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린스베른이 도주한 지 열흘.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던 하숙집에 돌아오자 반기는 것은 산처럼 쌓여 있는 편지들이었다. 그냥 이대로 등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순간 솟는 걸 애써 억누르며 레스는 상자 가득 담겨 있던 편지를 식탁 위로 쏟아부었다. 기말 과제 기간 중 도서실에 틀어박혀 흰 종이와 검은 글자만 며칠을 들여다봤던 악몽이 떠오르는 듯해 속이 메스꺼워졌다.
한숨을 삼키며 하나하나 편지를 열어 보며 내용을 확인하고 있자니 뒤에서 팔이 쑥 뻗어 나와 편지 한 묶음을 가져갔다.
“에다렌 학장에 레카슨 교수에…… 하, 로카슨은 너 안 좋아하지 않았냐?”
당연하다는 듯 쓱쓱 편지를 넘기며 읽어 보던 세자르 메힌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레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내 편지들을 읽어 보지…….”
“네가 처음 퇴원한 후 침대에서 빌빌거리고 있을 때 네 세금이며 고지서를 다 읽어 보고 해결해 준 건 누구지?”
“메힌 님이요.”
“오냐.”
레스가 식탁 위에 벌려 놓은 너저분한 종이의 산을 혐오 어린 눈으로 바라본 세자르는 골라낸 편지 몇 장을 넘겨주었다.
“로카슨이랑은 일하지 마. 같이 일한 조교 중에서 정시에 퇴근하는 녀석이 하나도 없대.”
“나는 로카슨한테는 구직서 넣은 적도 없었는데.”
“네가 일을 구한다는 소문이 꽤 퍼졌고, 네가 요즘 워낙 유명해졌으니 로카슨이 먼저 들이댔겠지. 네가 왕태녀 전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고 생각하던데.”
“세자르, 어쩌지? 나, 생각보다 엄청나게 잘나가는 것 같아.”
그 말에 단숨에 싸늘해지는 세자르 메힌의 표정에 레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안 그래도 소데베르크 교수님이 추천서 써 주셨어. 뷘터하우젠에 군 역사학 과목의 교수 자리가 비었다고 하더라.”
“그분은 은퇴하셨다면서 무슨 껌 씹는 것처럼 간단하게 교수직에 사람을 꽂아 넣어?”
“적폐가 내 편이 되니 좀 짜릿하긴 하지.”
“그래서, 하게?”
“생각 중이야. 군 역사학은 가르쳐 본 적도 없고, 이렇게 교수 추천으로 교수직 얻어서 뒷말 나오면 교수님께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또?”
“한동안은 키샤랑 놀 거야.”
“……그럼 지금 당장 공주님한테 꺼지지 않고 왜 황금 같은 내 휴일을 방해하며 낭비하고 있는 거냐?”
“공주님을 만났다고 지금까지 지고지순하게 곁을 지켜 준 세자르를 버리는 건 파렴치한이나 하는 짓―.”
정말로 살충제를 향해 손을 뻗는 세자르를 피해 현관까지 도망친 레스는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세자르, 그동안의 네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언제 한 번 저녁이라도 함께―.”
“꺼져.”
기어코 쿠션이 날아오려고 해 레스는 재빨리 현관문 밖으로 도망쳤다.
‘지금 집에 들어가려고 했다간.’
죽겠지.
살기까지 느껴졌던 룸메이트의 눈빛에 소리 죽여 웃음을 참은 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충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에 열리는 사냥회의 후야제에 참석할 준비를 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이참에 좀 걸을까.’
서서히 해가 져 가는 길거리는 보름 동안 이어졌던 사냥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장갑과 목도리, 겨울 코트로 꼭꼭 무장한 이들이 하얀 입김을 불어 가면서 색색의 전구로 장식한 노점상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의 발길을 붙잡으려 호객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거리 악사들은 경쾌한 음률의 곡을 연주했다. 까르르 웃는 목소리가 종처럼 울렸다.
