해율을 모른다. 아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
같은 학교였지만 언제나 누구에게나 둘러싸인 학교의 유명인이었던 현우경과, 항상 조용히 책을 읽고 공부만 하던 기해율. 단 한 번 옥상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다였을 뿐, 겹치는 친구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했다.
현우경이 기해율을 모르는 것이.
혹여라도 무릎이 닿을세라 해율이 몸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배어 나오는 듯해 꼿꼿한 자세 그대로 허벅지 위로 손을 올린 채였다.
우경이 그런 해율을 보며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성함이 기해율, 이라고 하셨죠?”
“네? 아, 네. 맞아요.”
“진형이 형 후배시라고요.”
“네.”
이어지는 물음에 해율은 그저 단답식으로 대답했다. 어쩐지 머스크 향이 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머리카락을 손에 꼬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느라 허벅지 위에서 제 손을 동그랗게 말아 그러쥐었다.
“진형이 형, 사람 좋죠.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았거든요. 집안끼리도 각별하고 그래서요.”
“그러셨어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건네는 말에 해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우경이 웃음이 조금 섞인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흘리듯 독일어 배워 보고 싶다고 하니까 대뜸, 과외 받을 생각 없냐고 물어봤어요. 독일어 굉장히 잘하고 성실한 후배가 있다면서.”
해율이 허공으로 던지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우경을 바라봤다.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쿵, 내려앉았다.
우경이 기분 좋게 눈을 휘고는 해율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형이 엄청 자랑을 하더라고요. 독일어도 잘하고, 똑똑하고, 차분하고, 인기도 많고. 뭐 그런 말들을요.”
“아…….”
“진형이 형이 거짓말한 건 아니었네요.”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서요. 아, 죄송해요. 이런 얘기 불편하신가요.”
“아, 아닌……. 감사합, 니다.”
해율은 자신의 혀가 마비된 것만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평소에는 잘만 나오던 말들이 자꾸만 굳고 얼어 버렸다. 우경의 앞에서, 완전히 바보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조금 생경한 우경의 모습과도 이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우경은 과거 고등학생일 때의 모습과 같은 듯하면서도 약간 달라져 있었다. 해율과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그는 치기 어린 그 나이 특유의 활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금 차분해진 것도 같고, 느긋해진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갑자기 해율은 자신의 귓바퀴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우경은 편한 면바지에 부드러운 캐시미어 소재의 니트를 걸치고 있었다. 편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탄탄한 몸매는 숨겨지지 않았다. 남성미 넘치고 성숙한 모습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듯, 너무나 당연하게 해율의 시야에 들어왔다. 속절없이 시선을 끄는 우경의 존재는 어쩐지 눈물까지 찔끔 배어 나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해율은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했다.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붉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이 장소에 온 소기의 목적을 애써 상기하며 달싹이던 입을 떼어 냈다.
“독일어는 처음 접하시는 건가요?”
“네. 이제까지 접해 볼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요.”
“그래요?”
해율이 의미 없는 대꾸를 되돌렸다. 그러자 그가 옅게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기회 자체는 충분히 있기야 있었어요. 아마 들으셨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님이 독일 관련 일을 하고 계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흔한 인사말 하나도 제대로 모르니.”
해율이 조용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금살금 응시했다.
“이제부터라도 해 보려고요.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는 진지함과 가벼움 그 어느 사이에 서 있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해율이 그러냐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진형 선배 말로는 열 번 정도 수업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그 정도면 간단한 회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독일어의 기본은 이해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제가 전문 강사가 아니라서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원하시는 방향이 있으시면 맞추도록 할게요.”
해율이 단조롭게 말을 읊자 우경이 책상 위에 얹은 손가락을 잠시 툭 두들기며 까딱였다. 그에 자신의 허벅지 근처로 가져가던 해율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지며 자연스럽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 그렇게 딱딱한 수업 원하지 않아요. 하시던 대로 친구한테 알려 준다는 셈 치고 편안하게 가르쳐 주시면 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과외를 흔쾌히 받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거고요. 오히려 전문 강사는 부담스러워서요.”
“그러시군요.”
해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이제 선생님과 학생이네요.”
부드럽고 낮은 저음이 해율의 귀에 꽂혔다.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를게요.”
“네?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되는데요.”
“그러면 배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거죠. 저는 호칭부터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선생님.”
그렇게 말하며 우경이 웃었다.
