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46)

7.

가파른 산길은 밤새 쌓인 눈으로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제대로 된 포장도로가 아닌 자갈길을 밀고 올라오려던 차는 바퀴가 눈에 잘못 파묻히자 헛돌기만 할 뿐 꼼짝도 못 했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회전하는 바퀴가 눈 더미에서 빠져나가려 애를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이미 연보랏빛과 청록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린스베른이 제멋대로 지정했던 약속 시각인 세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고작 반 하루 전.

사냥제의 후야제를 함께하기로 한 파트너 대신 익숙한 필체의 메모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메모의 내용을 확인한 후, 그녀는 몇 시간을 공들여 치장했던 것을 던져 버리고 곧장 공주 저로 달려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이 왕좌를 놓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적이 없다는 듯 뻔뻔스러운 친근함을 담은 메모에는 장황하게 늘어놓은 요구 사항과 함께 한 움큼의 금갈색 머리칼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백만 데캇 상당의 금품과 당장 사용 가능한 다섯 종류의 화폐를 준비할 것.

반경 3km 내에 경관이나 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할 것.

외로움을 많이 타는 오빠를 위해 네가 국경까지만이라도 동행을 해 줄 것.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쓸데없이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진행할 것.

사근사근하고 부탁하는 어조였으나 거절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후야제에 참가하려고, 혹은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일찌감치 퇴근한 이들을 윽박지르듯 다시 불러와 린스베른의 가당치도 않은 요구 사항을 준비시키며 레티시아는 쉴 새 없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아니겠지.’

기어코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났다. 그 아픔조차 느끼지 않는지 레티시아는 재차 상처를 짓물었다.

‘그래도, 친구였다는데.’

아무리 린스베른이 쓰레기라도, 궁지에 몰렸어도, 설마 진심으로 한때의 친구이자 부관을 해치려 할까.

그냥 궁지에 몰리니 되는 대로 내뱉는 것뿐일 거다.

그래야 했다.

그러나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섬뜩함에 레티시아는 몰래 레오르나에게 전령을 보내 소식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쪽지가 시키는 대로 운전사 하나만을 데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공주님까지 인질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미쳤다고 거기에 진짜로 혼자 가세요?’

후야제를 맞이해 쇼핑을 즐기겠노라고 조기 퇴근했던 테시라는 숨이 턱까지 찬 채로 달려와 그녀의 차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가 봤자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고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다루기 쉬운 어린애도, 여자도, 민간인도 아닌 살인 경험 풍부한 전직 군인을 미쳤다고 아직 살려서 끌고 다니겠어요?’

테시라는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 충동적인 것처럼 보여도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언제나 지극히 이성적이다.

‘비켜.’

‘공주님! 적어도 왕태녀 전하의 지원을 기다리세요! 거길 공주님 혼자 가셔서 뭘 하실 수 있다고 그러세요!’

그때 대신전의 종이 울렸다. 새벽 한 시를 알리는 둔중한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원을 기다리면 늦어.’

린스베른이 그녀를 불러낸 곳은 브륀셀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산속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밟아.’

‘공주님!’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밟으라고!’

그녀의 날카로운 명령에 안절부절못하던 운전사는 결국 천천히 차의 속도를 올렸다.

‘아, 시발!’

자기 보호 본능에 투철한 테시라가 얼른 비켜서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 그녀에게 속으로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며 레티시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던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제발 살아 있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호렌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 길로 내려가서 언니한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해.”

결국, 몇 분 동안 성과 없이 요란하게 공회전만 하는 차를 노려보던 레티시아는 준비했던 가방을 낚아챘다. 어두운 밤의 산길에 그녀가 든 램프의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발목까지 눈이 쌓여 겨우겨우 알아볼 수 있는 산길을 오르자 금세 숨이 차고 땀이 났다. 레티시아는 그것이 산길이 험해서인지, 그녀가 지금 제정신으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겁에 질려서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린스베른은 기본적으로 겁쟁이였고, 욕심이 많았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자기가 다치지 않을 만큼, 잃어버리고 손해 보지 않을 만큼 아주 기가 막히게 처신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벼랑 끝까지 몰려 버렸다.

‘실수했어.’

란드로스 이노첼의 살인 미수 건으로 린스베른을 몰아넣은 것을 너무 일찍 자축했다. 너무 일찍 경계를 풀어 버렸다. 린스베른이 벼랑에 몰렸다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어야 했는데.

‘그 자식이 누구를 제일 죽여 버리고 싶어 할지 뻔한데.’

지금의 린스베른이라면 순간적인 충동으로 계산하는 걸 잊고,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고 레스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결코, 자신의 탓을 하지 않을 린스베른은 자신의 몰락이 레스의 탓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내 탓이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자책감에 숨이 막혔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고작 그 생각만이 빙빙 맴돌았다.

