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46)

4.

란드로스 이노첼이 죽었다. 사인은 자살.

달리는 차 안에서 펼친 조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한 린스베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룻밤 사이에 전소해 버린 이노첼 가의 타운하우스 서재에서 발견된 사체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시체의 품에서 발견된 이노첼 가의 문장이 새겨진 금제 회중시계만이 그 시체가 이노첼 가의 장자가 아닐까 추측하게 할 뿐이었다. 화재 사고가 아닌가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던 조사는 사흘 전 란스타인 일보에 란드로스 이노첼의 친필 유서가 도착함에 따라 완전히 방향이 바뀌었다. 세 명의 국가 필적 감정사는 그 유서가 란드로스 이노첼의 친필이라 증언했고, 그에 따라 조사는 부검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자살로 결론이 지어졌다.

[……이노첼 경의 안타까운 죽음은 연이어 강도를 높이고 있던 셀레스트 스캔들의 조사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수면과 식사조차 제공하지 않은 채 사방이 막힌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며칠에 걸쳐 이뤄지는 고문과 같은 비윤리적인 수사 환경에 대한 지탄은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조명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노첼 경의 죽음을 통해 셀레스트 사건 당시의 왕자의 행적에 대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인이 한 사람 줄었다는 것 역시 안타까운 사실이다…….]

작정하고 날을 세운 어조의 기사를 대충 훑어 넘기며 린스베른은 좌석에 깊게 몸을 묻었다.

“레반, 차를 돌려. 오늘 정오에 이노첼 경의 추모식이 레첸 대신전에서 열린다던데 한때의 친구로서 꽃이라도 바쳐야겠어.”

“예, 왕자님.”

끼이익, 작은 소리와 함께 타이어가 바닥을 긁더니 움직이던 차의 방향이 변했다. 엔진이 부드럽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린스베른은 눈을 감았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앞자리 조수석에서 흘끗거리며 보던 하인스 키시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자님, 크리첸 경이 보내온 편지가 하나 있습니다만…….”

그에 무성의하게 손을 내민 왕자는 단단히 밀봉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한때 그의 부하였던 펠리시아 크리첸은 셀레스트의 일로 성 미카텔라 훈장을 받은 후 그 연금으로 약에 절어 산다던 소문이었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도 쓰지 않던 그 여자가 무슨 일로 몸이 달아 편지까지 보냈는지 상상이 되어 그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어제는 멜키르에 오늘은 크리첸까지. 영 연락을 안 하던 이들이 왜 갑자기 연락하는 걸까.”

“…….”

“하인스, 펠리시아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 살려 달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제, 제가 부족해서 대체 무슨 말인지 영…….”

“그러게 말이야. 이건 지금 당장 태워 버려. 누가 잘못 보기라도 하면 내가 전우를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겠네.”

“그, 그러게 말입니다. 크리첸 경이 약을 건드리더니 아무래도 정신이 좀 불안정해진 것 같습니다.”

“정신이 불안정하다니, 하인스. 말을 가려서 하도록 해. 펠리시아는 내 소중한 전우야.”

“죄송, 죄송합니다.”

하인스 키시르의 등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부러졌다가 겨우 붙은 후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팔이 그에 반응하듯 떨려 왔다. 그게 보이는지 아닌지 왕자는 자못 친절하게 편지를 내밀었다. 흘끗 바라본 편지는 잔뜩 구겨진 채 심하게 흔들린 필체로 쓰여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하인스 키시르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느끼며 찰칵, 휴대용 라이터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불을 붙이자 편지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왕자님,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차가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멈춰 서고, 재빨리 먼저 내린 운전사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대신전 앞, 쏟아지는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몰려 있던 인파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 꽃을 들고 있는 지인들, 그저 구경을 위해 몰려든 구경꾼들 앞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린스베른이 차에서 내렸다.

사박, 발이 눈 덮인 땅을 디디고, 곧 그의 몸이 휘청하며 앞으로 쓰러졌다.