해율은 이 방 안의 조명이 밝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우경의 시선이 해율의 이목구비 곳곳에 꽂혔다. 어쩐지 자꾸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명치께가 꽉 조여 왔다. 해율 또한 홀린 듯 우경을 바라봤다.
남성적인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우경의 얼굴선은 투박하지 않고 어느 곳 하나 모난 굴곡 없이 미끈하게 뻗어 있었다. 깊게 팬 눈매는 오묘한 다갈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우뚝 솟은 콧날은 베일 듯이 날카로웠다. 집이라서 그런지 옆으로 살짝 탄 가르마로 흘러내린 머릿결이 그의 굵은 눈썹 위로 흩어져 있었다.
표정에 따라 인상이 휙휙 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게 우경을 일컫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깊은 눈매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지금은 한없이 신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무표정을 지을 때면,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차갑게 보이기도 했다.
미칠 듯이 목이 탔다. 목구멍이 깔깔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알몸을 그대로 내보인 것처럼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원인 모를 열감이 치솟았다. 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해율은 속내를 숨기며 자신의 크로스 백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저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할게요.”
“네. 선생님 편한 대로 해 주세요.”
우경 씨. 들리지 않게 입으로 발음을 굴려 보았다. 어쩐지 혀끝이 간지러웠다.
“교재는 제가 사용하던 것을 가져왔어요. 기본기를 다지는 데는 이게 제일 좋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한 권밖에 없어서 오늘은 같이 봐야 할 것 같아요. 미리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첫 수업 이후에 과외를 취소하실지도 몰라서 말씀 안 드렸어요.”
학생 과외를 하면서도 그랬다. 첫 수업은 시범 수업이나 다름없었다. 즉, 테스트였다. 한 차례 수업한 후 학부모로부터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의 여부를 통보받는 그 순간이 해율은 제일 긴장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소 선을 긋는 듯한 해율의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해율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셨어요? 아. 저는 취소한다는 건 아예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이라도 취소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괜찮…….”
“아뇨. 전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요.”
단호하면서도 나직한 어조에 해율은 그러냐며 단조롭게 응수하고 교재를 폈다. 깨끗하게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음, 독일어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별로 없어서 친숙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런데 배우다 보면 또 의외로 가까이 있었던 언어이기도 하고요.”
“아, 그 가곡도 독일 가곡이었죠. 뭐였더라.”
눈썹을 까딱인 우경이 귀에 익숙한 음률을 낮게 흥얼거렸다.
해율이 그런 우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Ich liebe dich.”
“아, 맞아요. 와, 선생님이 발음하시니까 어쩐지 색다른데요. 이히 리베 디히. 이건 무슨 뜻이에요?”
순수한 궁금증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해율은 어쩐지 입을 떼어 내기가 힘겨웠다.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를 사랑해.”
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말끝을 맺자 우경이 짙게 미소 지었다. 나직하게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교재 보면서 오늘은 가볍게 기본적인 발음부터 공부해 볼게요.”
해율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교재 뒤쪽에 자신이 써 온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열 번 동안의 수업 커리큘럼은 이렇게 짜 봤어요. 혹시 원하시는 방법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셔도 돼요.”
“음, 좋은데요. 저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갈게요.”
“……네. 그래도 혹여나 중간에라도 괜찮으니까 가감 없이 말해 주세요.”
“알겠어요, 선생님.”
해율은 차분하게 수업을 이어 나갔다. 우경은 진지하게 수업에 임했다. 설명에 집중하다 보니 조금 긴장감이 옅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불시에 둘만 있는 지금의 상황을 자꾸 새삼스럽게 인지하게 됐다. 그의 방 안에서 단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현실과의 괴리감이 지독했다.
그리고 동시에.
간헐적으로 숨을 멈추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가 교재를 보기 위해 몸을 숙여 해율이 앉은 쪽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 우경의 방 안에 들어설 때 느꼈던 진한 머스크 향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른한 감각이 들었다. 자꾸만 전신을 감싸는 그의 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입 안의 여린 살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어야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진짜.
눈앞이 자꾸만 어릿해진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독일어의 기본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며 자꾸만 물을 들이켰다.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끝마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두 시간이 꽤 빠른데요.”
시간을 확인한 우경이 웃음 섞인 말을 건넸다.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해율이 주섬주섬 교재와 필기구를 챙겼다.
“그럼 다음 주에도 이 시간에 뵈면 될까요?”