‘세자르한테는 로쿰이라도 사 갈까.’
그 인파의 기분 좋은 소란에 몸을 맡기며 레스는 여유롭게 노점상들을 살폈다. 너무 놀리는 것에 재미를 들였다가는 진짜로 화를 낼지도 모르니 뇌물이 필요했다. 여전히 음이 맞지 않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레스는 매대의 군것질거리들을 골라 들었다.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들이 취향인 세자르에게는 로쿰을, 색다른 걸 좋아하는 공주님께는 저 정체 모를 까만 걸, 그리고 야근에 지쳐 쿠데타를 일으키려 들 공주님의 비서들에게는 달콤한…….
“레, 레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등 뒤에서 팔을 그러쥐는 손을 반사적으로 꺾어 버린 레스는 아픔에 소리도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얼굴을 굳혔다.
“……형.”
끙끙거리는 얼굴이 익숙한 것이라 레스는 뼈를 부러트릴 기세로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형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에?”
“레스―.”
“왕자와는 이제 상종 안 하기로 했어?”
“그, 그건 맞지만…… 네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야!”
“……진짜로 왕자와 결별했다고?”
기가 막힌 듯한 그의 표정에 하인스 키시르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깨물어 댔다. 마르고 눈가가 거뭇해진 채로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해 보이는 형의 얼굴에 동정심이라도 들 법했으나 그 순간마다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반년도 채 안 된 날의 기억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악을 써 댔던 그를 바라보던 형의 얼굴.
돌아서던 등.
뭐라 말을 내뱉으려다가 그는 그냥 포기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레, 레스! 잠시만― 그게 아니야. 정말 할 말이 있어!”
“…….”
“잠시만 내 말을 들어 봐. 정말 중요한 말이야!”
“……형, 좀 그만―.”
“왕자가 너를 죽이려 해!”
애써 소리를 낮춰 내지른 말에 성큼성큼 내디디던 레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동생을 쫓아가느라 뻘뻘 땀을 흘린 하인스 키시르는 숨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자, 헤냐 로페르를 죽였어.”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소리야. 애써 준비한 도피 계획도 내팽개치고 그 여자를 죽인 후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도피 자금을 죄 털어서 뭔가를 꾸미는데…… 레, 레스, 네 뒷조사를 시켰어. 나한테도 감시가 붙어서 겨우 빠져나온 거야. 젠장,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의심스럽기 짝이 없겠지만―.”
“……아니, 믿어. 딱 왕자님께서 하실 만한 행동인걸. 그리고.”
찰칵, 인파의 소음 속에서도 그 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레스는 침음성을 삼키며 어느새 인파 속에서 떨어져 나온 사내 둘이 롱코트의 옷자락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민 총구로 하인스의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눈앞에 증거가 나타났으니.”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하인스의 표정에 오히려 실풋 웃으며 남자들은 그를 둥글게 둘러싸며 원을 좁혀 왔다.
“키시르.”
여섯.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이들도 적어도 넷은 더 된다.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던 남자는 레스의 어깨에 냉큼 팔을 두르며 자못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높으신 분이 경을 보자고 하는데, 경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두 가지씩이나.”
“하나, 우리를 얌전히 따라오는 것. 둘, 우리에게 옮겨지는 것. 안타깝게도 나이가 드니 무거운 걸 들기는 힘들단 말이야? 그러니.”
하인스 키시르의 옆구리에 겨누어졌던 총구에 꾹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새하얗게 질린 하인스의 얼굴을 보며 히죽거리며 웃은 남자는 까딱 고갯짓했다.
“형의 똥으로 가득 찬 뱃가죽에 새로운 구멍을 뚫어 주기 싫으면 따라와.”
