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46)

7.

[기적의 신데렐라: 레스 키시르는 누구인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져 나갔다. 자극적인 단어로 범벅이 된 조간을 내려놓으며 린스베른은 제 분을 못 이겨 시근덕거리는 모왕을 흘끗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배신이군요.”

“…….”

“누님이라면 몰라도, 키샤까지 이럴 줄이야.”

매끄러운 아들의 목소리에 책상 모서리를 으스러질 듯 그러쥔 이스칸타 3세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하얗게 변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모왕을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 서재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린스베른은 그녀가 우그러트려 집어던진 조간지를 하나하나 반듯하게 펼쳐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어머니께서는 아셨습니까? 어머니 허락을 받고 이런…… 비천한 피를 왕실 계보에 섞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다니는 겁니까?”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니, 허락은커녕 언질조차 받지 않았음이 뻔했다.

“참 할 말이 없네요. 왕족의 결혼은 아무리 하찮은 방계라 해도 어머니의 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이건 대놓고 어머니를 무시하는 처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책상 위 쌓여 있던 책이며 장부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젯밤 사냥회 전야제 때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레스 키시르의 손을 잡고 등장한 것으로 신문사라는 모든 신문사가 폭주하고 있었다. 모왕이 몇 달에 걸려 고생하다가 겨우 성과를 조금 보고 있던 카탈린 광산의 소유권 이전 건도, 발표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새 법률안도 무서운 속도로 묻혀 버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별별 신문사 같지도 않은 신문사까지 나서서 레티시아 레반스타인과 레스 키시르의 러브 스토리를 써 재꼈다. 보수적인 상류층 인사들이 핏대를 세우며 반대를 하고 나섰으나 오히려 그게 자유연애에 물들어 가고 있던 젊은 귀족들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젠트리들에게 불을 붙였다.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공주님.

레티시아가 딜도 대용으로 비-귀족들을 사들이고 있다는 스캔들은 자취를 감췄다. 단순히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한 위장이었다면 오히려 물어뜯을 건수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레티시아는 오늘 아침 일찍 신전이 문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가 약혼 신청서를 접수해 버렸다. 증인 란에는 레오르나 레반스타인의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이 와중에 레티시아는 왕의 인가 따위는 받으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딸년이라고 딱 둘 있는 것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더니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해? 조금만 더 나가면 왕좌에도 저 알아서 앉으려 굴겠군!”

“…….”

“제 아비랑 똑같아. 씨는 어디 안 간다고 똑같은 낯짝에, 똑같이 기고만장해서…… 그런 것들도 자식이라고!”

의자가 집어 던져져 장식장을 박살 내고, 값비싼 유리며 도기 장신구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장중하고 위엄 있는 품격이 느껴졌던 서재는 한순간에 태풍이라도 맞은 듯 엉망으로 뒤집혔다.

“키샤가 크게 실수를 했네요.”

왕이 제풀에 지쳐 조용해지자 린스베른은 느긋하게 모왕을 뒤에서부터 안아 다독였다.

“어머니께서 그 애에게 베푸신 것을 잊고.”

“…….”

“관대하게 보아 넘기신 잘못들도 잊고.”

“…….”

“낳아 주신 어머니보다 누님의 말에 현혹되어서.”

다시금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 린스베른은 모왕을 껴안은 팔에 꽉 힘을 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너무 관대하시니 선을 넘은 게 아니겠습니까. 이 기회에 똑똑히 알려 주셔야지요. 키샤는 어머니의 딸이기 이전에 왕의 신민이라고.”

“……그래. 내가 그 애가 막내라고 너무 오냐오냐했지.”

“예. 그리고 주제넘게 손에 닿지 않을 것을 꿈꿔 어머니의 심기를 이렇게까지 거슬리게 한 그 남자 쪽은.”

유려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순간 뚝 끊겼다. 왕이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돌리자 린스베른은 그제야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알아서 처리해 두겠습니다.”

* *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왕자의 서재에서 초조한 낯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던 비서가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와, 왕자……!”

그 말이 미처 끝낼 새도 없이 휘둘러진 지팡이에 비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비서의 어깨를 발로 뒤집은 린스베른은 지팡이의 뭉툭한 끝을 충격으로 크게 벌어진 남자의 입 안으로 처넣었다.

“쉬이.”

지팡이로 바닥에 눌려 기도가 막힌 비서가 우욱거리며 구역질을 해 댔다. 숨통이 눌리고 목구멍에 이물이 틀어박혀 컥컥거리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퍼렇게 질렸다. 지팡이를 떼어 내려 발버둥을 치는 필사적인 손길을 벌레 보듯 무시하며 지그시 힘을 주었던 린스베른은 남자의 눈이 뒤집혀 흰자가 보이자 그제야 목을 짓누르고 있던 힘을 풀었다.

