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46)

3.

타인의 추락처럼 짜릿한 오락거리는 없다.

지금까지 흠 하나 없던 왕자의 스캔들은 마른 장작에 불을 땐 듯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국왕이 대놓고 왕자를 편애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힘을 잃었던 왕태녀파의 의원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왕자의 과거사가 현미경 아래에서 재조명되고 당사자인 왕자는 충격으로 있었는지도 몰랐던 지병이 도져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에 기자들은 기삿거리를 찾아 셀레스트 전선의 생존자들 주위를 메뚜기 떼처럼 에워쌌다.

“란드로스 이노첼이다!”

저번 전쟁에서 왕자를 훌륭하게 보좌해 휴전 협정을 이뤄 낸 공으로 성 미카텔라 훈장을 받았던 란드로스 이노첼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노첼 자작가의 수도 타운하우스 앞을 둥그렇게 에워싸며 대기하고 있던 기자 중 하나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뒷문을 지나려던 남자를 발견해 소리치자 그 소리를 들은 주변의 기자들이 와르르 달려들었다. 며칠씩이나 저택 밖에서 밤을 새운 기자들의 눈은 실핏줄이 터져 벌겠고, 깎지 않은 수염은 추위에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 위로 성성했다.

“이노첼 경! 키시르 경이 했던 말이 사실입니까? 왕자 전하가 정말로 공격당하는 자기 부대를 버려두고 도망쳤습니까?”

“왕자 전하가 정말로 군부대에서 빠져나가 자기 누나와 닮은 여자들을 골라 강간했습니까?”

“헤냐 로페르 양의 아이는 그럼 정말로 왕손인 겁니까?”

“다레즈 수송소에서 보낸 포로 교환 요청서를 왕자 전하가 압력을 가해 파기해 버렸다는 게 사실입니까!”

“비켜요! 주거지 침입으로 고소할 겁니다!”

안으로 도망치려는 란드로스 이노첼의 옷자락을 수십 개의 손이 잡아채자 그걸 몸으로 막아서고 있던 경호원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노첼 경!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왕자 전하와 같이 혐의를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노첼 경, 경도 사실 자기 전우들을 두고 도망친 게 맞지 않습니까! 유족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이노첼 경―.”

쾅 소리와 함께 뒷문이 닫히자 악악거리며 소리 질러 대는 목소리가 그나마 잦아들었다. 엉망이 된 머리와 찢겨 너덜거리는 외투 차림으로 란드로스 이노첼은 얼굴을 가리느라 짓누르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땅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빌어먹을 각다귀 같은 새끼들!”

그에 답이라도 하듯 뒷문이 거칠게 두들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 소리가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으로 연달아 울렸다.

“작은 주인님…….”

피로를 숨기지 못한 집사가 조심스레 부르는 것을 무시하고 란드로스 이노첼은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102대 98의 표결로 의회가 특별 조사권을 발동시켰다. 특별 재판부와 특별 조사부가 꾸려지고 수사원들은 마구잡이로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했다. 국왕이 왕자를 보호하고 있어서 건드리지 못하니 다른 참고인들을 더 집요하게.

란드로스 이노첼은 셀레스트 전선이 무너질 때 왕자의 부관 중 하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번 주에 벌써 네 번째로 조사부에 불려갔다. 오전 7시에 잡힌 심문은 세 번 미뤄져 그는 점심과 저녁을 통으로 거른 채 총 열두 시간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대기해야 했다. 조사부의 참고인 대기실 벽은 얇디얇아 그는 그 열두 시간 동안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욕지거리, 책상 두드리는 소리, 참고인들의 울음 섞인 악다구니를 그대로 들었다. 드디어 심문 시간이 되었더니 속을 알 수 없는 담당 수사관은 별 연관도 없을 법한 쓸데없는 신변잡기만 물어보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며 그를 돌려보내곤 했다.

그 사람 피 말리는 고문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기다리는 것은 눈을 번들거리는 기자들이었다.

