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인스 키시르는 모자의 챙을 깊게 눌러쓰며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그는 흐릿한 가스등의 그림자에 숨어 어두침침한 겨울밤의 거리를 은밀히 걸었다. 종이 울리는 소리, 증기 기관이 쉭쉭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소리를 배경으로 밤이 깊었음에도 기차역은 사람으로 붐볐다.
“자네 들었나? 정말이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나는 언젠가 이런 게 터질 줄 알았지. 왕자는 어딘가가 좀 수상했어. 분명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데도 어딘가 좀 쎄한 게 말야…….”
“그나저나 왕태녀가 왕을 이렇게 간단히 쫓아내 버리다니…….”
“지금까지 참은 것도 신기한 거지. 왕태녀가 호구 등신이 아니면 언제까지 보고만 있었겠어?”
“왕자파는 이걸로 끝이군. 그 중요하신 왕자님이 현상 수배범이 되어 버렸으니.”
열차를 기다리며 쑥덕거리는 이들의 목소리에 하인스는 더욱 몸을 사렸다. 인파를 피해 역의 물류 창고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숨어든 그는 재빠르게 창고의 문패를 살폈다. 원하던 표식을 찾은 그가 문을 두드리자 창고지기의 복장을 하고 있던 남자가 문을 열었다.
“키시르 씨.”
“네베라 씨.”
“열차의 준비는 되었소?”
“예, 역무원들을 매수해 두었으니 조용히 숨어 들어가기만 하면 국경까지 검문 없이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말에 남자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에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지는 걸 느끼며 하인스는 느릿하게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랐다.
“그래, 데히록도 등을 돌렸다 이거지.”
왕자는 창가에 기대어 선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며칠간의 도피 생활에 왕자는 면도칼처럼 시퍼렇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파르라니 돋아난 턱수염을 쓸어 대며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정돈한 왕자를 몇 안 남은 부하들이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바라보았다.
“왕자님, 이제 슬슬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다행히도 왕자는 자신의 변화한 위치를 잊어버릴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했던 옛 추종자의 변절에 길길이 날뛰며 아직 떠나지 않은 부하들의 관성처럼 남아 있는 충성심을 시험하는 대신 린스베른은 꽉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 쉰내 나는 거지 소굴에서 한순간이라도 더 있다간…….”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던 왕자의 목소리가 순간 뚝 끊겼다.
“왕자님……?”
“……저년.”
창틀을 그러쥐던 왕자의 손에 콱 힘이 들어갔다. 창 너머로 뭘 봤는지 시선조차 떼지 못하는 왕자의 눈에서 확 불꽃이 튀었다. 그 광기에 하인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년을 데려와.”
“왕자님, 지금은 그럴 때가―.”
왕자를 말리려 했던 부하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의자가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피한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 왕자는 창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하인스는 조심스레 왕자의 시선을 좇았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역사 앞에서 역무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왕태녀가 온 건가 싶을 정도로 닮은 뒷모습이었다. 구불거리는 풍성한 붉은 머리가 등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왕자가 부드럽게도 들리는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지금 당장, 저년을 내 앞에 데려와.”
* * *
하인스 키시르는 회중시계와 눈앞의 광경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며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헤냐 로페르, 왕자의 사생아를 안아 들고 창월궁 앞에 나타나 이 모든 악몽을 시작했던 여자는 사내 둘에게 어깨를 잡힌 채 끌려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왕자의 앞에 무릎을 꿇려졌다.
성큼성큼 걸어간 왕자가 그녀의 머리채를 확 휘어잡아 들어 올렸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헤냐가 비명을 삼켰다. 린스베른의 손이 몇 번이나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누구지?”
“누구냐니, 다짜고짜…….”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성인 남자만 보면 불쌍하게 벌벌 떨었잖아. 네가 제 발로, 혼자서 그 촌구석에서 기어 나왔을 리가 없는데, 누가 시켰어?”
그 말에 머리칼을 휘어잡힌 헤냐 로페르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왜 누가 시켰다고 생각해?”
말을 해 보라는 듯 왕자가 짐짓 다정하게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헤냐 로페르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정말 변하는 게 없구나.”
“총명하신 로페르 양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실까?”
“항구가 없는 브륀셀에서 당신이 도망칠 구멍은 기차를 통하는 것 정도지. 여기서 돌아다니다 보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 당신은 절대로 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에 린스베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경련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열차에 숨어들어 도망가야 할 처지일 텐데 굳이 나를 발견하자 끌고 왔지. 솔직하게 말해 봐. 정말로 내 배후가 궁금했던 거야, 아니면.”
“…….”
