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46)

Curtain Call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여름 하늘. 항구마을 플로렌체의 거리는 오랜만의 좋은 날씨에 밖으로 나온 인파로 활기를 띠었다. 와악, 소리를 지르며 방조제 위의 자갈길을 내달리는 아이들, 그 아래의 백사장까지 내려가 달려오는 파도를 피하며 깔깔대는 연인들과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양산을 쓰고 구경하며 산책하는 노부부들. 철썩이며 방조제에 부딪히는 파도와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는 물새들의 소리가 평화로웠다.

레스는 쭉 기지개를 켜며 한참을 앉아 있던 카페테라스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은사가 보내온, ‘네가 예전부터 정신이 왔다 갔다 했던 건 잘 알고 있었지만’으로 시작하는 장장 열 페이지 상당의 편지에 ‘교수님, 저번에 교수님 잔소리가 싫다고 가출했다던 아드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자면’으로 시작하는 열 페이지의 답장을 쓰고 나니 몸이 뻐근했다.

린스베른이 교도소에 갇힌 지 두 달. 레스는 채용 반년 만에 장기 휴가를 내고 수도 브륀셀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를 교수직에 추천하고, 연구팀에 끼워 넣어 방학을 틈타 알차게 부려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은사는 뒤통수 맞은 심정으로 펄펄 뛰었다. 화가 많으신 교수님을 위해 마음을 진정시키는 박하 차를 보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항구 쪽을 바라보았다. 열흘에 한 번 도착하는 정기 연락선이 항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레스는 테이블 위에 동전 몇 개를 내려놓고 느긋하게 항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풍경 좋으나 사람은 없는 기준으로 고른 휴양지는 5년 전 데캉트 왕국군과 대치했던 서남부 전선에 있는 작은 항구마을이었다. 상륙 작전의 격전지가 되어 마을 자체의 인구수의 몇 배가 넘는 사상자들로 해변에서 썩은 내가 가시지 않았던 게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이번 휴전 협정으로 국경선이 쭉 서쪽으로 밀리며 최전선에서 벗어나게 된 플로렌체는 이제 슬슬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새로 지은 집들의 회벽을 새하얗게 칠하는 남자들과 창가에 색색의 꽃을 심은 화분들을 매달아 놓는 여자들의 뒤로 아직 채 철거되지 않은 무너진 집의 잔재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 잔재 사이를 아이들과 마을 개들이 왁자지껄하게 뛰놀았다.

5년 전, 그는 이곳에서 무너진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도망친 데캉트 군 생존자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습관적으로 목이 졸려 오는 듯한 기분에 레스는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는 새하얀 뭉게구름만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사라진 이명에 다시 한 번 가볍게 심호흡을 한 레스는 마을에 딱 하나밖에 없는 잡화점에서 꽃을 한 아름 사 들었다. 활짝 피어난 해바라기가 싱그러웠다.

“어이, 선생. 오늘 무슨 날이야?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데?”

항구에 도착해 갓 잡은 생선들과 뒷산에서 재배한 게 분명한 채소들, 뭍에서 공수해 온 향신료를 몇 개 사들이고 있자니 가판대의 주인이 실실 웃으며 물어 왔다. 그에 레스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 보입니까?”

“그으래? 무슨 날인데?”

“플로렌체 근교의 모든 사람에게 공지할 일이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선생, 내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데 나를 뭐로 보고!”

“대국민 확성기지 뭐긴 뭐야.”

곁에서 낄낄거리며 생선을 토막을 치던 어부가 손질된 생선을 레스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들한테는 박력! 자신감! 열정이야. 알았어, 선생? 특히 선생같이 다소곳하고 예쁘장한 타입은 말이야, 밤에 침대가 부서질 정도의 열정은 있어야―.”

“서언새앵, 침대가 부서지면 내가 싸게 고쳐 줄게! 알지? 총알은 데캉트 놈들에게, 가구는 이 마커스 로페트에게―.”

“아이고, 선생. 이런 헛소리를 조언이랍시고 들으면 꼭 다 말아먹고 울며 술을 찾게 된단 말이야. 그냥 하던 대로만 해. 남자는 다 필요 없어. 얼굴이 시작과 끝―.”