“왕자님!”

“괜찮아, 레반.”

재빨리 부축하러 나선 운전사에게 기대다시피 해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한 린스베른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은 무시한 채 신전 정문 앞 한켠에서 꽃을 팔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갔다. 멍하니 왕자의 등장을 구경하고 있던 아이는 갑자기 자기에게 다가오는 왕자의 모습에 당황해 새하얗게 질린 채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은 린스베른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꽃을.”

“아, 여, 여기, 여, 여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하얗게 얼고 갈라진 채 부어 있었다. 추위에 반쯤 시들어 있는 수수한 풀꽃들을 조심스레 받아 들며 린스베른은 아이의 손을 잡아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이 날씨에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꽃을 팔아 줘서 고맙구나.”

다정한 말에 아이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며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왕자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인스 키시르는 재빨리 아이에게 은화 몇 닢을 쥐여 주었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은화에,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들을 꺾어 준 값으로는 과분하게 많은 금액에 소녀의 눈이 확 커졌다.

“아, 저, 저기, 왕자님, 이렇게나 많이……!”

그에 그저 미소만을 한 번 지어 보인 린스베른은 발걸음을 옮겨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몰려들었던 인파가 머뭇거리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딱, 딱, 지팡이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와, 왕자님…….”

참전 용사의 예우에 따라 란스타인의 청월기(靑月綺)가 덮인 관 앞에 주저앉은 이노첼 부인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젖은 여자의 얼굴에 린스베른의 얼굴에도 서글픈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조심스레 숙이며 꽃잎을 뜯어 관 위에 흩뿌렸다.

“란드로스는 내가 가장 힘겨울 때 함께했던 전우이네.”

“…….”

“머리가 좋고 꿈이 많았던 이였지. 그 지옥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와, 왕자님……!”

순간 울음을 잊을 정도로 놀란 이노첼 부인이 큰 소리를 냈다. 왕자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왕자님, 눈물을 거두소서! 과, 과분하옵니다!”

“왕자이기 때문에 친우의 죽음에도 슬퍼할 수 없단 말인가?”

그 말에 이노첼 부인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짐승 같은 흐느낌이 악문 이 사이로 새어 나오고 그녀는 얼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린스베른은 울음으로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나와 란드로스는 삶과 죽음을 함께한 형제. 형제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와도 같네. 란드로스를 대신해서 부인이 편안하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조용히 거리를 둔 채 조의를 표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부인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린스베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 사실 란드로스가 죽기 전에 내게 부탁한 것이 있다네.”

“란디가, 무슨…….”

“‘왕태녀가, 저를 죽이려 합니다.’”

그 말에 부인의 숨이 멎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도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네.”

여자의 눈이 다른 의미로 커졌다. 경악과 혼란으로 물든 눈에 확 사나운 빛이 스쳤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란드로스는 신의를 지키려 했지. 수사관들이 아무리 압박해도 거짓 증언은 하지 않으려 했어. ……적당히 굽혀 줬다면, 그들도 만족했을지도 몰랐을 텐데.”

“왕태녀 전하께서 제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레스 키시르가, 그 전날 왔다고 했지.”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커다란 공동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린스베른이 고개를 숙이자 기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신에는, 목이 밧줄로 졸린 자국이 있을…….”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린스베른은 말을 멈췄다. 그는 홱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감히 내 친우의 마지막을 기리는 자리에서 소란을…….”

“누구 마음대로 친구고 누구 마음대로 마지막이야?”

린스베른의 얼굴이 확 굳었다. 결코, 여기서 들으리라 생각한 적 없는 목소리였다.

“란드로스……?”

“라, 란디!”

이노첼 부인이 홱 몸을 일으켰다. 한걸음에 아들에게 달려간 그녀는 미친 듯이 아들의 몸을 쥐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손안에서 사라질 듯 더듬었다.

“어, 어떻게 네가……! 이 사람들이 너는 분명히 죽었다고! 와, 왕태녀 전하가 협박해서, 키시르 경이 모, 목을 졸라서…….”