“네. 혹시라도 선생님이 바쁘시면 시간 바꾸셔도 돼요. 제 연락처는 알고 계시죠? 진형이 형이 전달해 줬다고 하던데요.”
“네, 알고 있어요.”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그저 과외 시간을 바꾸거나, 모르는 단어를 묻거나, 그런 일의 필요에 따른 연락을 일컫는 말이겠지. 하지만 해율은 다시금 귓바퀴가 뜨끈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고개를 설핏 끄덕이자, 우경이 책상 옆 서랍을 열고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해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우경이 눈을 호선으로 휘었다.
“과외비요.”
“아.”
그랬다. 왜 그걸 잊고 있었지.
300만 원이라는 거금에 과외를 승낙했던 해율은, 그의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의 빈한한 생활에 대해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상기해 냈다. 이 돈이 없으면 당장 집으로 갈 교통비조차 절절매야 하는 상황인데도.
“감사해요.”
“제가 더 감사하죠. 학기 중에 바쁘실 텐데 과외까지 해 주시고.”
해율은 흰 봉투를 받아 가방 속에 넣으려 했다. 그러자 우경이 작게 미소 섞인 질문을 던졌다.
“저 믿으세요?”
“네?”
해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자, 우경이 짙은 다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말을 이었다.
“금액이 맞는지 세어 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넣으면 어떻게 해요.”
“글쎄요. 맞겠죠.”
“하하. 큰일 났네요, 선생님.”
“뭐, 가요?”
“그렇게 덜컥 남을 믿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
해율은 말을 삼켰다. 처음 본 사이가 아니라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사실 너를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해 봤자 서로 곤란한 상황만 만들어 낼 것이다.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다.
“집에 가서 세어 보고 혹시 만 원이라도 모자라면 진형 선배 통해서 청구할게요.”
“네? 아하하.”
담담히 뱉는 해율의 말에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우경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 기억이 언뜻 떠올랐다. 옥상에서 그가 건조하게 웃던 그때의 기억이.
입을 가리고 시원스럽게 웃어 젖힌 그가 마지막에 ‘미치겠네.’ 하고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숨과 함께 터진 말이라 제대로 들은 것인지 헷갈렸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우경의 말에 해율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해율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디디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밤 10시예요. 위험해서 안 돼요.”
“괜찮아요. 보통 학생들 과외하면 다 이 정도 시간에 끝나요. 오가는 교통편도 미리 확인해 뒀어요.”
“아니요.”
“네?”
우경의 낮은 말에 해율이 뒤를 돌았다.
“제가 불안해서 그래요.”
아.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자동차 실내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분명히…….
“다음에요. 오늘은 혼자 갈게요. 버스 정류장도 여기서 금방이던데요.”
“…….”
우경에게서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해율이 시선을 들자 우경이 턱을 쓸던 손을 내리더니 나긋하게 대꾸했다.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만 바래다 드릴게요. 이건 괜찮죠, 선생님.”
해율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더 이상 거절을 할 만한 이유도 없어서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자 그는 가벼운 차림 그대로 해율의 옆으로 와 걸었다. 들어왔던 정원을 다시 가로질렀다. 철컹, 하고 대문을 닫은 우경이 해율의 옆에 서서 묵묵히 걸음 속도를 맞추었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선연하게 들렸다.
우경이 있는 방향인 오른팔이 간지러웠다. 지금만이 아니었다. 우경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던 아까도 그랬다. 해율은 괜히 자신의 오른팔을 왼손으로 감싸며 말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고급 주택 단지인 이 동네는 가로등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고, 360도를 감시하는 CCTV가 24시간 돌아가고 있었다. 해율이 사는 동네와는 달랐다. 허구한 날 가로등이 깜빡거려 어둡기 짝이 없는 그곳과는 천지 차이였다.
버스 정류장은 걸어서 오 분 거리도 채 되지 않았다.
말없이 도착한 정류장에 어색하게 서 있기도 전에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가 금세 도착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네. 그럼 이만.”
“다음 주에 봬요, 선생님.”
우경이 밖에서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당황했지만 해율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까닥였다.
그 뒤로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버스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의 정류장이 방송으로 나올 때 부리나케 하차 벨을 눌러 정신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낡은 원룸으로 돌아온 해율의 등 뒤로 쿵 하고 문이 닫혔다.
“하아.”