“에이, 얼굴보다는 몸이지. 확 잡았을 때 거기가 앙증맞으면 얼마나 식는데.”

“게다가 선생 댁 아가씨는 예쁜 걸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면 되잖아. 남자라면 역시 장난감은 생각도 나지 않게 하는 두께와 크기와 기술이―.”

“아니 이 여편네가 못 하는 말이 없어!”

레스는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로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적나라하기 짝이 없는 음담패설을 흘려 버렸다.

“안녕히 계세요.”

이미 그가 오든 가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소리를 질러 대며 떠드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레스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슬슬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상의의 단추를 하나 더 풀어 내며 레스는 도시 외곽의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사아아, 바람에 무릎까지 긴 억새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언덕 위, 새파란 바다와 언덕을 따라 옹기종기 지어진 흰 회벽의 집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집이 있었다.

차랑, 문을 열자 현관에 걸어 두었던 풍등이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거의 11시가 되어 감에도 집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장을 봐 온 것들을 주방 카운터 위에 내려놓고 해바라기 꽃다발은 잘 다듬어 식탁 위의 크리스털 화병에 장식했다. 축음기에 조심스레 레코드판을 올려놓자 곧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 무슨 날이야?’

결국 대답을 하지 않았던 질문의 답을 생각하자 레스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축음기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의 음을 나직하게 흥얼거리며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갓 잡은 생선을 다시 한 번 손질해 구웠다. 오븐에 빵을 넣고 클램 차우더를 만들기 위해 육수를 우리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면서 반쯤 눈을 감은 레티시아가 풀썩 그를 뒤에서부터 안아 왔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그에 공주로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쿡쿡 웃음을 흘리며 레스는 몸을 돌려 강아지처럼 자꾸만 그의 등에 얼굴을 비비려 하는 작은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이갈이를 하듯 입술을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물어 대는 공주가 키스에 열중해 있는 사이 레스는 그녀의 몸을 훌쩍 들어 올려 식탁에 앉혀 놓았다.

“나도 도와줄 수 있는데…….”

“거참 무서운 소리를 하시네요.”

그 말에 어깨가 깨물렸다. 계속 깨물고 싶어 하는 공주의 입에 방울토마토를 넣어 주고 어깨를 구출해 낸 레스는 다듬는 게 끝난 재료를 냄비에 넣고 저었다.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생선이 구워지고 수프의 고소한 향이 풍겨 오자 이제 완전히 잠이 깬 레티시아가 커다란 접시에 샐러드를 담았다. 수많은 접시를 깨고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음식을 망쳐 가면서 겨우 획득한 능력이었다. 식사 시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해 본 적 없었을 공주님은 저번에 한 번 경험해 봤던 단둘만의 생활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위해 가사를 배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식탁이 차려지고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자극했다. 식탁 위의 꽃병을 장식하는 해바라기를 새삼스레 발견해 볼을 발갛게 붉히며 좋아하던 레티시아는 냄비가 끓을 때부터 주방을 빙빙 맴돌더니 드디어 그녀의 앞에 수프가 놓이자마자 거의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와아, 클램 차우더다! 나 이거 진짜 좋아하는데!”

대뜸 빵을 집어 들고 수프에 듬뿍 찍어 먹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웃음을 숨기며 레스는 스푼을 들어 올렸다.

‘경, 나랑 사랑의 도피 하자.’

린스베른의 재판이 끝나고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더위에 시든 꽃처럼 축 늘어져 있던 레티시아가 갑작스레 한 말이었다. 공주님, 날이 갈수록 창의성이 넘치는 개소리를 하시는군요, 라는 공주의 비서, 테시라 자르덴의 인간 이하의 무언가를 보는 시선을 무시한 채 레티시아는 어느새 활기를 되찾아 지도책을 휙휙 넘기고 있었다.

‘이참에 안 덥고 사람 없는 데로 사라지는 거야.’

공주가 그냥 평범한 여름휴가가 가고 싶어서 뻗대는 거라는 걸 깨달은 테시라는 행선지에 대해 입을 다물고 그 격무를 대행하는 조건으로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 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몇십 개의 섬과 그 두 배는 되는 리조트와 별장 중 어디로 가야 좋을까를 고민하던 레티시아에게 레스는 슬쩍 말을 얹었다.