한계였다.

“주인님, 지금 서재에는 기다리시는 분이……!”

그래서 란드로스 이노첼은 급히 자신을 붙잡는 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녕, 이노첼.”

서재에서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 너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양이네.”

레스 키시르는 반듯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무감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란드로스 이노첼이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승전 연회 때였다. 그때의 레스 키시르는 말라비틀어져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피로가 뒤엉켜 거뭇하게 가라앉은 눈가와 도드라진 뼈대, 갈라진 입술이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 졸려 있는 듯했다.

지금 자신의 꼴이 딱 그랬다. 그리고 레스 키시르는 그런 란드로스 이노첼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앞으로 심해지면 심해졌지 편해지지는 않을 텐데 벌써 이 지경이면 어떻게 버티려고?”

그때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미친 새끼, 너 때문이잖아! 네가,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바람에 다 끝났던 일이―.”

확 머리에 피가 쏠려 다짜고짜 레스 키시르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몸이 확 꺾였다. 미처 눈으로 좇을 여유도 없이 날아온 주먹이 명치를 후려쳐 란드로스 이노첼은 가슴께를 그러쥐고 바닥에 굴렀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바닥에서 기었을 때, 섬뜩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목 바로 옆으로 내리찍혔다.

선반 위의 자료를 가져오기 위한 소형 사다리의 다리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 옆에 내리박혀 있었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보자 내려다보는 황금빛 눈동자가 짐승같이 번들거렸다.

“다 끝났다고 좋아했을 때는 좋았겠지. 왕자가 돈도 좀 준 모양이고, 전우를 남겨 두고 혼자 도망가서 살았다는 소리도 안 들어도 되었을 테니까.”

“아, 아으, 으아아…….”

“미안해. 다 죽어 버리기를 바랐을 텐데 살아 돌아와서.”

아으, 악, 허윽, 의미를 가지지 못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 막힐 정도로 정적인 표정의 레스 키시르는 눈만이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바닥에 웅크린 란드로스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사다리를 쥔 손가락이 마치 건반을 누르듯 간헐적으로 움직였다.

“이노첼, 자수해.”

그리고 마치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소리도 내지 않고 사다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침과 땀을 줄줄 흘리며 벌벌 떠는 이노첼과는 반대로 레스 키시르는 옷자락 하나 구겨진 자국 없이 반듯했다. 이 방 안에서 그 어떤 폭력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다 털어놓고 유족들한테 용서 빌어. 그리고 왕자가 죗값을 제대로 치르도록 협조해.”

레스 키시르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조차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탁. 남자의 등 뒤로 서슴없이 문이 닫혀 버렸다.

* * *

손님이 나간 후, 응접실의 굳게 닫힌 문 너머로는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안절부절못하며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 집사는 날아오는 의자에 기겁해 몸을 웅크렸다.

“아이고, 작은 주인님! 이게 무슨―.”

“젠장, 빌어먹을!”

집사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이미 화가 치밀어 눈앞이 벌게진 란드로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씨발놈의 왕자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니까 키시르 놈을 살려 두는 건 껄끄럽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미적거리며 여유를 부리다가……!”

쾅, 쾅, 바닥을 내리친 주먹이 찢어져 피가 맺혔다. 주인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을 확인한 집사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우고 문을 닫았다. 란드로스의 머리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레스 키시르가 얼마나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왕태녀와 손을 잡은 모양이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왕자는 국왕이 어떻게든 살려 주겠지만 왕자와 같이 있다가 살아남아 훈장까지 받았던 자신까지 살려 주려고 할까. 왕태녀라면 모를까 레스 키시르가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같이 살아남았던 나머지 세 명에게도 자수하라는 둥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을까. 증거가 모자라서 증언이라도 얻어 보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 같은데, 나머지 셋 중 하나라도 증언대에 서는 것을 조건으로 거래를 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입을 닫고 있겠다고 다 같이 맹세했어.’