* * *
눈을 가리던 천이 휙 벗겨지고 팔이 등 뒤로 돌려진 채 밧줄로 단단히 결박된 레스는 바닥으로 떠밀렸다. 바닥에 머리가 부딪치는 것만큼은 막았으나 단단한 바닥에 쓰러지며 부딪친 어깨가 찌릿하게 아파 왔다. 어둑어둑한 집 안을 노랗게 흔들리는 등잔불만이 밝혔다. 먼지와 오래된 피비린내가 풍기는 그곳은 나무꾼의 버려진 오두막처럼 보였다.
“와, 왕자님.”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 개가 끙끙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는 달리 손이 묶여 있지도 않은 하인스가 린스베른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왕자님! 자,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배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 제가 정말 잠깐 정신이 나가서…… 아주, 아주 잠깐 미쳐서…….”
린스베른은 마치 공연을 구경하는 듯 그런 하인스를 옅은 미소를 띤 채 바라보았다. 도피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까칠하게 말라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에서 안광만이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주위에는 여섯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왕자파의 추종자들은 다 어디 갔는지 그들은 고용된 용병들이나 건달들처럼 보였다. 허리에 차고 있는 나이프와 피스톨, 손에는 블랙잭을 쥐고 휘휘 돌리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하인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녹아 버릴 듯 땀을 흘려 대고 있었다.
“혀, 협박! 협박을 당했습니다! 제가 왕자님 측근이라는 걸 알고 쓸 만한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 저희를 다 죽여 버리겠다고 해서, 저, 저는 왕자님의 안위를 위해 그나마 쓸모없는 정보를 고르고 골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키시르,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하인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 그래도 안색이 좋지 않은 얼굴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렸다.
“레, 레스, 나는, 나, 나는…….”
그 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듯해 레스는 눈을 돌려 버렸다.
“……사실입니다. 제가 형을 협박했습니다.”
“호오?”
“형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했는데 제가 입을 열지 않으면 형까지 공모자로 잡아들일 거라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믿기지 않는데?”
그렇게 말하는 린스베른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넌 예전부터 거짓말을 정말 끔찍하게도 못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아. 이래 가지곤 내가 하인스를 살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어?”
“커흑!”
무자비하게 배를 걷어차인 하인스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흐느끼는 신음, 고통을 참기 위해 웅크린 몸 위로 흔들리는 먼지 낀 가스등의 노란 불빛. 오래된 먼지와 피비린내의 악취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다시금 발목에 날붙이가 들이대어지는 듯한 착각에 레스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럼, 내게 대체 뭘 바라는 겁니까.”
“빌어.”
“…….”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 보라고.”
레스는 즐겁게 지껄이는 린스베른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다.
‘제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주는 이들이 생길 거다.’
……저자가, 그런 말을 했던 시기도 분명, 있었는데.
떠올릴수록 목이 막혀 오는 듯한 끔찍함에 그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왕자를 바라보는 눈빛에 선명하게 떠오른 경멸에 하인스가 다급히 그에게 기어왔다.
“레, 레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이 그의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레스, 어서 빌어. 자,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라고!”
“……형.”
“내, 내가 왜 이 꼴이 됐는데! 너 같은 걸 동생이랍시고 둬서, 다, 다 너를 살리려다가 이렇게 된 건데 네가 그 정도도 못 해 줘?”
“…….”
“당장 빌란 말이야, 이 개자식아! 기어코 나 죽는 꼴을 봐야겠어? 이게 누구 탓인데! 이 고마운 것도 모르는 새끼! 젠장, 내가 너를 구하려 하는 게 아니었어!”
팔다리가 묶여 쓰러져 있는 레스의 멱살을 움켜쥐고 하인스가 미친 듯이 흔들어 댔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는 그에게 그의 등을 블랙잭으로 툭툭 찔러 대는 남자들과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린스베른의 시선이 와 박혔다.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하인스는 레스의 머리를 그러쥐더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을 내리쳤다.
“빌어! 어서 빌라고, 빌어!”
“하하! 이거 걸작인데?”