‘정말 도피한 것처럼 지내 보실래요?’

그리고 그 말에 레티시아는 눈을 무섭게 반짝였다.

“계속 경이 한 음식만 먹으니까 입만 고급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다른 데서 먹는 건 예전처럼 맛있지가 않아.”

“로페르가 있잖습니까. 키샤가 언제 돌아올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나를 이렇게 길들여 놓고 다른 남자한테 보내려 하다니 경은 정말 냉혈한―.”

만족스러운 얼굴로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하는 말에 레스는 방울토마토를 한 줌 집어다가 한꺼번에 레티시아의 입에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볼이 가득 찬 레티시아가 항의의 소리를 내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그 볼을 꾹 찔렀다.

“보낼 일 없고 가신다 해도 안 보내 드립니다.”

말을 한 후에야 그는 자신의 말이 꽤나 한심하게 들릴 거라는 자각을 했다. 분명히 장난으로 내뱉은 말에 이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만큼 분위기를 깨고 상대를 민망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레스는 서둘러 미소를 지어내며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끔씩 다른 남자 얼굴을 봐야 제 얼굴의 소중함을 알…….”

“안 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레티시아가 한 걸음 만에 그들 사이의 거리를 확 줄이더니 냉큼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톡, 고개가 그의 어깨 위에 기대지며 그녀는 새를 잡아먹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그리고 그 말에 별수 없이 안심해 웃어 버리는 그가 있었다.

이렇게, 어제보다 오늘 더 당신을 원하게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일 년이 흐르고,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넘게 되면 당신 없는 삶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당신을 좋아하게 해서 결국 당신이 없이는 사는 것조차 두렵게 해 버리겠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당신을 고용인도, 아는 이도 없는 곳에 데려다 놓을 정도로.

“공주님은 정말로 나쁜 분이세요.”

“내가 뭐 어때서!”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레티시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볼에 가볍게 반복해서 입을 맞추자 레티시아가 간지러운 듯 킥킥거렸다. 도망가려는 듯 버둥거리는 그 몸을 꽉 끌어안자 무서울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라 그는 톡, 고개를 그녀의 목덜미에 기대었다.

“저, 사실 공주님 처음 뵀을 때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 것 같긴 했어. 왜 내 미모가 안 통한 거야?”

“린스베른이랑 안 닮은 것 같은데도 묘하게 닮은 데다가 다짜고짜 마음에 든다며 춤추자고 하는데.”

깊게 숨을 들이마셔 비강 가득 레티시아의 체취를 담으며 레스는 눈을 감았다. 지금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 어렵잖게 그의 인생 최악이 될 수 있었던 밤의 무도회.

시선에 담긴 악의에 압사당하는 듯했다. 소리 죽여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으라는 듯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서커스의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시선들이, 흥미 본위로 툭툭 치고 갔다가 그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 구경하며 즐거워하던 모습들이 한데 뒤엉켜 그의 목을 졸랐다.

‘왜 아직 살아 있지?’

연회장의 대기마저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왕이 이걸 위해서 그를 그 자리에 전시해 뒀구나 싶어 구역질이 났다.

‘안녕, 키시르 경?’

그 와중에,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을 만났다.

“객관적으로 춤 상대로 삼고 싶어 할 꼴이 아니었잖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괴롭히려나 싶어서.”

“……미안해. 내가 가끔 생각이 참 없어.”

“이제 와서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멋대로 오해했던 거였고.”

“그래도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 정말로 괴롭히려는 생각은 없었어. 음, 저번에도 말했는데 궁금해서.”

“궁금하셨다고요.”

“여기 있느니 차라리 머리 박고 죽고 싶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왜 꾸역꾸역 자리를 지키며 욕이란 욕은 다 듣고 있는 걸까, 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티시아 공주님을 앞에 두고 당장 반해 버리지 않는 걸까, 왜 난 저 뼈밖에 안 남은 신사분의 날카로운 턱선이 그렇게 잘생겨 보였던 걸까, 뭐 그런?”

“키샤가 제 턱선을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는데요.”

“예쁜 데가 하도 많아서 그래. 하나하나 돌아가면서 찬양하다 보면 차례가 쉽게 돌아오지 않거든.”

“전 시간은 많고 칭찬은 좋아해요.”