해율의 입에서 이제껏 참아 온 한숨이 새었다. 폐부 가득 들어차 있던 머스크 향은 아무리 날숨을 쉬어도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해율의 콧속 점막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다리가 뜨거웠다. 아니, 정확히는 온몸이. 그리고…….
‘……미쳤어, 기해율.’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이 해율을 혼란스럽게 했다.
해율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털썩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귓바퀴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탈 듯이 뜨거웠다. 열기를 견딜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 * *
[과외 어땠어?]
강의가 끝나고 다른 학생들과 같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던 때,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 확인해 보니 진형이었다. 단순한 물음에도 해율의 심장이 펄떡였다. 하지만 동요를 가라앉히고 답장했다.
[괜찮았어요.]
[그래? 다행이다.]
[소개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뭘. 다 네가 똑 부러지고 잘해서 그런 거지.]
진형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평소 같았으면 장난스러운 이모티콘 한두 개 정도는 보내왔을 텐데 웬일로 진지한 텍스트가 가득했다.
반면 해율은 의례상 던진 인사도 반 정도는 섞여 있었다.
현우경. 정말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어느덧 성숙한 모습을 풍기는 그는, 기억 속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남자답게 굵어진 선과 크고 단단해진 체격이 더욱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짙은 다갈색 눈동자와 깊은 눈매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정신 차려.
자꾸만 상념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마구잡이로 꼬여 엉망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자꾸만 우경이 생각났다. 해율은 입술을 잘근 물고는 가방을 들어 강의실을 나섰다.
어쩐지 체력적으로도 조금 버거웠다.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한 탓인 듯했다. 후, 하고 밭은 숨을 내쉬며 막 건물 밖으로 나서려던 때였다.
“기해율!”
뒤에서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에 해율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야, 저 멀리서부터 불렀는데 못 들었어?”
“미안.”
씨익 웃으며 살갑게 다가온 남자는 해율의 과 동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이었다. 경영대 수업을 듣는 해율은 같은 수업을 듣는 그와 조 모임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는 군대를 갔다 오고 복학을 했다고 했다. 해율은 곧 졸업반이었지만 그는 이제 3학년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워낙 과 활동을 하지 않는 해율이었기에 그와 통성명을 하게 된 것은 이번 수업이 처음이었다.
“저번에 커피 사 준다고 했는데도 그냥 가 버리고.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섭섭하다. 동기 좋다는 게 뭐야.”
“나 커피 잘 안 마셔서.”
“어. 그때도 나한테 그랬었지.”
옆으로 붙어 오는 후덥지근한 체온에 해율이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동기인 이 남자, 오형욱은 이렇듯 노골적으로 해율을 향해 일방적인 친근함을 표해 왔다. 해율이라고 모르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드러낸 것도 아니고, 그가 언뜻 동기와 호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기에 섣불리 거절하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기도 했다.
아까부터 지친 상태인 해율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강의는 한 시간 뒤였다. 그 전에 간단히 점심부터 해결해야 했지만 별로 입맛이 돌지는 않았다.
옆에서 오형욱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해율은 묵묵히 걸음만 내디뎠다.
“너 지금 약속 있어, 혹시?”
“응?”
“약속 없으면 점심 먹으러 갈래?”
해율이 고개를 슬쩍 들자, 눈이 마주친 오형욱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가뜩이나 가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오형욱은 해율의 몸으로 향하던 시선을 황급히 들어 올리며 동공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해율은 담담하게 시선을 던졌다. 해율이 지그시 바라보자 오형욱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해율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끈적한 숨을 내쉬며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인 오형욱이 말을 뱉기도 전에 해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미안해. 나 입맛이 별로 없어서.”
하지만 그 말과 동시에 오형욱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제 예상과 다른 해율의 반응이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아, 진짜. 매번 까이네, 나는.”
“정말 입맛이 없어서 그래.”
“그래그래. 네가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닌데 뭐. 별로 기분 안 상했어. 진짜로.”
투덜댐과 비슷한 소리에 대번에 해율의 기운 또한 팍 꺾여 버렸다. 피곤했다. 사실은 집에 가서 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다음에 같이 먹자, 점심.”
“어?”
“오늘은 말고. 다음에.”
“진짜지? 와. 너 언제 시간 돼? 여기서 차 타고 십 분만 가면 진짜 근사한 레스토랑 있거든? 거기 예약하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거든. 다음 주 이 시간 점심 가능해?”