그러나 다음 순간 란드로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새끼들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다리 병신이랑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왕태녀를 직접 만나서 거래를 하자. 그 여자도 왕자를 끌어내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

그가 이제야 얼얼하게 아파져 오는 주먹을 문지르며 외출할 준비를 하려 했을 때였다.

“작은 주인님, 외출하십니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며 시종 하나가 말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무심코 반 발짝 뒷걸음질 쳤던 란드로스는 그리했던 게 부끄러운지 확 얼굴을 붉히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게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

시종의 머리를 후려치려던 팔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란드로스는 자신의 팔이 호리호리하게만 보이는 시종의 손아귀에 잡힌 것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팔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으나 시종은 싱긋 웃으면서 덩달아 힘을 주었다. 손아귀에 쥔 팔이 아릿하게 아파짐에 따라 란드로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길가에서 마주쳤다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정도로 평범하고 하찮아 보이는 시종.

“왕태녀를 찾아갈 생각입니까?”

그 말에 란드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넌……!”

방문이 닫히는 동시에 시종이 란드로스의 팔을 비틀어 바닥으로 끌어 내린 후 발길질을 했다. 숨이 턱 막히며 바닥을 구른 그의 입에 천 뭉치가 쑤셔 박혔다.

“사, 사람 살려! 사람…… 으읍!”

“맹세를 하셨으면 지키셨어야지요, 작은 주인님.”

“읍! 으으읍!”

“당신이 그냥 조용히 입 닥치고 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싱긋 웃으며 시종은 품 안에 있던 주머니칼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려 보이더니 란드로스의 목덜미에 지그시 짓눌렀다. 날이 없는 칼등이었으나 서늘한 금속 특유의 감촉에 그는 새하얗게 질렸다. 천을 쑤셔 넣은 입은 그 위로 단단히 재갈이 물렸다. 칼을 쥔 시종이 유유히 몸을 일으키자 목이 찔리지 않도록 란드로스 역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마치 무도회에서 숙녀를 에스코트하듯 란드로스를 책상 앞으로 이끈 시종은 그의 앞에 종이와 펜촉을 밀어 주었다.

“불러 주는 대로 쓰세요. 나날이 집요해지는 의회와 언론의 압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왕자님이 당황하시고 죄책감에 괴로워하시는 모습이 사진상으로도 보여서 죄송하기만 할 따름이다.”

그 말에 란드로스는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들부들 떨리는 눈에도 시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이를 혼내는 듯 내뱉는 시종의 말에 란드로스는 고분고분 고개를 다시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동료들을 저버리고 도망간 비겁자라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다.”

시종은 참을성 많은 협박범이었다. 그는 흰 종이 위에 형편없이 비뚤어져 쓰이는 글자를 구경하며 란드로스가 부산스레 눈을 굴리는 걸 주시했다.

“머리에 상처를 입으셔서 의식이 없으셨던 왕자님께서는 당신이 정신을 잃고 계셨던 와중 일어났던 참담한 패배로 충분히 괴로워하셨다. 그분께 더 이상 부당한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막고 내가 죽게 했던 다레즈의 열여덟 명의 전우들, 그리고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일을 당했던 레스 키시르 경에게 이제라도 목숨을 바쳐 사과하려 한다. 나를 믿어 주고 지지해 주었던 가족들에게는 정말이지 미안하기만 할…….”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지며 란드로스가 바닥에 굴렀다. 퍽 소리와 함께 꽤나 세게 어깨가 바닥에 부딪혔음에도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반쯤 기고 반쯤 달리며 도망가려 했다. 시종은 그런 남자를 너무도 손쉽게 제압했다. 뒤집은 몸을 타고 앉아 무릎으로 목을 짓누르며 시종은 양손에 밧줄을 휘감았다.

“이노첼 경, 이제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하셔야지요.”

밧줄이 란드로스 이노첼의 목에 휘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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