“잘됐네. 나도 시간 많은데.”

깔깔거리며 웃는 레티시아가 안심한 듯 그의 가슴에 기댔다. 애교 부리듯 파고들어 오는 몸을 끌어안고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빗겨 내리며 레스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좀 더 잘하고 싶었던 것, 아예 다시 하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그날의 일은 계속 생각이 납니다.”

“무슨 일?”

“그때 당신의 손을 거절한 거요.”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키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 주고 싶으니까요. 거절당하는 건 그리 기분 좋은 게 아니니까 그런 경험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미 지나간 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

“공주님, 마침 오늘이 저희 만난 지 딱 일 년 되는 날인데요.”

가볍게 레티시아를 안아 올려 의자에 앉힌 레스는 천천히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며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자꾸만 말라 들어가는 입술을 축이며 그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지금 다시 물어봐 주신다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텐데요.”

짐짓 장난스럽게 말하는 남자의 가볍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티시아는 그제야 거실의 가구들이 멀찍이 치워져 있다는 것과 레스의 차림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플로렌체에서 온갖 집안일을 다 맡아 하면서 언제나 낙낙한 셔츠와 가죽 바지 차림이었던 평소와는 달리 그는 오늘은 좀 더 격식 있는 드레스 셔츠 차림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차이만으로 남자는 순간 멈춰 서서 돌아볼 정도로 눈에 띄었다.

절대로 여자한테 거절당할 일 없는 얼굴을 하고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긴장하는 게 연기라면 이건 그 실력에 감탄하며 속아 줘야 할 정도다.

“……경은 진짜 약은 것 같아.”

레티시아는 그 손을 냉큼 잡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경, 저와 춤춰 주시겠어요?”

그에 비로소 안심한 듯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며 레스가 그녀의 손등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기꺼이요, 공주님.”

* * *

축음기의 음악이 그들뿐인 작은 저택의 거실을 가득 채웠다. 색색의 꽃이 심어진 창문 너머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 아래에서 그들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완벽히 회복된 것은 아닌 레스의 다리는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춤은 소화해 낼 수 없었고, 그리 넓지 않은 거실은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기에는 너무 좁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새하얀 나이트가운의 치맛자락이 레티시아의 맨다리를 휘감듯 달라붙었다가 턴을 함에 따라 빙그르르 꽃이 피어나듯 퍼져나갔다. 나풀거리는 레티시아의 머리카락이 그 뒤를 따르듯 허공에 하늘거렸다가 감겨 들어오듯 그녀의 등 위에 내려앉았다. 정식 무도회에서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달라붙어 턴이 끝날 때마다 시선을 마주치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입술에 키스가 떨어졌다.

어느새 축음기의 동력이 다했는지 레코드판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음악이 잦아들었다. 땀이 흘러 살짝 옷이 몸에 들러붙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스는 충동적으로 레티시아를 번쩍 들어 빙글 돌렸다.

“꺅!”

아이 같은 명랑한 웃음소리가 비명에 묻어 나왔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확 끌어안는 그녀에게 몇 번씩이나 입을 맞춘 그는 테라스의 장의자 위에 레티시아를 내려놓았다. 후원으로 이어지는 테라스는 바로 앞에 펼쳐진 호수 덕분에 여름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살짝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내자 가볍게 상기된 얼굴로 레티시아가 웃으며 레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의 몸이 그녀를 덮듯 장의자 위에 쓰러졌다.

“아아, 좋다.”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레스의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며 레티시아는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한다는 게 아쉬워.”

“내년에 또 오면 되지요.”

“그건 미래의 일이잖아. 일 년씩이나 기다려야 하고.”

“여기가 아니라도 전 언제나 공주님께서 부르시면 곁에 있을 텐데, 그래도 아쉬우십니까?”