오형욱이 제멋대로 신나서 약속 날짜까지 잡으려 들었다. 점심 한 끼 같이 먹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었다. 해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형욱이 한껏 상기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휴대폰에 무어라 적어 가기 시작했다.
“오케이! 그럼 다음 주에 봐! 너 강의 끝나는 시간에 전화할게.”
“응.”
오형욱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더니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 중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난 오형욱이 전화에 대고 무어라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해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 이만 가 볼게.”
“어, 그래!”
그 말에 오형욱은 통화를 하다 말고 해율에게 재차 약속을 상기시키고는 또다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무더운 체온이 가시자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밀어닥친 머스크 향의 기억에 해율이 걸음을 멈추고 이마를 손등으로 짚었다.
* * *
띵동.
하얀 손가락이 새까만 버튼 위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띵동.
두 번을 눌렀다.
어라.
해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과외 시간은 저녁 8시. 날짜도 오늘이 맞았다. 저번처럼 늦게 대답하려는 것인가 싶어서 잠깐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시계를 보자 8시에서 이 분이 지나 있었다.
해율은 다시금 초인종을 눌렀다. 정말 이상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시면 문을 열어 주셨을 텐데. 설마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해율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커다란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
‘전화해 볼까.’
휴대폰을 들고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와 전화를 하는 것 자체는 처음이었다. 과외 수업을 하기 이틀 전, 그에게서 문자가 한 통 온 게 처음 주고받은 연락이었다. 교재 이거 맞냐는 물음에 단답식으로 네, 하고 답장했을 뿐이었다.
해율이 아랫입술을 잘근 물고는 이내 통화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화면 위의 공중에서 헤엄치던 엄지가 막 버튼을 누르려던 때였다.
아.
눈부심에 해율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쨍하게 앞을 비추고 있었다. 손으로 시야를 보호한 해율이 대문 안쪽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온 헤드라이트 빛이 지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른 탓이었다.
이내 빛이 팟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고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뭐지.’
그렇게 속으로 의문을 중얼거린 해율의 눈이 대번에 크게 뜨였다. 가로등이 훤히 비추는 아래,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의 인영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운전석에 있는 것은 굵은 웨이브 머리의 화려한 미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은.
해율이 숨을 삼켰다. 순간 흡, 하고 호흡을 멈췄다. 현우경이었다. 제 눈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해율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사이에 또다시 해율의 온몸이 굳었다.
운전석에 있는 여성이 손을 올리더니 우경의 얼굴을 한 차례 쓸었다. 어둠 속의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농밀한 손길이었다. 차 내부의 공기가 얼마나 팽팽하고 야릇한지, 멀리 떨어진 해율조차 느낄 수 있었다.
우경은 여성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 냈다. 이윽고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더니 무어라 말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 조수석 문이 열리며 우경이 차에서 내렸다.
해율이 놀라 대문과 차고 벽 사이에 몸을 숨겼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구둣발이 일순간 멈추더니.
지이잉-
‘헉.’
해율의 전화가 울렸다. 당황스레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해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발신인은 현우경이었다.
“어.”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예전과 똑같이 부드럽게 건네는 목소리에 해율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세미 정장을 갖춰 입은 우경이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떨어트린 채로 해율을 보고 있었다.
“진짜 죄송해요, 선생님. 일찍 출발한다고 출발했는데 길이 이렇게 막힐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아니에요. 저도 막 왔는데요, 뭘.”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서 우경이 사과를 해 왔다. 해율이 괜찮다고 대답하자 우경은 쓰게 웃으며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해율은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 계단만을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해율이 입을 뗐다.
“늦게 되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면 좋겠어요.”
그녀의 단호한 어투에 잠시 말을 않던 우경이 이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럴게요. 죄송해요.”
방 앞에 다다라 막 안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때, 문득 가까워진 그의 몸에서부터 짙은 방사의 향기가 훅 끼쳤다. 아니, 말하자면 우경의 체향에 섞인 플로랄 계열의 향수 냄새였다. 야하고, 방만의 흔적이 가득한 냄새.
자신의 착각인가.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
문득 무릎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해율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색이 좀 안 좋으신데.”
우경이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깊게 숙여 눈을 맞춰 왔다.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는 듯한 진득한 눈빛에 해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가 밑에 가서 과일이랑 물 좀 가져올게요. 앉아 계세요.”
