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6)

2.

겨울을 맞아 휴식기를 앞두고 있던 의회는 개판이었다. 왕자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아이를 안고 창월궁 앞에 나타난 여자로 달아오른 스캔들은 오늘 아침의 갑작스러운 왕태녀 폐위 발표로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갔다. 평소라면 필요 이상으로 세게 틀어진 난로 때문에 꾸벅거리며 졸곤 했던 나이 지긋한 의원들까지 잠에서 깨어나 서로에게 악을 써 대고 있었다.

“의회의 존재 의의가 무엇입니까! 국민들의 목소리를 모아 국왕 폐하께서 올바른 길을 가실 수 있도록 자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국왕 폐하의 결정은 과연 올바른 결정이며 이 상황에서 입을 닫고 있다면 국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후계자의 선별 문제는 국왕 폐하의 온전한 권리이자 의무였소! 거기에 의회가 나서서 왈가불가할 수 있다 보시오?”

“폐하께서 세우시려는 후계자에 문제가 있는데 가만히 있자는 게 말이나 되오? 애초에 시기가 너무 이상하지 않소. 폐하께서 왕자 전하를 편애하시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분께 좀 불리하다 싶은 스캔들이 터지니 가만히 있던 왕태녀 전하를 물고 늘어지는 게. 이거야말로 정말 왕자 전하께 문제가 있고 그걸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게 아니고서야―.”

“아니 신문사들이 너도나도 소설을 써 댄다고 의원께서도 동참하실 생각이시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여자들의 말만 믿고 왕자님을 범죄자로 몰 생각이시오? 언제부터 이 나라 법이 군중 재판으로 집행되었소?”

“그만! 논지를 벗어났소!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것은 이번 폐태녀 결정에 정식으로 우려 성명을 낼지 말지요.”

탕탕 소리를 내며 의사봉이 내리쳐졌다. 의회 본회의장에 딸린 대기실에 앉아 그 소란을 생생히 전해 들으며 레스는 양손을 꽉 모아 쥐었다. 어느새 식은땀에 젖은 옷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중후한 마호가니 재질의 벽과 금박으로 장식된 기둥은 종류는 달라도 군사 재판장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절로 빨라지려는 숨을 가다듬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그는 여기에 제 발로 와 있는 것이다. 그 누구의 강요도, 협박도 없이, 그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키시르 경.”

“……괜찮습니다.”

그의 상태가 이상한 걸 느낀 경호원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 손을 예의 바르게 떼어 내며 레스는 느릿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왕자 전하의 범죄 행위가 단지 그것뿐이 아니었다면 어쩌시겠소.”

본회의장 안에서는 리오넬 레파르 로벤타스 후작이 발언하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 아군의 가장 일방적인 패배였던 셀레스트 전투를 기억하실 거요.”

“지금 대체 무슨 맥락에서 그런 말을―.”

“제1, 2특수부대의 568명 중 283명이 죽었고, 58명이 불구자가 되었소. 셀레스트가 무너짐으로써 우리는 리센 강을 따라 구축한 남동부 전선을 모조리 포기하고 레첸트까지 후퇴했어야 했소. 왕태녀 전하께서 시의적절하게 개입하셔서 비요른을 함락시키지 않으셨다면 휴전 조항은커녕 패전 배상금을 합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거요.”

재차 상기시키는 쓰디쓴 패배의 기억에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여러 곳에서 터져 나왔다.

“아인츠 공, 케베스 공, 로첸트 공, 내정 자문과 군사 자문을 맡고 계신 공들이라면 개선식 때 왕자 전하께서 선두를 차지하신 광경이 얼마나 괴상하게 비쳤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거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후작.”

“비요른 함락은 왕자 전하가 아니라 왕태녀 전하의 공이요.”

“무슨 속셈으로 다 끝난 일을 끌고 와 분란 거리를 만드는 거요! 그것은 왕태녀 전하께서도 인정하신 왕자 전하의―.”