“키샤!”

그리고 겨우 도달한 산의 정상,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아빠진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제 오라비라는 이가 레스의 머리채를 잡고 나타난 순간, 레티시아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증오로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했다.

“린스베른―!”

레스의 얼굴 한쪽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와 뺨이 터져서 흘린 피로 엉망이었다. 짐짝같이 질질 끌려오는데도 반항 한 번 하지 않는 축 늘어진 몸에도 선명한 구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순간 그 모습이 이미 죽어 버린 시체 같아 레티시아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비명처럼 내지른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레스의 고개가 들렸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지 멍한 눈이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점점 그 눈에 초점이 맺히더니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공주님! 안―.”

필사적으로 소리치려는 그의 관자놀이에 피스톨이 겨눠졌다.

“레스!”

“키샤, 내 말이 들리니?”

진심으로 즐거운 듯 레스의 머리에 총구를 짓누른 린스베른이 다른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들리면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오렴. 네 사랑스러운 애인의 머리에 총탄이 박히는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키샤, 듣지 말아요! 돌아가요, 지금 당장!”

“네 말대로 혼자 왔잖아, 그러니까 이제 레스를 놔줘!”

레티시아는 자신의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 더 이상 아프게 하지도, 힘든 일을 겪게 하지도 않겠다고. 그를 괴롭힌 이들에게 철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그러나 그녀 역시도 겁쟁이라서, 왕위 다툼이라는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일에 끼어들어 형제들과 적이 되는 게 싫어서 홀로 도망쳤다. 자기 스스로만 간수하면 되는 삶이라서 그녀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지켜야 했던 일도 없었고,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빌어먹게도 불공평한 세상은 그녀의 멍청함의 대가마저 레스에게 요구한다.

“린스베른, 이런다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쓸데없이 형량만 쌓지 말고 지금 당장 자수해!”

“그러면, 우리의 자비로우신 누님께서 나를 살려 주실 거라고? 정말로?”

대놓고 비웃음이 섞인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레티시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 만한 말을 찾으며 슬쩍 양어깨를 끌어안아 코트 안쪽에 숨겨 두었던 피스톨의 촉감을 확인했다. 그녀는 전투 훈련이라고는 받아 본 적 없으나 이걸 레스에게 넘겨주기만 한다면 탈출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미 은밀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온 경호원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을 것이고, 곧 레오르나 역시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될 것이다.

“왕자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때, 오두막 안에 들어가 있던 남자들이 하나씩 총이며 가방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왔다. 개중 하나는 레티시아에게 다가와 그녀가 들고 온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요구한 금품이 얌전히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한 린스베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키샤, 그래도 나는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야. 네가, 내 그 모든 호의와 권유를 그리 매몰차게 거절했어도 말이야.”

“린스베른―.”

무언가 견딜 수 없이 불안한 예감에 레티시아가 뭐라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린스베른은 레스를 홱 오두막 안으로 던져 넣었다. 손발이 묶인 그는 별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린 오두막의 어둠 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린스베른은 재빨리 현관문을 닫은 후 자물쇠를 걸어 버렸다.

“불붙여.”

그 말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름을 남자들이 오두막에 끼얹었다. 레티시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지붕으로 불붙은 성냥이 서너 개 던져졌다.

순식간에 오두막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안 돼! 레스, 레스―!”

찢어지는 듯한 레티시아의 비명을 마치 음미하듯 들으며 린스베른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속삭였다.

“봤지? 나는 키시르에게 손 하나 대지 않았어.”

그 말에 레티시아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걸 꽉 품에 끌어안는 것으로 제압한 린스베른은 즐겁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완벽하고 완벽한 하루였다.

* * *

사방이 온통 불바다였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연기에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레스는 하도 맞아서 어질거리는 머리를 애써 내저었다. 연기 때문에 따가워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 시야가 온통 뿌옜다. 숨이 턱 막히는 것이 연기 때문인지, 불길 때문인지, 기억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셀레스트 주둔지가 꼭 이렇게 타올랐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죽어가는 이들과 몸에 불이 붙어 죽어가는 이들과 그 사이로 총을 쏴 대는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낄낄대며 떠들고 농담 따먹기를 하던 이들이 알아보기도 어려운 조각이 되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사방에서 불길이 조여들었다. 그걸 피해서 들어갔던 초소 안에서, 그는.

‘군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큭, 허억.”

빠른 속도로 기도가 조여 오는 감각에 레스는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한쪽은 ……왕자님께 지휘를 맡겨 다리를 건너 퇴각한 후 본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욱. 우웨엑.”

냉정한 척, 똑똑한 척하며 지껄여 댔던 처참하게도 형편없던 선택에 구역질이 솟아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토했다.

‘나머지는 저와 함께 이곳에서 아군의 퇴각을 보조합니다.’