그 말에 란드로스 이노첼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이 개자식!”

뭘 어찌할 새도 없이 날아든 주먹에 린스베른이 바닥에 굴렀다. 뇌가 흔들리고 코피가 쏟아졌다.

“너, 너……!”

린스베른이 뭐라 더듬거리며 하려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체면 같은 걸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을 굴려서 피하자 란드로스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어 린스베른을 넘어트렸다. 바닥에 넘어진 왕자의 머리를 그러쥐며 몸 위로 올라탄 란드로스는 서슴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컥컥거리는 비명이 터졌다. 상식을 초월한 상황에 멈칫했던 구경꾼들이 한발 늦게 다급히 달려들었다.

“이노첼 경!”

“말려! 뭘 멍하니 서 있어!”

“젠장, 경비병은 어디 간 거야!”

“아이고, 왕자님!”

사방에서 팔들이 뻗어와 란드로스를 끌어냈다.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 그를 잡아 누르느라 경호원들의 얼굴에 진땀이 맺혔다.

“네가, 네가 사주했던 거지? 나를 죽여 버리라고! 그걸 왕태녀도 알고 레스 키시르도 알았는데 나만 몰랐지!”

“젠장, 이거 미친 거 아냐? 빨리 왕자님 모시고 나가!”

“왕태녀가 미리 사람을 심어 놓지 않았다면 거기서 숯이 되어 버린 건 네놈의 암살자가 아니라 나였을 거야. 그분이 나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면 그 새끼한테 목이 매달렸던 후유증으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이 새끼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란드로스를 제압한 경호원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사이에 경호원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린스베른은 부들거리며 떨리는 팔을 들어 얼굴을 훔쳤다. 얻어맞은 얼굴이 부어올랐다.

시선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나오는 불쾌한 즐거움과, 호기심과, 경악과, 혐오감이.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같이 거슬리는 이 상황에 린스베른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노첼 경이…… 여러 가지로 힘들었나 보군. 일단 데리고 나가서 오해가 있다면 풀도록 하지.”

앙다물린 잇새 사이로 애써 부드럽게 누그러트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말에 경호원들이 란드로스를 끌어냈다.

“놔, 놔! 이거 놓으라고!”

“이노첼 경, 얌전히 따라오면 왕자님께서도 선처하실―.”

“선처? 누가 누구한테 선처해?”

“이노첼 경―.”

“씨발, 자기 혼자 살겠다고 키시르한테 빌었을 때부터 감을 잡았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 말에, 주위가 싸늘하게 조용해졌다.

* *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뒤집혔다. 서류가 사방으로 휘날리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잉크병과 꽃병이 산산조각을 내며 박살이 났다. 왕의 이런 발작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보좌관들과 시녀들은 모두 일찌감치 방에서 빠져나간 후였다. 폭탄이 터진 듯 처참해진 집무실 가운데에 서서 이스칸타 3세는 덜덜 떨었다.

‘폐하, 경시청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 중요 참고인이 진술을 번복해 왕자님을 중요 용의자로 구속했다고 합니다.’

쾅, 주먹이 벽을 후려쳤다. 피멍이 들어 시뻘겋게 변해 가는 손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왕은 몇 번이나 벽을 후려쳤다.

‘이노첼 경은 왕자님께서 자기를 죽이려 사람을 보냈는데 와, 왕태녀 전하께서 보낸 사람이 살려 주었다고…….’

와장창, 집어 던진 의자가 창문을 깨며 정원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이스칸타 3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것이, 그것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어. 은혜도 모르는 년이, 이 자리를 빼앗으려고……!”

기억 속에서 아이답지 않게 섬뜩할 만큼 가라앉은 암녹색 눈동자로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안겨 들고 싶다는 듯 음울하게 시선으로 쫓으면서도 가끔씩 그렇게 그녀의 바닥을 캐내는 듯한 눈을 하곤 했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어 갈수록 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누군가를 닮아 갔다.