“남의 공을 채 와 자신의 것처럼 조장하는 솜씨가 출중하신 왕자 전하와 그걸 뒤에서 장려해 오신 국왕 폐하시오. 그렇다면 자기의 실책 역시 남에게 떠넘기는 일도 할 법한 짓이 아니겠소.”

“지금 후작은 무슨 증거가 있어서 두 분 전하께 그런 참담한 혐의를 씌우려 드는가!”

“증거?”

쾅 소리를 내며 두툼한 서류철이 책상 위로 내리쳐졌다.

“셀레스트 전선이 무너졌을 때 레첸트의 사령 본부에 도착했던 파발과 무전 내용이요. 하나하나 읽어 보면 당시 급박하기 짝이 없었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본인은 란스타인 왕국 신민의 대표로서 왕실과 관련 기관들에 정식으로 묻겠소.”

감정을 짓누르고 억누르고 욱여넣어서 끝이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후작이, 아들을 잃은 아비가 말했다.

“이 급박한 상황, 린스베른 소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본인의 이름으로 내려진 하명이 하나 없으며.”

“…….”

“그때 술에 취해 주둔지를 이탈했다가 그대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던 레스 키시르 대위가 왜 이 모든 상황의 지휘를 맡았던 건가.”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레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길에 수많은 손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듯했다. 한 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자, 눈앞에 환한 빛과 함께 본회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대위는 아직 살아 우리 곁에 있으니…… 이 기회에 그가 말하는 진상을 들어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간 멈췄던 소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후작! 지금 망상증 진단을 받아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정신이상자의 말만 듣고 이 난리를 벌인 것이오? 의회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데도 정도가 있지!”

“이건 왕태녀 전하의 사주를 받고 벌인 일이 아닙니까? 정적이신 왕자 전하를 끌어 내리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까지!”

“위급한 전장에서 그 부관이 상관을 대신해 연락을 지시하는 경우는 없는 일도 아니요. 고작 그런 불확실한 것을 증거라 대고―.”

“레미에르 로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하나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버린 악다구니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청아한 미성은 칼날처럼 소음을 잘라 내며 귓가에 또렷하게 와 박혔다.

“아론 키시너, 로완 맥페든, 리칼 제너, 스토바 레지, 키시바 하멜른, 로위스 네더필, 이센 싱클레어, 마리너 스완.”

명확한 발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하며 레스 키시르는 한 걸음 한 걸음 본의회장을 가로질렀다.

“리펠 카스트로, 레메페신 듀락, 실로엔 라만차, 리로이 루벤, 클레아 제너스, 오윈 드라셀, 하셀 이바네스, 키신저 아도라.”

아, 그 이름들의 공통점을 알아챈 누군가가 탄성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혼란으로 찡그려진 얼굴, 착잡함으로 흐려진 얼굴,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그러진 얼굴, 흥미로워하는 얼굴이 하나같이 레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의장석에서 대각선으로 자리한 발언석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조슈아 레파르.”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이의 아비와 그의 마지막을 지켰던 전우가 발언석의 연설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리오넬 레파르 후작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잠깐의 순간 세월이 따라잡았는지 그의 주름진 얼굴에 굽이굽이 피로가 스며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 발언석에서 내려갔고, 교대하듯 레스 키시르가 올라섰다.

“셀레스트 전선의 사망자들 283명 중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던 여든 명. 그리고 그중 살아서 다레즈 포로수용소에 도착했던 열여덟 명.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들입니다.”

단조롭기까지 한 목소리가 본회의장에 울렸다.

“여기 계신 의원분들은 주님을 대신해 국민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왕을 바른길로 이끄시는 분들이지요.”

군사 재판 때의 레스 키시르는 그저 억울하다고,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소리쳤다. 그날의 기억을 분초별로 해부해 끝없이 머릿속에서 재생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러시다면 적어도 이들의 죽음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제 심장 같은 가족과 연인과 친구를 잃은 이들에게 증명해 주십시오.”

그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무엇이 억울하다고 호소해야,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야 무언가가 바뀌었을까.