“예전처럼 나를 엎어 놓고 박고 싶었어? 당신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말에 예고도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얻어맞은 입술에 피가 맺히고 부어터져 퍼렇게 변해 갔다.
“당신은 예전부터 그랬지. 병신 취급당했다고 혼자 열 받아서 씩씩대다가 그 상대에게는 무서워서 보복 못 하겠으니 애먼 상대 잡아서 화풀이하는 거.”
“하.”
“이렇게 꼬리 말고 쫓겨나려니 자존심이 아파서 죽을 것 같잖아. 그렇게 치를 떨던 누나에게 처참하게 지고, 부하들은 다 배신하고, 도망갈 곳에서는 예전처럼 존경받으며 편안히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강자가 된 느낌을 내려고 한 거 아냐.”
“……재미있는 분석이야. 더 할 말이 있나?”
“더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들어 볼래?”
머리채를 잡혔던 헤냐의 눈이 환희로 반짝였다.
“나야.”
넘치는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녀는 꿈꾸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린스베른에게 속삭였다.
“내가 왕태녀 전하께 이 모든 걸 건의했어.”
“……이제 망상증까지 도졌지?”
“당신은 절대로 스스로 인정 못 하겠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벌레 같은 게 당신을 이런 지경으로 만들다니.”
하인스 키시르는 다급하게 왕자의 표정을 살폈다. 더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왕자의 얼굴을 보며 헤냐 로페르는 극치감이라도 느끼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아, 최상이야. 당신의 그 낯짝.”
뎅―.
그 순간, 창밖에서 일곱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에 맞춰 기차의 기다란 경적이 울리더니 곧 차장이 울려 대는 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시에 도착하는 키노페 행 열차가 승강장에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 열차를 잡아타지 않으면 내일 해가 밝기 전까지는 국경으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지 않는다.
“왕자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아, 그리고 말이야.”
하인스 키시르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헤냐 로페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신, 별 지저분한 협박을 지껄이면서 박아 대는 거 좋아하던데. 하핫, 좆이라도 커야 겁이 날 거 아냐. 쥐꼬리만 한 걸 좆이라고 달고 휘두르니 귀여워서 웃음이 다 나왔잖―.”
“너.”
“와, 왕자……!”
말리려고 끼어들려 했던 부하들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여태까지 가장하던 모든 여유를 내팽개친 채 우악스럽게 여자의 목을 조르는 왕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너, 내가 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아?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네 목은 수수깡처럼 부러질 거야. 네가 보름쯤 후에 다 썩은 시신으로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누가 신경이나 써 줄까? 내가 죽였다고 알아챌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것 같아?”
“왜 없어.”
숨통이 막혀 캑캑거리면서도 여자가 악착같이 속삭였다.
“네가 있잖아.”
“…….”
“네가, 평생 기억할 거 아냐. 좆 작은 열등감 덩어리 패배자라는 말을 듣고도 반박할 말이 없어서 맞서 싸울 힘도 없는 여자, 목이나 졸라 죽였다는―.”
“닥쳐.”
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머리가 맨바닥에 짓찧어졌다. 그 가느다란 목을 양손으로 힘껏 쥔 채 그는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머리를 바닥에 찧어 댔다. 피가 흘렀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닥쳐. 닥치라 했어!”
입을 뻐끔거리며 목을 조르는 손을 긁어 대는 와중에도 헤냐 로페르는 웃었다. 그녀의 얼굴색이 새하얀 것을 넘어 새파랗게 변하고, 눈이 뒤로 넘어가면 갈수록 반대로 린스베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
패배자.
툭, 숨이 끊긴 몸이 바닥에 굴렀다. 하인스 키시르는 경악에 물든 얼굴로 환희에 찬 미소를 띤 채 차갑게 식어 버린 여자의 시체와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린스베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빠아아앙―.
기다란 경적이 울리며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생쥐가 든 독의 뚜껑은 막히고 그들은 죽은 여자와 미친 왕자와 함께 남겨졌다.
“……키시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다정하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목소리로 왕자가 몸을 일으켰다. 쥐고 있던 헤냐 로페르의 몸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던지며 린스베른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뺨에 튄 핏방울을 우아하게 닦아 냈다.
“네 동생이 언제 공주 저에서 기어 나오는지 알아내.”
하인스 키시르는 머리가 아찔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와서 분풀이를 하기엔 늦었습니다.
이렇게 미적거리다가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잡히는 거야말로 그 여자가 노리는 바입니다.
제가 그 아이 형이라는 걸 기억이나 하는 겁니까?
그러나 그 말을 내뱉는 대신 그는 짐짓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