너무 많은 이가 그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다. 가까스로 했던 선택은 더 많은 이를 죽여 버렸다.

그 희생을 치르고 필사적으로 구해 냈던 것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배반자였다.

그는 정말이지 무언가를 제대로 했던 적이 없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구해 낸 적이 없었다.

“……키샤.”

차라리 처음 셀레스트에 폭격이 떨어졌을 때 죽었던 것이 그였다면. 아니면 조금의 염치라도 있어서 다레즈에서 같이 죽어 주었다면.

린스베른에게 잡혀 왔을 때 일찌감치 죽어서 레티시아의 족쇄가 되지 않았더라면.

처절했던 그녀의 비명에 레스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는 다시 한 번 힘껏 속박된 팔을 풀려 발버둥을 쳤다. 불길이 날름거리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 새빨간 불길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 안에 묶인 손목을 집어넣었다.

“―!”

눈앞이 새하얘지는 고통에 으스러질 듯 악문 어금니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시가의 연기와 발등을 지졌던 담뱃불, 어두컴컴하고 좁은 먼지 냄새 나는 골방, 소리 없이 웃어 대던 간수의 뱀 같은 눈이 환상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다가 결국 레티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처참하게 일그러진 우는 얼굴.

그와 얽히지 않았다면 그런 끔찍한 감정 따윈 모른 채 아름답고 빛나고 재미있는 것만 즐기며 살 수 있었을 당신이.

“윽, 아으윽!”

옷이 타들어 가 살이 지져지고 신경이 직접 타들어 가는 통증 속에서 레스는 손목을 묶은 밧줄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반쯤 타들어 간 밧줄이 뚝 소리와 함께 끊어지자 단숨에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는 타들어 가는 의자를 바닥에 내리쳤다. 의자가 처참하게 박살이 나자 그는 의자 다리에 불을 붙여 다리를 묶은 밧줄을 같은 방법으로 끊어 냈다.

참을 수 없는 아픔에 온몸이 뒤틀렸다. 시뻘겋게 타들어 가 빠르게 부어오르는 팔목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한 채 통증을 참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우지직 소리를 내며 군데군데 내려앉아 가는 지붕은 지금 당장이라도 한꺼번에 내려앉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을 몇 번 몸으로 부딪쳐 봤으나 자물쇠가 걸렸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면서도 레스의 눈이 분주하게 사방을 훑었다.

벽. 기둥. 지붕. 문. 창. 바닥. 벽난로.

순식간에 사방을 훑은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곤 주저 없이 문과 정 반대쪽에 있는 벽을 향해 돌진했다. 불이 붙어 타들어 가는 벽에 몇 번이고 몸을 부딪쳤다.

쾅, 쾅, 허술한 나무를 엮어 만든 오래된 오두막의 벽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온몸이 아팠다. 어지러운 머리는 현실과 악몽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 구역질과 기침이 동시에 찾아와 그는 눈과 입에서 질질 침과 눈물을 흘리며 넘어가려는 숨을 필사적으로 이었다.

그는 솔직히 지금의 이 상태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셀레스트 전선에 포탄이 떨어진 밤 이후, 그의 인생은 매일이 다 이런 식이었다.

좀 살 만하다 느꼈던 건, 당신과 있을 때뿐이었다.

당신과 있으면, 아니 당신 생각을 할 때면 이 출구 없는 지옥 굴에 창문이 하나 뚫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그 희박한 공기를 갈구했나 보다.

……호박죽이 먹고 싶다.

해바라기가 보고 싶어.

당신과 춤추는 거, 정말 좋았는데.

당신을 만지고, 품에 안고, 웃음소리를 듣고, 시시각각 풍부하게 넘쳐흐르는 그 표정 하나하나를 다 눈에 담아 기억에 새기며,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당신이 있기에 다시금 아름답게 빛나던 이 하루하루를, 당신과 함께 사는 걸, ……내가 사실 얼마나 원했는데.

사실, 아까 당신이 홀로 달려왔을 때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했으면서도 기뻤어. 당신이 나를 찾아와 줘서 내가 조금은 가치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고 구하러 와 주었어.

……그러니까.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어코 벽이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잔재들을 팔을 들어 막은 레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재빨리 무너져 내리는 오두막에서 뛰쳐나갔다.

화상과 타박상으로 아려 오는 온몸에 싸늘하고도 상쾌한 겨울바람이 쏟아졌다. 숨통이 탁 트이는 상쾌함에 그는 크게 두 번 심호흡했다.

“당신, 만큼은.”

불에 그을리고 잦은 기침으로 갈라진 목을 긁으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키고 싶어.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씨발, 이 새끼 뭐야! 어떻게 나왔……!”