“275년 2월 19일 오후 5시, 셀레스트에 주둔하고 있던 제1, 2특수부대는 리센 강 너머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제6육군연대의 긴급 통신을 받았습니다. 장교들만이 알고 있는 채널을 통해 암구호를 정확히 전달한 후 제6육군연대장이신 벨라르 디칸 대령님의 이름으로 명이 내려왔습니다. 제6육군연대가 적의 급습을 받아 위험하니 지금 당장 지원 병력을 보내라는 것이었지요.”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연습했던 말은 감정의 떨림 한 자락 없이 유려하게 흘러나왔다.

“그 지시에 따라 제2특수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안즈 헤일츠 소령님과 제1특수부대 부대장 대리였던 저는 군의 절반 이상을 추출해 일페스 다리를 건너게 했습니다.”

첫 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275년 2월 20일 오전 2시, 셀레스트 주둔지가 야습을 받습니다.”

까맣던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순간 눈앞이 번쩍하다가 천지가 흔들리더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자 사방이 불바다였다. 적들이 쏘아 대는 신호탄이 새 울음소리처럼 가냘프게 울다가 폭죽처럼 터져 나가 사방으로 빛을 흩뿌렸다.

“저희 암구호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적들은 제6육군연대의 전령인 척 주둔지로 침투해 폭탄고를 폭발시키고 주둔지 사방에 불을 질렀습니다. 적의 포탄에 헤일츠 소령님이 전사하시고, 제대로 대처할 여유도 없이 적의 본군이 밀려왔습니다.”

귀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지고, 벽을 짚으려다가 부딪치고, 그런데도 등 뒤에서는 계속 누군가가 죽는 소리와 살점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서. 혈관으로 들이부어지는 아드레날린에 통각이 둔해지고 감각만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려 바로 옆에서 달리다가 쓰러져 죽은 이들의 벌린 입만 기억에 낙인찍히듯 남고.

헤일츠 소령은 자다가 뛰쳐나왔는지 미처 단추조차 잠그지 못한 군복 아래로 피가 온통 흥건했다. 그 상태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시신을 뒤로하고 다시 달려 나가며 레스는 강박증 걸린 것처럼 되뇌었다.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적들의 전파 방해로 무전이 끊기고, 이대로라면 전멸을 막지 못하리라 판단. 저는 임시 사령관의 권한으로 남아 있던 부대를 둘로 나눴습니다.”

최선이라고 확신하며 저질렀던, 두 번째 실수.

“저는 그렇게 나눈 부대 중 반은 주둔지에 남아 시간을 끌고 반은 일페스 다리를 폭파한 후 레첸트의 사령 본부로 후퇴하라 명을 내렸습…….”

“잠깐, 대체 무슨 명목으로 대위에 불과했던 경이 임시 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한단 말인가? 왕자 전하께서는…….”

“왕자 전하께서는 그때.”

레스의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미처 술이 깨시지 않아서 심신 미약의 상태라 판단, 후퇴하는 부대에 끼워서 퇴각시켰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홀로 발버둥을 쳤던, 세 번째 실수.

“저와 함께 성 미카텔라 훈장을 받았던 이들이 증언해 줄 수도 있겠습니다.”

“그 무슨! 지금 왕자 전하께서 자신의 의무를 팽개치고 전쟁 중에 술을 입에 대셨다는 건가!”

“무슨 망발을! 란스타인의 부대 어디에서 술을 취급한다고 그런…….”

길길이 뛰며 삿대질을 하던 의원이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잔류했던 이들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아직도 똑바로 걷지 못해 일병들에게 이끌려 하나 남은 군용 차량에 밀어 넣어지는 왕자의 뒷모습을 잔류하게 된 병사들은 핏줄이 터져 시뻘게진 눈으로 지켜보았다. 남겨진 이들은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전우들과 고향에 남겨 둔 가족들을 위해 죽음 정도는 받아들였으나 혼자서 살아서 돌아갈 왕자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직급과 신분으로 억눌러 왔던 원색적인 비난과 조롱이 터져 나왔다. 알코올에 절은 머리에도 그 비난은 박혀 들었고, 한밤의 어둠도 시뻘겋게 물들었던 왕자의 낯빛을 숨기지 못했다. 레스는 같이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이 뼈아픈 비난을 통해서 린스베른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길 바랐다.