가만히 시선만 올려 바라보는 얼굴에 레티시아는 확 그 목을 끌어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떨어트렸다. 도도한 고양이처럼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 키스를 받아 내는 레스가 그의 볼을 감싸 쥔 그녀의 손에 가볍게 고개를 비볐다. 그 애정 가득한 몸짓에 레티시아는 꽉 힘을 주어 그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그가 일 년 전의 승전 연회에 대해 말해서일까. 그녀 역시 새삼스레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야위고 지쳐 보였던 남자에게 지금과 같은 모습이 있으리라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채 건강한 혈기를 띠고 있는 뺨을 어루만지며 레티시아는 이마를 가리는 그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턱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꺼풀이 뜨이며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묻어나는 반짝이는 애정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 나는 그때 경이 나를 거절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의문을 담은 시선을 마주 응시하며 그녀는 마치 홀리듯 말을 내뱉었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그러나 적당한 때를 찾지 못해서 담아만 두었던 말이 정신없이 흘러나왔다.

“흥미 위주로 가볍게, 무성의하게 찔러 보는 제안에 당신이 무조건 고개 끄덕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그 힘겹고 외로웠던 시절, 그가 자신을 체념하듯 던져 버리거나 가당찮은 가격에 팔아넘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온 세상이 당신을 적으로 돌리고 외면해도 끝끝내 꺾이지 않았던 당신을 존경해.”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듯 눈동자가 크게 뜨이더니 파르르 흔들렸다. 확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버리려는 그의 얼굴을 조금 힘을 주어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하면서 레티시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타인의 상처를 염려하고 배려할 수 있는 모습을 동경해.”

“저는, 그런 대단한―.”

“당신이.”

익숙하게 내뱉으려는 겸양의 말을 잘라 내며 레티시아는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반복했다.

“당신이, 받아 마땅한 사랑과 인정 속에서 언제나 행복해졌으면 해.”

그 말에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던 레스는 그대로 확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아, 정말 공주님, 우리 이제 그만 진짜로 결혼하면 안 될까요?”

“……가, 갑자기?”

“갑자기라니요. 저는 프러포즈하고 반년을 얌전히 기다렸는데요. 그런데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건지 전혀 아무 말도 없으시니까.”

원망하는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레티시아는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야, 경이 바빴잖아! 우리 얼굴 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린스베른 일이 해결되기 전에는 그거 도와준다고 매달리고, 그게 다 끝났나 싶었더니 다음엔 교수 일이 바쁘다고 무슨 밤을 하루 걸러서 새우니까―.”

“그런 거 상의할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그 말에 뭐라 대꾸를 하려던 레티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공주님……?”

뭔가 수상함을 느낀 레스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자 도륵 눈을 굴려 시선을 피한 레티시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지, 결혼식을 꼭…… 상의해서 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

“……없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지요……?”

“……아, 응, 뭐…… 그렇겠, 지……?”

다시 한 번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모습에 뭔가 참을 수 없이 불안해져서 결국 레스는 레티시아의 위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키샤, 뭔가 제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것 같은데……?”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티시아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어째서인지 점점 더 최악으로 곤두박질치는 상상에 레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자 결국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예, 공주님.”

“사실 내일 돌아가는 대로 우리 결혼식을 하려고 준비했다면…… 화낼 거야?”

“……아.”

아주 한참 후에야 겨우 그렇게 대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리를 만들어 낸 레스는 멍하니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뻔뻔해지기로 한 여자의 생글거리는 얼굴에 레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화를 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여기 키스.”

당당하게 입술을 살짝 내밀며 눈을 감는 모습에 그는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재빨리 레티시아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는 꼭 상의하고 할게.”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미는 모습에 레스는 그 입술을 살짝 깨물어 버렸다.

“다음이 어디 있습니까. 다음은 없어요.”

아야, 아파, 엄살을 부리며 칭얼거리는 공주를 끌어안고 그는 이번에는 부드럽게 입술을 벌리며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녹아내리듯 그의 팔 안에서 흐물거리는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당기며 그가 툭 내뱉었다.

“결혼은 저랑만 해야지요.”

“응. 그래. 경이랑만 할 거야.”

눈치만은 빠르고 애교만은 넘치는 여자가 냉큼 그의 허리에 매달리며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오래오래, 당신이랑 같이 평생을 살 거야.”

“……눈 감으세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심장이 터질 듯 기뻐지는 이유는, 그 역시도 같은 것을 바라 왔기 때문에.

“상 드릴게요.”

기다렸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감는 레티시아의 입술에 레스는 정성 들여 입을 맞췄다.

긴긴밤의 끝에서 만난 당신에게, 영원을 바라는 소망을 담아.

Copyright by 秋葉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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