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때 레오르나 레반스타인을 위협하는 왕위 계승자 후보였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린스베른의 추락은 신속했다.
“린스베른 에오렌 시오 레반스타인에 대한 본 재판소의 판결을 선고한다.”
초승달 모양의 단상 위에 앉은 열한 명의 재판관 중 가운데에 앉은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고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시에 무단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명령 체계에 혼란을 주었고, 지위를 이용하여 군 문서를 조작하고 은닉함으로 아군의 피해를 야기했으며…….”
레스는 방청석 한구석에 서서 피고석에 선 린스베른을 바라보았다. 왕자의 지병을 들먹이며 조사를 질질 끌고 가던 왕자의 변호사는 어느 순간부터 수염도 나지 않은 젊은 국선 변호사로 바뀌어 있었다. 방청석의 관중은 경비들에게 끌려나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왕자가 입을 열 때마다 소리 높여 야유해 댔다. 그의 도움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고위 귀족들과 왕은 자기들의 스캔들을 잠재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의 일 년을 꼬박 끌어 온 법정 공방에 린스베른은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까칠하게 마른 데다가 군데군데 희끗희끗하게 새어 버린 머리칼. 린스베른의 얼굴 그 어디에도 예전의 그 선해 보이던 미소는 없었다.
“……이상, 찬성 10, 반대 1로 린스베른 에오렌 시오 레반스타인에게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반역, 군 복무 중 전선에서의 무단 이탈, 기밀 유출, 공문서에 대한 유출과 은닉, 헤냐 로페르 및 다수의 무고한 민간인 살해와 레티시아 레반스타인 공주 전하 살인 미수에 대한 혐의를 인정하여 본 공동 재판소는 피고에게 284년의 징역을 선고한다.”
레티시아는 처음부터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레오르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린스베른은 이제 거의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왕태녀에게 직접 시간을 소모할 가치도 없는 상대가 되었다.
“본 재판소의 판결이 모든 공권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이들을 추모하며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신 관중석에 자리하고 앉은 이들은 유족들이었다. 셀레스트에서 죽은 이들, 다레즈에서 죽은 이들, 그 후의 은폐 작업에 말려들어 죽은 이들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순번을 정해 놓고 꼬박꼬박 린스베른의 모든 재판에 참석했다.
“또한, 이번 일이 위대한 란스타인 왕국의 법이 만인의 앞에 공정하고 엄중하게 집행될 것임을 모든 국민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방에서 이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을 기록하려는 기자들의 펜이 빠른 속도로 춤추었다. 승리의 이면에 그 어떤 속물적인 거래와 야심이 있었다 해도 국익을 위해 왕족이 법 앞에 끌려 내려온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재판장의 판사봉이 세 번 내리쳐졌다.
“이상으로, 본 재판을 폐정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 * *
카메라를 들이대며 소감을 요청하는 기자들을 예의 바른 미소로 무시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마주 끌어안거나 징그럽게 울지 말라고 타박하면서 레스는 재판이 열렸던 중앙 법원의 위압적인 대리석 아치문을 빠져나갔다. 이미 봄의 끝자락에 접어들어 여름의 향기가 나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는 영광의 문 광장의 분수대를 지나쳐 걸으며 레스는 단정하게 걸쳐 입었던 재킷을 벗어 팔에 걸었다.
그는 일 년이 조금 안 되는 과거, 군용 수송차에 실려 처음 이 거리로 돌아왔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로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는 이제 거의 다리를 절지 않고, 붉은 것을 봐도 속이 울렁거리지 않는다. 아직도 이틀에 한 번씩 잠을 설치고, 아직도 목을 조이는 옷을 입거나 고기를 먹으려 하면 속이 뒤집힐 듯 괴로워지지만, 그 정도쯤이야 예전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솨아아, 바람이 불어와 거리 양옆에 심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잠시 걸음을 멈춰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감각을 만끽한 레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점 외곽으로 접어드는 가도를 걸었다.
국립묘지는 새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키득거림을 제외하곤 고요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묘지 입구의 꽃집에서 있는 대로 꽃을 쓸어 담자 매대를 지키고 있던 젊은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킥킥거리며 웃었다.
“손님, 지금 그 말 조금 설렜어요.”
“죄송합니다. 이미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다.”
“쳇, 그럴 줄 알았죠. 어쩌자고 괜찮은 남자들은 다 임자가 있어.”
흥, 고개를 팩 돌려 버리면서도 아가씨는 꽃다발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묶어 건넸다. 장미, 튤립, 수국, 백합, 패랭이꽃, 카네이션. 색색의 꽃들을 양팔 가득 안은 레스는 천천히 흰 석조 계단을 올라 묘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지바른 언덕 위, 란스타인의 청월기를 어깨에 두른 채 품에 안은 라이플에 고개를 기댄 여인의 조각상이 보였다. 란스타인을 의인화한 여신의 발치에는 셀레스트 전선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매끈한 비석에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절대 잊지 않기를.]
주르륵 나열된 끝없는 이름들 위에 새겨진 문구를 한 번 손끝으로 쓸어 낸 레스는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꽃다발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왕자가 죗값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전우들의 묘지를 찾은 적이 없었다. 혼자만 살아남아서 린스베른이 잘만 살고 있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죗값을 다 치르기도 전에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계속 감시할 겁니다. 그러니.”
희미한 웃음마저 지어 보이며 레스는 양손을 모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 당신들도, 아직 이곳을 떠돌고 있다면, 편히 쉬세요. 힘들었던 마지막은 다 잊어버리고,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가세요. 저도…….”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따뜻한 감정만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행복하고 다정한 것이기를 다시 한 번 믿어 보며 살아가겠습니다.
솨아아,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을 휘날리고 꽃잎들을 흔드는 바람에 경쾌한 발소리가 섞여 왔다. 고개를 들자 완만한 능선을 그리는 언덕길을 올라오는 방문객의 모습이 보였다.
굽실거리는 붉은 머리칼이 산들바람에 제멋대로 살랑였다. 세련된 하이웨이스트 치마의 트임 사이로 춤을 추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다리, 커다란 밀짚모자 아래 반짝이는 새싹 같은 눈동자, 가볍게 이름 모를 곡조를 흥얼거리던 입술은 그를 발견하자 꽃이 피어나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안녕, 키시르 경.”
레티시아의 모습을 발견한 레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그렇게 그는 햇빛의 찬란함과 함께 다가온 그의 미래에게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