정말로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린스베른의 웃음소리가 깔깔거리며 울렸다. 거기에서 무슨 희망을 봤는지 뺨을 내리치는 하인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빨리 빌어! 빨리 잘못했다고, 살려 달라고 빌라고! 나를 죽게 둘 거야? 나, 난 아내가 있어! 딸이 있다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난 주, 죽을 수 없어! 너 때문에 죽기 싫다고! 젠장, 레스 키시르!”
살이 터지고 피가 손에 묻어났다. 거의 엉엉 오열하며 그의 뺨을 때리는 형의 모습에 레스는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리는 듯했다. 꽤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존재가 벌레처럼 찌부러지는 역함.
이게 어떻게 내 탓이야.
어떻게 이것까지, 또 내 탓이야.
형이 이리 나약하고, 형의 선택이 다 이리 지랄 맞게 최악이고,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이 이리 졸렬하고 정신 나간 새끼인 게 어떻게 다 내 탓이 될 수가…….
‘조금만 고분고분하게 굴면 제대로 된 감방에 넣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대위님이 남으시겠다고 했는데 보좌로서 도망칠 수 있나.’
‘벌레 같은 새끼, 좆도 아닌 게 상관 노릇을 하려 들더니, 결국 자기 부대를 통으로 말아먹고.’
‘키시르 씨! 셀레스트 전선에서의 패배에 왜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너, 너만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왕자님이 이렇게나 관용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걸 걷어차서 우리까지 다 곤란하게 만들고……!’
훅, 얼굴로 내뱉어지는 시가의 매캐한 향. 경쾌하게 웃으며 등을 치던 손길. 퍽, 얼굴에 던져진 썩은 달걀이 깨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과 눈이 멀 정도로 요란하게 터지는 카메라의 플래시, 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잡혔던 팔에 가해졌던 악력과.
더 이상 생각을 거부하며 그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울고 싶은 것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피가 날 때까지 손찌검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였다. 혼자서라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당신에게 총구가 겨눠져 있어서 꼼짝도 못 하고 끌려와서 이런 진절머리 나는 경험을 반복하게 하는 저자가 그래도 형이라고, 그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묶인 팔다리에 조금 힘을 주어 봤다가, 얻어터질 때 흐른 피로 흐릿해진 눈을 몇 번 깜박여 보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겨눠진 피스톨들을 바라보다 레스는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몸을 늘어트렸다.
“……잘못, 했습니다.”
말이라면 얼마든 해 주지 못할까.
……어차피, 이런 짓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잘못했는데?”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린스베른이 짐짓 다정하게 몸을 숙였다. 비뚤어진 즐거움으로 눈이 희번덕였다.
“왕자님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것, 살려 주신 은혜를 잊고 앙심을 품은 것, 건방지게 고개를 들어 존안을 본 것…….”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굴었단 말이지.”
그 목소리에 담긴 즐거움이 최고조를 치며 가늘게 갈라졌을 때, 레스는 불길한 예감에 홱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잠깐―.”
“잘못된 일을 알고서도 했다는 건 죄질이 더 나쁘지. 벌을 줘야겠는데?”
철컥, 린스베른이 들고 있던 피스톨의 안전장치가 풀렸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안도 섞인 표정으로 레스에게서 떨어져 있던 하인스의 머리칼을 그러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 관자놀이에 총구를 꾹 짓눌렀다. 하인스가 사색이 되어 다급히 소리쳤다.
“와, 왕자님! 시키는 대로 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 모든 소리가 순간 뚝 끊겼다. 충격과 배신감에 크게 떠진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하인스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뻣뻣하게 얼어붙은 하인스의 몸이 바닥을 쳤다. 레스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을 마주 보듯 쓰러져 죽어 버린 형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시선을 억지로 들어 올린 레스는 린스베른을 바라보았다.
……왜?
차마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한 채 시선만으로 묻는 그에게 린스베른은 유유히 웃어 보였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었거든.”
그 말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대체, 대체 왜…….”