……통한의, 네 번째 실수.

“155명 중 80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상처가 심해서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저를 포함한 19명은 끝까지 살아남아 다레즈 포로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같이 끌려간 포로 중에서는 그를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고, 탓하는 이들도 있었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군용 차량 끝에 매달려 끌려가다 반죽음으로 돌아온 그를 둘러싸며 항의도 해 많이들 맞기도 맞았다.

“저희는, 관례대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거라 믿었고, 실제로도 간수 몇이 그런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석 달 동안이나 그러한 낌새는 전혀 없었고.”

다레즈는 포로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감방 사이의 방음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얇은 벽 너머로 낮에는 고문으로 내지르는 비명과 상처와 아픔으로 흘리는 신음과 더 견디지 못해 토해 내는 울음소리를 듣다가, 밤이 되면 간수의 귀를 피해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위로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것도 곧 끝날 거야.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 전투에서도 살아남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는데 고작 여기서 죽어 나자빠질 리가.

괜찮아.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햇볕이 따뜻하고,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그리운 우리의 고향으로.

“처음에는 레미에르 로센이 탈수 증상을 보이다 죽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그다음에는 아론 키시너가 상한 음식을 먹고 죽었고, 그다음에는 로완 맥페든이 부러진 뼈가 썩어 들어가 죽었고, 그다음에는 리칼 제너가…….”

돌아가면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지. 나는 이제는 후진을 모르는 싸나이가 되겠어. 사랑한다고 우리 아들들한테 말하면 아빠 징그럽다고 혐오하는 눈으로 보겠지만. 야, 하지 마. 불쌍한 애한테 무슨 짓이야.

폐를 토해 내는 듯한 기침으로 끝났던 웃음소리들.

“조슈아 레파르는 왕태녀 전하께서 다레즈를 함락시키기 사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폐렴이 심해져 거의 의식이 없었지만 그래도 말을 했고, 이름을 부르면 상대를 알아보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그 쾌활한 성정은 변함없었습니다.”

웃음소리가, 비명이, 기침 소리가, 소리 죽인 흐느낌이.

그 모든 것이 사그라들어 그 어둠 속에 혼자만의 숨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왕태녀 전하의 본대가 다레즈를 점령한 후, 포로 교환에 관해 물었더니 그런 요청 같은 건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셀레스트에서 돌아온 이들의 말에 의하면, 아예 부대를 둘로 나눴다는 보고가 없었다고……. 어째서였을까요. 분명, 스스로 남기를 정했던 저희가, 있었는데.”

그 말에 주체할 수 없는 술렁거림이 의회장 안으로 퍼져나갔다. 머릿속으로 얼음 송곳을 지그시 박아 넣는 것 같은 끔찍함에 그는 숨을 골랐다.

“저는, 죽어가는 이들에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아군이 우리를 구하러 와 줄 것이라 다독였습니다. 이 나라는 저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상황이 어쩔 수 없었기에 우리를 남겨 두고 떠나갔지만, 왕자 전하의 분대가 사정을 알리면…… 저희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어도 적어도, 죽을 생각으로 남았던 우리의 각오 정도는, 인정하고 기려 줄 것이라고…… 그래서, 최소한 포로 교환 요청 정도는 해 줬을 것이라고.”

레스는 가만히 연설대의 모서리를 뚫을 듯 응시했다. 그는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 미소를 띠었다.

“……저는 정말이지 세상에 둘도 없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군요.”

그의 명령을 따라 싸우고, 고통받다가 죽어 버린 이들은 죽어서도 명예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야습에 당황하다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 포로가 된 머저리 무능력자들이 되어 버렸고, 썩어 들어간 지 오래라 누가 누군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된 그들의 유해는 한데 모여 불탄 후 재가 되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존경하는 의회장님, 주님을 대신해 저희의 목소리를 대변하시는 의원님들.”

더 이상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그는 연설대의 모서리를 세게 쥐어 몸을 기댔다.