오두막의 입구에서 그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던 남자 둘이 경악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남자의 뒷머리를 그러쥐며 무릎으로 안면을 후려갈기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져 나왔다. 레스는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는 남자의 목을 잡아 단번에 비트는 것과 동시에 그 몸을 그 동료에게 홱 밀어젖혔다.

“씨, 씨발!”

반사적으로 시체를 받아 든 남자가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체를 홱 밀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스는 남자의 등 뒤로 파고들어 팔뚝으로 목을 휘감았다.

“컥, 크흑…….”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근육질의 거한이 발버둥을 쳤다. 화상을 입은 손목의 상처가 찢기며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숨이 막혀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긁어 대는 남자의 발버둥에 레스는 오히려 더 팔에 힘을 주어 비틀었다. 남자의 입에서 게거품이 흐르더니 눈이 공막 뒤로 넘어갔다.

기절했는지, 숨이 끊어졌는지 모를 남자의 몸을 바닥에 내던진 레스는 재빨리 그 허리의 홀스터에서 피스톨을 꺼내 절뚝거리며 내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일찌감치 출발했던 나머지 일행이 산길을 내려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시르!”

“레스!”

소란에 뒤를 돌아보았던 왕자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고, 레티시아의 눈에 확 생기가 감돌았다. 순간적으로 팔을 쥐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레티시아는 온몸으로 린스베른을 들이받으며 다리로 그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이게!”

두 몸이 엉켜 얼어붙은 땅바닥에 굴렀다. 넘어질 것을 예상하고 재빨리 머리를 들어 올린 레티시아와는 달리 머리를 정통으로 바닥에 부딪친 린스베른은 순간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왕자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달려오려던 차에 레티시아는 그대로 계속 몸을 굴려 산 아래로 떨어졌다.

“잡아!”

린스베른이 소리치는 것이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굴러떨어지는 레티시아를 애써 외면한 레스는 땅바닥에 엎드려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저격용 스코프가 달리지 않은 피스톨은 라이플보다 훨씬 더 가벼웠고, 미친 듯이 떨리는 총구는 조준을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거의 일 년을 쓰지 않았음에도 총기는 총기.

“쏘지 못하게 해!”

레스를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쳐 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역시 피스톨을 꺼내든 이들이 다급하게 쏘아 대는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역풍에 100m가 조금 넘는 거리. 이 조건으로 피격당한다면 그건 하늘이 그를 증오하는 것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결과다.

총을 쏘아 대는 이들을 무시하며 레스는 피스톨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한계까지 곤두선 온몸의 감각이 능선 아래에 있는 린스베른의 가슴을 조준했다.

“이 새끼, 멈춰!”

달려드는 남자들의 손아귀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기 직전, 레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번의 날카로운 소음이 공기를 찢었다. 린스베른의 머리를 크게 빗나간 첫 번째 총알, 총알의 낙하 때문에 바닥에 처박힌 두 번째 총알에 이어 세 번째 총알은 정확히 그의 복부에 박혀 들었다.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미친.”

경악 어린 표정으로 남자들이 레스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린스베른을 번갈아 보았다. 저 멀리서 소란을 틈타 개가 짖어 대는 소리와 달려오는 다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지! 경관이다!”

“무기를 버려! 움직이면 쏜다!”

서른은 훌쩍 넘는 경관들의 수에 결국 남자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이명으로 시끄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레스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팔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은 자꾸만 뿌예지고 의식이 위험하게 멀어져 갔다.

“레스, 레스!”

기절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 쓰러지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잔뜩 젖은 목소리가 달려와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흐릿한 시야를 들어 레스는 간신히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키샤.”

이름을 부르자 뿌옇게 일그러진 레티시아의 얼굴이 환한 미소를 터트렸다. 꽉 힘을 주어 온몸으로 그를 끌어안은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당신은 정말 손이 많이 가네.”

“당신이 할 말은 아닌데요.”

그에 습기 젖은 웃음만이 돌아왔다. 가만히 그의 어깨에 기댄 얼굴이 비벼지고 그의 옷자락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아득하게 멀리 들리는 저편에서 총에 맞은 린스베른을 제압하고 도망친 그의 일당을 잡으러 흩어지는 경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와 땀으로 엉망으로 엉켜 이마에 달라붙은 그의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넘기며 레티시아가 속삭였다.

“다 끝났어, 레스.”

“…….”

“당신도, 나도, ……무사해.”

그 말에 총을 거머쥐고 있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이제껏 잊고 있던 아픔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레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 얼굴 위로 레티시아의 손이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살아 있는.

레스는 그 손을 매달리듯 잡으며 뺨을 비볐다.

살아 있다.

살아 있어.

……이번에는 구할 수 있었어.

그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레티시아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 총은 그만 내려놔도 돼.”

그리고 그 말에 레스는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의식의 줄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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