어딘가 비틀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가 화풀이로 여자들을 때리고 강간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짐작했다. 왕자가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는 다르게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 정도로 크게 대가를 치를 만한 것이었나?
“왜 내게 이렇게까지 해! 내가 당신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퍽, 복부가 걷어차여 레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두개골이 흔들리는 충격에 헛구역질이 났다.
“쥐뿔도 없는 천한 비렁뱅이 새끼가.”
머리가 걷어차이고.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들고.”
가슴이 짓밟히고.
“누구를 동정해?”
다시, 배를 걷어차여.
“네가 뭐라고 감히 나를 경멸해!”
후두둑, 한 움큼의 핏덩이가 토해졌다. 얼마를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아픔에, 짐승처럼 다뤄지는 모멸감에, 숨을 막히게 하는 분노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묶인 채 바닥에 닿은 손가락이 갈퀴처럼 휘어 바닥을 긁었다. 긁고, 또 긁어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나올 정도로 긁어 대며 레스는 머리를 세차게 바닥에 짓찧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어. 내가 무언가 놓친 게 있지 않았을까. 무언가 나도 모르게 잘못한 게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언가를 착각해서.”
그가 그 오래전, 뷘터하우젠의 게시판 앞에서 만났던 그 소년은 강하고도 곧아 보여서,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왕자가 자신을 그렇게 미워한다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는 왕자이고, 이 나라를 지키기로 맹세를 한 군인이고, 아니 그게 아니라 적어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면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자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부하들을 그렇게 쓰레기같이 저버리지는 않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미워도, 증오스럽고 보기 싫어도 적어도 당신이 사람 목숨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나의 목숨을, 아픔을, 절망을 원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정말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당신을 구하려고 남는 것을 택했던 나를 이렇게 집요하게 망가트리려 하진 않지 않을까. 내가 겪어야 했던 일에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당신의 그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내가…….”
“닥쳐!”
다시 한 번 거센 발길질이 날아와 말이 뚝 끊겼다. 턱 숨이 막혀 폐를 토해 낼 듯 기침을 해 대는 레스의 머리채를 그러쥐어 들어 올린 린스베른이 악을 썼다.
“죽은 듯이, 내 눈에 띄지 말고 살라 했잖아. 죽어도 아쉬워할 새끼 하나 없을 쓰레기를 자비를 베풀어 살려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내 동생을 꾀어 나를 배신하게 해?”
“…….”
“잘난 것 하나 없는 죽다 만 다리 병신이! 네까짓 게 죽어도 눈치나 챌 이가 있을까!”
뚜둑, 기어코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레스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몸을 한껏 웅크리며 비명을 삼켰다. 쇼크로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가며 경련하듯 떠는 그의 모습에 린스베른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뷘터하우젠 시절, 레스 키시르는 단 한 번도 바닥에 구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빳빳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조심스럽게 미소 지으며 흙투성이가 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자님, 정말 대단하셨어요.’
……그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저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던지.
“왕자님, 왔습니다.”
그때, 지금까지 창밖을 주시하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급히 입을 열었다. 그에 린스베른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발끝으로 쿡쿡 찌르고 있던 레스의 목덜미를 내버려 두고 곧게 섰다.
“한 가지 정정해야겠군.”
창밖은 눈이 하얗게 쌓여 가고 있는 새벽이었다. 눈 덮인 상록수들의 가지 사이로 황금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등에 진 채 누군가가 오두막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뻐해라, 키시르. 적어도 한 가지는 내가 틀렸어.”
초점이 잡히지 않아 멍한 눈이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런 레스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끈 린스베른은 문을 덜컥 열어젖혔다. 확 얼굴로 불어 드는 찬바람에 고통으로 멀어졌던 정신이 순간 다시 돌아왔다. 린스베른은 즐겁게 소리 내어 웃었다.
“내 동생은, 정말로 너를 좋아했던 모양이야.”
오두막에서 한 스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레티시아가 깊게 뒤집어쓴 겨울 코트의 후드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