싱긋 웃은 우경이 귓가에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어딘가 저번보다 더 살갑고, 또 저번보다 더 차분했다. 우경이 1층으로 내려간 사이, 해율은 저번과 같은 그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그의 행동이 자꾸만 아슬아슬하게 다가왔다. 해율의 속 깊숙한 곳 어딘가, 내밀한 곳의 말초적인 신경을 건드렸다.
해율의 인생은 고요한 바다와 같았다. 파도 한번 치지 않는 조용한 그녀의 세계에 유일하게 불어온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우경이었다.
화려한 여자의 손길을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받아 내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해율은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을 상기했다.
옥상에서 우경과 만난 이후 해율은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옥상을 찾았지만, 우경은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발걸음 하지 않았다. 내심 실망했었던 그녀였지만 당시에는 그 실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이후 해율은 지나가던 복도에서 우경을 발견했다. 해율은 그를 알아보았지만 우경은 해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우경은 언제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그런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멀리서라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해율은 지금도 기억한다.
우경의 주위를 둘러싸던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안달이 난 이들이었다. 해율은 그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정했다. 그저 단순한 흥미일 뿐이라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인 호기심일 뿐이라고.
우경은 언제 어느 때나 여유로웠다. 지금과 달리 조금 활발했고, 지금과 같이 살가웠다. 그는 항시 뭇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에도 어려운 사정이었던 해율은 이모의 병치레 때문에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단한 시간과 함께 흘려보냈다. 그를 금세 잊었다.
아니, 잊으려 노력했다. 그를 볼 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지언정, 해율은 그래도 그를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도.
“선생님, 복숭아 드세요.”
“아.”
바로 곁에서 들리는 말에 해율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동그란 접시를 들고 있는 우경이 자리에 앉으며 책상 위에 접시를 놓았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해율이 그렇게 대꾸했다.
“복숭아 알레르기 있으세요?”
“아뇨. 없어요.”
“다행이네요. 복숭아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네, 감사해요.”
정신 차리자, 기해율.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해율은 쿵쾅대는 심장을 가눌 길이 없었다. 관능적인 향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한 체취에 거듭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니,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배 속이 간질거리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해율은 그가 가져온 물컵에 손을 뻗었다.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물컵을 들자마자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물컵이 약간 기울어지며 물방울이 책상 위로 점점이 튀었다.
“앗, 휴지가…….”
해율이 부산스럽게 휴지를 찾자 우경이 티슈를 건네줬다. 고마워요. 작게 말한 해율이 물방울을 닦았다.
“교재 설명할게요. 과일 드시면서 들으세요.”
“같이 드셔야죠.”
“아뇨, 괜찮아요. 저는 물 마실게요.”
해율은 우경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교재를 폈다. 침착하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생전 처음 겪는 아릿한 감각에 자꾸만 혼몽하게 정신이 까라졌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펜을 들고 교재를 펼친 순간, 해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펜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 또…….’
해율이 얼른 상체를 숙여 펜을 주워 올렸다.
“오늘 선생님 좀 이상하세요.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우경이 다정한 말투로 그렇게 물었다. 나긋하면서도 걱정이 어린 목소리였다.
해율이 고개를 돌렸다. 다갈색의 눈동자가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찌릿찌릿한 느낌에 숨을 들이켜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음영이 진 깊은 눈매가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미끈한 얼굴선 아래로 떨어지는 굵은 목선과 널따란 어깨. 셔츠 한 장 위로도 느껴지는 단단하고 넓은 가슴.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네, 괜찮아요.”
해율은 새까만 생머리 한쪽을 귀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을 꼬려던 손가락이 귀 뒤쪽에서 엉긴 듯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교재의 책장을 넘기려 팔을 올리다가 과일 접시를 탁, 쳐 버렸다.
“아!”
“이런.”
하지만 깜짝 놀랄 새도 없이 우경이 재빨리 접시를 잡았다. 다행히 접시가 깨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복숭아 두 개가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과즙을 흩뿌린 채로 떨어졌다.
“죄, 죄송해요.”
당황한 해율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상체를 숙였다.
“제가 할게요.”
그리고 우경이 그렇게 말한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경 또한 손을 뻗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의 두텁고 기다란 팔이 바닥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그때였다.
“……!”
상체를 숙이니 부푼 가슴이 힘을 받아 아래로 향했고, 복숭아를 집은 우경의 손등과 스쳤다. 정확히는 해율의 가슴 선단 쪽이었다.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었다.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으면 몰랐을 법한 정도의 가벼운 스침.