“큭, 콜록, 커헉, 크흑!”

겨우 숨통이 트인 남자가 눈물과 침을 줄줄 흘리며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 댔다. 그 모습을 보자 재차 속에서 들끓던 것이 울컥거리는 듯했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금갈색 머리칼, 눈꼬리가 살짝 아래로 쳐진 황금빛 눈동자, 남부 해안 지방 특유의 투박하고 툭툭 끊어지는 억양까지.

“……그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콜록, 와, 왕자님, 흐윽, 사, 살려, 살려…….”

“그년이 딱 그때 방해를 해서.”

손가락이 리듬감 있게 쥐었다 폈다 움직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비서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숨을 죽였다. 손가락은 머리채를 그러쥐는 것처럼도 보였고, 목을 조르려는 것처럼도 보였고, 팔을 비틀어 뽑으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럴 때마다 왕자의 침실에서는 붉은 머리의 여자가 시체 같은 꼴을 하고 실려 나갔다.

“하인스, 내가 그 쓰레기 같은 목숨을 살려 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예, 예에, 물론입니다, 왕자님, 무, 물론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네 동생이 키샤의 밑을 빨아서 조간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해서 그쪽에 붙는 게 낫지 않을까, 뭐 그렇게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말이야.”

“커흑!”

꽉 목 위를 짓밟는 힘에 하인스 키시르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카펫 위를 벅벅 긁었다. 이대로 부러트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 꾹꾹 발에 힘을 주던 린스베른은 결국 거세게 머리를 걷어차는 거로 비서를 놔주었다.

“명심해, 하인스 키시르. 네 동생이 너한테 구구절절 털어놓으며 도와달라 했을 때 네가 어떻게 했는지.”

그 말에 선명하게 자국이 남은 목을 그러쥐고 숨이 넘어갈 듯 콜록거리던 하인스 키시르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레스 키시르와 닮은 것도, 닮지 않은 것도 같은 얼굴이 공포에 질리는 것을 유쾌하게 바라보며 린스베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레스 키시르가 밸 없는 호인이라 해도 자기를 팔아먹어 왕자의 보좌관 자리에 들어간 형은 용서하기 힘들 거 아냐.”

“힉, 흐윽, 허윽.”

“형이 줄줄이 고해바치지만 않았다면 허언증 진단까지는 받지 않았을 텐데, 가엾게도.”

그 말에 하인스 키시르가 거의 숨이 넘어가게 통곡을 했다. 그 벌레 같은 꼴에 린스베른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헐떡거리며 비참하게 울어 대는 목소리와 시원스레 내뱉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섞여 울렸다.

“하인스, 네 동생이 그때, 네 경고를 잘못 알아들었던 모양이야.”

“와, 왕자님…….”

“승전 연회 때 그리 얌전히 굴었던 건 네 경고를 잘 알아들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얌전히 구는 척을 하면서 내 동생을 꾀고 있었다니. 기껏 말 잘 듣는 대가로 훈장까지 안겨 줬더니 말이야.”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명령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왕자님께서 보냈다는 말도 절대 안 했고, 우리 다 죽는 꼴 보고 싶다면 계속 그리 뻗대라 해서 안 그러겠다고, 조용히 살겠다고 분명해 그랬는데……!”

“그런데 지금 이 꼴을 봐, 하인스 키시르. 네 동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그러면 너랑 네 가족이 어떻게 될지 뻔히 상상이 되었을 텐데도 말이야.”

그 말에 하인스 키시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관찰하며 린스베른은 우아하게 몸을 접어 그의 앞에 쪼그렸다.

“하인스 키시르, 네 동생이 우리에 대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네가 그 녀석의 실체를 다시 한 번 상세하게 알려 줘.”

알겠지? 하고 다정하게 뺨을 두드리며 하는 말에 겁을 집어먹은 남자가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스 키시르가 반쯤 기고, 반쯤 구르며 방을 나가자 홀로 남겨진 린스베른은 서재의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입가를 장식하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로 표정이 부족했다.

“……레스 키시르.”

한 번 떠올리자 저절로 줄줄이 끌려 나오는 기억에 그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을 그렇게 갑자기 놓으시면 총구가 흔들려서 정확도가 떨어져요.’

왜소한 체격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얼굴. 신입생들이나 매는 붉은 타이를 맨 꼬마가 난데없이 그딴 소리를 했을 때, 린스베른은 눈앞이 시뻘게지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과녁을 겨누던 총구를 돌려 그 건방진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 했다.