“저는 그날 셀레스트에서 죽은 283명의 란스타인인들을 대표해 린스베른 왕자의 태만에 대한 처벌을 요구합니다. 그 대가를 치르기 두려워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이 나라를 위해 남아서 싸우다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들을.”

이제는 완전히 조용해진 좌중을 향해 그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발언석에서 내려가며 무너질 듯 휘청거렸던 몸을 재빠르게 경호원이 부축했다. 뇌에 노이즈가 낀 듯 가늘고 높은 피치의 이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몸에 이렇게 많은 수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뭉개지고 일그러지는 시야에 더 이상 표정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의원들의 얼굴이 비치고, 물에 처넣어진 듯 변질한 청각에는 의장봉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파르 공께서 제출하신 안건은 지금 배부하는 참고 자료를 검토한 후 다음 의회가 열리는 24일에 정식 표결에 부칠 것을 제안하겠소. 안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그때까지 이 안건에 엠바고를 걸며…….”

이 안건은 이미 왕태녀 전하께도 정식으로 고발서가 올라간 상태이고, 군의 정식 조사가 시작되고 의회의 엠바고가 풀리는 대로 법원에도 정식 고소장이 올라갈 것이며, 그렇다면 의원의 권한으로 명할 수 있는 조사는 어느 정도이고, 증거 자료는 이것 외에는 어떤 것이 또, 그렇다면 키시르와 함께 성 미카텔라 훈장을 받은 이들은 대체, 이걸 폐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레스.”

윙윙거리며 한 뭉텅이로 뒤섞여 귓가에 부어 넣어지는 듯한 소음들 사이로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회의장 옆의 대기실에는 어느새 도착한 레티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풀빛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다정한 빛으로 휘어지더니 그녀가 양팔을 벌렸다. 본능적으로 그 몸을 끌어안아 그 풍성한 붉은 머리칼에 고개를 묻자 레티시아가 팔을 뻗어 그의 몸을 꼭 감싸 안았다.

“정말, 잘했어.”

정말 별것도 아닌 말에 팽팽히 유지되었던 긴장이 탁 풀리며 몸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를 붙잡고 같이 바닥에 주저앉은 레티시아는 그 흔한 괜찮냐는 말도, 어땠냐는 물음도, 다른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마주 끌어안아 오는 온기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

‘……다 끝났구나.’

꾸역꾸역 살게 했던 목표였다. 그가 아니면 전할 이가 남아 있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일은 시작되었고, 이후 벌어질 일에 그의 역할은 필수 불가결하진 않았다.

그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은 이제, 끝났다. 해방감과 기묘한 상실감이 동시에 찾아와 가슴이 먹먹해졌다.

“……호박죽, 먹고 싶어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에 레티시아는 별 이상해하는 기색도 없이 가볍게 답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몇 개 기르던 게 있으니까 로페르한테 말하면 해 줄 거야.”

“해바라기도 보고 싶어요.”

“지금 피어 있는 건 없는데 저번에 갔던 오두막에 보면 그림이 예쁜 게 있어.”

“밤에 눈 오는 것도 또 보고 싶고, 키샤랑 춤도 한 번쯤 더 춰 보고 싶고…….”

“에이, 뭘 그렇게 다 쉬운 것만. 고민 좀 되게 하늘의 별 좀 따 달라고 해 봐.”

그 말에 레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별은 있어 봤자 쓸 데가 없는데요.”

그 말에 레티시아가 가늘게 눈을 흘기다가 그의 목덜미를 냉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부분부터 몸 안으로 퍼지는 온기에 얼어붙었던 몸이 그제야 추위를 안 듯 진저리를 쳤다. 공주의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몸을 바짝 끌어당겨 갈증을 채우듯 그 입술에 매달리며 그는 딛고 있는 땅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득함에 몸을 떨었다. 눈두덩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하고 싶은 것도, 좋은 것도 많은데 다들 왜 그렇게 일찍 죽어 버렸나. 그리고 그는 어째서 혼자만 살아남아서.

……혼자 끝끝내 살아남아서, 이렇게 행복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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