하지만 해율은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숨을 헉, 하고 삼키며 황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하얀 티셔츠 안쪽에서 봉긋한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아……. 어떡…….’
해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슴을 손으로 잡아 누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손등이 닿은 부분에서 생긴 저릿저릿한 느낌이 강도를 높여 갔다. 정말 아주 잠깐 스친 정도였다. 속옷을 착용했고 티셔츠까지 입은 터라 온전한 감각으로 느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갑자기 가슴 앞쪽이 간지러웠다.
‘왜 이러지. 미쳤어.’
해율의 숨이 가빠 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제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떨려 왔다. 허벅지 안쪽으로 꽉 힘을 주었다. 비눗방울이 퐁퐁 터지듯 온몸 여기저기서 생경한 감각들이 저마다 자기주장을 해 댔다. 무시하려고 해도 어깨가 자꾸만 바르르 떨렸다.
우경의 손등을 눈으로 훔치듯 시선을 두었다. 그녀의 가슴 선단과 스친 손등에는 복숭아 과즙이 묻어 있었다.
“티, 티슈가…….”
해율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던 때였다.
“이런, 묻었네.”
그가 나직하게 그렇게 읊조리더니 손등을 천천히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입으로 손등에 묻은 과즙을 쭉 빨았다. 해율의 가슴과 닿았던 바로 그 부분을.
쿵.
해율의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해율을 보고 있었다. 시선은 그녀에게 못 박은 채, 입으로 손등을 느릿하고 진득하게 빨았다. 마치, 그곳에 남은 어떤 감각을 간접적으로 음미하듯이 그렇게.
그의 타액이 손등에 묻어 과즙과 뒤엉겼다. 액체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해율은 헉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의 체온이 닿았던 신체가 탈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타구니 안쪽에서 엄청난 열감이 느껴졌다. 관능적인 머스크 향과 달콤한 복숭아 향이 뒤섞여 콧속을 파고들었다.
눈가가 자꾸만 젖어 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풀렸다. 온몸의 근육이 전부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맛있어요, 복숭아.”
“아. 네, 네……?”
해율이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다시금 싱긋 웃으며 손등을 핥았다.
“선생님도 드셔 보세요.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있어서요.”
“그, 그래요?”
해율이 고개를 다시금 정면을 향해 홱 돌렸다. 자꾸만 힘이 풀려 맞닿으려는 무릎에도 힘을 줬다.
자신이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스스로조차 알 수가 없었다. 미친 것 같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자신이 예전에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단 두 번 만났을 뿐인 독일어 과외 선생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학교 선배인 진형을 매개로 한.
그리고, 자신의 착각일 것이다.
우경이 그녀를 쳐다보며 저렇게 진득하게 손등을 빠는 행위를 하는 것이. 그게 미친 듯이 야릇하다는 것도.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이제, 수업할까요.”
“네.”
선선히 웃으며 대답한 우경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려는 자세였다.
막 교재를 펴려던 때, 해율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우경이 빨아 댄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등에는 그가 스스로 남긴 짙은 빨간색 울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우경이 다른 쪽 손으로 그 울혈 위를 슥 쓸어 냈다. 그 위에 묻은 타액을 훔치려는 듯. 아니면, 잠깐 스친 어느 감각을 음미하려는 듯. 간접적으로 느끼려는 듯. 마치 신체 어딘가를 애무하듯 울혈이 진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간질였다.
음란하고 외설적인 광경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동작이 아닌데도, 절로 목구멍에서 비음이 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야했다.
해율이 입을 달싹였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울고 싶어질 정도로 온몸이 뜨거웠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그러세요.”
해율이 말과 동시에 일어섰다. 그리고 휙 돌아서서는 빠른 걸음으로 2층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그 앞에 도착해서는 화장실 문을 등 뒤로 재빨리 닫았다. 헉, 하고 흉부에 가득 차 있던 단 숨을 터뜨렸다.
세면대의 수전을 열었다. 쏴- 하고 거센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 소리에 묻듯 헉헉하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풀어지려는 다리를 티 내지 않으려 힘을 준 탓에 다리가 아플 정도였다. 끙, 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세면대를 팔로 받친 해율의 가녀린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리고…….
‘설마.’
해율은 자신의 청바지 버클을 풀고 입술을 잘근 깨물며 팬티를 슬며시 내렸다.