그 버러지의 이름을 성스러운 일로미냐의 휘장이 장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본래대로라면 제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 어디서.

고작 학생들 간의 유치한 줄 세우기에서 앞섰다고 건방지게 기고만장해져서 나를 내려다봐?

‘……고마워.’

그러나 그는 속내를 꽉꽉 억누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왕자라는 태생과 선량한 피해자의 가면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알았다. 특히 뷘터하우젠의 학장단 늙은이들이 그를 퇴학시키니 마니로 시끄럽게 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단순하기 짝이 없는 벌레는 고작 그 한 마디에 역겨울 정도로 기뻐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한참이나 더 늘어놓았다. 그리 짖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린스베른은 웃었다.

벌레는 벌레대로의 사용법이 있는 법이다.

벌레가 알아서 봉사하겠다니 그 소원을 들어줘야지. 고작 다정한 척 몇 마디, 친근한 척 몇 번 두드려 준 어깨, 미안한 척 눈꼬리를 일그러트리며 짓는 미소. 벌레는 알아서 착각하고, 알아서 들떠서, 알아서 일을 벌였다.

그를 대하는 교수들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강의가 요약된 노트가 매번 책상 위에 남겨졌다. 사격 연습장에서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의 곁에 붙어 잔소리를 해 댔다.

학년 석차 53위.

그의 등수 표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하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고작 53위.

그 계집 때문에 석차는 1위 하나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왕에게 가져가 봤자 욕이나 잔뜩 얻어먹지 않을까.

그러나 그 석차야말로 그의 개인 최고점이었다.

53이란 숫자 옆에 적힌 제 이름을 보고, 고개를 들어 1이란 숫자 옆에 적힌 레스 키시르의 이름을 보고 린스베른은 그냥 웃어 버렸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뷘터하우젠에서 빠져나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정신이 들어 보니 온 사방이 엉망이었다. 부서진 술병과 엎어진 집기. 조잡하고 낡아빠진 여관방 한구석에는 멍투성이의 여자가 다 찢어진 옷으로 애써 몸을 가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스스로가 저지른 짓에 덜컥 겁이 나 그는 도망치듯 다급히 뷘터하우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에 린스베른은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한 것을.

너무나 명쾌해진 머리에 새삼스레 깨달음이 찾아왔다.

정해진 룰에 따라 바득바득 바닥을 긁어 가며 발버둥 치는 것은 저 밑의 벌레들이나 할 짓이다.

벌레들이 신경 쓰는 것은 어차피 그럴싸한 겉 포장뿐이다. 저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해 뒤집어씌울 뿐. 속내가 어떻든 그것들은 알 길도 없을뿐더러 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능력도 없다.

그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쉬웠다.

뷘터하우젠의 명예와 역사를 들먹이며 핏대를 세우던 학장들은 결국 그의 졸업을 승인했다. 란스타인의 모든 뇌가 붙은 이들이 뒈지기 전에는 네가 장교가 되는 일이 없을 거라던 교수들의 비아냥거림에도 그는 소령이 되었고, 제 부대를 얻었으며, 그들이 그리도 애지중지 여기던 그 계집을 몰아내고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군법이란 군법을 모조리 어겨도 다른 장교들은, 그의 조언자 격인 소령은 입을 다물고 오히려 그의 눈치를 봤다.

이 모든 성과 그 어디에 그의 노력이 필요했던가.

그렇게 정신이 나갈 때까지 술을 쏟아붓고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챈 채 성이 찰 때까지 박아 댔다. 그리고.

‘……전하?’

“병신 새끼.”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을 지었던 레스 키시르의 얼굴을 떠올리며 린스베른은 코웃음을 쳤다.

그 배신감. 그 경악. 절망. ……혐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탁자 위의 다기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 조각을 하나하나 꾹꾹 짓밟으며 린스베른은 미간을 꾹꾹 힘주어 매만졌다.

그를 영창에 넣겠다고 난리를 쳤던 것은 그자가 처음이었다. 어차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꽤나 귀찮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벌레.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그런데 왜.

타닥, 타닥,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길이 천둥처럼 울렸다. 신경 줄을 갉작이던 불쾌감, 뭐라 딱 꼬집어 특정할 수 없는 위기감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레티시아가 레스 키시르의 후원을 해 준다 해서 무언가가 크게 달라질 일은 없다. 설사 그 다리 병신이 레오르나와 손을 잡고 날뛴다 해도 그에 대한 모왕의 총애는 굳건했다. 별 중요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니 진실 공방이 펼쳐진다면 재판장이 그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무언가가 거슬리는지.