언제나 그녀를 한심하고 덜떨어진 저능아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선양하십시오.’

“킬데르트……!”

이젠 사라지고 없을 남자는, 그의 딸의 눈을 통해 끈질기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가 함께 떠나 드리지요.’

선심 쓰듯 지껄였던 헛소리에 구역질이 났다. 죽음조차 그자를 지워 버릴 수 없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망령을 쫓아 버릴 수 있을까.

“……린스베른.”

셋이나 낳았던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그녀를, 자라 가면서는 그자를 닮아 갔다. 개중 아들만이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했다.

“그것을 쫓아 버려야 해. 그것이 나를 끌어내리려고 올 거야. 그것이 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왕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내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중무장한 한 무리의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걸어 들어오는 레오르나의 모습에 이스칸타 3세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청월의 수호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왔습니다, 국왕 폐하.”

“그게 네 국왕의 집무실에 무장 경비를 멋대로 끌고 들이닥칠 이유가 된다는 거냐!”

“왕자 린스베른 레반스타인이 저지른 약자를 향한 패륜적인 강간, 폭행, 착취, 그리고 전시에 인간으로서, 지휘관으로서, 또한 한 나라의 왕자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행한 탈영, 군사 기밀 은닉 및 날조, 아군을 향한 배반 행위는 반역의 죄를 묻기에 충분합니다. 그 증거가 나날이 쌓여 가니 좌시할 수 없지요.”

“누구 마음대로 좌시할 수 있니 없니를 따지는 거지? 너는 이제 왕태녀도 뭐도 아닌―.”

“군부의 통촉장과 의회의 탄원서, 셀레스트 유족들의 성명서가 여기에 있사오니.”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한 걸음 다가온 레오르나의 손안에서 세 장의 문서가 흔들렸다.

“엄정한 천칭의 수호자로서 의무를 다하소서.”

그 목소리에 이스칸타 3세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위압감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 왕태녀는 시선만으로 제 어미를 찍어 내리듯 내려다보았다.

그 낯선 태도에 국왕은 급박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면을 쓴 듯한 무표정, 석상같이 견고하게 버티고 선 수사관들의 장신이 그녀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들은 왕태녀의 협박을 눈앞에서 들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감히 왕을 협박하는가!”

“폐하, 칙명으로 왕자에게 지엄한 국법의 심판을 내리소서. 왕자가 바닥으로 끌어 내린 왕실의 명예를 그나마 회복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누, 누가 마음대로 심판을 입에 담고, 대체 무슨 권위로 국왕을 협박하는가! 경비! 경비는 뭘 하고 있는가! 누가 공주를 들여보냈나! 분명히 공주에게는 자숙을 명했을―.”

그 말에 레오르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경쾌하고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집무실을 울렸다.

“자숙이라. 내가 하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 잘못을 빌고, 보여 주기식으로 근신을 하고, 정작 잘못한 쪽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꼴을 멀거니 보고만 있는, 그런 걸 기대하셨던 겁니까?”

“너, 너……! 내가, 내, 내가 네년의 더러운 수에 놀아날 거라고―.”

“결국, 놀아나시게 될 겁니다.”

“무슨…….”

“아주 예전부터 예견하시지 않았습니까.”

뻣뻣하게 굳어 파르르 떠는 어미에게 몸을 숙인 딸은 나붓이 속삭였다.

“어머니, 그만 물러나실 때가 왔습니다.”

그날.

이스칸타 3세는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다, 아이처럼 울어 대다가, 결국은 시체처럼 늘어졌다. 그런 국왕을 미소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레오르나는 해 질 무렵 국왕의 인장이 찍힌 구속 허가서를 들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 국왕은 자신이 폐했던 왕태녀에게 직무를 이양하고 칩거. 그 소식을 들은 린스베른 왕자는 가택 연금 중 추종자 몇을 이끌고 도주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의회와 대법원의 축복하에 레오르나 레반스타인이 국무 대리인으로서 집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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