‘아…….’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속옷 안쪽이 점도 높은 투명한 액체로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해율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 * *
“그냥 오늘 수업 일찍 끝낼 걸 그랬어요. 선생님 컨디션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도 오늘 좀 수업 내용이 부족한 것 같아서 다음에 한 번 보충해 드릴게요.”
해율이 허벅지 위에서 주먹을 말아 쥐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등을 받치고 있는 차 시트는 푹신하고 편안했다. 조수석에 누군가를 태웠던 것처럼 등받이가 딱 편한 위치로 기울어져 있었다.
우경의 커다란 SUV가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정숙한 배기음을 내며 도로를 내달렸다. 하지만 해율은 어김없이 딱 미칠 것 같았다. 오늘도 버스로 가려고 했는데 우경이 ‘오늘은 제가 데려다 드리기로 약속했잖아요.’ 하고 말하는 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밀폐된 공간이라서 그런지 그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는 팔 동작으로 생긴 공기의 흐름까지 민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번 더 보충하면 저야 좋죠. 아니, 아예 수업을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으로 늘리고 싶은데요.”
“네?”
“독일어 과외로 선생님 전속 계약 맺고 싶다고요.”
해율이 쳐다보자 그가 정면을 주시한 채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해율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매력적이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전의 현우경은 활기차고 인기도 많고 누구나 그를 좋아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뒤를 따르던 소문은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 소문들은 대학생 연상의 누군가와 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느니, 여자 친구가 어느 재벌 기업의 상속녀인데 꽤 난잡한 플레이를 즐긴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조용히 공부만 하고 책만 읽는 학생이었음에도 반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에 저들끼리 모여 그런 근거 없는 소문을 떠들고 낄낄대고는 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전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뒤에서 뒷말을 해 대는 남자애들을 속으로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어른이 되었다. 뭇 여인과 농밀한 애무를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여유도 충분한 어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
그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자꾸만 몸 여기저기에 열감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남자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성감이라는 것을 인식할 새도 없는 생활의 반복이었기에 이 나이 되도록 키스 한번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뭔지. 아찔했다. 젖은 속옷을 그가 눈치챌까 봐 두렵기까지 할 정도였다. 조수석에 앉아 허벅지를 더 꽉 조이며 그녀가 말했다.
“저 여기에 내려 주세요.”
“아직 집까지 가려면 멀었는데요.”
그녀는 우경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근처 편의점 주소를 불러 줬을 뿐이었다. 쓰레기가 나뒹구는 더러운 빌라촌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여기서 걸어서 금방이고, 골목이 좁아서 차가 못 들어갈 거예요.”
우경이 잠시 음, 하고 목을 울렸다. 그러더니 곧 “알겠어요.”라고 하면서 가장 밝은 거리에 차를 세웠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해율이 가방을 챙기며 그렇게 말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선생님.”
“네?”
나직하게 부르는 말에 해율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핸들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상체를 조수석 쪽으로 살짝 숙이며 빙긋 웃었다. 눈이 가느스름하게 예쁜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오늘 늦어서 죄송해요.”
“아.”
해율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순간, 화려한 미인이었던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 안쪽이 꽉 죄어들었다. 그 불쾌감을 숨기려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저도 오늘 제대로 수업 못 해 드려서 죄송한걸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해율이 그렇게 말하던 때.
“안전벨트, 제가 풀어 드릴게요.”
“아.”
불쑥 몸 앞으로 두터운 팔이 훌쩍 넘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강한 체취가 훅 끼쳤다. 금방이라도 신음이 터질 것 같아 숨도 쉬지 않은 채로 목구멍을 꽉 죄었다. 그의 체온이 너무나 가까웠다. 팔꿈치가 가슴께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어쩐지 허리가 약간 휘어질 것 같았다.
그의 옆모습이 눈앞에 바로 들어왔다. 순간, 우경이 눈동자를 굴려 해율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차 안을 가득 채운 공기가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목울대가 꿀꺽하고 절로 울렸다.
달칵.
안전벨트가 풀리자마자 해율이 차 문을 벌컥 열고 몸을 내렸다. 그때 우경의 목소리가 뒷머리를 잡아챘다.
“안녕히 주무세요.”
우경의 마지막 말에 해율이 고개를 까닥이며 차에서 내렸다. 해율이 내려도 SUV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해율은 어두운 거리에 숨어들 듯 걸음을 내디뎌 자신이 사는 빌라촌 안으로 몸을 숨기다시피 들어갔다.
복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 속 깊은 곳이 얼얼하게 아려 왔다. 아래가 질척이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