돌고 돌던 사고가 책상 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조간지 1면에 큼지막이 인쇄된 사진에 닿았다.

“레티시아.”

흑백 사진 속의 동생은 레스 키시르의 팔에 손을 얹은 채 화사하게 웃음을 뿌려 대고 있었다. 그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에 그의 입가가 비틀렸다.

“아아.”

불쾌함의 정체를 파악해 그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결국, 문제는 그것이었다. 레티시아 레반스타인이 뭣도 없는 레스 키시르의 편을 들고 나섰다는 것. 모든 것을 복잡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었다.

“키샤.”

레스 키시르 혼자였다면 언제든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영특하던 네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한 걸까.”

해사하게 웃고 있는 레티시아의 사진이 손아귀에서 무참하게 구겨졌다.

어째서. 무엇이 부족해서. 꽤 괜찮은 오라비 노릇까지 해 주었는데. 그저 모르는 것일까. 그가 이 일에 얽혀 있다는 걸 레스 키시르가 아직 말하지 않아서…….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이런 일을 벌였던 걸까?

“왕자님, 이제 개회식에 참가하실 시간이십니다.”

똑똑, 짧게 끊어 두 번 낸 노크 소리 후 문이 열리며 시종이 들어왔다. 그에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린스베른이 싱긋, 단정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곧 가지.”

* * *

“……에포시스력 275번째 해의 308번째 날을 맞이하여 한 해의 끝을 기리고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제를 올립니다. 주의 영광이 하해와 같이 충만해 폐하와 폐하의 신민을 긍휼히 하시고…….”

사냥회의 개회식이 열리는 겨울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축사를 읊으며 교황은 어젯밤 사이에 가득 쌓인 흰 눈 위에 올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적포도주를 뿌렸다. 핏방울처럼 흩뿌려지는 포도주를 바라보는 레티시아의 숨이 하얗게 물들었다.

북방 수렵 민족의 피를 이은 란스타인은 첫눈이 내리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 대대적으로 산짐승을 사냥하곤 했다. 겨우내 먹을 식량을 구하는 것은 물론 추위를 버틸 모피를 얻고 주거지를 위협할 맹수의 수를 줄이기 위한 전통이었다. 수렵을 이끌었던 왕족의 사격을 시작으로 그 친위대를 구성했던 귀족들이 사방으로 말을 달리며 짐승을 사냥했다. 잡은 짐승의 가장 좋은 가죽은 왕에게 바치고, 고기는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귀족들은 가장 많은 수의, 혹은 가장 강한 맹수를 잡은 이의 영예를 위해 경쟁한다.

“공주님, 첫발의 영예를.”

길고 긴 교황의 축사가 끝나자 왕궁 사냥터 지기가 사격 시연에 쓸 산탄총을 들고 와 양손으로 바쳤다. 레티시아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손길로 총을 점검하며 사격의 준비를 했다.

저 멀리서 사격 시연의 제물을 몰아 대기 위한 사냥개들이 컹컹대며 짖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키샤.”

그때, 왕족의 자격으로 그녀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린스베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네 약혼 신청서가 신전에 접수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어.”

“그래?”

“이 일로 어머니께서 많이 상심하셨어.”

“…….”

“남자 하나 때문에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건 곤란하지 않겠니.”

고개도 돌리지 않는 동생을 보며 린스베른은 느긋하게 총을 쥐어 들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핀이 해제되고 다시 한 번 철컥, 소리가 나며 총알이 장전되었다.

“레스 키시르가 혀 놀리는 거 하나는 예전부터 잘했지. 나는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니?”

“경고.”

여상스레 되뇐 레티시아가 소리 없이 웃었다.

“뭐에 대한 경고?”

“키샤.”

“네 말을 안 들으면, 또 무슨 짓을 하시게?”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할 리가 있겠니. 이건 그냥 오라비로서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린스베른.”

그에 처음으로 레티시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라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생글거리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싸늘했다.

“너야말로 할 말은 정말 그것뿐이야?”

후벼파는 듯한 질문에 린스베른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비틀어졌다.

“그게 네 답변이니?”

그 말에 슬쩍 눈동자만을 굴려 그를 바라보던 레티시아의 입꼬리가 깔끔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그때, 컹컹거리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푸드덕거리며 한 무리의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몸을 돌려 능숙하게 총구를 사냥개들에게 쫓겨 날아오른 오리들에게 겨냥했다.

탕, 깔끔하고도 단호한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졌다.

후드득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내리는 오리에게서 시선을 거둔 레티시아가 린스베른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진행자가 확성기에 대고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2